가라앉은 불
박혜정_이채은展 / painting
2008_1209 ▶ 2009_0104
이채은_Twins and
a Pony_종이에 과슈, 잉크, 수채_35.56×25.4cm_2008
초대일시_2008_1211_목요일_05:00pm관람시간 /
수~일요일_12:00pm~06:00pm / 월~화요일_예약
옆집갤러리_NEXT DOOR Gallery 서울 종로구 창성동 122-8 Tel. +82.2.730.2560 www.nextdoorgallery.co.kr
박혜정,
이채은 두 작가의 그림에는 한결같이 환상이 깃들어 있다.

박혜정_Blue Bird_보드에
아크릴채색_50.8×40.64cm_2005
환상은 불빛 속에 머문 시선과 같으며, 빛은 언제나 우리를 보이는
곳으로 이끈다. 경험이 우리의 사고와 판단을 밝히기 위한 질료라면, 기억은 우리의 의식 속에 자리 잡은 잔재의 불씨와 같다.

이채은_Twins_종이에 과슈, 잉크,
수채_17.78×25.4cm_2008
의식 속의 점점 희미해진 기억은, 그림 속에 흩뿌려지거나 번진 물감의
추상적인 흔적을 통해 환상으로 되살아나 무심히 바라보이기도 하고, 저 너머 사색의 곳으로 점점 빠져들기도 한다. 그것은 기억의 잔재에 관한
실체의 추구이다.

박혜정_The Dark Umbrella_보드에
아크릴채색_40.64×50.8cm_2006
그림 속에 그려진 환상은 선명한 색채의 대비와 명료한 구성으로 과거에
대한 현재의 합성을 불러일으키어 기억의 내용을 전이하는 고리가 되기도 하는데, 그것은 막연한 경험이 새로운 경험을 통해 원래 갖고 있지 않던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는 것이다.

이채은_Gold in the Air of One
Late Summer Night_종이에 과슈, 잉크, 수채 22.86×30.48cm_2008
이채은 작가의
작품은, 미란다 줄라이 감독의 인디영화 「미 앤 유 앤 에브리원 (Me and You and Everyone We Know」2004년 작,
감독은 2004년 「Sundance / NHK International Filmmaker's Award」를 수상하였다)'에도 잠시 소개된 적이
있으며, 감성적이고 열정적인 붓터치에 담긴 풍부한 서정의 색채는 추상과 구상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다.

박혜정_The Girl in Shadow_보드에
아크릴채색_45.72×35.56cm_2005
박혜정 작가는 일러스트레이터로서 컴퓨터 작업 외에도 직접 붓으로
그림을 그리는 작업도 꾸준히 병행하는 작가이다. 콘트라스트가 강한 색채와 명료한 화면 구성으로 스토리를 응축하는 힘이 있는 작가의 작품은 학부
재학 시절부터 인정을 받아 주요한 국제적인 일러스트 상을 수상하였으며, 이번 전시에는 그 수상작 중 몇몇 작품이 포함되어 있다. ● 두 사람의
그림 속에 담긴 함축적인 서정의 환상은 마치 수면 위에 부유하는 몽상이거나 심연 속에 가라앉은 기억의 불과 같이 우리를 깨운다. ■
김태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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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ONSTER
이승애展 / LEESEUNGAE / 李昇愛 / drawing
2008_1211 ▶ 2009_0120 / 월요일 휴관

이승애_Mother(Tear series I)_종이보드에 연필_105×255cm_2008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이미지 속닥속닥 Vol.060327a | 이승애 드로잉 설치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8_1211_목요일_06:00pm
관람시간 / 화~일요일_11:00am~07:00pm / 월요일 휴관
아라리오 서울_ARARIO SEOUL
서울 종로구 소격동 149-2번지
Tel. +82.2.723.6190
www.ararioseoul.com
아라리오 서울 갤러리에서 12월 11일부터 2009년 1월 20일까지 이승애의 괴물들을 만나보자. 공상과학영화 속 에일리언 같기도, 진화 이전의 고대 동물 같기도 한 그녀의 괴물들은 라틴어 원어 monstere (보여주다)의 의미를 구현하는 존재로, 인간 내면의 어두운 힘을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현재적 불만과 정치 사회적 부조리, 대적할 수 없는 거악을 일망타진 하고픈 나약한 개인들의 집합적 욕망을, 상상력의 형태로 내세운 것이 이승애의 괴물들인 것이다. 이들은 각각의 특성에 맞는 고유의 이름뿐 아니라 그들의 탄생비화와 존재의 목적, 운명, 그리고 이들과 작가와의 정신적 소통의 내용들을 지니고 있다. 소설과도 같이 쓰여 내려간 작가의 글을 통하여 이들은 생명을 부여 받고, 화면이라는 특정한 시공간적인 제한을 벗어나 나름의 역사와 이야기를 가짐으로써 화면을 넘어 문맥과 개념 속에서 생명을 가진 채 살아있게 된다.

이승애_Mummy Series1_종이에 연필_50×40cm_2008
표범의 몸통에 입 주변은 포유류의 날카로운 치아대신 편형동물 무더기가 꿈틀대는, 신화 속 메두사의 머리를 변형적으로 계승한 것 같기도 한 「Green Eyes」 작가의 설정에 따르면 인류의 슬픔은 하나의 신호로 이 괴물에게 전해진다고 하는데, 머리에 붙어있는 4개의 눈은 인류의 분노와 슬픔이 보내는 신호를 보다 잘 식별하려는 배려 같기도 하다. 또 다른 대작 「Mother」 는 머리에 난 뿔 여섯 개와 뱀의 비늘이 돋은 얼굴, 긴 콧수염 등 동양적 용의 형상을 취하고 있으며, 그 품 안에는 원생동물, 혹은 편형동물 세포들이 한아름 안겨있다. 이 괴물의 모성애는 절망에 빠진 인류에 대한 위로를 표상하는 것 같다.

이승애_Mummy Series5_종이에 연필_40×50cm_2008
전시관 한 켠에는 자연사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을 법 한 표본함들 속에 몬스터 드로잉을 한 장씩 배치하여 마치 생물 표본실을 연상시키는 인스톨레이션이 설치된다. 이 소형 괴물들은 피부가 말라 비틀어져 골격 위로 달라붙다시피 한 처절한 주검이다. 매인 전시관에서 대형으로 재현된 괴물이 인간 심성 안에서 투쟁 중인 '현역' 괴물의 활약상을 보여준다면, 표본실에 박제된 나약한 괴물은 건드리면 바스러질 만큼, 몸통에서 한줌의 숨결마저 느껴지지 않는 미이라다. 소형 괴물의 본질은 인간 심성에 비친 사회 소수자에 대한 연민이 현현된 것이다. 이 중 잠자리 날개를 단 '아저씨' 미이라 5 는한노숙인의사진에서영감을얻어제작된것으로, 사회에서 버림받은 낙오자에 대한 측은함이 고물의 형체로 배출된 예이다.

