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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omepage]님께서 남기신 글 (2008-02-12 13:32:28, Hit : 684)
[기사] 이윤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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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택에 관한 게시물을 언제 올려야지 하다가, 이제야 올리는-_-;   귀감이 될 만한 부분도 있고 신경꺼야할 부분도 분명한데 작업자체 보다는 자신의 삶 자체를 무브업하는 능력이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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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강석천




▲ photo 유창우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연극 연출가이자 극작가인 이윤택(55) 감독은 자신을 ‘중간인’ ‘회색분자’라고 했다. 그러나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는 ‘경계선에 있는 사람’이라기보다는 ‘경계를 넘나드는 사람’이다. 이 감독은 비주류 게릴라 연극인에서 한국 연극의 중심으로 우뚝 서게 됐다. 하지만 그는 초심을 잃지 않고 게릴라 시절의 열정과 아이디어를 계속 뿜어내고 있다. 또 이 감독은 2년제 방송통신대를 나와 동국대학교 교수가 됐다. 그는 권위를 내세우기보다 학생의 편에 서서 함께 수업시간을 즐기고 있다.

이 감독은 예술 장르의 경계도 넘나드는 ‘멀티플레이어’다. 그는 연극, 뮤지컬, TV, 영화 등을 오가며 글을 쓰고 연출을 한다. 올 가을에는 뮤지컬 ‘공길전’, 연극 ‘정말, 부조리하군’ ‘피의 결혼’ ‘태화강 이야기’를 잇따라 무대에 올리고 있다. 이 바쁜 와중에도 이 감독은 지난 10월 16일 맨발에 편한 구두를 신고 집 근처로 마실 오듯 조선일보 주필 서재에 등장했다.

[강천석] 연극계로 오기 전에 도서외판원, 우체국, 한전, 한일합섬, 부산일보 등 정말 다양한 회사를 다녔더군요. 남들은 한 번 사표를 쓰기도 힘든데, 이 감독은 정말 사표를 많이 썼겠어요.
[이윤택] 직장을 통해 세상 여행을 한 거죠. 한 곳에 머물러 있는 것이 체질상 맞지도 않고요. 유랑광대 기질이 있어서요.

[강] 결국 부친으로부터 그런 성향을 물려받은 것 아닐까요.
[이] 제 아버지는 15세부터 17년간 일본에서 살았고, 34세 때 12세 연하 띠동갑 어머니와 결혼하셨는데도 평생 집 밖을 떠돌아다니셨죠. 제가 어렸을 때 화투 치러 나가시는 아버지께 “저 내일 소풍가요”라고 두 번이나 말씀드렸는데도 그냥 확 나가버리시더라고요. 저는 울지 않고 구멍가게에 가서 주인아저씨에게 제가 먹을 빵과 선생님 드릴 담배를 외상으로 얻어서 소풍을 갔어요.

물론 아버지에 대한 서운함 때문에 사진을 구겨버린 적도 있죠. 나중에 보니까 어머니가 그 사진을 다리미로 다려서 보관하고 계시더라고요. 20대가 돼서 그 사진을 다시 봤는데 제 얼굴이 그 안에 들어있는 거예요. 결국 저는 그토록 서운해 하던 바로 그 아버지의 아들일 수밖에 없죠.

[강] 부친과는 심정적으로나마 화해를 했나요.
[이] 아버지가 지낸 시대를 이해하고 나서는 제 아버지가 아닌 역사 속의 아버지와 화해를 했어요.

[강] 부친은 한때 부산 공동어시장 중매인으로 큰 부자가 됐다가 쫄딱 망해서 집안살림이 극도로 어려웠다고 들었습니다.
[이]‘이가전’이란 대본을 써놓았어요. 파란만장한 제 아버지 이야기를 담았죠. 언젠가는 연극이나 드라마로 나올 겁니다.

[강] 학창시절은 어땠나요.
[이] 중·고등학교 때 공부는 잘 안 했지만 검도부, 문예부, 흥사단 등 활동을 많이 했어요. 경남 고등학교 시절에는 문예반이었습니다. 수학은 꼴찌였지만 국어는 전교 1등이었어요. 서울대에 원서를 냈다가 떨어졌죠. 하지만 제 작문이 서울대 입시 모범 작문으로 뽑혀 ‘진학’이란 입시잡지에 게재됐어요. 낙방자의 답안이 모범 답안으로 실린 셈입니다. 재수를 하면서는 점점 공부를 멀리하게 됐죠.


