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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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abel  [homepage]님께서 남기신 글 (2003-08-20 13:51:57, Hit : 1052)
[펌] Fred Wilson 이야기



http://www.moma.org/exhibitions/1999/wilson/index.html
시간 관게로, 프레드 윌슨에 관한 별 다른 웹페이지를 찾지 못했다.      전시 한번 못보고 작가에 대한 호감이 생기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취향인질 뼈져리게 느껴본 바이지만, 아래 글에 있는 그의 간단한 소개만으로도 범상찮은 인물임은....틀림없어 보인다.      아무리 미디어가 왜곡의 첨병이라지만, 어쨌든 그것들의 목표는 정보전달이니까.       머.......아니면 어쩔 수 없고..^^
사회적 발언을 강하게 품고 있는 작업들에 대한 내 생각이 제대로 정리된 것은 없지만, 아마도.      지금과 같은 사회환경에서, 사회적 발언 이외의 어떤 것이 사람들에게 흥미를 유발할 수 있을까란...... 의구심도 있다.      울거나 화내지 않으면, 거개의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더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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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베니스비엔날레 미국관 작가로 참여하여 많은 논의를 불러일으킨 프레드 윌슨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서 인종차별과 시대별 문화와 역사의 재현을 중심 주제로 다양한 작품세계를 펼쳐왔다. 그는 미술관의 관습과 편견, 유대인 대학살, 서구의 식민지 정책 등 다소 무거운 사회, 정치적 이슈들을 매번 문맥을 달리하며 재치있게 풀어나간다. 1990년대 문화다원주의 시대를 거쳐 오늘날 글로벌리즘 시대에 이르기까지 프레드 윌슨은 전세계 주류 미술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가임에 틀림없다. 베니스비엔날레와 대규모 개인 순회전을 맞아 프레드 윌슨의 예술세계를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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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드 윌슨은 뛰어난 이야기꾼이다. 이번 베니스비엔날레 미국관 작가이자 미국 미술계의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 중 한 사람인 그는 대학과 미술관을 무대로 다수의 강의를 열어 왔다. 윌슨에 관한 가장 유명한 일화 중 하나는 1991년에 선보인 그의 작품 〈통제된 관점(Guarded View)〉에 관한 것으로, 이는 아마도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이 작품은 머리 부분이 없는 4개의 갈색 마네킹으로 구성되었는데, 이 마네킹들은 각각 뉴욕을 대표하는 네 미술관 -- 휘트니미술관, 메트로폴리탄미술관, MoMA, 유대인박물관 -- 의 경비원 복장을 하고 있다. 어느날 윌슨은 휘트니미술관으로부터 작가가 직접 관객들에게 미술관 소장품에 대해 설명해 줄 것을 부탁받았다. 전시장을 돌며 설명을 하던 도중, 그는 관객들에게 미술관 내의 다른 갤러리에서 잠시 후에 다시 만날 것을 제안하였다. 관객들이 약속 장소로 향하는 동안, 윌슨은 빌려 두었던 경비원 복장을 하고 승강기 주변에 서 있었다. 그의 지시에 따라 정해진 장소에 모인 관객들은 윌슨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고, 마침내 윌슨은 자신임을 알리고 전시 설명을 계속해 나갔다. 이 예술가가 아무리 고명하고 존경받는 위치에 있다 해도, 아프리카계와 카리브계의 혼혈인 그와 대개 유색 인종인 미술관 경비원들이 똑같은 옷을 입었을 때는 미국 미술관 관객 대다수인 백인 중산층은 그들간에 별 차이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예술가와 경비원들이 공유한 -- 아니, 단지 백색이 아니라는 점에서만 비슷한 -- 피부색은 그들의 직업, 사회적 위치의 차이를 무너뜨리며 무효화해 버린다.

