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가 되고 싶지 않은 개
곽수연 수묵채색展
2007_0709 ▶ 2007_0723

곽수연_무드셀라 증후군_장지에 수묵_54×44cm_2007
초대일시_2007_0712_목요일_06:00pm
애완견 동반 관람 가능가(애견은 갤러리 꽃에만 입장 가능합니다.)
관람시간_11:00am ~ 08:00pm
갤러리 꽃 / 2007_0709 ▶ 2007_0718
서울 마포구 서교동 337-36 지하 1층
Tel. 02_6414_8840
café Suッkara / 2007_0709 ▶ 2007_0723
서울 마포구 서교동 327-9 산울림소극장 1층
Tel. 02_334_5919
www.sukkara.co.kr
개는 인간으로 진화(進化)중 ● 오늘날 급속한 산업사회의 발달로 이루어진 현대사회의 세계는 인간적인 냄새를 컴퓨터에 빼앗기고, 인간과 자연 사이에 사유하는 서정과 낭만의 즐거움이 줄어들고, 게다가 이러한 21세기 산업사회의 무한경쟁시대는 사람들로 하여금 인문학의 기조에 의한 상상력의 의식마저도 빼앗아 가고 있다. 디지털 시대와 현대인의 삶 속에 개는 일부 사람들이 좋아하는 기호식품에서 일반적인 애완견으로 자리매김 할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의미로 다가서고 있다. 인간이 애완동물을 통해 얻게 되는 가장 큰 행복은 감동적인 교감일 것이다. 개는 2만년 동안이나 인간과 같이 생활하면서 벗이 되어주었고, 조력자(助力者)로 남으면서 인간은 그들에게서 위안을 받고 있다. 아마도 개는 인류와 오랜 시간을 함께하는 동안 인간과 개의 유기적인 관계 속에 서로 혼재되어 나타나고 있는 이분법적 구조의 현상이 아닐까 한다.

곽수연_회춘(回春)_화선지에 먹_138×89cm_2007
‘작품 속에 개는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고 또 우리가 길에서 만나는 불특정 다수의 인간이기도 하다. 이런 면에서 개는 인간의 자화상을 볼 수 있는 수단이며, 사람보다 더 인간과 가까운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본 필자는「개가 되고 싶지 않은 개」라는 주제를 인간의 욕망과 진정한 행복의 의미는 무엇인가! 라는 입장에서 노자(老子)의 사상과 연계하여 본다면, 노자의 철학사상은 과학의 발전과 함께 욕망의 추구가 극에 달하는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되새기게 하는 그의 사상은 다음과 같은 지혜를 요구하고 있다. 인간들이 물질에 속박당하지 말고 그것을 제어할 수 있는 인생관을 가지라고 말한다. 속세(俗世)에 매이지 않고 산과 물 사이를 오고가며 유유자적(悠悠自適)하게 살아가는 신선의 모습을 마음속에 그려보라고 한다. 그렇다 현대사회가 복잡한 패턴으로 흘러갈수록 각기 개인들은 현실을 잠시 벗어나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 할 것이다. 과거의 사람들과 다시 만나면서 그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다시 나를 발견하고, 현실에서 드러낼 수 없는 내면의 것들을 자연스럽게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곽수연_일요일 오후_화선지에 먹_61×55cm_2007
오늘날 인류는 다원화의 시대를 맞이하여 숨 가쁘고 각박한 현실을 살아가는 현대인이 쉽게 받게 되는 스트레스와 상처를 인간은 애완견을 통하여 얻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이상의 것을 얻고 있다. 그러나 평소에는 가장 친한 친구의 소중함을 느낄 기회가 많지 않듯이 정작 우리 사회에서 개라는 친구와 언제부터 어떻게 정을 나누고 쌓아왔는지 가슴깊이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는 것 같다. 그저 개로써... 그러나 여기 곽수연은 인간과 개의 관계에 있어서 종속적 또는 하등 동물로 구분되어 온 개에 대하여 오랜 시간 동안의 연구를 통하여 새롭게 관찰되어 나타나는 표상을 재치 있게 들추어내고 있다.

곽수연_김기사_화선지에 먹_66×55cm_2007
곽수연의 회화는 서구문명의 물질만능 주의로 인해 발생되는 각기의 현시적 현상들을 개를 통하여 함축적으로 꼬집어내고 있다. 이번‘개가 되고 싶지 않은 개’그림은 일차적으로 시각적 즐거움이 매우 크다. 이러한 시각적 즐거움은 그의 독특한 사고의 구성에서 시작되는데, 즉 개가 인간이 된 듯한 착각에서 빚어지는 에피소드를 발견하는 즐거움을 제공하고 있다. 마치 개가 인간으로 진화되어 엉뚱한 하나의 익살과 해학적 인간형상으로 환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곽수연_투견-링 에선 아무도 날 도울 수가 없다_장지에 먹_145×76cm_2007
이 수수께끼 같고 우스꽝스런 인간 꼴 형상은 또 다른 대중문화의 프리즘을 보여주고 있는 그만의 독특한 시각의 진실성에 기인 한다고 하겠다. 이러한 작가의 생각은 21세기 새로운 문화현상과 현대인들의 특징적 문화 양상 및 지향 점의 상실, 공포와 불안감 등에 대해 인간으로 구성된 사회의 역할은 무엇인가라는 토론과 담론이 형성되지 않은 채 ‘인간의 욕망과 경쟁구도’만 가속화 되어 가고 있는 현실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또한 이러한 인간의 정신세계나 심리적 자화상을 분석하여 인간의 공정성, 객관성 및 역할과 가장 아름다움 삶의 가치를 상실하고 허둥대는 현대인의 단상을 가장 우려스런 현상적 모습으로 그려내고 있다. 곽수연의 회화 방식은 전통 수묵의 모던적 표현 방식과 달리 포스트 모던적 수묵의 해석을 감미하여 드러나는 재현으로써 새로운 현시적 사고의 표현을 형상의 미지로 풀어나가고 있다는 점에 예술적 의미와 더불어 그 가능성에 대해 주목하게 된다. ■ 이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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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뽁 뽁 이’展
BUBBLE WRAP 2007 SEOUL展
2007_0705 ▶ 2007_0719
‘뽁 뽁 이’展_예화랑_2007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예화랑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7_0705_목요일_05:00pm첸주펜 Chen Ju Pan (타이완)_김두진
Dujin Kim(한국)_고자영 Jayong Koh(한국) 이재훈 Jaehoon Lee(뉴질랜드)_조이스 슈 Joyce
Hsu(캐나다)_김정선 JungsunKim(한국) 아멘테로스 레이 Rey Armenteros(미국)_중생
JS.Factory(한국)
예화랑 서울 강남구 신사동 532-9 가로수길 Tel. 02_542_5543 / 3624 galleryyeh.com
뽁뽁이전-버블 속의
개인들 ● 발포비닐시트, 완충포장재를 흔히 ‘뽁뽁이’(Bubble-Wrap)라고 부른다. 손가락으로 눌러 터트릴 때 나는 소리에서
연유하는 것이리라. 수많은 기포들이 일정한 높이를 지닌 체 균등하게 배열되어 있는 뽁뽁이는 깨지기 쉬운 물건을 싸는 포장재를 가리킨다. 손상되기
쉬운 물건을 포장하고 보호하며 편리한 이동을 도와주는 이 비닐은 상품과 소비, 이동, 일회용품, 신상품, 몰개성 등을 은유한다. 그런가하면
‘거품’이란 뜻도 포함한다. 버블의 텅 빈속과 이를 감싸고 있는 껍질은 공허한 우리 현대인의 삶과 무척 많이 닮아있다는 것이다. 끊임없이
생산되는 상품들은 만족감을 추구하는 인간을 충족시키기 위해 보다 과장되어 포장되며, 때로 그것들은 ‘버블랩’의 질서정연하게 반복된, 텅 비어버린
기포처럼 소비되어지며 사라져버린다고 본다. 아울러 포장하고 감싸고 완충작용을 하는 뽁뽁이는 치유나 보호 등의 의미로도 읽을 수 있다. 이처럼
중의적인 의미로 읽을 수 있고 동시대 삶과 문화를 은유하는 뽁뽁이를 타이틀로 내건 이번 전시에는 다국적 작가들이 참여했다. 한국과 미국,
타이완, 캐나다, 뉴질랜드에서 온 작가8명이 그들인데 여기서 8라는 숫자는 불완전한 존재의 의미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이들은 미술행위를 통해
동시대 삶과 현실의 문제를 다루는 한편 사회적, 문화적, 성적 정체성을 가진 자신들의 욕망과 그 단절에 주목한다. 이 모든 문제의식을
‘뽁뽁이’라는 주제 안에 거느리고 있다. 오늘날 미술이 인테리어나 감각적인 볼거리를 만들어내는 ‘공작’수준의 행위로 제한되고 위축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은 여전히 미술을 사회적 언어와 자의식의 기호로 사용하는 한편 현재 미술의 위상과 쓰임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이들은 무엇보다도 모든 것의 소비가 조장되는 현대사회에서 예술의 의미를 묻고자 하는 의식을 공유한다. 모든 것이 재빠르게 소비되고
순환하는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 역시 그러한 ‘트렌드’로 소비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인식, 그리고 그에 대한 비판적 사유가 이들 작가의
작업세계를 관통하는 키워드 내지는 관류하는 의식들인 셈이다. 그래서 이들은 “상품미학과 욕망으로 대변되는 현대사회의 소비적 시스템에 대한
질문으로, 역사적으로 가벼움이라 치부되었던 소외된 가치들에 대한 재발견으로, 또한 현대인이 갖는 공허함의 치유에 대한 몸짓으로” 자신들이
작업세계를 가꾸고 일련의 기획전시를 일구어나가고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결국 현재를 살아가는 자신들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과 함께 동시대 이미지의
생애와 그 의미를 부단히 물어보는 것이 화가의 일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미지에 대한 이미지적 사유, 이미지에 부단히 개입하고 그 이미지에
기생하는 한편 이를 전복하고 그 배후에 자리한 의미를 읽어내는 이미지의 사회학적, 인문학적, 문헌학적 접근 등이 그것이다. ■
박영택

