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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abel  [homepage]님께서 남기신 글 (2003-07-19 03:01:59, Hit : 456)
[펌]주명덕 - 이영준 글




주명덕은 1940년 황해도 안악 출생. 경희대 사학과 수료. 중앙일보 기자를 역임했다. 66년 홀트씨 고아원전을 시작으로 이달의 작가전 (국립현대미술관) LANDSCAPE전 등 6회 개인전 개최. 사진, 오늘의 위상전, 사진은 사진이다전 사진, 새로운 시각전 등에 참가했고 한국현대 사진의 흐름, 서울정도 600년 기념 사진전 등을 기획했다. 사진집으로 《섞여진 이름》 《한국의 장승》 《사람의 도시》 등 다수. 현재 도서출판 시각 대표, 한국사진연합 이사장이다.








실제 사진을 보려면 http://www.wolganmisool.com/199810/index.htm 로 갈 것.



내설악
<내설악> 젤라틴 실버 프린트 1972





전주 동산면
<전주 동산면> 젤라틴 실버 프린트 1974





전북 익산
<전북 익산> 젤라틴 실버 프린트 1971





경북 안동
<경북 안동> 젤라틴 실버 프린트 1968





송광사
<송광사> 젤라틴 실버 프린트 1972





구룡령
<구룡령> 젤라틴 실버 프린트 40.6×61cm 1986





오대산
<오대산> 젤라틴 실버 프린트 40.6×61cm 1988





경주
<경주> 젤라틴 실버 프린트 40.6×61cm 1997




전쟁의 상처를 안고 있는 혼혈아들, 인천 차이나타운, 초가, 정신대 할머니 등 근대화의 뒤안길에 잊혀져간 기억을 되새겨주는 사진을 통해 본격적인 사회적 기록의 가능성을 선보였던 주명덕을 소개한다. 30년이 넘는 경력의 소유자인 그는 한국의 샤머니즘, 문화 유산, 산하로 앵글을 옮겨가면서 최근에는 풍경과 정서, 조형성과 내러티브를 하나의 이미지로 융화하는 독특한 경지를 선보이고 있다.

주명덕의 사진을 보면 한국이 꽤 아름다워 보인다. 정확히 말하면, 그의 사진 속의 한국은 아름다웠었다. 아름다움에 대해 과거 시제를 쓰는 이유는 그가 찍었던 대상 중에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명시의 고향》(1971)에 나오는 시인의 생가 주위 오솔길에는 이제 가든 음식점들이 즐비하게 생겨났을 것이고, 아이들이 놀던 푸근했던 강원도 땅 그 마당에는 코란도가 서 있을 것이다. 《한국의 공간》(1995) 속의 공간도 많이 변해버렸는데, 그의 사진 속에 숨쉬고 있는 서정성은 그런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그가 사진찍었던 것들 중 아예 사라진 것들도 있다. 모델 윤영실은 실종됐고, 성철 스님은 입적했다. 윤영실과 성철 스님을 같은 반열에 놓고 얘기할 수는 없으나, 주명덕의 사진에서는 사라진 모습에 대한 안타까운 그리움은 공통된 것이다. 그의 사진이 기록의 차원을 넘는 것은 그것이 주명덕의 심미적인 눈으로 포착된 기록이라는 점도 있지만, 사라짐에 대한 저항이라는 점도 있다. 세계적으로 가장 빠르게 변하는 나라 한국에서는 사람도 풍경도 건물도 모두 그 현존을 끊임없이 지우며 살고 있기 때문일까. 그것들은 항상 살면서 또한 동시에 죽고 있는 것이다. 죽음이라는 목표를 향해서 빌빌대며 ‘죽어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씩씩하고 활발하게 ‘죽고 있는’ 것이다. 그때그때의 현존은 곧바로 지워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인공물이든 자연 상태이든 아마 한국에서 10년 전의 모습을 현재와 같이 유지하고 있는 것을 찾기란 아주 어려울 것이다. 뉴욕에 가면 백 년이 넘는 건물에 사무실과 아파트가 있는 곳이 아주 많던데, 그런 곳의 시간이야 한국의 그것과는 다를 것이다. 한국의 시간은 발터 벤야민이 클레의 그림 <새로운 천사>에 대해 얘기할 때 언급했던 ‘역사의 천사’가 맞닥뜨리고 있는 그런 시간성을 가지고 있다. 벤야민은 불쌍한 역사의 천사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천국으로부터는 폭풍이 불어오고 있고, 또 그 폭풍은 그의 날개를 꼼짝달싹 못하게 할 정도로 세차게 불어오기 때문에 천사는 그의 날개를 더 이상 접을 수도 없다. 이 폭풍은 그가 등을 돌리고 있는 미래 쪽을 향하여 간단없이 그를 떠밀고 있으며, 반면 그 앞에 쌓이는 잔해 더미는 하늘까지 치솟고 있다. 우리가 진보라고 일컫는 것은 바로 이러한 폭풍을 두고 하는 말이다.”