이 에피소드는 윌슨이 그의 작품 활동을 통해 지속적으로 탐구해 온 문제가 무엇인지 여실히 보여 주는 좋은 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유색 ‘원주민(native)’에게 전통 복장을 입혀 마네킹으로 전시하고, 인종과 사회적 위치에 따라 노동 계급을 나누는 미술관을 비롯한 문화산업 기관들의 인종에 대한 지식과 편견, 선입관의 생산에 관한 것이다. 인종 문제는 미국 사회에서 가장 깊숙하고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트라우마(Trauma)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은 노예제도가 폐지된 지 150년의 세월이 지나고, 시민권 운동(Civil Rights Movement)이 시작된 지 30년 이상이 지난 지금까지,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난제, 혹은 아포리아인 인종 문제의 망령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뮤지엄(Museum)이라 불리는 기관들은, 그것이 미술관이건 역사박물관이건 간에 전시, 컬렉션, 교육 프로그램과 일상 업무에 이르는 많은 부분에서 끈질기고 극단적인 형태의 인종 차별을 용인하는 모순을 드러낸다. 이들은 인종 차별을 강화하기 위해 그것을 강요하기보다 아예 차별의 존재 자체를 무시하는 방법을 통해 그러한 모순을 심화한다. 현재 순회 전시중인 〈프레드 윌슨: 오브제와 설치, 1979∼2000(Fred Wilson: Objects and Installations, 1979∼2000)전〉을 기획한 큐레이터 모리스 버거(Maurice Berger)는 윌슨의 작업에 대해, “프레드 윌슨에게 미술관은 그의 작업을 위한 매개물이며, 인종은 작업의 중심 주제다”고 적절하게 표현하였다.

프레드 윌슨은 1952년 뉴욕에서 태어나 도시 곳곳에 산재한 많은 미술관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며 자랐다. 그는 MoMA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을 자주 드나들며 자연사박물관을 비롯한 많은 미술관, 박물관 등의 교육 프로그램을 위해 일하기도 하였다. 작가로서뿐만 아니라, 미술관의 다양한 기능에 관여하게 되면서 그는 미술관·박물관이라고 하는 특정 문화기관이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를 속속들이 알게 되었다. 이와 같은 정황으로 미루어볼 때, 그가 큐레이터같은 작가라는 사실은 전혀 놀라운 것이 아니다. 어떻게 작가가 큐레이터가 될 수 있을까? 아마도 그 대답은 1992년 Maryland Historical Society에서 선보인 윌슨의 중요한 설치작품 〈미술관 채굴하기(Mining the Museum)〉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의 도심 빈민가 부근에 위치한 이 박물관은 윌슨을 초대하면서, 그들이 소장하고 있는 지역의 역사적 유물을 자유롭게 이용해 새로운 전시실을 꾸며 줄 것을 의뢰하였다. 이에 윌슨은 미술관 안에 뿌리박혀 있는 인종 차별주의적인 의도를 드러냈는데, 그 결과는 유머러스하면서도 미묘하게 불안하고 부조화한 것이었다. 전시장에 들어선 관객들은 윌슨이 새로이 가져다 놓은 물건들로 시선을 돌리게 되었다. 작가는 수장고에서 발견한 한번도 전시된 적이 없는 물건들을 기존에 전시된 고귀하고 품격 있는 물건들 옆에 배치했다. 예를 들어 그는 20세기 초에 생겨나 지금까지 존재하는 백인우월집단인 KKK(Ku Klux Klan)단의 흰색 후드 모자를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유모차(Baby Carriage, c.1908)〉 속에 넣어 두었고, 역시 한번도 전시된 적이 없는 노예들에게 채웠던 족쇄는 우아한 은접시, 커피 주전자, 차주전자 등과 함께 〈금속공예품(Metalwork 1793-1880)이란 제목이 붙은 진열장 속에서 같이 전시되었다. 이 중 가장 극적인 것은 도망치려 했거나 주인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던 노예들을 채찍질할 때 쓰였던 기둥을 각기 다른 시대적 스타일의 의자들 앞에 배치한 〈가구 제작(Cabinet making 1820-1960)〉이다. 이 작품의 전체적인 모습은 잔학한 폭력의 현장을 연상시켰다.

