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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호展 / LEEMOONHO / 李文虎 / photography.installation
2008_1024 ▶ 2008_1103

이문호_space1_람다 프린트, 디아색_126×80cm_2004
초대일시_2008_1024_금요일_05:00pm
SeMA 신진작가 전시지원 프로그램 선정작가展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가나포럼스페이스_GANA FORUM SPACE
서울 종로구 평창동 98번지
Tel. +82.2.720.1020
www.ganaart.com
착시의 번역자, 보는 방법을 사진 찍다 ● 이문호의 사진작업은 액자소설을 닮아있다. 하나의 공간을 대상으로 재현 속 재현, 공간 속 공간, 복제의 복제 등의 방법으로 보는 이의 시선을 붙잡아둔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시점을 이동하며, 하나의 대상을 다른 방식과 과정을 거쳐 다각도로 보여주는 그의 작업은 공간과 그것의 번역,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의 문제를 해부하듯, 낱낱이 그리고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눈으로 어떤 대상을 보고, 즉, 실재공간을 이미지로 재현한다면 어떤 모습인가? 또 이미지를 실재로 재현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 공간을 보는 방식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 그의 작품은 이러한 질문에 공간을 세트처럼 제작하고 그것을 다시 사진으로 기록하는 일련의 작업을 통해 탐색하고 있다. ● 실재 어떤 특정한 일상공간이 아닌 모호한 공간을 실재처럼 만들고, 인공조명으로 공간감을 극대화해 사진으로 기록하는 방식은 재현과 연출, 복제가 복잡하게 얽혀있다. 그것은 곧 그의 작품속에서 시각성에 대한 집요한 해석과 의문을 강화한다. 이같은 과정을 거쳐 눈의 시각성, 손에 의한 재구성, 기계눈(카메라)의 시각성을 순차적으로 , 결국에는 중첩해 보여주는 그의 사진은 동시대미술에서 활발하게 논의되는 시각성, 원본과 복제와 같은 중요한 지점들을 짚고 있다. 그의 작업에서 만드는 행위와 사진 찍는 행위, 즉 사진적 행위는 결합되어 신체적인 눈과 심리적인 눈이 얽히게 된다. 이같이 다양한 시각성의 프리즘을 거쳐 재현과 기록의 방식, 그 자체를 보여주고 있다.

이문호_distortion_람다 프린트, 디아색_100×130cm_2007
기억과 경험을 압축한 공간_Imaginary Space ● 그가 만드는 대상공간의 대부분이 실제의 특정한 공간이 아니라 그의 기억 속, 혹은 상상 속 대상공간이라는 데서 이러한 확증은 더욱 분명해진다. 경험과 감각에 의한 장소의 이미지가 현실을 압도하는 상황 자체를 재현하는 것이다. 공간의 기능이 전혀 드러나지 않은 채, 중성적인 면모를 드러낸 공간시리즈에서, 그는 점차 특정 기억의 공간으로 대상을 확장해나간다. 폐쇄적으로 닫힌 공간들 사이 열린 공간에서 새어나오는 빛을 통해 중성적이면서도 신비감, 초현실적 분위기를 구축했다. 그가 구축한 공간의 미묘한 에너지는 우리 주변 공간속 의식 주위를 떠도는 수많은 의미 없는 존재들에 주목하게 한다. 이후 그는 교실, 작업실 등 특정한 공간으로 보이는 좀 더 복잡하고 정교한 공간을 구성하고 다양한 칼라를 통한 공간에 대한 다채로운 감각과 기억을 재구성하여 다각도로 보여준다.

이문호_ego2_람다 프린트, 디아색_110×140cm_2007

이문호_Gogh's-room_캔버스에 잉크젯 프린트_설치_2005

이문호_memory(the-room)_람다 프린트, 디아색_90×130cm_2004
이미지의 실상과 허상_Extra Space ● 이제 그는 허상을 실재로 만들어낸다. 실재가 반사되거나 비춰진 허구의 이미지를 실재로 만들어내, 실재와 허구 사이의 간극을 드러낸다. 허상, 이미지의 재현물을 다시 사진으로 기록한다. 재현의 재현, 일종의 지표화를 통해 시각성 그 자체에 복잡한 질문을 제기한다. 인간의 눈과 기계의 눈 사이의 미묘한 차이와 어긋남을 병치해 보여줌으로써 인간의 인식에 대한 균열을 가한다. 벽면에 거울을 통해서 사방의 반사를 가능하게 하는 무용실이라는 공간을 일종의 작은 세트처럼 재현하는데, 거울에 비친 공간을 그대로 재현해낸다. 원근법적 시선으로 반영된 이미지를 실재로, 즉 3차원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마치 거울 속 세상을 그대로 드러낸 것처럼 말이다. 거울이라는 실재세계가 반사된 공간 내부를 3차원으로 실재화하며 공간을 무한히 확장한다. 그런데, 이 허상의 실재는 매우 정교하여 그것이 거울에 비친 2차원이 아니라, 3차원의 사물로 이루어져있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차리기는 어렵다. 여기에서 단순한 재현의 문제가 아니라 입체와 평면의 번역이 이루어지며, 또 다른 미학적 쟁점을 제기한다. ● 왜곡 시리즈에서는 광학 기계 렌즈로 본 세상을 재현하며, 카메라-눈의 시각과정 자체를 그대로 드러낸다. 이는 3차원 대상을 2차원 사진으로, 즉 지표로서 복제함에 따라 일어나는 왜곡된 차이를 실상화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의 화면에서는 어떤 것이 원본이고 복제본인지 구별하기 어렵도록 만들어져있어, 현실과 이미지의 경계는 완전히 해체되어 버린다.

