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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omepage]님께서 남기신 글 (2006-10-22 19:53:25, Hit : 760)
전시 10.22



흐르는 풍경

박병춘 수묵展

2006_1026 ▶ 2006_1105 / 월요일 휴관



박병춘_새벽 하늘을 날다_한지에 먹_135×183cm_2006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이미지 속닥속닥 Vol.051109e | 박병춘 수묵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6_1026_목요일_05:00pm

금호미술관 기획 초대전
후원_디키스코리아





금호미술관
서울 종로구 사간동 78
Tel. 02_720_5114
www.kumhomuseum.com






실경과 진경 사이 혹은 실재와 그림 사이에 흐르는 풍경 ● 풍경은 나와 무관하게 저 홀로 펼쳐진 객관적 지평이 아니다. 풍경과 나는 상호 내포적인 관계에 놓여 있으며, 나의 주관적 전망 안에서만 그 형태와 의미를 갖는다. 풍경은 그러니까 근본적으로 주관의 소산인 것이며, 주관이 자기를 열어 보이는 비전의 한 종류인 것이다. 그 속에 내가 내재된 나의 일부이며, 나의 연장이다. 이를 메를로 퐁티는 ‘우주적 살’이라고 부른다. 나와 풍경 사이에는 나의 육화된 의식이 가득 채워져 있는 것이다. 이로써 풍경은 나의 하늘, 나의 나무, 나의 바람, 나의 공기가 된다. 그렇지 않고서는 모네가 본 하늘과 고흐가 본 하늘이 서로 다른 이유를 설명할 길이 없다. 사람들은 이런 연유로 저마다 다른 풍경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화가들의 그림에 나타난 실재와의 객관적 닮은꼴은 다만 이를 유형화된 풍경으로 읽게 만드는 의식의 간계에 지나지 않는다. 어떻게 실재가 한갓 붓질자국으로 환원될 수 있단 말인가. 바람은 어떻고, 또한 공기는 어떤가. 결국 모든 실경(객관적 지평으로서의 풍경)은 사실은 진경(주관적 전망으로서의 풍경)일 수밖에 없다. 풍경은 그 자체 객관적 실재가 아닌, 실재에 대한 주관적 개념의 소산인 것이다.




박병춘_거제도를 날다_한지에 먹_130×162cm_2006



박병춘_낯선, 어떤 풍경_한지에 혼합재료_135×390cm_2006



박병춘_페러글라이딩을 타고 흑산도를 날다_한지에 먹_87×137cm_2006


박병춘에게 있어서 풍경은 저절로 주어진 객관적 지평이 아니라, 작가로 하여금 세상을 바라보게 해주는 창 그 자체이다. 그 동안 작가는 기억의 풍경, 금빛 풍경, 흐린 풍경, 검은 풍경, 낯선 풍경이란 창을 통해서 세상을 들여다보았다. 철저한 사생에 바탕을 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풍경들은 실재에 대한 단순한 감각적 닮은꼴을 넘어선, 실재에 대한 주관적 개념의 소산이다. 즉 실재에 기생하면서도 궁극적으론 작가의 관념이 만들어낸 풍경인 것이다. ● 그 풍경들은 작가로 하여금 오랜 사진첩 속의 색 바랜 흑백사진을 뒤적이듯 사사로운 기억을 들추어내게 했으며, 노란 색(금빛) 필터를 통해 본 세상처럼 현재를 과거 속으로 밀어 넣게 했다. 그에게 풍경은 다만 그 지정학적 위치가 지금 여기라는 현실에 속해 있는 것일 뿐, 그 실질적인 위치는, 특히 그 시간적 위치는 언제나 과거 속으로 되돌려지는 것이었다. 이처럼 과거로부터 불러낸 그 풍경이 작가에게 때로는 흐릿한(흐린 풍경), 때로는 암울한(검은 풍경), 때로는 낯 설은(낯선 풍경) 기억으로 남겨진다. 이 모든 정서의 계기들은 사실상 작가가 자신을 투사한 풍경의 지점들, 자신의 주관을 투사한 삶의 성분들에 다름 아니다. 아득한 풍경이 자신의 주관과 삶의 성분에 따라서 흐릿하게도, 암울하게도, 낯설게도 나타나 보이는 것이다. 결국 그 풍경의 변화된 주기는 그대로 풍경에 대한 작가 자신의 주관이 변화된 지점들을 엿보게 한다. ● 그리고 이제 작가는 흐르는 풍경 속에다가 이 모든 풍경의 계기들을 흐르게 한다. 마치 흐르는 물처럼 풍경의 계기들이 그 경계를 잃고 함께 흐르는가 하면, 마치 주름처럼 주체의 성분들이 하나의 지층으로 포개지게 한 것이다(작가에게 풍경과 주체는 동격이다). 그렇다고 흐르는 풍경이 단순히 구분의 경계를 넘어 무구분과 통합의 단계로 도약하는(도사연하는) 논리적 비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작가에게 있어서의 실경(지금 여기에 현재하는 풍경)이 진경(그 풍경에 대한 주관적 해석과 간여의 소산인)과 혼연일체이듯이, 흐르는 풍경은 (마치 유기체와도 같이) 흐르는 기억과 사유와 개념의 생리(주관의 생리)를 암시한 것으로 읽을 일이다. 일면적으론 흐르는 풍경이 지금까지의 풍경 시리즈의 결정판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전 풍경 시리즈에 나타난 풍경의 의미들을 모두 아우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실경과 진경 사이, 혹은 실재와 그림 사이에 흐르는 풍경이랄 수 있을 것이다.




