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푼크툼(punctum), 텅 빈 일기장
- 김경덕의 일상적 풍경들
김경뎍 개인전
"일상 - 보물"
갤러리 룩스
2003년 4월 9일 - 2003년 4월 15일
조선령(부산시립미술관 큐레이터)
롤랑 바르트는 사진에서 언어처럼 코드화된 측면을 ‘스투디움(studium)’이라고 부르고, 코드가 파괴되거나 해체된 부분, 그래서 개인적이고 특별한 감성으로 다가오는 측면을 ‘푼크툼(punctum)’이라고 불렀다. 스투디움은 작가의 의도, 사회적 ․문화적 교양,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 맺어지는 하나의 계약”으로서의 문화와 관련되는 부분이다. 반면 라틴어로 ‘점’을 의미하는 ‘푼크툼’은 스투디움을 파괴함으로써 발생하는 하나의 우연성이며, “화살처럼 나를 관통하는” 것, 나를 상처입히고 자극을 주는 어떤 세부적 요소이다. 바르트는 푼크툼이 없는 사진 - 보도자신이나 포르노 사진 - 은 무기력하고 매끈한 욕망을 불러일으킬 뿐이며, 우리에게 자극을 주고 사진의 탁월한 가치를 느끼게 만드는 것은 푼크툼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 말을 확대 해석하면, 스투디움만으로 이루어진 사진과 마찬가지로 푼크툼으로만 이루어진 사진도 예술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것이 된다. 결국 이 이원성의 긴장과 조화가 사진의 가치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문화와 문화를 이탈하는 요소라고 하는 지극히 고전적인 두 요소에 관한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는 바르트의 이 구분은 김경덕의 사진을 이야기하는 데 있어서도 하나의 단서가 되어준다.
방금 푼크툼만으로 이루어진 사진..이라고 했지만, 실제로 바르트는 그런 사진에 대해 언급하지는 않았다. 아니, 실제로 그런 사진이 가능한가? 왜냐하면 스투디움의 세계는 곧 문화의 세계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숙명적인 것이고, 푼크툼은 스투디움과 함께 있을 때만이 포착가능한 것일 텐데. 그런데 코드라는 익숙한 테두리를 넘어 일종의 물리적 실재로서 다가오는 많은 작품들을 보면서 바르트의 이런 구조주의적 입장은 수정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김경덕의 사진에서도 어쩌면 스투디움은 하나의 허구이거나 아름다움 모조물이고, 오히려 모든 것을 지배하는 것은 푼크툼이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든다. 왜냐하면 결론부터 말하면 평범한 일상의 사물들로 구성된 그의 사진에서 코드화의 문제는 하나의 ‘미끼’처럼 제시될 뿐, 결코 그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코드가, 바르트의 용어로 말하면 스투디움이 구성될 듯 말 듯한 분위기를 풍기다가 결국 모호함이 걷히지 않은 채 끝난다고나 할까.
겉보기에 김경덕은 지극히 평범한 대상을 사진찍는다. 2000년에 열렸던 개인전에서 그는 자신의 방에 놓인 이불과 배게들을 사진에 담았다. 단정하게 개어져 있기도 하고 조금 흐트러져 있기도 하고, 여러 모습으로 등장하는 이 이부자리들은 거의 미니멀적인 아름다움을 풍기며 조용히 존재하고 있었다. 이번 개인전에서도 역시 이부자리가 등장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좀더 구성이 복잡해졌다. 이부자리만이 아니라 텔레비전, 책, 화장품 병, 옷 같은 소품들, 그리고 인물도 가끔 등장한다. 방금 벗어놓은 듯한 이불 옆의 잠옷 바지, 외출하면서 놓고 나간 듯 의자에 걸쳐져 있는 옷들, 읽다가 놓아둔 것 같은 책들. 분명히 소소한 일상의 풍경들이다. 특징이 있다면 휴식과 관계된 것들이라는 것, 눈높이를 낮추었을 때 눈에 들어오는, 거의 주목할 가치도 없어 보이는 사물들이라는 것들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 화면속에는 일상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조형적 아름다움만을 추구하기 위해 사물들을 탈도구화시키고 있는 것도 아니면서 그렇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분명 벗어놓고 간 옷들은 그 옷을 입은 사람의 흔적을 드러낸다. 그러나 동시에 이 사진들은 그 사람의 일상적 행동이나 감정에 우리가 동참할 여지를 거의 주지 않는다. 언뜻 이 사진들 속에는 스투디움을 구성할 수 있는 요소가 풍부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이불 옆에 놓아둔 베르메르의 화집이나 ‘녹색평론’ 같은 책을 보면 여기에 어떤 스토리가 숨어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것은 지시되지 않은 모호함 속으로 사라진다. 이 사진들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기처럼 보이면서 동시에 중심이 텅 비어 있는 불가해한 이미지들이다. 결국 김경덕의 작품에서는 나를 찌르는 섬광같은 푼크툼이 오히려 중심을 차지하고 있으며 스투디움은 그 주위에 하나의 ‘미끼’로서 걸쳐져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고정관념은 역설적 방식으로 뒤어진다.
스투디움과 푼크툼의 문제는 형상이 존재하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아니다. 대상을 알아볼 수 없는 추상적 작품조차도 스투디움으로 가득 찰 수 있다. 사진이 예술로 인정받은지 오랜 세월이 흐른 끝에 사진의 코드화를 둘러싼 담론은 다른 예술, 다른 이미지의 담론과도 겹치게 되었으며, 또한 사진 내부에도 그 역사 주위에 구축된 담론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들뢰즈가 말하듯이 예술가는 결코 텅 빈 캔버스(사진의 경우는 텅 빈 프레임이라고 해야할까)로부터 작품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을 온통 둘러싸고 있는 진부한 상투적 이미지들로부터 시작할 수 밖에 없다. 들뢰즈는 예술가는 분명 카오스와 투쟁하지만, 그것은 견해(doxa, 즉 상투적 이미지)와의 투쟁이라는 더욱 심오한 투쟁에 비해 이차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사진을 둘러싼 스투디움과 푼크품의 담론 그 자체 역시 하나의 스투디움화한 것은 아닐까. 김경덕의 사진은 진부한 이미지와 투쟁하는 사진의 임무를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새롭게 시작하고 있기 때문에 특별히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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