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욱 :
상식과 원칙을 지키려는 갑각류와 목이 쉬게 떠들고도 본전을 못 건지는 장돌뱅이 맞습니다. 하지만 이 것은 '선택'의 문제일 뿐입니다.
나는 나만 잘 났다고 떠드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은 어떤 선택을 하고 있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어렵고도 혼돈스런 시점에서 선택의 여지는 점점 줄어들고 있는데, 마치 무한의 선택이 있는 것처럼 얘기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새된 목소리를 한 번 더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한국의 미술평론가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무엇입니까? 비평이 미술을 왜곡의 거울 앞에 서게 하고 있다면 그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이고, 그들 앞에 놓인 선택은 무엇이어야 하겠습니까?
비평을 바로 세워야 하는 일에 그/그녀가 힘을 보태지 않는다면 지탄을 받아 마땅합니다. 우리는 그/그녀가 공개적으로 미술계에 보탬이 되길 거부하는 일마저 당연하다는 듯 눈감아 주고 있습니다. 이런 태도는 분명히 문제입니다. 자기 전공 분야를 열심히 파고드는 일에만 몰두하다가 마치 그에 대한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이 각종 심사다 자문이다 하는 일에(만) 나서는 관행은 옳지 않습니다. 이 것은 -나서기 싫어하는 자신이-아무 것도 안한 게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옳지 않은 선택을 이미 나서서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근본적으로 자신의 개성이 어디 나서길 원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심사다 자문이다 하는 일에도 나서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국내 여건상 이런 사람은 현실적으로 교수직을 수행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다만, 공부조차 하지 않으면서 속세의 권력에나 몰두하는 일부 미술비평가들에 비하면 도덕적으로 우월해 보이지만. 뻔한 거짓말입니다.
물론 이런 얘기를 할 때 주장만 할 게 아니라,-점수를 따가면서- 효과를 염두에 두면서 말해야겠지만 나의 인품은 거칠고 성격은 지나치게 급한 편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급한 마음이 사라지고 나면 나는 한없이 뒤로 숨어버리는 -또 다른 의미의-갑각류의 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나를 숨겨버리기 전에 격하게 뱉는 말들에 대해 나는 모종의 신뢰를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두 가지입니다. 격한 나와 숨는 나. 내가 이런 갑각류의 삶을 살고 있는 건, 지금까지의 내 삶의 조건이 그러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조건 속에서 우리는 항상 '선택'을 해야만 하고, 또한 자신도 모르게 하고 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미덕이라면 이 때에 소리를 지르는 일입니다.
박불똥 :
"내가 나를 숨겨버리기 전에 격하게 뱉는 말들에 대해 나는 모종의 신뢰를 가지고 있다"
최진욱 선생 글의 이 대목을 읽다가 문득, 찰리 채플린 영화 <시티 라이트>에 나오는 부자(富者)-취중이라야 진실을 발설하고 각성 중엔 '위증'하는 주정뱅이 사내를 떠올렸습니다. 이는 물론 최 선생이 평온시 못하던 말을 술기운을 빌어 토로한다거나 연단에 올랐을 때와 내려섰을 때 표정이 이중적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한 개체의 감성표출을 억압하는 어떤 힘과 그것을 벗어 던지게 하는 또 다른 어떤 힘을 나란히 연상한 것일 따름이지요.
그리하여 또 <양철 북>의 주인공 오스카도 생각났습니다. 선택해야할 때 선택하지 않음으로써 결국 '행동'하는 것-행동해야할 때 행동하지 않음으로써 결국 '선택'하는 것-필시 반동입니다. 그 반동적/보신적 작태가 허다한 미술판을 향해 '최진욱'이 갈겨대는 글 '쏘'기-"소리지르기"는 일종의 호신술인 셈이지요. 호신음이되 '최진욱 개인의 자존'을 넘어, 상식과 원칙의 위기상황을 일깨우는 공의의 '호루라기소리'이기도 하다는 점, 진작부터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경적'은 기본적으로 '소음'입니다. 적절히 조절할 필요가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호루라기를 불 때 흔히 잘못 들어간 '침'은 수시로 뿌리쳐내야 명랑한 소리가 나는 법입니다.
그런데, 대담 일정이 며칠 남지 않았으므로 각도를 틀어서 좀 색다른 '전진'을 꾀해보면 어떨는지요?
최진욱 :
공의를 위한 호르라기불기라니 난장이의 것일지언정 기분이 썩 나쁘진 않군요.
대담의 각도를 트는 게 나로서는 여의치 않을 것 같으니 조이한씨가 한 말씀해주시죠.
조이한 :
제가 인터넷 상에서 글을 쓰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습니다. 포럼a 에서 월간미술 구독거부 논쟁이 있었을 때 그냥 가볍게 쓰기 시작한 게 지금까지 이어졌습니다. 포럼a를 보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 직전인데 그때부터 최진욱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서 처음엔 좀 불편했던 게 사실입니다. 워낙 강항 톤으로 말씀하시니까요. 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최진욱선생님의 글쓰기를 존중합니다. 자기 의견 말하기를 꺼려하거나 두려워하기, 혹은 자기 의견이란 게 있기나 한 걸까 의문스러운 미술계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바꿔보고자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읽히기 때문입니다.
미술계 내부에서의 최진욱 선생님의 역할이 얼만큼 큰지에 대해 관심 없는 저로서는 최선생님의 "글쏘기"에 신선함마저 느낍니다. 예를 들면 얼마 전에 쓰신 포럼a 칼럼에서 "나는 그림에 대해 모든 걸 알고, 그렇기 때문에 내 눈에 걸리는 모든 그림을 일등서부터 꼴등까지 석차를 매길 수 있다."라는 대목은 너무나 신선해서 한껏 웃기까지 했습니다(비웃음이 절대로 아님). 자기 판단이 나중에 틀려서 쪽팔림 당할까봐 좋다/싫다 라는 판단도 얼버무리는 전반적인 분위기에서 이렇게 베짱좋게 말할 수 있음이 기분 좋았던 거지요.
글쓰는 스타일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고종석이나 손석춘처럼 쿨하게 쓰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진중권처럼 패러디와 풍자를 섞어 날카롭게 직격탄을 날리는 글을 쓰는 사람도 있습니다. 고종석이나 손석춘은 아무리 비판적인 내용을 담은 글일지라도 그 날카로움이 상대를 자극시키지 않습니다. 쿨하고 부드럽고 살갑게 다가오지요. 그런 사람들은 욕을 별로 먹지 않습니다. 반면 진중권처럼 글을 쓰면 많은 사람들을 적으로 만듭니다. 더구나 그 비판의 칼날이 적을 향할 때는 열광을 받지만 자기 둥지를 향할 때는 엄청난 반발이 일어나지요. 하지만 중요한 것은 비판의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글 쓰는 스타일이야 개성이지요. 사람들에게 모두 같은 스타일의 글을 요구할 순 없다고 생각합니다.
최진욱 선생님의 강한 주장이 담긴 글은 일단 "미술에 대해 말하기"의 물꼬를 트는 작업으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작업이 거기서 멈추지 않고 대화와 토론의 장으로 넓어지려면 박불똥 선생님께서 지적하신대로 타인의 말에 귀기울이는 자세가 요구되겠지요. 그건 지금까지의 최선생님의 글쓰기가 자기 주장의 강함에 비해 논리적 근거가 약하다는 말도 될 것입니다. 윽박지르거나 고함치기로는 상대를 설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상대가 더 논리적이고 풍부한 근거를 제시한다면 자기 주장을 바꿀 수 있는 자세도 중요하겠지요. 그런 자세는 최선생님이 갖추고 있다고 판단됩니다만...
