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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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omepage]님께서 남기신 글 (2006-02-09 15:33:24, Hit : 800)
전시 2.9




비트폼 갤러리에서 전시하는 대니얼 로진의 작품-서클 미러

(서울=연합뉴스) 조채희 기자 = 미국 뉴욕에 있는 비트폼 갤러리(Bitsforms Gallerys)는 뉴미디어ㆍ디지털아트 미술품을 전문으로 전시하는 화랑이다. 비트폼 갤러리는 의류회사 ㈜한섬의 투자를 받아 지난해 9월30일 한국 지사 형태로 강남구 청담동에 비트폼 갤러리를 열고 최첨단 디지털아트를 국내에 소개하는 창구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마크 네피어, 대니얼 로진 등 비트폼 갤러리 전속작가들의 작품을 한국에서도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뉴욕대 인터렉티브 텔레커뮤니케이션 프로그램의 교수인 이스라엘 출신 대니얼 로진(45)은 산업 디자이너 출신으로 최근 10여년간 조각ㆍ소프트웨어 설치 부문 미디어ㆍ디지털 아트계에서는 세계적인 명성을 지켜왔다.

서울 광장동 W호텔에 가면 로비 벽면을 차지하고 있는 로진의 작품 '나무 거울(Wooden Mirror)'을 볼 수 있다. 정사각형 나뭇조각 1천500개를 설치하고 중앙에 카메라와 수많은 센서를 보이지 않게 설치해 앞에서 사람이 움직이면 움직임을 따라 나뭇조각들이 도미노처럼 연쇄적으로 움직이면서 파문을 만들어낸다.

로진이 13일부터 청담동 비트폼 갤러리에서 최신작인 '스노 미러(Snow Mirror)'와 얼마전 뉴욕 비트폼 갤러리에서 처음 선보인 '서클 미러(Circles Mirror)' 등 작품 10여점을 전시한다. 서클 미러는 152×152㎝의 정사각형안에 여러가지 무늬가 그려진 얇은 플라스틱 원판 900개를 어슷하게 포개놓은 형태로, 카메라가 관객의 움직임을 포착해내면 원판들이 회전하면서 그림자를 만들어낸다.

스노 미러는 까만 화면 앞에 선 관객이 펑펑 내리는 눈을 맞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작품이고, '자아중심적 거울(Self-Centered Mirror)'은 직사각형 거울 34개를 교묘한 각도로 연속 배치해 정면에 선 관객에게 자아도취의 즐거움을 준다.


비트폼 갤러리에서 전시하는 대니얼 로진의 작품-셰이킹 타임

급커브길에 세워진 볼록 거울처럼 왜곡된 이미지를 제공하는 '시간을 흔들다(Shaking Time)' 등의 다른 인터렉티브 작품들도 만날 수 있다. '미술과 과학의 만남'이 유행하지만 어쩐지 과학은 어렵다고만 생각해온 관객들이라면 카메라나 컴퓨터 마우스, 스크린이라는 매개체 없이도 인터렉티브 작품을 즐길 수 있어 반갑다.

청담동 비트폼의 이훈송씨는 "작품의 모든 기술적인 요소들은 작품 뒤로 철저히 숨기고 관객과 쉬운 언어로 소통하기를 원하는 작가"라고 설명했다. 3월25일까지.

☎02-516-5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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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터 그라스

귄터 그라스 판화조각展

2006_0208 ▶ 2006_0228



귄터 그라스_무제_석판 인쇄_40×54cm_2005




초대일시_2006_0208_수요일_05:00pm



기자간담회 2006_0206 ▶ 2006_0207 오전 11시 갤러리 고도

관람시간 / 10:00p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고도
서울 종로구 수송동 12번지
Tel. 02_720_2223_4






부활절 직전 ● 검은 못에서 / 백조를 보았다. / 그가 아닌, 내가 놀랐다. / 너무 아름다운 것이 무심함과 짝이되어.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 지나쳤다.




귄터 그라스_무제_석판 인쇄_40×54cm_2005


눚게 ● 자연이 스스로 드러낼 때만 / 자연을 본다 / 손을 더듬어 / 자연의 단편만 보거나 / 결코 못 보거나 / 오직 행운이 찾아 올 때만 / 모습을 본다 / 온전히 ● 이른 아침에 / 내 똥이 증명하는, / 찬란한 아름다움이 / 무었이어야 하고 무었을 못 박는지 / 나는 모른다. ● 그러기에 마지못해 잠든다. / 꿈은 대상을 흐리게 하고 /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기에 ● 나는 깨어 있고 싶다. / 어쩌면 돌이 움직이거나 / 카룸이나 서양자초 / 나를 졸리게 하는 것을 가지고 / 아그네스가 올지도 모른다.