아멘테로스
레이_Obscurity
아멘테로스 레이(Rey Armenteros) ● 실제 버블 랩에 물감을 바르고
이를 종이에 찍어내는 반복적인 작업을 통해 일정한 패턴에 의한 추상적인 원형이 점들의 집적과 그 사이로 문득 사람의 형상이 드러나는 그림을
보여준다. 잉크 속에서 순간을 갖는 이 이미지는 일종의 이벤트의 연속으로 변한다. 이는 어떤 현상이나 연결 점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 일이자
새로운 기억과 가상의 역사를 조정하여 만드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일종의 주술적 행위, 종교적 의식을 연상시키는 이 방법론은 우연적인 잉크의
번짐과 집적 아래 드러나는 이미지, 자신도 모르는 그 무엇을 찾아 헤매는 행위의 은유다. 아울러 그것은 숨을 들이쉬고 내뱉는 일련의 행동과 매우
유사하다. ■ 박영택 아멘테로스 레이(Rey Armenteros) ● Rey Armenteros의 그림에는 시대와
지역을 확정하기 어려운 어떤 공간이 어느 정도는 감상적이고 어느 정도는 그로테스크한 느낌으로 묘사되어 있다. 요괴와 마녀가 인간과 공존했다던
동부 유럽의 어떤 지역 같기도 하고, 나그네를 냉담하게 경계하며 맞이하던 서부영화 속 멕시코의 촌락 같기도 하다. Armenteros의 필치는
이야기와 영화, 공상과 추억 사이를 오가며 부유한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작품들은 이런 화면 위에 물감을 바른 ‘버블랩’을 직접 찍은 것들이다.
‘버블랩’의 뭉글뭉글한 감촉이 물감 자국이라는 매개를 통해 화면 위에 옮겨지자, 그림 속 형상들은 아득하게 물러서면서 ‘버블랩’의 자국과
뒤섞여서는 더욱 신비하고 풍요로운 장면을 낳는다. ■ 이연식

고자영_창3
고자영
● 손으로 그린 페인팅과 와이드 칼라 인화된 사진을 통해 조합된 이상한 풍경화를 보여준다. 전시장에 가설된 이 가짜 풍경은 창문(프레임)과
조명으로 인해 마치 실제로 존재하는 바깥 풍경을 창문을 통해 엿보는 듯한 기이한 실재감을 안긴다. 그러나 그것은 복제된 이미지다. 작가는 자신의
원본그림을 와이드 칼라 인화하고 이를 창문가 조명으로 연출한 후 설치한다. 그것은 마치 잘 만들어진 무대 세트와도 같다. 이 초현실적 효과는
익숙한 타성에 젖어있는 우리 주변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한편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독창성에 대해 의구심을 자아내게 한다. 그러니까
작가는 원본을 복제하는 과정을 통해 새롭게 생성되는 의미와 그 가치에 대해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茱?작가는 원본과 복제본의 관계가 더 이상
위계적 질서 속에서 논의되는 것에 대해 반대한다. 작가의 작업은 그 두 가지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의문이며 복제의 과정 중에 생성되는 의미에 더
큰 관심을 두고 있다. ■ 박영택 고자영 ● 갖가지 식물(주로 아열대, 열대 식물)로 가득 차 있는 고자영의
작품을 보고 있자면 왠지 이들 나무 둥치 사이나 커다란 잎 아래쪽에서 사람이나 짐승이 불쑥 모습을 드러낼 것 같은 느낌이다. 고자영의 그림이
천진한 화풍으로 이국의 풍경을 만들어 냈던 앙리 루소(Henri Rousseau)의 그림과 통하기 때문에, 루소가 그린 이국의 식물들 사이에
피리를 불어 뱀을 조종하는 사람이나 소파에 길게 누운 나녀(裸女)가 자리 잡고 있는 것처럼 고자영의 그림에서도 뭔가가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고자영은 손쉬운 답을 제시하는 대신 긴장감을 유지한다. 화면에는 사람이나 짐승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그 때문에 뭔가가
당장이라도 나타나 눈앞에 보이는 풍경의 분위기를 바꿔 놓을 것 같은 기대감이 화면 위를 떠돈다. 고자영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게 다
무대 장치에 삽입된 무늬일 뿐이라며 짐짓 위악적인 장치까지 집어넣는다. 과연 저 잎 뒤에는, 나무 둥치 뒤에는 뭐가 있을까? 이 질문을 뭉개듯
다가서는 저 인화지의 얇은 두께에는 뭐가 스며 있을까? 관객의 입장에서는 불온한 기운과 미묘한 정념을 붙들고 싶어지지만 고자영은 관객이 내민
손을 뿌리치는 것처럼 보인다. 그 때문에 관객은 그녀가 엮어낸 화면에서 눈을 떼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 이연식

첸쥬펜_Incubator
첸주팬(Chen
Ju Pan) ● 매달려있거나 부유하는 듯한 인형형상들을 설치했다. 마치 마네킹과도 같은 일률적으로 복제된 인간이 형상을 한 이 존재는
표류 또는 부표하는 개인 심리적 상태를 반영하거나 사회적 일원으로서 끊임없이 자신이 세상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것이 중요함을 말한다.
개인적 자율성이란 가벼움과 사회적 책임의 무게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일에 있어서의 충돌, 독립성과 책임 사이의 행복한 균형을 추구하는 유동적이고
독특한 지각을 보여준다. 여기서 부표 또는 곡류하는 것은 부정적이라기 보다는 의미 있는 탐사에 해당한다. 그러니까 이 부표는 맹목적인 고립과
소외감을 연상시키는 동시에 무한한 자유로움과 관련되어있는 것이다. ■ 박영택 첸주팬(Chen Ju Pan) ●
Chen Ju Pan이 빚어 만든 여성들은 하나같이 고요하고 차분한 표정으로 이곳이 아닌 어딘가를 꿈꾸고 있다. 팔다리도 없고 그저 얼굴과
몸통으로만 - 여성임을 드러내는 볼록한 가슴과 풍만한 둔부로만 - 존재한다. 그녀들은 살과 뼈를 지닌 존재라기보다는 어떤 액체나 기체가 빚어낸
존재들처럼 보인다. 좀 더 노골적인 비유를 찾아보자면, 그녀들은 마치 튀어 올라온 우유방울이 빚어낸 존재들처럼 보인다(한국에서는 1980년대
초반에 우유방울이 왕관 모양으로 튀어 오르는 모습을 정지 화면으로 잡은 TV광고가 크게 인기를 끈 뒤로, 튀어 오르는 우유방울의 형상은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각인되어 있다). 그런 때문에 그녀들의 형상은 다음 순간 형상 자체가 사라져 버릴 듯한 불안감과, 짧고 우연적인 순간을 어떤
계기를 통해 영속적으로 이어 가는 듯한 긴장감을 준다. 그런 그녀들이 때로는 카누를 타고 어디론가 향한다. 수동적으로 보이던 그녀들이 배를 타고
항해를 한다는 건 일견 모순처럼 여겨진다. 그녀들이 향하는 곳이 어디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그녀들은 고요하고 엄숙하게 공간을 장악하면서 불가사의한
공감을 자아낸다. 그녀들을 뒤따라 나서도 좋을 듯한 느낌이다. ■ 이연식

이재훈_space
tree
이재훈 ● 뉴질랜드의 오크랜드라는 도시에 위치한 건설 폐기물장에서 수집한 이미지들을
디지털상에서 콜라주했다. 도시에서 버려진 폐기물, 고철더미들이 탑처럼 수직으로 세워진 장면은 가상의 것으로 현실풍경에서 출발하지만 조금 과장된
것이다. 그러나 이 풍경은 컴퓨터상에서 허구로 생성된 문명의 얼굴의 상징이 되었다. 또한 플라스틱으로 제작된 음식 모델들을 다룬 작업은 그
플라스틱 모형물들이 고도로 상업화 된 우리의 음식문화에서 경쟁적으로 유혹의 대상을 찾는 포장된 상품의 미끼라고 본다. 경쟁적으로 유혹의 대상을
찾는 포장된 상품의 미끼인 이 모형들을 무작위로 섞어서 설치한다. 여러 나라의 음식들이 섞여있고 더구나 다양한 나라의 향수와 유기적으로 섞여
화려하고 달콤하고 유혹적인 냄새까지 곁들여놓는다. 냄새가 없는 플라스틱에 냄새를 부여하고 시각에 후각을 덧붙이는 작업이다. 또한 그는 여행 중에
각기 다른 시간과 공간에 채집된 텍스트와 상황들을 디지털 상에서 재구성하여 끊임없이 나열시키고 이를 극사실화된 공간으로 확장시킨다. 디지털
콜라주사진작업이며 일종의 피부로 채집하고 기억한 다큐멘터리작업이기도 하다. 자신의 몸 주변을 이루는 구성물들을 포함하는 이 작업은 자기 자신의
유목주의적 정체성에 바탕하여 이루어진다. 고정되고 불변하는 것으로 인식되던 존재자, 시간성, 공간성의 테두리는 순간 무효화 되면서 그것들은
미디아의 유기체적 구조망을 통해 끊임없이 순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 박영택 이재훈 ● 건설 폐기물을 재구성한
사진을 선보인다. 하나는 시멘트 폐기물을, 다른 하나는 고철 폐기물을 쌓아 올린 것인데, 마치 사람의 옆얼굴처럼 보인다. 일찍이
아르킴볼도(Archimboldo)가 과일과 채소, 수목과 불꽃, 수중 생물 등 갖가지 자연물을 모아 만들어 냈던 환상적인 초상화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아르킴볼도의 초상화가 생멸을 거듭하며 순환하는 자연의 풍요로움을 드러낸 작품이었던 반면, 현대문명이 무분별하게 쏟아내는 폐기물을 쌓아올린
이재훈의 초상화는 자못 비관적인 전망이 담긴 기념비이다. 순환의 통로를 틀어막아서 자연의 조건을 위협하고 결국 인간의 생존 조건을 위협할 것이
분명한 거대하고 불길한 기념비이다. 〈Space Tree〉나 〈Sunset〉 같은 사진 작품은 ‘순환’과 ‘증식’을 둘러싼 이재훈의 사유를
모형처럼 드러낸다. 〈Virtual Station〉은 마치 혈관처럼 도시를 순환하는 지하철의 모습을 담았다. 지하철이라는 순환계가 없는 대도시를
이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터. 게다가 지하철은 계속해서 새로이 건설되어 더욱 복잡한 망을 이루는 한편 도시 외곽으로 뻗어나간다. 멈출 줄
모르는 이 움직임이 인간의 미래에 대해 무슨 의미를 갖는지를, 정작 지하철에 몸을 맡긴 시민들은 알지 못한다. 그들은 혈관 속을 흘러 다니는
혈액처럼, 도시를 구성하면서도 정작 유기체가 된 도시에 대해 뭔가를 생각하고 결정할 수는 없다. 모조 음식물을 이용한 〈Festival〉은
폐기물로 쌓은 기념물과 마찬가지로, 마땅히 뚫려 있어야 할 순환의 통로가 틀어 막힌 양상을 드러낸다. 합성수지로 만든 모조 음식물은 실제
음식물을 섭취하라고, 음식점에서 돈을 쓰라고 유혹한다. 음식물은 누군가가 먹어 치워 소화시키거나 아니면 그대로 썩어 분해될 테지만, 음식물을
먹도록 사람들을 이끄는 모조 음식물은 정작 이런 순환의 고리를 틀어막고 버티고 있다. 모조 음식물은 썩지 않는다. 썩지 않기 때문에 기괴하다.
■ 이연식