[강] 서울연극학교(현 서울예대) 연극과에 진학했던 무렵의 사연은 어떤가요.
[이] 교수진이 너무 좋았습니다. 특히 유치진 선생의 특강에 감동을 받아 연극 ‘브나르도(민중속으로)’ 운동에 관심을 가졌어요. 이듬해 학교를 나와 부산에 내려가서 제작, 연출, 주연을 맡아 연극을 무대에 올렸는데 완전히 망했어요. 그래서 빚을 지고 군대로 도망갔죠. 3대 독자였지만 자원 입대를 했어요. 그런데 하사관학교로 차출돼서 6개월 훈련 받고 포천으로 배치됐어요. 정말 군생활이 안 맞았어요. 아프신 어머니의 ‘생계유지 곤란사유’를 들어 10개월 만에 의가사제대를 했죠.

[강] 당시 제대하고 돌아온 아들에게 고기를 먹이려고 폐병을 앓으시던 어머니가 주인집 아줌마에게 돈을 빌리는 모습을 보고 일종의 회심(回心)을 경험했다는데.
[이] 밥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깨달았죠. ‘밥이 없으면 인간은 인간답지 못하다.’ 그래서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일을 시작했어요.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고 합격했죠. 처음 발령 받은 곳은 부산우체국이었어요. 낮에는 우체국에서 일하고 밤에는 시도 쓰고 연극도 했어요. 이후 방송통신대 초등교육과에도 들어갔어요. 선생님이 되고 싶었거든요. 재학 중에는 제1회 방송문학상에 당선됐어요. 당선된 시는 현대시학에 실렸죠.

[강] 우체국을 나와서는 어디로 갔나요.
[이] 한일합섬 염색기사로 일하면서 짐승 취급 받는 여공들의 실생활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의자가 없어서 8~9시간을 계속 서서 일했고 작업반장들은 여공들의 몸을 예사로 더듬었습니다. 하지만 여공들은 그 지옥을 잘 웃고 낙천적인 모습으로 살아냈어요. 혁명이 아니라 좋은 화장품을 사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그걸로 행복을 얻었어요. 에릭 호퍼의 말처럼 민중은 어떻게 해서라도 자신의 삶에 만족하려고 하죠. 혁명을 꿈꾸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계층 상승을 꿈꾸는 민중 부르주아일 뿐이에요.

[강] 한일합섬에서 나와 한전으로 옮긴 계기는 무엇인가요.
[이] 하루는 작업반장이 여공 가슴을 마구 주무르며 성추행을 하기에 제가 염색용 쇠몽둥이로 후려쳤어요. 도망쳐서 숨어지내다가 동료 통해서 기숙사에 있던 옷가지를 챙겨오고 다시 한전에 취직했죠. 밀양과 충무 영업소에서 일했습니다.

[강] 2년제 방송통신대 학력으로 신문사에 입사하기 힘들었을 텐데요.
[이] 부산일보 교열기자 실수로 모집공고에 학력(學歷)이 학력(學力)으로 나왔고, 원서를 낼 수 있게 됐어요. 필기시험에 1등으로 붙었고 면접 때 학력을 문제 삼기에 “기자가 취재 잘하고 글만 잘 쓰면 되지 학력이 무슨 상관입니까”라고 오히려 큰소리를 쳤습니다. 결국 합격했고 6년 반 동안 편집부에서 근무를 했습니다. 시나리오 ‘우리는 지금 제네바로 간다’와 희곡 ‘시민K’는 당시 신문사 책상에서 쓴 것입니다.

[강] 1986년 1월 4일 시무식 때 신문사를 나왔고 그 해 퇴직금 660만원으로 부산에 가마골소극장을 세우고 ‘연희단거리패’를 만들어 정식으로 연극계에 뛰어들었습니다. 데뷔 시절 한국 주류 연극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까.
[이] 기존 연극인들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첫 공연 ‘동해안 별신굿’도 신인과 무속인들을 등장시켰습니다. 1988년에는 정말 게릴라처럼 서울에 입성했고, 당시 신문 문화부 기자였던 고(故) 기형도 시인이 ‘문화무정부주의자 이윤택이 서울 입성한다’는 기사를 썼죠.

