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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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omepage]님께서 남기신 글 (2007-11-14 17:24:38, Hit : 799)
전시 11.13



기린과 사람

김언주 회화展

2007_1121 ▶ 2007_1127



김언주_편지(a letter)_캔버스에 유채_130×130cm_2007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공화랑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7_1121_수요일_06:00pm




공화랑
서울 종로구 인사동 23-2번지
Tel. 02_735_9938
gonggallery.com






김언주의 ‘기린과 사람’ ● 김언주씨는 기린과 사람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준다. 산문식으로 조근조근 ‘이미지 보따리’를 펼쳐 감상자의 이해를 도모하고 있다. 그런데 그의 작업은 일종의 우화(寓話)로 분류할 수 있다. 사전을 뒤져보니 우화란 “인간 이외의 동물 또는 식물에 인간의 생활감정을 부여하여 사람과 꼭 같이 행동하게 함으로써 그들이 빚는 유머 속에 교훈을 나타내려고 하는 설화(說話)”라고 설명한다. 김언주씨의 그림은 인격이 없는 기린을 사람과 동격으로 설정한 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괴리를 유머러스하게 풍자한다. 그의 작품 가운데 키 작은 인간과 멀 대처럼 키가 웃자란 기린이 등을 돌리고 서 있는 장면이 나온다. 서로 등을 진 걸로 미루어 관계가 서먹서먹하거나 무슨 다툼이 있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화면 중심에는 두개의 틀니가 서로를 향하고 악다구니를 퍼붓는다. 어찌나 입을 크게 벌리고 상대방을 비난하는지 치아에서 침이 흘러내리는 것도 알지 못한다. 별 것 아닌 문제를 놓고 다툴 때의 우리 모습과 흡사하다.




김언주_침묵(silence)_캔버스에 유채_60.5×50cm_2007


옛날부터 동물을 이용하여 인간사회를 풍자하는 방법은 적지 않지만 그런 경우 주인공인 동물들은 인간의 능력과 줄을 긋고 절대로 자기 본래의 영역을 넘지 못하는 데 비해 우화의 주인공들은 인간의 모든 기능을 구비한 인격으로서 형용되어 등장한다. ?이솝우화?가 대표적인 예로 간결하고 소박한 동물우화로 인간성에 대한 예리한 통찰을 보여준 바 있다. 프랑스의 라 퐁텡(La Fontaine)은 17세기 왕족들의 호화판 생활과 딴 판으로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암울한 삶을 세련된 기지와 유머로 묘출하였다.




김언주_함박눈(snowing happily)_캔버스에 유채_72.5×60.5cm_2007


줄거리를 서술로 풀어가는 문학에 비해 사건을 한 화면에 담아내야 하는 시각예술의 특성상 그림은 스토리텔링과 플롯구조가 취약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우화’가 미술의 한 형태로 자리잡는 난점으로 작용해오지 않았나 싶다. 그러므로 생소한 우화를 미술안에 끌어들였다는 점에 김언주씨의 그림의 특징이 있다. 김언주씨의 그림은 사람과 기린이 엮어내는 사건에 기초하여 현대인의 삶을 대리적으로 표현하고 혹은 작가 자신의 일상을 전달한다. 그림에서 기린은 사람과 꽤 친한 사이다. 둘을 떼어놓을 수 없을 정도로 가깝다. 예쁜 옷을 입고 등산을 하기도 하고 동물원에 놀러가기도 하며 야심한 밤에 모닥불을 지펴놓고 대화를 나누기도 하며, 노을이 진 해변 또는 스크린 앞에 앉아 다정하게 영화를 관람하기도 한다.




김언주_회상(retrospection)_캔버스에 유채_101×76cm_2007


그러다가 어쩐 일인지 둘의 관계가 서먹서먹해진다. 마스크를 쓰고 먼 산 쳐다보듯 딴 데를 쳐다보고 있는가 하며, 서로 떨어져 헤어지기도 하고 기린에서 달아나는 모습을 형용하기도 한다. 그의 그림은 가까이 있으면서도 서로 대화할 수 없는 상호이해의 부족을 드러낸 것같다. 외로움과 고독의 수렁에 빠져 있으면서 좀처럼 헤어나오지 못하는 ‘핵(核)인간’을 풍자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이 모두 세태를 풍자한 것만은 아니다. 때로는 자아를 우화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붉은 사막에 누어있는 형상은 유학시절 애리조나와 유타 지방을 여행하면서 광활한 벌판에서 느꼈던 행복감을 회상한 것이며 어둔 밤에 모닥불을 지피고 있는 녹턴 작품도 그때의 미국시절을 회상한 작품으로 자아를 동물 캐릭터로 묘출하였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어린 아이처럼 눈오는 날을 고대하며 즐거워하는 순간, 선글라스를 쓰고 이곳저곳을 쏘다니는 시절을 즐겁게 묘사한 것도 있다.




김언주_향수(nostalgia)_캔버스에 유채_91×117cm_2007


김언주씨의 작품은 묘사나 형태 중심의 그림은 아니다. 인물은 단순하게 요약되어 있고 실물을 따라가기보다 ‘이야기 중심’으로 꾸며져 있다. 화면을 그때그때 상황에 맞추어 면으로 구획하여 채색하는가 하면 유머러스한 캐릭터에 맞게 명랑한 색, 채도높은 색을 구사한다. 나는 그의 작품을 보면서 문득 에밀졸라(Emile Zola)의 소설 ?목로주점?에 나오는 주인공 제르베즈가 떠올랐다. 어렵사리 마련한 세탁소도 날려버리고 나락의 길로 들어선 제르베즈, 딸은 가출하고 남편은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버렸고 마침내 죽음의 문턱은 넘는다. 희망을 놔버린 제르베즈도 마지막 남은 삶의 의미인 술 한 잔을 들이키며 비참하고 슬픈 생을 마감한다.




김언주_blue night_캔버스에 유채_112×145cm_2007


김언주씨의 작품은 제르베즈처럼 생을 무책임하게 ‘비관’에 내맡기지 않는다. 흔들리는 전등의 위태로운 불빛 아래 술잔을 기울이는 사람도 있지만 그 전등을 똑바로 매달아놓고 그 밑에서 대책을 짜는 사람도 있다. 진정한 용기를 지닌 사람은 고난과 시련이 왔을때 풀썩 주저앉는 사람이 아니라 새롭게 준비할 수 있는 사람이다. 김언주씨의 작품에 등장한 주인공들은 ‘희망’이 좌절을 막아주는 유일한 생의 무기라는 것을 알려준다. 전등이 흔들리고 나무의자가 삐걱거릴 때마다 동요하는 대신 감사할 거리를 찾고 재기의 의지로 일어날 채비를 갖추어야 한다. 만일 김언주씨의 작품이 값싼 즐거움만을 추구했더라면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시련과 고난을 딛고 얻은 희망일 때에라야 더 값진 법이다. 값싼 즐거움과 희망의 차이점은 ‘좌절이라는 걸림돌’을 뛰어넘었느냐 하는 여부에 달려 있다. 좌절을 딛고 희망으로 가는 것은 감명을 주지만 막연한 즐거움의 추구는 자칫 더 큰 불행을 초래할 수도 있다.




김언주_침묵III(silence III)_캔버스에 유채_117×91cm_2007


김언주씨의 작품은 절망과 희망중에 희망을 선택한 사람들에게 무게중심이 실려 있다. 물론 무력감에 시달리고 섭섭한 감정을 품은 사람관계를 포착한 작품도 있지만 정작 그가 보여주려는 것은 고단한 삶중에서도 여유를 갖고 미소를 되찾는 일이다. 누군가의 말처럼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이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무슨 일이 일어났다. 그런데 그 후에 무엇을 하고 있는가?” 바로 이 점에 유의해야 한다. 행복의 보금자리로 들어가는 실마리를 김언주씨는 언뜻 내비치는 듯하다. ■ 서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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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 공간(in between spaces)

김현식 개인展

2007_1108 ▶ 2007_1126



김현식_사이공간-tree_혼합재료_90×60cm_2007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정 갤러리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7_1108_목요일_06:00pm

정 갤러리 기획초대展




정 갤러리
서울 종로구 내수동 110-34번지
Tel. 02_733_1911
www.artjungwon.co.kr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 김현식의 작품 앞에 서면 놀랍도록 생생하게 묘사된 머리카락에 매료된다. 사실 그가 숨긴 것은 머리카락 사이에 있다. 그것을 찾기 위해 우리는 머리카락 사이를 유심히 들여다보아야 한다.




김현식_사이공간-tree_혼합재료_90×60cm_2007


김현식의 작품은 지극히 작가의 수공적 노력의 결실이라 할만한 극사실주의 회화로 보인다. 누구나 처음 갖는 느낌은 고전적 아름다움과 신비감으로 무장한 이미지의 강렬함일 것이다. 백옥같이 희고 가는 목선에 드리워진 윤기나고 흑단같은 긴 생머리가 눈에 보이는 전부라고 믿는다. 마치 실재처럼 보이는 머리카락 한올 한올의 현전은 이 작품이 환영이나 모방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듯 하다.




김현식_사이공간_혼합재료_90×60cm_2007


그러나 그림을 좀 더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라. 김현식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것은 머리카락 사이에 존재하는 명백한 틈이다. 그의 회화 안에는 실재 공간이 존재한다. 이쯤 되면 그의 회화는 더 이상 회화가 아닌 것이 되고 만다.