저는 요즘 좀 다른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미술을 하면서 먹고 살 수 있을까,에 관한 것입니다. 좀 좁히면 미술시장에 대한 관심이지요. 이번에 전시를 하나 기획했는데 후원금만 가지고는 부족해서 작가들의 동의를 얻어 소품판매를 시도했습니다. 그러면서 든 생각인데, 우리는 미술을 감상할 감수성 훈련이 정말로 안되있더라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을 움직이는 미술, 감동을 주는 미술, 그냥 좋은 미술은 뜽금없이 무작정 저절로 생기는 게 아니쟎아요. 제 파트너는 지금껏 유화물감을 딱 한 번 만져봤다고 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미술을 접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입시교육 때문에 미술시간은 자습시간이 되기 일쑤였고 미술사 교육도 외우기식이 전부였지요. 그렇게 길러진 사람들이 무슨 화랑을 갈 것이며 미술관을 찾겠습니까. 더구나 단돈 만원도 미술에 투자하지 않게 되는 겁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가수의 콘서트에 몇 만원에서 몇 십 만원의 돈을 투자하는 사람들, 축구장에 몇 시간씩 줄서가며 들어가 열광하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요. 미술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그런 감성교육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앞으로 노력해서 미술 교육을 제대로 한다면 앞으로 30년, 40년 뒤에나 결실을 맺게 될 겁니다. 지금부터라도 그런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미술시장은 영영 죽어버릴 것이며 작가들은 "작가 정신"하나로 버티다 굶어죽던가 전업을 해야할 겁니다.
선생님들 대화에 어정쩡 끼어서 계속 헛소리만 하고있는 것만 같아서 좀 부담스러웠습니다. 하지만 뭐 대화 주제도 왔다갔다 하고 특별히 정해진 것도 없는 것 같아 그냥 제가 하고 싶은 말을 해봤습니다. 저의 "멋모르고 말 마구하기"에 불쾌하셨다면 그건 전적으로 이 대담 자리를 마련한 박찬경씨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멋모르고 말하는 줄 잘 알고있으면서 이 자리에 불러놓고는 대담자 중 한 사람이 멋모르고 말한다고 다그치면 저더러 어쩌란 말입니까?(지문이 달리지 않은 채로 이 말만 나가면 제가 심각하게 불평하는 것으로 읽히지요? 그게 글의 한계입니다)
최진욱 :
감성교육이 20-30년 후 미술을 살릴 거라는 얘기, 원론적으로는 맞는 말일 겁니다. 어쨌든 지금 학교 현장에서 '감성교육'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가르칠 시간조차 정부가 발표하는 '교육과정'의 차수 가 올라 갈수록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니까요.
그러나 나는 좀 더 시장중심적 사고를 하고자 합니다. 시장에서는 일차적으로 '시장의 질서'란 게 중요합니다. 예술품시장에 아무렇지도 않게 실내장식품들이 섞여 있어서는 안 될 것이고, 같은 예술품이라 하더라도 객관적인 등급을 알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후에라야 예술 소비자의 '감성'을 예술품 시장 앞에 세울 수 있을 겁니다. 아무리 기본적인 감성이 갖춰진 소비자라 할지라도 모든 게 뒤죽박죽인 죄판에서는 아무 것도 고를 수가 없습니다.
시장질서가 이토록 엉망인 곳에서는 여간한 전문가가 아니어서는 예술적 가치가 있는 작품을 (인테리어만을 염두에 둔 단순한 장식품들로부터)골라 낼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같은 예술작품이라 하더라도 어느 게 더 높은 예술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럴 때는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들은 일차적으로 미술평론가고, 그 다음은 안목을 갖춘 화랑주가 될 것입니다.
서구의 미술시장에서는 미술평론가가 큰 역할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비평체계가 제대로 서있는 미술시장은 화랑이 담당하는 게 정상적이니까요. 미술평론은 아마도 간접적인 영향력이나 발휘한다고 보는 게 합리적일 겁니다. 내가 만나 얘기해 본 국내 미술평론가의 대부분은 한국의 미술시장도 이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이런 합리적인 미술시장이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게 문제일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화랑주들이 과연 제대로 된 안목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증거가 있을까요? 그들은 그런 높은 문화적 안목(즉, 쓸만한 비평적 안목)을 가질 기회가 없었다고 나는 단언합니다. 해방 이후의 격동기를 거쳐 처음으로 전문화랑이 등장하는 6-70년대 개발독재와 80년대 군부독재의 졸부 문화시기를 거쳐 막바로 대중소비와 정보화 시대로 직행하면서 언제 어느 시점에서 그들이 문화적 소양을 쌓을 수 있었겠습니까? 이 게 단순히 혼자 공부한다고 되는 일도 아닌데 말입니다. 간단히 말한다면 그 동안 우리의 천박한 문화수준은 그렇게 높은 안목을 가진 화랑주들을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더욱 두려운 건, '그럼 지금은 필요로 하는가?'입니다.
우리의 이런 독특한 문화 현실 속에서 미술시장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보면 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그 건 우리의 문화수준을 높이는 일입니다. 그렇게 해서 덩달아 화랑주들의 문화수준도 높이도록 하고, 화랑주들이 스스로 미술시장의 좌판을 정리하도록 하는 일입니다. 고급과 저급을 가려내고, 정품과 불량품을 가려내는 일을 해야 합니다. 어찌 보면 무식한 해답이지만, 나는 그 것 외에는 답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 사회의 문화수준을 억지로 올릴 수 있는 방법은 없을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저절로 올라갈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 수도 없습니다. 또 가만히 두면 저절로 올라간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유일한 문화적 행동은 기존의 가치들을 '충돌'시키는 일일 겁니다. (아마 이런 걸 '혁명'적이라 부르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내 눈에 띄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모든 엉터리를 엉터리라고 불러야 '충돌'이 일어납니다. 내 눈에 띄는 (파묻혀 있는)모든 걸작들을 '최고다!'라고 불러야 충돌이 일어납니다. 내가 보기에 이런 소리지르기를 전문적으로 할 수 있는 사람들은 미술평론가들입니다. 그들이 아무리 외국이 어떻다고 우아하게 속삭여 봐야 우리 미술시장의 좌판은 정리되지 않습니다.
한편으로 이렇게 좌판이 엉망인 걸 포스트모던의 징후로 읽으면서 재미있게 살 수도 있을 겁니다.(현재 그렇듯이.) 그러나 포스트모던은 모더니즘을 득한 이 후에나 가능하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고, 그렇게 살기는 어렵다 하더라도 최소한 동시에 추구되어야 할 가치로 보는 게 온당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 모든 것이 엄청난 도전이고,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조이한 :
관객이자 소비자인 사람들이 "모든 게 뒤죽박죽인 죄판에서 아무 것도 고를 수가 없"으며 이렇게 엉망인 문화 현실 속에서 미술시장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의 하나로, "엉터리를 엉터리라고" 소리침으로써 충돌을 일어켜야한다는 말씀에 동의합니다. 말씀하신대로 이런 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들은 미술평론가들이겠지요. 다시금 평론의 문제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왜 우리에게는 제대로된 소리를 내는 미술 평론이 없을까요? 제 생각엔 볼만한 평론이 아주 없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현대식 교육으로 뒷받침된 미술평론의 역사가 짧은데 어떻게 갑자기 수준높은 평론이 쏟아질 수 있겠습니까. 우리들과 우리들 윗세대가 모두 그렇게 엉망인 교육을 받으며 컸으니까요. 한 사회의 문화수준은 어느 한 개인의 돌연변이적 천재로 인해 우연히 이루어지는 건 아닐 겁니다.