귄터 그라스_울프스할레의 깃털_석판 인쇄_40×54cm_2005


타르 칠하고 깃털을 갈기 ● 그녀는 털뽑힌 나를 원했다. / 깃털들 나는 /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 갈매기의 싸움에 대하여 쓴다. ● 아니면 한 소년이 / 솜털을 울타리 넘어 어딘가로 / 불어 날리는지. ● 솜털, / 이것은 수면이고 / 킬로당 파는 거위이다. ● 침대마다 느끼는 하중. / 그녀가 무감각한 무릅 사이로 / 깃털을 뽑을 때, / 소문대로 깃털이 날아다니는 동안 / 공권력은 포근히 잠잤다. ● 가금(家禽)류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 하지만 나는 불어서 뜨게 했다. / 그것은 전해져온 믿음이다; / 타르칠로 깃털을 간 의혹 ● 얼마 전 나는 / 깃털을 있는 대로 찾아내 / 내게 맞게 재단했다. / 처음에는 수도승이, 나중에는 시 서기가 / 오늘날엔 속기사가 / 거짓말을 떠다니게 한다.




귄터 그라스_울프스할레의 암소_석판 인쇄_40×54cm_2005



귄터 그라스_울프스할레의 나무_석판 인쇄_40×54cm_2005



언어의 은유와 회화의 직설 ● 최근 개별 예술의 영역간의 경계가 애매해지고 다양한 삶의 방식이 예술 전반에 끊임없이 실험되고 있습니다. 이는 더 정확히 관찰하면 비단 오늘날에 한정되어 보이지 않습니다. 여기에 소리와 의미에 의존하는 문학과 조형적 요소와 시각적 인식에 의존하는 미술, 이 양자간을 넘나들며 전후에서 지금가지 활동한 예술가가 있습니다. 그는 바로 독일의 시인이자 소설가 그리고 미술가인 권터 그라스 우리에게 소설 "양철북" 노벨문학상 작가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그를 문학가로 볼 뿐 미술가로 이해되지는 못했습니다. ● 이 번 저희 갤러리에서는 영역간의 경계에 구애되지 않고 문학과 시각예술을 한 예술가가 자신의 창작을 위해 개별 영역이 그 이웃 영역에 의해 자극되고 또한 서로 보완함으로써 하나의 삶 속에 완수해 내는 사례로서 권터 그라스의 판화와 조각 작품을 전시하기로 했습니다. ● 이번 전시회를 통해 오늘날의 예술적 실험들의 근원을 다시 확인하는 기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귄터 그라스_무제_석판 인쇄_40×54cm_2005


그라스는 듀셀도르프 아카데미와 베를린 조형대학에서 미술을 공부했습니다. 그는 평생 목탄과 펜, 수채용구를 놓지 않았고 판화와 조각을 했습니다. 이 전시회는 그의 조형적 성과의 일부를 조망하고 동시에 그의 문학적 업적에 의해 가려진 미술가로서의 모습들을 국내에 소개하여 영역간의 실험과 같은 오늘날 이 땅에서 진행되는 예술일반의 활동들에 하나의 창의적 사례로서 기여하고자 기획되었습니다. ● 엄밀히 말해 그라스의 미술과 문학은 직접적으로 긴밀한 연관성으로 얽혀있기보다 오히려 삶, 예술 혹은 진리, 이와같은 궁극의 목적에 접근하는 길로서 개별 예술 영역이 같은 역할을 함을 논증하는 듯합니다. 새로운 가능성을 시험하는 단계에서 그는 언제나 그리기와 글 쓰기가 그의 삶에 지속적으로 평행하게 유지되어 왔습니다. 그려진 그림은 다시 글로 쓰여졌습니다. 그래서 그의 글에서 생산된 은유는 다른 한편으로 곧 직설적인 그리기로 보증되었습니다. ● 결국 이들 개별 영역들 사이의 연관 아래 서로를 활력적으로 자극하여 발전을 이끔니다.