김현식_사이공간_혼합재료_90×54cm_2007


김현식은 기억, 역사, 사라져 간 과거의 시간을 되돌리는 작업에 몰두한다. 이러한 시간의 단층은 무수한 선들(이를테면 머리카락) 사이로 켜켜이 쌓이면서 서로 다른 차원의 공간 속에 머무르게 된다. 그가 만들어 내고자 하는 것은 보이는 이미지 자체가 아니라 시간이자 공간이다. 이 때 공간은 겹겹이 쌓이면서 틈을 만들어내는데 가령 투명한 합성수지가 하나의 공간을 창조하면 그 위에 보태지는 작가의 선 긋기나 그리기 행위는 새로운 층위의 공간을 맞이하기 위한 하나의 쉼표 역할을 한다. 바로 이 사이 공간이 기억, 역사, 과거의 시간들이 공개되기도 하고 때로는 모호함 속에 놓여지기도 하는 장소가 된다.




김현식_사이공간_혼합재료_90×146cm_2007


김현식의 작품은 매우 감정적이다. 어떠한 이미지나 형태를 취하고자 하는 것은 구체적이고 형식적인 문제이다. 차갑고 투명한 합성수지, 선 긋기에 사용된 날카로운 도구, 여기에 형태가 어떻게 구축되는 지의 문제도 결국 감정으로 귀속되어야 할 것들이다. 틈새 안에 답이 있다. ■ 임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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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성식 회화展

2007_1110 ▶ 2007_1209 / 월요일 휴관



민성식_A Carpenter's House(목수의 집)_캔버스에 유채_65×91cm_2007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닥터박 갤러리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7_1110_토요일_05:00pm



관람시간_11:00am ~ 08:00pm





닥터박 갤러리
경기도 양평군 강하면 전수리 19-1번지
Tel. 031_775_5600
www.drparkart.com






작가 민성식의 이름 앞에 유망 신진작가란 타이틀은 이미 익숙하다. 부산시립미술관, 대전시립미술관 전시에서 주목받았고 두 차례 성공적인 개인전에 이어 닥터박 갤러리에서 그의 세 번째 개인전을 갖는다. 그의 작품에는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겪게 되는 일상의 삶이 투영되어 있다. 현대인들은 너무나 바쁘게 짜인 틀에 맞춰 반복적인 일상을 살아가지만, 한 번쯤은 일탈을 꿈꾸기도 하고 현실에서는 요원한 미래를 상상해 보기도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작가 민성식의 작품은 현대인의 마음 속 한 자락 숨겨둔 꿈과 욕망을 그대로 캔버스에 옮겨놓은 듯 하다.




민성식_A Dreaming Boat(꿈꾸는 보트)_캔버스에 유채_65×91cm_2007



민성식_On Sale (분양중)_캔버스에 유채_80.3×116.8cm_2007



민성식_A Parking Lot (주차장)_캔버스에 유채_112×162cm_2007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도 그간 그가 일관되게 작업해 온 왜곡된 공간구조나 물리적인 시점의 변화와 같은 장치들을 통해서 사실적인 회화의 보편성 위에 작가의 의도된 유머와 위트를 보여준다. 채워지지 않고 한 쪽으로 치우친 공간은 불안정해 보이지만 그러한 긴장감이 동시에 새로운 시각을 불러일으키는 신선함을 던져준다. 크레인에 매달린 텐트나 주차장에 올라 앉아있는 보트, 바다로 가지 못한 낚싯대는 관람객의 흥미를 자아내기에 충분하며 화면이 일시 정지된 듯한 작품 안의 상황은 누구든 뛰어들어 주인공이 되는 상상을 하게 만든다. 관람객은 공사 중에 나무그늘에서 낮잠을 즐기는 목수가 되고, 작업을 준비하는 화가가 되기도 하며, 망망대해의 항해를 꿈꾸는 보트가 되기도 한다.




민성식_Underconstruction (공사중)_캔버스에 유채_130×194cm_2007



민성식_A Carpenter's House (목수의 집)_캔버스에 유채_130×194cm_2007



민성식_Two Faces (두얼굴)_캔버스에 유채_145.5×227.3cm_2007


작가는 작품을 통해서 현대인들이 느끼는 고뇌와 갈등을 이해하고 그들이 이루고자하는 것들의 실현을 보여주고자 노력한다. 그것은 작가가 바라는 삶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민성식의 회화는 이러한 삶의 열망을 극적인 색면의 조화가 그대로 살아있는 절제된 구성과 다듬어진 디테일 묘사 속에 담담히 담아내고 있다.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만의 공간에서 꿈을 실현하길 바라는 작가의 바람처럼 이번 전시는 그동안 잊혀졌던 각자의 꿈의 공간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 닥터박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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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자와 단도

박화영 개인展

2007_1117 ▶ 2007_1202



박화영_치자와 단도 (치자와 식빵)_디지털 프린트_2007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이미지 속닥속닥 Vol.030927a | 박화영 영상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7_1117_토요일_03:00pm

작가와의 대화_2007_1121_수요일_03:00pm

후원_한국문화예술위원회





몽인아트스페이스
서울 중구 신당동 432-1692번지
Tel. 02_736_1448
www.mongin.org






“어느날 예고 없이 치자는 나의 집에 와서, 자초지종 설명도 없이 마루에 하나밖에 없는 의자에 몸을 싣는다. 천천히 고개를 오른쪽으로 살며시 기울여 눈을 감으며 귓구멍에서 흘러 나오는 피곤을 펼친 손 위로 한참을 따라낸다. 그날부터 마치 자연스러운 일인 것처럼 거리낌없이 나의 집에서 산다. 치자를 치자라 부르게 된 것은 무더운 여름 어느날 그녀가 새하얀 치자꽃이 핀 화분을 품에 들고 좁고 습한 나의 방에 향긋함을 안고 들어온 각인된 기억 때문이다. 사실 나는 그녀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처음에는 대화가 도통 되지 않아 알 수 없었고, 시간이 지나서는 벙어리 여자와 나름대로 학습된 언어를 배제한 소통을 하노라고 믿고, 또 굳이 소리 내어 그녀의 이름을 부를 일도 없기에 묻지도 않았다. 몇 년 전부터 나의 집에 들어와 사는 이름없는 개를 마음 속으로 ‘단도’라고 부르듯이 그렇게 그녀를 속으로 ‘치자’라 부른다.” (중략) ● “나의 영혼이 1년 전쯤 어느날 돌연 집을 나가버린 이야기를 치자에게 이야기한다. 그녀가 내가 하는 말을 다 알아들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연신 두 눈은 나를 관통하듯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 한참을 그렇게 부풀어오른 눈으로 주시하다가 눈을 두 번 깜빡이고는 주섬주섬 가방에서 지갑을 꺼낸다. 그 속 깊은 주머니에서 겹겹이 접은 작은 하얀 종이를 꺼내고선 떨리는 손가락으로 한 겹 한 겹 펼치고 나니 사람형상이 드러난다. 막 가위로 싹둑 싹둑 거칠게 잘라 만든듯한 모양새다. 심장 부위가 모양대로 구멍 나있고, 나름대로 눈구멍 콧구멍도 뚫려있다. 그것을 조심스럽게 내게 펼쳐 보이고서는 이내 곧 차곡차곡 다시 접어 원래 지갑 위치 속에 고이 집어넣는다. 치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나는 그녀의 얘기를 알아들은 것으로 생각한다. ‘이렇게 자신의 영혼을 접어서 지갑에 넣고 다니면 도망칠 염려가 없는 거야’라고 내게 가르쳐주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지갑을 잃어버리게 되면 영혼도 함께 분실돼지만 말이다. 이 말을 바꿔서 하면, 영혼을 방치하고 싶으면 살며시 어딘가에 지갑을 버리고 모른 척 가버리면 된다.” (중략) ● “영혼이 바닷가를 걷다가 모래사장 위에 파도에 실려 나온 기이한 불가사리 하나를 발견한다. 일반적으로 불가사리가 별처럼 다섯 갈래로 되어있는 것과 달리 그 생긴 것이 마치 벤쯔 자동차 마크처럼 세 갈래로 뻗어있다. 쪼그리고 앉아 그것을 자세히 관찰하니 요상하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징그럽게도 작은 입 같은 부위로 무슨 미세한 노랫소리 같은 것을 내는데, 귀를 갖다 대고 자세히 들어보니, 멜로디가 제니스 조플린의 ‘메르세데스 벤쯔(Mercedes Benz)’ 를 노래하는 것처럼 들린다. 영혼은 잠든 단도의 꿈 속에 나타나 이 기묘한 불가사리의 노래를 들려준다. 노래 속에 치자에게 전할 메시지를 담고 있는 신호를 단도에게 담아 보내, 치자가 제니스와 만나 블루폰드(Blue Pond)에 함께 갈 수 있도록 안내한다.” (중략) - 박화영의 작가의 책, “치자와 단도”(책빵집) 본문중에서 발췌




