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 SLEEP, HAVE VISIONS
박진아展 / PARKJINA / 朴眞雅 / painting
2008_0925 ▶ 2008_1018 / 일요일 휴관

박진아_긴 저녁_the long evening_캔버스에 유채_168×180cm_2007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이미지 속닥속닥 Vol.070524f | 박진아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8_0925_목요일_06:00pm
관람시간 / 월~토요일 10:00am~06:00pm / 일요일 휴관
원앤제이 갤러리_ONE AND J. GALLERY
서울 종로구 가회동 11-9번지
Tel. +82.2.745.1644
www.oneandj.com
일상적 현실이 모습을 드러낸 유일한 순간 ● 당연한 이야기지만, 어떤 작품을 감상할 때 우리는 그것이 ‘재현하는 내용’과 ‘내용을 재현하는 방식’을 동시적으로 인식한다. 이 중에서 상대적으로 쉬운 것은 재현하는 내용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이 의식할 수 있는 관습적 체계 안에서 모든 것이 이뤄진다. 감상자는 재현자의 탈주를 예방하고, 그곳에서 안도한다. 그러나 중심을 이동 시켜 ‘내용을 재현하는 방식’에 방점을 찍으면 상황은 달라진다. 관습체계에 머무르고 있던 요소들이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탈주를 꿈꾼다. 재현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과 전달하지 않고자 하는 작품의 무의식이 ‘내용을 재현하는 방식’에 나타난다. 재현자와 감상자의 미묘한 불협화음은 여기서 발생한다. 감상자의 인식 바깥에 존재하는 것을 재현자가 작품에서 환기 시킬 때, 자신의 인식의 바깥을 바라봐야 하는 감상자는 불안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곳에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곳에 작품의 본래적 의미가 기거(寄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박진아의 작품으로 눈을 돌려보자.

박진아_마지막 한 입_everybody's leaving_캔버스에 유채_225×155cm_2008
1. 재현하는 내용 ● 무엇을 볼 수 있을까? 일단, 특정 공간(야외, 파티, 밤의 공원, 전시장)에 놓인 사람(들)이 보인다. 그들은 특별한 행동을 하고 있지 않다. 잠시 잠을 자거나, 무언가를 먹는 순간에 있거나, 우두커니 서 있거나 앉아 있다. 혼자 있을 때에도, 사람들이 많을 때에도 그들은 그냥 그렇게 특별하지 않은 존재로 공간에 놓여 있다. 그들은 작가의 주변 인물들로 특정한 누군가를 지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 마저도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행동을 보여주고 있는 ‘어떤 인물’에 지나지 않는다.

박진아_프로젝터 테스트_Projector Test_캔버스에 유채_200×245cm_2008
2. 내용을 재현하는 방식 ● 무엇을 볼 수 있을까? 캔버스 위를 빠르게 지나간 붓의 흔적들은 대상을 세세하게 묘사하지 않고 압축적으로 제시한다. 오히려 대상은 화면에 어눌하게 안착해 있다. 재현된 대상에게 향할 수 있었던 시선의 지향점을 붓의 흔적들이 독차지한다. 그렇다고 대상을 무의미한 존재로 환원시키지도 않는다. 분명 대상은 세세한 묘사가 따르지 않지만, 순간의 기억과 감정을 담아내듯 빠르게 지나간 붓질, 그것들이 중층적으로 쌓이면서 만들어 놓은 색과 톤, 그리고 화면의 구성이 대상을 담담하게 그러나 더욱 명료하게 재현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작가의 시선이다. 작가는 대상과 객관적 심리적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그는 철저한 관찰자 시점에 놓여 있다. 주변 인물, 그리고 그들과 어울리고 있는 시간을 담아내면서도 말이다. 화면 속 인물들은 시선을 공유하지 않는다. 그들은 개별자로서 자신의 일(특별하지 않은 일)에 충실하고 있을 뿐이다. 사람들의 왁자함으로 가득한 공간을 기표로 사용하고 있지만, 대상들은 외로운 섬과 같이 다른 대상들과 분절되어 있다. 주변 인물, 그리고 그들과 어울리고 있는 시간을 담아내면서도 말이다. 즉, 그는 대상과 대상, 그리고 그들의 관계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만들고 있는 정서적.심리적 서정성의 세계를 화면에 재현하고 있다. (「문탠(Moontan)」 시리즈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동일한 시간에 동일한 장소에서 동일한 행동을 하고 있으나, 이들의 행동은 하나로 모아지지 않는다. ‘동일한’이라는 수사는 ‘상이한 혹은 개별적’이라는 수사로 대체된다. 그러면서 재현되는 것은 대상 자체가 아니라 대상들의 바깥이다. 그리고 다시 바깥은 대상으로 침투하여 대상을 재현한다.)

박진아_그랜드피아노_Grand Piano_캔버스에 유채_200×250cm_2008
EAT, SLEEP, HAVE VISIONS. ● 박진아의 그간의 작업에서 ‘재현하는 내용’과 ‘재현하는 방식’은 일관되게 지속되고 있다. 변화가 있다면, 분할된 화면에서 하나의 화면으로 옮겨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2개 또는 4개의 화면에서 하나의 화면으로 옮겨왔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전 개인전 제목(「여가(餘暇)」, 「Excursion」)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사회적 생산체계에서 무의미한 행동을 작업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것들은 특히 화면에서 미묘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인물의 행동에 의해서 구체성을 지닌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4개의 화면은 시간의 차이뿐만 아니라 다양한 구성과 붓 터치를 통해 회화적 차이를 드러내기에 적합했다. 그들은 하나이면서 미묘한 차이(단순히 시간뿐만 아니라 회화적인 측면에서)에 의해 하나가 아니다. ● 분할된 화면은 「문탠(Moontan)」연작에서 하나로 합치된다. 가운데 펼쳐져 있는 돗자리가 상징하듯 그들은 하나의 목적으로 이곳에 모였다. 그러나 박진아가 포착한 그들의 모습은 산만하다. 각자가 자신의 소소한 일에만 몰두하고 있다. 분할된 화면에서 볼 수 있었던 미묘한 차이들이 한 화면에서 다른 인물들을 통해 조합된다. 그러기에 이들의 모습은 중심에 있는 돗자리에 모이지 못하고 그 주변을 부유하고 있다. 이곳을 찾은 소기의 목적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문탠(Moontan)」에서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어두운 배경은 또 하나의 의미를 획득하고 있다. 어두운 배경은 주변부를 차단하면서 이 상황 자체에 주목하게 한다. 인물들이 중심에서 개별적으로 존재하듯이, 이 공간 역시 전체의 그 어떤 곳에서 떨어져 있는, 겉돌고 있는, 부유하는 공간으로 설정된다.)

박진아_남자와 소년 01/2/3 _Persistent Boy 01/2/3_캔버스에 유채_162×120/130/120cm_2008
박진아는 이번 전시에서 개별적 행위를 특정 행위로 제한을 둔다. 그리고 공간은 더욱 사람들이 붐비는 장소를 선택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만나고, 이야기하고, 웃고, 떠들면서 사람과 사람의 연결고리를 이어나가야 한다. 그럼에도 박진아의 그림 속 사람들은 작가가 제시한 제한된 행위를 하면서 그 시공간으로부터 일탈해 있다. 「마지막 한 입」에서 화면의 중심에 있는 커다란 테이블을 따라가 보면 화면 중심에서 어떤 인물이 무언가를 막 먹으려는 순간과 마주한다. 주변 정황을 봤을 때, 많은 사람들이 머물렀다가 지나갔을 자리이다. 그러나 그 주변에는 그들의 흔적만이 있을 뿐 사람은 없다. 모든 정황은 생략되고 중심인물의 단지, 먹는 행위 자체만이 부각된다. 일상에서 벗어난 일탈적 공간과 가장 본능적 행위가 교차한다. 「잠」에는 의자에 기대어 잠들어 있는 인물이 있다. 이 인물 역시 파티에서 떨어져 있다. 화면의 중심에 인물이 놓여 있지만, 이 인물은 분명 파티가 열리고 있는 공간의 구석에서 잠을 자고 있다. 공간에 놓이지 못하고 외부로 벗어나 있는 인물의 묘사는 「감나무아래 피자먹는 남자」에서도 발견된다. 감나무 아래 남자는 허겁지겁 피자를 먹고 있다. 감나무와 피자의 조합은 낯설다. 즉, 이 남자는 피자를 먹고 있는 어떤 공간에서 벗어나 있다. 「프로젝터 테스트」와 「그랜드 피아노」의 인물들은 앞선 작업들과 다르게 무언가 함께 하고 있다. 그리고 시선의 방향도 일치하거나 마주보고 있다. 그러나 이 작업에서는 공간이 인물을 압도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작업에서 박진아는 공간보다는 그 속의 인물, 인물 보다는 그 행위 자체에 방점을 두었다. 그런데 이 두 작업은 공간이 인물을, 그리고 그들의 행동을 압도하고 있다. 프로젝터의 푸른빛과 화면 중심에서 관처럼 놓여 있는 그랜드 피아노가 공간 전체 정서를 만들어 낸다.