이문호_Piano

이문호_relativity-by-M.C-Escher_람다 프린트_111×116cm_2005
불가능한 공간의 딜레마_Empty Space ● 한편 그는 실재로는 불가능할 것만 같은 에셔의 그림 <상대성이론(Relativity)>을 입체로 정교하게 재현해, 그것을 사진으로 기록한다. 가능하지 않은 상상의 구조로 여겼던 공간을 실재로 구현해낸 그는 에셔의 그림 속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삭제해 버렸다. 여기서 앞서 살펴본 작품들에도 오직, 빈 공간만 있을 뿐 공간속에 머무는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된다. 건물의 주체가 증발된 체 공간만 텅 비어 있는 것이다. ● 이처럼 그는 어떤 구체적인 상황이나 상징을 제거하고, 오직 공간을 만들고 그것을 기록할 뿐이다. 또한 공간을 단순한 환상세계로서 다루지 않는다. 일상 속에서 각인된 장소를 심리적 환상세계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공간은 또 다른 공간으로 파생되고 복제되어 무한히 확장되는 시각적 환영을 다룬다. 그것이 단순한 기록으로서의 사진을 넘어 일종의 구조로서의 공간을 직접 만드는 이유를 뒷받침한다. 이러한 공간의 복제, 확장은 오늘날 서로가 서로를 반영하는 이미지 숲의 무한집합인 현실에 대한 인식을 암시하고 있다. 현실 자체가 복제를 반복해 이미지와 뒤섞여 해독되어야 할 하나의 텍스트로 인식된다고 볼 때, 그는 자신의 작업을 자신이 만든 공간을 연속해서 복제함으로써 하나의 텍스트로 시각화하고 있다. 그것은 이미지와 현실의 상호보완성, 즉, 현실의 개념이 변하면 이미지도 변하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라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역설적으로 현실과 이미지의 미묘하게 어긋난 지점을 파고들어 예리하게 보여준다. 즉, 실재 공간과 재현된 공간, 복제된 공간을 통한 실재와 허구의 경계에 대한 의문과 이미지와 실재가 구별하기 힘들만큼 뒤섞인 현실을 의문시한다. ● 그는 미니어쳐처럼 실재 공간을 축소시켜 다시 사진으로 확대하기도 하고, 실재 사이즈로 확대한 설치를 사진으로 남기기도 하며, 크기의 변화와 조작을 통해 일어나는 미묘한 차이들까지 담아냈다. 이같은 시각적 환영은 점차 심리적인 층위로 확대된다. 끝없이 반복되며 증폭된 공간 이미지는 공간의 어떤 깊숙한 웅덩이를 통해 복잡한 현실인식과 그 속에 내재된 폐쇄공포 등과 같은 심리적 불안과 환각을 암시하고 있다. 그 곳은 은신처처럼 공포와 안도감이 공존하는 장소이다. 그곳은 일종의 착시의 복제로서 시각성에 대한 철학적 물음을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이문호의 집요한 공간읽기와 인식체계에 균열일으키기가 단순한 유희적 차원이 아닌 현실의 반영과 경계에 대한 의문이라는 점에서 그의 정교한 작업은 시각성의 논의를 관통하고 있을 뿐 아니라, 철학적 차원으로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의 작업에 주목해야만 한다. ■ 김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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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have nothing to say and I am saying it
플랫폼 서울 2008
2008_1025 ▶ 2008_1123
쟈넷 카디프_The
Forty-Part Motet_2001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플랫폼 서울 2008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8_1024_금요일_02:00pm(구
서울역사) 초대일시_2008_1024_금요일_06:00pm(아트선재센터)공동주최_사무소(SAMUSO)_조선일보 주관_아트선재센터 협찬_현대카드 후원_문화체육관광부_프랑스문화원 협력_SCAI
the Bathhouse_국제갤러리_두아트 서울_하이트맥주(주)_매일유업(주)_경방(주)
아트선재센터 / 갤러리 예맥 / 갤러리 선 컨템포러리 국제 갤러리 / 두아트 서울 / PKM 갤러리 웨이방 갤러리 /
송원아트센터 / 원앤제이 갤러리 가 갤러리 / 쇳대박물관 / 구 서울역사
플랫폼
서울은 2006년에 시작되어 2010년까지 5년 동안 매해 이루어지는 현대미술 페스티벌로서, 전시를 주축으로 비디오 및 필름 상영, 공연,
강연, 퍼포먼스 등 동시대 예술의 소통화 생산에 관여되는 다양한 행위들을 실험하는 장이다. 플랫폼 서울 2008은 “I have nothing
to say and I am saying it”란 타이틀로 영상, 사운드, 빛, 무용, 연극 등 다양한 요소들과 접목된 동시대 예술 전시를
선보이며, 국내외 50여 명의 작가들이 참가하여 아트선재센터를 비롯한 사간동 일대 갤러리들과 구 서울역사, 그리고 동숭동 쇳대박물관 등 총
12개 장소에서 10월 25일부터 11월 23일까지 펼쳐진다. “I have nothing to say and I am saying it” 는
존 케이지(John Cage)의 1961년도의 저서 『Silence』 105쪽에 있는 “Lecture on Nothing”의 한 문구에서
인용하였다.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관람객은 작품이 속한 시간과 공간에 삽입되어 시각에 한정되지 않는 공감각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비록 완전한
소통은 이루어지지 않지만 일방적인 시각적 경험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경험하고 체험해야 느낄 수 있는 감각의 경험을 제시한다는 의미에서
전시의 제목을 “I have nothing to say and I am saying it”이라 하였다. 플랫폼 서울 2008은 작가들이 공간이
지닌 특수성을 반영하여 작업한 고유한 장소성을 지니고 있다. “I have nothing to say and I am saying it”에
참가한 작가들 대부분은 자신이 전시할 장소를 미리 방문하여 장소특정적인 새로운 프로젝트를 제작하거나, 기존의 작업을 설치할 경우에도 전시장이
지닌 장소의 의미와 연계하여 전개하였다. 특히, 1925년에 준공되어 2009년 리노베이션에 들어갈 예정인 구 서울역사에서 전시하는 작가들은
건물이 지닌 역사적이고 사회문화적인 맥락과 연계한 작품을 선보인다. 댄 그레이엄, 루이 자콥 등 작가뿐 아니라, 바르셀로나 현대미술관 관장인
바르또 마리, 도쿄현대미술관 시니어 큐레이터 수미토모 후미히코 등의 강연회와 퐁피두센터 큐레이터인 에티엔느 상드랭 비디오 프로그램, 그리고
시징맨, 콘탁 곤조, 김순기 등의 퍼포먼스 등 다양한 형태의 프로그램들이 전시기간 내내 개최될 예정이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_COUNT ON US Star
■ 전시장소 및
참여작가 ○ 아트선재센터 : 살바도르 달리, 존 케이지, 김순기, 이강소, 예페 하인, 티노 세갈, 박주연, 비토 아콘치,
트리샤
브라운, 댄 그레이엄, 앨런 캐프로, 로버트 모리스, 브루스 나우만, 이본느 라이너 ○ 갤러리 예맥 : 김순기 ○ 갤러리 선
컨템포러리 : 마틴 크리드, 안젤라 블로흐 ○ 국제 갤러리 : 시징맨(김홍석, 오자와 츠요시, 첸 샤오시옹), 수라시 쿠솔롱, 얀
파브르 ○ 두아트 서울 :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슈 젠, 마르쿠스 쉰발트, 콘탁 곤조, 댄 그레이엄, 무라이 게이테쓰 ○ PKM
갤러리 : 루이 자콥 ○ 웨이방 갤러리 : 페터 피슐리, 다비드 바이스 ○ 송원아트센터 : 다나카 고키 ○ 원앤제이 갤러리 :
우지노 무네테루 ○ 가 갤러리 : 마농 더 부르 ○ 쇳대박물관 : 토마 뷔유 ○ 구 서울역사 : 윤동구, 최재은, 다비드
라멜라스, 나빈당(나빈 라완차이쿨&타일러 러셀), 다카야마 아키
라, 남화연, 쟈넷 카디프, 티노 세갈, 함양아, 길버드&조지, 김순기, 이강소, 플레이, 무라카미
사부로, 다다오 라이브 액션 페스티벌, 액션 인 차이나
■ 프로그램 종류 ● 강연회 - 아트선재센터
아트홀 ○ 10월 24일(금) 4시_댄그레이엄 ○ 10월 25일(토) 4시_수라시 쿠솔롱 ○ 10월 26일(일) 2시_루이
자콥 ○ 10월 26일(일) 4시_니나 바이에르 & 마리 룬 ○ 11월 7일(금) 4시_박소현, 수미토모 후미히코, 슈
양 ○ 11월 14일(금) 4시_바르또 마리
● 고양이 프로젝트 - 아트선재센터 아트홀 ○ 10월
31일(금) 4시_크리스 마르케 영화 상영 「숨은 고양이 찾기」/ 토마 뷔유, 에티엔느 상드랭 강연
●
퍼포먼스 ○ 10월 25일(토) 2시_시징맨 「시징극 프로젝트: This is Xijing- Journey to the
West」 국제갤러리(구관) ○ 10월 27일(월) 7시_니나 바이에르 & 마리 룬
「The Act」 연극실험실 혜화동 1번지 ○ 11월 1~2일_콘탁
곤조 11월 1일(토) 2시_두아트 서울 / 11월 2일(일) 2시_신 서울역사 ○ 11월
16일(일) 2시_남화연 「The Tide is High 파도는 높은데」 구 서울역사 ○
11월 15일(토) 4시_김순기「시간과 공간」(1975) 아트선재센터 아트홀
●
비디오 프로그램 - 아트선재센터 아트홀 ○ 11월 1일(토)~2일(일) 4시_에티엔느 상드랭(퐁피두센터 큐레이터) 비디오
프로그램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 울라이 「Expansion in
Space」 백남준 & 샬롯 무어맨 「New Television Workshop」 외
9편 ○ 11월 8일(토) 4시_함양아 비디오 프로그램과 아티스트 토크 ○ 11월 9일(일) 4시_박주연 비디오 프로그램과 아티스트
토크
● 음악극 공연 - 구 서울역사 ○ 11월 26일~29일(수~금요일_5시,8시 /
토요일_4시,7시) 음악극집단 바람곶 「물을 찾아서 2008」
●
워크숍 ○ 11월1/8/15/22일(토)_1시,4시 아트선재센터 외 3곳
가족과 함께하는 플랫폼 서울 2008(초등학생과 부모님 대상 매회 10인 가족) ○ 단체 전시관람 프로그램(유치원~청소년 20인 이상
단체) 전시기간 중 사전예약 아트선재센터

