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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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omepage]님께서 남기신 글 (2008-01-05 14:32:55, Hit : 716)
전시 1.5



아트포럼 뉴게이트 젊은작가 6인전

'아트포럼 뉴게이트 젊은작가 발굴' 프로그램 작가展

2008_0108 ▶ 2008_0122 / 일.공휴일 휴관



권기범_JUMBLE PAINTING07_7_혼합재료_70×70cm_2007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아트포럼 뉴게이트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8_0108_화요일_06:00pm

포럼_2008_0108_화요일_07:00pm~09:00pm

'아트포럼 뉴게이트 젊은작가 발굴' 프로그램_2004년 권기범, 박서림
'아트포럼 뉴게이트 젊은작가 발굴' 프로그램_2005년 지요상, 이지송
'아트포럼 뉴게이트 젊은작가 발굴' 프로그램_2007년 한승구
'아트포럼 뉴게이트 젊은작가 발굴' 프로그램_2008년 손종준

관람시간_11:00am~06:00pm





아트포럼 뉴게이트
서울 종로구 신문로2가 1-38번지 내자빌딩 1층
Tel. 02_737_9011
www.forumnewgate.co.kr






권기범_조화의 현재적 부재와 회복 ● ... 권기범은 지금까지 동양적 사유를 근간으로 이른바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궁극적 지향점으로 삼아왔다. 하지만 그의 작품 안에서 이상적 조화란 정작 그것의 현재적 부재를 먼저 드러냄으로써만 가능해진다. ● 그가 출발점으로 삼은 것은 ‘충돌(clash)’이다. 여기서 충돌이란 다름 아닌 자연과 인공의 대립이다. 이로써 그는 우리의 삶 안에서 ‘자연스러움’이 어떻게 부재하는가에 관한 작가적 인식을 치밀하고도 섬세하게 그려낸다. 우선 충돌은 그의 작업 전반에서 등장하는 무수한 선들의 교차를 통해 표면화된다. 여러 겹의 층으로 한 데 겹쳐지고 중첩된 선들이 작위성과 자연스러움을 오가며 끊임없이 충돌한다. 줄을 이용한 설치작업은 중력을 거스른 채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던 선들이 시간의 경과와 함께 차차 이완되면서 자연의 질서 안으로 순응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평면이나 영상 작업 역시 자연의 질서인 중력에 내맡김으로써 얻어진 자연스러움과 이를 거부하는 인위적 태도 또는 도시와 자연의 이미지가 혼재하는 속에서 충돌의 구조를 형상화한다. 또한 그가 각각의 선들에 담아내고 있는 관념들에는 ‘중력’에 대한 상반된 태도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그것은 삶 내지 존재 자체에 대한 본원적 태도와도 맞닿아 있는 것으로 순응과 거부라는 상반된 의지의 교차다. ●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는 동양화의 관념적이며 회화적인 전통을 동시대적 맥락에서 어떻게 이어받을 것인가라는 문제로도 확장된다. 바로 무엇을 고수하고, 버릴 것이며 또 새롭게 취할 것인가의 문제다. 이와 함께 작가가 파악하고 있는 동양화의 회화적 요체란 바로 붓에 의한 필선이다. 전통의 문맥 안에서 볼 때 글씨를 쓰던, 난이나 매화를 치던 각각의 필선이 일궈낸 자연스러움의 정도는 곧 작품의 완성도뿐만 아니라 그 행위 주체의 삶과 철학적 깊이를 가늠하는 중요한 척도였다. 작가의 선에 대한 진지한 천착 역시 이러한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로써 선은 그에게 철학적 사유의 도구라고도 할 수 있다. 게다가 거기에는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는 우주 혹은 자연의 질서, 참 존재, 조화와 같은 본질적 관념과 역사의 궤적들이 공존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그가 회화적 전통을 현재화하는 데 가장 큰 주안점으로 삼고 있는 것은 정신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정신성이란 다름 아닌 스스로를 자연의 일부로 파악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해지는 참된 자기인식의 의지와 다르지 않다. 이를 위해 작가는 과정 자체를 사유한다. 어떤 확정된 결과로써가 아니라 자연과 인공의 대립 안에서 쉽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질서의 실체를 가시화하는 것이다. ... ■ 윤두현