박진아_조명아래_under lighting_캔버스에 유채_118×140cm_2007
박진아는 일상적 삶의 순간을 그린다. 그러기에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쉽게 마주 할 수 있는 순간들이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 순간으로 정지하는 것이 아니라 긴 여운을 관객에게 야기한다. 그것은 그가 ‘재현하는 내용’이 아니라 ‘재현하는 방식’에 방점을 두기 때문이다. 박진아는 가장 일상적인 순간을 제시했지만, 관객은 이 순간을 통해 가장 불안한 순간을 경험할 수 도 있다. 자신의 구축한 체계에서 벗어나 있는 그 순간 말이다. 그러나 이 순간, 인간의 일상적 현실이 모습을 드러낸 유일한 순간이 아닐까? ■ 이대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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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TWORK PROJECT-JAPAN
2008_0926 ▶ 2008_1024
Kaoru USUKUBO_Three to
Four_오일파스텔_145.5×145.5cm_2008
초대일시_2008_0926_금요일_05:30pm참여작가 Aarki Yoshida_Asa
Go_Chika Hattori_Fumi Aizawa_Hiroyuki Aoyama Horigome Sachie_Jun
Azumatei_Kaoru Usukubo_Keiki Yamada Keisuke Maeda_Kohei Nawa_Koichi
Enomoto_Mayuka Yamamoto Miki Taira_Oscar Satio Oiwa_Satoko Takagi_Shozo
Araki Takahiro Ameku_Tetsuya Noguchi_Tokuhiro Kawai_Tomoko Shioyasu Toru
Kamiya_Yohei Watanabe_Yoshitaka Azuma_Yuki Inoue Yukiko Shibata_Yuya
Fujita
관람시간 / 10:00am~06:00pm
인터알리아 아트컴퍼니 INTERALIA ART COMPANY 서울 강남구 삼성동 147-17번지 레베쌍트빌딩 Tel.
+82.2.3479.0114 www.interalia.co.kr
Network
Project이란? ● 네트웍 프로젝트는 인터알리아가 국외 특정 지역 현대 미술과의 집중적 교류를 위하여 매년 정기적인 행사의 형태로서
선보이는 작업이다. 전 세계의 여러 지역별로 흥미로운 현대미술의 흐름을 읽어내기 위하여 다각적 리서치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를 보여주기 위한
전시를 구성한다. 올해는 그 첫 번째 해외 지역을 일본으로 정하여 일본 현대미술의 다양한 모습을 발견한다.

Asa
GO_Depend On Myself_캔버스에 유채_193.6×261cm_2007 Yuya FUJITA_Grapes_종이에
연필_50×60.6cm_2008

Koichi
ENOMOTO_Untitled_캔버스에 유채_145.7×112×6.2cm_2008 Kohei NAWA_Gush#18_종이에
아크릴채색_60×60cm_2008
『Network Project-Japan』은 일본 현대미술 갤러리 및 젊은 작가
지원 단체에서 추천한 27명의 일본 현대 미술 작가들이 참여하는 전시 프로젝트이다. 2008년 4월에 있었던『Japan Now』전시가 일본
현대미술의 색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고 그들과의 네트웍을 형성하는 첫 단계였다면, 이번 프로젝트는 내년에 열리게 될 일본 미술의 현재를
보다 더 다채롭게 보여주기 위한 리서치와 함께 진행되면서 일본의 갤러리들과의 문화 교류의 지속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취지를 가진다. 이 행사에
참여하는 작가들은 우선 일본 여러 갤러리에서 추천한 작가들의 자료를 수집하고, 실제로 방문하여 작품을 확인하여 참여작을 직접 선별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작품을 선별하는 기준은 우선 작가의 활동에 대한 갤러리의 지지도가 높아야 했다. 즉, 작가를 프로모션하기 위한 갤러리스트들의 활동
사항을 살펴 보았고, 작품은 일본 현대미술의 정형으로만 소개되었던 애니메이션적 성향에 편중 되지 않은 보다 다양한 모습의 작업들을 선택하려고
했다.

Mayuka
YAMAMOTO_Black Bear_캔버스에 유채_145.5×112.1cm_2007 Tetsuya NOGUCHI_Soaring scene
of a Hovering Man_보드, 종이, 천에 아크릴채색_76.2×46.2cm_2008

Yukiko
SHIBATA_Untitled_일러스트레이션 보드지에 연필.수채화_51.5×37.3cm_2008 Tokuhiro
KAWAI_Magnificent extracurricular class_보드에 유채, 혼합재료_100×80.3cm_2005
본 프로젝트를 위하여 만나 본 갤러리스트들이나 미술 전문가들은 작가를 프로모션하고 활동 기반을 마련해 줄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는 역할을 하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그 방식이나 성격은 각양각색이었다. 연간 젊은 작가들을 지원하면서 전시를 통해 작품을
프리젠테이션 할 수 있도록 하는 개인 운영 단체가 있는가 하면, 열악한 일본 내 미술시장의 수요자 층에 대한 대안으로 해외의 컬렉터들을 대상으로
프로모션 활동을 펼치는 갤러리들이 있었다. 또한 모더니즘 회화에 기반한 오랜 세월의 일본 미술시장의 역사와 흐름을 지속시키면서 동시에 현대
작가들의 성향을 소개하고자 하는 갤러리도 든든하게 버티고 있었다. ■ 김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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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 : 離
김준용展 / KIMJOONYONG / painting
2008_0919 ▶ 2008_1012 / 월요일 휴관

김준용_Papaver Somniferum_유리, 에폭시_120×120cm_2008
초대일시_2008_0924_수요일_05:30pm
관람시간 / 12:00pm~08: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벨벳_GALLERY VELVET
서울 종로구 팔판동 39번지
Tel. +82.2.736.7023
www.velvet.or.kr
有 : 離-부재자를 위한 헌화(獻花) ● 벨벳이 위장된(?) 한국화 전문 갤러리란 풍문이 나돈다. 한국화과 출신 젊은 작가들의 입에서 뜻밖의 우려와 함께 전해졌고, 다음 전시 작가의 동료라는 자에게서도 나무라듯 그런 소리를 들었다. 여기에서의 '우려'란 이미 낡은 장르라는 낙인이 찍힌 바, 한국화 작가로만 전시를 진행하느니 컨템포러리 작품에 섞어놔야 간접 조명이라도 받는다는 극단적 패배주의다. 또한 여기에서의 '나무람'이란 벨벳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자신은 우리와 전시를 하고 싶지만 한국화 전문이라는 이미지가 다소 마음에 걸린다는 오만의 맥락이다.
허나 상기한 '우려'에 대해서는 일찍이 『현재 진행형으로서의 진경』展(2005.05.21-06.10 김천일, 권기윤, 김현철, 갤러리 벨벳)을 통해서, 현존작가들에 의해 실시간으로 생산되는 그들 작품을 벨벳은 명백히 현대미술로 받아들인다고 밝힌바 있다. 또한 상기한 '나무람'에 대해서도 이 자리를 빌어 명백한 입장을 밝히자면, 벨벳은 한국화에 대한 이해가 없는 한국국적의 작가보다는 차라리 정체성이 분명한 외국작가와의 교류를 더 선호한다.

김준용_꽃속의 꽃_유리, 에폭시_60×60cm_2008
기획자로서 지난 북경 올림픽 폐막식에서 유독 눈길을 두었던 지점은, 일사분란하고 거대한 중국이 아니라 절제된 미학의 런던이었다. 런던을 상징하는 빨간 이층버스가 런던 최고의 문화상품인 뮤지컬 무대적 변신을 보여줬으며, 레오나 루이스가 노래했고, 축구의 종주국이자 락의 고향답게 데이빗 베컴과 지미 페이지가 등장했다. 특히나 칠순 노구를 이끌고 연주에 몰입해 있는 대가의 모습은 실로 압도적이었다. 뭇 시선을 사로잡으려는 장황한 기교 없이 거장다운 정공법으로서 이미 충분했고, 그런 대가를 배양해낸 대영제국의 저력을 단 8분간 군더더기 하나 없이 전 세계에 보여줬다. ● 하지만 그 감탄스러움은 모든 것이 영국의 것으로 이루어졌기에 가능하지 않았던가? 우리나라가 자랑하는 세계적인 명물들, 예컨대 촛불 시위자들은 탈 수 없는 마법 같은 8000번 청와대 순환 버스, 조수미, 차범근, 신중현으로 각기 공연을 대치했을 때, 개인의 기량 면에서는 영국에 못지않을 것이나, 그것에 대한민국이라는 한 국가를 상징하는 대표성을 부여해야한다면, 감탄 이전에 뭔가 찝찝한 꿀림이 있지 않을까?

김준용_Platy codon_유리, 에폭시_60×60cm_2008
그렇기에 벨벳의 정체성을 규정함에 있어 한국화 전문이라는 호칭은 오히려 모자람이 있다. ● 벨벳이 갤러리로서, 한국을 대표하고 있다는 자각을 분명히 하고 있음을, 그동안의 기획을 통해 인정받길 원해왔으니까. 하지만 이런 논의에는, 그럼 꼭 상투 틀고 수묵 산수화만 그려야 하냐는 단순무지한 반론이 뒤따른다. 고고한 산천에 신비한 구름을 자유자재로 불러들이는 재주는, 여의봉을 든 중국원숭이도 예로부터 줄곧 해왔던 일이었으니... 한국화의 범위 규정에 있어서 전통이 재료적-소제적 제약이 되지 않음을, 우리는 『리코멘타리1』(2008.06.11-09.07 박병춘, 유근택, 신하순, 김천일, 박종갑, 김성희, 인큐베이터)을 통해서 이미 부족함 없이 제시한 바 있다. 아니, 제약은 커녕 얼마든지 자유롭게 차용하면서, 서구인들에게는 없는 고유한 경쟁력마저 보존하고 있음을 부각한 것이 상기 전시에 대한 우리의 자부심이다.
캔버스 위에 아크릴 작업을 하든 가변적 설치 작업을 하든, 그것은 작가의 메시지 전달을 위한 방법론의 문제이며 툴의 분류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또한, 단순히 지필묵을 사용하여 산수풍경을 그린다는 정황이 딱히 한국화가로서의 정체성을 대변해줄 수도 없다. 중요한 것은 작업 방향의 체계를 지원하는 철학의 문제로서, 작가의 자아가 생존해가야 할 '현재라는 주변'의 역사적 맥락에 대한 자의식과 그 대응에 있다. 그것이 생략된 채 미국 팝아트를 단순 답습하여 양산되는 숱한 마릴린 몬로와 미키 마우스들은 허황될 뿐이다. 외형적 반복이 아닌 미술사적 맥락에선 변정현(『The room-인형의 집』 2009.01.30-02.17 벨벳)과 연미(『게릴라』展 2008.06.03-08 인큐베이터)의 극히 일상적 오브제를 통한 간명한 전언이 오히려 팝의 정신과 가깝고, 박미리의 아메리칸 팝송을 열창하는 전형적 몽골리안의 얼굴과 미 8군 무대의 반짝이 의상 사이의 부조화만큼 진솔해 보이지도 않는다(『딴따라』展 2008.12.05-28 인큐베이터). 패티김, 위키리, 김시스터스라는 원조시대 원년이자 가치혼돈 원년의 전형적 이름들에서부터 나훈아, 남진, 태진아로 진화한 키치적 초상에 진정한 코리안 팝아트의 가능성이 있다는 거다. ● 모든 '혼돈'에는 '혼돈 이전'이라는 명확한 전제 개념이 있다. 혼돈 이전의 질서와 그 근간의 철학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숙지 없이는, 혼돈 이후의 방향성에 대한 모색은커녕 '현재'마저 시류에 부유하는 '서구예술의 단순한 표면적 재현'에 머물게 할 뿐이다.