김정선_보영
김정선
● 얼굴이 부재한 사람들이 입고 있는 구체적인 티셔츠에 새겨진 ‘얼굴’을 그렸다. 이 이미지는 사진을 통해 차용한 것이다. 그 얼굴은 체게바라,
오드리 헵번, 미키마우스, 비틀즈 등이다. 유혹적이고 매혹적인 대중적 아이콘이자 우상인 이들의 초상이 젊은이들이 피부, 옷에 부착되어 함께
한다. 그 도상들은 마치 문신 같다. 옷, 악세사리, 기호품 등도 동일한 기능을 한다. 그것은 또 다른 존재의 표상이자 부재하는 정체성을
대신하는 기호로 부유한다. 정작 사람은 없고 티셔츠에 자리한 이미지, 도상들만이 실제 힘을 발휘하고 존재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이미지가 실재를
대신하고 이를 넘어선다. 이미지를 소비하면서 개성을 실현한 듯 자연스러운 그 모습들이 쓸쓸하다고 작가는 말한다. ■
박영택 김정선 ●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알려진 것과 알려지지 않은 것의 관계를 신중하게 살펴 왔다.
김정선이 자신과 가족들의 옛 사진을 화포 위에 옮겼을 때 그녀는 사진들 속의 모습을 뚜렷이 드러내는 대신 흐릿한 붓질 속에 감추었다. 이로써
그녀의 개인적인 추억은 개인적인 영역을 넘어 보편적인 의미로서의 추억을 암시하게 되었다. 김정선이 사진을 소재로 한 작업에서 이미지는 불투명하고
모호한 영역으로 후퇴하는 듯했지만, 레이스와 벽지 무늬를 소재로 한 그녀의 최근 작업에서 이미지는 급작스레 관객의 눈앞으로 다가들다 못해 관객의
멱살을 쥐는 듯하다. 그저 눈을 편안하게 하는 듯싶었던 장식적인 패턴들 속에서 베트남 전쟁과 광주학살을 비롯한 역사 속 비극의 장면들이
튀어나와서는 숨어 있던 기억을 파고들며 물음을 던진다. 그때 보았던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고, 그때 보았던 것들을 이제는 어떻게 할 것이냐고.
김정선의 최근 작업에는 셔츠를 입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셔츠에는 영화와 만화 속 주인공들이나 팝 스타 등의 모습이 담겨 있는데 정작 셔츠를 입은
사람들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이 작업은 그녀가 과거의 작업에서 옛 사진들을 끌어들여 어떤 사람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물었던 것과 연결된다. 김정선의 발걸음은 아무래도 익명성의 영역으로 이끌리곤 한다. 그녀는 정체성을 쉽사리 규정하는 것을 거부하고, 대신에
정체성을 둘러싼 문제가 대단히 모호한 것임을, 그리고 정체성은 종종 외부의 임의적인 장치들에 의해 규정됨을 거듭 상기시킨다. ■
이연식

조이스
슈_Bobby
조이스 슈(Joyce Hsu) ● 장난감이나 만화캐릭터들의 성격을 반영해서 우리의 삶에서
상상이나 공상 등 정신적 영역까지도 기계화되고 상품처럼 포장되었는가를 언급하고 있다. 작가가 직접 제작한 날개가 달린 이 장난감 인형들은
자가만의 세계, 왕국의 등장인물들이다. 동심의 세계를 보여주는 듯 하지만 이 역시 축소된 사회망과 유사하며 엄격한 현실에서의 계급적 계층적
지배논리를 반영한다. 여기서 작가는 자신의 욕망을 극대화하는 여왕벌의 존재로 자리잡는다. 키덜트적인 이 작업의 배후에는 기묘한 욕망과 계급,
어른의 사회를 신랄하게 풍자하는 시선이 놓여있다. ■ 박영택 조이스 슈(Joyce Hsu) ● 날개가 달린
장난감을 손수 만들어 왔다. 단지 장난감을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이들 장난감에 이름과 계급을 부여해서는 자신의 왕국을 구축했다. 우리 주변에서
아이들이 행동하는 걸 관찰하거나 자신이 어렸을 때를 떠올려 보면, 평등과 연대(solidarity)는 어리고 ‘순수한’ 영혼의 발명품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오랜 투쟁과 반목 끝에 도출해 낸 타협의 산물이다. 그래서 아이들이 떠올린 공상의 나라 중에 시민이 평등한 나라는 없다. 오히려
실제로 존재하는 국가보다 더욱 권위적인 나라가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 <슈렉>이 옛 동화를 뒤틀면서 시리즈를 이어가고 있지만
공화국을 무대로 한 <슈렉>은 앞으로도 결코 나오지 않을 것이다. Joyce Hsu의 장난감 군단은 유희적인 몽상의 세계를 확장시켜
나아가는 한편, 몽상에까지 투영된 위계와 집단의식의 문제를 날카롭게 드러낸다. ■ 이연식

김두진_blur blur blur_캔버스에
유채_160×160cm_2004
김두진 ● 이성애 문화에 숨어있는 동성애적 코드의 시각적 재현에 관해
말한다. 이성애 중심사회가 생산하는 시각문화의 경험과 그 체험을 주관적 상상력과 결합하여 어떠한 결과물로 재현하고 있는 것이 그의 작업인
셈이다. 그가 다루는 이미지는 일상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시각체험에서 온 것이며 그것들은 대부분 영상매체와 여러 대중매체를 통해 습득된
이미지들이다. 사실 그러한 이미지들은 사람들에게 일정한 관념, 가치관을 주입하는, 훈육적 기능을 담당하는 텍스트들이다. 그러한 매체 속에
잠재적으로 지배하는 이성애적 문화 내부에 숨어있는 동성애적 코드를 발견하거나 이미 고착된 이성애적 아이콘을 차용하여 전이함으로 그 정형화된
의미를 제거하는, 일종의 정치적 전략에 대한 탐구가 그의 그림이다. 그것은 뽁뽁이처럼 증폭되고 소멸되는 동성애의 욕망에 대한 개인적인 진술이자
생의 모색이기도 하다. ■ 박영택 김두진 ● 16세기 초에 영국 궁정에서 활동했던 화가 한스 홀바인(Hans
Holbein)은 당시 영국에 사신으로 와 있던 프랑스인 관료들을 모델로 〈대사들(The Ambassadors)〉이라는 그림을 그렸다. 이
그림은 수수께끼 같은 형상이 삽입되어 있는데, 이 형상은 관객이 그림의 아래쪽에 바짝 붙어서 위쪽을 비스듬히 바라보면 해골의 모습이 된다.
이렇게 숨겨진 해골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 유명해서, 이제 〈대사들〉을 보는 관객은 이 그림을 제대로 보려면 두 개의 시점이 필요하다는 점을
안다. 정면에서 보는 일반적인 시점과, 해골이 완전한 모습으로 드러나는 또 하나의 시점. 해골을 제대로 보는 순간 당연히 그림의 다른 부분은
어그러진 모습으로 보일 것이다. 〈대사들〉에는 해골이 삽입되어 있다면, 김두진의 〈Hey! Honey, Look at me tender〉에는
영화와 만화 영화에 등장하는 슈퍼 히어로들의 얼굴이 길쭉하게 삽입되어 있다. 해골이 삶과 세계의 덧없음을 암시했다면 슈퍼 히어로들은 영원히
쇠하지 않는 생명력을 대표한다. 게다가 김두진의 그림에는 〈대사들〉과 달리, 비스듬하게 봐야 할 형체가 세 개나 들어 있다. 그래서 베트맨의
얼굴을 제대로 보려면 데어데블과 스파이더맨의 얼굴은 안 보이고, 스파이더맨의 얼굴이 떠오르는 순간에는 베트맨과 데어데블의 얼굴이 밀려나는
것이다. 물론 김두진이 배경에 그려 넣은 동성애 장면도 모두 어그러져서 기괴한 문양처럼 보인다. 홀바인의 <대사들>은 신기하게
보이기는 하지만 당시에 유행했던 아나모르포시스(왜상 : anamorphosis)의 관례에 맞춰 질서 정연하게 그려진 그림인 데 반해, 김두진의
그림은 다양한 시점을 혼란스럽게 중첩시킨다. 세상이 왜곡되어 보이는 건 하나의 시점에 의존해서 보기 때문이라고 김두진은 말하는 것 같다. 세상을
바라보는데 하나의 시점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고, 설령 여러 시점을 오간대도 세상을 보는 완전한 시각을 획득할 수는 없다. 시각의 불완전함을 깊이
의식하는 수밖에 없다. ■ 이연식