예페
하인_Invisible Labyrinth_2005
■ 전시
티켓 - 아트선재센터_일반 6,000원 / 학생 3,000 / 유아 2,000원(단체
4,000원/2,000원/1,200원) - 구 서울역사_일반 6,000원 / 학생 3,000원 / 유아 2,000원(단체
4,000원/2,000원/1,200원) - 전시 통합티켓(아트선재센터+구 서울역사)_일반 10,000원 / 학생 5,000원 / 유아
3,000원 (단체 7,000원/학생3,500원/유아2,000원) - 프로그램 1회권_일반
6,000원 / 학생 3,000원(단체 4,000원/2,000원) - 프로그램 통합권_일반 30,000원 / 학생 15,000원(단체
20,000원/10,000원) - 자유이용권_일반 40,000원 / 학생 20,000원(단체 27,000원
/13,000원) (모든 유료 전시와 프로그램 참여 가능, 음악극집단 바람곶 「물을 찾아서
2008」제외) ※ 구 서울역사와 아트선재센터 외 전시장은 무료 입장 ※ 할인 적용 - 학생:대학생이하 / 단체 20인 이상 할인 /
유아:미취학 아동, 유치원생 이하
■ 문의_SAMUSO(사무소)_Tel.
+82.2.739.7098 홈페이지_www.platformseoul.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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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kton & Plankton
변대용展 / BYUNDAEYONG / 卞大龍 / sculpture
2008_1018 ▶ 2008_1105 / 일요일, 공휴일 휴관

변대용_아이스크림 먹는 백곰_레진_180×220×170cm_2008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이미지속닥속닥 Vol.080905i | 변대용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8_1018_토요일_03:00pm
관람시간 / 09:00am~06:30pm / 일요일, 공휴일 휴관
송은갤러리_SONGEUN GALLERY
서울 강남구 대치동 947-7번지 삼탄빌딩 1층
Tel. +82.2.527.6282
www.songeun.or.kr
『넥톤 앤 플랑크톤』전시서평 ● 지금, 에둘러 갈 길마저 잃어버린 세계는 내일을 보는 것 마저 힘들게 만든다. 희망에 관한 무수한 소문이 떠돌다가도 좌절에 대해 이야기 하고 마는 현실은, 자본과 권력에 완전히 포섭된 미술시장을 직면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출구를 찾지 못하는 이곳, 어떠한 변화도 저항도 불가능할까. 자본에, 사회에, 혹은 자신에게 길들어진 현실을 환기시키기 위해서 변대용은 조각과 오브제들을 풀어놓는다. 능동과 수동이라는 대립된 개념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조형언어들, 그것이 인간의 모습이 투영된 동물이거나 혹은 사람들이 쓰고 버린 빈 용기들이거나. 그럼에도 그러한 대립이 무의미한 전시공간.

변대용_장화신은 두루미_레진_110×58×200cm_2008
앞선 세 번의 개인전을 통해 변대용은 유사한 형식으로 전시를 구성했다. 물론 전시마다 접근했던 주제들이 다르긴 하지만, 형식적으로는 일관된 형태를 유지했다고 볼 수 있다. 빈 용기들 외형에 색을 입힌 후 전시장 바닥 곳곳을 메우고, 특정한 형상의 조각 작품 두세 점 정도가 놓여있는 구성을 취한다. 물론 전시를 설치하는 과정에서는 이 조각 작품을 먼저 두고, 주변에 색이 칠해진 빈 용기들을 깔았을 것이다. 전체적인 구성이 사실은 이 조각 작품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조각 작품은 전체 구성의 중심점처럼 보이기도 한다.

변대용_정지된 폭발_레진_60×310×230cm_2008
조각 작품들은 긴 시간의 노동과정을 통해 완성되었지만, 그래서 형태적으로는 완벽하지만, 기이하거나 결여를 안고 있다. 먼저, 2미터 높이의 선글라스를 끼고 장화를 신고 있는 두루미-인간은 튼튼한 두 다리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질적인 결합은 오히려 안정된 느낌을 준다. 원래 새의 다리가 갖는 불안함이 인간의 두 다리를 통해 보완되는 것처럼 보인다. 두루미-인간과 마찬가지로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백곰도 매우 안정된 자세를 취하고 있다. 형태적으로 안정되었지만, 이 두 조각 작품은 잘못된 현실에 대응해야하지만 그것에 길들여질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보여준다.

변대용_Nekton & Plankton_레진_가변크기_2008
폭발하는 형상을 보여주는 조각 작품은 좀 더 모호하다. 이 작품은 두 조각작업에서 보여지는 안정감보다는 폭발하고 있는 순간을 포착하기 때문에 긴장감을 유지한다. 이것은 수동적 상황, 즉 자신의 자율적 의사결정권을 잃어버린 상황들에 대한 소리 없는 외침으로 보인다. 팽팽한, 긴장된 순간이 관객들에게 전이되는 순간, 이 작품의 의미를 획책한다.

변대용_Nekton & Plankton_레진_가변크기_2008
그런데 무수히 많은 용기들과 특정한 조각 작품의 만남은 사실상 같은 층위의 문제를 건드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전혀 다른 층위의 작품들이 왜 한 자리에 놓여 있는 것일까. 아마도 이것이 변대용이 구성하고 있는 공간을 새롭게 보도록 만드는 힘이라고 볼 수 있다. 흰색 부직포 위에 함께 놓여진 조각들과 붉은 색을 입은 빈 용기들은 한 공간에 있지만, 조각 주위에 포진하기도 하지만 분할되어 있기도 하다. 빈 용기들은 조각을 돋보이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한다고 볼 수 있다.

변대용_Nekton & Plankton_레진_가변크기_2008
따라서 그의 작업에서 중점적으로 봐야 할 것은 익명인, 그럼에도 조각 작품에 비해 훨씬 자율적인 사물들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조각 작품들이 전통적인 조각의 조형언어와 정신분석학적인 병치를 통합시킨 것이라면, 이들 하나하나는 작품으로서 혹은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한 듯이 보인다. 그런데 오히려 작가의 고된 노동이 배제된 일련의 빈 용기들은 다시금 ‘작품’에 대한 경계를 의문에 부치게 된다. 또한 그것들은 개별적인 서사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인 형태를 구성할 때에만 의미를 발현한다. 만약 그들이 조각작품들을 좀 더 돋보이게 하기 위한 전시디스플레이를 위한 하나의 장치였다면, 무수한 아우성들은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익명의 소란스러움이 시장과 자본에 꽉 막힌 예술의 숨통들은 아닐까. 자기 완결적 몸과 서사를 갖는 조각 작품보다는 의미를 찾기 어렵지만, 그것 자체로 강렬함을 드러내는 것들, 이것들이 오히려 그가 구축한 세계가 여타의 조각전들과 구별지어지는 지점은 아닐까.