박서림_멧돼지가 있는 풍경_한지에 혼합재료_47×75cm_2007


박서림_‘생각하는 멧돼지’의 여정 : 우리(we)의 우리(cage)로부터 ● ... 작가의 멧돼지 작품 중, 몸에 무늬를 넣어 그린 「나는 멧돼지다」(2006)를 보고 몇 년 전 그의 자화상 전시에서 보았던 한 이미지를 찾아달라고 부탁하였다. 「스물아홉살에 스스로 내 꼴을 그리다」(2002)에서 그는 멧돼지와 유사한 패턴의 원피스를 입고 있다. 몇 년의 시간이 지나 스스로도 감지하지 못했던 인식의 선상에서 그는 자신이 입었던 옷을 멧돼지에게 입혀주었던 것이다. 인간과 동물이라는 점이 다를 뿐, 보는 이를 쳐다보는 눈과 구불거리는 패턴의 반복적 움직임은 이 둘을 관통하는 정서적 교감, 더 나아가 삶의 조건에 대한 유사한 인식을 보여주는 듯하다. ● 작가는 멧돼지의 눈을 그리며 스스로 그 눈이 응시하는 최초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멧돼지가 작가의 상황이 이입된 존재라 생각할 때, 사실 이것은 멧돼지가 멧돼지를 보는, 혹은 작가가 작가 스스로를 바라보는 상황과 다르지 않다. 작가가 멧돼지를 답답함과 안타까움으로 바라본다면, 멧돼지는 작가의 무엇을 보는가? ― 다시 말하자면, 작가는 작가의 무엇을 보는가? ● 이와 같은 질문은 수묵을 다루는 작가의 자의식과 조건에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그는 동양화를 전공하고 작업을 하면서도 디자인과 같은 다양한 분야에 계속해서 관심을 두어 왔으며 동시에 자신의 작업과 삶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그지없이 자연스러웠던 상태에서의 동양화가 시간과 역사를 거듭하며 스스로 정체성을 묻지 않을 수 없는 상황. 작가는 하나의 주제를 탐구하여 어떤 경지에 이르는 동양화의 깊이에 공감하면서도 지금의 이 상황이 제기하는 문제들에 천착하고 있다. 수묵화의 지긋한 보폭이 작가가 살고 있는 이 시대와 그 경험을 담아내기에 적당한 것일까 고민하는 것이리라. ● 그의 최근작인 「멧돼지가 있는 풍경」(2007)은 그의 작업에 있어 하나의 전환을 암시하는 작품이다. 멧돼지를 클로즈업해 그렸던 지난 몇 년간의 작품과는 변화된 화면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멧돼지가 공간과의 관계상에 그려졌다는 점에서 다르다. 의자, 책상, 침대, 테이블 등이 이루어내는 새로운 공간 안에서 하나의 소재로 멧돼지가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 공간은 모던한 디자인의 가구와 오랜 옛날의 괴석이 양존하는 그야말로 시대가 혼재된 곳이다. 청대의 화본인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에서 끌어온 모티브들, 작가의 소유물, 상상 속의 대상 등이 시공의 질서 없이 배치된 화면은 거리와 원근을 가늠할 수 없는 바탕을 배경으로 애매하면서도 불분명한 공간을 이루어낸다. 그러나 이 애매하고 불분명한 곳이야말로 지금 우리의 삶이 자리한 곳이 아닌가? ● 멧돼지는 문틈을 통해 이 공간을 빼꼼히 들여다본다. 그는 자기 앞에 놓인 모호한 공간과 물건, 그 우리(cage) 밖의 세계를 낯설게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 작가의 손때가 묻은 물건들이 섞여있는 이 공간은 작가, 혹은 멧돼지의 내면세계로의 탐구이기도 할 것이다. ... ■ 김남인




지요상_寂寥_한지에 수묵_200×135cm_2007


지요상_지요상의 寂寥 ● ... 전통적인 수묵이라는 재료를 사용하고 있으나 그 형태묘사는 서구적인 조형기법, 즉 명암기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색적이었다. 자기만의 조형적인 해석을 관철하려는 의지에 이끌리고 있는 극적인 명암대비는 고집스럽게 집착하는 듯한 사실주의 기법을 적극적으로 옹호한다. 그러기에 멀리서 보면 목탄 소묘처럼 보일 정도이다. ● ‘적요-눈 감고 머물다.’라는 부제는 대작가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이와 같은 명제는 그림의 내용을 지시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시각적인 이미지로서 그치는 그림이 아니라, 내용을 중시하는 그림이라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실제로 그의 그림은 우선 발상 자체가 특이하다. 실제의 인물과 그 인물이 수면에 비치는 대칭적인 두 가지 이미지를 대립시키는 구성이다. 실상과 허상의 대비인 것이다. 따라서 인물은 물그림자로서의 허상 역시 이 부분분만을 거꾸로 보여준다. 여기에서 인물은 삭발한 모습으로서의 수도자를 상정하고 있다. ● 실상과 허상은 수도자의 실제 모습과 의식의 그림자를 의미한다. 이는 육체와 정신, 물질과 관념, 현실과 비현실의 대립 및 양립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두 가지 상황을 하나로 일체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회화적인 기술로 이해할 수 있다. 그는‘장자의 내편 제물론에 언급된 꿈에 대한 부분은 작업의 화두로서 대상과 일치를 표현하고자 하는 영감의 원천이 된다.’ 고 밝히고 있다. 이로써 알 수 있듯이 그의 작업은 실상과 허상이 일체가 되는 지점은 꿈꾸고 있다. 그림은 어디까지나 시각적인 이미지라는 점에서 단지 실상과 허상, 즉 신체와 의식이 하나가 되는 과정으로서 머물 따름이다. 수도자가 수도를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이상경은 그의 그림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실상과 허상, 신체와 의식이 합일하는 수도의 한 장면만을 서술할 수 있을 따름이다. ... 그의 작품세계에 주시하는 까닭은 어려운 내용을 시각적인 이해가 쉽도록 구성한 점이 그 하나이고, 수묵에 대한 새로운 접근방식, 그리고 출중한 형태묘사 및 상활설정이다. ... ■ 신항섭