한국에서의 풍경의 변화는 이런 폭풍 속에 휩싸여 있는 것 같다. 주명덕의 사진은 이런 한국적인 시간 속에서 태어났다. 주명덕의 사진 작업은 이런 폭풍 같은 시간으로부터 이미지들을 구해 내는 일이다. 그가 사진을 잘 찍었다고 해서 성철스님이 다시 부활하지 않듯이, 자신이 사진찍은 대상 자체를 구원할 수는 없다. 단지 이미지만을 구원할 수 있을 뿐이다. 그가 사진찍은 풍경이나 사람들 중 그런 역사적 시간을 생각하지 않고 볼 수 있는 것들은 거의 없다.

못된 버릇인지는 몰라도 나는 그의 사진을 볼 때 참 아름답다는 생각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 아름다운 마당은 이렇게 변했겠지’, ‘이 아름다운 사람은 이제는 주름이 팍 졌겠지’하고 생각하는 습관도 있다. 이런 못된 버릇은 이른바 ‘조국 근대화’가 나에게 가르쳐 준 것이고, 주명덕의 사진은 조국 근대화라는 폭풍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제 우리가 그의 사진을 관조적으로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은 조국 근대화가 어느 틈엔가 역사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주명덕의 사진이 한국적인 풍경을 추구하는 다른 사진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고 아류도 많지만, 주명덕의 사진과 같은 사진이 다시 나올 수 없는 이유는 똑같은 폭풍이 똑같은 자리에 다시는 안 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의 사진들은 폭풍의 끝처럼 차라리 고요하지 않은가. 목이 잘린 부처들, 자전거가 지나간 자국만이 남은 돌담길, 콩기름을 잘 먹여 번들거리는 송광사의 승방, 바람이 불지 않는 겨울 오대산. ‘주번’ 표지를 가슴에 단 시골 초등학교 아이들은 웃고 있지만 그 웃음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평상 위에 모여 앉아 입을 다물고 카메라 앞에 얌전히 포즈 취한 시골의 가족들 앞에서 닭들이 모이를 쪼고 있지만 닭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시간성을 위반하는 고요함이 그의 사진에 아름다움을 실어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얌전하고 고요한 것들에 한국적인 아름다움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런데 한국적 아름다움이란 말은 어느 틈엔가 우리에게 짐이 되어 버렸다. 그것이 짐이 되어버린 이유는 ‘한국적’이라는 딱지에 내재한 딜레마와 상관있다. 역설적이지만, ‘한국적’이란 말 속에 들어 있는 한국적이라는 가치는 한국적인 것 자체에서 온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남대문으로 아침저녁 드나들던 시절, 그것을 한국적인 아름다움으로 생각한 사람이 있을까? 사람들이 남대문을 국보로 정한 것은 남대문이 사라질 무렵의 일이 아닐까? 즉, 남대문 안으로 걸어 다니는 것이 아니라 그 주위로 차가 다니고, 남대문보다 더 높은 빌딩들이 주위에 생겨 남대문이 더 이상 ‘대문’이 아니게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한국적 아름다움으로 보는 것은 아닐까?