귄터 그라스_무제_석판 인쇄_40×54cm_2005


그라스 조형적 재능은 대상에 대한 집착(Sucht zu Gegenstand)과 구체적인 비유로 형상화 시키는 (Ins-Bild-Bringen)것에 있습니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개구리, 버섯, 뱀장어, 넙치, 달팽이, 깃털 등의 동식물은 미술학도 시절부터 즐겨 그려온 것이고 각각의 작품과 시대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반복되어 등장합니다. ??깃털을 부는 남자??, ??달팽이 눈의 남자??, ??넙치속의 남자??에서처럼 자화상을 연상케 하는 남자의 등장은 예술이 자신의 삶의 기록임을 보여줍니다. ● 추상적인 관념조차도 구상적인 모습을 띠고 나타나는데 일체의 해석과 의미 방향을 암시하거나 덧붙임 없이 관람자에게 직접 제시되며 ??구체적으로 관찰 할 수 있는 것, 사물들에 한정시켜?? 사물 자체로 하여금 말하게 합니다. 때로는 거칠게 때로는 자극적으로 드러나는 형태와 선들은 현실의 부조리한 모습과 모순을 반영하며 이 시대의 흐름을 포착하고 대상들을 그려나가는데 있어 결코 선동적이지 않으며 여기에 환상적 요소를 가미해서 현실이 갖는 부조리의 무게를 덜어내는 모습을 보입니다. 환상과 사실 연결될 것 같지 않은 두 개념이 그의 회화에서 성공적으로 자연스럽게 결합되어 보입니다. ● 그의 문학은 은유의 실험을 위한 매체로 활용한 것으로 보이고 한편 당대까지 유럽 특히, 독일 미술 전반에 면면히 흐르는 알레고리를 직설적 표현력으로 완수한 점에서 시각예술의 영역을 확장시킨 것으로 보입니다. 그라스는 단지 이 두 가지 예술적 업적에 머무르지 않고 이들 양자간을 자신의 삶 속에 종합하는 것에서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지대해 보입니다.




귄터 그라스_무제_석판 인쇄_40×54cm_2005


귄터 그라스 G?nter Grass ● 1999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이자 시인으로서 정치적 발언과 행동으로 주변에 영향을 끼쳐왔다. 생애 전반에 걸쳐 판화와 조각의 제작을 놓지 않은 미술가이기도하다. ● 그는 1927년 단치히에서 태어나 1947년 석재견습공을 출발로 1948~1952년 듀셀도르프 아카데미에서 오토 판코크에게서 배우고 1953~1956년 베를린 조형대학의 칼 하루퉁으로부터 지도받았다. ● 그는 스스로 자신을“미술가(artist)로서는 전문교육을 받았고 작가(writer)로서는 교육받지 않은 예술가”로 특징지었다. 수십 년간 저술활동과 조형작업은 병행되어 진행되고 완성되었다. 하나의 영역은 다른 영역에 언급되고 영향을 주고 해석되어 관객을 항상 매료시켰다. ● 이론의 여지가 없는 리얼리스트의 대가인 귄터그라스는 무었 보다 수많은 판화작품을 반복과 변주로서 창조한다. 지금까지 독일, 국내외에 수많은 전시로 명성을 얻었고 루드비히 와 뷰르트 미술관에서 그의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 2002년 그의 문학과 미술을 위한 공개토론의 장인 “귄터 그라스의 기념관”이 뤼벡에 설립되었다. 눈을 감은 후에도 떠오르는 잔상은 귓속의 달팽이관에서 맴돈다. 많은 경우 그것은 아름다운 이미지가 아닌 소음으로 기억된다. 소음은 어떤 기억보다 강하다. ■ 갤러리 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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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Loop Full Moon Party

2006_0211_토요일_07:00pm~



Full Moon Party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대안공간 루프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6_0211_토요일_07:00pm~새벽까지

기획_대안공간 루프_김인선_김준기

디제이_왕파리(Superfly)
드레스 코드_80년대 분위기의 의상(교복 대환영)





대안공간 루프
서울 마포구 서교동 335-11번지
Tel. 02_3141_1377
www.galleryloop.com






Full Moon Party란? ● 루프에서 매달 보름달이 뜰 때마다 하는 파티입니다. 미술인, 문화인들의 교류의 장에서 나아가 일반 대중들과의 새로운 소통접점을 지향하며. 술과 미술과 음악과 함께 가볍고 혹은 무거운 담론들을 이야기 할 수 있는 문화 심포지움의 장입니다. 모여서 놉시다, 재미있게... ■ 대안공간 루프