변대용_인공적인 흰색_레진_40×40×100cm_2008
분명 변대용은 일련의 전시를 통해 이전에 그가 구성해왔던 일련의 조각을 놓는 방식과는 변별지점을 마련했다. 작가는 자신의 주된 서사를 구축해 왔던 조각과 함께 설치작업을 믹스했다. 이러한 이중적인 결합은 때때로 조화라는 이름으로 포장될 수 있겠지만 오히려 완결된 서사를 구축하는 것이 어려워져버린, 그래서 관객들의 시선을 완전히 장악하지 않은 분산된 전시의 꼴을 만들어 놓았다. 불확실하고 불명료한 전시공간의 작품들을 그저 관조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만들어 놓은 그 길을 걸어보는 것은 어떨까. 세련된 작품과 전시공간의 딱딱함을 벗어던진 그 곳에서, 미술‘시장’의 활로 모색이 아니라 ‘미술’의 활로를 모색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 신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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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들의 산책_A Stroll of Painting Brushes
정경화展 / JUNGKYUNGHWA / 鄭景化 / painting
2008_1022 ▶ 2008_1028

정경화_필들의 산책Ⅰ(A Stroll of Painting Brushes)_143×219㎝ 한지에 수묵_2008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이미지 속닥속닥 Vol.071109d | 정경화展 으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8_1022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후원_한국문화예술위원회
인사아트센터
INSA ART CENTER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8번지 6층
Tel. +82.2.736.1020
www.ganaartgallery.com
필들의 산책-의경(意境)에서의 노님 ● 나는 현대미술을 보면서 곧잘『논어』의 “절실하게 묻고 가까운 곳에서 생각한다. 切問而近思”는 구절을 떠올린다. 그리고 종종 에세이를 쓸 때 이를 인용한다. 그것은 오늘날 현대미술이 가지고 있는 한계 때문인지 모른다. 현대미술이 비인간적인 상황으로 치달려 온 결과, 그 반성으로 근래에 와서 멀어졌던 대중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소통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미술이 대중과 소통을 강조하면서 거리를 좁히려고 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멀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나에게 현대미술에 회의를 들게 하는 것이다. 아마 겉으로는 소통을 내걸지만 밑에서는 자기만의 독백을 강조하여 차별화의 길로 계속 치달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현대미술의 문제는 재현이나 표현의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미술에 대한 태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언제가 정경화는 내가 인용한 공자의 말에 상당히 공감을 표시한 적이 있다. 이후 나는 그의 작품에 관심을 갖고 지켜보게 되었다. ●
정경화는 스스로 자신의 작품 과정에 대해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2001년 이후 자신의 작품은 새로운 경향으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이전의 “충실한 임모와 사생을 통한 실경 작업들”에서 무언가 “자신의 개성을 새롭게 표현하는, 미지의 세계를 찾아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자신의 작품 경향의 변화에 대해 말한 것 같지만, 사실은 미술사적인 경향에 대한 반성에서 일어난 것이다.

정경화_노란숲Ⅰ(Yellow Forest)_한지에 수묵채색_63×93㎝_2008
우리나라 한국화에서 90년대 이후 유행처럼 번진 진경산수에서 진경은 실경이나 사실주의로 치우치는 경향이 일어났었다. 즉 현대 진경(眞景)의 추구가 우리 자연에 대한 사실적 묘사에 치우쳐 그것에 대한 진실한 감성의 표출이 소홀히 되었다고 본 시대적 실천에 대한 반성의 결과인 것이다. 사실 진경은 사실주의와 거리가 멀다. 진실한 감성의 표출을 위해서는 한편으로 대상의 진실한 접근도 필요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대상의 왜곡, 단순화, 과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다만 대상의 묘사와 자신의 표현이 서로 충돌하는 가운데 서로 중화된 방법을 추구하되, 어디까지나 주체의 활동성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전통적인 동양화론에서 “비슷하면서 비슷하지 않는 가운데(似不似之間)” 주체성의 활성화를 강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 정경화의 작품은 2001년 이후 이러한 여정을 보여준다. <논과 밭-수묵의 표정>(2001), <숲-바람-숨결> (2003),<숲-부드러운 바람>(2005), <숲을 노닐다>(2007) 등 일련의 개인전에서 중심 표제를 통해 알 수 있듯, 자연의 형상과 자신의 감정의 표출을 아우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만 감정의 표출에 더 중심을 두었다. 서로 대립되어 있는 대상과 주체에서, 대상에로 쏠리면 주체가 움츠러들어 정취가 부족하고, 반대로 주체의 표현이 강조되면 감정의 방종으로 흘러 이을 묶어 보편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대상이 소홀히 된다. 정경화의 작품세계는 2001년 이전에는 오랫동안 대상의 충실한 묘사를 바탕으로 대상의 세계에 경도되었다면, 이 이후는 주체를 자연스럽게 표출하는 방향으로 전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 정경화가 이를 위해 나뭇가지나 죽필(竹筆)로 인한 용필법을 적극적으로 구사하였다. 그러나 이는 또 다른 조형적인 한계들과 부딪혀야만 했다. 그 자신이 경험적으로 인식하고 있듯, 나뭇가지는 강경하고 빠른 묘필을 구사하여 순간적인 표상력을 높일 수 있지만, 나뭇가지에 먹이 머물 수 있는 시간이 짧아서, 간헐적으로 호흡이 끊어진다는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습관적으로 나뭇가지를 더욱 빨리 급박하게 구사할 수밖에 없는데, 이렇게 되면 오히려 다시 화가의 의상(意像)에 대한 밀도를 떨어트리게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결과적으로 그림이 날리고 산만하며 거칠어지기 쉬운 것이다. 따라서 화가는 내면적의 의기(意氣)를 일관되게 흐르게 하기 위해서는 먹이 손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을 길게 해야 하는 해결책을 강구해야 하였다.

정경화_노란숲Ⅱ(Yellow Forest)_한지에 수묵채색_130×194㎝_2008
이것은 정경화에게도 해당되는 것이었다. 사실 그의 2001년 <논과 밭-수묵의 표정>에서 자신의 작품에서 습윤성(濕潤性)의 부족을 지적한 것도 이에 기인하는 것이다. ● 정경화는 나뭇가지보다 죽필(竹筆)에 치중하면서 해결책을 찾았다. 그러나 죽필(竹筆) 역시 나뭇가지에 비해서 호흡이 길고 먹의 습윤성이 뛰어날 수 있지만, 모필에 비하면 여전히 한계를 갖는다. 그러나 장점도 있다. 그것은 힘차고 적극적인 표현이 강조되며, 또한 선의 감각에서는 더 한국적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그의 죽필의 선은 신석기 시대 토기의 빗살무늬나 신라 토기의 형상에 사용된 선을 연상시키는데, 이는 한국미술의 특징 중 하나인 주저함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표출되는 “생명력”에 가깝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정경화는 죽필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 표현력에 상당히 애착을 갖고 작업을 하는 것 같이 보인다. ● 이어서 열린 개인전 <숲-바람-숨결>(2003), <숲-부드러운 바람>(2005), <숲을 노닐다>(2007)에서 그는 죽필에 의한 감성의 표현적 가능성에 더 역점을 두고 다양하게 시도하였다.

정경화_어떤공간Ⅶ(Some Space)_한지에 수묵채색_194×650㎝_2008
물론 감성은 독립적이라기보다 대상에 흥기되는 상호적인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한편으로 대상의 형상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다른 한편으로 감정의 일관된 활동을 강조한 죽필의 표현력을 높이려고 하였다. 다만 보기에 따라 주체의 표현에 치우쳐 대상의 묘사가 화면에서 병렬적, 평면적으로 구성되어 구체적이지 못한 것처럼 보이나, 이는 자신의 표현력을 위해 의식적으로 선택한 것 같다. 또한 이전에 한계로 지적된 습윤성은 발묵(潑墨)이나 파묵(破墨)으로 통해 보안하면서 발전적인 진취를 이루어 내었다. 다만 발묵의 용묵과 죽필의 용필의 관계가 다분히 의도적이어서 획일화 되었다는 점에서 여전히 극복해야할 문제로 남아있었다. ● 무엇보다 새로운 발전은 개인전 표제에 맞게 일련의 산책, 또는 유람에 따라 시각, 촉각, 청각 그리고 이를 포괄하는 몸각(body-sense)에 따라 표출되는 일련의 정서적 흐름을 죽필로 표현하고자한 화가의 의도가 충분히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조형적으로 상당히 성공적으로 보인다. 감정의 표출로 대상의 평면적 배열적 묘사로 인해 입체적이지 못함으로써, 감성이 질적으로 깊이가 약하다는 한계를 갖고 있음에도 말이다. ● 정경화는 이번 다시 <필들의 산책>이라는 표제로 개인전을 갖는다. 기존 작품들과 일관성을 가지고 있지만 조용한 변신을 시도하였다. 먼저 눈에 띠는 것은 공간(여백)의 활용, 발묵에 의한 색면의 강조, 그리고 구성과 표현에서 있어서 허(虛)와 실(實), 소(疎)와 밀(密)의 긴밀한 상호관계에 신경을 많이 쓴 것을 들 수 있다.