김준용_꿈속의 꽃_유리, 에폭시_60×60cm_2008
따라서 벨벳은 한국인으로서의 명확한 역사인식과 사회의식의 자각 하에 진행되는 모든 작업을 한국화로 분류한다. 서구예술의 단순한 표면적 재현에 치중하는 이나, 분명한 자기 확신에 의한 필연성 없이 막연한 전통의 관성에 지배 받는 이는, 한국화와 양화의 경계 이전에 작가로도 굳이 분류하고 있지 않다는 거다. 그렇기에 벨벳에서 전시하는 작가는 기존의 서양화 동양화 조각이라는 구분을 넘어서 그냥 한국화가다. 그 안에서 회화와 입체와 영상 등의 세분이 있을 수 있겠지만, 국가대표 갤러리로서, 학부 전공여부에 따른 치졸한 분류에도 벨벳은 딱히 의미를 두지 않아왔다. 그리고 그런 표본적 전시가 이순종의 경우와(『The room-神堂』 2009.01.30-02.17 벨벳) 이번 김준용의 전시다. ● 조각과 출신이며 미국유학파로서 첨단 입체작업이 어울림직한 이순종의 최근 주재료는 장지에 채색안료다. 지적 발언자로서의 오랜 고민이 그의 최근 작업경향을 이끌어냈고, 또한 그것이 주제에 적합한 재료들을 필연적으로 요구하게 했을 것이다. 기존의 미인도가 속의 영역이라면 곧 이을 여신도는 성의 영역으로서, 풍속화가 아닌 종교화에 부합하는 소재들이 또한 새롭게 요구될 것이다. 다시 반복하건데, 그의 추구는 재료 그 자체, 소재 그 자체가 아닌 정신성에 있다. 남성중심의 유교사회에서 오래도록 폄하되고 축소되었으며, 몰이해한 서양문명에 의해 미개와 무지의 영역으로 전락해 버린 우리 전통신앙에서의 여신, 그녀의 복권과 복원을 위해 그에 맞는 재료와 소재를 창작자로서 선택할 뿐이며, 새로운 재료를 사용함과 새로운 소재를 표현함에 부끄럼이 없도록 가열차게 연마하고 있는 것이다. ● 김준용 또한 전공은 유리공예이며 미국유학파다. 요즘 세태를 보면 그 순수성이 꽤나 의심되나 일명 ‘순수예술’로 분류되는 학과에 꼬박꼬박 등록금을 붓고, 만기가 차면 적금 찾듯 ‘작가’라는 호칭을 인감도장처럼 찍어왔던 분들의 인색한 기준에 의하면, 그는 공예가 내지는 많이 양보해서 '공예'작가로 분류되며 그의 작업이 한국화 영역으로 분류될 수도 없다. 하지만 그는 앞서 규정한 벨벳의 기준에 충족한 '한국' '작가'이며, 전통적 작가 정신의 정수이자 기원인 헌화가(獻花歌)의 맥을 잇고 있다. 그런데, 대체 누구를 위해?

김준용_Vanda_유리, 에폭시_100×100cm_2008
신라 성덕왕 때 강릉 태수로 부임 받은 순정공의 행차 길에, 그의 부인 수로가 험한 바위 절벽에 핀 철쭉꽃을 탐미했으나, 누구도 꺾어올 엄두를 내지 못하던 차 홀연히 나타난 이가 소를 치는 한 노옹이었다. 노옹은 기꺼이 소의 고삐를 놓고 험한 바위를 손수 올라, 수로에게 꽃을 따다 바치며 헌화가를 노래한 후 이름을 남김도 없이 사라진다. ● 소의 고삐를 놓는다함은 그에게 노동→생산→이익이라는 환금의 절차를 초월하는 가치가 존재함을 의미하며, 그것이 바로 아름다운 것을 알아보는 이를 위한 자발적 노고일 것이다. 또한 그 행위로 인해 노래를 불러야할 만큼의 심적 기쁨이 충족했으므로, 하찮은 보상 따윌 셈할 까닭이 없기에 연고를 남길 이유도 없는 것이다. ● 위험을 무릅쓰고 고관의 아내를 기쁘게 한 자가 보상도 원치 않고 사라졌으니, 세속적 상식의 후세인들은 구름 위 선인일 것이라 쑥덕대야 마음이 편했겠지만, 그게 바로 우리 전통 예인의 정신이며 삶의 자세가 아니었던가. 수로부인과 노옹이 아닌 복부인과 노망에 어울리는 탁한 흥정들이 범람하는 지점에서, 김준용은 투명함이란 유리 고유의 특성을 극대화하여, '부재자'가 발 디딜 징검다리를 놓고 그의 가슴에 꽃물을 들인다.

김준용 / 有 : 離 展_2008
부재자... 그를 위해 작가는 벨벳의 어둡고 칙칙한 지하전시장에 유리 징검다리를 띄우며, 행여 깨질라 손끝도 댈 수 없는 휘황찬란한 유리공예품이 아닌 유리설치작업을 통한 적극적 참여를 유도한다. 꽃문양이 새겨진 채 미세한 빛을 발하는 그 징검다리를 걸으며, 부재자는 앞서 지적된 혼탁함 속에 일말의 희망처럼 점점이 놓인 '투명한 순수' 예술의 길로 인도된다. 그리고 그 한 걸음 한 걸음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촉각을 이끌어내기 위한 장치와 맞대어 있다. 우선 어두컴컴한 지하라는 환경이 우리 몸의 숨어있던 촉각까지 민감하게 깨어나게 할 것이며, 인간 존재의 모든 하중을 실은 맨 발은 그 차갑고 이물적인 질감과 집중적으로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하여 그 한 없이 증폭되고 긴장되는 촉각의 순간, 부재자는 일상적으로 접해왔던 유리라는 소재의 특성에 대해 가장 적나라한 각인을 받게 될 거다. 작가는 물론 하중에 의해 유리 디딤돌이 깨질 일은 절대 없다고 보장한다만, 꽃문양으로 어여쁘게 가공된 그 길을 걸으며, 부재자의 마음에 불안과 조바심이 생길 일도 없다고까지 보장할 수는 없으니... ● 그런 친절한 보장 하에 유도되는 롤러코스터 공포 효과를 통한 각성은, 표면적으로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린 듯하나, 떠나는 내내 가는 자의 심기를 어지럽힐 진달래 꽃빛 같은 짙은 정념과 같다. 날카로운 비수를 잠재한 차가운 유리 소재 속의 빛깔 고운 꽃잎의 중첩은, 버려지더라도 잊혀지지는 않겠다는 김소월 적 애증의 의지와 다름없으니!

김준용 / 有 : 離 展_2008
이렇듯 오늘 날 설치미술은, 고생하는 이만 남고(有), 즐기는 이는 떠나버렸다(離).
작가가 아무런 댓가의 보장도 없이 꽃문양이 새겨진 유리 조형물을 벨벳의 1층 전시장에 가득 세워도, 뜨거운 할로겐 조명 빛을 투여해 영롱한 꽃무늬를 물들여줄 가슴 있는 관객이 부재하는 것이다.
●「꽃밭에 앉아서 꽃잎을 보네 / 고운 빛은 어디에서 왔을까 / 아름다운 꽃이여 / 꽃이여」
그래서 이번 김준용의 전시는 정훈희의 ‘흘러간 유행가 - 꽃밭에서’가 자연스럽게 떠오를 만큼, 화사한 고독함과 비애감이 감돈다. 고독함이란 함께 나눌 수 없다는 처절한 상황인식에 기인하며, 비애감이란 그래도 노래를 멈출 수 없는 쟁이들의 기구한 팔자에 기인한다.
●「이렇게 좋은 날엔 / 이렇게 좋은 날엔 / 그 님이 오시면 / 얼마나 좋을까」
서울대 동양화과에 서예 교육이 부활되는데도 근 30년을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우리가 감히 국가대표 갤러리라 호언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며 말려도 자신이 신념하는 일은, 밥을 굶더라도 지켜내는 국가대표 고집불통들에 의해 벨벳의 전시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 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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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EN STUDIO
조성준展 / JOHSUNGJOON / 趙成俊 / painting
2008_0926 ▶ 2008_0928

조성준_사당_리넨에 유채_249×170cm_1995~2008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SUMMER PROJECT OPEN STUDIO展
관람시간 / 01:00pm~05:00pm
ETERNAL PAINTING : 영원한 그림, 끝없는 그림 ● 뉴욕에서 미술학교 다니던 시절 내가 몇 개월째 그리던 그림을 두고 맞은 편 작업실에 있던 Randy가 내던진 말이었다. 보다 못해 한마디 던진 게 아니었을까. 크긴 했지만 그다지 세밀한 묘사를 많이 요구하는, 그래서 오랜 시간이 걸려야만 했던 작품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끝없이 그리다... 이번 오픈 스튜디오에 전시 될 세 대작들도 이 부류에 속한다고 봐야할 것 같다.