박화영_치자와 단도 (제니스, 영혼, 그리고 단도)_디지털 프린트_2007


"치자와 단도", 책과 전시회 ● 박화영에게서 오랜만에 연락을 받았다. 그가 서울에서 통 안보이길래 아마도 외국에 나가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요즘 어디에 있냐 물었다. 서울 한복판에 쭉 살면서도 잘 안 나다니다 보니, 어쩌다 지인과 마주치면 그런 질문을 자주 받는다고 했다. 그러면 그 위치에서 남산타워 쪽을 가리키며 저 언저리에 사노라고 한단다. 뭐하면서 사냐고 물으니, 잠시 뜸을 들이다, 개 키운다고 한다. 엉뚱한 대답에 개 농장 하는 거냐고 물으니, 그게 아니라 그냥 개 한 마리 키우며 산다고 한다. 어떨 땐 개가 자신을 키우는 기분이 들 때도 많지만 공식적으로는 자신이 개를 키우는 거란다. 간만에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다며 혹시 도록에 넣을 글을 하나 써줄 수 있는 지 내게 묻는다. 의외의 요청이라는 생각이 든 것은, 내가 아는 그는 누구에게 글 청탁을 하는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며, 지금까지 여러 차례의 개인전 자료에 내가 아는 한 한번도 정형화된 비평글이나 서문 등을 실은 적이 없는 것으로 안다. 2003년에 '드라이브' 멀티채널 비디오 오디오 설치로 개인전을 연 후, 이번이 4년만의 여덟번째 개인전이다. 그 사이 뜸하게 그룹전이나 상영회에서 간혹 작업을 보이다 미술전시장에서는 거의 안 보이다시피 했다. 2004년 대학로에서 '컬트로보틱스-블라인드 스퀘어(Cultrobotics-Blind Square)' 멀티미디어 공연을 하고, 내가 이번 일 전에, 그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2005년 동경 Japan Foundation Forum에서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 탄생100주년에 앞서 '베케트 이머넨스(Beckett Immanence)' 행사 중 그가 연출한 멀티미디어 퍼포먼스, 'ㄹㅗㄱㅇㅏㅂㅏㅇㅣ(rok-a-ba-ee)'공연에서 였다. 그는 마치 삶에서 일정 부분을 도려내기라도 한 것처럼, 그때 나를 거기서 만난 사실을 기억 못하는 듯 겸연쩍어 했다. 오히려 그는 나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2002년 쾰른에 전시 하고 떠나는 비행기 안이 아니었냐며, 당시 호텔 근처 작은 바에서 함께 쾰른 지역 맥주인 쾰쉬(Kolsch)를 함께 마신 일이며 그 부드러운 순한 맛도 기억하고 있었다. ● 'ㄹㅗㄱㅇㅏㅂㅏㅇㅣ(rok-a-ba-ee)'는 베케트의 '자장가(Rockaby)' 텍스트에 반응하여, 서울이라는 도시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고립된 존재의 진혼곡이라는 인상을 주는 작품이었다. 영상에서 사람이 마주보는 듯 주고받는 대화 속 분절된 한글의 단위들은 의미를 상실한 기호로 나타나며 사람의 목소리 대신 피아노 음이 공간에 공허하게 울린다. 언어가 해체되어 소통의 개념이 대답 없는 울림으로 치환된다. 비디오 공간 속에서 고립되어 보이는 흔들의자에 앉아 세상을 바라보는 여자와, 자본주의 도시의 삭막한 풍경 속에 발견하는 표정없는 얼굴들이 병치된다. 마주하는 수많은 얼굴들은 기다려봐도 목소리가 없고 도시는 계속 침묵한다. 사각 링 안에서 버선을 머리에 쓴 두 명의 퍼포머가 샴쌍동이처럼 서로 결박한 채, 침묵하는 도시의 풍경 속에서, 자유를 제한 받은 신체로 싸우는 듯 춤추는 듯 상호동작을 만들어 나간다. 영상이며 무대며 사운드며 모두 흑백의 어두운 기운을 풍기고 있어 죽음의 냄새가 물씬 나는 인상을 받았었다. 그의 이전 작업에 숨어있는 장난기 있는 작은 가시 같은 유머의 요소들도 자취를 감춘, 비애와 암울함으로 연출된 작품이다. '컬트로보틱스-블라인드 스퀘어'(2004)에서는 임신한 로또여왕이 다리 사이에서 숫자가 새겨진 오색 로또알을 줄줄이 까고, 펑크족 머리털이 난 바퀴달린 빨간 돼지들이 무선 조종되어 공간을 누비는 등 부조리한 결혼의식과 장례의식의 기묘한 교차 속에도 풍자적 유머가 보였었다. '별일없지?' (2002~3) 2채널 비디오 작품에서는 목이며 사지가 절단된 신체가 걷는 모습이 드라이하게 표현되어, 그로테스크하기 보다 마치 통닭이 걷는 것처럼 해학적 여백이 있었으며, '맛보려 담근 손가락을 배어먹는 딸기잼', '전기충격 주면 귀엽게 웃는 고등어 생선' 등 다소 위험스러운 상황들이 마술적 유머로 입가에 작은 웃음을 주기도 했다. 'ㄹㅗㄱㅇㅏㅂㅏㅇㅣ'가 마지막으로 본 그의 작업이어서 아직도 그 진혼곡 같은 무거운 어두움이 입안에 남아 쓴맛이 나는 것만 같다.




박화영_치자와 단도 (이끼사람들)_디지털 프린트_2007



박화영_치자와 단도_비디오스틸_2007


그로부터 약 2년이란 시간이 흐르고 소리소문 없이 조용히 지내다 개인전을 한다고 하니, 과연 그가 그 동안 어떠한 프로젝트를 진행했으며 무엇을 우리 앞에 들고 나타날지 몹시 궁금해진다. 이번 작업이 한 소설적 내러티브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프로젝트라며, 우선 작품들을 보기 전에, 글 초안을 참고 삼아 읽어보라고 이메일을 보내왔다. 단순 내러티브 구조를 설명한 짧은 글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그 아직 미완성이라는 초안의 분량이 내가 생각한 것보다 많은 A4용지로 빽빽하게 스무 페이지가 넘었다. 그것을 받고 문학적 소설 쓰는 취미가 있는 지 몰랐다고 하자, 멋쩍어 하며 그냥 소설 같은 내러티브라고 말을 흐린다. 이번 프로젝트는 다채로운 복합매체로 구성되어 있으며, 총체적 내용전개 역시 복합적으로 존재하는 비선형적 요소들이 서로 교차 충돌하면서 체험 되는 총체적 복합미디어아트 전시이다. 형식적으로 다양한, 복잡해 보일 수도 있는 여러 장르 및 표현방법의 요소들을 총체적 내용으로 엮어주는 구조적 역할을 하는 축으로서 소설적 내러티브를 쓴 것이라고 한다. 그가 문학배경의 사람이 아닌 작자로서 글을 쓸 때 어떤 자기만의 방법론이 혹시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는 글을 쓸 때 '기린 뿔 모양의 헤어밴드'를 머리에 하고 인공눈물을 건조한 눈에 몇 방울 넣는다고 한다. 그리고는 그 행위가 자신이 좋은 글을 쓰는데 도움을 주노라고 자기체면을 건다고 한다. 아직껏 체면이 효과를 본 적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여전히 글을 쓸 땐 기린 뿔이 달린 헤어밴드를 착용한다고 한다. ● 그가 쓴 '치자와 단도' 소설과 동명 타이틀인 이번 전시회는 중구 신당동에 위치한 '몽인아트스페이스'에서 열린다. 그는 '몽인아트스페이스' 스튜디오 작가로 있으면서, 한 때 주식회사 애경의 창업자의 생가였던 주택을 개조해 예술공간으로 활용하는 '몽인아트스페이스'와 그 인접 지역을 배경으로 가상의 허구적 내러티브를 만들어 나갔다. 이 사이트를 전시공간으로 활용하여, 소설의 전개에 등장하는 장소성이 실제 눈앞에 펼쳐지는 구체적 사이트(site-specific) 프로젝트이다. 그래서 비현실적 상상의 이야기를 현실의 실제 사이트, 오브제, 사진이미지 등이 증거하면서 현실적 단서들을 연상하게 되고, 또한 그에 대한 반사작용으로 주변 현실 세계를 보는 눈이 학습되고 주입된 방식 너머의 시선으로 꿰뚫고 뒤집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치자와 단도'는 현실과 비현실 세계가 뫼비우스 띠처럼 이면(異面)이면서 서로 연결되어있는 비틀린 구조로 형성되어있다.




