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옹_112cm x 145.5cm_캔버스에 유채_1981
박찬경(작가, 평론가)
우리에게 근대화의 체험이란, 가설무대 위에서 진짜 삶을 사는 것이 아니었나 한다. '국민의식'은 그 근대주의의 정신적 물질적인 기반이 없었기 때문에 정치적 선동과 상투적 신기루에 크게 의존 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우리의 근대성 자체가 연극적인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해볼 수도 있다. '강물에 유람선이 떠있는 대한민국'은 그렇다 치더라도, 삼풍백화점 성수대교 붕괴, 대구 지하철 사고를 연극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반대로 종로타워('화신앞' 자리에 국세청건물)나 한나라당을 연극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이산가족상봉, 인천공항, 아니 서울 전체를 단순히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을까.
미술이 이야기, 문학, 언어와는 달리 순수한 조형이라는 하나의 태도나 관념이 우리 미술에는 여전히 굳어져 있다. 돌아보면, 1980년대 초기에 한국에서 미술이 어떤 이야기를 담는다는 것은 일종의 금기에 가까웠다. 나아가 미술이 사회참여적일수 있는지 여부는, 미술이 말을 할 수 있느냐는 원칙적인 질문에 의해 미리, 효과적으로 봉쇄될 필요가 있었다. 반대로 추상화가들은 2류 현상학을 늘어놓거나,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 것을 유일한 대화기술로 택했다.
'현실과 발언'이 창립 이후 몇 차례의 전시를 통해 신선한 충격을 줄 수 있었던 것은, 미술이 말을, 엄숙한 선언이나 철학적인 개념어가 아니라 일상의 대화체로, 때로는 속어와 비어를 섞어 말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말은 문자로 똑같이 풀어낼 수 있는 것은 전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혀끝에 다다르지 않는, 마음 속에서 웅얼거리거나 머리 속을 맴도는, 아직 명확하게 내뱉어질 수 없는 어떤 이미지들이었다. 민정기의 그림이 오윤, 주재환과 더불어 '현실과 발언' 미학을 대표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침묵이 지배하고 있던 당시 미술에서 서사를 되살렸기 때문이다.
'포옹'이라는 작품에서 그가 선택한 색은 변화무쌍하고 풍부한, 아름답거나 미묘한 색이 아니라 단조롭고 우중충한 푸른색이나 고동색, 적색, 녹색 등이다. 이 그림에서 민정기는,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기술적으로 원숙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아마추어 화가의 표현을 의도적으로 모방한다. 민정기가 '이발소 그림'에서 보았던 것은, 이러한 미숙한 표현이 표현의 대상이나 느낌의 풍부함이 아니라, 대개는 표현의 욕망이나 목표만을 투명하게 드러낸다는 점에 있었다. 이를테면 이 그림에서 하늘은 곧 하늘색이다.
90년대에 들어서야 최정화 등에 의해 유명해진 '키치'의 정치학은 민정기에 의해 이미 80년대에 먼저 발견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민정기의 키치는 최정화의 찬란한 '개발미학(aesthetics of development)'의 조울증과는 달리, 여전히 민중의 삶에 깊이 연루되어있는 상태로서의 키치, 키치라고 하기에는 온정이 너무 강하게 흐르는 미학이다. 젊은 작가들이 싸구려 플라스틱의 번쩍이는 표면을 찬양하는 전략을 택했던 반면, 민정기 키치의 민중적인 원천을 다시 복구하려고 했다. 이발소 그림의 표면이 명화를 의미하고 싶어하는 것에 대해서, 민정기는 이발소 그림을 이발소의 내용으로 채우는 것이다.
그의 다른 작품 '세수'나 '대화'에서 보이는 것처럼, 민중공동체에 대한 솔직하고도 대담한 경애, 혹은 '프롤레타리아 낭만주의'는 어떤 다른 민중미술 회화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전두환 통치 시대에 이 아무렇지도 않은 그림이 그토록 불순해 보였던 것도 그 때문이다. 이 그림이 '세수'나 '대화' 보다도 불온해 보였던 이유는, 이 그림이 더욱 풍부한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수(Ⅰ)_130.3cm x 97cm_캔버스에 유채_1980
여기서 보이는 풍경은 아마도 유명했던 '조국근대화'에 의해 망가진 풍경이자, 그로 인해 같이 '망가진 내면'의 풍경일 것이다. 그런데 '포옹'에서 풍경은 단순히 망가져 보이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피안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 그림은 현실의 풍경이면서도 피안이며, 개발지구이면서도 에덴동산이다. 현실의 자연주의적 모방도 물론 아니지만, 피안의 상상화는 더욱 아니다. 그래서 이 그림은 뭔가 잘못되어있다.