조성준_미완성 책장_리넨에 유채_244×229cm_2004년 전후

조성준_미완성 책장_리넨에 유채_244×229cm_2000~2008
뉴욕에서 이런저런 아르바이트에 의존해 어렵게 살던 90년대 중반 시작한「사당」이 제일 오래 되었고「미완성 책장」과「보문서점」은 2000년도 전후 시작되었다.「사당」은 아주 작은 방에서 시작했다. 가로 세로는 2M 정도 밖에 안됐지만 그나마 천장은 3M 높이 여서「사당」크기의 그림이 가능했다. 최적의 상황은 결코 아니었다. 갈 곳 없던 책상 자들을 양옆 벽에 쌓아 놔야 했고 그 때문에 방은 결국 삼각형의 구조가 되고 말았다. 햇빛은 거의 들지 않았고 인공조명도 공간이 너무 작은 관계로 고르지 못했다. 그림을 전체적으로 점검해 보는 것은 결국 광각렌즈로 찍은 사진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 어느 지인의 도움으로 90년대 후반기에 드디어 제대로 된 화실을 하나 확보했다. 그것도 내 아파트 바로 옆에... 그곳은 여러 예술단체들이 모여 공동운영하는 오래된 폐교건물이었는데 나 혼자서 빈 교실 하나를 다 쓸 수 있게 되었다. 복도 맞은편에는 Mabou Mines극단이 자리 잡고 있어 거기에 출입하는 다양한 인간상들이 항상 묘한 분위기를 연출했고, 창 밖 1번대로 건너편에는 전성기 시절의 Coyote Ugly Saloon이 자리 잡고 있어서 또 다른 분위기, 조금 천박스러우면서도 나름 어떤 행복을 추구하는 모습을 열심히 연출해 내고 있었다.

조성준_보문서점_리넨에 유채_259×244cm_2001년 전후

조성준_보문서점_리넨에 유채_259×244cm_2004년 전후

조성준_보문서점_리넨에 유채_259×244cm_2000~2008
조금 뒤 나는 어느 화가가 버리고 간 거대한 그림 틀 두개를 접수해서 그 위에 고급 아사를 얹고「미완성 책장」과「보문서점」을 시작했다. 이 큰 그림들을 앞에 두고 있으면 어린 시절 열심히 다니던 영화관들이 생각나곤 한다. 물론 어려서 그랬겠지만 어마어마해 보이던 화면... 특히 옛 대한극장, 그리고 옛 우리 동네의 명소 노벨극장... 제일 앞줄에 앉아서, 거진 누워서, 꿈꾸듯 즐기던 경이로운 풍경들, 인물들, 색깔들... 끊임없이 흐르던 화면... 화면 그 자체에서 품어 나오던 은빛 광채, 수백만, 수천만의 필름 입자들이 서로 부딪히면서 이루어내던 빛과 그림자의 눈보라... ● 이번에 전시되는 이 그림들은 바로 그 어린 시절의 영화들이 내 눈앞에서 끝없는 향연을 연출해 냈듯이 그림을 그리고 지우고 또 그리기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나만의 영화를 연출하면서 축적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 조성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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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space H 신진작가 공모
접수기간 / 2008_1001 ▶ 2008_1031
Artspace H 1층_2008
접수마감 / 2008_1031_금요일
아트스페이스 에이치_ARTSPACE H
서울 종로구 원서동 157-1번지
Tel. +82.2.766.5000
www.artspaceh.com
아트스페이스 H는 국내외 유망한 현대미술 작가들을 국내무대에 소개하고 국내 젊은 작가들이 국제무대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회의 공간 마련하고자 2008년 종로구 원서동에 새롭게 개관하였습니다. 아트스페이스 에이치는 저희와 함께 성장해 갈 역량 있는 젊은 작가를 발굴하고자 신진작가공모를 실시합니다. 열정과 꿈을 가진 작가분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 바랍니다. ■ 아트스페이스 에이치
■ 공모요강
● 공모대상_1970년 이후 출생한 자 (대졸 이상)
● 심사방법
○ 1차 심사_서류심사
○ 2차 심사_면접 - 실제작품, 작가스튜디오 방문
● 지원내용
‘09년 중 아트스페이스 H에서 그룹전 또는 개인전 형식으로 전시지원
전시장 지원, 홍보, 인쇄물 제작 등 전시관련 진행을 지원
● 응모방법
○ 제출자료_자료는 출력물과 CD-ROM 두 가지 모두 제출
- 이력서_학력과 경력 등 상세한 프로필 (A4 2장 내)
- 작품사진_10~15점 (jpg 파일)
이미지파일의 제목은 작품캡션으로 저장할 것 (제목_재료_사이즈_년도)
- 작가노트_A4 2장 이내
○ 첨부자료_포트폴리오 북 또는 이전 전시도록 첨부 가능
● 지원안내
○ 접수기간_2008_1001(수) ▶ 2008_1031(금)
○ 접수방법_직접 방문 및 우편 접수
- 주소_(110-280) 서울시 종로구 원서동 157-1 아트스페이스 H
○ 결과발표_2008_1107(화) 예정, 개별 통지
○ 자료반출_2008_1110 ▶ 2008_1120
- 포트폴리오 북은 위의 기간 내에 직접 방문하시는 분에 한해 반환해 드립니다.
● 기타문의
artspaceh@naver.com으로 이메일 문의, 전화문의는 받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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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상 : Reality +Image
김강용展 / KIMKANGYONG / 金康容 / painting
2008_0926 ▶ 2008_1019

김강용_Reality+Image 805-891_캔버스에 혼합재료_180×180cm_2008
초대일시_2008_0926_금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가나아트센터
GANAART CENTER
서울 종로구 평창동 97번지
Tel. +82.2.720.1020
www.ganaart.com
회화적 실험에 천착한 30여년의 세월 ● 김강용은 80년대 초, 극사실주의의 유행을 주도했던 "사실과 현실"의 동인으로 활동하였으며, 조직이 해체된 후에도 꾸준히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그가 벽돌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당시의 시대상황을 아스팔트 위의 담배꽁초나 골목길의 쓰레기통 등 소외된 표현하던 시절에 문득, 개체의 기본이 되는 육면체의 벽돌에 중요성을 부여하면서부터이다. ● 초기에는 벽돌과 함께 그것이 놓인 공간에도 비중을 둔 「현실+장(Reality+field)」시리즈를 제작하였으며, 이후에는 분위기의 묘사를 배제하고 그림자의 음영만으로 구성된 억제된 표현의 「현실+상(Reality+Image)」시리즈로 이어졌다. 극사실과 눈속임기법으로 주목받았던 작품들을 통해 작가는 모래 위에 그린 음영을 질료와 형태의 유사성 때문에 벽돌로 인식하는 것과 같은 고정관념을 교란시키고, 환영의 문제를 제기한 것이었다. 또한, 캔버스의 측면에도 벽돌을 그려 넣어 2차원 회화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한 점과, 모래를 작품의 재료로 직접 사용함으로써 오브제 회화의 가능성을 연 것이 그의 작품이 갖는 의의이다. 다양한 재료를 이용한 작품들이 늘어나고 있는 현재의 미술경향의 선두에 그의 작품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 실제 벽돌처럼 보이기 위한 요소로 사용되었던 작품의 재료인 모래를 통해서도 다양한 실험을 해왔는데, 오랫동안 해안가에서 직접 채취한 모래를 사용하던 방법에서 지난 몇 년 사이에는 대리석을 갈아 만든 규사를 사용하게 되어 색상이 다양해지고 표면도 정제되었다. 이번 전시에는 다양한 색상이 어우러진 인간 군상과 도시의 분위기를 표현한 컬러플한 작업들이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선보인다. 상감기법과 같이 다른 색상의 벽돌이 차지할 공간을 정확히 파내서 다른 모래를 채워 넣는 방법은 한 치의 오차라도 있으면 작품을 폐기해야 하기 때문에 균질적인 작품보다 시간과 노동을 더 많이 요구한다.

김강용_Reality+Image 805-899, 900_캔버스에 혼합재료_162×260cm_2008

김강용_Reality+Image 806-913_캔버스에 혼합재료_130×162cm_2008
원근법을 무시한 다시점 ● 김강용의 트레이드 마크인 화면전체를 벽돌의 배열로 채우는 방법은 최근 몇 년 사이에 화면에 여백을 남기거나, 벽돌을 흐트러뜨리고 여러 가지 색깔을 사용하는 등 다양한 조형적 모색으로 이어지고 있다. 실제와 이미지를 유사하게 재현함으로서 그 간극을 드러내는 형상의 강조에서 더 나아가 화면구성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 좌측상단에서부터 시작되어 벽돌로 화면을 채워가는 작품과는 다르게 색상이 첨가되거나 흐트러진 구도의 작품은 중앙에서 바깥으로 진행되면서 작가의 의도에 따라 그 방향과 구도가 다양하게 결정된다. 원근법을 무시한 다시점으로 구성된 벽돌들은 실제로는 불가능한 모습이며, 실제(벽돌)는 더 이상 재현된 이미지가 아닌 화면 그 자체가 되고 있다

김강용_Reality+Image806-915_캔버스에 혼합재료_100×100cm_2008

김강용_Reality+Image804-886_캔버스에 혼합재료_150×150cm_2008
모든 개체의 기본인 육면체를 소재로 회화의 가치와 의미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된 그의 작업은 화면구성의 기본 요소인 변화, 균형, 통일, 조화를 적용하고, 모래를 화면의 재료로 사용함으로써 가장 기본적인 동시에 가장 독창적인 작품이 되었다. ● 순수 국내파인 김강용이 50세가 넘은 나이에 진출한 뉴욕화단에서 초대전을 갖고, 1999년부터 꾸준히 20여회의 해외아트페어에 참여하여 좋은 성과를 올릴 수 있었던 것은 이렇듯 독특한 소재, 수공적인 노동력, 탄탄한 묘사력을 바탕으로 형성된 독창적인 작품세계 때문인 것이다. ● 이번 전시는 보는 이의 시선을 조작하고 교란시키는 작가의 탁월한 능력을 직접 느끼고, 화면이 암시하는 것 너머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선사할 것이다.