박화영_치자와 단도_비디오스틸_2007



박화영_치자와 단도_비디오스틸_2007


이번 개인전에 포함되는 여러 형식적 요소로는, 내러티브 비디오 상영, 오브제 및 오디오 설치, 사진, 페인팅, 드로잉, 멀티채널 비디오 설치, 그리고 내러티브의 축이 되는 소설을 비롯한 시 등 문학적 요소가 있는 작가의 책 등 다원적 복합미디어가 혼재하는 총체적 작업이다. '치자와 단도' 소설의 세 등장인물 별로 공간을 분할하여 작업을 펼쳐 놓는다. 우선 가장 넓은 공간인 1층 전시실에서는 소설 속 미디어 아티스트로 추정되는 '나'의 시점으로 사진작업, 오브제 및 오디오 설치, 그리고 내러티브 비디오가 전시되고, 2층 공간에는 소설에서 일정기간 머물다 떠나버린 '치자'가 남기고 떠난 페인팅 및 드로잉 작품들이며 두고 간 물건들을 전시하여 '그녀'가 키운 초록 식물들 사이로 '치자'의 시선을 보여주고, 마지막 3층 다락공간에는 소설 속 진돗개 '단도'의 시점으로 구성되는 몽환적 멀티채널 오디오 비디오 설치가 선보인다. 그리고 전시를 주의 깊게 감상한 사람들에게는, 전시공간을 떠나면서 만나게 되는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돌 하나, 들고양이 한 마리, 집 하나, 건물 하나, 길목 하나 등 주변의 환경들 구석구석에서 아직 내러티브가 끝난 것이 아니라 연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경험을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치자와 단도'의 복잡한 구성요소들과 중층적 레이어의 이야기들은 궁극적으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소설 속에서 나레이터는 "이것은 아무 것도 찾지 않는 이야기이다"를 반복 강조한다. 그리고 다소 작위적으로 느껴지기도 하는 주인공 '나'의 상태를 '영혼'과 '육신'으로 나누어 이야기를 시작한다. 등장인물 '나'와 '치자'는 불현듯 동거를 하게 되는데, 여기서 '나'는 여성인지 남성인지 설명하는 단서도 하나도 없을 뿐더러, 둘 사이의 인간적 관계를 암시하는 것도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관계에 대한 구차한 설명 없이, 다만 파편적 에피소드들의 축적 속에서 그들이 함께 지내는 것이 우연 만은 아닌 필연적 암시들을 단서로 남긴다. '치자'는 말없는 벙어리 여자로 처음 등장하는데, 박화영 작업에서 말이 나오지 않는 무언의 요소는 빈번하며, 말이 많이 나오는 경우에도, '소리'(1998)에서 처럼 짓지 않는 떠돌이 개가 등장하거나, '별일없지?'(2002,3)에서 말소리를 모두 음절단위로 난자해 음소로 들리게끔 뒤섞어 놓거나, '블라인드 스퀘어' 및 'ㄹㅗㄱㅇㅏㅂㅏㅇㅣ'에서 처럼 음향이 말소리를 치환하는 등, 학습된 언어의 왜곡된 소통의 한계를 주제로 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소리'에서 나레이터가 "나는 너의 언어로 이야기 하지 않으며, 너 또한 나의 언어로 말하지 않는다."를 건조하고 담담한 목소리로 시작하는 것을 떠올리면 그의 작업 저변에 깔린 공통 주제를 감지할 수 있다. ● 이번 '치자와 단도' 비디오에서도 두서없이 갑자기 스페인어가 등장하고, 해양깃발 신호, 수화, 수화처럼 보이는 손동작, 자연물이 전달하는 무언의 암시적 언어 등 다양한 표현수단이 나와 우리에게 익숙한 언어소통을 전복시킨다. 개 '단도'는 그 이름이 함축하는 날카롭고 재빠르며 명쾌한 이미지와는 상이하게, 소설 속에서는 세상 편하게 널브러져 낮잠이나 자고 산책이나 졸졸 따라다니는 평범한 개로 등장하지만, 쓰레기 장에서 예시적 '루마니아 그림'을 발견했을 때도 '단도'가 '치자'를 거기로 안내하는 것처럼, 실상 더 깊고 넓은 투시안을 갖고 육감적으로 세상을 감지하는 것은 '단도'임을 3층 다락방의 비디오 설치를 보면 알 수 있다. '단도'는 꿈속에서, 인간들이 보지 못하고 연결시키지 못하는 비선형적 해체된 파편들을 체험하는 예지력을 갖고 있으며, 시공간적으로 분리된 개체들을 이어주는 매개체 역할도 수행한다. 이런 '단도'의 숨은 능력은 이번 작업에 전반적으로 자연이 잠재하는 위대하고 신비한 에너지가 각종 동식물의 무언의 목소리로 드러나는 것의 연장으로 보인다. ● '치자' 캐릭터는 일반 사람보다 조금은 이런 목소리에 귀 기울일 줄 아는 등장인물로 나온다. 그래서 나름대로 자연의 동식물과 '대화'하는 방식을 실천한다. 그녀는 목소리를 내뱉지 않은 채 자신의 세계와 호흡한다. 치자의 생각들은 그녀의 삶의 방식과 그녀가 남긴 그림들과 시 등으로 드러난다. ● 소설 속 등장하는 '나'는 의구심과 호기심이 많아 부조리한 세상을 관찰하며 많은 실마리들과 의문들을 허공에 던져 놓는다. 발견한 이상한 단서들을 조각 맞추며 다소 황당한 상상으로 치닫기도 하는데 추리를 귀결시키거나 증명하는 경우는 없다. 이야기의 나레이터 또한 이야기의 귀결된 설명으로 친절하게 마무리해주지 않는다. ● 남겨진 육신인 '나'를 떠난 '영혼'은 이야기 전개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으며, 자연 속을 방랑하고 다니다가 발견한 단서들을 '단도'를 통해 암시적 메시지로 보낸다. ● 확연히 제니스 조플린을 빗댄 것으로 보이는 '제니스'는 '치자'와 만나 상상의 빨간 오픈카 벤쯔를 타고, 화려해보이는 세상을 까뒤집은 듯한 풍경 속을 유영하며 탐방한다. '메르세데스 벤쯔'라는 곡은 제니스 조플린이 자본사회 속 소득분배의 불균형 및 소유의 문제를 역설적으로 노래한 해학이 있는 70년대의 풍자곡이다. 그녀는 노래한다, "주님, 나 벤쯔 한대만 사주세요. 내 친구들은 다 포르쉐 타요…" 그들이 당도한 이 디스토피아적 세상을 '블루폰드(Blue Pond)'라 명한 것은 어쩌면 푸른연못 '청담'을 직역한 것으로 서울의 화려한 자본주의의 표피를 드러내는 지역을 풍자적으로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자본의 논리로 권력과 재력이, 넓은 바다로 분배되어 널리 펼쳐지지 못하고, 자꾸만 작은 연못으로 고여 드니 물이 쉽사리 썩기 마련이다. 시공간을 초월하여 만난 이 두 여자가 상상의 벤쯔를 타고 달리며 관찰한 시점 속에 자본과 권력의 질서만을 맹신하는 현대사회의 암울한 거품 같은 자화상을 보여준다.




박화영_치자와 단도_비디오스틸_2007


'자연'이 우리에게 한없이 말을 걸어오는 암시적 양태들이 여러 모습으로 드러난다. 바위, 나무, 꽃, 풀, 바람, 이끼, 숲, 바다, 그리고 고래, 코끼리, 참새, 거미, 불가사리, 개 등 자신이 아는 방식대로, 우리가 알지 못하는 메시지를 '청력이 있는 귀머거리들' 인간들에게 한없이 속삭인다. 자신의 통나무토막의 목소리를 듣는 '트윈 픽스(Twin Peaks)'의 '로그 레이디'의 깜짝 등장도 이런 측면을 보이기 위함일 것이다. 우주의 질서 및 에너지를 인위적으로 왜곡시키지 않고 영위하던 것들이 인간의 인공적 개입으로 틀어지고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들이 위협 받는 것에 대한 징후들이 작업에 드러난다. 실제로는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 미스터리한 '집주인'과, 주인집에 임시적으로 사는 이들을 둘러싼 많은 의문과 의구심은 현대사회와 환경을 사는 위기의식 속에서 불길한 징후들을 예견하는 불안심리를 보여준다. ● 내러티브가 끝나가는 시점에서의 '치자'의 사라짐은 모호한 의문을 남기는데, 그냥 집을 나간 것인지, '제니스'와의 여정 이후 앞으로 제니스와의 '임무'수행을 하러 떠난 것인지, 블루폰드 탐방목격 후 비관하여 서울을 떠났는지, 죽었는지, '치자의 식빵'이 내재한 상징적 에피소드로 '나'의 일부가 되어 '집 나간 영혼'의 자리에 대신 들어간 것인지, 아니면 원래부터 치자는 '나'가 알아보지 못한 '영혼'의 다른 모습이었는지, 어쩌면 두 등장인물은 서로 다른 시공간에 존재하는 것인지…… 귀결시키지 않은 채 의문을 품고 이야기를 종결 시킨다. 작가가 비디오에 등장시킨 빨간 바바리 코트를 걸치고 바람 속에 서있는 -'소설' 속에 직접 등장하지 않는- 등장인물은 또 누구일까? 치자가 그린 '이끼그림'시리즈에도 등장하고, '나'의 사진에도 나오는, '하늘 색 가방을 들고 바람 속에서 빨간 바바리를 입은 여자'는 '치자'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영혼'의 모습 또는 '나'의 모습일 수도 있으며, 혹은 그저 관계없는 행인일 수도 있는 모호한 존재로 나온다. 이처럼 마치 다중인격장애를 가진 듯한 복합적 암시설정은 파편화된 인물들과 에피소드들을 이어주는 영매 같은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등장인물들의 경계가 모호해지며, 동일인처럼 느껴지다가도 다른 시공간에 존재하는 분리된 개체들로도 파악되다 보니, 심지어는 그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의 존재마저도 가공으로 고안해 낸 등장인물이 아닐는지 의심이 들 정도이다!! ● 박화영은 이번 총체적 프로젝트에서, 마술적 리얼리즘적 내러티브 속 내재되어 있는, 언어 및 소통체계, 환경 및 자연, 자본과 권력, 분열된 존재, 과학과 문명의 이기, 현대사회의 암울과 불안, 우연과 필연, 허구와 실제 등 복합적 요소들을 혼재시키며 엮어나가고 있다. 수없이 많은 파편들이 서로의 간극 속에서 읽혀지는 다소 복잡한 구조로 볼 수 있지만, 그 많은 정보와 이미지 중에서 마지막까지 가장 머리에 남아 곱씹게 되는 장면은 아이러니칼 하게도 가장 단순해 보이는 치자와 단도가 마루에 하릴 없이 뒹굴며 낮잠이나 자고 있는 '행복한' 이미지이다. ■ Dando Chiza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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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나의 집 (Home Sweet Home)

성지 회화展

2007_1122 ▶ 2007_1201



성지_그 순간 1_캔버스에 유채_112×145cm_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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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1122_목요일_04:30pm

11월 27, 28, 29일은 수시모집 관계로 휴관합니다.