박병춘_풍경 위를 날다_한지에 먹_172×270cm_2006



박병춘_검은 풍경_한지에 먹_190×960cm(부분)_2006



박병춘_집이 있는 풍경_한지에 먹_155×135cm_2006


박병춘의 그림에서의 특징적인 사실은 실경을 바탕으로 해서 이를 스케치한 사생(寫生)첩의 작은 그림이 거의 그대로 크게 확대되어 그려진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는 단순히 크다는 점에서 뿐만 아니라, 스케치 당시의 생생한 현장성이 큰 화면에도 그대로 옮겨지고 전달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붓으로 그린 먹그림임에도 불구하고 흡사 목탄 그림과도 같은 표면질감이 특징이며, 또한 몽실몽실한 특유의 준법이 발견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일명 몽준이라 이름 붙일 수 있을 것이다(어떤 이는 작가의 그림에서 발견되는 특유의 준법을 라면준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그만큼 작가의 준법이 자유자재하다는 뜻일 게다). ● 작가는 이 특유의 준법으로써 거의 화면이 꽉 차게 그린다. 주로 화면의 위쪽과 아래쪽에 가로로 좁고 길게 드리워진 하늘과 강을 제외하고는, 그 주요 대상인 산세(산의 형태)를 묘사하는 것으로 화면을 가득 채운다. 이처럼 꽉 찬 화면에서 여백은 그 의미를 상실한다. 대신에 여백은 그려진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 주름과 주름 사이, 준과 준 사이로 파고들어서 일종의 내적 울림을 만들고, 그 파동이 그림 전체에 퍼지게 한다. 이는 그림이 결정적이고 고정된 실체로서 느껴지게 하기보다는, 그 자체 잠재적인 운동성, 잠재적인 움직임을 내포하고 암시하는 형태로서 느껴지게 한다. ● 그리고 풍경의 특성상 옆으로 긴 그림들이 많은 점도 눈에 띤다. 원래 자연이란 이처럼 풍경이 옆으로 전개돼 보이며, 화면 뒤쪽이나 안쪽으로 중첩되면서 전개된다. 이는 대개 수직적 구도로 나타나기 마련인 문명이 그린 풍경과 비교되는 것이다. 이러한 구도 자체는 그림에 쉽게 동화하게 만든다. 작가는 이 모든 그림을 하나의 붓으로 그린다(물론 일부 예외가 없지 않지만). 똑같은 농담의 먹을 찍어 붓을 세워 그리는가 하면 옆으로 뉘어 그리기도 하면서 대상에 대한 묘사와 함께 원근과 음영, 이 모두를 표현한다. 무수히 많은 붓의 움직임에 의해 생성된 필과 획이 엉킨 것이며, 이러한 사실은 작가의 그림으로 하여금 평면화의 경향성이 두드러져 보이게 한다. 평면화 자체는 구상(형상)보다는 추상의 경향에 가까운 것으로서, 이는 작가의 그림에 나타난 실경 사생에 바탕을 둔 생생한 현실감과 부닥치면서 상당한 긴장감을 연출해낸다.