이런 척박한 현실 속에서 뭔가를 시작해야 합니다. 퍽이나 동경스러운 훌륭한 평론만을 기대하며 우리의 현실을 개탄하고만 있을 순 없지요. 그나마 드물게 보이는 좋은 평론들을 돋보이게 할 수 있는 장이 필요합니다. 기존의 미술잡지들로는 그런 걸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겐 미술 대중지만 있지 미술 전문지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기 색깔이 있는 미술 전문지가 최소한 두 개는 나와야 합니다. 한 평론가가 여기에도 글 쓰고 저기에도 글쓰는 무채색의 잡지가 아니라 자기들의 취향과 선택에 따라 작가들을 발굴하고 소개하며 예술론을 피는 전문지, 그래서 각각 색채가 다른 잡지가 발굴해내는 작가들이 다르고, 이들이 서로 충돌하면서 담론을 형성하며 이론을 정교하게 다듬고 더불어 발전할 수 있는 그런...
저는 이것의 모델로 좀 지난 시대의 문학잡지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금은 색채가 많이 흐려졌지만 80년대 "문학과 사회 (문학과 지성사)" 와 "창작과 비평 (창작과 비평사)" 은 각자 색채가 있는 문학지로 우리 문학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미쳤지요. 중도적 지식인을 대상으로 한 "문학과 사회"에서는 고 김현 선생이, 민족문학을 지향했던 "창작과 비평"에서는 백낙청 선생이 작가들을 발굴하고 문학론을 발전시켰습니다. 각각의 잡지를 통해 훌륭한 작가들이 배출되었고 평론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김현 선생이 작고하신 후 한쪽의 무게를 잃어버린 창작과 비평은 더 이상의 발전을 기대하기 힘들어졌습니다. 지금 잡지들은 각자의 개성을 잃어버리고 흔들리고 있는 중 입니다.
자기 시대의 예술을 평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미 죽은 작가들, 그래서 쓰여진 글도 많고 자료도 많은 속에서 자기 의견 조금 덧붙이는 거야 쉽지요. 하지만 자료도 없고 기존의 평가도 없는 당대의 미술, 더군다나 미적 기준이란 게 사라져버린 현대 미술을 논한다는 게 여간 힘든 게 아닙니다. 저는 좋은 평론에 목말라있는 작가들의 갈증을 피부로 느낍니다. 자기들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채워진 평론이 아닌, 작품 얘기는 하나도 안나오고 야리꾸리한 이론들로만 채워진 평론이 아닌, 일반인도 알아듣고 공감할 수 있도록 쓰여진 평론, 구체적인 평론이 나와줘야 합니다. 그래서 평론은 골치 아프거나 잘난척하는 글로 아무도 안 읽는 휴지 조가리가 아니라, 작품을 읽는 하나의 가능한, 매력적인 시각을 제시할 수 있으며 그 자체로 미적 감동까지도 줄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평론과 작품이 서로 비판하고 받쳐주면서 나갈 수 있으려면 지금 있는 이 수준에서 시작해야겠지요. 너무 윽박지르지만 마십시요. "너희는 왜 이렇게 밖에 못하냐"라는 질책만으로 갑자기 성장할 순 없쟎아요. 지금 막 시작한 또랑또랑한 젊은 비평가들이 활동할 수 있도록 장을 마련해 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최진욱 :
조이한씨 얘기 잘 들었습니다. ‘두개의 전문지’가 필요하다는 얘기는 정말 경청할만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우리 형편이 그럴 수밖에 없는데, 내가 윽박지른다는 말씀도 한편으로 이해가 가는군요.
하지만 내가 윽박지르는 것으로 보였듯이, 내가 윽박지르게 되는 것은 단지 우리의 문화적 토대를 몰라서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뻔한 거짓말’과 뻔할 뻔자의 사실들을 외면하고 있는 평론가 집단의 비양심과 비이성, 무성의와 무감각, 무책임을 ‘질책’ 이 외의 수단으로 일깨울 수 있는 방법이 없어서일 겁니다. 아마 나 같은 사람들이 많아지고 목소리를 더 높인다면 그들이 굼뜬 엉덩이를 들어 그야말로 “또랑또랑한 젊은 비평가들이 활동할 수 있도록 장을 마련해 줄 수”도 있지 않겠어요? 내가 말했듯이 문화의 수준은 그냥 지켜보고 있는다고 올라가는 게 아닌데, 아무도 일어서지 않는다면 누군가는 엉덩이를 걷어차야 하는 거 아닌가 말이죠. 윽박지르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니라, 더더욱 많이 윽박질러야 한다는 말이죠.
윽박지르지만 말고 생산적인 ‘장’을 마련해 줘야한다는 거 원론적으로 맞는 말씀이지만, 일은 그들 자신이 해야지 누구보고 장을 마련하라 마라할 게 아니라는 것이 내 속 마음이고요. 그런데 한 개도 아니고 ‘두 개’가 있어야 한다니 갈 길이 멀긴 멀군요.
조이한씨도 가끔 미술평문 속에서 뻔한 거짓말과 허튼 소리들을 발견하실 겁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하십니까? 반격을 가할 ‘장’이 펼쳐질 때까지 기다리는 거 말고요. 나는 평론가들이 이럴 때 어떻게 자기 자신을 추스리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아, 정말 우리는 문화수준이 너무 낮아...쯧쯧."
‘뭘 하긴 해야 될 텐데. 좀더 기다려 보자.’가 그들 내부의 소리라면, ‘(그러려면)니들 다 나가 죽어라.’가 내가 지르는 외부의 소리인 셈이죠.
남이 쓴 글 속에서 부조리함을 발견해 내는 것 외에도 먼저 자신 내부의 외침이란 게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이 곳이 수준 높은 미술이론이 펼쳐지는 외국의 평론의 장이 아니라, 온갖 모순과 부조리와 허깨비 같은 담론이 판을 치는 현대 한국미술평론의 장이라면 뭔가 외치고 싶은 것이 있어야 진정한 글쟁이가 아닌가요? 문화 수준이야 어떻든 간에, 우리미술평론의 환경이 어떻든 간에 말입니다.
하지만 제도가 우리를 만든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인터넷 매체가 없었다면 내가 어디에 대고 소리를 쳤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제대로 된 미술평론지가 먼저 나와야 한다는 말씀에 깊이 공감합니다. 힘을 모으고, 뜻을 모아 본다면 지금 여건으로도 충분히 꾸려나갈 수 있을 텐데요, 민간지원이든 관 지원이든 부지런히 따내서 그럴듯한 매체를 하나 띄워야 할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종이 포럼에이가 활성화 되기를 크게 기대합니다. 종이 포럼에이가 미술평단에 힘있는 목소리를 내게 된다면 그에 대응하는 매체가 뒤이어 튀어 나오게 되리라는 즐거운 상상을 하게 되네요.
이영욱 :
* 논의가 어찌보면 다른 국면으로 변화된 듯도 한데 뒤늦게 글 올립니다.
* 대담이 진행중이고 왠지 잘 안풀리는 것 같다는 말을 박찬경씨로부터 들었을 때 약간은 무심하게 "내가 끼면 어떨까"하고 또 실수의 말을 내뱉고야 말았습니다. 잊고 있다가 며칠 후 이 대담 장소의 주소가 이메일로 도착했지요. 어쨌든 우선 여기 들어와 올려진 글들을 한번 일별해 보았습니다. 언젠가 포럼 에이 게시판에서 두 분이 논쟁(?)을 하는 것을 보다가 어딘가 두 분 서로가 서로의 문화와 자세 잡는 방식에 대해 약간의 이해부족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무래도 두 분과는 비슷한 시기를 같이 한 제가 조금이라도 조언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 적이 있었지만, 막상 글들을 보니 박불똥 선생님의 말씀과는 달리 제가 꽤나 '영문이 빠삭'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쨌든 끼어 들겠다고 했으니 그나마 나름의 편견을 갖고 끼어 들어 볼까 합니다.