이승애_Green eyes(Revenge series I)_종이보드에 연필_220×225cm_2008
전시장 1층에는 전지 사이즈를 짝수로 이어 붙인 대형 드로잉 5점과 표본 디스플레이 12점, 2층에는 대형 드로잉 1점과 한쪽 벽면을 메우는 스케치들이 전시되는 이승애의 두 번째 개인전 'The Monster'. 무력한 개개인이 대적할 수 없는 거악에 맞설 대항군으로 탄생된 이승애의 새로운 괴물들을 만나볼 수 있는 흥미로운 시간이 될 것이다. ■ 아라리오 서울, 반이정 「세계는 괴물을 필요로 한다」일부인용

이승애_Nice Dream(Victory series I)_종이보드에 연필_310×170cm_2008
Mother ● 전우주의 기운이 어우러져 지구상의 한인간의 운명을 결정 짓는 순간이 있다. 이 결정의 순간이 오면 mother는 붉은별의 신호를 받아 그의 운명에 가장 적합한 어머니를 지정 한다. 그에게 결정된 운명 안에서 가장 의미 있는 이야기가 되도록 하며 가장 값진 삶을 깨달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지정 목적이다. 그들만의 운명 속 영혼이 되어 인간은 어머니란 존재로 메시지를 전달 받게 된다.
"딸아, 울지 마라, 다 괜찮다. / 괜찮다. 모두 다 놓아 버리렴, 괜찮다. / 다 놓아 버리면 널 아프게 하는 가지들이 잔잔해 질 꺼다. / 네가 그걸 잡고 있으면 그게 널 잡고 흔들어서 너의 특별함을 퇴색 시켜버린단다. / 괜찮다. 다 놓아 버리렴, 넌 너무 특별 하단다."
Green Eye ● 인간의 한맺힘이 극에 달하게 되면 검은별로 푸른 신호가 보내진다. 이 신호가 green eye에게 분노를 폭발 시키게 하고 그 한의 대가에 상응하는 복수가 검은별의 도움아래 이루어진다.
green eye의 복수정신 ● 당하면 반드시 갚는 응징의 요소와 당한 것만큼만 갚는 관용의 요소를 가진다. 이두 요소가 합쳐져서 배반한 자와 배반당한 자가 화해하는 장이 만들어 지기도 한다. 무조건 용서하라는 것도 없고 무조건 복수 하라는 것도 없다. 정의에는 응징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증오'의 요소가 있고, 그 응징을 제한할 것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사랑' 의 요소도 있다. 그래서 복수를 할 때에는 애정이 있다고 봐야 한다. 복수를 하는 데에는 많은 노력이 필요한데, 만약 노력을 쏟을 가치가 없을 경우에는 저주나 축복의 형태로 발현된다. 저주나 축복의 성공률은 대단히 높은 편이였는데, 언젠가부터 약발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잔인한 복수가 더 잦아지고 있다. 맞서 싸우는 것 보다 복수가 좋은 이유는 시간을 많이 벌 수 있고, 그 시간을 이용해 힘을 길러 더 강력하게 되돌릴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며 잘못된 판단을 한 자신에게 상대방을 용서할 수 있는 시간을 벌게 해준다는 것이다. ■ 이승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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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LLERY DAM & WEIBANG GALLERY Presents
최경태展 / CHOIKYOUNGTAE / 崔鏡泰 / painting
2008_1211 ▶ 2008_1220 / 월요일 휴관

최경태_Doll_캔버스에 유채_91×116.8cm_2008
초대일시_2008_1211_목요일_06:00pm
관람시간 / 화~일요일_12:00pm~07:00pm / 월요일 휴관
웨이방 갤러리_WEIBANG GALLERY
서울 종로구 화동 127-3번지
Tel. +82.2.720.8222
www.weibanggallery.com
갤러리 담_GALLERY DAM
서울 종로구 안국동 7-1번지
Tel. +82.2.738.2745
최경태의 인형, 혹은 욕망의 불구적 형식 ●인형은 어린 육체에 대한 그의 욕망의 사소한 변형일 수도 있고, 혹은 어린 육체에 대한 그것에 상응하는 또 다른 불구적 욕망, 곧 페티시즘의 일종일 수 있다. 그러나 평자의 입장에서, 이번 작업은 최경태식 미학의 전개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계기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결론부터 말하면, 최경태가 그의 미술적 표현의 실천논리에 있어서 유의미한 변환과 '굴절'(refraction)을 성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굴절은 비평적 관점에서 매우 중요한데, 왜냐하면, 그의 굴절이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지적한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예술장(artistic field)의 효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점을 조금 달리 말하면, 곧 최경태가 유의미한 미술적 실천을 통해 미술장 내에 진입했다는 증거일 수 있다는 것이다.

최경태_Doll_캔버스에 유채_162.2×112.1cm_2008
미술장의 관점에서 최경태의 인형은 그가 미술장의 존재와 그것의 굴절효과를 보여준다. 최경태가 보여주는 이 굴절효과는 최경태가 미술장 밖에서 미술장 내부로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동시에 최경태가, 사회공간에 대한 직접적인 발언의 지평으로부터 미술장의 자율적 가능성의 공간으로 진입했음을 보여준다. 그 적나라한 어린 육체로부터 인형으로 변화는 미술장 내외에서 최경태가 그리는 위치와 궤적의 변화와 일치한다. 이러한 변화는 한때 자신을 민중미술가로 호명했던 리버럴들에게서 흔히 관찰되는 바, 양립불가능한(incommensurable) 게임들 사이의 설명되지 않는 개종(conversion), 혹은 변절이 아니라, 장의 경계를 통과할 때 나타나는 관찰되는 지극히 당연한 굴절에 충실한 효과로 보인다. 어린 육체와 인형의 차별성이 전혀 다른 게임의 논리가 아니라, 정당한 굴절인 이유는 어린 육체와 인형이 그것들 사이의 차별성에도 불구하고 결국 욕망에 관한 삶의 동일한 문제들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인형은 삶의 사회적 형식에 관한 최경태의 발화를 미술장 내 언어로 변환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평자의 비평적 관점에서 그의 인형을 미술장의 존재와 굴절의 증거로 보려는 이유는, 삶과 사회에 대한 최경태의 지속적인 문제의식이 비교적 일정해 보이기 때문이다. 최경태의 이미지 실천의 궤적 속에서 어린 육체와 인형 사이의 대립은 그저 개인양식(individual style) 상의 사소한 변화가 아니라, 미술장의 존재와 장 내외에서 작가의 위치 변화를 보여준다는 판단이다.

최경태_Doll_캔버스에 유채_45.5×65.1cm_2008
최경태가 인형을 통해 발언하려는 것은 여전히 욕망의 문제이다. 그의 욕망은 곧 개인의 문제이자, 회화의 문제이며, 자신의 욕망에 관한 내밀한 발언이자, 욕망의 코드로 소통될 수 있는 사회적 세계에 관한 회화적 발언이다. 그의 발언은 어린 육체에 대한 직접적인 사실묘사에 비해 좀 더 중첩되고, 우회하며, 은유된 이미지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인형은 곧 그러한 중첩과, 우회, 은유가 만나면서, 욕망에 관한 개인과 세계에 관한 회화적 발언이 생산되는 지점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평자는 최경태 미학의 지형에서 현재의 인형작업이 어린 육체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와 상응하거나, 그것을 넘어서는 과정일 수 있다는 생각이다. 중요한 것은 최경태가 한낱 어린 육체를 탐하는 비윤리적 외설작가가 아니라, 미술장 내의 굴절효과를 자신의 이미지 조직 방식을 통해 표현하는 정당한 구성원이라는 것이다. 이번 인형작업은 최경태가 미술장 내 합법적 행위자라는 사실에 대한 뒤늦은 증명과도 같다. 물론, 이 증명은 미술장 내에서 생산되는 상징자본을 경제자본으로 변환하는 과정에서 우호적인 전환율을 부여하는 기능 역시 수행한다. 곧 상품가치에 대한 무한한 회의와 의심이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작용하는 미술시장에서 최경태의 작업의 안전한 상품가치를 보장하는 비평적 근거일 수 있다.