[강] 서울로 입성하고 연극, TV 드라마, 시나리오 등 여러 방면에서 승승장구했다는데.
[이] 제 초기작 ‘시민K’를 보고 한국 연극계를 주름잡던 정통 보수 연극의 대선배들이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보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현대극장, 실험극장, 산울림소극장 등에서 공연을 할 수 있었어요. 게릴라가 본산지를 점령한 거죠.


[강] 이후 대한민국에서 탈 수 있는 연극상은 거의 다 받았는데 얼마 후 기득권의 견제로 한동안 제동이 걸렸다고 들었습니다.
[이] 화가 이중섭 이야기를 담은 ‘길 떠나는 가족’의 경우 작품상, 주연상 등 모든 부문의 상을 다 주면서 연출상은 안 줬어요. 화가 나서 고향인 부산으로 다시 내려갔죠. 저는 잘 하면 주고 못 하면 안 주는 게 상이라고 생각해요. 다른 이유가 개입돼서는 안 되죠. 그런데 선배 한 분이 찾아오셔서 “자네는 젊으니까 앞으로 상은 얼마든지 탈 수 있다”고 달래시더군요. 결국 설득당했죠.

[강] 정통 사실극 훈련을 받을 기회가 제대로 없었던 이 감독의 연극이 기성극단에 주는 충격은 어디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나요.
[이] 저는 시(詩)의 힘으로 연극을 만들어냅니다. 제 연극의 에너지는 주로 시에서 나오는 것이죠. 또 신문사에서 6년 반 정도 편집기자로 일한 것이 도움이 됐습니다. 필요한 부분만 남기고 모두 자르는, 버리는 방법을 습득한 거지요. 생략과 비약을 통해 관객의 상상력이 숨쉴 공간을 마련해준 거지요. 기존 연극은 너무 설명적이에요. 그러면 관객이 피곤해지죠.

[강] 연극 ‘오구’도 큰 성공을 거뒀는데 언제 구상했고 쓰는 데 얼마나 걸렸나요.
[이] 구상은 26세 때 했고 10여년 가지고 있다가 이틀 만에 썼습니다. 친구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초상집에 갔는데 그 친구 어머니가 10만원을 주면서 화투나 치라고 하더군요. 초상집이 너무 적적하면 안 된다는 거지요. 그 친구는 저와 함께 열심히 화투를 치다가도 문상객만 오면 곡(哭)을 하다가 다시 돌아와서 신나게 화투를 쳤어요. 친구 어머니도 화투 치는 것을 보고 계시다가 문상객이 오면 목놓아 우시는데 ‘이것이 진실된 연극이다’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강] 연극 ‘오구’는 성공했지만 영화 ‘오구’는 실패했습니다.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이] 먼저 연극 관객과 영화 관객이 다르다는 것을 가볍게 생각했어요. 연극 ‘오구’ 관객은 따로 따로 들어와도 연극이 진행되면서 하나가 되어 함께 즐기지만 영화 ‘오구’ 관객은 언제까지나 혼자의 시선으로 영화를 봅니다. 그러니까 집단적인 공감대가 형성되지 못하는 거죠. 두 번째는 한국의 영화 관객이 너무 어리다는 겁니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 힘든 젊은이들이 주 소비층이라는 겁니다. 세 번째는 유통구조입니다. 부산에서 제작한 데다 메이저 배급사를 잡지 못했어요. 끝으로 돈 되는 배우가 등장하지 않았고요.

[강] 작품성과 흥행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는 힘들죠. 영화의 경우 배급에 돌리는 최종판은 감독보다 제작자에 의해 결정된다고들 합니다. 그래서 감독들이 자신의 마음대로 편집한 ‘디렉터스 컷’을 다시 만들기도 하죠.
[이] 한국 영화인들은 연극인 이상으로 지적 수준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학벌도 좋고 아이디어도 많아요. 그런데 작품은 형편 없어요. 감독 마음대로 찍을 수 없기 때문이죠. 예전에는 ‘오발탄’ ‘마부’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등 좋은 영화가 많았는데 말입니다.

[강] 이 감독은 시간예술의 성격상 지나면 잊혀지는 한계가 서러워서 영화로의 전환을 시도하는 것은 아닐까요.
[이] 맞아요. 연극은 아무것도 남기질 못해요. 동영상으로 촬영한다고 해도 완벽하지 않아요. 기록 측면에서는 영화가 훨씬 낫죠.