* 박불똥 선생님과 최진욱 선생님 두 분의 논쟁은 제가 보기에 사실은 그리 바람직한 양상을 띤 것은 아니지 싶습니다. 뭐랄까 제가 기대한 것은, 예를 들면 최진욱 선생님들이 80년대 이후 민중미술의 무력한 단절을 질타할 때 박불똥 선생님이 단절의 어쩔 수 없었음을 설득하고 그러한 단절이 나름대로 또 다른 거름의 역할로 스스로를 드러내는 역사의 아이러니랄까 한 것을 주창하는 그래서 심지어는 지금의 새로운 단체 구성에까지 논점이 심화되고 확대되는 그런 식의 논쟁이었습니다. 하지만 논의는 대체로 어법과 관련해 국한되고 그 속을 순환하는 것이 되고 말았지요. 물론 저는 어법 혹은 말걸기 방식이 중요치 않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는 거기대로 모든 논점들이 결집, 내장되어 있지요. 하지만 어법의 차이 자체가 좀더 다양한 여타의 논점들을 통해 이해되고 또 역으로 그 차이를 통해 다양한 논점들이 다시 이해되는 그런 논의가 가능해야 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 저는 최진욱 선생님의 글을 볼 때면 그야말로 이 분은 그야말로 모더니스트구나 하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글쎄 모더니스트라는 말의 뜻이 뭘까요? 뭐 여러 가지 설명들이 있는 것을 알지만, 나는 한마디로 "진보를 믿는 자" 혹은 '계몽주의자"정도로 정의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곧 다름 아닌 이성에 의한 합리적인 토론을 통하여 서로가 자신이 같고 있던 이전의 억견들을 넘어서서 변할 수 있다는 믿음 그리하여 역사(?)가 진보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 말입니다. 뭐 한편으로는 너무 고색창연하고 또 달리는 뻔한 정의라 어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저는 최진욱 선생님이 이 원리를 적어도 우리의 미술판과 관련한 한 매우 철저하게 관철시키려한다는 점에서 다름 아닌 모더니스트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이 계몽주의자 진보론자가 그야말로 철저할 경우 교과서에 나오는 여러 가지 문제를 드러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우선 이 계몽주의자는 불가피하게 엘리뜨주의자의 성격을 띠게 됩니다(혹은 지나치게 주체를 강조할 경우 주의주의자의 성격을 띠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이성을 중시하는 고로 여러 가지 고려, 예를 들면 사람들의 감정에 대한 고려나 박불똥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첨단을 지향하는 구심력과 말단으로 파생하는 원심력의 길항 관계"에 대한 고려가 부족하게 되거나 심지어 '새된 소리'를 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현재의 미술판의 현황과 관련한 한 저는 최진욱 선생님의 작업이 충분히 유의미할 뿐 아니라 나름의 내용과 형식(스타일)이 일치하는 정당한 방식을 갖고 제시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저로서 최선생님께 미술판과 관련하여 바라는 것은 너그러움도 배려도 아닙니다(다른 분들에게 또 다른 것을 바랄 수도 있겠지요). 그는 한국의 미술판이 무엇이 문제이고 그것이 얼마만큼 중요한 문제인가를 매우 정확히 통찰력 있게 알고 있습니다. 또한 그 문제점을, 그것을 잘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름의 스타일을 개발하여 일종의외치의 방식으로 잘 전달하고 있습니다(그것을 드러내기를 회피하고 있는 사람들과는 달리). 사실 그것으로써 충분하고, 그가 모더니스트로서 지닐 수밖에 없는 여타의 결함을 상쇄합니다. 저는 현 상황에서 그 이상을 그에게 요구할 권리가 없다고 생각하며, 차라리 그러한 요구는 각자가 나름의 결함을 지닌 철저한 또 다른 주의자(아카데미스트, 전통주의자, 민중주의자, 서구주의자, 포스트모더니스트)가 되는 가운데 해소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하지만 박불똥 선생님은 최 선생님의 글을 저와는 달리 또 다른 방식으로 읽으시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최진욱 선생님의 글에 새되지 않은 여유와 분간이 없는 포용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하십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모더니스트로서 최 선생님의 입장 자체에 분명 그런 문제가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문제와 스타일의 문제는 다른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모든 스타일은 원칙적으로 그것이 그야말로 종교적인 잠언과 행위의 수준에 이르기 전에는 결함이 있기 마련입니다. 저는 따라서 최 선생님의 스타일이 그 스타일 안에서 결코 박 선생님이 주장하듯 그렇게 독자들에 대해 오만하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차라리 독자들을 좀더 엄격하게 하나의 주체로서 대하는 방식 혹은 배려 혹은 촉구의 양식이 들어가 있다고도 생각합니다.
* 이런 점에서 우리는 차라리 최 선생님의 글을 나름의 거리감과 여유를 가지고 읽지 못하는 독자들에게 주목할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아시다시피 우리는 일상적인 대화에서도 끊임없이 소통의 어려움과 스타일의 충돌을 경험합니다. 그 경우 우리는 어떻게 그 어려움들을 헤쳐 나가곤 할까요? 아마 ① 충돌을 이기지 못하고 서로 대화를 중단할 수도 있고 소통을 거부하거나 ② 억지로 소통의 외양만 갖추고 딴소리를 하고 끝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③ 대화의 목적에 따라 그 스타일을 통해 주장되는 내실에 일차적으로 주목하는 가운데 소통의 밀도가 높아지는 겨우도 가능하며 ④ 그리하여 결국은 그야말로 최선의 '구성지고 흥겨운 말걸기'와 소통이 넘나드는 경우도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소통이라는 것 자체가 쉽지는 않지요. 저는 3번 정도가 게시판이라는 형식을 통해 우리가 요구할 수 있는 최대치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따라서 '구성지고 흥겨운 말걸기'는 요구 사항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우연한 혹은 놀라운 이해능력과 그러한 소통경험이 축적된 결과에 가깝다는 것이지요. 어쨌든 저로서는 어법과 스타일에 대한 편향된 비판보다는 다양한 결함있는 스타일들의 내실있는 자기 주장과 그 결과로 나타나는 상호이해가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 하지만 물론 사태는 그렇게 전개되어 오지 않았습니다. 최 선생님들의 글에 대해서는 여러 형태의 반발이 있어왔고 박불똥 선생님의 글이 그중 가장 세련된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는 문제가 최 선생님이 스타일을 변화시켜 자신이 전달하려는 내용을 순화(?)시켜야 하는가 혹은 그것이 가능한가 라는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분명히 최 선생님이 현재의 대화상황을 운산하고 계시며 거기에 나름의 스타일을 들이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결과는 최 선생님의 뜻대로만 이루어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저는 한마디로 최 선생님이 스타일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반발도 일정정도 불가피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문제들의 해결은 지금의 이와 같은 논의의 도움으로라도 차후에는 스타일보다는 내실에 대한 상호 논쟁에 초점이 주어지는 가운데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왕도는 없으리라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판단과는 별도로 저는 박 선생님의 반발이 지나치게 스타일에 혹은 스타일과 모더니스트로서의 최 선생님의 문제점을 혼동하시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로 말하자면 저는 스스로를 모더니스트로 생각지 않습니다. 저는 박불똥 선생님의 반발이 80년대를 겪으면서 특히 민중미술 진영에서 겪으셨던 여러 형태의 소영웅주의나 사갈심들 같은 것들의 폐해 같은 것을 염두에 두고 계신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서로 각을 세우기만 할 뿐 결국은 상대방과의 진정한 대화를 이끌어 내지 못했던 진정 답답했던 그 때의 상황들 같은 것 말입니다. 사실 저도 그 때의 상황에 대한 상처를 아직도 갖고 잇습니다. 때문인지 저는 게시판에 그리 큰 기대를 갖고 있지도 않고 지금 정도의 기능에도 적지 않이 만족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 최 선생님의 어법이 80년대의 폐해의 수준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80년대의 경우는 사안에 대한 태도의 정당함보다 개인적인 스타일(그 안에 내포된 욕망과 아집)이 훨씬 우세했던 경우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저는 박 선생님이 대화의 대상으로 상정하시는 '가상의 하나-우리'나 아니면 '구분 짖지 않은 독자 일반'이라는 전제 또한 지나치게 낭만적(종교적)이며 또 게시판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원론적으로 볼 때도 모든 것을 인정하고 껴안으려하는 가운데 실제로는 결국 차이와 입장을 무시한 대동단결 같은 논의가 이루어지기 쉽고요. 저는 차라리 부족한 개인들이 부족한 개인들에게 부족하게나마 자신의 인식을 말하고 같이 변하자고 설득하고 소리치는 것이 좀더 솔직하고 민주적인 방식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박불똥 :
나만 잠자코 지낸 사나흘 동안 조이한 최진욱 두 분 글이 번갈아 올라왔고 이영욱 선생도 '총평'같은 소감을 마침내 주셨군요. 그런데 한정한 대담기일이 오늘로 그만 다 차버렸네요. 내 몫으로는 어쩌면 이 진술이 마지막이겠습니다. 그래서 좀 길게 쓰렵니다. 다소 지루하더라도 양해바랍니다.