〈미술관 채굴하기〉의 반향은 널리 퍼져 나갔다. 이 작품은 미국 현대미술을 다루는 많은 교과서에 소개되었고, 윌슨에게는 박물관들로부터 설치 프로젝트가 물밀듯이 밀려들었다. 시애틀에서부터 마드리드, 샌프란시스코에서 카이로에 이르는, 미국은 물론 해외에서도 초대장이 날아들었다. 맥락의 전환을 좋아하고 또 민감한 윌슨은 미국 역사와 인종 문제에서 비롯된 관계에서 떠나 더욱 확장된 주제들을 다루어 왔다. 예를 들면 1992년 폴란드의 바르샤바에서 그는 당시 그 지역의 매우 절박한 문제였던 동유럽 사회주의의 붕괴와 그것을 대체하는 자본주의에 대해 다루었다. 그는 Ujazdowski Castle의 Center for Contemporary Art에서, 다섯 미술관에서 빌린 작품들과 일상생활에서 수집한 물건들을 결합시켜 〈불가능한 미술관(Museum Impossible)〉을 선보였다. 1999년에는 ‘공포(horror)’와 ‘희망(hope)’이란 두 단어에서 따온 〈H RR R and H PE〉라는 제목의 전시를 열었는데, 그는 이 전시를 위해 뉴욕 사진박물관에 보관된 사진들 중 유대인 대학살(holocaust)과 관련된 유대인의 이산을 다룬 사진 몇 장을 골라 이미지의 일부만을 아주 조금 보이도록 전시하였다. 이 작품은, 그의 회고전 카탈로그에도 나와 있듯이 “기록보관소(Archive)에 관한 은유, 정보의 선택적 보급, 그리고 구체적이고도 무의식적인 기억의 습성”을 표현하고 있다. 윌슨의 전 작업을 관통하는 공통된 주제가 있다면, 그것은 재현의 문제와 그것의 실패, 그러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지속해야 하는 우리의 의무일 것이다.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옮겨 다니며, 일시적으로 문맥을 바꾸는 프로젝트들을 진행하는 동시에, 윌슨은 비슷한 일련의 질문을 던지는 오브제 작품들도 함께 제작해 왔다. 1995년 작품인 〈나의 것/당신의 것(Mine/Yours)〉은 색을 입힌 작은 도자기 인물상으로 구성되었는데, 이 인형들은 편견 섞인 흑인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뚱뚱하고 헌신적인 유모, 비굴하면서도 순종적인 집사, 언제나 유쾌한 살찐 요리사, 수박을 먹는 더러운 옷차림의 아이 모습을 한 이 인형들에게는 〈당신의 것(Yours)〉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한편 그 옆에는 〈나의 것(Mine)〉이란 이름붙여진 오래된 사진 한 장이 붙어 있는데, 그 속에는 가난에 찌든 한 흑인 가족의 모습이 들어 있다. 생활 속에서 찾은 물건들과 사진을 두 단어의 제목으로 연결한 이 단순한 결합은 관객들로 하여금 지난 역사로부터 상속받은 짐들에 의해 자기정체성이 비자의적으로 결정되어 버린 한 개인이 자신의 가족과 뿌리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러한 개인적인 이해가 외부의 사회적·문화적 영향에 의해 어떠한 식으로 그저 몇몇 이미지와 카테고리, 그리고 라벨로 단순화되어 버리는가 하는 사실을 반추하게 한다.
불가능한 미술관, 전통적 미술관의 재해석