정경화_어떤공간Ⅴ(Some Space)_한지에 수묵채색_100×100㎝_2008
사실 이것은 이전 작품에서 보이는 한계 즉 감성의 질적인 깊이 부족과 관련된 것이어서, 필자로서는 정경화가 어떤 식이든 방법적 모색을 강구했을 것이라고 믿었던 결과이다. ● 또 다른 변화는 형상으로 회귀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이전의 형상과 다른 개념이다. 나 밖의 형상이라기보다 나 안의 형상 즉 의경(意境)의 표현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중국 명나라 화론가 이일화(李日華)는 산수화의 세계를 세 가지로 나누었다. 첫째가 직접 거주하는 곳, 둘째가 눈으로 보는 곳, 셋째가 의(意)로써 노니는 곳이다. 정경화의 경우 이전의 작품들이 많든 적든 첫째와 둘째에 머물러 있었다면, 이번 개인전은 “의(意)로써 노니는” 세계 즉 의경(意境)의 표출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 의경은 “용필로 귀결되어” 표현된다. 그래서 작가는 이번 주제를 “필들의 산책”이라고 한 것이 아닐까. ● 그런데 이 의경(意境)은 작가의 경험이 확충되고 창작실천이 강화되어야만 자신 있게 구현할 수 있다. 물론 그의 왕성한 작업의욕과 그동안의 작업양의 결과로 나온 것이지만 아직 작품의 포괄적인 감동이 모호하게 보인다. 그럼에도 이전의 작품에서 문제로 남았던 여러 가지 회화적인 한계를 충실하게 극복하여 가는 것이 너무나 좋다. 발묵의 용묵과 죽필의 용필이 조화되고, 공간(여백)이 살아남으로써 허(虛)가 실(實)을 규정하고 실(實)이 허(虛)를 활성화 하는 역동적인 관계가 엿보인다. 이것이 앞으로 더욱더 희망적인 작업과정을 엿보게 하는 것이다. ● 그러나 새롭게 주의해야 할 점도 있다. 그것은 자칫 의경을 강조하다보면 감정의 구체성을 잃고 추상적인 것으로 흘러버릴 소지가 많다는 것이다. 이일화(李日華)가 강조한 의경은 눈으로 보고 직접 거주하는 세계를 부정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발전하는 것이다.

정경화_어떤공간Ⅰ(Some Space)_한지에 수묵채색_194×650㎝_2008
“나는 마음을 배우고, 마음을 눈을 배우고, 눈은 화산을 배운다(吾師心, 心師目, 目師華山)”는 명나라 이론가 왕리(王履)의 주장으로 이를 보충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의경은 구체적인 자연을 초월하지만 또한 이에 근본하고 있다는 모순을 앉고 있는데, 분명한 것은 의경의 생동성은 자연과 긴밀한 관계에서 이를 반영하는 데에서 나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물론 정경화의 작업 과정에서 볼 때, 그의 의경은 구체적인 자연의 충실한 묘사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손(나)-마음-눈-화산(자연 대상)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에서 마음은 대상에 벗어나려는 방심이 있을 수 있고, 대상은 마음을 속박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긴밀한 배분과 조화가 필요로 한다. 이것은 아마도 작업의 일반적인 자세를 말하는 것일 수 있다. 따라서 화가가 작품에서 가지는 긴장감은 언제나 마음 놓을 수 없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바로 화가 자신의 문제이니 이보다 가깝고 절실한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공자가 말하는 “절실하게 묻고 가까운 곳에서 생각한다.”는 것이 이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정경화의 작품에 대한 기대가 자꾸 가는 이유는 물론 진경을 진실한 감성의 유동적인 표현으로 해석하여 의경으로 나아간 것도 있지만, 그가 작업에서 “절실하게 묻고 가까운 곳에서 생각하는” 자세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조송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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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ummer wasting_여름에 버린 시간들
이버들이展 / BUDULLEELEE / photography
2008_1017 ▶ 2008_1106 / 일요일 휴관

이버들이_green moss_C 프린트_24×24㎝_2008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이미지 속닥속닥 Vol.070722e | 이버들이 개인展 으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8_1017_금요일_06:00pm
관람시간 / 월~금요일_10:00am~06:00pm
토요일_01:00pm~06:00pm / 일요일 휴관
스페이스 크로프트_SPACE CROFT
서울 종로구 평창동 98-3번지
Tel. +82.2.391.0013
www.spacecroft.com
올해 여름, 이버들이는 알고 지내던 인디 밴드의 베이시스트, 아티스트, 가수의 남자 친구 등을 데리고 서울의 근교로 간다. 장마가 막 지난 여름의 숲 속, 폐허가 된 수영장,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창고에서 작가는 이 남성들의 옷을 벗겨 사진 촬영을 한다. 이 사진 속에서 모델들은 화분을 머리에 써보기도 하고, 창고의 지붕 위에서 뛰어다니기도 하며, 나무 위에 올라가 서있기도 한다. 이 모델들이 누드에 응하게 된 이유 또한 다양하다. 군대가기 전 추억이 되기도 하고, 20대의 기억이 되기도 한다. ● 『A Summer Wasting』展 에서 이버들이는 이전의 작품인 20-30대 여성에 관한 사진에서 방향을 바꾸어, 남성을 향한 관음증과 진부한 누드 사진을 섞는 위험한 경계를 실험한다. 작가가 찍는 20대 초반의 남성 누드 모델은 성적이고 사회적 의미를 담는 함축된 존재이다. 작가는 야외에 놓여진 남성 모델이 전달하는 에로티즘을 조용하게 조율한다. ● 본 전시가 보여주는 것은 여자 사진 작가가 은밀하게 품었던 마른 소년의 몸을 가진 20대의 남성에 대한 페티쉬이자 판타지의 노출이다. 본 작업들이 만들어지는 과정에는 연극적인 상황들이 존재한다. 작가는 야외에서 남성 모델의 옷을 벗기고, 그들의 몸을 사진 촬영을 한다.

이버들이_play stick_C 프린트_20×20㎝_2008

이버들이_play plant_C 프린트_20×20㎝_2008
공공의 장소에 놓여진 청년들의 누드 사진을 바라보는 옷을 입은 관객들은 당황하게 된다. ● 왜 우리는 야외에 있는 나체를 볼 때 불편한가. 나체로 옷이 벗겨지는 것은 문명사회에서 주체를 박탈한 자아의 상징이다. 즉, 나체가 된다는 것은 사회와는 단절된 상태로서의 불완전한 자아를 노출하는 것이기 때문에, 관객은 누드 사진을 공공 장소에서는 똑바로 바라보지 않는다. 이러한 당혹감은 작가가 폐 수영장의 샤워실에서 누드를 가까이 찍은 사진들에서 여실히 나타난다. 에서 벗은 남성의 상체는 가냘프기만 하다. 사진 속 모델의 카메라를 향한 시선은 계속적으로 흔들리며, 그를 둘러싼 콘크리트 벽과 천장은 금방 무너져 내릴 것만 같다. 사회적 패턴에서 벗어난 불연속적 존재로써의 인간이 드러나는 것에 관객은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 작가는 폭력적이지 않은 시선의 거리두기를 통해 에로티즘과 외설의 미묘한 경계에 선다. 외설이란 시스템 속 안정되어 있는 개인성의 상태를 뒤엎을 때 발생하는 편하지 않은 우리 자신의 상태이다. 여기에 성적인 행위가 따른다면, 외설은 완성된다. 대상을 향한 집착적이지 않은 듯한 작가의 시선을 통해 관객은 『 A Summer Wasting』展을 불편하지만, 그다지 위험하지 않은 에로티즘으로 이해하게 된다. ‘play_plant’에서 누드의 남성 모델은 모자처럼 보이는 파란 화분을 머리에 뒤집어 쓰고 숲 속을 뛰어다닌다. 이러한 연극적 상황을 통한 모델과의 거리두기는 나무 사이로 보이는 남성의 누드를 바라보는 관객에게 외설이 흔히 상징하는 부정적 거부감을 차단한다. ● 작가는 에로티즘에서 여성이 희생자로, 남성이 주체로 나타나는 관습적 시선의 전환하여, 관음증을 여성의 시선으로 해석한다. 미술사에서 피카소로 흔히 상징되는 남성의 지배적 시선을 넘어서, 작가는 자신의 페티쉬인 마른 남성의 몸을 탐구한다.