최경태_Untitled_캔버스에 유채_60.6×72.7cm_2008
여고생 이후 최경태가 보여주었던 사회비판은 자신이 비판하고자 하는 대상의 모순을 완전히 체화함으로써 성취되어 왔기 때문이다. 즉 자신이 비판의 객관적 주체가 아니라, 비판의 대상와 완전히 동화하는 극점에서 성취되는 비판의 전략을 채택해 왔다. 이점은 최경태의 초기 민중미술 시절과는 완전히 다른 양상이다. 당시 최경태는 윤리적으로 우월한 민중미술가의 선도적 입장에서 권력을 비판했다. 그러나 여고생 연작에서 그의 비판은 스스로 어린 육체를 탐닉하는 비윤리적 중년 변태가 됨으로써 수행되었다. 최경태는 자신과 자신의 그림을 발가벗겨 세상에 내 놓음으로써, 동시에 자신에 대한 비난과 멸시를 자신의 온몸으로 받아내면서, 역설적으로 전체 사회공간의 수준에서 작동하는 성에 관한 집단적 위선과 기만, 그리고 권력의 훈육적 작동을 들추어 냈다. 자본주의 정치경제 체계 밖에서 순결한 시선으로 그것의 모순을 지적하기 보다, 자본의 모순 속에 철저하게 자시을 위치함으로써, 오히려 목적을 성취하는 복잡한 비판의 형식이었던 것이다. 때로, 최경태의 비판의 동지여야 할 페미니스트, 비평가, 작가들이 오히려 그를 비난하는 것은 최경태의 비판적 위치취하기(positioning)를 잘못 읽어냈기 때문이다.

최경태_Untitled_캔버스에 유채_72.7×90.9cm_2008
스스로 자신을 버림으로써 예술/예술가를 버린 체계의 존재와 모순을 반증하는 방식이다. 여고생 이후 최경태는 욕망의 문제에 접근하면서, 이러한 방식으로 더욱 자본의 모순 속으로 한발 더 접근한다. 최경태는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고, 또 그렇게 드러난 욕망을 통해, 욕망과 상품논리의 관계에 좀 더 다가서는 것이다. 최경태가 자신의 욕망을 노출함으로써 증명하려는 욕망의 자본주의적 형식이란, 그것이 영원히 충족될 수 없는 불구적 상황 속에 놓여진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욕망의 소비의 원천이며, 따라서 욕망의 충족은 소비와 생산의 확장적 순환을 멈출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욕망은 더 많은 소비를 위해 더욱 더 부추겨져야만한다. 충족될 수 없는 욕망. 영원히 갈구되어져야 할 욕망의 회로. 평자는 이를 욕망의 불구적 형태로 규정하고자 한다.

최경태_Adarasi Fantasy_캔버스에 유채_112.1×162.2cm_2008
최경태는 욕망의 불구적 형식을 자신의 욕망을 통해, 나아가 회화를 통해 재현하려는 듯 보인다. 어린 육체에 대한 최경태의 욕망은 변태라는 불경스러운 형식을 통하지 않고서는 결코 충족될 수 없는 불구적 형식이라는 것이다.

최경태_Untitled_캔버스에 유채_90.9×72.7cm_2008
사회공간은 지배와 억압, 차별과 저항이 다양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다차원적인 공간으로 이미 진화했다. 이 사회공간의 모순은 이미 폭발 직전의 상황까지 치달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과거의 독재/민중의 이분법 구조가 아니라, 인종, 고용, 지역, 환경, 성, 교육, 세대, 문화의 갈등이 서로 교차하면서, 부글거리는 그런 공간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공간의 비대칭적 분화는 어느 때 보다 여전히 이미지 조직에 관한 사회적 실천을 요구한다. 물론, 변화된 상황에서 미술의 사회적 실천은 과거와는 다른 형식을 취해야 할 것이다. 그 차별성은 곧 미술장의 굴절과 사회공간으로의 재환류되는 미술실천에 의해 달성될 것으로 보인다. 미술장 내 합법적 행위자인 동시에 사회적 개입자인 최경태는 이러한 과제를 합법적으로 수행할 소수의 실천자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 김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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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산_A Mountain
박찬경展 / PARKCHANKYONG / 朴贊景 / photography.video
2008_1213 ▶ 2009_0111

박찬경_어떤 산_디지털 프린트_86×106cm_2008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이미지 속닥속닥 Vol.051115a | 박찬경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8_1213_토요일_05: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관람료_1,000원
갤러리 소소_GALLERY SOSO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법흥리 헤이리마을 1652-569번지
Tel. +82.31.949.8154
www.gallerysoso.com
흔히 ‘계룡산’ 에는 두 개의 상반된 이미지가 겹쳐있다. 하나는 미신의 세계이며, 다른 하나는 ‘민족 신비주의’에 대한 동경이다. 내게 그것은 우선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실제로 나는, 우연한 기회에 마주친 계룡산을 보고 이유를 알 수 없는 충격에 휘말린 적이 있다. 백두산이나 히말라야에 가면 더 큰 충격을 받을지 안 가봐서 모르겠지만, 내게는 이미 그것으로 충분했다. ● 그리고 하나의 일반적인 진실이 있다. 유교를 국교로 삼은 조선시대는 물론, 일제 강점기와 근현대를 거치면서 무속과 선가(仙家)와 같은 한국의 전통 종교문화는 계속 억압되었다. 서구화와 세계화를 거치면서, 민간신앙이나 전통종교는 기껏해야 관광자원이나 신비주의 상품으로 인식될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한국의 민간신앙, 신종교, 산악숭배 등에 대해 교리의 세련성을 잣대로 삼아 비판하는데 익숙하다. 그러한 잣대 자체가 왜곡되었다는 생각은 별로 하지 않는다.

박찬경_어떤 산-폭포_디지털 프린트_86×106cm_2008
기도문은 주문보다 순수하고, 종교상징은 부적보다 합리적이며, 찬송가는 독경보다 세련된 것이라는 일반의 인상은 생각보다 깊다. ‘상제(上帝)’는 최초에는 God의 단순 번역어였지만, 와인이 막걸리보다 웰-빙이 되었듯이 God은 상제 위에 있는 존재처럼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근 100여년을 통해 우리나라에서 급성장한 제도종교의 대부분은 기복과 신비체험, 해원(解寃)과 몰입을 노골적으로 활용했다. 무속신앙이 기독교 등에 스며들어, 신비주의 색채가 강한 ‘한국적 종교문화’를 낳았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 거대 외래 종교가 지역의 종교전통을 활용하면 할수록, 자신을 ‘그들이 규정한 미신’으로부터 구별할 필요는 강해진다. 거대 외래 종교가 자신을 미신으로부터 끊임없이 구분하려 할 때, 미신으로 취급되는 지역의 판타지들 - 지상천국, 호랑이, 산신, 상제, 염라대왕과 약사여래, 그 밖에 수없이 많은 신성한 존재들은 오히려 그들 ‘반(反)미신’ 속에서, 그들이 잘 모르게 살아간다. 여기서 상황을 뒤집어 읽어 볼 가능성이 생긴다. 전통 민간신앙이 정신의 서구화에 의해 변형되고 축소되었다고 보는 것보다, 그 변형의 전 과정이 오히려 위기에 처한 전통 신앙의 지혜로운 처신이라고 보는 편이 더 옳지 않을까. 천주교 개신교가 ‘토착문화’를 이용한 것이라고 단정하기 전에, 무속과 선가에서 기독교를 이용하거나 혹은 허용한 것은 아닐까라고 물을 수도 있지 않을까. 급기야 민간의 유불선무(儒彿仙巫) 기독교 통합신앙은 보수적 종교엘리트, 종교관료들의 무의식을 끈질기게 괴롭히는 것은 아닐까.