박병춘_길이 있는 풍경_한지에 먹_270×171cm_2006



박병춘_몽환적 풍경_한지에 먹_172×278cm_2006



박병춘_낯선, 어떤 풍경_한지에 혼합재료_172×540cm_2006


이와 함께 작가는 풍경 속에다가 사사로운 경험이나 공적 사건을 그려 넣어 풍경의 지평을 일종의 시대적인 풍경, 시사적인 풍경, 서사적인 풍경으로까지 확장한다. 가족여행 장면이나, 여행하다가 들른 동료의 결혼식 기념촬영 장면을 그려 넣어 마치 사적인 일기나 일지와도 같은 일면을 엿보게 한다. 그리고 대통령 순방장면, 서울시장 후보들의 기념촬영장면, 데모 진압장면, 유기된 아이 등의 신문이나 매체를 통해 본 뉴스를 그림 속에다 끌어들인다. 작가의 풍경 속에는 이처럼 당대의 시대적 상황이, 그 사회적 풍경이 고스란히 들어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적이고 공적인 사건 이외에도 패러글라이딩이나 거대한 풍선기구를 타고 하늘을 날고 있는 사람이나, 숲 속에서 성행위에 열중하고 있는 연인들과 같은 해학적인 모티브를 그려 넣기도 한다. 마치 숨은 그림 찾기를 연상시키는 이러한 모티브들 자체는 작가의 그림으로 하여금 단순히 자연을 대상으로 한 풍경을 넘어서게 해준다. 따라서 주제인 흐르는 풍경이란 이처럼 여러 이질적인 제 요소들이 하나의 화면 속에 녹아들어 있는 풍경을 말하며, 하나의 풍경 속에 여러 서사적인 계기들, 시사적이고 일상적인 계기들을 숨겨 놓은 마치 일기 혹은 일지처럼 읽히는 풍경을 말한다. ● 박병춘의 그림은 이처럼 실경에 대한 사생에 바탕을 둔 것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림에서의 정황 자체는 단순한 실경을 넘어선다. 예컨대 그림 속에서처럼 모래사장 위에 빨간 소파가 놓여져 있을 리가 없고, 화분이 놓여져 있을 리가 없다. 이것들은 차라리 집의 실내에나 놓여져 있을 법한 기물들이다. 이러한 사실은 서로 다른 시간대가 그림 속에서 서로 중첩된 경우로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실제로 사생이 진행되는 현장과, 이를 바탕으로 해서 작업실에서 큰 그림으로 옮길 때의 시간대가 중첩되고, 실경과(현장에 속한) 생활 모티브가(일상적 공간에 속한) 중첩되는 것이다. 이렇듯 풍경으로서의 실경 속에다가 사사로운 생활사를 슬쩍 밀어 넣는 행위는 작가 자신이 풍경을 일종의 내면적이고 주관적인 비전의 한 형태로 보고 있음을 말해준다. 세계를 들여다보는 창과 풍경을 동격으로 놓고 있음을 뒷받침해주는 것이다. ● 이외에도 작가의 근작에서는 전통적인 민화에 대한 재해석이 느껴진다. 예컨대 부부애를 상징하는 원앙 한 쌍이 산수를 배경삼아 유유자적하게 날고 있거나, 화려한 나비 한 마리가 허공을 날고 있는 그림에서의 민화적 모티브가 수묵으로 그려진 흑백의 화면과 대비를 이룬다. 그림 속에다가 일종의 의외성, 일탈성, 해학성의 계기를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다. 박병춘의 그림은 이처럼 점점 더 그 모티브가 확장되고, 때로는 논리마저도 넘어서는 여러 이질적인 계기들이 중첩돼 나타난다. 이는 실경에 대한 탄탄한 사생에 바탕을 둔 것이란 점에서, 실경과 진경이 긴밀하게 짜여져 그 표현 가능성을 극대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설득력을 얻는다. ■ 고충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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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용 / 위로하는 빛


갤러리 나우(02-725-2930)
2006-10-25 ~ 2006-10-31
2006-10-25 오후 6시

김성용-‘위로하는 빛’
까만 어둠 저편에 발광하는 하나의 돌은 보는 이의 시선과 심장에 그대로 와 박히면서 가장 장엄한 구경거리를 선사했다. 수시로 변하는 형상과 어둠을 배경으로 환하게 번지는 빛으로 인해 달은 강력한 볼거리가 되어 무한한 상상을 가능하게 했는데 그런 면에서 밤하늘은 최초의 화폭이며 달과 별은 모든 이미지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달 표면에 나타난 음영을 보면서 사람들은 다양한 이미지를 떠올리는 동시에 온갖 전설과 신화를 창조해냈다. 회화와 문학 또한 그렇게 해서 탄생했다. 어둠을 구원하고 중력에 저당 잡힌 이 현실계 너머를 꿈꾸게 해준 것은 달이었기에 달은 늘 그리움과 몽상, 희망을 비추는 거울처럼 자리했다. 사람들은 달을 보면서 탈중력과 비상에의 욕망을 꿈꾸었다. 달이 없었다면 지상의 모든 이들은 꿈을 잃었을 것이다. 또한 사람들은 달 속에 어른거리는 그 누군가의 얼굴을 애타게 찾는다. 고독과 외로움, 상처를 진정시켜주었던 이미지는 다름아닌 달과 함께 오버랩 되어 떠오르던 누군가의 얼굴이었다. 그래서 달은 만월이어야 제격이다. 달은 인간의 얼굴을 상상하게 해준 결정적인 공간이다. 어두운 밤하늘에 등처럼 떠있는 밝고 둥근 달은 모두에게 심리적인 안정과 위로를 선사해주었다. 해서 지상에 있는 모든 존재가 저 달로 인해 받았을 은혜를 생각해본다.