우석홀 갤러리
서울 관악구 신림9동 산 56-1번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50동 3층
Tel. 02_880_7480






즐거운 나의 집 ● 오래간만에 가족은 한 자리에 모였다. 저녁 식사를 한 후 거실에 둘러앉았다. 거실 한복판에서 텔레비전이 주인인 양 가족을 맞이한다. 그리고 티비를 켠다. 그들은 아무 말 없이 드라마를 본다. 드라마에서는 또 다른 가족의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안락함, 편안함, 따스함, 조건 없는 애정 같은 것들이 가족하면 막연하게 떠오르는 느낌이다. 이렇게 가족이란 말이 전하는 어감은 참으로 긍정적이다. 그럼에도 나는 전혀 긍정적이지 않은 불편한 요소를 발견한다. 서먹함을 덮고 감추기 위한 공간은 너무 번듯하고 화려해서 차가운 공기가 더욱 감돈다. 우리는 티비 속에서 또 다른 티비를 보는 등장인물을 바라본다. 티비 앞에 홀로 앉아 있는 그들은 티비를 보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나의 그림은 티비 속 가족을 바라보는 티비 밖의 가족들, 지금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이다. 드라마 속 가족을 바라보고 있는 여기는 ‘즐거운 나의 집’이다. ■ 성지




성지_그 순간 2_캔버스에 유채_112×145cm_2007



성지_"그 아이도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_캔버스에 유채_112.2×194cm_2007



성지_"말씀을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_캔버스에 유채_60.5×73cm_2007



성지_"죽어도 그건 안 됩니다 저에게도 생각이 있습니다"
캔버스에 유채_60.5×73cm_2007



성지_"몇날 며칠 밤을 안자고 생각해봤다"_캔버스에 유채_112×162cm_2007



성지_"이럴 순 없는 거야 이럴 순 없어"_캔버스에 유채_112×162cm_2007


Home Sweet Home ● Once in a while, the family gathers together. After dinner, they sit in the living room. The TV greets them from the center as though it were the host. It is turned on. We watch a drama together, speechless. It shows the story of another family. Comfort, calmness, warmth, unconditional love... these are what comes to mind from the word “family.” It is an exceedingly encouraging word. Yet in it, I find something discouragingly discomforting. The space is too well kept, too glamorous to keep the uneasiness covered, hidden, thus the awkwardness stands out even more. We look at the person in the drama, who is looking at another TV. They sit alone in front of the TV, like a portrait of us here and now. My work is about my family , the family out side the TV that is looking at the family inside it. Here, where we watch a family in some drama, this is my “home sweet home.”■ Sung, J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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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ILL ROOM

서혜영 개인展

2007_1122 ▶ 2007_1216



서혜영_양식의 불일치_아크릴, 색연필_130×194cm_2007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금호미술관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7_1122_목요일_06:00pm




금호미술관
서울 종로구 사간동 78
Tel. 02_720_5114
www.kumhomuseum.com






유리창, 얼룩, 브릭 그리고 낯선 일상 ● 거울과 유리창은 내부의 텍스트를 반영한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물론, 그들의 지향점은 다르다. 거울은 내부를 선명하게 반영(일정 정도의 왜곡은 있지만)한다는 점에서 내부 지향적 텍스트이다. 반면 유리창은 내부를 희미하게 반영하고, 시선을 외부로 확장 시킨다는 측면에서 외부 지향적 텍스트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한다면 유리창에 반영된 피사체는 확장되는 시선을 가로막는 ‘얼룩’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내부와 외부를 구분하기 위해서는 유리창이 필요하고, 그곳에는 필연적으로 ‘얼룩’이 지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유리창에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얼룩’을 단순히 외부 지향적 시각을 저해하는 요소쯤으로 간과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답을 구하기 위해, 다른 방향으로 질문을 던져보자. 과연 ‘얼룩’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리고 ‘얼룩’은 그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유리창의 맺힌 잔상을 추적해보면 그것의 정체는 내부에서 외부를 바라보고 있는 자기 자신이며, 자신이 서 있는 내부 공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희미한 형상을 하고 있지만 마치 거울을 대면하고 있을 때와 같이 지금-여기를 비추고 있다. 그러나 정작 유리창에 선명하게 나타나는 것은 저 너머에 있는 외부 풍경이다. 그러기에 유리창은 ‘희미한’ 내부와 ‘선명한’ 외부가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공간이다. 이것은 유리창에 항시 내재된 것이지만, 내부와 외부라는 이분법적 시각으로는 발견할 수 없는 제3의 공간이다. 그러기에 쓸모없는 것으로 보이던 ‘얼룩’의 정체는 유리창이 제3의 공간임을 알리는 하나의 명확한 지표이다.




서혜영_두려움에 사로잡힐 때_아크릴, 색연필_130×194cm_2007


브릭(brick) 위에 놓인 익숙해서 낯선 풍경들 ● 항상 존재한다고 해서, 그리고 그곳에 지표가 있다고 해서 모두가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작업(2002년 Sadi 윈도우 갤러리 설치 작업)으로 시작해보자. 유리창은 언제나 그러했듯이 안과 밖을 구분한다. 우리는 유리창을 이것과 저것을 명확하게 분별하는 하나의 경계선쯤으로 인식한다. 내부에서는 안을 보기 위한 창문으로, 외부에서는 안을 들여다보기 위한 쇼 윈도우로 말이다. 그러나 서혜영은 단순히 안과 밖으로 구분되지 않는 또 다른 공간이 그곳에 있음을 인식한다. 그들이 중첩하며, 충돌하고, 소통하는 공간을 포착한다. 그곳은 바로 유리창 표면이다. 서혜영은 유리창이라는 2차원적 표면에 자신이 인지한 새로운 3차원적 공간을 재생시킨다. 벽돌 하나하나를 올리듯 그곳에 라인테이프(‘얼룩’)를 이용해 자신이 발견한 중첩과 충돌의 공간을 형상화한다. 서혜영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한 발 더 나아간다. 이제 내부에 투사된 외부의 빛을 형상화한다. 그는 유리창에 붙어 있는 라인테이프가 만들어낸 내부의 그림자를 따라 또 다시 라인테이프를 붙여 나간다. 하나의 건물을 완성하듯 그는 벽돌을 쌓아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곳이 유리창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것이다. 그곳은 외부를 응시하는 내가 서 있는 지점이며 외부의 빛이 투사된 지점이다. 그러기에 그곳은 유리창처럼 안과 밖이라는 이분법적 구획에서 벗어나 있는 서로 중첩하며 충돌하고 발설하는 소통의 장이다. 이렇듯 서혜영의 작업에서 쌓여진 브릭들은 일견 외부 시선을 차단하는 유리창의 ‘얼룩’과도 같은 존재처럼 보인다. 그러나 브릭은 공존할 수 없다고 생각되던 그들이(안과 밖, 밀실과 광장 등 이분법으로 구획된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 상호간에 나누고 있는 소통의 언어다. 서혜영은 브릭 하나하나를 이어 붙이면서 그들의 언어를 추적하고, 듣고 그리고 그것을 형상화 한다.




서혜영_사색의 탄환1_아크릴, 색연필_180×220cm_2007



서혜영_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는것들_아크릴, 색연필_194×130cm_2006


최근 작업에서도 브릭은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브릭의 표현방법에 있어서 라인테이프에서 연필로(2003년 개인전에서 연필을 사용)의 변화가 있었지만, 여전히 브릭은 그의 화면에 주요 지점을 차지하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브릭이 일정 공간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화면 전체를 뒤덮고 있다. 연필로 그려진 브릭은 미세하여 보일 듯, 말 듯 희미하게 그러나 화면에 굳건하게 밀착되어 있다. 즉, 캔버스 표면과 브릭은 한 몸이 되어 있다. 이것은 작가가 지금까지는 특정한 이분법적 공간을 탈주하는 출구의 지표로 브릭을 위치시켰다면, 최근의 작업에서 보이는 작가의 눈 자체가 브릭이 된 것이다. 다시 말해 브릭이 탈주의 지표로 사용되던 것에서 작가의 눈 자체가 탈주의 지표가 된 것이다.




서혜영_선명하고 강렬한 화석_아크릴, 색연필_136×105cm_2007


그렇기에 브릭 위에 그려진 대상들에 있어서도 변화가 있다. 그간의 작업에서 대상들은 형태를 가지고 있으나 세부적 구체적 구체성을 가지지 못하는 관념적 존재(마치 그림자처럼)로 제시되었다. 반면 최근의 작업은 작가의 삶과 밀착되어 구체적인 물질적 대상으로 제시된다. 그곳에는 일상의 소소한 사물, 풍경들이 자리한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발견되는 이러한 익숙한 대상들은 그의 정적인 화면과 조응한다. 그곳의 시간은 정지되어 있는 것처럼 고요하다. 자고 있는 아이, 작업실 주변의 풍경, 맨드라미, 오래된 아파트의 풍경, 책장 등 자신의 주변에서 쉽게 마주 할 수 있는 대상들이다. 그러나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 모두가 인식되는 것은 아니다. 그곳을 인식하는 주체의 시선이 닿을 때, 즉 그들과 소통하고 대화를 할 때만이 그들이 인식소로 작동한다. 서혜영은 그곳에 자신의 시선을 부여한다. 그것은 희미하지만 뚜렷하게 자리하고 있는 무수히 많은 브릭들이다. 이러한 그의 시선을 통해 익숙한 것으로 보이는 일상의 대상들은 낯선 풍경으로 재맥락화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무수하게 펼쳐진 브릭을 타고 대상, 그리고 그것에 대면하고 있는 주체와 소통하고 있다.