박찬경_어떤 산-백호_디지털 프린트_86×106cm_2008

박찬경_어떤 산-포옹_디지털 프린트_86×106cm_2008
현대과학기술의 반대편에 종교가 있다면, 종교의 반대편에는 미신이 있다. 나는 현대과학기술도 싫고 제도종교도 싫다. 그렇다고 ‘미신’을 따를 수도 없다. 유물론자의 차가운 머리도 내 몫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현대과학기술의 위험을 경고할 때의 종교는 좋다. 종교의 무의식을 건드리는 미신은 좋다. 미신을 거부할 때의 합리적 사고는 좋다. 내게 계룡산은 그런 생각의 가운데 우뚝, 또는 흐릿하게 서있다. ● 나는 이런 태도가 나만의 것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바리데기, 동학의 상제, 청산거사(靑山居士), 그리고 할머니들이 들려주는 이야기 속의 귀신은 현대문화가 허세를 부리며 관용하는 여유분이 아니라, 현대문화를 뿌리에서 뒤흔드는 무의식일수 있다. 동북아의 고딕(Gothic)문화라는 형용모순이 왜 불가능한가? 맹수와 대화하는 신화의 서사구조와 대량 도축하는 사회의 윤리는 감히 비교조차 될 수 없다. 가장 나쁜 경우, 혹세무민하는 사교(邪敎)의 정치조차도 단순한 합리주의적 잣대로 재단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한 동기와 가치로 얽혀 있다.

박찬경_어떤 산-숲_디지털 프린트_86×106cm_2008
집단적으로 유토피아를 추구하는 것은 부패하기 쉬우며 위험하지만, 그것을 꿈꾸는 것은 모두의 권리이다. 그리고 그런 권리를 찾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위대하거나, 또는 내몰린 사람들이 언제나 있었고 계속 있을 것이다. 생시몽(Saint-Simon)과 수운(水雲) 최제우 사이의 거리는 그렇게 먼 것일까. 일부(一夫) 김항과 푸리에(Fourier)는 내게는 비슷한 사람처럼 보인다. 제도교육의 기회나 보편적 행복을 빼앗긴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남달리 총명한 사람, 형이상학적인 고뇌에 빠진 이들이 계룡산에, 지리산과 묘향산에 갔을 것이다. 그 중에는 진짜도 있고 가짜도 많겠지만, 거짓과 진실, 사실과 환상을 손쉽게 가려내려는 현대 도시인의 싱거운 욕망 자체가 먼저 반성되어야한다.

박찬경_어떤 산_디지털 프린트_86×106cm_2008
동시대를 사는 어떤 여인이 컴컴한 밤중에 산신기도를 하러 깊은 산속을 거닐 때, 대체 나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나? 아마 차를 장만하거나, 유명해질 궁리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도 가끔은, 소나무와 기암괴석와 산이 보이는 꿈을 꾼다. ■ 박찬경

박찬경_어떤 산_디지털 프린트_86×106cm_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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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inting as a Silent Witness
이정임展 / YIJEONGIM / 李靜妊 / painting
2008_1212 ▶ 2008_1221

이정임_Michael_부분
초대일시_2008_1212_금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30am~06:30pm
노암갤러리_NOAM GALLERY
서울 종로구 인사동 133번지
Tel. +82.2.720.2235
www.noamgallery.com
Painting as Silent Witness ● 이 전시에 선보이는 작품들을 대하는 것은 마치 진행 중인 퍼포먼스를 보는 듯하다. 아니 오히려 퍼포먼스는 잠시 숨을 고르며 정지되고 관객들의 주위를 배회하면서 감각적으로 그러나 조용히 관객들의 주의를 요구한다. 관객들은 지금 자칫 보여 지지 않을 수 있는 아름다움 속에 존재하는 특정한 형상을 간직한 세계에 들어가도록 권고 받는다. 우리는 이곳, 행위가 일어나는 장소인 잔상과 여운의 세계에 서있다.

이정임_3rd Street_캔버스에 유채_75×100cm_2008

이정임_Hallway of Bldg_캔버스에 유채_130×162cm_2008
이정임의 작품은 시각적 잔상과 실제, 독립된 가치를 지니고 있는 물체들의 기묘함과 함께 탁월한 기법을 반영하고자 하는 초기 실험인 눈속임 회화(TROMPE L'OEIL)의 전통과 최근 들어 대두된 환영(SIMULACRA)과 무엇이 실제인가에 관한 재의(再意)에 대한 관념과 확연한 연관성을 갖고 있다. 유려한 기법을 통해 인식되는 작품의 중심에 있는 것은 단순한 기술이 아닌 시각적 시어(詩語)이다; 작품에 묘사 되어진 작은 구멍, 긁힌 자국, 물감 자국 모두는 실제로 체험되어진 경험이며 크기에 상관없이 각각의 작품은 시각적 인지와 경험의 정확한 결합을 전달한다. 이는 시각적 탐구에 대한 충실한 해석임과 동시에 확장된 형이상학적 형상이다. ● 작품을 통해 이정임이 전달하는 것들 중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불가사의한 존재를 자신 안에 포함함으로써 시각 미술 내 회화의 독창성에 대한 개념을 재생시킨다는 점이다. 영원한 현전성의 상태란 여기, 지금 그리고 그곳에 존재할 수 있는 역량을 소유한다는 것이다. 이정임의 작품은 민감한 감각들의 집합점이다. 또한 탐구와 의식(意識)을 시공간 속 화합의 반영물로 표현한 것이며 우리에게 작가의 헌신으로 다가오거나 최소한 그 본질적 측면에서 성스럽게 여겨질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정체성을 드러낸다는 것인데 시간의 초월성, 현존과 부재 이 세 가지 특질이 이정임의 통찰력이 내포하는 특성이다.

이정임_Mr. Morgan_캔버스에 유채_130×162cm_2008

이정임_Studio_캔버스에 유채_15×20cm_2008
이 시점에서 회화는 제의와 성역이 되며 자각에 대한 선언이 된다. 서구 문화사회 전반에 걸쳐 흰색은 예술의 역사 안에서 여러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20세기 초 뉴욕에서는 갤러리들이 갖는 중성적인 환경을 이루었으며 벽의 보수와 도색을 용이 하게했고 작업실에서는 빛의 반사효과를 최고도로 이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크게 환영 받았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넘어서 시적인 실존성은 가장 겸손한 또는 최소한의 화려함을 가진 환경에서 찾아지며 작가들은 그들의 사회 혹은 공동체에서 원초적인 선견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이정임은 이러한 과업들에 관해 말하고 있는 세계에 거주한다. 그의 작품은 감성적, 이성적 날카로움이 공존하는 고요하나 열정적인 감성의 잔상들이다. ■ Jeremy Morgan

이정임_Headland Center for the Arts_캔버스에 유채_213×213cm_2005~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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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cing the window
신민주展 / SHINMINJOO / 辛旻炷 / painting
2008_1212 ▶ 2008_1230

신민주_Window 1_디지털 프린트_90×75cm_2008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이미지 속닥속닥 Vol.031118a | 신민주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8_1212_금요일_06:00pm
관람시간_11:00am~06:00pm
문화일보 갤러리_MUNHWA GALLERY
서울 중구 충정로 1가 68번지
Tel. +82.2.3701.5757
gallery.munhwa.co.kr
거울들-경험세계에 대한 신민주의 작업 ● 신민주의 작품들은 그녀의 경험세계를 반사함으로써 자신과 그를 둘러싼 현실을 반성하는 거울이다. 주제의 면에서도, 소재의 면에서도, 신민주의 작품 안으로 들어오는 경험세계는 크지 않다. 그것은 가령 어떤 때는 신민주와 그녀가 본 영화(레옹, 나쁜 피, 소년 소녀를 만나다, 아이다호)였다가, 신민주와 그녀가 있는 장소(홍대 주변의 거리, 바닥, 바)였다가, 심지어 그녀의 얼굴이거나 그녀가 걸쳤던 옷이거나 한다. 설명된 문장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그녀의 작품들은 그녀를 중심으로 한 생활 반경을 벗어나지 않고, 끊임없이 그녀에게로 되돌아온다.