이지송_blank_캔버스에 유채_113.1×193.9cm_2007


이지송_매혹적인 사실 속의 달콤한 소외 ● ... 이지송의 시각과 정서는 현대적이다. 그러나 그의 방식은 17세기 후반의 네덜란드 회화의 그것과 매우 유사하다. 작가는 전체적인 밑그림의 윤곽이 간단히 형성되면 마치 한 땀 한 땀 직조하듯 형상들을 만들어 나간다. 이러한 방식은 무수한 노동을 요구하는 일이며, 그리기에 대한 현대의 형이상학적 태도와는 대립 항을 이룬다. 모더니즘이 부정한 이 전통적 화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잠시 그의 작업을 엿보는 것이 좋겠다. 작가는 미세 모에 물감을 찍어 점을 찍듯 화면 전체를 그린다. 시간의 속도를 추구하는 현대인들에게 경외심조차 불러일으킬 만하다. 또한, 간단히 윤곽을 그린 스케치 외에, 결과를 예비할 어떠한 밑 작업 없이 작은 붓질이 점차 전체를 구성해 나가는 것을 보면 거의 편집증적 작업방식이라고 불러도 무방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의 유사성보다 더 설득력이 있는 근거는 네덜란드 화가들과 이지송이 공유한 회화적 감성이다. 당대의 회화는 장르를 넘나들며, 대상을 인간의 모든 감관을 자극하도록 섬세하게 재현하였다. … 여기서 우리는 작은 것들이 만들어내는 감각의 우주 속을 유영하게 된다. 그들의 필력은 그런 맥락에서 즉물적이고 또한 환상적이다. 그들이 대부분 작은 크기의 화면을 선택한 것도 이러한 즉물성에 대한 집중력 때문이었으리라. 이들과의 비교는 작가 이지송이 전통적이고 미술사적 정통성을 가지고 있다고 정의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의 태도에서 그리고 작업방식에서 유사성을 찾았기 때문이고, 더 나아가 그들이 구축했던 감각에 대한 사실성을 그의 작업 속에서 재발견했기 때문이다. 하나 더 유사성을 든다면, 사회적인 연관 속에서 거시적 메시지를 담지 않으려 한다는 점이다. 이지송이 연출한 사건은 소소한 일상적 실재이다. 그러니까 기억도 나지 않을 일상의 사건들이 드라마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드라마를 이루는 정서 또한 가볍다. 제목이 시사하는 것처럼 조밀하고 심층적인 감정들을 드러낸다. hesitate(망설임), a delicate situation(미묘한? 순간), tedious play(지루한 장난) 등 명기된 제목들은 커다란 운명 따위나 극한 상황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매번 반복되는 사건이나 관습적 일상들에 연유된 것이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상황의 성격들이다. 그 성격은 한편으로는 소외된 인간을 보여주고, 다른 한편으로 욕망의 파행을 심리극처럼 펼친다. 그래서 상황 자체는 미미하지만, 그 심리적 파장은 매우 깊게 파고든다. 이러한 사실은 미시적 삶에 대한 감성적 애널리스트로서 이지송을 바라보게 만든다. ● 마지막으로 이지송의 작품에 대한 감상자들의 일반적인 평가가 극사실적인 재현에 우선 근거한다면, 그의 방법론은 사실주의의 비 주류적 장르로 정의할 수 있는 Trompe l'oeil (눈속임 기법 혹은 회화)가 될 수 있다. 부재에 대한 대리적 표현으로부터 허위를 즐기는 유희적 성격까지 다양한 해설이 이 장르에 곁들여져 있지만,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이 장르가 본래 작은 것에 충실한 회화방식이라는 점이다. 이 장르는 결코 기념비적인 성격의 의미나 시각을 갖지 않는다. 오히려 거대담론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부정적인 태도를 견지한다. 이지송의 작업은 이 장르에 내재된 원리적인 특성들과 더불어, 일상에 산재된 평범하면서도 매우 섬세한 정서와 심리를 미묘하게 얽어내는 능력을 함께 보여준다. 이지송 회화에 보여주는 사실성에 대한 놀라움은, 묘사된 사물과 인물에서 뿜어 나오는 즉물적 감각에 취하게 되는 과정을 겪으며, 드라마가 구성하는 일상의 신비주의에 매혹되는 것으로 발전하는 감상의 로드 맵이 정해질 수 있겠다. ... ■ 김정락