서혜영_추상의과정_아크릴, 색연필_130×194cm_2007



서혜영_텅 빈 신전_아크릴, 색연필_130×194cm_2007


제3의 공간에서 지속되어야 할 ‘생산적 대화’ ● 유리창 너머로 외부의 풍경을 바라보는 것은 관조적이고 정적이다. 그리고 그곳의 ‘얼룩’은 그것을 방해하는 저해요소이다. 그러나 서혜영은 오히려 유리창에 ‘얼룩’을 만든다. 그리고 사람들의 관심을 유리창 표면에 생성된 그러나 인식하지 못했던 공간에 머무르게 한다. 이번 작업에서도 그의 캔버스는 무수히 많은 브릭들이 붙어 있는 유리창과 다름없다. 안과 밖을 가르면서 견고하게 서 있는 벽과 같은 유리창. 그러나 브릭들은 텅 비어 있다. 그리고 최근 작업에서 서혜영은 자신의 일상을 채웠다. 그러나 그것은 누구나 볼 수 있는 익숙한 일상처럼 보이지만, 유리창의 ‘얼룩’을 지표로 읽을 수 있는 자가 인식한 낯선 세계가 담겨 있다. 관객들은 텅 빈 기표를 가득하게 만든 서혜영의 언어를 따라 그곳에 자신의 의미를 내려놓을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관객과 작가의 게임(비우고(브릭) → 채우고(브릭위에 놓인 형상) → 비우고(작가의 형상을 낯설게 받아들이는 관객) → 채우고(자신의 일상적 경험을 올려놓는 관객) → 또 다시 비우고(그것 마저도 비우는 브릭))이 지속될 때, 관객과 작가는 작가가 발견한 제3의 공간에서 ‘생산적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 흥미진진한 게임을 기대해본다. ■ 이대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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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재영 수묵채색展

2007_1122 ▶ 2007_1223



민재영_직장(職場 / A work place)_한지에 수묵, 채색_125×170cm_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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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1122_목요일_05:00pm

전시관람_11:00am~07:00pm / 월요일 휴관




가인갤러리
서울 종로구 평창동 512-2번지
Tel. 02_394_3631
www.gaainart.com






민재영은 도시의 사람들을 그린다. 도시는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삶의 장(場)으로서 최근 많은 작가들의 관심 소재가 되고 있다. 그러나, 다수의 작가들이 도시의 건물이나 구조와 같은 ‘공간’ 자체에 주목하는 반면, 민재영은 그 공간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에 집중한다. 보다 정확히는 인간의 ‘관계’에 관심을 둔다. 그녀의 그림에는 무리를 이룬 사람들이 등장하고 그들로부터 우리는 타인과 관계 맺으며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 자신을 발견한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과 얽히어 때로는 힘겹게 또 때로는 무덤덤하게 지금의 삶을 살아내고 있는 나 자신을 말이다. 그림 속 사람들은 옆 사람과 몸이 닿지 않으려 애쓰면서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기도 하고, 서로 어깨를 부딪히며 밀집된 군중을 헤치고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때로는 길 위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잠시 우두커니 서있기도 하고, 식당, 편의점, 클럽과 같이 사람이 북적대는 일상의 장소에서 주변 사람들과 무심히 스쳐 지나기도 한다. 그들 모두는 언젠가 그 자리에 있었을 법한 나 자신이며, 움직임이 정지된 그 순간은 지금도 여전히 흐르고 있는 시간이다. 구체적 인물과 상황이 묘사되어 있지만 인물들은 특정 개인으로 인식되기 이전에 익명의 인간으로 다가오고, 그들이 처한 상황은 특별한 한 순간이기 보다는 우리가 살아가며 늘 겪고 있는 보편적 상황에 가깝다.




민재영_만찬중계(Men in Black)_한지에 수묵, 채색_145×145cm_2007


이렇듯 민재영의 그림은 도시에서 살고 있는 현대인의 일반적인 모습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그 일반성은 우리에게 각자의 개별적 정서를 불러일으킨다. 누구나 경험했을 법한 일상의 장면을 보면서 사람들은 그 상황에서 자신이 느꼈던 개인적인 감정을 다시금 환기하게 된다. 군중 속에 있어도 혼자인 듯한 외로움, 옆 사람과 살이 닿을 때의 묘한 느낌, 주변 동료들에게 느끼는 경쟁심, 그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리라는 동질감 등 살면서 타인과의 관계에서 느끼는 크고 작은 감정들이 그것이다. 평소에는 묻혀 있던 일상의 한 순간에서 느낀 감정과 정서를 그와 유사한 장면과 맞닥뜨림으로써 다시금 상기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내가 느낀 것을 다른 사람도 느낄 수 있다는 인간의 보편성이 자신의 그림을 통해 확인되기를 바라는 예술의 소통 가능성에 대한 작가의 근본적인 믿음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작가의 의도가 실현되도록 뒷받침하는 것은 그림의 형식적 측면이다. 민재영의 그림 대부분은 위에서 수직으로 내려다보거나 사선으로 비껴 내려다보는 관찰자의 시점으로 그려진다. 이는 부유하는 인간 군상의 단면을 하나의 장면으로서 극명하게 부각시키는 동시에 그러한 장면이 보편적 정서를 획득하도록 돕는다. 누구나 겪었을 법한 구체적인 상황을 하나의 장면으로 인식하여 그 장면의 이미지가 부여하는 특정한 정서를 환기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초기에 그녀가 작품 소재로 삼았던 영화 〈희생〉이나 〈해피투게더〉의 한 장면처럼, 일상의 순간도 정지된 한 장면으로서 다가갈 때 어떠한 정서적 울림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녀가 자신의 그림에서 사람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그 상황 자체에 대한 몰입이라기 보다 특정한 장면이 불러일으키는 정서적 경험인 셈이다.




민재영_호밀밭(In the Rye)_한지에 수묵, 채색_148.5×210.5cm_2007


민재영의 그림이 하나의 장면으로 보여지는 또 다른 이유는 그녀가 움직이는 순간을 포착하기 때문이다. 실제 작가는 동영상을 촬영하고 그 중에 자신에게 와 닿는 순간의 장면을 정지시켜 그림으로 옮긴다. 초기에는 사진을 이용했지만 사진이 움직임을 포착하기에 부적절하여 동영상 촬영 방법으로 선회했다고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그려진 그림 속 인물들은 고정된 채 완벽하게 재현된 하나의 대상물이 아니라 움직이는 중에 있는 실제 사람들처럼 생생하게 다가오고, 전체적인 화면은 진행중인 어떠한 구체적 상황의 한 장면인 것처럼 여겨지게 된다. 한편, 이처럼 우리가 민재영의 그림에서 움직임을 인식하고 이미지의 미세한 떨림을 감지하게 되는 데는 화면을 구성하는 가로선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림의 전체 화면을 메우는 가로선은 영상화면의 주사선(scanning line)과 같이 중첩되어 특정한 형상을 드러낸다. 그녀가 처음 가로선 그림을 시도했던 것 역시 동양화를 현대적으로 해석하자는 취지로 열린 한 단체전(〈낯선 외출〉, 1999)에서 전통적인 수묵화에 의도적으로 텔레비전의 주사선을 도입한 그림이었다. 마치 멈춤(pause) 단추를 눌렀을 때 주사선이 미세하게 떨리는 비디오 화면을 보는 것처럼, 우리는 무수히 많은 가로선들로 채워진 민재영의 그림에서 움직임이 일시 정지된 하나의 장면을 보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




민재영_하복(夏服 / The Summer Uniform)_한지에 수묵, 채색_130×176cm_2007


그러나 민재영 그림의 가로선은 브라운관의 주사선과 외견상 직접적인 유사관계를 갖고 있으면서 더 근본적으로는 전통적인 동양화가 갖는 형식적 한계를 극복하는 중요한 방편으로 사용된다. 그녀에게 동양화의 선은 거부할 수 없는 중요한 요소이지만 대상의 깊이나 실재감을 표현하는 데는 밋밋한 윤곽선에 그칠 수밖에 없어 한계로 다가왔다. 또한 윤곽선 없이 한 붓으로 면을 만드는 것 역시 인물의 세부적인 부분을 묘사하기에는 둔탁하여 적절치 않았다. 그리하여 민재영은 동양화의 윤곽선이 만들어내는 삽화성을 벗어나면서도 선이 지닌 특유의 맛과 세밀함을 고수하고자 여러 시도를 해왔다. 1998년 첫 개인전에서는 이미지를 하나의 선으로 분명하게 표현하지 않고 여러 개의 선을 겹쳐서 형상을 그려냈으며, 이후 2001년 2회 개인전에서는 흐릿한 수묵의 세로선들을 중첩하여 인물 형상을 표현하였다. 이러한 진화과정을 거쳐 나타난 것이 오늘날 민재영의 가로선 그림이다. 또렷한 윤곽선 없이도 인물의 표정까지 생생하게 드러내고자 하는 그녀에게 지금의 가로선은 매우 적절한 방편이 된 것이다. 민재영의 가로선 그림은 동양화 붓을 사용하여 일정한 간격으로 수묵의 직선을 그은 후 그 위에 목탄으로 대략의 스케치를 하고, 그 이후부터 수묵이면 수묵, 채색이면 채색으로 짧고 긴 선을 무수히 중첩하여 형태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방법은 선이 겹쳐지는 정도에 따라 명암이 조절되어 별다른 조작 없이 가로선만으로도 깊이와 양감을 표현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그려진 그림은 매끈하게 한번에 그은 선과는 달리 형상이 고정되지 않고 진동하듯 흔들리며 자연스럽게 전체적인 이미지를 화면 위로 떠오르게 한다. 가까이서 보면 그저 무수한 직선들로 이루어진 추상적 이미지가 거리를 두고 멀어질수록 서서히 또렷한 이미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2003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러한 민재영의 가로선 그림은 기본적인 방식을 유지하되 계속하여 진화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민재영_Wander Girls_한지에 수묵_130×170cm_2007