흠, 고민인걸. 파티에 대해 글을 써야 하다니...... ● 80년대 스타일을 주제로 파티를 한다고 하니 잠깐 고민스러워졌다. 글을 쓰라고 하니 더 고민스럽다. 나는 최류탄 냄새에 성가심을 느끼면서 눈물을 찔끔거리며 90년도에 누리고자 했던 대학생활을 위해 학생 시절을 모범적으로 학교를 등교하고 생활해야 했던 운동부족에 비만의 위험을 안고 10대를 보낸 그 시절의 전형적인 평범한 초, 중 고등학생이었을 뿐, 그 당시의 패션을 그리 즐기지는 못했던 시기였다. 그 시대에 벌어지고 있는 심각한 사회이슈들을 직접적으로 체험했다고도 못하겠다. ● 파티의 주제를 정하고자, 지독하게 삭힌 김치로 만들어진 새빨간 뚝배기 김치찌개와 기름과 소금이 적절히 발려져 윤기있게 잘 구운 김을 반찬으로 두고, 루프의 디렉터 서진석씨, 문희채 큐레이터, 플랫폼 L의 윤희정씨, 그리고 나와 함께 organizer로 참여하는 김준기씨 등은 신나게 80년대에 흔히 볼 수 있었던 우스꽝스럽고 촌스러운 모습들을 떠올리며 식사 내내 낄낄거렸다. 그것은 주로 어글리 패션에 대한 것이었는데, 탱탱하게 말아 올린 앞머리며 어깨에 뽕을 넣어 건장한 체구로 보이게 만드는 상의, 칠보 디스코 바지의 패션, 진한 눈썹과 갈색 볼터치, 립 라인 등의 진한 색조화장법 등 온갖 촌스러운 조합들이 물결치던 그 모습은 이번 파티에 무궁무진한 소스들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은 나에게는 일종의 그 시대의 동경 같은 것이었다. 성인이 되기 전의 학생의 모습에서는 이러한 특징들을 달고 다니기는 힘들었기에 스스로는 만끽하지 못했던 스타일이었고 TV속에서, 대학가에서 이러한 스타일들을 힐끔거리며 바라보기만 했었던 것이다. ● 위트와 유머어가 넘치는 내 친구들과 80년대의 스타일에 대한 평가를 끝없이 뱉어내다가 흥에 못 이겨 마침내 서로의 얼굴을 80년대 스타일로 화장해주고 사진을 찍어대던 어느 날 저녁의 ‘놀이’를 떠올렸다. 그날은 서로를 보면 깔깔거리기는 하였지만 그것이 단지 80년대를 비웃은 밤은 분명 아니었다. 80년대 절절한 가사의 대중가요들과 팝송에서 우러나오는 진한 감성에 대한 찬양도 주요 소재였고 패션에서 보여지는 과감한 표현에 대해 은근한 경외감들을 표현하고 있었다. 어릴 때 엄마의 립스틱을 입술에 빨갛게 발라보며 좋아했던 심정도 함께 동반되었다. ● 나와 내 친구들이 그렇게 즐거워했듯 80년대에 유난히 아이러니했던 사회상에 대한 담론은 잠시 덮어두고 그 시대의 패션을 맘껏 꺼내 입고 치장하고 즐겨보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니 파티에 대해 글을 써야 한다는 압박감도 조금 홀가분해 진다. 이 글이 너무 가볍다고 느껴지는 사람들에게 이해를 구해야겠다. 어쩔 수 없다. 난 즐겁고 웃기는 파티를 원하니까. ■ 김인선