이버들이_green portrait_C 프린트_24×24㎝_2008

이버들이_play ramose_C 프린트_20×20㎝_2008
관습화된 시선을 전복함으로써, 남성 모델이라는 대상은 무언가 편하지 않은 이상함과 외로움을 느끼게 된다. 이를 바라보는 관객은 동정심을 느끼며, 모델 위에 존재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 전시 타이틀에서 말해주듯, 왜 남성 누드를 여름 내 촬영하는 것이 소모적인(wasting) 행위인가. 에로티즘은 생산과 축적의 목적이 배제된, 소비의 논리에 기반한 욕망의 가치관이기에 기독교에서는 죄악으로 단정짓는다고 바타이유는 말한다. 즉, 생산이 아닌 욕망을 목적으로 성을 탐닉한다는 것은 금기가 된다. 욕망의 대상인 소년과 청년의 경계에 있는 남자의 누드를 찍는 데 보내는 여름은 버린 시간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이러한 소모는 곧 청춘의 사라짐, 고독과 죽음으로 우리를 이끈다. ● 『 A Summer Wasting』展에서 이버들이는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청춘의 사라짐과 그로 인해 야기되는 쓸쓸함의 감정들에 주목한다. 작가는 우울, 고독, 허무 등 인간의 실존에 관한 고민을 청년이 되기 전 20대 초반의 가냘픈 남성의 몸에서 발견한다. 이러한 순간을 이버들이는 몽환적이며, 선선하게 담아낸다. ■ 양지윤

스페이스 크로프트 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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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aison-Reconstruction
박대성展 / PARKDAESUNG / 朴大成 / installation
2008_1022 ▶ 2008_1103 / 일요일 휴관

박대성_PART III Liaison-Room_123×142×12cm_혼합재료_2008
초대일시_2008_1025_토요일_05:00pm
관람시간 / 11:00am~08:00pm / 일요일 휴관
갤러리 무이_GALLERY MUI
서울 서초구 서초동 1658-14번지 무이빌딩 1층
Tel. +82.2.587.6123
cafe.naver.com/gallarymui
생존의 흔적, 기억의 그림자, 그리고 삶의 형식에 대한 은유-지각, 생태, 그리고 생명력 ● 우리의 지각은 삶을 경험하는 방식을 규정한다. 우리가 바라보는 세계는 투명한 중립적인 세계가 아니라 생존 환경에 의해 굴절되고 취사선택된 가치-지향적 세계이다. 인간을 포함한 동물들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요소들 예컨대, 먹이감이나 천적 등에 집중하고, 생존과 무관한 외부 자극에는 무감각하게 반응한다. 우리의 지각은 우리의 삶의 지평을 기반으로 형성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환경에 대한 적응이 생존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이라면 생태학적 요소가 지각의 가장 밑바닥에 자리 잡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특히 익숙하지 않은 환경을 접하게 되면, 세상을 바라보던 자신의 기존 지각 방식이 낯설게 느껴지고, 지각의 대상이 아니라 지각 방식 자체에 대해 주목하는 경우가 있다. 우리는 자신만의 지각의 특이성을 경험하고, 자신의 고유한 지각을 통해 세상과 대면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 타자와는 다른 나의 존재감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다. ● 박대성은 ‘새 둥지’, ‘판잣집’, 그리고 ‘집의 평면도 모형’을 통해 생태학과 지각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는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생존의 흔적과 지각 방식을 형상하여 ‘주체와 환경 사이의 보이지 않는 영역’에 대해 질문을 하고 그 답을 제시하려고 한다. 그의 작품은 보이지 않는 ‘주체와 환경의 관계’를 구현하고 있고, 이것을 통해 우리가 각자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확신하게 만든다.

박대성_PART III Liaison-Room_혼합재료_40×60×10cm_2008

박대성_PART II Liaison-Construction Work_나무_40×60×10cm_2008
생존의 흔적으로서 새둥지 ● 박대성은 새둥지의 구축 과정을 통해 삶의 흔적을 구현하고 있다. 그는 일정한 길이의 나무막대를 하나씩 포개어 쌓아가는 방식으로 실제의 새둥지와 유사한 형태의 구조물을 실제 벽면에 구축해 놓고 있다. 언 듯 보면 실제 새둥지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일정한 크기의 나무 막대기를 규칙적으로 포개어 쌓아 올려놓고 있다. 그는 새가 자신의 둥지의 재료를 하나씩 물어와 오랜 시간동안 세심하게 구축한 과정을 형상화하고 있다. 또한 그 구조물의 가운데를 일정 정도 비워놓음으로써 그 곳에 둥지를 튼 새의 크기와 모양을 가늠할 수 있도록 제작해 놓았다. 이 작품은 새와 그 주위 환경이 상호 관계를 맺는 기나긴 시간의 축척 과정을 보여주면서 새가 외부 세계와 연결되는 방식을 우리에게 은유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새는 생존을 위해서 자신의 신체적 능력이 허용하는 한 견고한 구조로 자신의 둥지를 만들려고 한다. 그러나 그 방식은 외부의 환경에 적응하는 방식을 취할 수밖에 없다. 새는 자신의 능력이 허용하는 크기의 재료를 사용하고 또한 그 환경에서 이용 가능한 재료를 사용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박대성은 새 둥지 형태로 나무 막대를 구축함으로써 주체와 환경과의 관계를 성찰하고 있다. 나무의 일련의 규칙적인 구축의 과정과 그 정교한 형태가 생존의 흔적을 생생하게 확인하게 만든다.

박대성_PART II Liaison-Reconstruction_나무_47×46×209cm_2008

박대성_PART II Liaison-Mediation_혼합재료_50×60×28cm_2008
생태학적 모델로서 판잣집 ● 판잣집 형태의 구조물은「새둥지」가 제기하고자 했던 생존의 흔적의 문제를 더 적극적으로 제기하고 있다. 새둥지 형태의 조형물이 주체와 환경의 투쟁과 화해의 과정을 나무막대들의 구축을 통해 보여주는데 주력했다면, 다양한 형태로 축소된「판잣집」은 생존 환경에 반응하는 주체의 개별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생태학적 측면에서 보면「새둥지」와「판잣집」은 동일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새가 자신이 속해 있는 환경 속에서 이용할 수 있는 재료를 하나씩 날라 새집을 구축하듯이, 판잣집에 살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은 도시의 버려진 재료들을 하나씩 실어 날라 자신이 쉴 공간을 구축한다. 판잣집의 형태는 세계 어느 곳이나 비슷한 형태로 제작된다. 새집처럼 지지물을 이용해 한 축이 형성되면 그것이 안정된 형태이든 아니든 간에 판잣집 재료가 발견되는 대로 보충하고 구축하는 형태로 제작이 된다. 판잣집은 주변의 것들, 곧 버려진 것들로 구축된 것이고, 그 재료의 변화가 판잣집의 형태를 규정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판잣집이 외부 환경의 변화에 반응하면서도 생존 주체마다 각기 다르게 제작된다는 점이다. 동일 지역의 판잣집들은 동일한 재료로 구성되었지만 세심하게 살펴보면 사람의 얼굴처럼 각기 다른 형태로 제작되었다. 판잣집들은 외부 환경에 적응하는 각각의 개별 주체의 다양한 반응을 보여주고 있다. 동일한 유형의 재료로 형태에 대한 구상 없이 재료를 구축하는 방식으로 제작되었지만 주체의 개성이 곳곳에 묻어나온다.「판잣집」은 환경에 적응하면서 주체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판잣집」들을 자세히 보라! 주체가 환경과 조우하는 ‘접점’ 혹은 주관이 세상과 소통하는 ‘통로’에 해당하는 각기 다른 형태의 창들이 뚫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은 외부 환경에 반응하는 개별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결국 이것은 외부 조건을 수용하고 그에 반응하는 우리의 ‘몸’에 대한 은유라고 할 수 있다.