박성호_중생-신계동1-340
박성호(JS.
Factory) ● 일상공간을 스캔하듯 촬영한다. 그는 도시의 바닥과 특정한 공간을 연속적으로 채집한다. 그 이미지들이 집적되고
모자이크되면서 무한히 복제되고 증식되는 일상의 이미지가 초상화된다. 작가는 화장실을 촬영했다. 지극히 사적이면서도 대수의 대중들과 공유하는
공중화장실의 내부를 촬영했다. 화장실이란 공간은 인간의 본능과 직결되는 곳으로 사회화되지 않은 어두운 욕망이 충족되기도 하고 여러 만남과 정보가
공존하는 곳이자 가장 내밀한 곳이기도 하며 현재 한국 사회의 생활상과 문화를 압축해서 보여주는 장소다. 이 화장실 작업 또한 이전작업과
연장선상에서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메트로폴리탄의 자화상”이다. ■ 박영택 박성호(JS. Factory) ●
화장실을 찍은 작품들을 선보인다. 요즘은 깔끔한 주변 환경에 대한 요구가 높아진 때문에 예를 들어 카페나 술집이 화장실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면
손님이 끊어진다. 그런데 깔끔함에 대한 요구는 환경에는 의외의 방식으로 영향을 미친다. 배설물을 농토에 뿌렸던 농경 사회와 비교하면 현대 사회는
배설물을 활용이 불가능한 상태로 처리한다. 게다가 배설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많은 물을 함께 소비한다. 그저 지저분한 것을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우기 위해 막대한 대가를 지불하는 셈이다. 박성호가 냉담하게 포착한 배설의 공간은 이처럼 불모와 은폐, 기만의 공간이기도 하다. 화장실은
깨끗해졌지만 배설 행위에 담긴 석연치 않은 감정을 완전히 몰아낼 수는 없다. 어차피 배설물은 몸에 있는 구멍에서 나와서 몸 밖의 다른 구멍으로
들어간다. 구멍과 구멍 사이의 공간에서는 무슨 일인가가 벌어질 것만 같은 느낌이 늘 붙어 다닌다. 괴담이나 공포 영화에서는 재래식 변소 뿐
아니라 수세식 변소의 변기 속에서도 끔찍한 것들이 튀어 나온다. 뱀이나 여타 괴물, 심지어는 살아 있는 사람까지. 영화
<트레인스포팅(Trainspotting)>에서 약에 취한 주인공은 변기 속 ‘드넓은 바다’를 헤엄치고, 일본 영화
<하나코(Shinsei toire no Hanako-san)>에서는 아예 화장실의 변기 구멍이 저승으로 이어진다는 관념까지 등장했다.
일본에서 연원한 건지 애초부터 한국에서 전해져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화장실에서 미래의 배우자를 본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한밤중(자정)에 재래식 변소에 앉아 거울을 들여다보면 미래의 배우자가 보인다”라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를 뜯어보면 공포를 유발하는 장치를
있는 대로 겹쳐 놓고는 그것을 견뎌 내라고 주문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때로는 입에 칼을 물고 거울을 봐야 한다는 내용도 곁들여진다. 거울을
보는 순간 칼이나 거울을 떨어뜨리면 미래의 배우자에게 불행이 닥칠 거라고도 한다. 박성호가 재래식 변소를 찍은 사진들은 변소에 대한 색다른
관념을 산뜻하게 드러내고 있다. 배설물을 비료로 활용하던 자연친화적 변소 한복판에 현대적인 변소의 부속물인 양변기가 들어와 있다. 주술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이 공간에서 양변기는 때로 희생제의의 공물 같기도 하고 때로 주술사 같기도 하다. 불이 환하게 켜진 현대식 화장실은 불모를
암시하지만, 색등과 촛불이 은은히 빛나는 이 재래식 변소는 어딘가 다른 세상으로 통할 것만 같다. ■ 이연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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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en home
송명진 회화展
2007_0704 ▶ 2007_0714

송명진_Riversid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94×259cm_2007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송명진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7_0704_수요일_06:00pm
노화랑
서울 종로구 관훈동 103번지
Tel. 02_732_3558
www.rhogallery.com
세계의 이면, 바깥으로의 트임 ● [풍경의 표면](2005) 전을 비롯하여, 송명진의 그림에서 알아볼 수 있는 구체적 모티브로 교각, 풀숲 등이 있다. 재현적인 요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주의와는 무관한 그림 속 모티브가 필자도 알고 있는 익숙한 장소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 후, 그림을 이해하기 위한 실마리로 그 장소를 겹쳐서 보았다. 서대문구, 마포구 등을 거치며 한강에 이르는 홍제천은 요즘 청계천처럼 ‘자연형 하천’으로 복구시킨다고 공사가 한창이다. 비가 오지 않을 때는 건천(乾川)으로 교각의 받침대인 거대한 콘크리트 판과 거친 자갈들, 그 사이사이로 드문드문 자란 잡초들이 볼썽사나운 곳이다. 그나마 요즘은 자전거 및 운동코스로 개발이 된 상태지만, 몇십년 전만 해도 홍수 때 오물이나 돼지가 떠내려 오던 대형 하수도였고, 그 주변으로 도시 빈민들이 몰려 살았다. 물론 공해가 없던 몇백년 전에는 생명의 젖줄이었던 곳일 터이다. ● 젖줄에서 대형 하수도로, 건천으로, 개발을 다시 개발하려는 시대에 돌입했다. 물이 흐르지 않는 건천 위로는 여러 갈래로 뻗은 교각들이 있고 하천을 가로지르는 수많은 다리들, 얼마 전에 경의선 공사구간으로 폭삭 내려앉은 철도까지 몇 갈래 걸쳐있으면서, 도심 한가운데 산업시대의 풍경이 남아있는 꽤나 야성적인 구간이 곳곳에 존재한다. 작가는 나름 운치 있는 뚝방길의 가로수가 아니라, 드러난 하천 바닥에 드문드문 펼쳐진 척박한 장소에 주목한다. 온통 초록인 송명진의 그림과는 달리, 이곳의 식물은 땅 속에 깊이 뿌리 내릴 수 없다. 비라도 한번 크게 오는 날에는 모두 휩쓸려 내려가기 때문에, 식물은 우기와 우기 사이에 급격히 번성했다가 사라지는 일회성 군락을 이룬다. 그 장소는 현재 자연이 처해있는 모든 상황을 압축한다.

송명진_Riverside(부분)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94×259cm_2007

송명진_Green shelter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3×162cm_2006

송명진_Escape from paradise(부분)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81.8×227.3cm_2007
새마을 운동 식으로 어느 한날 쭉 심어놓은 듯한 가로수하며, 계절별로 줄지어 갈아 심어지는 화초들, 몰래 일구어 놓은 개인 경작지, 그리고 오랜 세월로 균열이 간 뚝방 틈사이로 자라난 풀숲에 이르기까지, 그곳을 덮고 있는 식물들은 송명진의 그림에 잘 나오는 네모진 잔디판처럼 깊이와 고유의 질이 제거된 자연이다. 이러한 자연에 대한 인식에 회화적 공간과 환영 간의 공방전이 가세한다. 작가의 작업 지반은 도심의 버려진 바닥부터 회화의 바탕까지 이른다. 바탕을 살짝 덮은 초록 융단같은 시뮬라크르로서의 자연은 암울하고 풍자적인 요소가 암시되어 있을 때조차도 기이한 아름다움으로 남아있다. 그곳은 선개발로 인해 난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은 곳이며, 전에는 주변부였기에 이제는 오히려 도심의 공백과 숨통을 틔워주는 곳이 되었다. ● 서두가 길었지만, 2000년대 중반 송명진 회화의 단초가 되었던 곳은 이처럼 원초적인 자연이라기보다는, 시뮬라크르에 가깝다. 그 위를 뒤덮는 녹색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림에 등장하는 몇 안되는 색이 모두 녹색 언저리에 있는 색이다. 간혹 등장하는 붉은 색은 색상환에서 녹색의 보색이며, 갈색 역시 자연의 관점에서 볼 때 녹색이 바랜 색이다. 화이트는 색이라기보다는 공백이나 공간으로, 자연 및 심리적인 색과 상호작용하면서 또다른 차원을 만들어 내는 요소이다. 작가는 자연이 가지는 두툼하고 밀도 높은 초록에 비해 정작 색이름--opaque oxide of chromium--은 무척 인공적이라고 말한다. 2004-5년의 작품에는 색소 이름을 제목으로 삼은 작품들도 꽤 있다. M. 브룬스는 자신의 색채론에서 초록 잎새나 풀들은 만족할만한 녹색을 내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함유하는 엽록소는 항상 다른 요소들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초록톤을 보다 강렬하고 지속력있게 만들기 위해서 식물성 염료에 비유기적 염료를 부가해야 한다. 생명의 초록이 독약 초록으로 변하는 것이다. 브룬스는 이러한 초록의 속성이 자연의 무질서한 번식력, 즉 생장의 광기로 생명을 가차없이 다시 목조르는 정글, 즉 초록지옥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 그것은 태모처럼 태연히 낳고, 낳은 것을 삼키는 존재와도 같다. 송명진의 ‘초록 자연’에도 이러한 양면성이 내재해 있다. 현대미술이 재현과 멀어지면서 초록은 지루함과 진부함의 색채로 치부되기도 하였지만, 사실 그 색 만큼 눈을 평화롭게 해주는 색도 없다. 색 스펙트럼에서 중앙을 차지하는 초록은 ‘더 이상 나가기를 원하지도 않으며 더 이상 나갈 수도 없다’(괴테). 그러나 지루하고 수동적인 색이 송명진의 작품에서 꿈틀거린다. 초록은 단순히 자연의 인상을 운반해 주는 것이 아니라, 촉수를 가진 동물이나 잠재 에너지로 가득한 광물같은 양상으로 변모하기 때문이다. [Gardening](2006)에서 다양한 녹색 계열의 줄기에 상응하는 붉은 색 계열의 단면은 보색의 생동감을 이용한다. 빨강과 초록 그 양극은 유대관계를 이룬다. 거기에는 무기물을 유기물로 바꾸는 광합성과 붉은 혈액의 동형성이 발견된다. ● 시각적인 관습상 초록은 자연으로 간주되지만, 송명진의 작품은 초록 물감으로 발려진 평면일 뿐이다. 그래픽 스타일의 형태 및 색채 처리로 전체적으로는 평면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주로 사용되는 아크릴은 빨리 마르고 붓질이 남지 않으며, 필요 이상의 묘사가 생략되는 매체로 깔끔한 형태 및 색면처리가 용이하다. 이 평면에 최소한의 참조점만을 가진 얇은 환영이 드리워져 있다. 그러나 그 환영도 곳곳에서 벗겨진다. 화면에는 환영과 평면이라는 두가지 층위가 존재한다. 또 하나의 요소는 작품 속의 화이트이다. 그것은 노출된 캔버스의 느낌을 주면서 공백과 평면성을 암시한다. 평면성은 회화가 어쩔 수 없이 가지는 공시적 구조, 즉 시간성의 억제를 드러낸다. 어떤 상황을 한순간에 고정시킴으로서 모호한 기념비적 풍경을 만든 첫 개인전 [순간-멈춤](2001)이 이러한 회화적 자의식에 충실했던 전시였다. ● 그러나 평면으로의 진화는 미술사에서 이미 답이 나와 있기 때문에, 더 이상 화가가 답습할 필요는 없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현대회화에서 감각을 순수 시각적 평면성의 승화로 규정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라고 지적한다. 그들이 제시하는 대안은 뒤덮을 것이 아니라, 끌어올리고 모으고 쌓고 가로지르고 일으키고 접어야 한다는 것이다. 송명진 역시 하나로 쏠리는 환원주의가 아니라, 경계에서의 게임을 즐긴다. 초록이 스펙트럼의 중간에서 어떤 역할을 하듯이, 평범한 풍경의 또다른 면이 들추어지듯이, 어떤 결론이 나온 상태를 공유하기 보다는 그 이면의 내밀함을 음미하고자 한다. 가령 송명진의 그림은 풍경 자체가 아니라, 풍경에 편입되는 디테일과 디테일들 간의 관계가 중요하다. 단촐한 몇가지 풍경의 디테일이 변주되면서 팽창하고, 화면은 틀을 넘어 시원하게 뚫리는 느낌을 준다.