윌슨의 예술은 대부분 한 사회의 역사와 연관되지만, 미술사적으로 구체적인 언급을 하기도 한다. 20세기 서양미술사에서 ‘재현(Represen-tation)’이 가장 문제화한 영역은 ‘원시주의(Pri-mitivism)’라고 할 수 있다. 1985년 뉴욕 MoMA에서 열린 획기적인 전시, 〈Primitivism and 20th Century Art: Affinity of the Tribal and the Modern〉이 보여 주려 시도했듯이, 서구 아방가르드가 ‘타자’의 문화와 맺은 다양하고 복잡한 관계는 역사적 왜곡, 정치적 폭력, 그리고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욕망으로 점철된 것이었다. 실제로 야수파, 초현실주의, 추상표현주의를 아우르며 고갱, 피카소, 브랑쿠지, 헨리 무어에 이르는 서구의 많은 거장에게, 원시미술은 한때 전염병처럼 퍼졌던 중요한 상상력의 원천이었다. 이 난해한 미학적 쟁점에 대한 윌슨의 반응은 1990년 작품 〈식민지 시대 수집품(Colo-nial Collection)〉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영국박물관(The British Museum)에서 볼 수 있음직한 전시장을 모방하여, 그는 긴 진열장 안에 아프리카를 점령하는 유럽 군대의 모습이 묘사된 18세기 혹은 19세기 스타일의 판화 두 장, 인간의 해골과 말라리아 모기의 샘플을 나란히 배치하였다. 진열장 위 전시장 벽에는 눈 부분을 영국 국기와 프랑스 국기로 가린 6개의 ‘부족(tribal)’ 마스크를 걸어 놓았다. 모더니즘은 원시주의를 이야기할 때 서구 미학의 관심사와 관련된 부분만을 골라 논의에 포함시키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윌슨은 우리에게 서구의 식민정책은 자신의 땅을 정복당하고 침묵을 강요받아야 했던 원주민들에게 참기 힘든 잔학함의 연속이었음을 상기시킨다.

최근 캘리포니아 대학의 버클리미술관에서 열릴 프로젝트를 준비하던 윌슨은 그러한 잔학성에 대해 생각하였다. 〈여파(Aftermath)〉(2002-2003)라는 제목의 작품에서 그는 낮은 연단 위에 부서지고 깨진 물건들을 늘어놓았다. 버클리대 인류박물관의 드넓은 창고 속에 묻혀 영원히 망각될 뻔했던 이 불완전한 파편들은 통상적으로 ‘전시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진홍색 연단 위에 놓인 오브제들은 두 면에 각각 다른 날짜가 적힌 세울 수 있는 이름표와 함께 전시되었다. 이 설치는 파헤쳐진 고대 유적지에 대한 회상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비극적인 전쟁이 휩쓸고 간 파괴의 현장을 은유화한 것이다. 비참한 몰골의 한 맺힌 이 오래된 물건 가운데에는 이름표의 양면에 똑같이 2001년이란 날짜가 새겨진 휴대폰이 놓여 있었다. 뉴욕 맨해튼에 거주하는 작가는 최첨단의 산물인 휴대폰을 통해, 세계무역센터가 무너졌던 9월 11일 이후의 상황을 생각하였다. 사건이 일어난 이후, 며칠 동안 주인 없는 휴대폰들이 거리를 뒹굴었으며, 이미 죽은 이들의 생사를 확인하려는 친구와 가족들로부터 걸려온 전화벨 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댔다고 그는 회상한다.

프레드 윌슨에게 역사란 정지되고 박물관 안에 박제된 죽은 어떤 것이 아니다. 역사란 어떤 사건이 일어난 이후의 상황, 여파적 측면에서 고려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의미할 수 없다. 미국의 미술사가들은 윌슨의 작업이 한스 하케의 전통을 이은 ‘제도 비판(Institutional Critique)’의 하나라고 설명하며, 1960년대 개념미술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미국의 인종적 관계와 문화적 의미에 대한 재구성, 재정의가 시작되던 중요한 시점인 1980년대와 1990년대에 활발한 활동을 벌인 윌슨은 문화다원주의(Multiculturalism) 예술의 핵심 주자로 인식되었다. 윌슨은 누구보다 먼저 자신이 수많은 역사의 여파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인정할 것이다. 그 여파란 미국의 인종 문제들의 트라우마, 9·11 사건, 자기 자신의 혼란, 분노와 결의, 그리고 그가 현대미술에서 차지하는 위상 등을 말한다.

프레드 윌슨이 현재 미국 미술계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그가 2003년 베니스비엔날레에서 미국을 대표하는 공식 작가로 선정된 것으로 그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다. 지난 1월 캘리포니아주 버클리에서 진행된 다음의 인터뷰에서 윌슨과 필자는 지난날 그의 작업의 개념적 배경이었던 문화다원주의의 어느 위치에 그가 서 있었는지, 그리고 앞으로 베니스에서 보여 줄 그의 작업에 대해 이야기하였다.(이 글에서는 작업 계획에 관한 내용은 생략하고 베니스비엔날레 개막 이후 전시 내용으로 대신한다.)