신민주_Window Ⅰ_디지털 프린트에 아크릴채색_120×146cm_2008

신민주_Window 2_디지털 프린트_90×75cm_2008

신민주_Window 3_디지털 프린트_90×75cm_2008
어찌 보면 그녀의 작업관은 구체적 생활을 모티브로 한다는 점에서 현실적이고, 자신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자기애(narcissistic personality)에 가까워 보이며, 사회 내 다른 문제들을 직접적으로 형상화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소극적인 것으로 인식될 수도 있다. 애초에 그랬을지라도 신민주는 자신이 속한 세계뿐만 아니라 자신마저 타자화 함으로써, 오히려 작품이 현실을 단순하게 모사 하거나 자신의 반영이 자기애로 비춰지는 것을 유보시키고 있다. 그녀의 작품들에서는 작가마저도 ‘당신’, 즉 타자로 호명된다. 거울이 반영한 ‘나’는 더 이상 내 자신이 아닌 낯선 자아, ‘당신’이다. 또한 작업이라는 거울이 반성한 ‘경험세계’는 ‘또 다른 세계’이다. ■ 강수미

신민주_Window Ⅵ_디지털 프린트에 아크릴채색_120×146cm_2008

신민주_Window Ⅷ_디지털 프린트에 아크릴채색_120×146cm_2008

신민주_Window Ⅱ_디지털 프린트에 아크릴채색_120×146cm_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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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여지도 Project 세 번째-서해안
박홍순展 / PARKHONGSOON / 朴弘淳 / photography
2008_1213 ▶ 2009_0221

ⓒ 박홍순_서해안-태안군 안면도 꽃지해수욕장,S Korea
젤라틴 실버 프린트, 흑백 인화_50.5×105.5cm_2007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이미지 속닥속닥 Vol.070727d | 박홍순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8_1213_토요일_05:00pm
후원_서울문화재단_한국문화예술진흥회
관람시간 / 평일_10:00am~07:00pm / 주말,공휴일_11:00am~06:30pm
한미사진미술관
The Museum of Photography, Seoul
서울 송파구 방이동 45번지 한미타워 20층
Tel. +82.2.418.1315
photomuseum.or.kr
고독하고 육중한 박홍순의 거대서사 ● 예술가 개인의 소소한 사변을 담아내는 일이 새로운 흐름을 형성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소소함이 사소한 것의 재발견과는 달리 지루한 혼잣말을 반복하는 것으로 변질했다는 것이 최근 비평계의 진단이다.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 현대미술계를 지배해온 일상담론의 미망은 미시서사의 섬세함에 도달하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다. 일상담론을 가장한 의사-일상성이 예술가의 자기체험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결여한 채 상투적인 신변기록에도 못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일상담론이 지배하는 현대미술의 가벼움에 비해서 거대서사의 장중한 무게는 발걸음이 더디지만 세월을 더해가면서 가속도를 붙인다. 박홍순이 그런 경우이다. 그는 지난 10여 년 동안 굵은 행보를 이어왔다. 세월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는 한 걸음씩 더 크게 성큼성큼 내딛으며 거대서사의 저력을 발휘하고 있다. ● 생태자연의 거대한 풍경 속에서 인공의 흔적을 담아내는 박홍순의 작업은 비판적 지식이다. 그것은 한순간 짧게 쓰일 보도사진이 아니라 수십년을 두고 쌓여서 우리 시대의 이 땅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장중한 기록이다. 그의 거대서사는 묵직한 중량감을 가지고 있다. 그는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에 주목하고 있다. 그는 예술이라는 비판적 지식 생산의 방식으로 사회에 참여한다. 그의 성장기와 청년기는 한국사회의 그 어느 시대 못지않게 급격한 사회변동의 에너지로 가득 찬 시기였다. 하여 그의 감성과 의식 속에는 사회를 바라보는 명징한 관점이 자리 잡고 있는데, 박홍순 자신의 말을 빌자면, 그가 백두대간에서 한강을 거쳐 서해를 찍고 다닌 것은 이 땅에서 태어난 사람으로서의 사명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이 땅은 한국사회의 거대한 행위자 주체들이 침입해서 조작과 훼손을 일삼고 있는 그 땅이다. 그 땅의 면면을 돌아보고 기록하는 일이 그가 선택한 이 시대에 우리사회를 만나는 방법이다.

ⓒ 박홍순_서해안-강화군 황산도 01, S Korea_젤라틴 실버 프린트, 흑백 인화_50.5×105.5cm_2008

ⓒ 박홍순_서해안-서산 부남호, S Korea_젤라틴 실버 프린트, 흑백 인화_74×98cm_2005
강원도 원주에서 나고 자란 그는 문학을 전공한 사람답게 서정성과 서사성을 동시에 꿰뚫는 작업으로 시간과 공간의 동시성을 회복하는 데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는 생태자연의 거대한 풍경 속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인간의 흔적들을 들춰낸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문제의 지점을 찾아가 순발력 있게 고발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관념적인 자연을 부르짖거나 전략적인 계몽의 서사를 남발하지 않는다. 자신의 보폭을 벗어나는 큰 목소리를 내기 보다는 매우 냉정하고 차분한 시선으로 현실을 재발견하게 한다. 그의 발걸음은 고독하다. 카메라를 든 많은 사람들이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 곳, 화려한 예술상품 생산에 주력하는 사람들이 매력을 느끼지 않는 곳을 찾아가기 때문이다. ● 1997년부터 백두대간을 담아서 사진집을 낸 것이 1999년의 일이다. 이어서 몇 해 전에는 한강을 주제로 한 연작으로 개인전을 열었다. 마흔을 넘어서부터 그는 서해안을 오가기 시작했다. 혼자 떠나는 여행은 다양한 표정의 땅과 물을 만나게 해주었다. 길 떠난 사람이 부딪히는 새로운 장면과 상황들을 카메라에 담는 일은 그 자체로 기록이며 새로운 발견이자 세계에 대한 성찰이다. 애초의 계획에 따라 움직이다가도 예측을 빗겨나는 또 다른 결과를 만나고 우연성에 이끌려 계획과는 전혀 다른 경로를 탐험하기도 하는 것이 여행의 묘미이다. 박홍순은 생태자연과의 만남을 위해 늘 길을 떠나곤 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사람을 만나지 않으면서도 인간 또는 사회를 날카로운 시선으로 담아냈다. ● 뒤로 물러나 멀찍이서 느긋하게 바라보는 박홍순의 시선은 백두대간 곳곳을 파헤친 문명의 개발 논리를 낱낱이 드러낸다. 측광을 받아 극단적인 콘트라스트를 보이는 채석장의 부서진 바위 조각들, 마치 거대한 대지미술처럼 속살을 드러낸 도로공사의 절곡면, 아스라이 뒤로 물러서는 산맥의 흐름을 도도하게 바라보며 산하를 지배하는 산꼭대기 관측소와 철조망과 헬기 착륙장. 박홍순은 백두대간의 구석구석에서 발견한 이 모든 장면들은 모종의 상황을 포착하고 있다.