한국적이란 것은 한국적이지 않은 것과의 대립에서만 생기는 것이다. 햄버거가 없었다면 우리는 냉면의 맛을 오늘과 같이 느꼈을까? 물론 옛날에도 냉면을 먹었으되 거기다가 ‘우리의’ ‘고유한’ 음식이라는 타이틀을 붙여 가며 먹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 ‘한국적’이란 것은 서구 문명이 이 땅에서 지배적인 사고의 패러다임이 되었을 때 비로소 의식된 것이며, 그런 패러다임에 의해 타자화된 영역이다. 우리에게 있어 한국적이란 것이 딜레마인 이유는 이렇게 타자화된 영역을 다시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주명덕이라고 해서 그런 딜레마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딜레마에 발목을 잡혀 고민하지 않았고, 작가적 고집과 끈기를 밀고 나간다. 주명덕은 그런 고집을 통해 산의 산다움, 인물의 인물다움, 절의 절다움, 초가집의 초가집다움을 사진으로 말해 주는 코드들을 만들었다. 그 코드는 그의 사진을 조형적, 시각적, 내러티브적 측면에서도 한장 한장 독립된 것으로 만들어준다. 그런 만큼 그의 사진은 요즘 얘기하듯이 유형학이나 관상학적 체계에 의존해 봐야 되는 사진은 아니다. 그의 사진은 하나하나가 단편소설에 비유될 수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안동 하회마을의 돌담길을 찍은 사진은 돌담이 에워싸고 있는 집의 구조와 크기에 대한 암시를 던져 주고 있다. 그러나 그런 파사드에도 불구하고 이 사진의 함축적인 주제는 돌담 주위로 걸어다님, 더 자세히 말하자면 전통적 공간에서의 신체 이동에 대한 암시이다. 사진 앞 아래쪽에서 왼쪽 위로 난 자전거 바퀴 자국이 우리의 눈을 그런 쪽의 해석으로 초대하고 있다. 그래서 그 사진을 보는 사람은 한편의 이야기를 읽듯이 자신의 신체를 그 사진의 공간 속에 이입할 수 있다. 그리하여 권 대감은 버석거리는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이런 고얀지고”하며 돌담의 저쪽으로 사라졌다는 식으로.

송광사 승방 사진도 그 문창살의 규칙적인 형태와 명암 대비가 아주 강조되어 있지만, 그런 조형성은 형식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승방의 고요함과 규칙성을 말하고 있다. 역광을 받아 번들거리는 방바닥은 눕거나 자는 곳이라기보다는 꼿꼿이 가부좌를 틀고 있어야 하는 공간임을 암시하고 있다. 누군가 저 문을 열고 들어올 것이다. 필시 그는 스님일 확률이 큰데, 스님과 나눌 전형적인 대화가 떠오른다. 고요와 긴장과 침묵과 명상이 가득 찬 공간에서의 몸가짐, 거기에는 아무 말도 없다.

농촌의 가족 사진은 공동체의 평화로움이라는 이야기를 엮어 내고 있다. 이 사람은 저 아이의 할아버지이고, 이 여자는 저 여자의 며느리이고, 저 닭은 내일이면 잡혀 먹힐 것이고 하는 이야기들, 사진의 조형적인 배치가 그 이야기에 설득력을 더하고 있다. 평상 위의 사람들과 그 아래 닭들은 서로 아무 상관없는 것이 아니라 사진 속의 공간 배치에 의하여 하나의 공동체로 묶이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친밀하다. 가족 사진 특유의 안정된 구도가 그 친밀함을 확증해 주고 있다.