김성용은 우연히 밤하늘의 달을 바라보며 위안을 얻었다고 한다. 어느 날 겪은 일상의 불쾌와 마찰들이 비로소 달을 통해 정화되었던 개인적인 경험이 달을 보고 찍고 싶도록 유인한 것이다. 차가운 겨울날 밤에 본 그 달이 내내 잊혀지지 않았던 그에게 달은 새롭게 다가와 주었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그는 소리없이 자신의 머리 위에 환하게 떠오른 그 달을 촬영했다. 지속해서 자기에게 위안과 마음의 평안을 심어주었던 달을 그리워하고 다시 그 달을 확인하고자 하는 동경에 의해 채집된 무수한 달들은 현재 자신의 일상적 삶의 장소에 자리한다. 하단에는 삶의 공간들이 납작하게 드러누워 있고 그 위로 처연하게 달이 떠있다. 산동네나 아파트 건물 위로, 화려한 도시의 건물들 위로 혹은 소박하고 한적한 거리 위에 달빛은 공평하고 민주적으로 비춘다. 달빛에 비해 소박한 인공의 조명에 의지한 인간의 주거공간과 한 쌍을 이루는 이 달은 매우 인문적 성격을 띈다. 달이 없었다면 밤풍경은 너무도 삭막했을 것이다. 이지러지거나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풍만하고 꽉 찬 보름달만이 사진 속에서 빛난다. 그는 항상 원형의 달을 찾아 긴 밤 시간을 소요했다. 달을 찾아나서는 밤의 여정이 다채로운 풍경으로 그려져있다. 이것은 밤풍경이면서 동시에 달이 초상이다. 낮 동안의 일상이 잦아들면 그때 밤이 밀물처럼 들어차고 그 위로 달이 떠오르는 순간 사람들은 잠시 낮 시간의 번잡함과 수런스러움, 거칠고 부박스러웠던 마음의 갈래들을 다소곳이 내려놓고 차분함과 경건함으로 모두 휴지(休止)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작가는 달을 보면서 분노와 황폐함으로 어지럽던 마음이 순간 차분해졌던 그 날의 경험이 마냥 신기했다고 한다. 달은 분명 그 달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정서적으로, 심리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치는 절대적인 자연존재의 하나다. 밤의 시간대에 내리는 달빛은 사람들의 몸으로 적셔 들어가 내내 혼곤한 정서에 놓이게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달의 영향력과 기운을 두려워했다. 오늘날도 달은 여전히 신비스러운 존재다. 그것은 물리적, 과학적인 판명과는 다소 무관하다. 여전히 불안한 사람들의 마음과 슬픔, 상처를 달래주는 역할을 한다. 그런 면에서 달은 여전히 주술적인 대상이다. 낮과 밤이라는 두 세계가 나름대로 낭만적으로 존재했던 시간은 근대에 와서 달라졌고 그래서 밤을 지워낸 인공의 조명과 시간 아래 요정과 귀신, 신비스러운 밤의 문화가 지닌 주술성은 상실되어갔다. 반면 작가는 다시 달 사진을 통해 신비로운 힘과 주술성을 환생시키고자 한다.

달은 무엇보다도 풍요와 관련된다. 유럽에서는 달빛 아래에서 식물이 자란다는 믿음이 있는데 그래서 지금도 프랑스 농부들은 달이 떴을 때 파종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단다. 아울러 달빛이 충만한 밤에 성행위를 하면서 여자가 달을 보면 수태를 하게 된다는 믿음도 있다. 우리 선조들도 여성이 임신을 원할 때 달빛을 한껏 쐬곤 했다. 동시에 달의 주기적 변화는 인간을 두렵게 만들었다. 변화하는 주체인 달은 불완전성을 뜻했던 것이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달을 광기의 상징으로도 여겼다. 달의 모습이 시시때때로 변하듯 그렇게 변하는 정신의 상태를 미친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여성의 생리주기는 달과 일치한다. 그래서 달은 여성, 음을 상징한다. 음악에서 베토벤의 ‘월광소나타’와 슈만의 음악들은 미술에 있어서의 프리드리히나 고야처럼 달에 의해서 영감 받은 것들이다. 중국인들은 가을의 달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달의 차가운 느낌은 군자의 덕을 상징했으며 맑고 높은 절개의 상징이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농업과 관련해서는 풍요의 상징이자 시간의 질서와 시절의 운행, 섭리를 상징한다. 또한 재생과 부활의 기본적 원형이었으며 특히 달의 밝은 빛은 정화하는 힘의 상징이었다. 달은 밝고 원만하되 한 모습을 고집하지 않기에 불교에서는 불법을, 도교에서는 초월이나 승화를 의미했다.