박대성_PART II Liaison-Reconstruction_나무_47×46×209cm_2008

박대성_PART II Liaison-Mediation_혼합재료_50×60×28cm_2008
삶을 지각하는 틀로서 집의 구조: 기억의 그림자 ● 가장 최근에 제작된「Room」 시리즈는 앞에서 언급한 두 번째 시리즈인「Construction Work」 작품, 즉「판잣집」에서 풍겨 나오는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뉴앙스를 억제시키고, 주체와 환경의 투쟁과 화해의 공간으로서 집의 생태학적 의미를 강화시켜준다. 작가는 한개 혹은 두개의 방으로 구성된 평면도 형태의 조형물을 벽에 붙여 놓고 있다. 이것은 앞의 두 시리즈의 작품을 이해하지 못했다면 단출한 집의 평면도 이상의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게 구성되었다. 이것은 그「판잣집」의 내부라고 할 수 있다.「판잣집」은 외부 환경에 대한 반응의 외형적 결과를 강조한 것이라면,「Room」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반응의 내면적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 작가는 이전에 이사를 많이 다녔던 경험을 이야기 하고 있다. 이전의 공간에 대한 기억이 새로운 공간을 접했을 때, 그 경험들이 서로 동화되지 못하고 그 각각의 기억이 중첩된 형태로 쌓여 간다고 술회하고 있다. 외적인 상황에 대한 적응 과정으로 형성된 집의 공간 구조는 주체의 삶에 체화되어 그 방식의 경험을 익숙하게 만든다. 그런데 주체가 이와 다른 환경을 접했을 때 주체는 비로소 그 경험 방식을 그 환경에 구속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주체는 다른 공간을 낯설게 느낀다는 것을 의식하게 되고, 지각하는 익숙한 경험의 틀이 있었다는 것을 의식하게 된다. 공간의 구조 자체는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틀이 된다. 은 생존 환경을 체화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개별 주체의 고유한 지각 방식을 평면도의 형태로 구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박대성_PART I Projet de-intervention_나무_2008

박대성_PART I Projet de-intervention_나무_2008
투쟁과 화해의 공간으로서 집: 살아있음에 대한 은유 ● 박대성의 세 가지 시리즈는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새둥지」시리즈를 보지 못했다면 그의「판잣집」시리즈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판잣집」시리즈를 보지 못했다면 그의「Room」시리즈에 접근하기 힘들 것이다. 또한「Room」시리즈가 없었다면 관객들은「판잣집」시리즈에서 판잣집의 사회적이고 역사적 함의를 찾는데 집중했을 것이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주체가 환경에 적응하고 그 속에서 자신만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극적인 공간이 바로 집이요, 둥지이다.「새둥지」시리즈에서는 생태학적 적응 과정을 새 둥지로 구현했고,「판잣집」시리즈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주체가 동일 환경에 적응하는 다양한 모습을 형상화했다. 또한「Room」시리즈에서는 환경에 반응하는 주체의 경험의 구조를 보여주고, 환경이 그 주체의 정체성을 규정해 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박대성은 집의 구조물을 통해 타자와 투쟁하고 화해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주체의 생존 공간과 방식을 구현하고 있다. 환경에 적응해 가면서 자신의 방식대로 생존 방식을 찾아가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생존 주체의 생명감을 강하게 전달 받는다. . ■ 장민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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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환과 풍자
이석금展 / LEESOEKGEUM / 李石琴 / sculpture
2008_1027 ▶ 2008_1102

이석금_新윤복뎐_혼합재료_45×30×20cm_2006
초대일시_2008_1027_월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갤러리 화인_GALLERY FINE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중2동 1511-12번지 2층
Tel. +82.51.741.5867
www.galleryfine.net
그의 작품들은 너무도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기에 아무래도 우리는 이 인간군상들이 벌이는 한판 굿판에 합류하는 편이 차라리 나을 것 같다. ■ 김윤수

이석금_新윤복뎐 부분-1_혼합재료_45×30×20cm_2006

이석금_新윤복뎐 부분-2_혼합재료_45×30×20cm_2006
판소리건, 시나위건, 탈판이건 간에 우리 민족의 민중미학적 최고원리는 '그늘'이다. '그늘'은 삶의 신산고초를 마다않고 정면으로 부딛쳐 살아온 사람, 예술가로서의 고단하고 가난한 삶에서도 피나는 수련과 독공을 끝끝내 이겨낸 사람에게만 깃드는 독특한 능력이다. 이것 없으면 자고로 예술로 쳐주지 않는 것이 우리 민족의 민중미학적 전통이다. ● '그늘'은 그 스스로 훤하면서도 침침하고 이승이면서 저승이고 나이면서 너이고 눈물이면서 웃음이다. 소리에서는 이것의 제목을 '수리성'이라 하고 시나위에서는 이것의 절정을 '농현'에서 찾지만 탈에서는 이것에 달통한 꾼을 두고 무엇이라 할는지? ● 아마 '석금'이라고 새로이 이름지어 불러야 하지 않을까? ● 그만큼 이석금은 '그늘'에 투철한 탈 예술가다. 그를 내가 처음 본 것은 부산에서다. 또 그때 내가 처음 본 것도 그 사람됨 속에 들어있는 '그늘'이었다. ■ 김지하

이석금_新옹녀뎐_혼합재료_45×30×33cm_2006
이석금의 어떤 종이 토우작품은 미감이 자유롭기도 하고 또 훨씬 깊기도 하다. 말하자면 속울음이기엔 더욱 처절한 비장이고, 겉웃음이기엔 촌철살인하는 풍자의 작품이 번쩍 눈에 띄는 것이다. ■ 채희완

이석금_新옹녀뎐 부분-1_혼합재료_45×30×33cm_2006

이석금_新옹녀뎐 부분-2_혼합재료_45×30×33cm_2006
'신명과 한의 공유결합'이란 내면의 걸작들을 창작했고, 또 내가 좋아 흙으로 빚은 토우(土偶)를 석금은 종이로 빚은 토우를 개발해서 세인을 놀라게 한 것이 어쩌면, 스승과 제자 아니 부자간에 그렇게도 공통될 수 있을까라고 고맙게 느끼는 한편, 적실한 나의 후계자를 얻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 중곡 천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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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녀왔습니다
김한나展 / KIMHANNA / 金한나 / painting
2008_1028 ▶ 2008_1123 / 월요일 휴관

김한나_토끼를 찾습니다_캔버스에 유채_25.3×20.3cm_2008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김한나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8_1028_화요일_06:00pm
관람시간 / 화~일요일_11:00am~07:00pm / 월요일 휴관
아라리오 서울_ARARIO SEOUL
서울 종로구 소격동 149-2번지
Tel. +82.2.723.6190
www.ararioseoul.com
아라리오 갤러리 서울은 김한나의 전시를 선보인다. 이번 전시는 2006년 대안공간 루프에서 신인작가 발굴전의 일환으로 기획되었던 김한나의 첫 번째 개인전과 2007년 아라리오 갤러리 베이징에서의 개인전 이후 세 번째 준비된 개인전이다. 조용하고 깜찍한 소녀감성의 작가 김한나는 유화 작품과 드로잉, 그리고 조각을 통해 자신만의 눈에 보이는 토끼와의 일상의 순간들을 표현한다. 김한나의 작품 속에는 단발머리를 한 작가 자신의 모습인 한나와 토실토실한 흰 토끼가 등장한다. 토끼는 한나의 상상 속 가장 절친한 친구이자 그녀의 분신이기도 하다. 작가의 노트에서처럼 한나와 토끼는 밥도 같이 먹고, 수업도 함께 듣고, 둘이서 인형놀이도 하고, 빈집을 지키기도하고, 돈까스도 튀기고 만두도 만드는 둘도 없는 짝꿍이다.