김강용_Reality+Image707-707_캔버스에 혼합재료_145×112cm_2007

김강용_Reality+Image804-887_캔버스에 혼합재료_210×180cm_2008
벽돌이 아닌 벽돌그림 : 환영, 또 다른 세계로 향하는 창(窓) ● 화면을 가득 매우는 그림자 그리기는 작가와 작업이 일체가 되는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한다. 대상을 보고 그린 것도, 수학적 계산에 의한 것도 아닌 작가의 상상 즉, 마음의 눈(心眼)으로 그린 김강용의 벽돌그림은 구상도 추상도 아닌 모든 잡념이 제거된 ‘무심(無心)의 공간’이다. ● 일상적인 물건인 벽돌은 김강용의 작품에서 관념적 대상이 되며, 수행하는 마음으로 삶의 흔적(그림자)을 그려나간다는 작가의 말은 작품 속에 깃든 동양적 사유의 깊이를 드러낸다. 그의 작품은 벽돌을 그리면서 시작되었고 벽돌로 보이지만, 동시에 공간과 환영에 대한 것이며 또 다른 세계, 회화라는 세계로 향하는 창문이기도 하다. 이렇듯 작품 속에 깃든 진정한 의미에 다가가는 첫걸음은 작품을 단순히 벽돌을 그린 것으로 규정하지 않고, 또 다른 차원의 감각을 일깨우고 다양한 세상을 보는 매개로 생각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 가나아트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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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
강운구展 / KANGWOONGU / 姜運求 / photography
2008_0927 ▶ 2008_1206

ⓒ 강운구_담양_셀레늄 착색하여 영구보존 처리된 젤라틴 실버프린트_20×24inch_1998
초대일시_2008_0927_토요일_05:00pm
작가와의 만남_한미사진미술관 2층 세미나실
2008_1011_토요일_03:00pm / 2008_1108_토요일_03:00pm
후원_서울시
관람시간 / 평일_10:00am~07:00pm / 주말,공휴일_11:00am~06:30pm
관람료 / 일반_5,000원 / 학생_3,000원
한미사진미술관
The Museum of Photography, Seoul
서울 송파구 방이동 45번지 한미타워 19층
Tel. +82.2.418.1315
photomuseum.or.kr
강운구는 호흡이 길다. ● 「저녁에」가「마을 삼부작」이후 칠년 만에 하는 개인전이다. 더는 눌러 담을 수 없어 넘칠 때에라야 마지못해 전을 편다. 그래서 할 때마다 보통 개인전을 두세번은 할 만큼의 양을 쏟아 놓는다. 그러나 그는 횟수나 양 같은 것은 거의 염두에 두지 않고, 다만 깊이에 치중할 뿐이다. 강운구는 나이와 더불어 더 깊어져 간다. ● 그는 종종 “쌀로 할 수 있는 최고의 요리는 밥이다”라고 했다. “사진술로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사진은 기록성이 있는 사진이다”라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그의 기록은 이제 외면을 넘어서 내면 깊숙이 들어가고 있다. ● 강운구는 스스로를 ‘내수(內需) 전용 사진가’라고 말한다. 그가 천착하는 내용은 과연 그러하며, 여기에는 ‘국제적’, ‘세계적’이란 명분으로 정체성 없는 사진들이 범람하는 현상에 대한 저항의 의미도 담겨 있을 터이다.

ⓒ 강운구_정읍_셀레늄 착색하여 영구보존 처리된 젤라틴 실버프린트_11×14inch_2007

ⓒ 강운구_남해_셀레늄 착색하여 영구보존 처리된 젤라틴 실버프린트_11×14inch_2007
『저녁에』는「흙과 땅」,「연속사진」 그리고 「그림자」해서 삼부작인데, 모두113점으로 구성되어 있다. '저녁에'는 시간을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시간이 아니라 여러 겹의 이미지가 교차하며 이루는 시간을 말한다. 강운구는 이전과는 달리, 흙과 땅에 각인된 사람 그리고 노동의 자취를 통한 간접화법으로 사람과 흙과의 관계에 밀도 짙게 접근한다. 한국의 토착문화가 산업화 과정에서 발생되는 물리적인 힘에 의해 미미하게 존재를 연명해 나가거나 또는 사라져 버리는 과정을‘의도적인 객관성’으로 기록하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해오고 있는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더 정서적인 울림이 큰 작품들로 그의 ‘이름 값’과 ‘나이 값’을 제대로 치르고 있다.

ⓒ 강운구_순창_셀레늄 착색하여 영구보존 처리된 젤라틴 실버프린트_11×14inch_2008

ⓒ 강운구_거제_셀레늄 착색하여 영구보존 처리된 젤라틴 실버프린트_11×14inch_2008

ⓒ 강운구_문경_셀레늄 착색하여 영구보존 처리된 젤라틴 실버프린트_11×14inch_2007
내용뿐만 아니라 형식면에서도, 디지털 사진이 범람하는 이때에, 강운구가 영구보존 처리하여 제작한 젤라틴 실버 프린트의 비교할 바 없는 아름다움과 기품을 보여주는 깊고 무게 있는 흑백 톤은 그가 뛰어난 장인이기도 하다는 것을 드러낸다.

ⓒ 강운구_김천_셀레늄 착색하여 영구보존 처리된 젤라틴 실버프린트_11×14inch_2007
시인 이문재는 이번의 사진집 『저녁에』 서문에서 강운구의 사진작업을 ‘강운구의 사진이 사십 년 넘게 천착해 온 대상이 흙과 땅, 농촌과 농부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단지 사라져 가는 토착문화, 공동체문화에 대한 안타까운, 때로는 분노에 가득 찬 기록만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인간에 대한, 동시에 인간의 지구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사진가의 외침이다.’고 했다. 모두가 농부의 후예인 이 땅의 현대인들에게, 회귀본능을 자극하는 서정적 이미지 속에 숨겨진 작가의 의도를 읽어낼 것을 이번 전시회 『저녁에』는 묵시적으로 권고하고 있다. 이번 전시를 기해 열화당에서 『저녁에』(2008.9.20)가 출판된다. ■ 한미사진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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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ORROW OF THE LIVING
김나리展 / KIMNARI / 金나리 / sculpture
2008_0928 ▶ 2008_1020 / 월요일 휴관

김나리_어느 신부-결혼_소금유, 도조_66×43×34cm_2007
초대일시_2008_1001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01:00pm~07:00pm / 월요일 휴관
웨이방 갤러리_WEIBANG GALLERY
서울 종로구 화동 127-3번지
Tel. +82.2.720.8222
www.weibanggallery.com
살아있는 것의 슬픔 ● 김나리의 작품에는 생의 본능인 에로스와 소멸과 죽음의 본능인 타나토스가 공존한다. 사실 에로스와 타나토스는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있는 경우가 많다. 서양에서는 도덕적이고 교훈적인 차원에서 에로스와 타나토스를 결합한 뿌리 깊은 전통이 있다. 예컨대 젊고 아름다운 육체를 지닌 여성 뒤에서 느닷없이 나타나는 죽음의 그림자는 청춘은 짧고 덧없는 것, 자신의 싱싱한 아름다움에 도취해 있는 순간에도 죽음은 늘 함께 한다는 경고를 담고 있다. 메멘토 모리(memento-mori), 죽음을 기억하라. 이러한 교훈적 주제를 관능적인 것으로 발전시킨 클림트(Gustav Klimt)의 작품에서 에로티시즘은 더욱 고양되고 화면에 장식성은 넘쳐나지만 그 화려함 너머에서 죽음의 화신이 미소를 띠고 있다. ● 사랑과 죽음이란 주제를 표현하고 있으나 김나리의 작품에는 이런 드라마가 없다. 에로스는 성욕이기도 하지만 살아남고자 하는 욕망, 자기존중과 자기애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므로 에로스를 굳이 성(性)의 문제로 결부시킬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떤 점에서 그녀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은 중성적이기조차 하므로 관능성은 부차적인 문제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나리의 작품에서 삶과 죽음의 문제는 성적 상징과 함께 나타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이를테면 꽃의 상징성이 그렇다. 그녀의 작품에서 꽃은 청춘의 싱싱함과 아름다움, 생의 절정을 상징한다. 그러나 꽃은 언젠가 시들어야 하는 운명을 지닌 인간의 유한한 생명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활짝 만개한 꽃은 죽음의 상징, 즉 바니타스(vanitas)일 수도 있다.