누가 80년대의 문화적 파편들을 보았는가 ● 홍대 앞 극동방송국 인근의 한 건물 이층에서 출발한 대안공간루프의 초창기 모습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불과 몇 년 전이지만 그때 만해도 전시장과 까페가 공존했던 루프의 독특한 공간구성은 하얀 벽면 일색이었던 여느 공간들의 분위기에 비해 매우 신선하게 다가왔다. 이제 루프도 연륜에 맞게 나이를 먹었고 많은 것이 변했지만, 전시장에 앉아 커피 한 잔이나 맥주 한 캔, 와인 한 잔을 나눌 수 있었던 초창기 루프가 그립기도 하다. 새로운 공간을 마련한 루프가 두 번째 전시를 마무리하면서 파티를 연다. 공간이전에 따라 장소를 알리는 이벤트를 열어야할 필요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도 루프에게 이러한 파티가 필요한 것은 예술적 소통의 채널을 다각화 하고자 했던 초심을 잊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독립된 공간 건물로 우뚝 선 루프이지만 극동방송국 옆 자그마한 공간에서 까페와 전시장을 병행했던 유연한 공간개념을 살려서 깔끔하게 딱떨어지는 전시장 기능 이외에도 다소간 흐트러진 모양으로 느긋하게 노니는 곳으로서의 색깔을 잊지 않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 파티 주제는 80년대이다. 과거의 기억을 되살려 파티의 아이템으로 삼겠다는 생각은 자칫하면 퇴행적인 복고취미로 이어지지 않을까 조바심을 낼 법도 하다. 그러나 조금만 달리 생각해보자. 우리에게 이렇게 과거를 되돌아보려는 사유와 감각의 의례들이 얼마나 빈곤했던가. 과거를 돌아보는 일은 현재와 미래를 제대로 내다보는 일이 아니던가. 과거는 현재와 미래를 담보하는 보물창고가 아닐 수 없다. 대안공간루프에서 80년대라는 테마를 가지고 파티를 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80년대는 정치적으로는 일반민주주의의 원칙을 일부나마 이뤄냈고, 서로 다른 생각과 느낌을 조금씩 나누기 시작했던 문화다원성이 그 싹을 보이기 시작했던 시대이며, 사회적으로는 근대와 탈근대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시대이기도 하다. 20대 청춘들에게 있어 80년대는 아스라한 유년의 기억일 것이다. 30대에게는 성장기를 거쳐 세상에 첫발을 내딛던 가슴 두근거리는 추억이 서려있을 것이며, 40대에게는 가슴 뭉클한 스무살 청춘의 기억을 떠오르게 할 것이다. 50-60대에게 있어 80년대는 절망과 열망이 교차한 인생의 대격동으로 기억되기도 할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 80년대라는 시대는 유년의 기억이자 청춘의 기억으로 살아있다. ● 그 시대를 관통함으로써 우리사회는 비로소 색과 소리를 되찾았다. 삶을 노래하는 말과 가락을 만들어서 나눠가질 수 있었고, 자기 맘에 맞는 색으로 몸을 드러내기 시작했으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적은 글자들을 접하면서 머리와 가슴과 입과 귀를 나눠가질 수 있었다. 70년대의 백색테러를 극복하기 위해 ‘절제를 넘어서 표현으로’를 외쳤던 탈근대의 맹아들이 나온 것도 이 시대였다. 민족주의 담론과 결합하여 전통예술의 계승과 혁신이라는 화두에 불을 지폈던 것도, 민중계급의 혁명운동으로 세상을 한판 뒤집기 하는 데 예술로 한 몫 할 수 있다는 꿈을 꾸었던 것도 이 시대였다. 모던 패러다임이 포스트모던 패러다임과 뒤섞여 새로운 지평을 열어냈던 시대. 획일성의 사회에서 유동하는 사회로 나아갔던 변혁의 시대. 80년대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이렇듯 한 시대에 대한 존경과 경의로 가득 차있다. 동시에 우리 모두는 그 시대에 대한 부채의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세상의 변화는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를 일구어 나간 모든 사람들의 열망과 좌절 속에서 이뤄지기 때문일 것이다. ● 그러나 우리는 이제 더 이상 타는 목마름으로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다. 노찾사의 사계보다 거북이의 사계가 더 유명하고, 오윤은 20주기를 앞둔 작고거장이 되었으며, 89년 전대협의장 임종석은 열우당 당의장 후보가 되었고, 인권변호사 노무현은 이라크전 참전국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정치경제사회문화종교윤리성관계이성문제교육스포츠환경복지육아’ 등등등 우리를 둘러싼 그 모든 것에 있어서 극적인 전환점으로 작용한 80년대라는 한 시대를 관통했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그 시대의 어떠한 하비투스도 뚜렷한 전형으로 남아있지 않다. 아니,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출발하는 편이 낫겠다. 남은 것은 파편들뿐이다.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이제 그 시대의 파편화된 흔적들을 통해서 열린 감성으로 80년대라는 시공간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고 말해야 할지 말지 솔직히 망설여지지만)고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겠는가. 최소한 우리는 이렇게 자문해볼 수는 있다. 누가 80년대의 문화적 파편들을 보았는가. ● 파티 분위기는 오히려 경건 모드가 아닌 경박 모드일 것이다. 빌리진과 할렘디자이어, 터치바이터치, 깅기라기니가 뒤섞이는 댄스가 있을 것이다. 신디 로퍼와 프린스, 퀸, 마돈나, 유리스믹스와 같은 클래식도 있고 비지스와 둘리스, 놀란스의 가벼움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디제이 왕파리 아저씨가 ‘앉아서 무게 잡지 말고 나와서 바람 잡으세요’라는 작업멘트를 날려줄지도 모른다. 조용필과 이용, 전영록이 식상한 사람들에게는 대학가요제와 강변가요제가 배출한 걸작들이 귀에 쏙 들어올 것이다. 그러고 보니 소방차와 박남정, 김범룡 등 바람 같은 남자들의 댄스곡들과 패션이 동시에 떠오른다. 디스코바지와 교복으로 한 시대를 누볐던 낡은 청춘들도 등장할 것이다. 각자 자신의 80년대를 기념할 만한 한 장의 사진들을 통해 개개인의 비밀스러운 기억을 들춰내기도 할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80년대를 테마로 노는 데 있어 앞서 말한 엄숙한 시대정신 보다는 점점 잊혀져 가는 주변부 문화 아이콘들을 등장시키는 데는 나름 이유가 있다. 경건 모드에 짓눌려 한 시대에 대한 감성적인 조망을 간과해왔던 엄숙주의 시각을 넘어서고 싶기 때문이다. 모여서 놀자. 80년대의 문화적 파편들을 주섬주섬 주워 모아보자. 우린 그때 놀지 못했거나 놀다 말았다. 무릇 파티란, 특히나 과거를 기억하는 파티란 그때 놀다가 다 못논 것 마저 놀 수 있는 여유 정도는 있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심미성을 담보로 쌈빡한 이미지 게임을 벌이는 미술문화공간으로써 뿐만 아니라 주변부 문화의 자잘한 것들까지도 함께하는 열린 소통의 공간을 지향하는 말랑말랑한 루프 생각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 김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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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봉채展