글로벌리즘 시대 유색인종 예술가의 정체성



정도련(이하 정)_ 인터뷰를 시작하면서, 당신과 당신의 작업은 어떤 역사적·미술사적 범주에 속하는지 묻고 싶다. 당신은 활동을 시작했던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반의 미술계에 대한 자신의 시각을 여러 차례 피력한 바 있다. 그것은 특히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서 자신이 어떻게 정형화했는가에 대한, 혹은 흑인은 예술가가 될 수 없거나, 예술가는 흑인일 수 없다는 식으로 예술가로서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태도에 관한 것이었다. 당신은 그로부터 10년 후인 1993년 〈문화다원주의(Multiculturalism)전〉이라고 불린 휘트니비엔날레에 참여하였고, 다음해 같은 미술관에서 열린 〈흑인 남성(Black Male)전〉에도 참가하였는데, 이 두 전시는 당시 매우 활발하게 쟁점화되었으며 지금까지도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또 10년의 세월이 흘러 문화다원주의는 더 큰 범주의 문화에 흡수, 용해되었고 혹자는 문화다원주의는 사실상 종말을 선고받았으며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고도 말한다. 오늘날 미국인이 아닌 유색 예술가 중 젊은 세대들은 스스로 ‘후기 정체성 혹은 탈정체성(post-identity) 세대’라고 말한다. 이러한 역사적 변화를 어떻게 보는가? 발전인가, 퇴보인가?

프레드 윌슨(이하 FW)_ 오늘날 유색 인종 예술가들이 급진적인 정체성 문제에 관심이 없다고 보지는 않는다. 사실 그들은 여전히 정체성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이 문제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모르는 것 같다. ‘post-identity’ 문제가 당신이 이야기하는 문화적, 미술사적 흐름에서 형성된 변화 중 하나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나는 작업을 통해 또 미술계와의 관계를 통해 많은 문화적, 예술적, 그리고 이데올로기적 변화에 참여해 왔다. 개인적으로 정체성에 관한 논의는 다음 단계로 접어들기 바란다. 나는 내 작품 〈식민지 시대 수집품〉(1990)에서와 같이 이전 작업을 통해 이룬 것들을 지금 다시 반복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내 작업의 많은 부분은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에 대한 반응이다. 그리고 나는 끊임없이 변하는 성격의 소유자다. 정체성에 대한 내 관심은 그것의 복잡다단한 모습을 미국 역사를 통해 바라보는 데 있다. 그러나 내 작업은 문화의 역사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그것을 재현(represen-tation)하는 쪽에 더 가깝다. 하지만 내가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모습을 재현하는 데 어떠한 권위를 가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진정한 의미의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아니기 때문에, 내 고유 정체성은 그것에 의해 제한될 수도 없다. 〈미술관 채굴하기전〉(1992)의 경우에도 모든 미국인이 이미 노예 문제에 대해 알고 있으므로 나는 사람들을 교육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당신도 잘 알다시피, 과거 수십 년 동안 미국은 주입된 역사 읽기 방식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시각으로 역사를 해석하는 데 관심을 기울여 왔다. 내가 나서서 직접 그 일을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정_ 많은 미술관과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당신이 직면했던 비판은 어떤 것들이었는가? 너무 설교적이라든지, 지나치게 주관적으로 수정된 관점이라는 비판은 없었는가? 인종차별을 다룬 당신의 작업에 대해 부정적인 비판은 없었는가? 만약 그런 적이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대응했나?