김나리_우즈베키스탄행 비행_소금유, 테라시질라타, 도조_80×63×46cm_2007
머리에 화관을 쓴 여성이 들고 있는 해골, 그러나 그녀의 눈은 초점이 없고 무표정하다. 아름다운 청춘이 걸려드는 덫에 대해 말하려는 것일까. 그녀가 들고 있는 부케가 해골이란 점에서 섬뜩함을 자아내는 이 작품은 흰색으로 분장한 것이기 때문에 더욱 쓸쓸하고 비극적으로 보인다. 치켜든 두 팔에서 자라나는 꽃송이. 이 작품은 아폴로로부터 겁탈 당하기 직전 월계수가 된 가련한 다프네(Daphne)에 대해 떠올리게 만든다. 한껏 꽃으로 치장하고 있으나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창백한 분위기 탓에 존재의 비극이 관능을 추월하고 있는 것이다. ● 한 송이 꽃을 들고 있는 여자. 이 작품 역시 전체를 하얀 유약으로 마감한 까닭에 꽃의 붉은 색을 선명하게 부각시키고 있지만 인물의 표정이 없기 때문에 차라리 관조적이고 명상적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에서 꽃은 침묵, 종교적 묵상을 상징하는 것일까. 깊은 슬픔에 잠겨있는 소녀가 있는가 하면 젊은 여성의 등에 올라탄 노파가 한 덩어리로 결합돼 있고, 서로 포옹하고 있지만 육체의 열락에 탐닉하기보다 근원적인 슬픔에 잠겨있는 남녀의 모습이 나타나기도 한다.

김나리_미친 꽃_소금유, 테라시질라타, 도조_55×43×38cm_2007
그녀의 작품에 나타나는 인물들이 대체로 무표정하다는 점, 늘 죽음과 대면하고 있다는 점, 더러는 초월을 지향하는 듯 명상적이라는 점에서 순진한 자기애에 빠져 있거나 육체의 쾌락을 쫓는 것이라기보다 존재의 슬픔에 대해 사색하는 인간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그녀의 작품에서 얼굴이 일그러진 채 절규하거나 통곡하는 비탄의 모습을 발견할 수는 없다. 말하자면 그녀의 작품에서 절망적인 파토스는 감정의 분출로 나타나지 않고 잠복적이다. 오히려 자신의 슬픔을 관조하려는 듯 잔잔한가 하면 마치 방관자인 것처럼 표정 없는 얼굴에서 슬픔의 근원을 표현하려는 그녀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꽃과 함께 등장하는 고라니나 개와 같은 동물과 함께 있는 인물(대체로 자소상인 경우가 많다)을 보면 동물로 상징되는 자연과 합일하고자 하는 의도를 드러낸다. 그래서 그녀의 작품에서 슬픔은 내면화되고, 슬픔의 문제는 비극에의 동화가 아니라 존재에 대해 사색하면서 조금씩 쌓여가는 근원적인 질문이 된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해명하기 위해 존재, 시간, 욕망, 원인, 결과, 이유 등에 대해 계속 질문을 제기하지만 명쾌한 결론을 내리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나는 슬플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슬픔이 염세주의로의 함몰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점에서 이 끝없는 본질적인 질문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인간은 유한한 존재라는 단순하고 상식적인 사실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 유한성은 슬픔에 빠지게 만들지만 또한 존재의 정당성에 대한 새로운 질문을 제기하는 원천이기도 하다.

김나리_어느 신부-결혼_소금유, 도조_66×43×34cm_2007_부분
그러고 보니 김나리의 작품은 두상이거나 흉상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전신상보다 상체만, 특히 얼굴을 집중적으로 표현한 것도 조소가 아니라 도예를 전공한 그녀가 주제를 분명하게 보여주기 위해 선택한 방법일 것이다. 작품의 크기에 있어서 실제 인체의 크기에 필적하고 있어서 왜소하거나 위압적이지 않다. 혼자 작업해야 하기 때문에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스케일로 한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지만 한편으로 가마에서 구워야 하는 작업의 공정을 고려한 결과인 것이다. 특히 이 작품들은 먼저 흙으로 형태를 만든 후 그것을 몇 조각으로 절단한 뒤 그 속을 파낸 다음 다시 결합하여 건조시키는 방법에 의해 제작된 것이기 때문에 상당한 집중력과 강도 높은 노동을 필요로 한다. 이런 과정은 물론 도예와 조각이 공유하는 부분이지만 그녀의 작품은 조각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다. 장식성을 배제한 형태와 색조, 내면적인 세계를 천착하려는 주제의 무거움만이 아니라 태도에 있어서도 그녀는 이미 조각의 영역으로 진입해 있는 것이다. ● 존재한다는 것은 불영속적이다. 그 불완전함이 슬픔을 불러일으키지만 한편으로 온갖 삶의 문제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원동력이란 점에서 이 불영속성이 인간을 절망으로 내모는 고통의 올가미는 아닐 것이다. 그런 점에서 존재한다는 것의 슬픔은 희망과도 맞닿아 있다. ■ 최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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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ile Within
김지희展 / KIMJIHEE / 金智姬 / painting
2008_0930 ▶ 2008_1013

김지희_Sealed Smile_장지에 채색_90×72cm_2008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Vol.080604e | 김지희 개인展으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제3회 GS타워 로비갤러리 '더 스트릿' 무료대관공모 당선자 초대展
관람시간 / 08:00am~10:00pm
GS타워 로비전시관 더 스트릿
GSTOWER LOBBY GALLERY THE STREET
서울 강남구 역삼동 GS타워 1층 로비갤러리
Tel.+82.2.2005.1177
www.gstower.co.kr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말했다. 태어나면서부터 우리는 ‘사회’라는 구조 속에 소속되어 끊임없이 사람들과의 소통을 경험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특히 현대사회의 인간은 복잡해진 사회 공동체 속에서 사람과의 관계를 끊임없이 의식하며 살아가는 존재다. 이 과정에서 공동체속의 인간은 소통의 상황에서 스스로의 감정과 다른 표정과 행동을 취하기도 하며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일정한 양의 억압을 강요받으며 살아간다. 보이지 않는 억압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아름다움의 기준에 스스로를 맞추고 자신의 외형적 모습을 변화시키기도 하며 조직사회에 효과적으로 적응해 나가기 위해 내면에 느껴지는 감정과는 다른 표정과 행동으로 타인의 시각에 자신을 맞추게 되는 경우가 많다. 나의 관심사는 이러한 관념적인 사회 구조속의 인간관계를 형성해 나가는 과정에서 스스로의 감정을 감추고 살아가는 현대 사회인의 모습, 또 그로 인한 일정한 고독을 감당해야 하는 인간의 모습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이를 상징적인 표현방법으로 화면에 제시하는 것이다.

김지희_Sealed Smile_장지에 채색_40×30cm_2008

김지희_Sealed Smile_장지에 채색_63×100cm_2008

김지희_Sealed Smile_장지에 채색_40×30cm_2008

김지희_Sealed Smile_장지에 채색_40×30cm_2008

김지희_I love you_장지에 채색_90×72cm_2008

김지희_Sealed Smile_장지에 채색_35×35cm_2008
본래의 치아를 고르게 만들기 위해 철사를 사용하여 일정한 고통을 수반하며 치아에 압력을 가하는 치아 교정 행위는 강요된 아름다움의 영역에 속하게 되며, 사람과의 관계를 의식해 양의 탈을 쓰고 경직된 웃음을 짓는 모습은 사회 구조속의 억압을 상징한다. 선글라스, 마스크 등의 소재 역시 내적 감정을 드러내는 통로인 표정의 일부를 감추는 도구로서 제시되며 이러한 특정 소재들을 한 인물의 모습에 나열하는 것을 통해 우리에게 강요되어진 억압의 의미를 직설적으로 말하고자 했다. 또한 지금 이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강요되어진 억압의 소재들이 혼합된 인물을 볼 때의 익숙함과 당혹감을 통해 인간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진정성의 의미를 환기시키고자 하였다. 의식을 구속하는 보이지 않는 구조에 억압되어 진정성을 잃고, 복잡한 인관관계에 얽혀있으나 눈물이 고인 눈은 고독을 말하고 있는, 그러나 억지스러울 만큼 커다란 미소를 짓고 살아가는 우리의 자화상을 담았다. ■ 김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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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CHANGWON
이창원展 / LEECHANGWON / 李椙垣 / painting
2008_1001 ▶ 2008_1007

이창원_잊혀진달동네_한지에 먹_140×72×25㎝_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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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7:00pm
인사아트센터
INSA ART CENTER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8번지 3층
Tel. +82.2.736.1020
www.ganaartgallery.com
근대의 상징으로서의 도시 풍경 ● 화가 이창원의 시선은 도시로 향해있다. 덕지덕지 붙어있는 고만고만한 집들과 한없이 이어지는 빌딩 숲, 이렇게 숨통조이는 답답함과 함께 떠오르는 도시이미지는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과 공간의 상징이며, 삶의 근원이다. 근대이후 우리의 이야기는 모두 도시를 중심으로 만들어진다.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즈』의 다람쥐 쳇바퀴 도는 삶으로부터 위시트 사사나티앙(Wisit Sasanatieng) 감독의 『시티즌 독』에 이르기까지 도시는 근대적 인간 삶의 양상을 품고 있는 표상으로 이용된다.

이창원_잊혀진달동네_한지에 채색_142×98×25㎝_2008
근대적 삶은 빠른 시간과 제한된 공간, 그리고 의미 없는 바쁜 일상과 함께 온다. 모든 사람들은 꿈을 안고 도시로 상경하지만, 도시에서 사람들은 이름을 잃고 익명의 존재가 된다. 현대인은 끊임없이 근대적 삶이 주는 편리함과 전근대적 삶의 자유사이에서 맴돈다. 그러나 육체적 편리함이란 영혼의 고독이라는 값을 치르고 얻는 것, 사람들은 도시에서 모여 살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은 더욱 더 멀어지고 우리의 삶은 원시적 건강함을 잃는다. 우리는 때로 욕망만이 이글거리는 도시를 떠나 농촌으로 되돌아가기도 하지만 다시 되돌아간 그 자리 역시 이미 근대적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상대적인 공간으로 변모하여 있다. 그러므로 근대인으로써 우리는 도시를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과거 유기적 삶의 동경과 희망을 품고 도시적 삶을 살아간다. 해마다 설과 추석이면 되풀이 되는 귀향의 고난행렬 또한 근대의 산물이 아니던가. 거대도시는 톱니바퀴의 컨베이어 벨트처럼 기계적으로 돌아갈 뿐이지 개개인의 가치가 반영되는 구조를 지니지 않는다. 인간은 시스템을 유지하는 부속일 뿐이다.