[강] 어디 연재한 이 감독의 청춘시대 방황기에서 이 감독이 버리거나 이 감독을 버린 여인들을 합성하면 상당히 대중성 있는 작품이 나올 것 같은데요. 여성관은 어떤가요.
[이] 50대가 되니까 왠지 지루하고 심심한 느낌이 들어요. 그래서 연애를 하고 싶어요. 40년 전 저와 첫 키스를 한 여인이 최근 미국에서 저를 찾아왔어요. 그녀를 만났는데 당시의 떨림이 되살아났어요. 나이가 들어도 마음과 감정은 똑같은데 너무 어른 취급만 당하는 것 같아요. 내년에는 어릴 적 사랑을 다시 만난 중년 남녀의 이야기가 담긴 ‘꽃을 바치는 시간(가제)’이라는 작품을 쓸 생각입니다.

[강] 이번 대선은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또 이 감독이 “대권 주자들은 정조를 꿈꿔야 한다”고 말한 것을 듣고 깜짝 놀랐어요. 만약 고문(古文) 부활의 문체(文體)혁명을 이끌었던 정조가 대통령이 되면 이 감독의 글이 불온하다고 소각해버릴지도 모르는데요.
[이] 저는 정조의 다른 장점을 본 겁니다. 정조 같은 대통령이 나오면 보수와 진보, 좌익과 우익을 모두 아우를 것이라고 봅니다. 균형감각이야말로 정조가 가진 최고의 무기라고 생각합니다.

[강] 최근 학력 위조 사건으로 한참 시끄러웠습니다. 이 감독은 2년제 방송통신대 학력으로 동국대 교수가 됐는데.
[이] 저도 처음에는 학력 때문에 수치심을 가졌지만 이를 감추고 위조하기보다는 오히려 무기로 사용했어요. 학력보다는 실력을 키워서 말입니다. 그리고 제게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은 욕구가 항상 있었습니다. 동국대를 선택한 것은 한국 연극 교육의 본산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정통 보수 선배들의 뒤를 이어 게릴라인 저도 정통이 되고 싶습니다.

[강] 이제 이 감독은 게릴라가 아닌 것 같습니다. ‘전직 게릴라’라고 해야 할 것 같네요.
[이] 한 번 비주류가 영원한 비주류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주류도 될 수 있죠. 지금 청와대에 계신 분은 영원히 비주류로 남고 싶은 모양이지만 저는 주류가 되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또 주류와 비주류는 얼마든지 넘나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하고 싶은 일 중 하나는 동국대에 유치진, 이해랑의 흉상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래야 나중에 제 흉상도 설 것 아닙니까. 한국 연극계의 정통성을 지닌 선배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싶습니다. 어차피 죽으면 모든 것이 사라질 텐데 제가 존재했다는 흔적은 남기면 좋을 것 같습니다.

[강] 죽음이라는 지우개, 망각이라는 지우개, 시간이라는 지우개가 없으면 세상이 얼마나 골치 아프겠습니까. 죽음이라는 지우개가 있기에 삶의 의미가 있는 것이지요. 지구 역사에서 가장 오랜 세월 살아남은 것이 바이러스라고 합니다. 고등동물일수록 빨리 사라지니까 인류도 언젠가는 멸종할 것이잖아요.
[이] 죽으면 무엇이 남겠습니까. 하지만 어떻게 지워지느냐가 중요한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살아있을 때 최선을 다하고 행복해야죠.

[강] 페미니스트들은 이 감독 연극에 출연하는 사람은 성녀 아니면 창녀라고 비판을 하는데요.
[이] 성녀는 우러러볼 수 있고 창녀는 매혹적이니까 자주 등장하게 됩니다. 일반 여성이 나오는 연극을 만드는 재주가 별로 없어서요. 그리고 저는 세계가 여성화되는 것도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서로 공존하는 것이 좋죠. 남성이든 여성이든 한 세력이 다른 세력을 누르고 우월감을 누리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라 할 수 없어요.

[강] 지금은 밀양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 1999년부터 밀양 연극촌에 연극공동체를 만들어서 50여명의 단원과 살고 있어요. 이상주의적인 삶의 공동체, 완벽한 무정부적 공동체를 만들고 싶습니다. 나보다는 우리를 강조하는 공동체죠. 그래서 한 번 밀양에 들어온 사람은 안 떠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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