송명진_Green hous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12×145.5cm_2007

송명진_Taking a rest(부분)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0.6×72.7cm_2007
작품의 주요 모티브이기도 한 잔디판처럼, 네모난 녹색 판은 일종의 그리드가 되어 흰색 공백 위에 얹혀져 배열된다. 예를 들어 [Two fields](2005)나 [휙-](2003)같은 작품은 단순한 들판과는 다른 시야를 열어준다. 그것은 움직이지 않는 관객으로 하여금 풀밭을 넘어 다른 공간으로 이동시킨다. 풍경의 세부사항이 생략된, 단순화된 인상의 집적은 한없이 펼쳐진 세계로 연결된다. 그것은 황홀하면서도 동시에 불안한 느낌을 준다. 흰 공백은 캔버스 틀을 넘어서 밖으로 트인다. 자연의 기본 샘플같기도 한 녹색 판들은 허공 위에 떠있는 것 같기도 한데, 그것은 애초에 나눌 수 없는 것을 나누려는 불가능한 시도이다. 미셀 세르가 [헤르메스]에서 말하듯이, 현실의 덤불은 이제 격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송명진의 몽글몽글한 풍경은 구름을 닮았다. 세르는 구름의 모델이 하나의 중심, 어떤 정적인 집합을 완전히 에워싸는 연쇄가 아니라, 분산과 관련된다고 지적한다. ● 여기에서 사물은 직선의 연속 또는 그물처럼 짜인 평면 속으로 끌어들이지 않고 다수, 군집, 구름으로 다루어진다. 공백으로 길이 나있는 송명진의 들판은 백색 황야, 일종의 미로이다. 가능한 모든 것이 열린 곳, 그러나 방향이 없는 공간, 우연에 의해 정해지는 방향성은 두려움과 자유를 준다. 공백, 이 준거 없는 공간은 카오스이다. 엄밀한 규칙을 따르는 듯한 송명진의 기이한 카오스의 세계chaosmos가 현대회화와 관련하여 강조하는 바는 무엇인가. 들뢰즈와 가타리는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화폭은 이미 사전에 설정된 기존의 구태의연함 들로 너무도 빼곡히 뒤덮여 있어서, 우선은 지우고 청산하고 눌러서 두께를 줄이고, 심지어는 조각조각 해체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우리에게 비전을 가져다 줄 카오스로부터 솟아나는 한줄기 공기를 흐르게 할 수 있을 것이다. ● 2007년도에 공개된 작품들은 조형적 실험에 내러티브가 보강된다. 여기에서 나오는 주요 모티브는 기존의 요소들 외에 집, 건물, 캐릭터 등이다. 그러나 이들 역시 3차원 공간상의 존재들 같은 확고함을 가지지 못하는 가상의 왕국이다. 방공호, 정원, 제단 등으로 나타나는 구조들은 녹색 판대기로 얼기설기 기워져 있는 세트같은 형태이고, 도시같은 정교한 모습을 갖추었을 때조차도 부조리한 집합들로 채워진다. 작은 캐릭터는 인간의 말단인 손가락이 변형된 형태로, 인간의 퇴행 또는 진화를 암시한다. 손가락 인간은 모든 것을 도구화하고 도구화되는 현대인의 상황을 대변한다. 갈색으로 변모한 풀밭위에 던져지듯 놓여진 개집이나 실로 후려 감은 주거지가 척박해 보인다. 작품 [Green Shelter]는 방공호같이 얽힌 녹색 면이 인공 산을 이루고, [Shelters from nature]는 유사자연으로 연출된 성전에서 손가락 인간들이 그들만의 의식을 치룬다.

송명진_A builder Ⅰ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2×112cm_2007

송명진_A builder Ⅱ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2×112cm_2007

송명진_Fever in green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2.7×91cm_2007
[A builder] 시리즈는 대형 하수구와 교각 주변에 자리잡은 고치같은 주거지와 그 안에 또아리를 튼 손가락 인간들로, 화면을 가득 채운 갈색 잡초들이 그 황량함을 배가시킨다. 자연은 축소모델로 보다 정교화 되었지만, 기워진 흔적을 감출 수는 없다. 손가락은 무엇인가를 가리킬 때 사용한다. 과학기술은 이러한 지시관계를 대표하는 분야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과학의 지시관계가 무한을 포기한다고 지적한다. 과학은 온갖 한계들이나 경계들로 구축된 지시체계의 도식에 사로잡혀 있다. 송명진의 작품에서 손가락 인간을 에워싸는 인공적 환경은 완벽한 효율을 갖춘 이상적인 기계장치처럼 보인다. 가령 [Riverside]는 미로 한가운데 패놉티콘이 존재하는 도시이다. 그러나 이러한 합리성은 매우 비현실적이고 취약하다. 주거지나 근거지, 성지같은 곳은 단단한 지반이 아니라, 유체같은 곳에 떠 있다. 화이트로 나타나는 공백 뿐 아니라, 주거지를 가득 에워싸는 갈색 잡초들이 마치 파도치는 대양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 손가락 인간들이 질서로 생각하는 세계는 무질서의 바다 위에 떠있는 작은 섬들에 불과하다. 규칙과 이성, 구조와 조직으로 간주된 것은 정돈되지 않은 실제 위에 자리한 일시적 구성체에 불과하다. 여기서도 재현, 즉 균형을 갖춘 조화로운 공간구성은 위기에 처한다. 송명진의 녹색 대지는 어느 곳으로도 이르지 않을 분기점들과 빈 구멍으로 얼룩져 있으며, 현실적인 것을 섬처럼 에워싸는 카오스가 된다. 카오스를 제어하려는 권력은 늘 측정에 의해 질서를 유지해 왔다. 권력은 대지를 기하학적인 형태로 변화시킨다. 그러나 녹색 대지는 ‘평행으로부터의 일탈, 공동의 방향을 잊어버리는 길들, 황야로 진입하자마자 사라지는 바둑판 모양, 수직선이 아니라 예각’(M. 세르)이다. 그것은 모든 측정이 사라지는 또다른 공간의 인정이다. 공간은 균열을 내고 미로와 파국으로 변하며, 단일성 아래에 잠재해 있는 다수의 기이한 공간들이 용출된다. 이 공간에 새로운 신화가 씌여진다. 작가는 마법사처럼 이것과 저것을 끝없이 이어가면서 로고스가 지배하는 기하학을 뒤죽박죽으로 만든다. ■ 이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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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커스, 짐승들의 느와르
박찬용 조각展
2007_0704 ▶ 2007_0710

박찬용_막이 오르다_합성수지에 채색_가변크기_2007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박찬용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7_0704_수요일_06:00pm
인사아트센터 3층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8번지
Tel. 02_736_1020
www.ganaartgallery.com
박찬용의 상황주의 조각-서커스, 짐승들의 느와르 ● 박찬용은‘욕망의 도시’와 ‘아메리칸 핏불테리어’ 그리고 근작에서의 ‘서커스 연작’ 등을 통해 일관된 주제의식과 함께, 일종의 상황주의로 범주화할 만한 경향성의 조각을 실현하고 있다. 도시의 이미지와 투견 그리고 서커스 등으로 그 소재는 매번 다르지만, 그것들이 하나같이 삶의 본성과 그 조건을 암시하고 드러내기 위해 도입된 일종의 유비적 표현이란 점에서 일맥상통한 점이 있다. 그 실체가 손에 잡힐 듯 사실적인 형태임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조각은 단순히 대상에 대한 감각적이고 재현적인 모사의 소산이 아니다. 이는 다만 현실성을 강화하기 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를 마치 세팅된 무대처럼 재현해 놓음으로써 개별 작품이 자족적인 존재성을 획득하기보다는 서로 어우러져서 상황을 연출하고 서사를 만들어낸다. 이로써 작가는 여자와 맹견 그리고 서커스 단원들이 출연하는 삶의 무대에 우리 모두를 초대하고 있는 것이다. ● 욕망의 도시. 주로 갱들을 소재로 하여 비정한 도시와 그 삶의 생리를 드러낸 영화를 필름 느와르로 분류한다. 사실을 과장하고 극화하는 영화의 속성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이 영화들에서 그려지는 갱들의 모습이 기실 현대인 일반의 삶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는 않다.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현대인은 살아남기 위해 적과의 동침마저도 마다하지 않는 정글과도 같은 도시, 밤의 대통령이 지배하는 비정하고 비열한 도시, 화려한 외출을 유혹하며 꿈을 한갓 욕망으로 변질시켜 놓는 도시의 환락 속에 마약처럼 빠져든다. ● 무미건조하고 차가운 인상의 회색빛 콘크리트 구조물과 화려한 네온 불빛이 대비되고, 공허함과 욕망이 부닥치는 도심의 한 가운데에서 여자는 웃음을 팔고 남자는 배반을 거래한다. 그리고 마음씨 좋은 이웃 같은 맥도날드 아저씨가 소비로써 생산을 견인하는가 하면, 쇼핑마저도 아트로 포장되는 천민자본주의 시대의 욕망을 미소로써 증언해준다. 박찬용은 회색빛 도시와 화려한 욕망의 편린들을 대비시켜 비정한 도시의 생리를 드러내고, 그 욕망의 크기만큼의 소외와 공허감을 되돌려준다. 그가 연출한 도시의 이미지와 그 속에 담겨진 현대인의 초상은 한편의 필름 느와르를 보는 것처럼 피상적이고 감상적이고 삭막하다.