한승구_모래-untitled_영상설치_2007


한승구_0응시’와 ‘몰입’ ● 나르시소스의 두 얼굴 : 분열된 편집증_타자를 통해 자아를 보려했던 한승구의 시선이 나르시소스로 움직여 새로운 몰입의 국면을 맞는다. 그는 타자를 바라보는 시선이 선행되지 않았다면 편집증적인 자기보기는 없었을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한다. 타인을 바라봤던 것을 ‘편집증’으로 그리고 그것에 대한 반대급부작용으로 등장한 자기애적 바라보기를 통한 자기안의 여러 자아에 대해 ‘분열증’이라 명명하지만 나는 조금 달리 해석해 내고 싶다. 끊임없는 자기 응시를 통해 비로소 발견하게 된 존재성이 곧 ‘편집증’적 증상이며 동시에 그 안에 실존하는 다양한 자아를 다시 ‘분열증’적 목격이라고 말이다. / 그러나 그에 대한 해석이야 어찌 되었든 그것은 한승구에게 새로운 스팩트럼의 역할을 수행해 냈다. 이제 그는 기존의 얼굴을 거세하지 않은 채 타자의 얼굴과 비순차적으로 교차, 혼재된 새로운 이미지를 생성해 낸다.(Nod방식) 게다가 24개의 얼굴이 서로 뒤섞일 때 발화점이 되어 주는 것은 터치스크린을 만져 다른 얼굴로 변하게 만들던 바로 그 관람자(매개자)의 손끝에 달려있다. 즉, 浮彫化된 얼굴화면 앞엔 24개의 전구모양의 球들이 놓여있고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바꾸어 놓느냐에 따라 새로운 순서가 정해지는 것이다. ... ● 말거는 타자들 : 인터렉티브_이러한 관람자(매개자)의 행위는 전시작품 전면에 걸쳐 모두 적용된다. “후우~”하고 입김을 불면 자유로드롭이라는 놀이기구처럼 익명인의 얼굴이 담겨있는 모니터가 직각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올라갈 때보다는 느린 속도로 천천히 내려오게 되는데 이때 화면 속의 인물은 올라갈 때 물에 덮혔다가 내려올 때 물이 빠지면서 다른 인물로 변화되어 진다. 여기서 다시 적극적인 인터렉티브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한승구의 작품들은 관람자가 곧 매개자면서 동시에 자아를 찾는 개체자이며, 때론 자아에게 말을 걸어주는 타자가 되기도 한다. 굳이 한승구식 자아와 타자의 존재와 분류기준을 살펴보자면 퐁티의 ‘신체성의 자아’와 매우 유사한 구분방식을 갖는다. 내적, 심리적 기준의 경계가 아닌 외적, 신체적(얼굴)으로 보여 지는 구별법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며 이것은 시각적으로 사고하는 조형예술창작자에게선 너무도 당연한 사유의 방식으로 보여 진다. 여기에 덧붙여지는 인터렉티브한 코드는 한승구가 애초에 던져 놓은 자아와 타자의 관계를 좀 더 명확하게 들어내는 행위로 ‘나’와 ‘남’, 서로가 모두 존재해야만 가능한 ‘마주보기’ 속에서의 ‘자아보기’ 정도가 되겠다. ... ■ 김최은영




손종준_Defensive measure-performance in tokyo 001_작품착용 퍼포먼스_2007


손종준_테크놀로지시대의 신체와 그로테스크 이미지 ● ... 손종준의 사진들에서 가장 먼저 눈을 자극하는 것은 날카로운 금속성의 기계장치이다. …「defensive measure」라는 사진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손종준은 자신이 만든 이 생경한 기계장치들을 ‘방어 도구’로 상징화했다. 그런데 사진 속 그 장치들은 구조적으로 보면 머리에 씌워져 두개골과 안면을 보호하거나 어깨와 팔에 부착되어 보호대 구실을 하는 한편, 세부적으로 보면 금속 표면에서 화살촉처럼 생긴 것들이 예리하게 솟아나 있어 공격용 무기 구실을 한다. 이를테면 사진 속의 이 낯선 기계장치들은 단순히 ‘방어의 수단’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방어 수단이자 공격 수단’인 것인데, 그렇다면 무엇에 대한 방어이자 공격 수단인 것일까? 작가의 사진 속에서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찾아보기로 하자. ● 우리는 각종 테크놀로지 기계장치를 자율적으로 선택해서, 내 본원적 신체 지각과 세계 경험을 위축시키기 않은 채 다만 ‘유용한 도구’로 사용할 뿐인가? 손종준의 사진을 보건대, 우리는 그렇게 자율적으로 기계장치와 관계 맺고 있지는 못한 것 같다. 작가의 사진에서 은색 기계장치라는 극단으로 표현됐지만, 사실 그 장치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디지털 테크놀로지 매체 또는 도구들을 상징한다. 그것들은 우리가 선택적으로 탈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거의 ‘제 2의 피부’ 또는 ‘제 2의 감각기관’처럼 우리 몸에 달라붙어 있으며 이러 저러한 방식으로 우리가 세계와 맺는 인식적 ? 감각적 관계를 재편한다. 그 재편의 의미가 둘째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즉 손종준의 사진 속에서 기계장치들은 무엇에 대한 ‘방어 수단이자 공격 수단’이라는 것인가 질문했을 때, 그 답은 곧 그 장치들이 우리 바깥의 타인과 우리를 둘러싼 세계의 잠재적 공격에 대한 방어 수단이자 그 장치들을 통해 우리가 타인과 세계에 행사할 수 있는 공격 수단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첨단 테크놀로지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병합돼 있는 각종 장치들(여기서 장치는 단순히 기계장치만을 이르는 것이 아니라 각종 사회 기구, 제도, 물리적 형식을 포괄한다.)은 우리를 타인과 융화시키고 우리가 세계와 맺는 관계를 더욱 내밀하고 폭 넓게 한 것이 아니라 극히 자기 폐쇄적이고 사물화된 관계로 재편했다는 것이다. 손종준이 기계장치를 쓴 그로테스크한 인간 신체이미지를 통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 우리가 읽어내기를 기대한 메시지는 바로 이와 같을 것이다. 그리고 'defensive measure'가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지점 또한, 조형적 테크닉보다는 이 텍스트성, 즉 첨단 장치들에 익숙해진 우리가 과도하게 방어적이고 과도하게 공격적으로 타인을, 세계를 소외시키고, 그렇게 해서 스스로가 소외돼 있음을 말하는 데 있을 것이다. ■ 강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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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를 삼킨 보아뱀