조이한 선생께:
"글쓰는 스타일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개성이지요" "사람들에게 모두 같은 스타일의 글을 요구할 순 없다고 생각합니다" 조 선생의 이 말들, 지당합니다.
그런데 '개성 없는 글쓰기'를 요구하는 '미친놈'이 우리 중에 있나요? 누굽니까? 혹시.... 저요?
나는 자랑할만한 '글쟁이'는 못됩니다만 글/글쓰기에 대한 관심과 애정만큼은 어느 누구 못지 않게 각별한 편입니다. 내 꺼든 네 꺼든 뚜렷한 개성을 발하는 글 또는 글쓰기를 부디 앙망은 할지언정 용훼나 훼방놓을 리 만무합니다.
'최진욱'의 경우, 나는 그의 글쓰기 스타일을 문제삼은 것 결코 아닙니다. 글의 스타일=글쓴이의 개성에 내포 내지 잠재된 바 삶의 태도, 곧 세계관을 짚고 따져보려 한 게 본디 의도이지요. 이점 잘못 읽혔다면 그 책임의 일단이 명징하지 않게 대담 나눈 나한테도 있습니다.
나는 '최진욱'이 전자게시판에다 지금껏 '싸질러 댄' 잡다한 글 무더기를 통해서 그가 선민의식에 병적일 정도로 집착하는 골수 엘리트주의자이거니 판단합니다. 나는 그와 아주 다릅니다.
조이한 선생이 '너무나 신선해서 한껏 웃었노라' 며 예를 든 최진욱 선생의 호언-"나는 그림에 대해 모든 걸 알고, 그렇기 때문에 내 눈에 걸리는 모든 그림을 일등서부터 꼴등까지 석차를 매길 수 있다"-에 빗대어 내 꼴을 밝힙니다.
나는 그림에 대해 많이(심지어 별로) 알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앞에 제시되는 모든 그림을 낱낱이 점수매기거나 일렬로 석차 정하는 노릇을 (창피한 게 아니라 당연히)자신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딴 짓은 원천적으로 무리이며 무망한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또 그럴 필요가 뭔지도 모릅니다. 겨우, 내 범위 안에서의 선호나 우열정도만 크게 가늠해볼 따름이지요. 나는 그림에 있어서 '최고의' '제일의' 따위 감별사가 되고싶은 맘 터럭 끝만큼도 없습니다. 그림은 병아리가 아닙니다. 농산품도 공산품도 아닙니다.
철두철미(희망컨대!)한 민중주의자로서 '박불똥'에게 '최진욱 류'는 명백히 극복해야할 대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니 어쩌면 '최진욱'은 '내 안에 들어있는 오장육부 중 어떤 것'일지도 모르지요. 나는 나를 모쪼록 넘어서고 싶습니다. 다른 말로, '박불똥'에게 '최진욱'은 짙디짙은 '애/증'인 셈입니다!
그런데 조이한 선생.
고종석, 손석춘 씨 글이 '쿨'한가요? 진중권(이 양반, '90년대 초엽에 노동자 문화예술운동 연합 미술분과의 'ML학습'을 잠시 담당한 적 있는데 나는 그에게서 '쿨'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 당시 노문연의 '로고'가 "과학의 심장"이었지요) 씨 글은 '핫'하구요? 나는 정반대로 평소 느꼈습니다. "부드럽고 살갑게 다가오는" 글이 '쿨'한 건가요? 느끼기 나름인지 내가 무식해서 잘못 알고 있는 건지요?
어떤 글이 '상대를 자극하고 안하고' '사람들로부터 욕을 먹고 안 먹고' '적을 만들고 안 만들고' 하는 결정적 가르마가 과연 글의 스타일 때문에 생긴다고 보십니까? 조 선생 말마따나 "중요한 것은 비판의 내용"이지요. 제정신이 박힌 정상인이라면 글의 내용도 살피지 않은 채로 문체나 말투에만 사로잡혀 열 받고 욕하고 편드는 따위 '경거망동'할 리 없습니다.
조 선생은 고종석 손석춘 진중권 강준만 씨 등 논객들의 글을 그 스타일 기준으로 호불호하시나요? 그런 적 있습니까? 없다면 (나를 포함한)다른 사람들도 선생처럼 아마 그러지 않을 겁니다.
조이한 선생이 요즘 관심 두는 것, 미술시장에 대해서도 몇 마디 덧붙일까 합니다.
"어떻게 하면 미술을 하면서 먹고 살 수 있을까"
이 원초적/궁극적 문제를 풂에 있어서 나는 '좁은 의미'의 미술시장을 전제하는 것부터가 애당초 패착이라 여깁니다. 화랑 등을 주축으로 한, 미술시장의 협의적 이해는 곧 '미술'의 크기/넓이를 고정된 어떤 것으로 제한하고 말지요. 그렇듯 우물 안 개구리 짝일진대 너무나 당연히도 "미술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없고말고요.
그야말로 "자기가 좋아하는 가수의 콘서트에 몇 만원에서 몇 십만 원의 돈을 투자하는 사람들, 축구장에 몇 시간씩 줄서가며 들어가 열광하는 사람들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은 자신의 요구와 욕구, 욕망을 좇아 기꺼이 돈과 시간을 씁니다. 그들이 화랑을 가지 않고 미술관을 찾지 않는 건 "(그곳에 안치된 내용물을 향유할만한) 감성교육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좁은 의미의 미술'이 더 이상 그들의 요구, 욕구, 욕망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단돈 만원도 (협의의)미술에 투자(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겁니다." 그런 반면에, 넓은 의미의 미술에 대한 그들의 '투자'는 '일상 속에서' '다각도로' '다양하게' '활발하게' '눈부시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노력해서 미술(을 광의로 이해/인식하는) 교육을 제대로 한다면" "어떻게 하면 미술을 하면서 먹고 살 수 있을까"라는 고민의 이 대책 없는 막막함이 한결 가셔지지 않을까 싶네요. 물론 교육도 '깡그리' 바뀌어야 하지만 무엇보다 먼저 '미술' 그 자신이 본원적으로 바뀌어야 옳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좁은 의미의)미술시장이 아주 죽어버릴 수도 있으며 그래도 괜찮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작가 정신"하나로 버티며 굶어죽기를 각오하는 이른바 '작가'는 그 수가 대폭 줄어들 것이며 역설적으로 그들은 '피눈물을 삼키며 전업하는 비극'으로부터 해방되는 낙관을 장차 누릴지도 모를 일입니다.
최진욱 선생께:
최 선생이 말씀하신, 예술품의 생산과 유통 소비에 있어서의, '시장 중심적 사고'는 어떤 거지요? '시장의 질서'란 또 무엇이고요? 그 시장 중심적 사고나 시장의 질서는 미술적인 어떤 것을 실내장식품 또는 예술품으로 판가름하는 일에 상생/상극 둘 중 어느 편으로 작용하나요? 실내장식품과 예술품의 결정적 차이점이 대체 뭡니까? 더더구나 예술품간의 "객관적인 등급"은 과연 가능한 건가요? 어떻게?