박찬용_먼곳을 바라보다_알루미늄_가변크기_2006

박찬용_먼곳을 바라보다-부분_알루미늄_가변크기_2006
아메리칸 핏불테리어. 상대방이 죽을 때까지 싸우는 맹견 아메리칸 핏불테리어(줄여서 핏불)는 순종이 아니라, 투견으로서 요구되는 모든 우성인자를 결합해 만든 혼성잡종이고 개량종이다. 투견의 요구조건에 부합할 수 있도록 가장 완벽하게 진화한 종인 셈이다. 그러나 이때의 진화는 자연적인 진화가 아닌 인위적인 진화이며, 인간의 욕망에 의해 주도되고 조작된 진화, 잘못된 진화일 따름이다. 이처럼 인간의 욕망은 진화마저도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고 있다. 심지어 진화는 공공연하게 선보다는 악을 지향하는데, 이는 생존법칙 때문이다. 약한 것보다는 강한 것, 힘보다는 지략과 권모술수, 논리보다는 현란한 변명과 자기방어, 소요(逍遙)하고 사유하는 정신보다는 머리가 텅 빈 행동하는 인간(요새 말로 치자면 무뇌인)이 우성이다. 이로써 인간이 쌓아올린 문명의 바벨탑은 필연적으로 파괴와 파멸을 향해 나아가며, 나날이 성악설을 실현하고 있다. ● 인간은 욕망하는 동물이다. 살해와 폭력의 욕망을 껴안고 산다. 이에 대해 적어도 외관상으론 제도화된 사회가 그 욕망이 표출되거나 실현되지 못하도록 막고 있지만, 그런다고 욕망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욕망은 이를 투사할 대상을 찾아내고야 말며, 제도는 그 욕망이 적절하게 표출되도록 물꼬를 터주어야 한다. 희생제의와 가짜 왕 놀이(거지를 왕처럼 후하게 대접한 후 축제 마지막 날 죽이는), 유태인과 예수, 마녀와 정신병자, 동성애자와 왕따, 개똥녀와 된장녀, 보수꼴통과 진보깡패 등 문명사회는 예나 지금이나 개인이 자신의 적의를 공공연하게 드러내고 투사할 수 있는 희생양을 제공해왔으며, 지금도 제공하고 있다. 이렇다할 희생양이 없으면 만들어내야 하고, 그 타이밍과 수위를 잘 조절해야 건강한 사회가 유지된다. ● 박찬용은 핏불을 소재로 하여 진화론이 얼마나 이기적인 발상과 철저하리만치 배타적인 논리에 의해 지지되고 있는지를 주지시킨다. 그리고 그 상황을 ‘가까운 자들의 관계’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정작 폭력이 투사되는 대상은 익명적인 타자가 아니라 친구이며 동료인 것이다.

박찬용_열등한것들의 도전_알루미늄_가변크기_2006~7

박찬용_열등한것들의 도전-부분_알루미늄_가변크기_2006~7
서커스 연작. 다큐멘터리의 형식을 빌려 한 인간의 실존적 삶을 추적하고 기록한 영화감독 베르너 헤어초크는 영화 〈그리즐리 맨〉에서 알래스카의 야생지대의 주인인 회색곰과 함께 한 인간의 삶을 그리고 있다. 문명사회에 등 떠밀려온 주인공은 이곳이야말로 진정 나의 땅이며 나의 삶이라고 감탄하면서 야생곰과 더불어 사는 삶에서 진정한 삶의 의미를 발견한다. 그는 곰을 친구이자 동료이며 연인이라고 부르지만, 정작 감독은 곰의 눈에서 반쯤은 심심해하고 반쯤은 먹이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무정한 표정을 읽을 수 있을 뿐이다. 영화는 결국 곰이 되고 싶어 한 주인공이 야생 곰에게 잡아먹히는 비극적인 장면으로 끝난다. 이 영화는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을 증언하고, 길들여질 수 없는 야성을 주지시킨다. 야생이나 야성을 길들인다는 것은 정작 저들의 삶과는 상관없는 인간의 일방적인 논리이며 욕망에 지나지 않는다. 그 욕망은 심지어는 타자의 삶의 영역을 넘보는 침범행위이며 죄악이기조차 하다. ● 박찬용은 근작에서 서커스 연작을 시도한다. 여러 독립된 상들이 모여 상황을 연출하고 서사를 만들어내는 이 일련의 작품들에서 작가는 동물들과 함께 다양한 인간군상을 보여준다. 호랑이와 회색 곰 그리고 침팬지와 같은 동물들이 등장하는가 하면, 여기에 이들을 길들이는 조련사와 무희 그리고 차력사와 같은 사람들이 어우러진다. 그들은 사실상의 광대로 보이며, 그 사정은 동물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적어도 외관상 동물들은 원래의 야성을 상실한 채 조련사에 의해 길들여져 있다는 점에서 본성을 거세당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처럼 더 이상 위험하지 않는 동물들이 관객들에게 일종의 희극배우로서의 연기와 강요된 웃음을 선사한다. 이처럼 야성을 길들이고 잠재우는 기술은 그러나 인간과 동물과의 관계로부터 유래한 것이기보다는, 원래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도덕과 윤리, 금기와 터부의 이름으로 현상하는 온갖 제도적 장치들이 인간의 내면에 들끓는 욕망을 끊임없이 감시하고 통제하고 억압하는 것이다. ● 한편, 동물들이 조련사에 의해 그 본성을 거세당한 것과 마찬가지로 조련사와 광대 역시 관객들의 욕망에 의해 인간성을 거세당한다. 그들은 보란 듯이 남근을 과시하고 있지만, 그러나 이때의 남근은 더 이상 권력과 욕망의 증거이기보다는 오히려 이에 대한 거세의 지표로써 다가온다. 조련사는 동물들의 야성을 거세하고, 관객 또한 조련사나 광대의 인간성을 거세하는 것에서 서로 물고 물리는 권력관계가 느껴지며, 그 자체 관음증에 바탕을 둔 일종의 시선의 정치학(시선과 응시의 관계역학)이 엿보인다. 조련사에게 길들여진 동물들이 더 이상 야생의 짐승이 아니 듯, 관객에게 봉사하는 광대들 역시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박찬용_열등한것들의 도전-부분_알루미늄_가변크기_2006~7

박찬용_열등한것들의 도전-부분_알루미늄_가변크기_2006~7
핏불이 인간내면의 폭력욕망이 투사된 희생양이라면, 서커스 동물이나 광대는 희극욕망이 투사된 또 다른 희생양이다. 폭력욕망은 희생양에게 죽음과 같은 극적인 순간을 원하면서도, 정작 죽음 자체는 지연되기를 원한다. 관객이 원하는 것은 죽음의 이미지일 뿐 죽음 자체는 아니며, 죽음의 이미지는 욕망을 강화하지만 정작 죽음과 더불어 욕망은 끝장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희극욕망은 희생양이 기꺼이 바보가 되어줄 것을 주문한다. 모두가 이중적이고 다중적인 삶으로써 자신을 가장하는 시대에 누군가는 가식의 가면을 벗고, 그 이면의 부끄럽고 치졸하고 우스꽝스러운 실체를 드러내야 한다. 결국 관객이 광대에게서 보고 싶은 것은 타자를 향한 자신의 무의식에 다름 아니다. 이런 집단공모에 의해 지지되는 폭력의 정기적인 분출과 웃음으로써 소위 건강한 사회가 가능해지고 또한 지속될 수 있는 것이다. ● 박찬용의 조각은 사실적이고 극적이고 거칠다. 그의 조각은 삶의 장을 투견 장으로 그리고 서커스 장으로 바꿔놓는다. 마치 세팅된 무대 같은 그 장 속에서 우리 모두는 생존하기 위해 싸우고, 성악설을 실현하기 위해 싸우고, 진화론이 진리임을 증명하기 위해 싸운다. 그 투쟁의 와중에서 짐승들은 야성을 거세당하고 남근을 거세당하고 욕망을 거세당한다. 작가는 이 불임의 시대에 길들여지지 않는 야성이 회복되기를 원한다. 길들여지지 않는 것은 그 길들여지지 않음으로 인해 존중돼야 한다. 누가 누구를 길들이고 싸움으로 내몰고 웃음거리로 만드는가. 우리 모두는 심지어는 도망갈 출구조차 없는 그 장의 안쪽에 있을 수도 있고 그 바깥쪽에 있을 수도 있다. 나는 그리고 당신은 어디에 있는가. ■ 고충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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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U. Ready?
전영진 조각展
2007_0630 ▶ 2007_0717

전영진_눈을감다_혼합재료_30×30×30cm_2007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오픈스페이스 배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7_0630_토요일_06:00pm
유망 작가 발굴전
오픈스페이스 배
부산 기장군 일광면 삼성리 297-1
Tel. 051_724_5201
www.spacebae.com
볼록거울은 사물을 실제보다 많이 받아 들이지만 왜곡돼기 마련이다. 우리는 항상 현실보다 나은 삶을 원하지만 쉽지않다. 과도한 욕망은 왜곡된 거울속의 현실처럼 우리의 삶을 예측할 수 없는 곳으로 끌고 가버린다. 하얀 블럭은 순수한 인간의 근원이라 할수 있다. 그곳에 무언가 그림을 그리는 것은 바로 우리 일것이다. 우리는 이미 많은 그림을 그리며 살아 왔지만 간혹 뒤돌아 볼때마다 하얗게 빛나고 있는 블럭을 열망하지는 않는지. ● 사람의 형상을 소재로 작업을 한다는 것은 다양한 의미를 담기도 하고 방법적인 측면에서도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이런 익숙한 소재는 진부해지기 쉽다. 익숙한 소재로 진부함을 벗어나는 것, 그것이 내가 작가라는 이름을 얻고 가져야 할 소명이라 여겨진다.