이런 사진적 내러티브는 그냥 사진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던져져 있다. 이거 슬프지 않느냐, 이거 아름답지 않느냐, 이거 곱지 않느냐고 말을 걸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런 사진들은 ‘말이 되는 사진(pictures that make sense)’이라고 할 수 있다. 조형적으로 말이 되고 내러티브적으로 말이 되는 사진들이다.

그런데 그 말이라는 것이 때로는 버겁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래서인지 언제부턴가 주명덕의 사진에서 말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면 뭐가 남을까. 최근 들어 부쩍 주명덕은 자신의 사진이 언어화되는 것을 피하고 있는 것 같다. 그에게 “어떤 시선을 가지고 있길래 한국적 정서를 사진으로 효과적으로 나타낼 수 있었는가”라고 물으면, 그는 “그저 직감으로 찍는다.”고 한다. 직감으로 찍는다는데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그 직감에 대해 비평적이고 이론적으로 캐묻는 질문을 더 할 수도 있겠지만, 그의 답을 듣고 직감적으로 느낀 것은, 그가 자신의 사진에다 말을 덧붙이기를 피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최근 10년 간 그의 풍경 사진을 보고 뭐가 뭔지 잘 알 수 없다고 느끼는 것은 그것이 언어화할 수 있는 영역 바깥의 무엇을 쫓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산을 보거나 꽃을 볼 때 항상 사진적으로 의미가 통하는 이미지로서 본다. 그러나 그는 말들로 포화된 이제까지의 사진에서 벗어나 말의 바깥 너머 그 어떤 것을 찾고 있는 것 같다. 사진에 있어서 풍크툼이란 바로 말의 바깥, 너머, 그 밑에 있는 것이기에 주명덕 사진의 짙은 어두운 톤은 풍크툼이다. 그의 사진은 온통 풍크툼으로 가득한데, 더 이상 풍크툼이 없을 정도이다.

그의 사진에서 오대산이고, 설악산이고, 구룡령이고 그런 것이 중요하지 않은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러므로 그의 검은 톤은 그 자체로 무엇을 의미한다기보다는 말을 피하는 그만의 방식인 셈이다. 그것은 지우기와도 흡사하다. 사진의 대상이 숲이나 꽃이나 풀이되 그것들은 지워져 있고, 그 지우는 행위가 사진 속에 나타나 있다. 그러나 그런 지움이 우리를 쓸쓸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회화의 여백이 텅빈 공간이 아니듯, 주명덕의 어두운 여백이 아무 것도 없는 상태는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때로 컴컴하게 해가 지는 들녁, 물체들이 그 어둠 속으로 몸을 숨기기 시작할 때 묘한 쾌감을 느끼지 않는가? 뭔가가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안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움직이는 것 같기도 하고 가만히 있는 것 같기도 한 그 무렵은 모든 사물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감춰 버리는 순간이다. 그것은 마치 지우려는 힘과 지워지지 않으려는 힘이 맞서고 있는 대치 상태 같기도 하다.

그런 상태의 긴장은 우리가 그의 사진을 볼 때 지각의 차원에서도 드러난다. 이게 좀더 밝으면 꽃이 잘 보일 텐데, 산의 나무들도 잘 보일 텐데. 그러나 그의 사진은 그런 소망에 응답하지 않을 것이다. 주명덕이 자신의 직감에 대해 더 이상 풀어서 말할 수 없는 것처럼. 그러므로 그의 사진의 어둠은 한참 보고 있으면 적응이 되어 더 잘 보이는 어둠과도 다르다. 주명덕이 30년 넘는 사진 경력 끝에 도달한 어둠은 그를 말의 무게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있다.

그런 어둠으로 인해, 이제 그의 사진은 우리의 등을 가차없이 앞으로 떠미는 조국 근대화의 역사적 폭풍으로부터 자유롭다. 그리고 이제서야 그 사진들은 정말로 고요한 사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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