처음에는 거의 수묵 위주였던 그림에 약간의 엷은 채색이 가미되다가 점차 진한 색채를 위주로 한 작품들이 강세를 이루게 되었다. 사실상 그녀의 가로선 그림은 색채 위주일 때 그 효과가 배가된다. 색을 섞지 않고 약간씩 다른 같은 색 계열의 물감을 겹쳐 칠함으로써 인접한 색과의 관계에 따라 색의 발현이 이루어지도록 하여 채도를 떨어뜨리지 않으면서도 풍부한 색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는 기본 4색의 조합으로 무수히 많은 망점을 겹쳐 찍는 오프셋 인쇄와 같은 원리로, 작가는 먼저 한 계열의 색을 칠하고 다른 계열의 색을 칠해가는 식으로 색을 중첩해간다. 이번 전시에는 색채를 위주로 한 진채화와 먹의 농담으로만 이루어진 수묵화가 대조를 이루어 그 차이를 비교해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번 전시는 민재영의 가로선 그림이 형식적 측면뿐 아니라 소재 선정과 제작 과정에서도 변화, 발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과 그로부터 환기되는 정서를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는 동일하되 작품 소재의 범위를 일반적인 인간군상에서 특정 계층의 사람들로 좁힘으로써 주제를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시도가 이번 전시에는 돋보인다. 예컨대 교복 입은 여학생들이나 양복 입은 직장인들과 같이 계층을 알 수 있는 인간군상을 그린 그림들은 보다 구체적이고 효과적으로 어떠한 정서를 환기한다. 서로 부대끼는 가운데 자신을 보호하려는 그 시절 여학생들이 지닌 특유한 정서나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고자 애쓰는 직장인의 특수한 상황이 그대로 전달되어 그림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강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또한 제작 과정에서는 현실적으로 특정 계층의 사람들이 밀집해있는 상황을 찾아내기 어려울뿐더러 원하는 정서가 배어나는 장면을 포착하기 어렵기 때문에 특정한 상황을 연출하여 촬영하였다. 실재를 재연한 것이 실재보다 더 실제적인 까닭에 연출된 상황을 만들어 촬영하는 보다 적극적인 방법을 택한 것이다.




민재영_길 위에서(On A Brick Sidewalk)_한지에 수묵, 채색_100×132cm_2006


이렇듯 민재영의 그림은 갑자기 변화하거나 도약하지 않았다. 선의 중첩으로 형상을 만들어내는 형식적 기법에서부터 도시의 인간을 다루는 주제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그림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서서히 같은 맥락에서 진행되어 왔다. 또한 민재영은 누구보다 동양화의 기본적인 형식에 대한 연습이 충실한 작가다. 충분한 연습과 고민을 통해 동양화를 자신의 것으로 해석하고, 먹과 한지라는 재료를 한정된 요소로 제한한 채 그 안에서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계속하여 발전시키고 있을 뿐이다. 그녀는 최근 전통과 동시대성 사이에서 고민하며 자신만의 길을 가고자 하는 젊은 동양화 작가 중 한 사람이다. 그러나 동양화의 전통적인 준법을 고수하는 산수풍경과 서양의 팝아트 캐릭터를 같은 화면 안에 넣어 전통과 현대의 공존을 시도하는 일군의 작가들과 달리, 그녀는 그야말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의 작가로서 동양화의 재료를 사용하여 자신 주변의 삶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첫 개인전 작업노트에서 밝히고 있듯이 민재영은 지나간 특정 시대의 모델이 전통의 대안이 될 수 없으며, 다만 지나온 시간과 공간의 집적으로서의 ‘나’를 제대로 알아가고 현재의 자신에 충실함으로써 전통의 계승이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이야말로 오늘날 동양화가 ‘우리의 것을 지켜내야 한다’는 당위가 아닌 진정한 동시대 미술로 거듭날 수 있는 바람직한 하나의 방향이 아닐까 한다. 이것이 그녀의 작업을 계속하여 기대해도 좋은 가장 큰 이유다. ■ 신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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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rror Ball

갤러리 정미소 기획 안옥현 사진.영상展

2007_1121 ▶ 2007_1220 / 월요일 휴관



안옥현_미선과 실타래_C-프린트_40×40″_2007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안옥현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7_1121_수요일_06:00pm

작가와의 대화 / 2007_1206_목요일_04:00pm

관람시간 / 화~일요일 11:00am~07:30pm, 월요일 휴관
협찬 및 후원 / 월간 객석_운생동 건축사무소_한국문화예술위원회_갤러리정미소_서울문화재단





갤러리 정미소
서울 종로구 동숭동199-17번지 객석빌딩 2층
Tel. 02_743_5378
www.galleryjungmiso.com






이미지-스크린에 상영되는 욕망의 흔적 ● 1. 매체의 지위와 대상성에 관한 작업 /『표본실의 청개구리』(담 갤러리, 1998), 『눈이나 귀는 육체로 즐긴다』(갤러리정미소, 2005) ● 안옥현이 한국에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98년 전시 『표본실의 청개구리』와 2000년 사진비평상 우수상 수상을 통해서이다. 이 때 사진작업은 마치 정지된 시간을 보여주는 듯하다. 뚜렷하지 않은 이미지 속에서 파편적으로 등장하는 대상은 무엇인가 밀폐된 공간, 시간의 조우 속에서 그 물질성이나 공간적 특성, 시간적 우연성 등의 경계들을 무화시키는 사진이었다. 또한 어떤 경우에, 대상은 빈 방이나 밀폐된 공간 속에 멈추어 있는데, 그 대상은 육중한 무게로만, 혹은 움직이는 속도로만 보여지기도 한다. 이러한 사진에서 대상은 배경과의 경계 구분이 모호하며, 뚜렷한 특징을 갖는다기보다는 오히려 대상성의 지위 즉, 중심의 지위를 상실한 채로 등장하고 있다. ● 이러한 사진과 대상성에 관한 문제적 제안들은 2005년의 갤러리정미소에서의 전시 『눈이나 귀는 육체로 즐긴다』에서 더욱 확장된다. 이 때 전시에서 안옥현은 사진과 더불어 비디오 작품을 전시하였다. 같은 거리, 같은 장소에서 지나가는 행인들을 멈추어 세우고 찍은 이 사진들은 일종의 연작 작업으로 보인다. 인물 대상은 화면의 중앙을 차지하고는 있지만, 그 대상은 이 연작들 속에서 의미를 획득하는 대상들이라기보다는, 사진의 구성물 중의 하나로 보인다. 배경, 포획된 대상 모두 어떤 흐름이자 흔적으로만 남는다. 사진이라는 속성은 대상중심적일 수밖에 없지만, 안옥현의 사진은 사건자체이자 흔적으로 존재하며, 무대상성의 매체로 남는다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안옥현_극장 안내원 여자의 작은 손전등_단채널 비디오 영상_약 00:20:00_2003


이 전시에서 보여준, 비디오 작품 「초록티를 입은 여자」, 「극장안내원 여자의 작은 손전등」은 파편화된 내러티브의 작품이다. 일종의 액자 구조 속에서 에피소드는 중층적이며, 또한 이미지와 사운드도 서로 엇갈려있고, 작품내에 내러티브를 파괴하는 다른 환상의 장면이나 다른 에피소드가 삽입되어있다. 전체적으로 해체적 편집 방식에 의해 제작되어, 관객으로 하여금 어떤 하나의 사건에 주목하기 어렵게 만든다. 오히려 엇갈리는 사운드와 영상,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러한 장면들은, 카메라, 관객, 대상, 장면, 에피소드 등의 시선의 관계를 끊임없이 유동하고 교차하게 한다. 이는 보기라는 것에 결부된 응시의 차원을 돌출시킨다. 즉 바라보는 주체와 대상의 자리를 대상화, 객관화시키며 또한 나아가 그 자리를 무화시키는 것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안옥현_초록티를 입은 여자, 혹은_3채널 비디오 영상_약 00:08:00_2004


만일 우리가 이 작품으로부터 어떤 개성적 내러티브를 재조합을 해낸다면, 그것은 현실과 비현실, 환상을 오가는 것 속에서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즉 이 작품에서는 현실의 요소들, 환상의 요소들, 매체의 요소들이 서로 빗나가는 교환들 자체가 무대화되고 있는 것이다. 일련의 안옥현의 작품을 보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떠올릴 수 있다. 우리의 현실과 비현실이 우리로 하여금 실재적 현실로 자각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 실재적 현실이라는 것이 오인 속에서 재구성되는 것이라 하더라도, 왜 그것은 어떤 진실된 감정을 환기시키는 것일까. 왜 그 오인은 우리에게 치명적일정도로 중요하단 말인가. ● 이러한 질문들은 이번 갤러리정미소에서의 전시 『Mirror Ball』를 통해서 보다 분명하게 된다. 아마도 이 전시는 이미지의 지위에 대한 전시이자, 그 이미지-스크린에서 주체와 대상간의 환상이 공명의 지점을 발견하는 것에 대한 전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안옥현의 작품 세계에서는 현실의 장소, 현실의 대상, 현실의 어떤 불완전한 원칙들이 재연된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의 조직하는 환상의 이미지들로써 재연된다. 안옥현의 작품해체적 작품으로부터 어떤 재조합을 해낸다면, 그것은 현실과 비현실, 환상을 오가는 것 속에서 이루어질 것이 요되는 것이다. 즉 이 작품에서는 현실의 요소들, 환상의 요소들, 매체의 요소들이 서로 빗나가는 교환들 자체가 무대화되고 있는 것이다.