이창원_잊혀진달동네_한지에 먹_180×294×30㎝_2008
이창원이 보는 우리의 삶이란 바로 인간적 모습이 사라진 인공 주거물의 집합 속에 자리한다. 인간적 모습이 사라진 도시 풍경은 인위적이고 상대적 가치만이 지배한다. 시쳇말처럼 도시는 잘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의 두 분류가 있을 뿐이다. 빈부의 차이는 도시가 낳은 사생아이다. 도시는 근대의 욕망이 그대로 투영된 공간이고 그 욕망은 자본으로 드러난다. 덕지덕지 붙어 있는 단층의 판자집과 밀집된 공간 그 미로 같은 무질서는 도시에서 익명으로 묻혀 사는 노동자 계층의 삶이 묻어나는 공간이며, 높이 솟은 마천루와 질서정연한 대로는 자본주의 그 승리의 상징이다.

이창원_도시유감_한지에 채색_92×92㎝_2008
이창원의 눈은 바로 그 근대와 자본의 핵심을 찔러 근대의 선명한 예술적 기호와 상징을 만든다. 산이 깎이고 건물이 세워지며, 삶의 능선을 따라 또는 자연적 가치 기준에 따라 형성되었던 도로가 없어지고 기능에 치중한 신작로가 닦이고, 자연하천은 곧은 인공하천으로 정비된다. 변화는 순식간에 찾아온다. 영세민의 공간이었던 산기슭 판자촌조차 어느 틈엔가 재개발의 이름으로 허물어지고 도시 노동자들은 다시 변방의 허름한 골방으로 내몰린다. 이렇게 익명의 모습을 한 무수한 성냥갑 같은 건물은 오늘도 도시의 욕망에 의해 늘어간다.

이창원_도시유감_한지에 채색_72×195㎝_2008
작가 이창원은 바로 이러한 기능적 도시에 대한 관찰을 통하여 현재 우리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근대 우리 삶의 모습을 도시의 주거공간이라는 전형의 창조를 통해 기록하여 간다. 이창원은 전세계 근대도시가 갖는 복제성, 획일성, 몰개성과 인간적 소통이 닫혀있는 밀집 공간을 반듯한 거칠고 척박해 보이는 반듯한 사각형의 형상으로 연출한다.

이창원_도시유감_한지에 채색_99×140㎝_2008
겉으로 보면 도시풍경은 세계 어느 곳이나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비슷한 모습 그러나 그 안에서 살아가는 개인의 삶은 그리 단순한 것이 아니다. 사람마다 풍부한 감성을 지닌 자신만의 세계가 있다. 도시가 그 근대적 삶의 체계와 그 획일적 편리함과 효율에 의해 개성을 잃어간다 할지라도 그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은 사람마다 때론 꿈과 희망을 때론 절망과 좌절을 겪으며 수 없이 다양한 정감의 의식세계를 만들어 낸다. 우리는 이창원의 정제된 사각형의 밀집 속에서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정을 상상으로 그려낼 수 있다.

이창원_도시유감_한지에 채색_55×45㎝_2008
판자촌 한 구석 불 꺼진 창에서 도란도란 속삭이는 남매의 희망의 속삭임으로부터 술 취해 주정부리는 알콜중독자의 마른기침까지, 저 남산타워에 올라선 연인들의 기대에 부푼 미래에 대한 설계에서부터 아파트 꼭대기 층 인터넷에 열중하고 있는 실업자까지. 도시는 다양한 삶을 품고 있고, 많은 익명의 개인들은 자신의 존재를 매일매일 확인하며 살아간다. 도시는 사람을 소외시킬지라도 그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을 지킬 줄 아는 지혜를 배워간다. 이창원은 도시이미지의 전형을 창출함으로써 인간이 배제된 인간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대비와 은유를 통한 상상의 암시 가득한 그의 화면은 메마른 건축구조에 풍부한 생명력을 불어 넣고 있다. ■ 김백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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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IC SITE
김남수展 / KIMNAMSOO / 金南壽 / photography
2008_1001 ▶ 2008_1007

김남수_historic site_C 프린트_90×180cm_2008
초대일시_2008_1001_수요일_05:3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주말_11:00am~07:00pm
갤러리 룩스_GALLERY LUX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5번지 인덕빌딩 3층
Tel. +82.2.720.8488
www.gallerylux.net
역사의 미장센, 히스토릭 사이트 ● 김남수의 세 번째 개인전인 『히스토릭 사이트historic site』는 역사적 유물이나 유적들을 다룬다는 점에서 그의 첫 번째 개인전 『히스토리history』와 맥을 같이 한다. 그는 첫 개인전에서 역사교과서에 실린 문화재들을 사진의 대상으로 삼았다. 고등학교 국사책(국정교과서)에 실린 사진 속 대상들은 역사기술의 정당성을 보장해주는 증거물로서 반복표상 되어왔으며, 재현방식에 있어서도 하나의 상투형으로 고정되어왔다. ‘히스토리’는 이처럼 역사교과서에 실린 문화재사진들의 상투성, 나아가 역사인식의 상투성에 대한 문제 제기에서 시작했다. 그래서 컬러 라이팅 작업을 통해 우리에게 하나의 클리세cliche가 된 역사적 유물들을 낯설게 하여 그것을 재고해 보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 전시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사적지historic site에 표상된 역사성 자체를 회의한다. 사적지가 그것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 진실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지 말이다. ● 그가 이번에 촬영한 『히스토릭 사이트』는 고인돌이다. 이전의 촬영 대상들이 유사이래의 문화재들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번엔 유사이전 즉 선사시대의 유물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이런 이유에서 전시제목이 ‘프리히스토릭 사이트prehistoric site’가 되어야 더 온당할 듯싶다. 그러나 고인돌을 비롯한 유사이전의 유물들이 역사적 콘텍스트 속에 편입된 지 이미 오래며 역사적 유적지는 고대사를 기술하는 중요한 항목이 되었음은 주지하는 바이다. 따라서 문제는 그것이 언제 어떻게 역사적 좌표 위에 호명 되었는가를 살펴보는 일이 중요하다.

김남수_historic site_C 프린트_90×180cm_2008

김남수_historic site_C 프린트_90 180cm_2008
고인돌은 돌 탁자table stone를 뜻하는 돌멘dolmen의 순우리말로 한자로는 지석支石, 탱석?石이라고 표현한다. 우리에게 친숙한 한반도의 고인돌은 수 천 년 동안 제자리를 지키며 그곳에 존재해 왔지만 고고학적 대상이 되어 우리에게 ‘재발견’된 것은 불과 100여 년 전의 일이다. 구한말에 이미 서구인들에 의한 관찰과 기록이 남아있지만 본격적인 고인돌 조사연구는 일제강점기에 시도되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일본 학계에선 한반도의 석기시대 부재론이 지배적인 정설이었다. 그러나 석기시대의 유물과 고인돌이 발견되면서 기존의 학설을 뒤집는 사태가 일어났다. 그 장본인이 일본의 인류학자 토리이 류조鳥居龍藏이다. 당시 도쿄제국대학 이과대학 강사였던 토리이는 조선총독부의 고적조사사업에 촉탁으로 참여하여, 1910년 예비조사를 포함 1911년부터 1916년까지 총 7회에 걸쳐 조선의 전역을 샅샅이 조사했다. 그가 맡은 임무는 주로 석기시대의 유적조사와 주민의 신체측정 그리고 토속조사였다. ● 토리이가 조선에서 고인돌의 존재를 확인한 것은 1913년 제3회 조사에서였다. 경상도와 전라도를 답사하던 중 처음으로 고인돌을 발견했으며, 조사가 진행되면서 한반도 전역에서 그 존재를 확인하였다. 그는 고인돌을 북부 및 중부지역에서 보이는 탁자형태의 북방형과 남부지역에서만 보여지는 바둑판형태의 남방형 두 종류로 분류하고, 비교적 단순한 구조의 남방형이 진화해서 북방형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다도해의 진도와 완도 등에 다수 존재하고 육지로는 낙동강 하구 부근(김해 등지)까지 분포하고 있는 남방형 고인돌이 북쪽으로 올라가면서 북방형 고인돌로 변형되었다고 결론지었다. 한편 그는 고인돌과 함께 멘힐menhir, 스톤써클stone circle, 투물루스tumulus와 같은 거석기념물이 전세계적으로 유행했던 선사시대를 ‘거석문화시대’라고 명명한 바 있는데, 순천에서 발견한 멘힐(입석)의 존재를 통해 거석문화가 조선의 남부지역에서 행해졌던 것으로 확신했다. ● 그가 고인돌을 발견한 곳은 한반도가 처음이 아니었다. 이미 1895년에 실시된 요동반도 조사에서 고인돌을 확인했으며, 1905년 만주조사에서 또다시 확인하면서 거석유물의 존재를 의식하고 있었다. 또한 거석문화의 해석을 통해 거석기념물이 고대신앙과 태양숭배와 관련이 있고 서구 유럽 등의 거석유적이 아시아로 전해졌다는 문화전파론에 심취해 있었다. 이런 그에게 한반도에서의 고인돌 조사는 자신의 논리를 증명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따라서 고인돌의 발견은 자신의 전파론에 힘을 실기 위해 것이었으며, 나아가 그 안에 투영된 거석숭배사상을 일본의 원시문화와 종교의 잔존으로 보고 그것을 조선 문화와 종교의 원시성과 정체성을 증빙하는 도구로서 바라본 것이다. 결국 고인돌은 식민담론 창출을 위해 호명된 것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일선동조론의 논리를 고고학적으로 증명하려고 했던 일제의 고적조사사업에 얼마나 충실했는지 알 수 있다. ● 현재 우리나라는 전 세계 고인돌의 절반이 넘는 숫자가 존재할 정도로 고인돌의 나라라고 불린다. 이러한 고인돌의 존재는 우리나라 청동기시대 초기 고대국가의 탄생을 알리는 지표로 이해된다. 이어서 한민족의 역사적 기원을 고조선으로 소급할 뿐만 아니라 요동에서 발견되는 북방형 고인돌의 분포를 통해 고조선의 영토를 요동에서 한반도에 이르는 거대한 지역으로 확대 해석하는 결정적 증거로 삼는다. 토리이가 고인돌을 발견하여 근대일본의 텍스트로 읽었듯이, 우리는 근대한국의 텍스트로서 고인돌을 호명하고 있는 것이다.