김한나_토끼야 토끼야_캔버스에 유채_116.8×72.7cm_2008

김한나_한나야 한나야_캔버스에 유채_10.2×10.2xm_2008
‘다녀왔습니다’ 라는 제목을 내세운 이번 전시는 지난 전시들에서 보여준 한나와 토끼의 여유롭고 한가한 일상의 표현과 달리 한나와 토끼가 잠시 헤어졌던 애절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토끼를 찾습니다’ 라는 미아 찾기 광고를 보는 듯한 작품에서 보는 사람들은 미소를 짓겠지만 정작 한나는 목을 죄는 듯한 괴로움과 함께 애타게 토끼를 찾고 있다. 지금까지 한나와 토끼의 귀엽고 순수한 모습만을 볼 수 있었다면 이번에는 이별 후 서로를찾기 위한 노력과 겪는 고통을 보면서 한나와 토끼가 단순한 친한 친구가 아닌 토끼가 한나에게 없어서는 안될 존재임을 알게 된다. ‘다녀왔습니다’ 전은 페인팅과 조각뿐 아니라 애니메이션과 소품들이 더해졌고 1층과 2층으로 구성되어 있는 전시장의 구조를 이용해 토끼와 한나 개인만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등 한층 많은 얘깃거리를 가지고 구성된다.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되는 한나와 토끼가 헤어지게 된 이유는 작가의 새로운 시도인 애니메이션 안에서 표현된다. 헤어진 동안의 외롭고 괴로웠던 나날들, 재회 후의 이야기 등 우리는 다시 한 번 한나의 동화 속으로 빠져들게 될 것이다.

김한나_괜찮지?_캔버스에 유채_22.2×27.5cm_2007

김한나_금의환향_캔버스에 유채_193.9×130.0cm_2008

김한나_너무 좋아_캔버스에 유채_80.3×60.6cm_2008
이번 전시에서는 김한나의 유화와 드로잉을 비롯하여 이미 잘 알려진 그녀의 사랑스러운 조각과 새로이 시도한 애니메이션까지 약 40여 점 정도의 신작들이 전시될 예정이다. 그녀만의 삶에 대한 유머, 소심함, 따뜻함 그리고 외로움을 담아낸 동화와도 같은 이번 전시를 통하여 관람객은 각자 자신의 성장기 시절 추억들을 되돌아 볼 것이며, 성장통과도 같았던 경험들과 만남들, 헤어짐 들을 통하여 어른이 되어가는 자신들의 모습을 재발견할 것이다. ■ 아라리오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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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ust in Me
이유미展 / LEEYOUMEE / 李裕美 / sculpture
2008_1017 ▶ 2008_1114

이유미_눈물_종이,칠 작업_가변설치_2008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이미지 속닥속닥 Vol.060924a | 이유미 조각展
으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8_1017_금요일_06:00pm
관람시간 / 평일_10:00am∼07:00pm
토요일_09:00am~06:00pm / 일요일_10:30am∼06:00pm
갤러리 세줄_GALLERY SEJUL
서울 종로구 평창동 464-13번지
Tel. +82.2.391.9171
www.sejul.com
‘유미가 내민 손바닥에는 이렇게 씌여져 있었다.’
너를 믿었지만,
불길한 징조였을까
별로 좋지 않아
우리는 마음속에 남아 있는 잔여물을 안고 살아간다. 그 이유는 사람들의 마음은 말로 다 표현 되지 못하고 그 말은 마음을 다 전달하지 못한다. 그리고 마음속에 남아 있는 것은 타인들과 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합일을 보지 못한다. 현대의 사유가(思惟家) 들은 말로 전달되지 못하고, 끊임없이 이동하고 움직이는, 표현되지 못하는 마음의 정체를 문학공간을 통하여 해명해 가는데, 이유미 작가는 조각 작품으로 그런 마음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 상념이 가득한 공간에서 현실의 삶을 멈춘 듯이 간절하게 말을 한다. ‘나를 믿어줘’(Trust in Me) 이 말은 너무나도 절실하기에 목에 걸린 외침, 들리지 않는 말이다. 타자의 마음과 일치 하리라고 믿고 다가섰지만 바라보고 있는 것은 허상이다. 나는 너에게 너도 나에게 낯선 타자들 일 뿐이다.

이유미_나의 고통이 나무가 되어_종이,철,진주,산호,원석_가변설치_2008

이유미_어디로 가나_종이,철,자석,금박_가변설치_2008
이유미_저 별은 나의 별_진주,인조진주,스테인레스 스틸_가변설치_2008
이유미 작품이 우리의 마음을 끄는 것은 상처를 치유의 과정으로 곧장 가지 않고 우회하여 동요하는 내면의 보편성을 자기 성찰적인 방법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너를 믿고 나를 믿어달라고 손을 내밀지만 서로 엇갈려 이해 받지 못한다. 믿음에 대한 책임지지 못한 미안함, 버림받았다는 마음의 상처들은 깊숙한 곳에 남아 자국을 남긴다. 이처럼 소통되지 않아 상승하는 좌절과 상처, 그로 인한 술렁이는 마음의 공간을 구현하는 내면의 보편성을 스스로의 삶에서 목격하는 것이다. 너와 나의 보편성, 의미가 무한한 동시에 완전히 소진 되어 버린 마음의 빈 공간을 우리 앞에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유미_이 꽃이 지기 전에_종이,철,금박,산호,자석_가변설치_2008
작가는 작품을 통해서 가장 깊숙한 마음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려운 감정이나 허약함 그리고 은밀한 마음이 들킬까 염려 되어 깨알 같은 글씨를 뒤집어쓰고 스스로도 읽어내기 힘든 작업 노트 속에서 작품을 구상해 간다. 파편처럼 흩어진 낱말들, 고뇌에 찬 문형들은 날마다의 삶을 암호처럼 숨긴다. 이처럼 이유미 작가는 승화 되지 않고 남아 있는 마음의 기록들을 은유적으로 작품화 시킨다. ●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한 인물들은 여성인지 남성인지, 아이인지 어른인지 정체 없는 사람으로만 보이기를 바랬던 것은 오직 마음 그 자체를 보여 주려는 작가의 의도로서 성도 부여하지 않았고 나이나 어떠한 구분도 하지 않은 마음을 이야기 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유미_믿어줘_종이,철,자석_가변설치_2008

이유미_킁킁킁 일어나…_종이,철_가변설치_2008
그와 마찬가지로 검정개와 화분, 별 또한 동물이건 식물이건 무생물이건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는 은유적인 대상들이다. ● 작가가 다루는 재료 또한 오랜 작업시간을 요구하는 종이작업으로 노동집약적인 과정을 보여준다. 그것은 마음을 이야기 하면서 마음을 닦는 자기 성찰적인 수행의 과정처럼 보여지기도 한다. 그리고 이번 전시에는 진주로 만들어진 별자리와 자개로 만들어진 화분들을 볼 수 있다. 상처를 안고 탄생한 진주(Pearl)와 ‘진주의 어머니’인 자개(Mother of Pearl)는 작가가 표현하는 상처와 좌절로 인한 상심한 마음이 그를 더 크게 만들 수 있는 것처럼 진주나 자개가 갖는 태생적인 의미가 그의 작업의 내용과 맞물려 배가 시키고 있다. ● 눈물의 씨앗인 진주로 만들어진 북두칠성을 보며 조각배를 타고 화분을 들고 멀리 길을 떠나는 삶의 모습이 이유미 작가의 모습처럼 어디로 갈지 앞으로의 행보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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