한편, 최진욱 선생은 미술평론가든 화상이든 언필칭 '전문가'라는 족속을 너무 신봉하시는 거 아닙니까?
나는 '전문가'를 극렬 진작하고 조장하고 양산하는 이 사회의 모든 시스템에 대해 기피하며 가능한 반대합니다. 뿔뿔이 흩어지고 산산이 쪼개진 무 총체성의 삶을 날이 갈수록 심화해대는 이 망할 놈의 '전문가 천국'에서 나는 차라리 뛰어내리고 싶습니다. 내게 '전문가'는 사회체계에 허다히 배치된 필요악 중 하나로 인식될 뿐입니다. 내가 굳이 '작가'로 버티며 또 그렇게 살아남고 싶어하는 주요한 이유가 바로 "작가란, '삶의 총체성'에 비교적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존재"라는 매력 때문입니다. 세상에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해 전문가 아닌 사람이 어딨습니까? 그런데도 전문가는 늘 따로 있습니다. 무수히 많은 천태만상의 전문가 틈바구니에서 나는 내 삶에 대해서조차 거의 비전문가 취급을 받으며, 동시에 나 역시 타자를 비전문가로 내모는 또 한편의 전문가로, '필요악'을 주거니 받거니 살아가지요.
'전문가'의 득세와 기득권을 최소화하기 위한 싸움, '작가'가 명심하고 실천해야할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 '전문가'로서의 '최고'의 작가가 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몽상이고 망상입니다만, 나는 '화랑 중심의 순 미술 시장'이 위축되고 얼어붙다 못해 아주 죽어 없어져버렸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그 것 외에는 답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조이한 선생께:
"우리에겐 미술 대중지만 있지 미술 전문지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조 선생의 이 말씀을 나는 미술대중지에 대한 괄시로 듣습니다.
나는 미술 전문지 보다 오히려 '제대로 된' 미술대중지가 훨씬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한 평론가가 (무채색의 잡지)여기에도 글 쓰고 저기에도 글 쓰는" 짓을 무턱대고 손가락질할 거 아니지요. 자기 나름으로 견지하는 미학적 틀/색만 분명하다면 '여기'의 독자든 '저기'의 독자든' 가릴 것 없이 '양질의 평문 서비스'를 일삼는 거, 미술평론가로서 마땅히 해야할 노릇입니다.
나는 비평가의 '작부성'을 딴 데서 발견합니다. 주례비평이 그것이지요. 매문이요 곧 매음에 다르지 않습니다. 설령 호구지책이라 하더라도 원, 세상에. 밸도 쓸개도 없어 보입니다. 만일 어느 작가가 동시다발로 칠면조처럼 '다채로운' 작업을 해댄다면 어떻겠습니까? 용납이나 될 법한 일입니까? 상상도 어렵습니다.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비평가의 두뇌나 입을 빌리지 않아도 될 만큼 말하기/글쓰기가 능한 작가 상을 주류화 해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최진욱 :
예술품과 장식품의 구분도 민중적이지 못하고, 전문가와 비전문가를 구분하는 것도 민중적이지 못하니, 화랑은 죄다 문닫아 버리고, 전문가 집단을 믿는 그런 의식일랑 꺼져버려라, 뭐 이런 말씀이십니까? 지금, 현재, 이런 의식이 현실적으로 무슨 도움이 됩니까? 이 것이 그 '삶의 총체성'에 다가가는 길이라는 말씀입니까? 작가가 필요 없는 마당에 (작가가 따로 필요하다면 하신 말씀에 모순이 되겠죠. 작가도 전문가니까.) 작가가 되기 위해 삶의 총체성에 다가가야 한다는 말씀도 아울러 모순이 되겠습니다. 부디 작가가 되려고도 하지 마십시오. 적어도 모순된 삶은 살지 말아야지요.
포럼A게시판은 전문 미술가집단이 공익을 위하여 뭔가 자신의 얘기를 하는 공간입니다. 여기서 전문가집단을 소거해 버리면 이야기 자체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여기가 어디입니까? 또한 그 것이 이상이라 하여도 지금 당장 코앞에 넘어야할 산이 있습니다. 전문가의식을 해체하라는 얘기는 멋있게 들리지만 필경 '무책임'에 다름 아닙니다.
'민중적인 가치', 나도 존중합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는 눈에 '뻔'히 보이는 반민중적 제도와 그 제도 위에 군림하는 반민중적 인간들이 실명으로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들은 분명한 '적'입니다. 내가 비록 선민의식에 젖은 골수 엘리트주의자라 하더라도 나는 그 분명한 적들을 미력이나마 '실명'으로 실제로 공격해왔습니다. 그 동안-포럼A게시판이 만들어진 이후,-어쨌거나 (유감스럽게도)쭉 침묵하고 계시다가 모처럼 양심을 발휘하고 있는 사람의 그 알량한 '선민의식'따위나 공격할 만큼 정세 구분이 안 되십니까?
맞습니다. 나는 선민의식도 조금 있는 엘리트주의자입니다. 하지만 '병적으로 집착'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조금 즐기는 정도라고나 할까요, 이 게 코 앞에서 민중적 가치를 깔아 뭉개고 앉아 있는 오프라인 상의 리얼한 적보다 무서운 적이란 말씀입니까? 박선생님은 그렇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 같은데, 그 게 진정 객관적으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실일까요? 내가 잘난 척 하므로, 내가 적을 향해 날리는 언사는 전부 무효고, 아무런 가치도 없다?('싸질러 논 잡다한 글무더기'라 하셨나요.) 그 게 진실입니까? 만약에 손톱만큼이라도 내가 외친 말들에 가치가 있다면 내가 그들보다 더 큰 적은 아닐 테지요. 그 게 소위 객관적인 판단이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잘난 척 하는 게 뭐가 대수라고 '절대로' 해서는 안 될 것처럼 말씀하십니까? 그 것이 지난 날-진중권처럼- 군부독재에 맞서 싸워보지도 않은 자가 양심을 떠드는 것에 대한 가소로움에서 출발한 선민의식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지난 날 양심을 외치지 못한 자는 영원히 양심을 들먹이지 마라.(그러면 박불똥씨가 나 대신 외쳐 주었던가?)
결론은 이렇습니다. '박불똥씨 가라사대 비민중적인 자는 민중운동에 낄 자격 없다.' 내 대답은 이렇습니다. '언제부터 민중운동 전세 내셨습니까?' 아울러 '전세 내신 것으로 생각하신다면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된 적을 공격하십시오.'
아울러 그림을 '병아리'처럼 감별하고 싶어지는 강력한 욕구가 왜 시작 되었나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아무런 부조리가 없는 동네에서라면 언 미친놈이 그림 한 번 감별해 보자고 나서겠습니까?
