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가오는 풍경과 쫓아가는 시선의 절충 장치 : 이강우 매체의 얇은 표면
이희영 / 미술평론
이글은 다시 <미술세계> 2002년 5월호에 실렸다.
최근 이강우의 화랑 공간은 2000년 이후 미술가에 의해 개발된 다양한 포맷들을 한 자리에 기획하는 구성을 제시한다. 이는 그가 컬러 사진을 본격적으로 자신의 매체로 활용한 시기의 것들을 포함한다. 지난 3월 중순에서 4월 초에 걸쳐 진행된 그의 개인전에서 사진과 설치 물들의 포맷은 크게 ①바닥과 천장을 잇는 지지대에 부착된 사진으로 구성된 인물 버전, ②압구정동 풍경이 전사된 종이평면 그 자체를 화랑 벽면에 부착한 집 버전, ③문자와 형태가 변화하는 이미지를 투사한 동영상 물 그리고 ④누운 조각 좌대와 금속의 진열대 위에 놓인 병들의 설치 물로 이루어졌다. 그와 함께 그것들 사이 곳곳에 상징이 도안된 바닥의
타일과 벽의 문자들이 관람자의 동선을 이끌고 있었다.
인물 버전 중 몇몇은 현실의 관람자의 신체를 능가하는 규모이지만 관람자의 시선에 고스란히 그 형태가 다 포착되게 구성되어 있고 집 버전은 회화가 걸리는 위치와 동일한 높이다. 직립한 관람자의 시각 범위를 넘지 않고 일상에서 편안하게 목격될 수 있는 위치에 이미지와 대상들이 걸리거나 놓여 있다.
관람자의 걸음이 허용된 타일과 병의 설치 물마저 회화나 조각의 포맷과는 달라도 관람자가 바라보는 면을 헤치지 않고 오히려 진지하게 그 표면을 보도록 배려되어 있다. 이 버전들과 설치물 그리고 몇몇 문자의 벽면은 죄다 관람자의 응시를 위해 계획된 포맷이다. 결국 관람자는 전시된 사물들의 표면을 의식하게 된다.
이점은 관람자를 정면에 위치시키는 회화 포맷의 전통을 회고하게 한다. 인물 이미지들이 지닌 머리 모양이나 의상은 자유로운 청년 모드로 관람자의 것과 비교되게 하고 그것들의 모드를 따라 꾸리지 못한 관람자를 주눅들게 한다. 생소한 외관으로 설계된 것으로 보이는 집 이미지는 그런 곳에 살지 못하는 대부분의 관람자를 질책하듯 화랑 공간으로 뛰어나오려 한다. 한편 병 속의 액체는 약이거나 귀한 음료의 포맷으로 그것을 대부분 맛보지 못한 관람자에게 건강과 미용을 염려하게 한다.
이들 표면 너머에 담겨 있는 이미지와 대상들은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면 누구나 누려하고 가져야 할 것인 양 관람자가 서 있는 현실의 화랑 공간으로 쏟아져 나오려 한다. 그것은 이내 관람자를 초라하게 하고 그만큼 하나의 힘으로 다가선다. 관람자는 이강우의 표면이 제공하는 이미지의 모드와 진귀한 것처럼
포맷된 액체의 반짝임을 취하거나 누리는 것에 자극 받는다. 이들은 미술가에 의해 기록된 것이고 관람자의 현실과는 다른 곳에 분명히 누군가에 의해 사용되는 것들이다.