작가는 밤하늘의 달을 촬영했다. 모두 보름달이다. 그 달은 환하고 아름답지만 쓸쓸하고 처량하다. 그래서 고독하고 외로운 마음에 위안을 주는 존재다. 개인적 감성의 표현에서 시작해 대중의 보편적 감성에 가닿고자 하는 이 달 사진은 컬러사진이지만 실제의 재현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감성의 표현과 느낌을 강조하기 위해 색의 밸런스를 깨뜨리기도 하고 다소 과장하기도 했다. 마치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속에서 느껴지는 삭막하고 적조한 도시 야경의 모습이 연상된다. 호퍼 그림에 달을 하나씩 넣어주었다고나 할까?
항아가 달에 올라간 뒤부터 아폴로 11호에 이르기까지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무수한 사람들이 달을 쳐다보며 이런 저런 많은 생각을 가슴에 떠올렸을 것이다. 달이 없는 밤풍경은 상상하기 힘들다. 인간의 발이 달의 대지를 이미 밟아버린 세상이라고 할지라도 여전히 달을 보며 이런 저런 상념에 부침하기도 하고 더러 위로를 받거나 깊은 감정에 빠지기도 한다. 달은 슬픔과 처량함, 스산함과 적막함과 더 밀접해 보인다. 달은 어딘지 쓸쓸하고 아련하고 슬프고 적막해야 제 맛이다. 지치고 힘들고 고독한 이들이 고개를 들어 저 달을 본다. 거기 위안처럼 달이 떠있다. 세상에 속하지 못해 세상을 등지고 싶은 이들에게 달은 안식처를 제공한다. 특히나 이런 식의 삶에 대해 저항하고 슬픔의 힘을 통해 세상의 모든 것들에 위로의 시선을 던지는 예술가들에게 달은 그 어떤 것보다 영감과 상상력의 근원으로 존재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글 / 박영택(미술평론, 경기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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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오 / breaking silence


안단테 갤러리(02-735-3392)
2006-10-12 ~ 2006-10-29
2006-10-12 오후 5시

breaking silence

내가 접하는 수 많은 광경 중에서 카메라를 들이대고 싶은 충동이 느껴지는 scene들은 그다지 많지않다.
멋있는 경치나 충격적인 모습들이 아닌 연출되지 않은 자연스럽고 차분한 분위기로서 나의 마음을 사로잡는 광경들이 나에게 있어서의 photogenic 한 소재들이다.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그런 모습들 중에는 나도 모르게 마음이 끌리며 왠지 오묘한 기분에 휩싸이게 되는 순간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순간 전파되어 오는 자연의 발신음이 나의 뇌리를 진동 시킬때 자연스러운 shutter timing으로 촬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누구나 보고 대할 수 있는 평범한 sight중에서 나를 편안하게 유혹해 주는 순간들을 표현한 것이 breaking silence이다.

글 / 정명오 작업노트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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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보다

강민석 조각설치展

2006_1018 ▶ 2006_1024



강민석_너의 눈에 맑은 물을 담아 마신다_합성수지, 황토_150×150×120cm_2006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모란갤러리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6_1018_수요일_06:00pm




모란갤러리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7-28번지 백상빌딩 B1
Tel. 02_737_0057
www.moranmuseum.org






나를 보는 나를 만든다. 자신을 바라보는 행위를 반복하여 나를 보고, 나를 보는 나를 보고, 그 나를 다시 본다. 계속되는 밖으로부터의 시선은 역으로 안으로, 안으로 향하는 시선이다. 자신의 모습을 일부만 볼 수 있고 그 전체를 완전하게 지각하기 어렵다는 사실은 세상을 바라보는 자기 자신을 의심하는 근본적인 원인이 된다.




강민석_구를 잡는 사람_합성수지, 백토_180×200×150cm_2006/ 좌
강민석_무제_합성수지, 백토_50×30×30cm_2006/ 우



강민석_나를 보다 Ⅰ_합성수지, 백토_250×150×150cm_2006



강민석_나를 보다 Ⅱ-“좋은 아침입니다. 백선생.”_합성수지, 백토, 모니터_가변설치_2006



강민석_나를 보다 Ⅱ-“좋은 아침입니다. 백선생.”_합성수지, 백토, 모니터_가변설치_2006


우리는 보이는 것과 그로부터 유추한 나머지들의 사이에 서 있다. 나를 알 수 있을까. 세상을 알 수 있을까. ■ 강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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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관적 서사에 대한 욕망

박영근 회화展

2006_1021▶ 2006_1103



박영근_I & my wife, my dauthers_캔버스에 유채 아크릴 채색_701.6×90.9cm_2006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Vol.051006a | 박영근 회화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6_1025_수요일_05:00pm




갤러리 상
서울 종로구 인사동 159번지
Tel. 02_730_0028






어린 시절, 세상이라는 좌표에서 원점은 언제나 자신이었다. 세상은 내가 아는 사람들로 구성되고, 그 바깥은 존재하지 않았다. 내가 살아온 세월보다 훨씬 더 긴 역사가 오래전부터 존재해왔고, 내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끝없이 지속될 것이고, 내가 가본 곳이 세상의 아주 작은 일부일 뿐이라는 자명한 사실을 인정하기 시작하면서 세상의 중심은 점차 나에게서부터 외부로 이동한다. 객관적인 서사도 결국 주관적인 서사의 집합이거나 혹은 목소리 큰 주체가 만들어낸 (개인적) 서사의 확대판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서사는 종종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서사 앞에서 압도당하곤 한다. ● 캔버스에 바탕색을 칠하고, 그라인더와 샌더로 형태를 만들어낸 후, 휙 흐르는 듯한 곡선들로 속도감을 더하는 기법으로 이질적인 시공간에 존재하는 요소들을 조합하는 '이미지 계보학'※양정무, 박영근의 이미지 계보학 읽기, 2005 을 해왔던 박영근은 그 연장선상에서 더 적극적으로 자신만의 서사 만들기를 시도한다. 즉 세상을 바라보는 좌표의 중심을 외부에서 자신에게 되돌리고, 자신의 지극히 개인적인 일상에서 파생된 이미지와 그로부터 시공간적으로 확장된 이미지들을 조합하여, 객관적인 서사와 상관없는 주관적인 서사를 구축하는 일을 시도했다.