전영진_눈을감다_혼합재료_250×250cm_2007

전영진_눈을감다_혼합재료_950×250cm_2007
작품 속의 사람, 그것은 누구라고도 할 수 있지만 나는 아버지라고 부른다. 큰 의미는 없다. 그저 14명의 군상들처럼 아니 주변의 우리처럼 신나게 살지도 못하고 일상에 젖어 사는 그런 사람들. 그 속에 아버지가 있었다. 아버지는 절벽에 매달리고 거울 속에서 튀어나오려고도 하고 가만히 누워 있기도 한다. 하지만 항상 눈을 감고 야윈 모습이다. ● 내가 작업을 계속 할 수 있다면 언젠가는 아버지가 눈도 뜨고 아이들처럼 살이 오를 날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내가 임의로 작업을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조금 더 나아지면 자연스레 되지 않을까. 모두가 바라는 것이지만 시간의 힘을 한번 믿어보고 싶다. 첫 개인전이라 정신없이 작업을 했다. 정해진 기일안에 일을 끝내야 한다는 게 체질적으로 맞지는 않지만 자의든 타의든 또 몇 분의 아버지들을 만들었다. '이런 성의 없는 놈' 하고 욕을 할까 두렵다. 만일 시간이 아버지에게 멋진 옷을 입힐 수 없다면 내가 할 수 있을까. 내가 세상을 조금이라도..... ■ 전영진

전영진_눈을감다_혼합재료_950×250cm_2007

전영진_눈을감다_혼합재료_950×250cm_2007
작가가 부르는 작품의 이름, ‘아버지’. 흡수된 슬픔과 고통은 아버지의 진액을 다 빼놓았다. 그의 과거는 어떠했을까.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떠올리게 하는, 아버지. 시간은 붙잡을 수 없이 흘러가고 있고 나는 곧 아버지가 된다. 아버지가 향하는 곳은 어둠이나 빛으로 비유되는, ‘죽음’이다. 눈을 감은 아버지. 작가를 닮은 작품. 세 개의 자아 혹은 타자들이 합쳐져 작품은 연약한 자태를 발한다.

전영진_눈을감다_혼합재료_30×30×30cm_2007

전영진_눈을감다_혼합재료_250×250cm_2007
‘눈을 감은’ 아버지는 인간 군상들을 온 몸으로 나타낸다. 애쓰고 애 닳고 애 타던 여러 날들을, 자신의 돌이킬 수 없는 시간들을. 비단 아버지의 모습뿐만 아니라 이것은 작가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 작품의 특징이기도 한, 그저 먼발치에서 한번 훑고 스윽 지나가는 작품이 아니다. 들여다볼수록 이야기를 뿜어내는 아버지는 생동감 있는 표정은 매번 조금씩 다른 표정을 짓는 듯하다. 정적만이 흐르는 전시장 안에서 손바닥 크기만 한 작품과 내가 서있는, 나를 온통 몰두하게 하는 구조의 작품은 안타까워 보이거나 혹은 귀여운 몸짓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그것은 너무나 차분하게 sculpy를 이용하여 섬세한 선으로 인간의 형상을 드러낸 작가의 공일까. 어설프거나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 그리고 계속적으로 드는 생각. 현재와 실재와 과거의 기억과 미래를 떠올리는, 우리가 ‘지금’이라고 이야기 하는 시간에 얽매였지만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머릿속 모든 관념들이 혼란스러운 때, 바로 죽음을 인식하고 나를 돌아다보며 후회로만 물들었지만 돌이킬 수 없는 그때들. 그러나 또 해야 할 것들은 너무나 분명하게 발아래 나를 도망가지도 못하게 붙잡는 나의 생활들. 벗어나려고 애 쓰지만 돌아다봤을 땐 그때가 좋았다고, 지난것에 대해 편하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증후군들. 언제나 미래를 꿈꾸지만 그 안에서 죽음이란 빠트리고 생각하는 우리의 버릇들. 작품은 바로 이런 아이러니함을 나타내려 표현방법에 있어서는 사실적이나 초현실주의와는 다른 아이러니함으로 군림하는 인간을 극으로 치닫게 대비되는 난쟁이 아버지로 형상화하고 있다. ■ 오픈스페이스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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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드라이트를 켜다
홍원석 회화展
2007_0310 ▶ 2007_0325

홍원석_야간 구급차_캔버스에 유채_50×160cm_2006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홍원석 블로그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7_0310_토요일_05:00pm
작가와의 대화_2007_0311_일요일_06:00pm
갤러리하루 개관 초대전
제주도에 위치한 갤러리 하루에서 홍원석 개인전 〈헤드라이트를 켜다〉를 오픈한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본인의 운전에 대한 직간접 경험들을 상상력과 결합함으로써 관객들에게 자유로운 유희의 통로를 열어준다.
작가에게 어린 시절 자동차는 아버지의 운전으로부터 경험할 수 있었던 놀이-상상의 수단이었고 성장하면서 놀이-상상은 어둠을 타고 작가의 내면으로 내려앉게 된다. 자동차의 속도를 타고 느껴지는 긴박한 상황들, 특히나 야간 운전에서 느껴지는 헤드라이트 불빛에 비춰진 사물들의 모습은 작가를 가상의 Art-Driver(예술운전사)로 탈바꿈 시킨다.헤드라이트 불빛은 사물을 비추기도 하지만 유년의 기억들로 번쩍이게 하면서 작가의 상상을 통해 끊임없이 재구성되기 때문이다.

홍원석_낯선 데이트_캔버스에 유채_97×97cm_2007

홍원석_야간질주_캔버스에 유채_130×162.2_2006
〈야간구급차〉, 〈낯선데이트〉, 〈낯선손님〉 등의 작품에 등장하는 슈퍼맨, 낙하산, 풍선, 우주인 등은 인식의 저변으로부터 점등된 소재들이며 작가의 상상력과 결합하여 풍부한 불빛을 발한다. 이렇듯 작가에게 자동차는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여행’이다. 캔버스에 붓질을 시작하면서부터 ‘여행’은 시작된다. 그것은 내면적 여행이기도 하기 때문에 상상의 속도는 붓의 속도를 추월하여 시간을 가둬둔다. 보들레르의 파리의 우울 중 『여행에의 초대』를 보면 ‘코카뉴나라’라는 꿈의 나라가 등장한다. 그곳에서 시간은 무한의 감각들, 생각들로 더디게 흐르며 자연보다 예술이, 자연이 꿈에 의해 행복의 한계선을 끊임없이 넓힌다. 작가의 모든 작품들에서 어둠은 유순하지만 단단하게 뭉쳐져 있다. 그 안으로 시간은 흡입되고 멈춰 선다. 날선 헤드라이트 불빛이 그 사이를 가른다. 멈춰버린 시간 사이로 헤드라이트 불빛은 어둠을 밝히면서 단속적인 감각들을 불러들이고 작가의 상상은 끊임없이 미끄러지면서 꿈의 나라 ‘코카뉴나라’로 향한다.

홍원석_9:00pm야간구급차_캔버스에 유채_97×162.2cm_2007

홍원석_야간운전Ⅱ,낯선손님_캔버스에 유채_160×227cm_2006
‘코카뉴나라’는 무한한 가능성을 내포한다. 작가의 자동차 여행 곳곳에 웅크리고 있는 수많은 여행의 단서들이 언제 의식의 심연 너머로 들이닥칠지 모르기 때문이다. 헤드라이트 불빛은 ‘코카뉴나라’라는 찰랑거리는 베일 사이로 불현듯 스며든다.
이번 〈헤드라이트를 켜다〉전을 통해 작가는 종착지 없는 여행의 기로에 들어섰다. 그렇다면 작가의 상상력 앞에 무한의 감각으로 갈라서게 되는 관객들이 마주하게 되는 곳은 꿈의 나라일까? 꿈일까? ■ 바이홍(갤러리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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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self when I am real
서동욱 개인展
2007_0703 ▶ 2007_0729

서동욱_quai de la senne_캔버스에 유채_112.1×145.5cm_2007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대안공간 루프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7_0703_화요일_06:00pm
관람시간_11:00am~08:00pm
대안공간 루프
서울 마포구 서교동 335-11번지
Tel. 02_3141_1377
www.galleryloop.com
Myself when I am real ● 서동욱의 작업은 그만의 사적인 이야기에서 출발하여 일상에서 만나는 인물들에 관한 개인적 경험을 영상과 유화로 기록하여 재현한다. 시간성이라는 측면에서 상반되는 이 두 매체는 때로는 하나의 이야기를 완성하기 위하여 혼용되어 사용되기도 하고, 때로는 독립적으로 존재하기도 한다. 작가는 여기에 개인적 글쓰기와 내레이션이라는 텍스트를 덧붙여 자신만의 서사적 몸체를 만든다. 서동욱의 초기 작업은 지극히 사적인 경험에서 비롯된다. 2004년작 ‘Mimi 미미’ 에서는 한 여자(작가는 그녀를 미미라고 이름 부르기를 좋아했다)가 남기고 떠난 소지품을 단서로 하여 그녀가 파리에 도착해서 떠날 때까지의 행적을 추적하는 내용과, 그녀를 대학 때 처음 알게 되고 파리에서 다시 만나 짧은 사랑에 빠졌던 기억을 회상하는 형식으로 교차시켜 보여준다. 20대 남자의 여자친구 이야기라는 다분히 진부할 수 있는 소재를 작가는 유화와 비디오라는 두 가지 매체로 기록하여 감상적이고 독특한 서사적 파열을 만들어 낸다.‘연애에 탕진한 나의 20대에 바침’이라는 말로 끝맺는 그의 텍스트는 감각적이고 센티멘털하다.