'잃어버린 시간, 경계'

 

 

2006년 2월 8일(수) ▶ 2월 27일(월)

갤러리쌈지

서울시 종로구 관훈동38번지(인사동 쌈지길 아랫길) TEL 02-736-0088(#607) FAX02-736-6720

 

 

잠재력 있는 작가들의 작품을 다양한 계층의 관객들에게 소개하는 한편 젊은 작가들에게 상업적 판로를 마련하는 갤러리쌈지는 쌈지 스페이스 레지던시 프로그램 1기 작가이자 최근 광주를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보이는 손봉채 작가를 초대하여 기획한 "잃어버린 시간, 경계"展을 개최합니다.

손봉채 작가는 광주비엔날레와 도시와 영상전 등의 전시를 통해 인간이 만들어 놓은 기계문명에 의해 인간이 지배당하는 아이러니를 풍자한 설치 작품을 선보여왔습니다.

쌈지 스페이스 입주작가 프로그램과 광주시립미술관 창작스튜디오 1기 작가로 서울과 광주 그리고 최근에는 중국 등지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손봉채 작가는 그의 근작을 통해 기존의 기계적 설치 작업과는 또 다른 흑백 풍경사진을 입체적으로 재이미지화 한 설치작품 시리즈를 선보입니다.

본 전시에서 작가는 남도의 근 현대의 역사적 아픔을 그대로 간직한 사건, 사고가 일어났던 장소의 현재 모습을 통해 과거와 현재라는 시간의 간극을 흐린, 마치 시간이 멈추어 선 한편의 동양화를 보는 듯한 입체풍경을 선보입니다.