그 기록이 물리적으로 점령하고 있는 얇은 표면은 실재하는 화랑 공간으로 다투어 쏟아지는 힘과 그것을 열망해서 쫓아가는 시선이 충돌하는 지점이다. 따라서 이강우의 매체는 돌출하는 힘과 몰입하는 욕망의 에피소드를 기록하는 것으로 판독된다. 이 전시회에 이강우가 제시한 "문화풍경"은 바로 힘과 욕망의 대응 사이에 놓인 얇은 막을 가시화한 것으로 읽혀진다. 이강우가 채용하는 문자들은 욕망과 힘의 완충 지점에서 명제들을 구성한다. 그 문장들은 관람자에게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표면 너머의 인물들에게 제시된 듯하고 그 양자간의 관계를 이어 주는 듯하다. 이 상반된 방향은 결코 하나의 공간으로 합쳐진 것이
아닌 채로 서로의 차이가 얇은 표면과 이들 문장을 통해 확인 받는다. 나는 바로 이 얇은 틈이야말로 미술가 자신의 의식이 매체와 일치되는 지점으로 보고 있다. 그 곳은 비어 있고 그 만큼 타인들의 음성으로 아우성대는 것으로 보인다. 메를로 뽕띠가 사르트르의 조사(弔詞)에서 한 말이 생각난다 :
"결국 자아란 무수한 타자들의 소리에 다름 아니다."
+++ 이강우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와 동 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지금까지 7차례의 개인전과 다양한 단체전을 통해 작품을 발표해왔다. 1990년대 이후 사진작업에 관심을 갖고 이후 줄곧 사진과
설치물의 제작에 다양한 조형적 실험을 하고 있다. 서울여자대학교, 서울산업대학교, 동국대학교 등에서
강의를 했고 현재 서울대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전시의 개념 ; 미술(家) 이야기 & 문화풍경>
나는 이번 전시에서 사진, 비디오, 텍스트 등을 활용하여 다음의 두 가지 주제를 함께 다뤄보려고 한다. 작품들의 구성과 공간배치는 주로 설치감각으로 다스려 종합 연출할 예정이다.
1. 미술(家) 이야기
내가 다소 해묵은 듯한 '미술의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작품활동을 시작한지 10년 정도가 흐를 즈음이다. 당시 나는 어떤 조형이념들의 충돌과 문화변동에 연루되면서 제기된 미술의 '큰 문제들'보다는 미술창작활동을 밑받침하는 '작으면서도 실제적인 부분들'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이를테면 작업의 물적인 토대를 만들기 위해 작가가 감내해야 할 '밥벌이'에 관한 부분(미술가 27인의 밥)이라든지, 비록 전 인생의 의미를 걸고 있긴 하나 객관적으로 보기에 현 미술의 중심흐름에서 소외되고 마치 타자화 된 듯한 한 화가(이종주)의 '실존적 측면'과 '낭만적 기질' 그리고 그를 그렇게 만든 어떤 '내외적 동기들'에 관해서 라든지, 미술의 입문단계에서 거치곤 하는 정물연습의 주요소재인 '꽃'에 대한 새삼스러운 주목(生花, 造花 시리즈) 등이 바로 그것이다. 후에 그 관심은 나의 경력프로필에 유머러스러운 내용을 덧붙여 미술작동의 틀 안에서 운신하고 있는 한 개인으로서의 욕망과 그 삶에 대한 가벼운 풍자, 나아가 한 작가(성능경)의 신체행위와 그 개념들에 대한 다큐먼트를 통해 미술문제와 관련된 나의 관심을 좀 더 거시적인 영역으로 넓혀보려 한 시도로 이어지기도 했다.
나는 이번 전시에서 그러한 시도들을 좀 더 심화시켜보려고 한다. 물론 이제까지도 그런 자세를 견지해왔지만, 결국 무겁게 추상화되기 쉬운 거시의 관점으로 미술의 문제에 접근하기보다 다소 미시적 관점으로 시야를 좁혀서 작가 개인의 실제 삶에서 유래하는 구체적인 실례와 내용들로부터 그 논점과 의미들을 끌어내어 시각화시켜볼 생각이다. 다만 그런 시도가 현재의 미술 화두와 문맥에서 얼마만큼의 일반성과 당대성의 가치를 획득할 수 있을지 실로 장담키 어려운 점이 문제라면 문제가 될 듯하다.