박영근_Clothes to wear, the place to live, things to eat_캔버스에 유채_194×97cm×3_2006



박영근_ The mountain of conquest_캔버스에 유채_550×210cm_2006



박영근_ The vehicle of conquest_캔버스에 유채_725.4×227.3cm_2006



박영근_ The River of civilization_캔버스에 유채_730×150cm_2006



박영근_ The flower of human_캔버스에 유채_595.4×141.2cm_2006


누구나 알고 있듯 역사 교과서 속에서 한강과 인류 4대문명 발상지인 황하, 또 북한산과 나폴레옹의 알프스는 전혀 다른 비중으로 다뤄진다. 그의 집 건너편에 보이는 북한산은 중국의 황산, 유럽의 알프스로 확장되어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한강은 세계 4대문명의 발상지가 되었던 강들-황하, 나일강과 짝을 이룬다. 그는 객관적(이라고 믿어지는) 사실과 상관없이 전지적 시점에 서서 임의로 이질적인 요소들을 선택하고, 조합해나가는 일종의 유희를 즐긴다. 말과 배, 우주선이라는 세 가지 요소를 '정복'이라는 단어로 병렬시키고, 박정희, 렘브란트, 양귀비, 고흐, 릴케, 모네라는 뜬금없이 보이는 조합은 '꽃'이라는 단어로 한데 묶였다. 죽기 직전에 연못을 만들어 수련을 기르고 그렸던 모네, 말년에 튜울립에 투자했다가 파산했던 렘브란트, 열심히 무궁화를 심고 또 심었던 박정희처럼 특정한 꽃과 각별한 인연을 맺고 있었던 인물들의 이야기를 인물화와 꽃 그림으로 그렸다. 흑백으로 표현된 인물들은 실제 인물보다 동상을 보고 그린 듯 견고하고 기념비적인 느낌을 주는 반면, 하단에 위치한 꽃들은 화려한 빛깔로 싱싱하고 생기 있게 묘사돼 대조를 이룬다. ● 눈에 띄는 것은, 여기에 이미지(인물)와 이미지(꽃)를 연결시키는 작가의 텍스트가 삽입되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모네 때문에 개울물이 끊겨 아랫마을 아주머니들이 빨래를 못하게 되었다는 에피소드에 '아전인수(我田引水)'라는 해석을 붙이거나, 장미를 좋아하던 릴케가 장미 가시에 찔려 패혈증으로 죽은 것을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라 해석했다. 보는 이가 동의하거나 동의하지 않거나 상관없이, 지극히 주관적인 서사에 대한 작가의 욕망이 여기, 이 텍스트에서 가장 명확히 드러난다.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박영근의 회화 자체가 시각적 전달력과 팽팽한 긴장감을 갖고 있기 때문에, 친절한 해설 없는 이미지만으로도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작가의 의도를 생각하게 할 듯하다. 하지만 그간 21번의 개인전을 열면서 자연스럽게 이미지와 그 소통의 문제를 고민한 결과가 '이미지를 보완하는 텍스트'라는 적극적인 형태로 반영된 것 같다.




박영근_my dauthers & my wife, I_194×97cm_캔버스에 유채_ 2006



마지막으로 "어느 어둑한 날 밤, 집에 들어섰을 때 나는 곤히 잠든 70개의 발가락을 보았다"는 고백이 덧붙여진 가족 초상화 <나와 처와 딸들>은 가족, 즉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가장 명확한 세계에서 다시 출발하려 하는 작가의 의지를 재확인시켜준다. ■ 이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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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enomenological Perception

현상학적 보기展

2006_1018 ▶ 2006_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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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6_1018_수요일_06:00pm

문성식_박진아_이지원_최중원

기획_진휘연_정신영

관람시간_12:00p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175
서울 종로구 안국동 175-87번지 안국빌딩 B1(참여연대 옆)
Tel. 02_720_9282