김남수_historic site_C 프린트_90×180cm_2008

김남수_historic site_C 프린트_90×180cm_2008
식민담론 창출을 위해 역사상 다시 호명되거나 발견된 것은 비단 고인돌만이 아니다. 광개토왕비는 어떤가? 고구려 멸망이후 1200여 년 동안 주목받지 못하던 이 비석이 19세기 말 중국 지린성 집안시에서 발견되자 일제는 재빠르게 임나일본부설의 실증적 자료로서 제시하였고 이를 계기로 비문을 둘러싼 논쟁이 한중일간에 일어났다.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서로 다른 고대사가 만들어졌으며, 독자적인 해석을 통해 국민교육에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성시李成市의 표현대로 ‘현재를 과거에 투영하여 과거를 배타적으로 점유하려고 하는 표상을 둘러싼 투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고대사에 대한 해석상의 논쟁은 지금도 끊이지 않고 있으며, 그 범위를 역사 전반으로 확대하고 있다. 일본의 새역사교과서 검정 통과와 독도 영유권 주장, 중국의 동북공정 사업, 이에 대한 대응으로 한국의 독도우표 발행과 고구려를 배경으로 한 사극의 유행 등이 동아시아 나라들 사이에서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현행 우리나라 중고교 역사교과서에 기술된 근현대사 해석에 대한 진보진영과 뉴라이트진영 사이의 대립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이 모든 논쟁들이 동아시아 각국의 국민국가 형성과정 속에서 창출된 민족nation개념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근대와 근대성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요구된다. ● 이런 시점에서 김남수의 『히스토릭 사이트』는 역사적 유물과 그 유물이 놓인 유적지를 촬영하여 그것에 대해 국가권력이 표상해 온 역사적 미장센에 대해 강하게 의문한다. 그 미장센은 국민들을 조직하고 하나로 엮기 위해 고안한 근대적 내셔널리즘에 기초하고 있다. 이러한 내셔널리즘의 기원은 일제강점기에서 비롯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여기서 필수적인 것은 역사서의 기술인데, 일제는 일본역사학이 근대 일본의 국민국가 형성기에 중요한 역할을 했듯이 효과적인 식민지배를 위한 조선역사학을 창출하고자 했다. 결국 조선사편수회를 조직해 식민사관을 고취시킬 목적으로 『조선사』를 편찬했으며, 조선 역사의 타율성을 강조하고 실증하기 위한 고고학적 발견을 위해 고적조사를 시행했던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토리이가 조선총독부 내무부 학무국 편찬과에서 착수했던 교과서를 위한 자료수집을 위해 고적조사에 참여했다는 것이다. 그의 조사보고서는 제출되지 않아 명목상의 일이 돼버렸지만, 역사교과서를 둘러싼 논쟁은 오늘날에도 한일양국간의 중요한 현안이 되고 있다. 해방 이후 역사기술의 주체가 달라졌어도 식민담론에서 민족담론으로 이름만 바뀌었을 뿐 국민국가 형성이라는 역사테제는 여전히 동일했다. 근대적 내셔널리즘에 기초한 역사기술의 한계가 여기에 있다. 『히스토리 사이트』가 의문하는 지점도 바로 여기이다.

김남수_historic site_C 프린트_90×180cm_2008

김남수_historic site_C 프린트_90×180cm_2008
김남수는 『히스토릭 사이트』를 역사적 대상물과 그 대상이 놓인 공간 사이의 관계를 보여주기 위해 선택한 용어라고 한다. 어떤 대상이 역사적 구성물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놓은 장소성이 중요하다. 그것이 놓인 장소에 따라 매장방식이나 형태가 다르게 나타나는 고인돌의 경우 그것이 위치한 공간(장소적 공간과 시간적 공간 모두)은 매우 중요하며 또한 그것 때문에 고대사를 규명하는데 있어 절대적인 증거물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번 전시에서 장소성의 문제를 새롭게 환기시키기 위해 고인돌이 놓인 역사적 공간을 새롭게 변신시킨다. 그는 사진적 재현 과정을 통해 고인돌이 역사의 판타지로 보이길 바란다고 했다. 역사적 사실성과 역사의 판타지성을 뒤섞어서 모호한 상태의 새로운 공간으로 관객들을 위치시키고자 한다. 장소의 역사성을 판타지적 세계로 몰아넣음으로서 역사적 구성물들에 대한 총체적인 점검을 요구하는 것이다. 결국 그에게 고인돌은 역사는 어떻게 구성되며 또 어떻게 읽을 것인가 하는 하나의 수사학이며, 앞으로 계속해서 출현할 또 다른 이름의 "히스토리 사이트"를 예비하는 전제인 것이다. 그의 다름 행보가 기다려진다. ■ 이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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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린자연_近隣自然
공성훈展 / KONGSUNGHUN / 孔成勳 / painting
2008_1001 ▶ 2008_1023 / 월요일 휴관

공성훈_인공절벽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27.3×181.8cm_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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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8_1001_수요일_06:00pm
2008 대안공간 풀 기획초대 회화展
관람시간_11:00am~07:00pm / 월요일 휴관
대안공간 풀_ALTERNATIVE SPACE POOL
서울 종로구 구기동 56-13번지
Tel. +82.2.396.4805
www.altpool.org
● 다음 글은 2008년 9월 16일, 조이한(미술사, 남성학) 김정근(독문학, 연극학) 부부와 공성훈이, 공성훈 개인전 『근린자연』에 출품할 작품들을 놓고 방담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가깝고도 먼 ‘근린자연(近隣自然)’
공성훈_ 작년 개인전엔 모텔이나 운동장 등의 건물들을 그렸었잖아요? 이번엔 좀 더 자연을 그리고 싶더라고요. 제가 보기엔 이번 그림들이 프리드리히(Caspar D. Friedrich)나 낭만주의 풍경화 같은 면도 좀 있고요. 그리고 풍경화를 빗대서 현실적인 의미를 담아낼 수 없을까 그런 생각도 했어요. 그런데 그걸 담아내는 방식이 지금 좀 직접적인 것 같아요. ● 조이한_ 본인이 생각하기에는 직접적이라고요? 내가 생각하기에는 상당히 숨어있는 것 같은데 그래서 많이 숨기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는데요. ● 공성훈_ 어느 정도는 숨겨야죠. 숨기려면 풍경화를 좀 더 풍경화스럽게 잘 그려야 했어요. 드로잉적인 방법이 좀 더 개념적이 되기 쉽잖아요? 반면에 설명적이 될 수 있으니까 그런 쪽은 아니었고. ● 조이한_ 원래 프리드리히 풍경화가 정치적으로 해석이 되요. 그 사람은 의도하지 않았다고 얘기를 하지만, 그의 풍경화에서 입고 있는 옷, 왜 달빛을 등지고 바라보는 자세라든가 그런 게 다 정치적으로 해석이 되요. 프리드리히가 가지고 있었던 혁명에 대한, 이성주의에 대한 동경 그러나 좌절 그런 것들이 표현된 거다 그렇게 흔히 해석이 되죠. 제가 보기엔 이 작품들에선 그런 식의 풍경화 그러니까 낭만주의 풍경화 플러스 상징주의 풍경화의 어떤 뉘앙스도 많이 드러나는 것 같고.

공성훈_산책_캔버스에 유채_227.3×181.8cm_2008
김정근_ 아까 낭만주의에 대해서 이야기하셨는데, 낭만주의에서 이야기하는 순수한 자연은 이 작품에서는 하나도 없죠? ● 공성훈_ 예 이거 다 가짜죠. ● 김정근_ 사실 만들어진 자연이라는 개념에 더 가까운데. ● 조이한_ 낭만주의 풍경화에서의 자연은 원래 그런 거야. 프리드리히의 자연도 있는 그대로의 자연은 아니고 조합이거든. ● 김정근_ 이 그림에서도 저 낙하산이라는 게 들어오게 됨으로써 그 낙하산이 없었을 때 의미하고 있었을 때의 의미가 풍경화로서만 보더라도 상당히 의미가 차이가 난다고. 그리고 이 그림(「인공절벽」)에서 이 바위들이 실제 바위가 아니고 만들어진 바위잖아. 그리고 호수도 만들어진 호수고 이 숲도 인공으로 조림된 숲에 가까운 거니까. 그렇게 보자면 19세기 초와 21세기의 자연 개념이라는 것이 다르게 되는 거고 그러면 낭만주의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순수한 자연이라는 것도 재정립이 되어야 하는 거고. 이것도 실제로는 조경이죠? ● 공성훈_ 그렇죠. 바위 옮겨놓고 인공으로 조경한 정원이죠.

공성훈_사진 찍는 사람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3×193.9cm_2008
김정근_ 순수한 자연과 인공적인 형태가 혼합이 되어있는 게 21세기에서는 자연적인 풍경이 돼버렸거든. 그런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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