박희섭_변웅필_장형선 3인展

2008_0109 ▶ 2008_0125 / 일요일 휴관



박희섭_풍경, 붉그스름하다_Landscape in Reddish Tint_한지에 염료, 안료, 자개_89×145cm_2007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리씨갤러리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8_0109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_10:00am~06:00pm / 일요일 휴관

참여작가
박희섭_변웅필_장형선





리씨갤러리
서울 종로구 삼청동 35-240번지
Tel. 02_3210_0467~8
www.leecgallery.com






리씨갤러리에서는 새해 첫 전시로 각각 개성 있는 작품 활동으로 주목받고 있는 작가 3인의 신작들을 전시합니다. 우리 자신과 우리가 사는 세상이 우리가 보는 그대로인가를 끊임없이 자문하는 것이 이들 3인 작업의 원천이자 공통점이라고 하겠습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작업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박희섭_풍경, 붉그스름하다_Landscape in Reddish Tint_한지에 염료, 안료, 자개_89×145cm_2007

박희섭 작가는 천연재료에서 직접 추출하고 물들인 한지에 전통 공예의 소재인 자개를 이용하여 대자연을 묘사합니다. 그가 그린 소나무 숲 풍경은 실제 우리 몸의 중심인 척추와 그것을 오고가는 신경줄기들의 형상입니다. 물과 별, 나무 등 자연으로 대변되는 대우주(Marcrocosm) 일부분과 우리 신체 속의 소우주(Microcosmos)는 매우 닮은 모습임을 작가의 예리한 눈으로 포착한 것입니다.




변웅필_한 사람으로서의 자화상-53_캔버스에 유화_150×130cm_2007

변웅필 작가는 옷은 물론, 머리카락과 눈썹까지 배제시킨 자화상을 그려냄으로써 인간의 정체성에 질문을 던집니다. 일반적으로 초상화가 옷, 머리스타일, 소품과 인물의 배경의 요소들이 개인의 신분이나 직업, 학력, 능력, 삶에서 추구하는 이상과 목표까지도 설명하는 요소로 삼았다면 변웅필의 자화상은 우리 자신을 감추었던 장치들을 벗어던진 한 인간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 모습은 남성/여성조차 구분이 되지 않으며 아름다움을 위한 어떠한 치장도 하지 않은 존재로서 편견이 넘치는 세상을 당당히 응시합니다.




변웅필_한 사람으로서의 자화상-풍선껌_캔버스에 유화_150×130cm_2007

장형선 작가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단절된 관계와 그것이 야기하는 충돌이 가득한 세상의 모습을 만화의 형식과 이미지를 차용하여 위트 있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나날이 접하는 세계 곳곳의 위험한 소식은 작가가 그린 창 너머의 가상공간처럼 현대인에게 무감각하게 느껴지고 있음을 꼬집고 있는 듯합니다.