ⓒ 박홍순_서해안-안산시 대부도,S Korea_젤라틴 실버 프린트, 흑백 인화_74×98cm_2007
야만적인 상황을 매우 극적이면서도 담담한 시선으로 포착하는 박홍순의 렌즈는 매우 안정적인 어법을 구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지극히 불안한 서사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 한강을 거쳐 서해안으로 나아간 박홍순의 시선은 여전히 안정적이면서 동시에 불안하다. 갯벌을 붉게 물들이는 함초 밭을 뿌연 단색으로 눌러주는가 하면, 갯벌 위를 지나간 자동차 바퀴자국의 거대한 드로잉을 회화적 분위기로 재현하기도 한다. 갯벌 위에서 스러져가는 목조 설치 작품들의 비장한 상황들이 있는가 하면, 그림 같은 갈대의 서정이 흐르기도 한다. 연한 톤으로 지긋이 눌러준 모래사장 위로 바람과 사람이 공동 제작한 흐릿한 선들이 아스라이 멀어져간다. 갯벌을 가로질러 섬으로 이어지는 철골 탑의 긴 행렬은 자연의 거대함을 압도하는 역설의 숭고를 낳는다. 생태자연의 스스로 그러함과 인공의 조악한 다스림이 공존하는 역설적인 상황. 이것이 박홍순 카메라가 고행에 가까운 작업 과정을 거치면서 만난 장면이자 상황이다. ● 하늘과 땅이 교차하는 거대한 풍경 가운데서 인공의 흔적을 발견하는 일은 생태자연에 인공적인 흔적을 가미한 인간의 행위를 드러내는 비판적 성찰의 시각으로부터 출발한다. 따라서 박홍순의 렌즈는 생태자연을 겨누고 있으면서 동시에 현대사회의 야만성을 겨냥하고 있다. 새만금 갯벌을 인공댐으로 막은 초대형 간척사업은 한국 현대사에 있어 씻을 수 없는 오류로 남을 것이다. 박홍순은 이 심난한 현장을 드나들며 최병수의 설치작품을 담았다. 나무 위에 새를 올리는 대신 짱뚱어를 깍아 올리고 어선을 하늘 방향으로 곤두세운 솟대 작품들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점점 황폐지는 과정을 카메라에 담으면서 그는 점점 육지로 변해가는 그곳 갯벌의 현실을 착잡하게 목격하고 있다.

ⓒ 박홍순_서해안-강화군 황산도 02, S Korea_젤라틴 실버 프린트, 흑백 인화_50.5×105.5cm_2007
예술가가 자신의 스타일을 구축하는 과정은 지속성에 달려있다. 그는 오랫동안 축적한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화면을 구획하고 빛을 빨아들이는 자신의 어법을 만들어왔다. 박홍순의 프레임 속에는 역광을 포착함으로써 얻어지는 강한 콘트라스트가 존재한다. 최저의 어두움과 최고의 밝음이 한 화면 안에 공존하는 극단적인 명암의 대비는 그의 스타일을 구축하는 가장 큰 특징이다. 아날로그 작업에 의존하는 일 또한 박홍순 스타일의 결정 요소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디지털과 아날로그 작업을 병행하지만 10년 전부터 지금까지 일관된 맥락을 형성하는 흐름은 아날로그이다. 디지털 프린트가 일반화한 지금, 그는 다시 대형 프린트 작업을 위해 어두운 암실에서 한줄기 빛을 좇아 긴 시간 작업에 매달린다. ● 그의 풍경 사진들 가운데는 하늘과 땅을 절반으로 가르는 수평구조의 작품들이 많다. 특히 서해바다를 담은 근작들이 그렇다. 수평선과 소실점이 정중앙으로 모인 작품들이 많다는 점에서 그의 시선이 원근법적인 시선에 충실한 다큐멘터리로부터 출발한다는 점을 추론할 수 있다. 그는 생태자연의 컬러풀한 표정들을 흑백으로 환원한다. 그가 평면위에 옮겨진 색채의 세계를 회피하는 이유는 매우 사실적인 표현방법을 쓰되 그것을 절제미 속에서 실행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는 형상을 옮겨 오고 색채도 재현하는 사진의 왜곡을 조금이라도 덜어내기 위해서 흑백사진만을 전시장에 제시한다. ● 박홍순 카메라 워크의 매력은 밀착이 아니라 이탈에 있다. 그는 항상 멀리서 느긋하게 바라본다. 예를 들자면 서해안 기름유출 사건의 현장에서 여느 사진가들과 뚜렷하게 구분되는 박홍순의 시선을 확인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진가들은 기름때를 닦아 내기에 여념이 없는 자원봉사자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카메라를 바짝 들이댄다. 반면에 박홍순은 그 현장에서 한참 뒤로 물러나 거대한 생태자연의 풍경 속에서 꼬물거리는 인간 존재의 행위 장면을 포착한다. 태안군 학암포에서 기름유출 사건이라는 대재앙을 맞아 갯벌을 갈아엎은 장면을 포착한 작품은 마치 대지미술의 현장을 담은 것 같은 역설을 감지할 수 있다. 사건의 현장에 뛰어드는 것이 아니라 멀찌감치 뒤로 물러나는 것이다.

ⓒ 박홍순_서해안-군산시 비응도, S Korea_젤라틴 실버 프린트, 흑백 인화_28×57.5cm_2006

ⓒ 박홍순_서해안-변산반도 격포,S Korea_젤라틴 실버 프린트, 흑백 인화_43×54.5cm_2006
그는 예술가 주체와 세계 사이를 매개하는 카메라 렌즈의 시선으로 장소와 상황이라는 실재의 면면을 흡착한다. 그의 사진은 몸으로 찍는 사진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발로 찍은 사진이다. 드넓은 갯벌이 펼쳐진 서해안 곳곳을 누빈 박홍순의 순례는 강화도에서부터 안산과 변산, 태안을 거쳐 진도에까지 이른다. 그는 대자연의 숭고함과 인공의 사악함이 맞물리는 서해안의 시공간을 무던히도 드나들었다. 아무도 가라고 하지 않은 그 길을 걸어가는 일. 이것이 박홍순이 선택한 예술의 길이다. 그 장소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포착하는 일은 사진의 현장성에 대한 강박, 그러니까 결정적인 순간을 포착해야 한다는 집착으로 직결할 수도 있다. 그는 다르다. 그가 장소성과 상황은 포착하는 발걸음은 언제나 한결같이 느리고 길기 때문이다. ● 분명 그의 작업은 생태적 가치를 옹호하는 환경운동의 맥락과 동행한다. 그러나 그는 사회참여적인 운동의 방식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가 만든 사진 작업의 결과물은 전시장 전시뿐만 아니라 단행본 출판과 정간물, 그리고 인터넷 매체 등을 통해서 증폭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지금 당장 목전에 닥친 즉발적인 효과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만큼 긴 호흡으로 자신이 발 디딘 땅 전체를 담아내겠다는 원대한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얘기다. 그에게는 예술생산의 필연성이라는 맥락이 있다. 그로서도 아프리카나 아메리카와 같은 거대한 대륙을 향한 동경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속해 있는 공동체로부터, 더 좁게는 자기 자신의 체험과 내적 필연성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예술에 대한 진지하고도 성찰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 박홍순의 고독한 순례에는 예술영역에 팽배한 식민주의 시각을 넘어서겠다는 구상이 단단하게 자리 잡고 있다. 탈식민주의 관점의 첫출발로 그는 백두대간을 담기 시작했고, 한강을 거쳐 서해로 나아갔다. 조만간 그는 남해바다로 갈 계획이라고 한다. 몇 년 내에 끝나지 않을 긴 프로젝트도 구상중이다. 비무장지대를 담는 일이다. 지난 10년을 돌아보며 다시 새로운 10년을 내다볼 줄 아는 긴 호흡의 예술가 박홍순의 프로젝트이다. 그의 스케일 큰 구상이 일단락을 이룰 때까지 그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고독한 발걸음에 정비례하는 예술의 길을 걸을 것이다. 예술은 대중의 기호취미를 충족시키는 일이 아니라 소수자의 새로운 합의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이라는 것. 예술의 대사회적인 역할에 관한 질문에 대해 박홍순의 작업이 들려주는 해답이다. ■ 김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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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갤러리 쿤스트라움 신진작가 그룹展
A Coming Artist 2009 Group Exhibition
2008_1215 ▶ 2008_1230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참여작가_신성환_안인경_강주현_임주연_반경란_안태현
관람시간 / 11:00am~06:00pm
갤러리 쿤스트라움 KUNSTRAUM GALLERY 서울 종로구 팔판동 61-1번지 Tel.
+82.2.730.2884 www.kunstraum.co.kr
열린 공간을
추구하는 갤러리 쿤스트라움 에서는 역량있는 신진 작가들을 위해 전시 지원프로젝트를 진행해오고 있다. 2008년에 이어 2009년 신진작가 공모를
통해 선발된 선정작가6인의 그룹展을 시작으로 선발 신진작가들의 예술적 특성을 알리고, 2009년 Solo-展의 경향을 예고한다.