FW_ 인종 차별적 비판에 대한 문제는 너무도 명백하기 때문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 지금 당면한 유일한 문제는 내가 속한 문화의 울타리 밖에 있을 때 상황이다. 내가 만든 유대인, 폴란드인, 이집트인 프로젝트는 사람들에게 의혹의 대상이 되었다. (필자의 설명: 윌슨은 제4회 카이로 국제비엔날레의 〈Re:Claiming Egypt: Fred Wilson〉전(1992)과 뉴욕 국제사진센터에서 있었던 〈H RR R and H PE〉전(1999), 폴란드 바르샤바지역의 Center for Contemporary Art에서 열린 〈Muzeum Impossible〉전(1992)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일단 대화를 통해 내 프로젝트가 긍정적인 신념에서 나온 것임을 사람들이 알게 되면서 의혹도 사라졌다.

다른 지역의 사람들이 이방인인 나 자신을 어떻게 보는가에 대한 통찰은 내 작업에서 빠져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다. 특히 폴란드와 이집트에 머물던 1992년, 그곳 사람들이 나에게 보여 준 반응과 의심은 미국에 대한 그들의 시각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유대인 대학살 이미지를 가지고 작업할 때 만난 유대인들은 나에 대해 늘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사람들은 언제나 내가 흑인의 역사에 대해 실제로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단정한다. 그러나 나는 그 분야의 전문가도 아니고 내가 알고 있는 것 이상을 포장하여 작업하지 않는다.

정_ 당신은 10년 넘게 집중적으로 자료수집관(archive)이나 특히 미술관 같은 문화기관과 함께 일해 왔다. 이제 그런 작업은 충분히 했다고 생각하는가?

FW_ 나는 미술관과 함께 일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들은 내가 어떤 방향으로 작업을 하든 나를 내버려둔다. 미국은 언제나 사람들을 정의하고 싶어하고, 내 작업은 그들의 사회적, 문화적 선입견을 지속적으로 부정한다. 나는 이미 그러한 분야의 작업을 많이 해왔기 때문에 이제 좀더 개인적인 것, 즉 내가 느끼는 두려움이나 내 가족 등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최근 나는 사람이 들어가 살 수 있을 만큼 커다란 항아리를 만들고 있는데, 그 안에는 침대, TV, 냉장고 등이 모두 갖추어져 있다. 내가 어릴 적 아프리카 서부에서 공부할 당시 사람들은 진흙으로 만든 집, 다시 말해 흙으로 만든 항아리 안에서 살았다. 여자들이 무릎 위에 올려놓고 항아리를 만들 때, 그것은 마치 여자의 자궁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쌍둥이 빌딩이 무너진 9월 11일 이후, 나는 세계 곳곳에서 항아리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나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큰 항아리에 대해 조사하였고, 그것이 어떻게 장례의식에 쓰이는지 등에 대해 알아보았다.

정_ 다시 정체성의 정치와 문화다원주의 문제로 돌아가서, 문화다원주의에서 현재 미술계의 캐치프레이즈가 되어 버린 글로벌리즘을 향한 변화에 대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다. 당신은, 거듭 말하지만, 문화다원주의의 가장 최상의 (혹은 최악의) 전시로 소개되며 논쟁이 분분했던 1993년 휘트니비엔날레 전시에 참가했고, 올해에는 글로벌리즘에 대한 미술계의 논의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적 패러다임으로 받아들여지는 베니스비엔날레에서 미국을 대표하고 있다. 당신의 작업과 경력 측면에서 이러한 추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FW_ 이른바 1990년대 문화다원주의 시대 이전에, 사람들은 백인이 아닌 유색 인종 예술가들에 대해 별로 알고 싶어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 유색 예술가들에게 경멸적인 언사를 사용하였으며, 가장 자주 들을 수 있었던 비판은 “그들은 아직 예술가가 될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관점에서 문화다원주의는 긍정적으로 작용하였는데, 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그러한 시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닫게 만들었다. 한번은 〈미술 세계(Art World)〉라는 제목의 작품을 만들었는데, 나는 조각그림 맞추기 세계지도를 사서 유럽과 미국 부분만 남겨두었다.