민정기는 눈앞의 실제 풍경을 해석한 것은 물론 아니고, 사람들이 흔히 풍경화에서 기대하는 관념을 그리되, 뭔가 잘못되어 있도록, 기대에 '어긋나는' 방식일 뿐만 아니라 도상적 으로도 기이한 상태로 그렸다. 이런 소나무나 절벽은 이 그림 안에서의 도상적인 논리에도 맞지 않는다. 화면을 가로막는 철조망이나 포옹하고 있는 여인의 붉은색 치마의 낯설음만이 아니라, 소재의 배치 형태 색조 전반에서 뭔가 어긋나 있다.
이런 잘못된 풍경은 그러나 실제로 존재한다. 날이 흐린 날 일산의 호수공원에 가면 조금 비슷한 경험을 할 수 있다. 또는 소규모 놀이동산이나 관광지에서 경험하는 피안과 현실의 독특한 겹침, 현실과 초현실, 자연과 기계문명, 문명과 유치한 욕망이 서로 포개져 있는 현장들은 실제로 우리 주변에 널려있다. 그리고 이 그림은 그러한 현장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이 그림이 그러한 현장이다. 이것은 '포옹'에서 도상들이 서로 따로 놀거나, 지나치게 도안처럼 그려졌다던가, 조형적 공식을 정교하게 배제하고 있거나 하는 이 그림의 전반적인 인공성에서 온다.
포옹하고 있는 남녀만 뺀다면, 이 그림은 하나의 독립된 회화라기 보다는, 어떤 '배경'에 가깝다. 옛날 사진관이나 연극무대의 배경 말이다. 이런 배경그림에는, '포옹'에서 인물 땅 바다 섬이 그러하듯이 근경 중경 원경이, 독립된 판넬처럼 기계적으로 분리되기 마련이다. 포옹하고 있는 인물로 인해 배경그림은 이제 완성된 연극이 된다.
그는 그림 그리기의 어떤 순간에 '잘 그리는' 화가이기를 포기하고 연극연출가나 무대 디자이너를 선택한다.(그가 대학시절 유명한 배우였다는 것도 하나의 배경이 될 것이다.) 따라서 이 그림에서 색은 물감이다. 그것도 알파나 신안 물감에 흰색을 많이 섞은 화학재료의 탁색이며, 국산 물감의 탁색은 트로트 노래의 리듬처럼 일종의 '미학적 불륜', 짜릿하면서도 황폐한 감수성과 결부된다. 연극이란, 명확하게 가짜 같은 느낌을 주지만 그 느낌 자체가 너무 현실적인 것이 아니던가. 붉은 물감-치마, 구름기계, 나아가 '포옹'이라는 진부하고도 심원한 소재 자체의 선택 등은 너무 가짜 같은, 진짜들이다.
민정기의 포옹, 다방레지와 도시노동자의 포옹은 60,70년대, 그러니까 황석영이 이농을 묘사할 때의 이미지이다. 아니면 국내에서 컬러티브이가 시작할 때 즈음, 아직 컬러모니터가 방사하는 빛에 충분히 익숙하지 않은 시절의 이미지이다. 이 시대를 거리를 두고 관조하기에는 지금도 너무 많은 흔적이 남아있다. 아니 반대로 너무 빨리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그리고 기억에 대한 집단적인 억압은 과거의 갑작스러운 회귀를 낳는다.
최근 텔레비전과 영화 패션 등, 대중문화에서 흔히 나타나는 회고정서의 가소로운 부추김은 이 말해지지 않은 시간에 대한 또 다른 종류의 신기루이다. 신기루는 주로 국가와 상품이 미래를 그리고 약속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과거야말로 진정으로 넓은 시장이라는 것을 장사꾼들은 이제야 눈치채고 있는 중인 것이다.
대중매체가 사용하는 회고적 이미지들은 '조국근대화'의 거대한 연극에 대해 여전히 어쩔 줄 몰라하며, 그 주위를 맴돈다. 옛날 영화의 스타일을 보면서 낄낄거리다시피, 과거는 그저 어색하고 우스꽝스럽다. 그런데 그러한 감각이 돈이 되자, 과거의 낯설음마저도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래서 과거가 아니라 그것을 과도하게 잊어버린 현재를 어색하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그림이 여전히 갖고 있는 특권 중에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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