장형선_Crazy Cloud_혼합재료_91.5×109cm_2007



장형선_Fight_혼합재료_81.5×89cm_2007

여러분들은 위의 3인이 각자의 삶에서 느끼고 사색한 것들이 부단히 숙련되고 절제된 형식들로 드러난 작품들을 통해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을 발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감추어진 것과 드러난 것 사이를 넘나드는 시선들을 만나실 수 있을 것입니다. ■ 리씨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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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침범_silent invasion

김주리 조각展

2008_0104 ▶ 2008_0117 / 월요일 휴관



김주리_무제 Untitled_흑연, 흙, 물_10×10×40cm_2007_부분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가갤러리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8_0104_금요일_05:00pm

관람시간_11:00am~06:00pm




가갤러리
서울 종로구 원서동 141번지
Tel. 02_744_8736
www.gagallery.co.kr






작품의 제작과정에 있어서는 전통적인 수공조각이나 캐스팅 기법으로 그 형상이 제작된다. 그러나 이것은 물, 혹은 비나 바람 등에 의해 유형의 형상이 무형의 형상으로 되돌아간다.




김주리_무제 Untitled_흙, 유리상자_95×75×70cm_2007


매체들 간의 개별적 특성과 벽이 점점 더 사라져 가는 이때에 입체라는 독립적 조형 스타일을 가지지만 이내 형상이 소멸됨으로서 형식의 혼합적 양상을 가진다. 이미 예술의 소재나 재료에 있어서 더 이상 제한의 폭이 없어진 만큼 너무나 다양한 형태의 예술이 행해지는 시대에 재료의 물성이 고체와 액체, 물질과 비 물질의 단계를 유연하게 움직일 수 있는 성질의 물질을 이용하여 실존 하지 않는 조각, 기체상태의 예술을 지향한다.




김주리_무제 Untitled_흙, 물_각 39×50×16cm_2007


마른 흙덩어리와 물이 만나 작은 입자들이 떨어져 나가는 해체의 과정은 시간의 흐름을 인지하게 한다. 처음엔 완고한 조각적 언어를 가지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진행되는 해체의 과정은 이미 그 자체가 유연하고 스스로 자유로울 수 있다.




김주리_무제 Untitled_흙_12×64×36cm_2007


하나의 사물에 있어서 그것이 가지는 원래의 유형의 가치가 아니라 인간의 생각과 마음이 그것에 투영된다. 개개인이 가지는 사회적, 개인적 속성들로 인해 갖가지 다른 가치들이 부여되지만 그 모두가 개인의 심상에서 오는 허상일 수 있다. 외적 형상의 시각적 화려함 뒤에 이미지의 해체에서 오는 내러티브의 변화를 경험한다.




김주리_무제 Untitled_흙_14×49×51cm_2007


소멸된 이미지는 다시 자연 상태로 돌아간다. 이미 사물의 재현과 함께 본래가 가지는 존재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며 형상에 투영되는 개인적, 사회적 시선들을 고찰하고자 한다. 시각적으로 인지하는 외형의 형태를 해체, 변모함으로써 일반화 된 개념, 즉 구체적인 속성들이 가질 수밖에 없는 결여된 부분을 상상하게 한다. ■ 김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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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e Into Flower

김초희 조각설치展

2008_0104 ▶ 2008_0117



김초희_꽃물_조각설치_적동, 브론즈, 합성수지_가변크기_2008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아트다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8_0104_금요일_06:00pm




갤러리 쿤스트독
서울 종로구 창성동 122-9번지
Tel. 02_722_8897
www.kunstdoc.com






반짝이는 진주가루 눈물에 묻어 반투명 아른거리는 통에 있다. 무엇을 보관하려 했는지 무엇을 간직하려 했는지 그 임자는 빛에서 온 무지개와 가냘픈 적동(赤銅) 안으로 이를 밀어 넣었다. 시간은 흘러 세월이 되고 공기의 요철이 매끈한 물질을 뒤덮을 때도 이 안은 모든 것으로부터 안전하게 길들여지고 있다. 길들여진다는 것, 그것은 닮아가는, 아니면 하나로 섞여가는, 그래서 이런 모습 저런 모습으로 모가 깎이었다. 어쩌면 찬바람을 피하고 피해 여기로 왔고 발갛고 여린 맨살이 되어 깊은 잠을 자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저곳으로 나간 잎을 보거라. 여기처럼 틀이 없으니 스스로 동(銅)을 입었다. 그 가벼움은 무게를 갖고 그 모양은 한 방울의 눈물로 고착되었다. 생각해 보자. 꽃잎이 눈물이 되어 흐르지 않고 멈춰 서게 되었다는 것을... 어디나 할 것 없이 사물로 전락된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슬픔을...




김초희_꽃물_조각설치_적동, 브론즈, 합성수지_83×100cm_가변크기_2008

언제가 우리에겐 말랑말랑했던 감정이 흘러내린 적이 있었고 그것이 아쉬워서인지 미련이어서인지 하나의 애틋한 사물이 되었다. 그 후 나와 그 사물 사이엔 막이 쳐졌고 실체의 잔상이 막으로 번졌다. 그리고 오로라가 되었다. 무지개의 섬광을 테두리에 두고 실체에 조금 떨어져 사방에서 교차가 되어, 급기야 나의 시선을 현혹시키기까지 한다. 그것은 아우라가 아니었다. 단지 오로라였다. 사물로 온 입자가 대기를 이온화시킨 단순한 잔상에 불과한 오로라였다. 우리가 안타까워했고 애틋해했던 감정이 사물에 대상으로 교차하는 곳에서 배출되었고, 시야에 맞닿고 교란시키는 간극에서 힘을 잃었다. 더 이상 마음으로부터 흘러나온 감정으로가 아닌 망막에 얼맺힌 상의 착각된 놀이였다. 이 놀이는 지각과 정념의 자유로운 유희로 장소의 냉정을 잃지 않는다.