신성환_[Traum-Reise]_00:05:58_2008
신성환의「[Traum-Reise 꿈-여행]」은 이카루스 신화를 바탕으로 꿈과 현실의 중간선상에 놓여있는 한 개인의
이야기를 설치작업으로 발전시켰다. 비디오작업에는 머리를 하늘에 두고 육체는 땅(현실)에서 살아야 하는 인간의 실존에 대한 명상이 담겨 있으며
‘붉은 실’의 함축적 의미를 통해 ‘어떻게 그리고 무엇을 향하여.....?’라는 삶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남기고자 하였다.

안인경_왜곡하거나 착각하거나_장지에
혼합재료_91×116.7cm_2008
안인경은 왜곡된 현대인들의 공간을 시각의 착시 현상으로 풀어나간다. 실제의
도시형상과 시각의 착시 현상으로 일그러진 도시형상으로 어떤 것이 실제이고 어떤 것이 착시인지에 대한 모호함과 일상으로서 존재하는 공간은 나만의
왜곡된 공간인지, 그것이 실제인지 아닌지 그것이 착시현상인지 아닌지에 대한 혼돈을 표현하고 있다.

강주현_잘
부탁드립니다._OHP필름, 아크릴_160×80×55cm_2008
강주현의「잘 부탁드립니다.」는 제한된 프레임
안에서 재현된 이미지를 보여주는 사진의 확장에서 출발한다. 또한 무한의 복제로 인해 사라져가는 대상의 주관에 관심을 갖고 단순히 복제된 대상이
아닌 주관을 띄는 하나의 대상으로써 확장시켜 복제물과의 대화를 시작하고 있다.

임주연_yim8_회색양말_캔버스에
유채_89.4×219.7cm_2008
임주연의 작업에 사용된 지극히 사적인, 실제의 이미지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본질성의 도큐멘타 이다. 자기 투사적 오브제인 옷과 함께 드러나는 몸의 부분적 이미지는 작업의 행위자인 동시에 소재로서 나타나고 있다.
일차적으로 선택된 이미지들은 회화를 거치며 일상의 공간을 응시하도록 하며 심리적 공간을 형성한다. 한정된 공간-노란 방, 화장실, 침실-에서
일어나는, 얼핏 지루해 보이는 불확실한 순간에 의미가 더해지며 일상에 내제한 삶의 존재론적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반경란_n30-3-Francis Bacon et
moi_캔버스에 유채_116×91cm_2008
반경란 의 그림속 형상들은 일상에서 스스로가 드러낼 수 없는 현재를
보여주고 있다. 즉, 카타르시스_기억의 배변(排便)된 욕구라 할 수 있다. 라캉의 ‘욕망하는 나는 내가 아니며
자의식(self-consciousness)이다.’와 같이 내면 욕망의 분출이 만들어낸 형상을 통해 자신의 근원적 모습을 발견해간다.

안태현_생각의벽_크리스탈
테이프_250×200×6cm_2008
안태현[생각의벽]은 일상에서 쓰이는 테이프 그것은 평면일까, 입체일까? 또한
그 투명함은 과연 면(面)으로 인식 될 수 있는 것인가? 라는 질문을 시작으로 일상에서 쓰이는 중간적인 속성을 가진 테이프라는 소재를 이용하여
벽돌형태의 6면체를 구성하고 통로를 가로막는 큰 벽을 만들어 낸다. 그 벽은 통과할 수 없게 단절되어있고, 투명성 덕분에 막혔지만 막히지 않고,
뚫렸지만, 통과 할 수 없는 벽이다. 이것의 대한 해답이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그것이다. ■ 갤러리 쿤스트라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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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이야기들_stories of light
허수빈展 / HEOSOOBIN / 許秀賓 / sculpture.installation
2008_1211 ▶ 2008_1228

허수빈_빛을 기록하다_아크릴판넬7개, LED, DMX인터페이스, 신호케이블_각40×50cm_2008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후원_한국문화예술위원회
관람시간 / 01:00pm~09:00pm / 명절연휴 휴관
우리에게 너무 익숙하나마 존재감조차 없어 보이는 빛이지만 전시장에서 마주하는 빛은 의아하고 생소하리라 본다 하지만 작은 호기심 속에 빛의 재미난 일련의 현상들과 다양한 접근 방식들에 조금이라도 매력을 느끼고 집중하게 된다면 그 빛이 오히려 관객들에게 처음에 그런 익숙함으로 다가와 친절하고 편안히 그들의 세계로 이끌어 주리라 확신 한다. 더불어 작업이 나오는 과정들이나 아직 구현되지 않은 작가의 아이디어들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아카이브 조성하여 관객들과 작가와 작업을 연결하기 위한 공간을 제공하며 주2회 전시 중 총 4회에 걸쳐 빛 작업 장르의 이해라는 제목의 강의와 작가의 본인 작업소개의 시간으로 마련하여 작가가 다루고 있는 빛 작업의 영역들을 공부하고 좀 더 이해하는 시간을 갖고자한다. ● 보통은 글로 그림으로 사진으로 비디오로 사운드로 기록을 한다. 그런데 나는 빛으로 기록을 해 본다. LED는 그를 실현하기에 현재로서 가장 이상적인 재료이다. 빛을 이루고 있는 세가지색 빨, 녹, 파 이것들로 못 만들 색은 없다. 다만 채도가 약간 문제가 되서 아크릴판위에 차량용 썬팅 필름으로 코팅한 것 만 빼면... 어째든 여러 가지 실험을 거쳐서 원하는 데로 색을 구현할 수 있는 기록용 창문을 제작했고 이제 빛을 기록하기 시작한다. 내가 이번에 기록에 남길 것은 새벽의 하늘빛이다.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미리 준비된 기록용 창문을 내방 창문에 가져다 두고 기록용 창문의 색이 지금 현재의 빛과 거의 흡사 할 때까지 빨녹파값을 대입시킨다. 그렇게 한 달을 기록한다. 11월 한 달 동안 밤은 점점 길어 질 것이고 흐린 날도 있고 맑은 날도 있을 것이다. 빛을 담겠다는 생각, 빛을 담는 과정, 빛을 담은 창문까지 모든 것이 하나의 작업이다. 덧붙여 화면에 재미난 연출을 위해 일주일단위에 해당되는 7개의 창문으로 구성되어 있고 정각 6시와 그 후 10여분후의 밝아진 하늘빛까지의 흐름을 프로그래밍을 통해 빠르게 변환시켜 보았다.

허수빈_배밭_백라이트 사진출력, LED_60×90cm_2008

허수빈_신호등_백라이트 사진출력, LED, 프로그램 제어장치_60×90cm_2008
그 언젠가 추억이 있는 장소와 그렇게 언제나 그 시간에 고정된 기억들 그 기억들을 빛으로 담아 기억하고 회상해본다.