안옥현_인영과 그냥벽_C-프린트_40×40″_2007


2. 이미지의 지위에 대한 작업, 주체와 대상의 환상이 공명하는 이미지-스크린 / 『Mirror Ball』(갤러리정미소, 2007) ● 안옥현의 작품 세계에서는 현실의 장소, 현실의 대상, 현실의 어떤 불완전한 원칙들이 재연된다. 그런데 그것은 현실의 조직하는 환상의 이미지들로써 상영된다. 사진과 비디오 매체는 여기서 중요한 도구가 되고 있다. 안옥현의 2007년 『Mirror Ball』에서 사진과 비디오 작품은 이러한 현실의 불완전한 현실원칙의 어떤 틈새를 ‘이미지’ 자체로부터 드러나도록 한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즉 이미지라는 것의 환상적 측면, 그것의 지위, 지점에서 주체는 어떻게 욕망을 구성하는가에 관한 작업이 된다. ● 이번 전시의 일련의 연작처럼 보이는 사진작품에서, 주된 대상은 여성이다. 그녀들은 각자 가정의 거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들은 약간 야하거나 여성성을 강조하는 차림을 하고 비스듬하게 누워있다. 표정은 무표정이다. 이것은 작가의 설정이다. 마치 사진 자체는 마치 여성잡지에 흔히 나오는 소파 광고라든가, 실내 인테리어 광고처럼 보일 정도의 설정이다. 그렇지만 무표정하게 응시하는 그녀들의 시선은 도대체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지를 알 수 없도록 한다. 만일 그녀들이 그러한 복장을 하고서, 우리에게 유혹의 눈길이라도 던졌다면 우리는 보다 편하게 그녀들을 보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들과 ‘유혹’이라는 약호로 소통할 수 있다는 안도감을 갖기 때문이다. 즉 사진의 여자들은 여성이라는 대상, 그녀들의 포즈와 차림새와 같은 설정 속에서는 매우 자명한 이미지이다. 가령 유혹의 이미지가 되는 것이다.




안옥현_수정과 전복된 미니카_C-프린트_40×40″_2007


그렇지만 이 약호로서의 유혹의 소통이라는 것을 할 수 없게 만드는 요소가 있다. 일종의 그 약호의 원칙을 배반하는 것은 그녀들의 무표정이다. 그로부터 우리는 어떤 불안감에 휩싸이게 된다. 도대체 그녀들은 무엇을 원하는가.... 이로부터 우리의 시선과 그녀들의 시선은 끝도 없는 교환의 상태에 접어들고 만다. 그 교환의 자리인 이미지의 표면이 바로 욕망과 환상의 조우의 지점이 된다. ‘도대체 당신은 무엇을 원하는 것입니까.’, ‘그렇게 차려입고, 누웠는데도 왜 분명하게 유혹하지 않음으로써 우리를 이토록 괴롭게 만든단 말입니까’라는 질문 속에서... ● 안옥현은 약호화된 이미지의 차원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그 약호들을 파괴한다. 그럼으로써 주체와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모호한 욕망이 끊임없이 교환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제 주체와 대상의 관계는 약호를 넘어서, 욕망과 환상이 조우하기만을 간절하게 학수고대하는 순간으로 접어들게 되는 것이다. ● 또 다른 비디오 작품에서 작가 스스로 퍼포먼스를 한다. 퍼포먼스를 하는 여자는 주로 사랑에 관한 노래를 립싱크하고 있다. 그런데 그녀의 표정과 감정은 실로, 너무도 ‘리얼’하다. 구애의 눈길과 제스쳐는 우리에게 한껏 사랑으로의 매혹을 선사하는 듯하다. 하지만 이것은 진짜가 아니다. 아니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 없다. ● 작가는 자주 데이빗 린치의 「멀홀랜드 드라이브」영화를 예로 든다. 이 영화에서 두 주인공 여자가 한 밤중에 보러간 공연장면이다. 영화에서 이 장면은 눈물을 흘리면서까지 열창을 하던 공연자가 쓰러지고 나서도, 사운드는 울려 퍼지며 극장의 두 주인공 여자들이 서로 손을 꼭 부여잡고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다. 마치 뭔가 현실의 외피들, 즉 이미지는 허구의 것으로 벗겨지지만 그래도 우리의 감정과 정서, 감동들을 그것을 넘어서 울려 퍼지고 있는 듯한 것을 느낄 수 있는 장면이다.




안옥현_주먹만한 사랑_단채널 비디오 영상_약 00:06:00_2007


안옥현의 또 다른 비디오 작품에서는 이러한 이미지의 실재차원에 관한 이야기가 매우 직접적으로 드러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미지라는 약호화된 차원을 넘어서, 혹은 그 교환 속에서 드러나는 것은 무엇일까. 대상으로부터 환기되지 않는 성적 매력, 혹은 사랑의 기호들과 같은 어떤 상징적 차원을 넘어서는 어떤 약호 혹은 매개란 것이 있을 수 있을까. 물론 주체와 대상 사이에서 이미지-약호를 통과하지 않는 소통의 관계는 존재할 수 없다. 그렇지만 주체와 대상 사이에는 무엇인가, 즉 그러한 약호, 이미지-스크린에는 소통의 차원을 넘어서는 무엇인가가 교환되고 있다. 그런데 바로 그 교환의 지점에서 주체와 대상의 지위는 무화될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욕망과 환상의 교환 속에서 새롭게 그 지위가 생성되고 소멸되고, 새로 생기는 일종의 변증법적 연쇄고리가 형성되는 것은 아닌가. ● 아마도 안옥현은 이미지-약호-스크린의 이면에서의 욕망과 환상의 교환을 통해서, 우리 현실이 지탱되고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그러한 욕망의 투영, 빗나간 조우, 환상의 불가능한 시나리오를 자주 접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에 일종의 행복한 구속을 당하고 있다. ● 현실을 잘 포장한 이미지들, 가령 광고라든가, 환상의 시나리오로 엮인 영화라든가 하는 것들 속에서 우리가 발견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물론 우리는 그러한 이미지가 실재적이라고는 여기지 않지만, 우리는 더욱 더 그 이미지를 리얼하게 만들고 싶어한다. 이 가공된 이미지들은 가짜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짜라고도 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어떠한 소통도 할 수 없다.




안옥현_사랑한다고 말해_단채널 비디오 영상_약 00:04:00_2007


이렇듯 안옥현의 작품은 이 소통의 기호, 약호들에 관한 작업이자, 그 약호들의 이면에 관한 작업이 된다. 우리가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이미지로만 보고 있는 대상들은 그 외피, 즉 이미지를 넘어서 무엇인가 간절하게 원하는 욕망의 주체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 대상은 아무런 특별함도 없는 공백이자 무의 상태일 수도 있다. 단지 이들을 이미지자체로 조직화하는 것은 바로 주체와 대상간의 환상의 공명, 그리고 욕망의 교환을 통해서일 뿐이다. 즉 기호 혹은 이미지라는 장치를 무시하거나, 통과하지 않고서는 욕망도 환상도 현실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안옥현의 이 이미지들, 이 대상들의 소통의 약호들은 그것을 벗어내려고 하는, 그것을 빗나가는, 그것에 딱 들어맞지 않지만 그것이 없이는 아무것도 아닌 그런 이미지-스크린이다. ● 그리고 결국에 우리는 그 이미지-스크린을 넘어선 어떤 차원, 즉 주체의 환상이 공명하는 그 차원에서 우리의 실체를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이 이미지들에게, 과연 이 이미지들이 실재적인가 하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그 대답은 아마도, 대상의 규격화된, 통제된, 절제된, 즉 약호화된 이미지에서 우리의 환상이 공명하는 그 지점으로 귀결되는 어떤 빗나간 차원을 발견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을 것이다. 안옥현의 작품은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이미지, 소통의 약호들이 얼마나 완벽한 이미지가 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그렇지만 그 완벽함에의 기대는 오히려 빗나감으로써 완성된다. 그 빗나감의 장소인, 약호화된 이미지-스크린에서 우리의 수많은 감정들, 욕망의 교환, 우리의 환상은 발견되고, 상영될 것이다. ■ 이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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