조이한 :
"나는 자랑할만한 '글쟁이'는 못됩니다만 글/글쓰기에 대한 관심과 애정만큼은 어느 누구 못지 않게 각별한 편입니다."라고 겸손하게 말씀하셨지만 저는 박불똥 선생님이 "글맛"을 아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표현을 참 잘하시는데 그 표현이 (순전히 스타일로만 봐서) 박불똥 선생님이 질타하고 계시는 최진욱 선생님의 스타일과 어떤 면에서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선 박불똥 선생님과 최진욱 선생님의 글쓰기가 글읽는 상대를 자극시킨다는 의미에서 "진중권"식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를들면 박불똥 선생님의 "그런데 '개성 없는 글쓰기'를 요구하는 '미친놈'이 우리 중에 있나요? 누굽니까? 혹시.... 저요?" 같은 부분이지요. 최진욱 선생님도 "예술과 장식품이 뒤섞여 있는 미술판에서 예술을 가려내는 일이 필요하고 그림에 관한 한 나는 그걸 할 수 있다" 라는 내용을 "나는 그림을 일등부터 꼴찌까지" 점수 매길 수 있다는 식으로 쓰시는 거지요. (그 글을 읽고 웃었다는 제 말이 그 말에 동의한다는 말로 읽혔을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그건 " 한 사람의 화가가 자기 전문인 그림에 관한 한, 자신있게 자기 의견을 말할 수 있다"라는 의미로 읽었을 때 입니다. 만약 그 말이 글자 그대로의 의미라면 저도 당연히 박불똥 선생님처럼 그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과장과 비약, 비꼼의 수사를 통해 상대의 시선을 잡고 도발시킵니다. 그런 글에는 사람이 꼬입니다. 그것도 찬성과 반대의 극단적 반응을 동반한...
그리고 저는 글 내용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 수사법이 상대의 감정을 건드리며 필요이상의 반발을 끌어낼 수 있다는 의미에서 진중권식 글이 "쿨하지 않다"라는 말을 쓴 것입니다. 또 하나, 글쓴이가 흥분해서 쓰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는 의미에서 "쿨하지 않"기도 합니다. 그건 실제 글쓴이의 상태가 어떤지, 그리고 글의 내용과는 별개로, 글의 스타일에서 받는 느낌이기도 합니다. 반대로 손석춘이나 고종석은 글쓴이가 전혀 흥분하지 않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에 "쿨하다"라고 쓴 것입니다. 도발적인 단어를 사용하지 않으므로 상대를 자극시키지도 않으며 주로 편지형식의 글을 쓰기 때문에 부드럽지요. (내용은 젖혀두고 말하자면 저는 두가지 스타일의 글을 다 좋아합니다. 그 스타일이 내가 동의할 수 있는 내용과 맞물리면 더 좋아하지요. 거기에 글 자체가 미적 감동까지 더해준다면 최고겠지요)
박불똥 선생님께서는 "나는 '최진욱'이 전자게시판에다 지금껏 '싸질러 댄' 잡다한 글 무더기를 통해서 그가 선민의식에 병적일 정도로 집착하는 골수 엘리트주의자이거니 판단합니다. 나는 그와 아주 다릅니다." 라고 쓰셨는데 최선생님의 "골수 엘리트로서의 작가"와 박불똥 선생님의 ""작가 정신"하나로 버티며 굶어죽기를 각오하는 이른바 '작가'"가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이건 아직 생각을 더 해봐야겠군요)
저는 "작가의식"을 "프로의식" 정도로 해석합니다. 작가는 세상을 총체적으로 통찰해서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어떤 것을 가르켜주는 위대한 스승은 아닌 것 같습니다. 자기가 바라보는 세상과 대상을 시각적인 매체를 통해 자기 식으로 표현하는 사람이 작가이며 적어도 시각매체를 다루는 전문가여야 하지요. 그리고 평론가는 작품에 대한 해석의 가능성 하나를 사람들에게 제시해 줄 수 있는 그 분야의 또 다른 전문가구요. 그 이상의 의미덧붙임에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박불똥 선생님은 저의 "한국에 미술전문지가 없다"는 말을 미술대중지에 대한 괄시로 읽으셨는데 저는 그런 의도가 없었습니다. 저는 월간 미술 논쟁이 있었을 때 미술대중지의 역할이 있다고 계속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대중지와 전문지는 각자 역할이 다르다고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때 미술전문지를 엘리트적 시각을 밑에 깔고 생각하고 있진 않습니다. "문학과 사회" 나 "창작과 비평"을 전문가만 사는 것도 아니고 그 잡지에 대중들이 이해 못할 수준의 글들만 있는 건아니니까요. 저는 되도록이면 글을 쉽게 쓰자는데 동의 합니다. 그 분야의 문외한도 읽어서 이해되는 글이 좋은 글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작가"에 대한 거창한 신화는 벗겨져야하고 비평가들의 우아하거나 어려운 "거짓말" 또한 없어져야합니다. (우아하거나 어려운 모든 글에 대한 비판은 아닙니다)
"그들이 화랑을 가지 않고 미술관을 찾지 않는 건 "(그곳에 안치된 내용물을 향유할만한) 감성교육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좁은 의미의 미술'이 더 이상 그들의 요구, 욕구, 욕망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라는 박불똥 선생님의 말씀이 한 편 맞기도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미술이 사람들의 요구, 욕구 욕망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미술품을 사지 않는 것 같기도 하거든요. 그런데 그 말이 다 맞으려면 "그렇다면 언젠가는 미술시장이 살았던 적이 있었는가?"에 "그렇다"는 답이 나와야 하는 거 아닌가요? 대담이 끝을 향해 가고 있는데 어떻게 끝을 맺으면 좋을지 정말 애매하군요. 박선생님 말씀대로 뒤가 찜찜합니다.
최진욱 :
나는 이 대담을 통하여 내가 할 일은 미술판의 '무지'와 싸워 나가는 일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 걸 다른 사람들이 무엇이라 부르든 간에 나는 '무지'라고 서슴지 않고 부르겠습니다. 선민의식이나 엘리트의식으로 비춰지는 게 싫어서 다른 학술적이거나 교양있는 낱말들을 찾고자 애쓰지 않겠습니다. 조이한씨가 얘기하신 '쿨하지 않음'은 자신의 양심, 혹은 낯짝을 뜨뜻한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인 것 같은데, 어떤 의미에서는 나는 그 게 오히려 쿨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쿨한 걸 원해서라기 보다 내 양심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일을 이 게시판에서 꺼린다면 아는 것도 별로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말장난 외에는 없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입니다. 솔직히 말해 나는 그럴 시간은 없습니다.
나는 박불똥씨를 포함하여 상당수의 민중작가들이 내 글을 혐오한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적지 않게 당혹스러웠습니다. 수구 기득권 세력을 향해 날린 화살이 전혀 다른 표적을 꿰뚫고 지나가 버린 것입니다. 나는 이해를 구하길 원했고, 그들에 대한 변함없는 나의 존경심을 표하기도 했지만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단지 글 쓰는 스타일의 문제 일 뿐이라는 얘기도 통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글의 스타일은 그의 본심이 반영되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정작 본심은 읽으려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나는 그저 반민중적인 사람으로 매도되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두 가지의 색깔만을 갖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입니다. 실제로 나라는 사람은 민중적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반민중적이라고 볼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더구나 이 게시판에서 나는 반민중적 제도와 그런 제도에 기생하는 인간들을 공격하고 있었습니다. 박불똥씨는 나를 본질적으로 반민중적인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자신과 다르다는 점만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자신과 비슷하거나 심지어 같은 점은 전혀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관심법으로 보자면 나는 '반민중적'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꼬리표는 내가 잘난 척을 하지 않는다면 한 삼년쯤 지나면 잊혀질까요?
고작 예로 든 것이 작가의 그림들을 성적 순위를 매겨 일렬로 세우려 하기 때문에 반민중적이라는 것입니다. 왜, 누구를 등쳐먹었거나, 권력에 빌붙어 반사회적인 일을 한 전력을 얘기하지 않는지 모를 일입니다.
현재의 (나를 포함한)미술인들이 너무나 무기력하고, 무능한 것에 대해서 (내부의)누군가의 질타를 들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악역을 자초한 측면이 있습니다. 이 걸 액면 그대로 악인으로 받아들인다면 무지한 거 아니겠습니까? 잘난 척 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이런 인터넷 게시판에서 잘난 척하는 게 웃음거리 밖에 더 되겠습니까? 그냥 맘껏 조롱하십시오. 그 걸 자신과는 다른 병적인 사람으로 매도해버린다면 역시 무지한 거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일반 미술인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런 건 아무 일도 아닐 수 있습니다. 소위 우리 시대의 혁혁한 '민중작가'들의 생각이 그렇기 때문에 문제인 것입니다.