허수빈_문_전선, 전구_190×90cm_2006

허수빈_역기_스테인레스, 백열전구, 조광기_50×230×50cm_2007

허수빈_창문가로등_1300LED, 아크릴썬팅판넬, 철, 우레탄도장, DMX프로그램_150×500×80cm_2008
빛의 일련의 현상들을 화면에 담거나 조형화 시키고 공간을 표현을 한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그 밖에 빛의 갖고 있는 우연성들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왜냐하면 빛은 실제 물질로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달리 말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재료 혹은 에너지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어찌 보면 이미 작가의 의도적 한계를 벗어난 신비스런 작업의 형태들이란 뜻이다. 이점이 내가 빛 작업의 세계에 발을 내딛게 된 계기이며, 앞으로의 행복한 수많은 창작의 고통을 만끽하게 될 설레임의 이유가 된다. 내 작업들엔 유사한 형태의 시리즈가 없다. 빛의 다양한 현상들을 여러 가지 시각으로 담아내고 싶은 것뿐만이 아니라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앞으로 수반 되어질 많은 창작의 고통들과 함께 정진과 몰두의 시간을 누리기 위해 어느 한곳에 지체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비록 아무런 혜택 없는 특권이라 할지라도 창작은 내가 작가로서 누리는 유일한 행복이라는 점에서 난 그런 행복을 끝임 없이 추구하고 싶을 뿐이다. ■ 허수빈
■ 세미나 일정
2008_1213_토요일_04:00pm~05:30pm
2008_1214_일요일_04:00pm~05:30pm
2008_1220_토요일_04:00pm~05:30pm
2008_1221_일요일_04:00pm~05:30pm
■ 세미나 내용 및 취지
1. 빛 작업 Light art 장르의 이해(빛 작업의 도래와 전개 과정, 작업의 특성으로 분류하여 이해하는 빛 작업 장르의 세계)
2. 작가와의 대화
취지: 생소한 영역의 빛 작업 장르를 함께 이해하고 공부해 보면서 더 넓은 영역으로서 확장된 미술 그리고 다양성의 확보와 그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금 인식하는 과정임이 이번 세미나의 취지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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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북쪽_on photography展
2008_1217 ▶ 2008_1230
초대일시_2008_1217_수요일_05:00pm참여작가 나타나다_representation /
구성연_김수강_주상연_정혜진_데비한 살아지다_presence /
김옥선_안옥현_윤주경_윤정미_이선민_정강 사라지다_absence /
고현주_신은경_이옥련_이은종_전미숙
후원_한국문화예술위원회_월간사진
관람시간 /
10:00pm~06:00pm
관훈갤러리_KWANHOON gallery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5번지 본관 Tel. +82.2.733.6469 www.kwanhoonprojects.com
「사진의
북쪽」에서 ‘북쪽’이 갖는 의미는 여기 모인 작가들의 작업만큼이나 다채롭다. ‘북쪽’은 부재를 견디는 일로부터 작업을 시작하였지만, 그동안
억압받은 것들을 귀환시키고, 우리의 인식 속에서 추방당했던 보이지 않는 것들을 다시 우리 세계 안으로 호출해낼 줄 아는 작가들의 삶의 자리이다.
또한 우리가 일상의 타성에 무뎌질 즈음 서늘하게 섬광이 지나가는 자리이고, ‘남쪽’의 대척점에서 존재/부재, 빛/어둠, 진리/허위, 원본/모사,
현실/꿈, 이미지/상징, 남성/여성의 자리이자 사진의 본향으로서의 북쪽을 의미한다. 더 구체적으로는 죽음의 공간인 북망산의 북쪽이기도 하다. ●
고향집 마당에는 ‘집’만한 무덤이 있다. 십여 년 전 큰 수술을 받으신 아버지께서 퇴원하신 후 직접 만든 무덤이다. 이젠 명절 때마다 으레 그
무덤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지만, 처음 그 무덤이 생겼을 때 무덤 안에 무엇이 있을까, 작은 문을 열고 안으로 걸어가다 문이 닫힐까봐 황급히
빠져나왔던 기억이 있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여전히 흐르는 삶의 시간 속에서 존재하는 것의 운명과 그 운명의 고독한 아우성이 들려왔다.
사진 찍는 일은 그 문(shutter)을 하루에도 수십 번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 하는 일이다. 그래서 사진이라는 이미지는 타고난 휘발성을
가지고 있나보다. 찰나의 나머지는 온통 ‘죽음’이고 사진가는 무수한 죽음들을 만들어낸다. 영원할 것 같은 시간과 무한할 것 같은 3차원의 공간이
미끈한 인화지 속으로 들어와 농축된 레이어를 형성하거나, 이미 화석화 된 화면 속에서 다시 싹트고 숨 쉬며 존재하기를 시작하는 수수께끼 같은
사진이미지는 그래서 더욱 매혹적이다.

윤주경_의자_A Chair_C
프린트_180×150cm_1993

데비한_Two Graces I_라이트젯 프린트,
알루미늄, 아크릴_120×140cm_2008

고현주_대법정_C
프린트_123×149cm_2006

주상연_Wonder on Parnassus
series_C 프린트_50×40inch_2007

김수강_Stones 14_중크롬산염 검
프린트_90×70cm_2008

김옥선_rich the naturalist_C
프린트_100×125cm_2007

이은종_A studio 18B_C
프린트_150×180cm_2006

정 강_Say, 이진_C
프린트_100×100cm_2003

안옥현_에린과 샹들리에_C
프린트_100×100cm_2007

전미숙_김대건상, '우상의 자리'중_젤라틴 실버
프린트_97×97cm_1999

이선민_최명순의 집-추석풍경_C
프린트_120×150cm_2006

구성연_나비시리즈_라이트젯
프린트_120×150cm_2000

이옥련_Wittenberge
26.05.2001_디지털 프린트_94×60cm

정혜진_Potentiality-0528_M
프린트_60×80cm_2005

신은경_PhotoStudio-chair_디지털
프린트_79×100cm_2007
우리가 뛰어난 예술이라고 평가해온 작품들은 보이는 것들을 단순하게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들을 끌어내 보이도록 함으로써 현실의 이면과 표면을 조화롭게 만든 것들이다. 이러한 작품들만이 이성 중심주의와 남근적
폭력으로 가득한 세계가 만들어 놓은 불구적인 현실을 제자리에 돌려놓게 된다. 이번 전시에 참여하는 사진가들은 부재의 흔적을 포착해내고, 그
흔적(trace)에 주목한다. 말해질 수 없는 것, 존재할 수 없는 것들을 향해 흔적 찾기를 시도하는가 하면, 대상을 나타나게도 하고 사라지게도
하며 플라톤의 동굴 안팎을 넘나들며 ‘생생한 무당’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들은 모두 삶의 원근법적 중심(소실점)의 부단한 재설정 과정을 통해
굳건하게 지금의 자리에 이르렀다. ● 아마도 눈이 밝은 사람은 전시에 참여하는 작가가 모두 여성이라는 점을 알 것이다. 이 전시는 동시대 사진가
16인의 작품을 통해 사진 매체에 대한 존재론적 물음을 제기하는, 영문타이틀 명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사진에 관한’ 사진전이다. 전시될
작품들은 크게 ‘나타나다’, ‘살아지다’, ‘사라지다’의 범주로 나눠지며, 각각 사진매체의 가장 큰 특징인 재현(representation)과
현존(presence), 부재(absence)의 의미들을 밀도 높게 보여주는 작업들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16인의 여성 사진가의 작업을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의미 깊은 시간이 될 것이다. 이번 전시와 함께 작가들의 작업세계를 조망한 『사진의 북쪽』이 출간될 예정이다. ■
최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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