총체적 인식에의 도전과 현상학적 보기 ● 기존 매체를 이용하면서도, 진실로, 진실로, 새롭게 그리기나 새롭게 표현하기가 가능할까 ? 극단적이거나 파괴적 태도 없이, 또한 현대미술의 복잡한 담론과 상충하지도 않으면서, 관객들에게 진부함을 벗어나고픈 욕구를 충족시킴과 동시에 보는 즐거움을 선사하는 일군의 작가들이 여기 있다. 그들은 인류가 그토록 오랫동안 추구했던 사물의 실체와 그것의 표현 가운데 존재하는 인식의 변환에 초점을 맞추면서도 , 관객과의 소통에 전혀 수동적이지 않다. ● 미술이 진실을 찾으려는 인간의 노력에 궤를 같이 하면서 재현의 문제는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부터 담론 /철학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 . 그것은 이미 만 오천년 전 동굴 속 벽화를 그리며 사냥의 성공을 기원했던 구석기 시대 선조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창에 찔리고 칼에 쓰러지는 황소와 사슴들은 그들의 '염원'을 담은 정신적 유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일차적 세계관, 자연주의적 현현을 믿었던 그들의 종교적 진실이기도 했다. ● 고대 철학의 산맥을 넘고 근대의 다양한 사유를 거친, 2006년 현재에도 그 주제와 테마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인류는 여전히 이미지와 진실 , 그리고 그것을 파악하는 인식의 과정과 결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 여정에서 주체의 구성에 관해서도, 인지능력과 인간의 생물적 기관들에 대해서도, 또는 사물의 본질에 관해서도 논의는 진행되었지만, 결국 어느 것도 완결된 결과를 제공하지는 못한다. ● 세상을 향한 인간의 1차적 인식/감각 기관은 눈이다. 그것을 통해 사물을 감지하는 능력과 범위는 다른 감각기관을 통한 그것과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크고 중요하다 . 눈은 실체를 투사하지만, 인식이 그에 따라서만 결정되는 것은 아니기에, 문제는 복잡해진다. ● 인간의 존재가 곧 인식이라 믿었던 데카르트의 후예들에게 눈과 뇌는 어쩌면 동일한 도구이자 인식의 장치로 여겨졌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데카르트가 주장했던 '思惟'의 근거가 시각과 연결된 '뇌'에 국한되기보다는 인간의 다양한 경험과 결부되어있다는 이견이 20세기 들어서면서부터 제기되었다. 현상학은 사용하는 철학자나 문맥에 따라 조금씩 다른 내용을 의미하지만, 적어도, 관념적인 단계에 머물던 우리의 인식의 공간적, 물적 차원을 확대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 과연 인간의 사고와 판단이 사고하는 유일한 기관을 통해서 행해지는 단선적 과정일까? 대상을 파악하는 방법은 시각외에 다양하고 , 그 행위를 완성하기 위한 여러 기관들이 우리에겐 필요하다 . 후설(Husserl)을 위시한 일군의 현상학자들은 사고를 완성시켜주는 데는 신체의 다른 기관들, 예를 들어 손, 발, 귀나 코 , 그 밖의 감각기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또한 각자가 가진 경험 (지식을 포함한)을 모두 아우르는 종합적인 과정이 함께 수반된다고 주장한다. ● 그것은 매우 타당해 보인다. 인식을 둘러싼 논의의 철학적 깊이를 잠시 접어둔다면, 시각예술에서의 '보기'와 '인식'의 관계에 대한 다양한 시도 역시 데카르트식 단선론을 벗어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이후이다. 작가들은 사실적 형태의 무게에서 자유로와진 후, 통일된 시점과 화면의 일치를 벗어버리고(추상), 투명한 작품의 성격도 거부하며 (뒤샹), 때로는 사물을 뒤집기도 하고 (올덴버그, 크기와 물성에서), 예술작품의 존재 방식이나 감상 방식을 파괴하며, 작가대신 관객이 참여함으로써 작품이 완성되는 (미니멀리즘, 환경조각, 해프닝) 등, 일방적인 작품의 구성이나 수용을 전복시킨다. ● 또한 새로운 매체의 유통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사진을 필두로 기계적 복제가 가능한 매체의 탄생이후 예술가들은 어떻게 볼 것인가와 무엇을 볼 것인가, 그것이 만들어낸 변화된 시각의 차이에 집중해왔다 . 그러나 지난 세기 작가들이 과거 작품의 존재에 대한 도전을 예술의 조건으로 여기거나 재미와 순간적 비틀기를 통해 새로움의 전통에 기여했다면 <현상학적 보기> 전시의 젊은 작가들은 기존의 예술 작품의 표현 방식에 존경을 멈추지 않은 채 , 보기와 연관된 사고의 층위를 넓히고, 그 단계를 실험한다는 점에서 훨씬 더 진지하고 일관되어있다.




최중원_스치던 풍경_디지털 프린트_50×50cm_2004


사진기로 담은 이미지를 화선지에 프린트함으로써 감각적인 화면을 보여주는 최중원은 그의 짧은 이력에도 불구, 최근 많은 전시에 초대되고 있다. 그의 사진은 소박한 주제를 , 대담한 구도로 표현하면서 빛바랜 교과서의 삽화 같은 색감으로 감성을 자극한다. 이번 전시에 소개된 작품들도 일상적 소재를 다루는데, 그의 작품 속 공간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서정적인 장소이면서도 동시에 생경한 느낌을 주는 상이함을 갖는다 . 공간은 또한 측량할 수도, 환원될 수도 없는 깊이와 크기를 갖고 있는데, 평면적이라는 설명보다는 다른 세계 같은 묘한 느낌을 준다 . 과거의 어느 때인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관객의 기억을 자극하는 작품 속 시점들도, 우리의 뇌리에 존재하지만, 실재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은 모호한 지점을 가리키는 것 같다. 관객이 경험했던, 그러나 벌써 추상적으로 변해버린, 익숙하지만, 낯선 그곳은, 시각적 감각을 넘어서는 인간의 오감을 자극한다.