전시구성

흑백 풍경 사진이 전사된 여러 개의 투명 아크릴에 조명등이 부착된 입체 풍경 시리즈 설치 작품. 각 작품의 크기는 80cm X 60cmX15cm(두께), 120 cmX40

 

시간의 간극(間隙)을 넘어선 현재의 풍경

갤러리 쌈지 큐레이터 양옥금

 

여러 겹의 투명 아크릴 위에 흑백 사진이미지가 쌓여 하나의 풍경을 만들어내는 손봉채의 신작 시리즈는 존 버거(John Berger)의 "글로 쓴 사진 (photocopies)"의 첫 장에 보여지는 한 장의 흑백 사진을 떠올리게 한다. 아마 핀홀(pinhole) 카메라로 촬영 한 것으로 추측되는 그 흑백사진은 화면의 중앙에 서있는 피사체인 두 사람에게 초점이 맞춰지기 보다는 뒷배경의 검은 자두나무에 맞춰져 있고, 하늘에서 쏟아지는 역광과 화면 전체가 심하게 흔들린 듯한  흐릿한 이미지는 아무런 기술적 조작 없이도 "처얼컥"하고 천천히 셔터가 눌러지는 몇 분 동안 카메라 앞에 존재했던 피사체의 과거와 현재 사이의 간극을 의미심장하게 보여주는 듯하다.

버거(Berger)는 정신은 육체의 시간과 구별되는 또 다른 시간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한다고 말한다. 손봉채는 육체의 시간-물리적인 시간-을 거쳐 이룩된 특정 장소의 현재의 모습을 통해 정신의 시간에 집적된 역사의 기억을 불러낸다. 작가는 일제강점기와 6.25를 거쳐 근 현대에 이르기까지 주로 남도 지역의 특정 사건, 사고가 일어났던 장소를 돌며 그 역사적 장소의 현재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은 후 그 이미지들을 여러 장의 투명 아크릴 위에 전사(傳寫)시켜 몇 겹의 레이어를 쌓아 올리는 방식으로 재이미지화 한다. 이렇게 완성된 손봉채의 입체 풍경은 보는 시점, 시각, 빛의 양과 방향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보이는데 이는 마치 수묵의 농담과 공기원근법으로 표현된 동양화를 연상시킨다. 이것은 또한 사진/설치와 동양화적 어법이라는 다소 상이한 요소들이 어울려 만들어지는 조형언어로 손봉채가 기존의 기계적 설치 작업과 그림자 작업 등의 과정을 거쳐 시도해 온 동서양의 조형성의 결합으로 볼 수 있다.

손봉채가 흑백사진으로 담은 한국의 근 현대사를 관통하며 남도가 겪은 그 지난한 역사 속 장소의 현재 모습은 ‘과거’와 ‘현재’라는 시간의 간극만큼이나 생경하다. 평범한 시골 마을길이 된 6.25당시 주민 학살이 자행되던 교회가 있었던 영광 어느 마을의 오솔길, 지금은 고즈넉한 바람만 머물다가는 6.25때 죽창으로 주민들이 학살당했던 담양의 대나무 숲, 등산코스가 된 빨치산의 근거지였던 지리산, 그리고 잘 가꾸어진 가로수 길이 된 광주시내 기독교 병원으로 가는 길은 5.18 민주항쟁 당시 무고한 시민, 학생들이 생의 기로에서 달려갔던 길이었다. 또한 무심한 일상의 풍경으로 보이는 지하철에서의 광경은 멀지 않은 과거에 일어났던 대구 지하철 참사 현장의 오늘의 모습이다.

폴 오스터(Paul Auster)는 과거의 어느 사건은 이미지와 기억의 집합체로 존재한다고 한다. 스냅사진과도 같은 평범한 풍경사진이 바탕이 되어 만들어진(fabricated) 손봉채의 풍경들은 안개에 쌓인 듯, 흐릿한 시간의 경계에서 현존하는 장소와 그 장소에 얽힌 기억 사이를 흐리며 풍경 밖의 감상자를 화면 안으로 끌어들이는 제3의 풍경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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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괴적인 성격 Ⅱ

책임기획_김미령

2006_0208 ▶ 2006_0221



오기영_도시이야기3_장지에 안료, 먹, 감물, 합분_148×118cm_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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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6_0208_수요일_06:00pm