서동욱_rue du théâtre obscur 불꺼진 극장의 거리_2채널 비디오_00:16:15_2007

서동욱_rue du théâtre obscur 불꺼진 극장의 거리_2채널 비디오_00:16:15_2007
비주얼 다이어리와 전통 초상화적 형식이 결합된 서동욱의 초기 회화 작업은 소형 카메라에 장착된 플래쉬를 이용하여 인물을 취재하는 데서 출발한다. 내향적이고 우수에 찬 성격을 쉽게 드러내는 그림 속 인물들은 그들의 옷차림과 머리모양, 심지어 피부에도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취재하는 데 사용되는 카메라의 강한 섬광은 사진 속 인물을 마치 플래쉬 속에 완벽하게 노출된 야생동물의 불안한 모습처럼 묘사하고 있다. 강한 섬광으로 인한 진한 그림자는 인물들을 배경에서 완전히 분리시켜 어떠한 세계에도 소속될 수 없는 존재로 만든다. 이러한 플래쉬의 모티브는 그의 새로운 영상 작업 ‘rue du théâtre obscur 불 꺼진 극장의 거리’ 의 마지막 장면에서 다시 연결점을 찾는다. 서동욱은 자신의 새로운 유화작업에서 자신만의 독창적인 회화적 스타일을 시도한다. 도시는 해질 무렵이거나 밤의 풍경이다. 인물은 홀로 한 도시 속 거리에 서있지만 그나 그녀가 그 공간에 속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는 신작에서 인물이 속해있는 공간 전체를 추상화라 생각하여 물감을 털고 흘리고 닦아 내는 등 다양한 표현방식으로 묘사한다.

서동욱_HJ_캔버스에 유채_89.4×130.3cm_2007
quai de la senne’는 어두운 밤, 파리 세느 강변의 한 극장 앞에 서있는 작가 자신의 모습이다. 기억 속 한 장면이 그러하듯이 그는 반짝반짝 빛나는 밤의 파리를 배경으로 서 있지만 그 곳에는 이미 존재하지는 않는 환영이 된다. 신작인 2채널 비디오 영상작업‘rue du théâtre obscur 불 꺼진 극장의 거리’에서 작가는 서사적 완결성을 지향하지 않는다. A 채널의 남자는 공중 화장실로 종이 한 장을 찾으러 들어가는 장면이 연출된다. 이 종이에 적힌 호텔 코코비치의 주소가 A 채널과 B 채널을 연결하는 유일한 지점이 된다. 탐정소설을 연상시키는 B 채널에서는 얄개시대로 한 때 유명했던, 배우 이승현 찾기가 전개된다. B 채널 영상에서 반복되는 이미지들... 고속도로와 자동차, 잊혀진 배우와 술집 여주인 등은 모두 수명이 짧고 금방 잊혀져 버리고 마는 존재들이다. B급 문화인 탐정소설을 패러디하는 형식적 실험을 통해 작가는 잊혀지는 존재들에 대한 기억을 탐구한다. 두 채널이 만나는 지점인 몽펠리에는 은퇴한 노인들이나 남아서 쇠공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내는 쇠락한 휴양도시이다. 작가는 실제로 몇 년 전 5월에 몽펠리에를 여행한 경험이 있는데, 휴가시즌전의 쓸쓸함만이 남아있는 s te 해변에 관한 기억을 토대로 작품을 시작했다고 한다. 코코비치라는 미국식의 촌스러운 호텔 이름 또한 70년대에나 존재했을 법하다.

서동욱_nico_캔버스에 유채_80.3×116.7cm_2007

서동욱_GP_캔버스에 유채_91×116.7cm_2006
프랑스 누벨바그 영화 감독들이 미국의 B급 문화를 막연히 동경했듯이, 서동욱의 영상은 누벨바그에 대한 향수와 유럽문화에 대한 동경에서 비롯한다. 기존 영화의 짜임새 있는 구조가 아닌 느슨한 구조의 미학적 형식 속에서 실존주의에 바탕한 소통이 불가능한 현대인들의 모습을 그려낸다. 그의 작품 속 시간은 과거와 현재가 순환되며, 이러한 곡선적 시간 구조 속에 반복되어 나타나는 폼을 잡는 청춘은 짧고 허탈하다. 서동욱은 대학을 마치고 간 유학지 파리에서 5년간 거주했다. 이후, 그의 작업에는 센티멘털리즘과 나르시시즘이 공존한다. 작가는 이데올로기가 사라진 현대, 대도시에서 살아가는 20-30대 지식인 중산층의 진부한 모습을 애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본다. 플래쉬 속 불안한 도시의 젊은이의 모습에서 자신을 발견하기에, 작가는 청춘의 모습을 비꼬거나 조롱하지 않고 동질감과 연민 속에서 그려낸다. 작가는 이러한 짧은 젊음의 허무함을, 영상과 유화라는 시간을 기록하는 방식이 상이한 두 매체에 사적인 글쓰기와 내레이션을 중첩시켜 그만의 서정적인 세계를 만들어 낸다. ■ 양지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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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fensive measure
손종준 개인展
2007_0628 ▶ 2007_0716

손종준_defensive measure_디지털 프린트_2007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갤러리 보다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7_0628_목요일_06:00pm
갤러리 보다
서울 서초구 서초동 1461-1 한라기산 B/D 2F
Tel. 02_3474_0013
www.bodaphoto.com
심화되어가는 현대 사회 속에서 인성의 획일화와 더불어 개인주의적 풍토가 만연화 되어가는 이 시점에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한 상호공격적인 성향을 거침없이 드러내고 있다. 반면, 그에 따른 방어책을 만들어가고 심지어 불필요할 만큼의 충격의 방지대책을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 오늘날 현 세계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공통적으로 발현해내는 행동양상이 아닌가 생각한다. 나는 이러한 불필요한 자위적 조치(Defensive measure)를 표현함으로서 인성이 물성으로 변모해가는 이 시대를 비판하고자 한다. ■ 손종준

손종준_defensive measure-performance in tokyo

손종준_defensive measure-performance in tokyo
작가 손종준은 매체의 경계를 넘어 긴 과정의 작업을 하고 있다.
복잡하고 정교한 시스템에서 마치 무기처럼 보이는 조각을 만들고, 그 조각을 또 하나의 조각(여기서 또 하나의 조각은 인간을 의미하며, 젠더코드에 따라 다른 담론을 형성한다), 그리고 시내중심, 지하철 안 등의 도시공간과 어우러져 순간의 설치 작업을 한다. 그리고 그 순간의 설치를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해 기록하고 있다. 그 마지막 기록은 또한 다른 색이라는 코드를 배제한 흑백으로 출력함으로써, 작가가 작업의 코드로 선택한 조각_인간_공간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시각화하고 있다. ● 사람의 몸에 착용되어지는 이 조각은 작가의 말처럼 현대사회에서 인간이 스스로의 위치를 지키기 위한, 또는 권력을 가지기 위한 어떤 방어 수단 내지 공격 수단처럼 보인다. 어쩌면 이 조각은 사람의 몸에 착용되어 있는 시간의 양에 따라 익숙해 질 수도 있을 것이다.

손종준_defensive measure_디지털 프린트_2007

손종준_defensive measure_디지털 프린트_2007
즉, 작가는 인간이 자의 또는 타의에 의해 스스로의 몸에 지니고 있는 여러 사회적 윤리적 기제의 필요성과 의미를 질문하고 있다. 현 사회의 시스템 속에서 사람의 본래의 본성/인성은 무엇이며, 기계화, 디지털화 되어 가고 있는 현대 사회 속에서 인간의 모습이 어떻게 조형되어가고 있는지, 그 공격적 또는 자기 방어적 기제들로 인해 인간이 잃어가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작가는 여러 다양한 시도를 통해 질문, 비판하고 있다. ● 손종준 작가는 2005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를 졸업했으며 현재, 일본 타마미술대학 미술연구과 조각전공 박사 전기 과정을 하고 있다. ■ 손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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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적 신체로서의‘얼굴
조원득 회화展
2007_0628 ▶ 2007_0707

조원득_여(女)_한지에 혼합재료_162×130cm_2007
초대일시_2007_0628_목요일_06:00pm
관람시간_11:00am ~ 08:00pm
갤러리 꽃
서울 마포구 서교동 337-36 지하 1층
Tel. 02_6414_8840
작가 조원득의 작품소재는 인간의 ‘얼굴’이다. 작가는 자신과 타인의 얼굴표정을 세세하게 화폭에 그려낸다. 일체의 색을 다 빼버리고 흑백명암으로 처리한 얼굴은 사뭇 괴기적이다. 이러한 표현은 신비하면서도 화려한 색감을 추구하던 그녀의 이전작업에서 색감이 가진 의미의 군더더기를 모두 없애고자 하는 의도를 드러낸다. 그것은 예술적 언어에 대한 기대와 오해, 그리고 관객의 시선을 의식하는 작가라는 행동양식에서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마치 흑백사진이 컬러사진에 비해 더욱 사실적이고 풍부한 이야기를 전달해주듯이, 그녀의 작품은 초상화가 가진 재현적 영역을 크게 벗어나 단지 얼굴의 모습이 아닌 그 이면에 있는 함축적인 메시지를 전달한다.

조원득_약육강식_한지에 혼합재료_240×130cm_2007

조원득_약육강식_한지에 혼합재료_240×130cm_2007

조원득_약육강식_한지에 혼합재료_240×130cm_2007
여기서 ‘얼굴’은 소녀이자 작가 자신이며, 가족의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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