이지원_Light space 8_컬러인화_27×36cm_2006


이지원은 공간과 빛, 그리고 화면 안에서의 오해 또는 거짓에 대해 탐구한다. 그의 사진 작품은 격자의 구조 안에서 그것을 반복하는 상자모양의 공간안에 광선과 그림자의 대조를 담고 있다 . 양과 방향이 각기 다른 광선에 의해 섬세하게 차이를 보이는 공간을 열심히 파악하다가, 문득 그것이 자연 안에 놓인 소소한 크기의 공작물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된다. 언제나 평면 속 입방체에 '속기'를 자처하는 관객들에게 평면과 입체의 환영을 알려주는 작가는 사진이라는 기계적 매체의 감정 없는 표현 속에서, 다시 실체와 재현된 이미지간의 오해의 관계를 보여준다. ● 〈light space 8〉에서 장소를 옮긴 작은 입체는 실제 건축물의 공간 속에서 과감하게 부딪치며, 인공 광선과 장소안의 공간이란 다층적 조건을 보여준다 . 공간과 빛, 그들의 실체가 존재해도, 여전히 관객들은 화면안의 내용을 통해 꿈을 꾸고 , 상상의 영역을 확보하길 원하지만, 이지원의 작품은 그것마저 거부하면서 , 빛에 의한 공간 구조의 가장 기본적인 물성부터 차근히 담아내는데 성공했다.




박진아_로모그라피시리즈 섬_캔버스에 유채_135×196cm_2006


박진아는 4컷짜리 사진 찍기에서 구성과 내용의 힌트를 얻어오지만 전통적 유화를 구사한다. 그녀의 대상들은 4컷의 장면에 담기는데 , 마치 시간의 경과가 드러나는 듯, 움직임이 더해지고, 사물은 시야에서 사라지기도, 조금씩 위치를 바꾸기도 한다. 20세기의 가장 대표적인 도상인 격자 안에 든 이미지들은 그러나 고전적 회화가 보여주었던 통일된 구성을 거부한다 . 시간도 사물도 관객들에게 분명한 모양을 전달하지 않고, 시간만큼의 거리를 둔 이미지들은 우리의 통일된 인식구조의 단단한 벽을 깨면서 '보기'의 다양함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그녀의 작업은 관객들에게 어떠한 흥분이나 감성적 취향을 배제시킨 채 , 시각적으로 파악된 대상과 인식의 과정을 그대로 화면에 옮겨놓으면서 끈질긴 회화성의 힘을 전달해준다.




문성식_직사각형 정원_캔버스에 아크릴 채색_112×324cm_2004


문성식은 2005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참여한 미성의 작가이다. 전통적 원근법에 적용받지 않는 그의 언덕과 정원은 언뜻 친절해 보일정도로 , 섬세하고 작은 터치로 이루어져있다. 공간은 분명 제시되어있지만, 동시에 생략되어있고, 충분하지만, 완전하지 않다. 살아있어 작가에게 말을 걸어오는 나무들과 , 비었지만 사고의 전제가 되는 풍경은 고전적인 그림 속 풍경화와 구체적으로 궤를 달리하면서도 설명을 배제한 채, 그것의 유기적인 자생력을 드러낸다. 그 정원, 그 나무들은 작가의 구체적 경험과 기억을 거쳐 , 관객들의 그것을 자극한다. 작가의 시각적, 경험적, 시간적 인식을 반영해주는 작품들은 그리기와 보기의 꼼꼼함을 수반하는 또 하나의 흐름/과정으로, 현상학의 단면중 하나로 보인다. 생동감과 낯선 생경함을 가진 , 그래서 이야기(narrative)의 함축에 적절한 문성식의 그림들은 다양한 감각을 자극하는 회화 표현의 또 다른 가능성을 제시하기도 한다. 보기와 연결된 확장된 인식론으로 규정한 이번 전시에서의 현상학은 재현과 개념 사이의 복잡한 여러 담론들을 넘어서는 실마리를 보이며, 관객들에게 각자의 기억과 감성을 돌아보게 해준다 . 관념론적 한계를 벗어나 사물의 새롭고도 총체적인 경험으로 유도하는 인식의 확대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전시의 작품들은 긍정적이다. 그것을 제시하는 젊은 작가들은 때문에 한때 위기를 맞았던 평면작업 속에서 다시 '보기'의 기술을 강조한다. 그것의 변화에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외적 요소들 -생산력이나 매체의 발달-을 포함하면서도 미술사적 지식과 지적 성찰이 반드시 전제된다고 믿기에 철학적이다. 믿음위의 새로운 미술 언어들은 관객들의 감상 요소의 확대와 잠자던 감각을 동시에 깨워주며, 앞으로 미술의 중요한 줄기가 될 것임을 알려준다. ■ 진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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