방효진_안성규_오기영_이민혁_이여운_정재호




관훈갤러리 본관 전층
서울시 종로구 관훈동 195
Tel. 02_733_6469
www.kwanhoongallery.com






기다려 주지 않는 시·공간 속에서 - Black City ●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고요함의 서슬 푸른 빛 ● “매일 밤 날카로운 칼날처럼 서 있는 정신은 무엇이 불만인지 삐걱거린다. 수많은 밤들을 지새우면서 자아는 꺼질 듯한 촛불처럼 가녀리게 빛나고 있는 실낱같은 정신을 부여잡고, 회의에 회의를 거듭하면서, 종국에는 삐걱거리는 정신의 톱니로 괴로워하고 있는지 모른다.” - 파괴적인 성격Ⅰ-6인의 예술가와 1명의 침입자 서문 中 -




방효진_공상가-도시-미술세계_혼합재료_340×200×180cm_2006



방효진_공상가-도시-미술세계_혼합재료_340×200×180cm_2006


도시의 토사물에 관하여. ● 근대 이후 도시라는 거대 공간구조는 생산관계에 의해 영향을 받으며 변화하였다. 모든 공간은 자신마다 고유의 공간을 갖는데 그렇다면 도시라는 공간이 가진 표상은 무엇인가? 프랑스의 사회학자 앙리 르페브로는 공간을 사고, 행동, 지배, 통제 등의 도구로 권력의 지배를 실행하는 장으로 간주하였다. 그의 입장을 따르면 도시는 가장 중점적으로 권력의 지배를 실행하는 공간으로 대변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사회적 공간으로서 도시는 당대의 지배 권력의 체제유지의 표상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있는 도시의 거대한 시스템은 그곳에 속하지 못한 사람들에겐 무기력감과 어지럼증을 선사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지니지 못한 사람들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20세기 초반 벤야민은 “도시 앞에서 무력감”을 원래 지닌 사람이 길을 잃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지를 이야기한다. 그는 후에 산재되어 있는 거쳐 가야 할 공간들에 대해서 그만의 지도를 그렸는데, 그 모습은 마치 미로와 같았다고 한다. 이렇듯 끊임없이 갈 곳과 해야 할 것을 만드는 도시의 새로운 공간시스템은 사람들이 철저히 길들여지기를 요구한다. 그렇지 않으면 복통과 어지럼증에 시달리면서 살 수밖에 없을 수도 있을 것이다.




오기영_도시이야기4_장지에 안료, 먹, 콩즙_80×130cm_2003



이민혁_신설동1005



이민혁_흘120F


분절된 도시의 공간들 ● 안식처로서의 집이란 공간은 이제 여인숙처럼 돼버렸다. 현대인들의 삶은 이제 과거의 사람들처럼 집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거의 없다. 일터와 집을 오가며, 놀이도 휴식도 이제 집이 아닌 휴양소나 그 밖의 공간으로 이동하면서 보낸다. 방랑자와 같은 현대 도시인들의 삶에서 이제 방랑자가 되지 못한 자와 방랑자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의 양분이 시작되었다. 여기서 또 우리는 소외감을 발견하게 된다. 어느 시대건 유행이 있어왔으나 그 유행이 육체적, 정신적 안식처까지 침투하고 있는 것이다. ● 거리에 내몰린 사람들은 정처 없이 가야할 곳을 찾아 헤매다가 각자의 목적에 부합되는 이름표 달린 방들로 행한다. 이제 사람들의 교류와 관계는 극히 일부적인 공적인 장소를 제외하고는 잘게 썰려져 나간 이름표달린 공간들 속으로 철저히 감추어져 버렸다.




이여운_illusion_한지에 채색



이여운_illusion-05_한지에 채색



정재호_대광맨션아파트



정재호_회현동기념비


도시라는 공간이 토해낸 정신적인 충격과 존재감에 대한 의문의 서시 ● 시. 공간적 메카니즘은 그것을 경험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체험되는가를 통해서 그 의미를 추출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소재의 선택 또한 현 시공간에서의 문화적 기억에 기반하고 지배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근래에 들어 도시라는 소재를 가지고 작업하는 작가군이 급속하게 늘어나고 있는데 이는 젊은 작가들을 키워온 물적 토양이 도시라는 거대한 몸짓이었음을 반증하는 요소로 보여 진다. 이번 전시는 발전과 진보를 외치는 도시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상처받고 소외된 인간존재에 대한 고전적인 물음을 가진 작가들(방효진, 안성규, 오기영, 이민혁, 이여운, 정재호)을 통하여 거대 자본주의 세계 속에서 등한시 되고 있는 도시의 뒤안길에 묻혀진 인간존재와 그 속에 내포된 자생력을 엿보고자 한다. ■ 김미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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