2. 문화풍경
나는 풍경을 대략 두 가지 정도의 소재로 다루려고 한다. 하나는 풍경의 관점으로 본 '신체'이고, 다른 하나는 '집'을 소재로 한 풍경의 관점에 관한 문제이다.
"모든 것은 신체(혹은 몸으)로 귀결된다"는 말은 이 시대의 '몸'에 관한 담론들의 요체로 통하곤 한다. 그렇다면 그런 '몸' 혹은 '신체'를 풍경의 관점으로 봄은 무엇을 뜻하는가? 결국 '해석'의 문제가 아닌가 싶다. 즉 신체를 매개로 한 풍경 읽기의 시도는 거기에 중첩되고 얽힌 문맥들과 의미 망 도출의 문제로 귀결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자면 우선 작업에서 다룰 대상들을 응당 '객관화'시키려는 노력이 요구될 텐데, 나는 그런 냉정한 성격의 다큐먼트 만을 애써 고집하진 않으려고 한다. 되도록 그렇게 하되, 필요하다면 대상의 부각을 시각적으로 극대화하는 작업방식도 굳이 배제하지 않을 생각이다. 왜냐하면 나 자체도 감정과 감각이 충만(?)할 뿐만 아니라 그 진동에 의한 떨림과 분열을 늘 안고 사는 존재요, 내 시선 안으로 돌진해 들어오는 이미지의 충격들 또한 종종 나와 대상들 사이에 가로놓인 소위 보이지 않는 '언어의 막'에 대한 나의 지각능력을 훨씬 초월해버리곤 하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신체의 그 강력한 양상들은 한 순간 나의 의식을 텅 비워놓곤 한다. 그렇기에 내게 시 감각의 극대화는 그에 대한 대응과 반영의 한 방편으로서 간주된다. 한편 사진은 그 존재론적 특성상 프레임 안에 담긴 것들을 결국 지시적으로 고정해버리고 만다.
그러나 그 즉시 모호함도 복합적으로 증폭되기 시작한다. 그렇기에 풍경으로서의 신체 담기를 사진으로 수행코자 할 때, 결국 나는 내 의식이 그런 역설의 틈새사이로 놓이게 됨을 피하기 어렵다. 쉽진 않겠지만, 나는 사진에 얽힌 그런 미묘한 국면들까지도 작업에 반영해볼 심산이다.
압구정동의 '집'에 관한 풍경작업(2001)은 나의 개인적인 경험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러나 1990년 초 그 곳에 위치한 친구 집에 잠시 머무르지 않았더라도 이미 '압구정동'은 '소비사회와 이미지 문화'의 이정표로서 한 때 화두의 중심에 섰던 상징적인 場이다.
그렇다면 이미 그 곳은 각 종 의미 망들이 충분하게 구성되어 있는 풍경인 셈이다. 그런 면에서 그 곳을 이미지로 다시 들추는 일이 어쩌면 진부할지 모른다. 그러나 도시풍경의 마력은 그 소멸 생성의 속도와 폭이 다른 어떤 풍경보다도 빠르고 역동적이며 광범위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계급, 소유, 투자, 생산성 등등의 합리적 조직화'라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치열하게 재단되고 있음을 인정한다면, 그리고 현재 압구정동의 주택가 곳곳에 침투하여 안락함의 물질적 기표를 거세하고 있는 소비문화의 매력적인 기호와 상징들-이미지, 색채, 오브제, 도상, 텍스트 등등-이 향후 어떤 변모로의 중간지점에 관한 강한 암시를 발산하고 있음을 감안한다면, 설령 '집'의 양상으로 작업범위를 좁히더라도 그 기록의 의미와 가치를 녹녹치 않게 부여받을 수 있지 않나 싶다. 어쨌든 이 시각에도 그 곳은 지속적으로 꿈틀댄다. 그런 면에서 문화의 지표로의 '집'작업이 신체풍경작업과는 달리 나의 시각을 객관화시켜볼 수 있는 풍경의 영역임은 분명한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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