최근의 글로벌리즘이 미술계에 끼친 긍정적인 효과를 이야기하자면, 아시아 출신의 아시아 작가들이나 아시아계 미국인 작가들이 그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서구에서 거둔 그들의 성공을 통해 드러나는 사실은 급진적인 문화적 정체성이 이 작가들에게 더 이상 장애 요소가 아니며, 오히려 미술시장에서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매력적인 조건이란 것이다. 왜 전세계적으로 비엔날레가 양산되고 있는가? 그것은 국가들이 그러한 행사가 돈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며, 비엔날레와 같은 행사는 국가 경제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 또한 비엔날레가 열리는 국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각에도 큰 변화가 생긴다. 나라들은 자국의 작가가 비엔날레에 참가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 때문에, 이는 국가간 외교관계에도 영향을 끼치며, 나아가 이러한 관계는 더 큰 범주의 국제관계들까지 정당화한다. 또한 이러한 국제 비엔날레를 통해 주최국들은 세계적인 지명도를 갖게 되는데, 이러한 효과는 미스 유니버스 대회가 갖는 영향력과 매우 흡사하다.

비엔날레에 참가하거나 그것을 주최하는 일은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다른 국가들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나는 당장이라도 전쟁이 일어날 것만 같은 이 상황에서, 앞서 말한 그런 부분을 깊이 헤아리고 있다. (윌슨은 미국의 이라크 공습을 언급하고 있는데, 인터뷰 당시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이었다.)

나는 베니스비엔날레에서 작가들이 그들의 나라를 대표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1992년 카이로비엔날레에 참가했을 때는 상황이 전혀 달랐다. 거기서 나는 미국인임을 무척 의식하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모든 비엔날레가 다 같지는 않다. 베니스비엔날레가 국제관과 더불어 아직도 국가관을 고수하고 있다는 점에서, 베니스비엔날레의 방식은 구시대적이다.

다시 당신의 질문으로 돌아가 답을 하겠다. 미국의 문화다원주의는 다양하고 다른 어떤 것들에 관한 것이었다.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오늘날 우리가 미국 밖의 세상에 대해 알게 된 사실을 인식하고 감사하게 하였다. 나의 초기 작품들에서 명백하게 드러나듯이, 문화다원주의 시대 이전에 아프리카계 미국인 작가들은 그들이 속한 집단 외에는 아무에게도 말 할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넓은 국제적인 커뮤니티 내에서 자신의 생각이나 의견을 말할 수 있다. 예전에 우리는 국제 전시에 참가할 수조차 없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1993년 프로젝트 때문에 호주에 머물 당시 나는 브리즈번(Brisbane)의 퀸즐랜드미술관에서 열린 첫 번째 아시안-퍼시픽 트리엔날레를 볼 수 있었다. 거기서 나는 전혀 들어보지 못한 작가들의 작품들을 보았고, 그때 보았던 사람들은 모두 5년 후 뉴욕에서 자신의 작품을 소개하게 됐다. 그리고 미국인 컬렉터들은 이 아시아 작가들의 작품을 사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모습이 반영된 작품을 사고 싶어한다. 이전에 우리는 아시아 미술에 대해 몰랐기 때문에 그들의 작품을 전시하거나 사지 않았다. 문화다원주의 이후 일어난 특별한 변화는 다른 지역이나 문화로부터 온 작품을 구입하는 행위를 통해 자신이 뭔가 자유롭고 진보주의적이며, 국제적인 사람임을 의미하게 된 것이다. 그 컬렉터들에게는 긍정적인 표상이었다. 그들이 비록 같은 제3세계 지역 이민자인 하녀에게 집을 청소시킬지라도.(웃음) 예술적, 문화적인 이국의 정서는 언제나 경제적 글로벌리즘과 궤를 같이한다.

하지만 작가로서 나에게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아시아나 다른 제3세계 작가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통로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더 많은 지구상의 사람들이 예술가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정_ 베니스 비엔날레 미국관에 선보일 작업이 기대된다. 인터뷰에 응해 주어 감사드린다.
이방인이 바라 본 베니스의 르네상스와 현대



지난 6월 15일 시작된 제50회 베니스비엔날레 미국관에 선보인 프레드 윌슨의 전시 제목은 베니스의 무어인(모로코계 흑인 회교도)에 관한 셰익스피어의 희곡 《오델로》에서 인용한 문구인 〈나에 대해 있는 그대로 말해라(Speak of Me as I Am)〉였다. 윌슨은 1930년에 지어진 신고전주의 팔라디오풍의 미국관을 르네상스 시대의 베니스와 오늘날을 잇는 소규모 역사박물관으로 바꾸어 놓았다. 미국관 내부의 4개의 섹션은 각각 독립적인 전시공간처럼 연출되었다. 그러나 그 4개의 공간은 결국 하나의 큰 주제로 귀결된다.