김초희_꽃물_조각설치_적동, 합성수지_200×300cm_가변크기_2008

누구나 어둠 안에 하나의 빛이 비춰진 무대에 서있다. 그 무대는 깊고 신중하여 침착하고자 하는 태도로 가득하였다. 이는 스스로를 환기시키는 정화의 장소요, 지극히 개인적이고자 했던 사심(私心)이 읊조린 시적인 공론의 장소였다. 과연 꽃에서 떨어져 나간 꽃잎 하나가 한 사람의 마음을 긁기 시작하였더니 마지막에 가서는 허공에 달려 나의 잔상들과 함께 대기 중으로 휘발시켜 버려라 하였다. 그리고 아름답다 하였다. 비로소 미적 정서가 여기에 싹텄으니 그것은 시적형식의 눈물로 된 사물이었다. ●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한 단어 한 문장 이들이 시각화된다는 것은 무게를 취하는 이미지의 내러티브요, 요술과도 같은 예술의 일루전과 다르지 않다. 궁극적으로 이는 정념(pathos)의 재현의 문제로 소급되니 과히 미적 정서의 문제가 되었다. 어떻게 보면 예술의 실체는 없어야 한다. 바로 그곳이 예술과 우리가 관계하는 지점이니 참으로 시선을 동요하는 미술의 무한한 힘이라. 언제나 감정처럼 미술은 우리 주변을 맴돌며 우리 주변에서 선택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사람들은 이러한 대기를 실컷 들이마시며 다시 내뱉는다. 그것을 인지하지 못했을 때는 단순한 정서나 분위기로 그치지만 그것을 제어하고 조절하기 시작할 때 미적 정서로 우리는 정화된다.




김초희_꽃물_조각설치_적동, 브론즈, 합성수지_200×300cm_가변크기_2008

이곳은 꽃잎이 눈물로 봉인된 여성의 섬세한 손가락과도 같은 감옥이어라. 누군가 감옥을 거듭남 혹은 성장의 장소라 하는데 대상이 변하여 사물이 되었고 사물이 변하여 시적 장소가 되었다. 그 사물은 우리에게로부터 온 사적인 감격의 혼합된 이미지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말했던 카타르시스 (Aristotle, 천병희 옮김, 『시학』, 문예출판사, 2000, p.47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카타르시스를 언급하면서 연민과 공포를 환기시키는 사건에 관한 감정의 이행을 설명하고 있다. 그 이행은 이데아를 모방하는 것에서 출발하는데 감정이 유발하는 곳에서 감정이 유발되는 곳까지 감정이나 정서, 정념의 문제를 건드리고 있다. 이처럼 문학이나 예술은 감정이 감염되고 전달되어 결과물인 작품과 함께 환기된다. 무게를 갖는 시각미술에 적용시켜 봤을 때 대상이 되는 오브제, 사물은 시적인 형식을 취하게 된다. 시적인 형식이란 플롯(p.49)으로 사건의 결합이다. 꽃과 눈물의 이미지가 겹친다는 것, 이것은 사건의 결합이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신화의 내용까지 끌어들일 수 있다.) , 이처럼 조형예술에 적용될 수 있다는 감격의 기념처라 할 것이다. 한 목동이 한 묘비명을 읽는 푸생의 작품 (Nicolas Poussin, , 1638. Oil on canvas. Louvre, Paris, France. 푸생의 <아르카디아의 목동들>에는 문학적인 내러티브가 있다. 그 첫 번째가 묘비명에 쓰인 라틴어의 문자이며, 그 두 번째가 그것을 읽고 얘기를 나누고 있는 목동들의 제스처다. 이처럼 작품 속에 서사시와 희극, 비극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에 작품은 매우 문학적이며 시적이다. 이러한 미술형식은 낭만주의 작품에 영향을 주었으며 자연과학적인 측면에서 접근되기보다는 시적이고 문학적인 방식이라 하겠다. 지금의 미술과 관계하여 이러한 문학적인 시각화는 미술사의 도전적이고 문제적 측면으로 접근한 일면을 살펴볼 수 있다. 르네 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에서 이미지와 텍스트, 좀 더 구체화시켜 시각작업화와 문학작업화의 간극에서 떨리는 미적 시선의 갈등이 관객의 감상태도에 질문을 던졌다. 이러한 도전적 시각은 이 작업에서 세 가지의 형식으로 유추되기에 이른다. 그 첫 번째가 눈물과 꽃잎 등의 이미지들이 하나로 겹치면서 나온 ‘만들어진 사물’이다. 두 번째가 빛이 ‘만들어진 사물’을 비춰 필름에 맺힐 때 발생하는 흔들거리고 번진 잔상의 이미지들이다. 마지막으로 브론즈로 제작된 ‘만들어진 사물’과 적동으로 된 원형의 틀 그리고 그 안에서 위치가 조정되는 설치의 방식에서 오는 시적인 형식 즉, 플롯의 방식(사건의 결합)이다.) 처럼 문학적 감미로움이 ‘여기 미술공간에도 있다.’ 그것은 하나의 꽃잎이 떨어진다는 쓸쓸한 사건일 수도 있으며 그것이 눈물이 되어 감정을 부여하는 하나로 이어지는 행위인지도 모른다. 이처럼 미술공간은 '만들어지고 설치된 사물들' (이 작업에서 ‘만들어지고 설치된 사물’의 의미는 단순히 이미지화된 오브제 혹은 대상에 한정되지 않고 시가 함축된 정제된 가공물이다. 이 말은 한편으로 작업이 작가에게서 떠났고 다른 한편으로 작업이 여전히 작가의 심중에서 부유하고 있어서, 미적이다고 할 때 미적 정서나 감성을 건드리는 미적 오브제의 측면을 보여준다.) 로부터 온 섬세한 미감으로 충만하게 되었다. ■ 김용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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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BOT STORY_추억의 명작로봇

김석 조각展

2007_1228 ▶ 2008_0113



김석_명작트로이카_나무_가변설치_2007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김석 블로그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7_1228_금요일_06:00pm

관람시간_평일_10:00am∼06:00pm




갤러리 아쿠아
서울 강남구 삼성동 159번지 코엑스 아쿠아리움 옆
Tel. 02_6002_6272
www.coexaqua.com






2000년이 훨씬 지난다면... 꿈으로 그렸던 스케치북 속의 로봇들은 현실이 되어 날아다닐 것이며, 만화 속 주인공인 로봇은 내 친구임에 틀림이 없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21세기가 훨씬 지나버린 지금이지만 우리의 동심이 쉽사리 현실이 될 수 없음은 아쉬움과 애틋한 추억으로 다가온다. 이런 빗나가는 시대적 착오는 아쉬움과 애틋함이 그리움으로 찾아오는데 그들이기에 행복했던 시대별 로봇들을 유아기적 감성으로 재구성하여 누구나 가지고 있는 가지고 있었던 막연한 동심에 대한 보상이나 허망함을 추억하고자 하는 작업이다. 그것은 작가에게는 아주 작은 간절함이기도 하겠다. ■ 작가노트




김석_태권브이76_나무_140×70×200cm_2007

어릴 적 또래 아이들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문방구와 완구점을 작가의 부모님은 운영을 하셨는데 쉽사리 같지 못했던 메이드인 코리아 사출 조립로봇들은 작가에게는 흔희 접할 수 있는 생활과도 같았다.




김석_건담RX-78_나무_150×60×190cm_2007

조립도 해 보고 분해도 해 보고 부셔도 보고 고쳐도 보고 항상 장난감은 그에게는 기쁨이자 즐거움이고 행복이자 사랑이었다. 그냥 움직이지도 않는, 웃기게 생긴 촌스러운 사출 조립로봇을 책상위에 떡 하니 올려놓으면 그 뿌듯함이란 이루 말로 할 수가 없었으니까 말이다. 이미 그에게는 로봇이라는 이미지는 동경에 대상이자 아련한 추억인 것이다.




김석_마징가Z_나무_70×40×140cm_2007

그래서 나는 주로 로봇을 만든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추억이 물씬 풍기는 착하고 믿음직스러운 고전 로봇을 좋아한다. 하지만 그 형태가 유치하다든지 때론 인간이 탈을 쓴 듯한 샤프하고 날카로운 이미지의 악당 로봇들도 좋아하기도 한다. 그것들은 언제나 말없는 인간이 아닌 로봇이기에 그 장중함과 육중함 때로는 진지함까지 느껴보고자 로봇을 만든다.




김석_자크_나무_120×90×180cm_2007



김석_영웅시리즈_플라스틱_가변설치_2007

이번 전시의 주인공인 태권브이76 과 마징가Z , 건담 RX-78 , 제타건담 , 자크 등등 한 시대를 풍미했던 추억의 명작 로봇을 나무라는 소재로 거칠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엔진 톱의 힘으로 임의의 모양대로 깎고 자르고 뜯어낸다. 그리고 붙이고 맞추고 조여서 유치하지만 사출 조립장난감의 조형형태를 벗어나지 않게끔 최소한과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 추억의 명작로봇이 되고자 노력한 작품들이다.




전시광경

어쩌면 작가는 그 로봇들의 이미지로 선과 악을 구별하고 좋음과 나쁨을 판단하며 사람에게서 느껴보고자 하는 애정이나 감성들을 대신 채워보고자 하는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 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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