우측 날개의 두 섹션에는 티에폴로(Tiepolo)의 작품과 딜러들에게 대여한 베니스 출신의 여러 장인의 작품이 전시되었다. 이 고전 회화 속에는 역사적으로 충실하게 재현되었거나, 매우 이질적이고 이국적인 요소로 반영된 고대 유럽의 흑인 모습이 함께 나타나고 있다. 회화작품 주위에는 14∼16세기 베니스의 갤러리아 델라 아카데미아(Galleria della Accademia)의 유명한 회화작품에 등장하는 흑인 인물상의 모습을 한 마네킹들이 놓여 있다. 좌측 날개에는 작가가 베니스에서 직접 수집한 키치적인 기념품들과 베니스 거리에서 만난 흑인의 모습을 찍은 다큐멘터리 사진 작업이 함께 설치되어 있다. 흑인에 대한 편견과 그들의 실제 모습을 병렬해 배치함으로써 ‘재현’의 모순과 양면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어진 다른 방에는 각각 오델로에 관한 다른 버전의 공연 및 영화를 보여 주는 4개의 TV모니터가 설치되어 있다. 그중 하나는 흑인배우가 오델로 역할을 하는 최근 영화인 반면, 나머지는 백인 배우가 얼굴에 검은 칠을 하고 각기 다른 모습으로 베르디의 오페라 〈오델로〉를 공연을 하는 모습이다. 중앙 홀에는 마치 과거와 현재를 대변하는 2개의 다른 날개를 엮어 주듯이 작가가 디자인하고 베니스의 장인들이 제작한 새까만 샹들리에 하나가 걸려 있다. 한편 미국관 외부 입구 측면에는 이오니아식 기둥 2개에 현관을 받치는 형상을 한 흑인이 그려진 배너가 덮여 있고, 입구 한쪽에는 작가가 베니스의 거리에서 데리고 온 흑인 노점상인이 작가 자신이 디자인한 구치, 루이비통 같은 가짜 명품 핸드백을 팔고 있다.

베니스비엔날레에서 미국을 대표하는 것에는 적어도 두 가지 난점이 존재한다. 그중 하나는 미국이 세계 미술계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감안할 때, 미국관에 대한 관심과 기대는 지나치게 큰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재스퍼 존스, 빌 비올라, 제니 홀처, 루이스 브르주아, 로버트 고버 등 최근에 미국관에 참여한 작가 리스트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둘째로, 국가관은 하나의 미술관이 아니다. 비록 미술관과 진배없는 규모의 외관을 하고 있지만 미국관은 2년에 한 번씩 매번 가장 ‘대표적인’ 현대미술로 완전히 새로이 탄생되어야 하는 곳이다. 윌슨은 이곳에서 기존 미술관을 비판하거나 재창조하는 대신 흑인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보여져 왔는지, 또 현재 베니스라는 지역적 문화권 안에서 흑인이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하나의 미술관을 만들어 냈다.

아마도 베니스비엔날레 역사상 미국작가가 (혹은 다른 그 어떤 작가라도) 베니스라는 지역의 특수성에 대해 그렇게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작업한 것은 윌슨이 처음일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윌슨의 설치작업은 지나치게 의욕적으로 보이며, 그래서 시각적인 또는 물리적인 일관성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300명 이상의 작가가 참여한 사상 최대 행사임에도 불구하고 스펙터클이 부족했던 이번 비엔날레의 전체적인 분위기와는 대조적으로, 프레드 윌슨은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인 뚜렷한 통찰력을 증명하듯이 에어컨 바람만큼이나 쿨한 미국관을 만들어 냈다. ■


정도련 | 독립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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