나는 '상당수의 민중작가'들을 적으로 삼기로 하였습니다. 이 대담을 통해 느낀 바가 많습니다. 내부의 옹고집과 무례한 문화를 꿰뚫지 않고서 '민중적'이 된다는 것 역시 허상일 뿐입니다.
조이한 :
이 대담 기간동안 저는 무던히도 속을 끓였습니다. 심각하게 가지 말자, 고 몇 번씩 되뇌였지만 심각해지고 말았네요.
이 대담을 통해 서로의 차이를 드러낸 것이 어쩌면 더 바람직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처음부터 코드가 서로 맞는 사람들 끼리라면 모를까, 사실 대화를 통해 합의에 이른다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이렇게 인터넷을 통해서건 실제의 만남에 의한 토론을 통해서건 서로간의 차이를 확인하는 것이 아닐런지요. 차이가 분명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차이를 뭍혀 두고 애매하게 나아갔을 때 문제가 더 크게 불거지는 건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 대담에서는 서로의 차이를 확인했다기보다 서로 이해받지 못했다는 생각이 더 강하게 남습니다.
이 대담은 공개가 되겠지요. 지금은 일단 이렇게 마무리짓게 되겠지만 자유게시판에서 디시금 토론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대담의 내용과 계속 거리 두기를 하려는 저의 시도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저 또한 대담의 한 가운데에 서서 혼란스러웠습니다. 바깥에서는 볼 수 있는 것들을 안에서는 보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시간이 조금 흐른 뒤, 내 시선이 낯설어지면 그 때 다시 한 번 글들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동안 대담을 읽은 독자들이 의견을 내줄 겁니다.
박불똥 :
갓 올라온 최진욱 선생 글이 사뭇 강경하므로 이러고 그냥 끝내기 '찝찝하여' 한번 더 씁니다.
먼저, 엊그제 올린 내 글이 최 선생 심기를 여러모로 건드린 모양인데, 미안합니다.
반발을 웬만큼은 예상했으되 저다지 '선전포고'(?)까지 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나로서는' 일정정도 최 선생의 과민에서 비롯한 반응이라 치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만 자상하지 못한 내 표현력 탓이 더 크려니 여기고 스스로 돌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글' 내지 '전자 글쓰기'의 한계도 다시 떠올립니다.
아무튼, 서로간 '핏대'를 좀 가라앉히는 게 좋겠습니다. 필요 이상의 적대감을 앙칼지게 돋우는 모양은 어느 쪽에도 도움될 게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결정적인 문제점을 덮거나 비켜가자는 건 물론 아닙니다. 피차 상통하기 어려운 '이질'이 상당히 있음을 이미 확인한 셈입니다.
시간 아까울 정도로 바쁘기야 다들 마찬가지인 즉, 꾹 참고 유종의 미를 위하여 마지막으로 차근차근 시비를 가려봅시다.
미술판에서 나는 '폼' 잡고싶지 않습니다. 사실 잡재야 잡을 폼도 없지만, 폼잡기 좋아하는 사람을 워낙도 싫어합니다. 폼잡는/잡으려는 짓 그거, 아마 인간이라는 정치적/사회적 동물의 '자연'일 테지요. 내게도 그 자연이 아주 없진 않습니다. 어쩌면 누구보다 강렬할 수도 있지요. 그러나 '(어떻게)나서 (어찌)자란' 결과로서의 현존인 나는 '당위'에 입각하여 분명히 '폼생폼사'를 경멸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고쳐 생각하면, 세상만사 '폼' 아닌 게 있기나 할는지요. 권력, 자본, 상품은 물론이고 예술, 미술도 다 '폼'이거나 최소한 '폼'에 관련한 것들입니다. 아니 예술이야말로, 그 중에서도 미술이야말로 최고 최상의 '폼' 아닙니까?
그런데도 폼생폼사를 '경멸'하다니! 나는 아무래도 예술가 묵이가 아닌가 봅니다. '예술'을 운위하기에는 '너무 멀쩡한 나머지 관능이 불구인' 놈이지요.
그래서 '이 시대 우리나라 최고'의 작가 최진욱 선생이 나한테 쏘아붙이는 언어도단에 가까운 충고/경고-"부디 작가가 되려고도 하지 마십시오"-를 고소해하며 달게 듣습니다.
그러고 보니 부지불식간에 그만 큰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전문 미술가집단이 모여 공익을 위하여 뭔가 자신의 얘기를 하는 공간"에 꼴같잖은 이 '잡상인'이 잘못 들어왔네요. 얼른 나가지요. 다신 얼씬도 않겠습니다. 나는 일찌감치 '당신들의 작가'이기를 포기한 사람입니다. 그런 까닭에 '당신들로부터' 작가로 불리거나 말거나, 잡상인으로 내몰리거나 말거나 애달파하지 않으며 언짢은 거 조금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 점만큼은 명확히 짚고 갈랍니다. 나는 '전문가로서의 작가' 존재를 말소해야한다는 취지의 발언, 안 했습니다.
"'전문가'의 득세와 기득권을 최소화하기 위한 싸움, '작가'가 명심하고 실천해야할 일 가운데 하나다. '전문가'로서의 '최고'의 작가가 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내 글의 이 대목 또는,
"나는 '전문가'를 극렬 진작하고 조장하고 양산하는 이 사회의 모든 시스템에 대해 기피하며 가능한 반대한다. 뿔뿔이 흩어지고 산산이 쪼개진 무 총체성의 삶을 날이 갈수록 심화해대는 이 망할 놈의 '전문가 천국'에서 나는 차라리 뛰어내리고 싶다"
이 대목을 그릇 읽으신 건지요? 내 진술이 정녕 "전문가 의식을 해체하라"는 뜻이었습니까? 곡해입니다.
나는 분명히 이렇게 적었습니다.
"내게 '전문가'는 사회체계에 허다히 배치된 필요악 중 하나로 인식된다"
최진욱 선생.
침착해집시다. '필요악'은 말 그대로 '필요'+'악'입니다. 필요는 불필요의 반대며 악은 선의 반대지요. 나는 '전문가'가 현실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은 하되 '전문가 일변도'의 가치지향이 '박불똥 개인'의 세계관에 비추어 이를테면 '전문가 천국에서 뛰어내리고 싶을 정도'로 매우 달갑지 않다는 소감을 피력했던 것뿐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나는 '필요'를 외투로 걸친 '악'의 행세를 한사코 미워합니다. 가급적 '악'이 '필요 없는' 낙원을, 비록 공상일지언정 꿈꿉니다. 나의 이 공상은 '필요악이 수두룩한 현실'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아무리 빌어 처먹을 세상이라지만 꿈꿀 자유/권리조차 설마 없는 건 아니겠지요? 실현할 길 바이없되 이 꿈은, 실망 절망 패망에 지친, '누추한 내 현황'의 한 작은 그러나 그러므로 아주 소중한 위로입니다. 불씨입니다! 나는 이것을 숨지는 그 날까지 손아귀에서 놓지 않을 작정합니다.
미안한 얘긴데, 최진욱 선생이/ "모처럼 양심을 발휘"하여/ "반민중적 제도와 그 제도 위에 군림하는 인간들"="분명한 적"을 향해/ 포럼A 게시판에서 "실명으로 해대는 공격"='맹활약'은 내게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박불똥'의 불씨가 십중팔구 될 수 없습니다.
최 선생도 "존중한다"는 '민중적 가치' 그거, 기분 내키는 대로 환호하고 작약하고 악수하고 포옹하고 건배하고 만세 부르고 그러다가 쉽사리 토라지고 딴청부리고 팔아 넘기고 심지어 "적으로 삼"아 버리기도 할 거, 그렇게 호락단순한 거 아닙니다. 나는 '민중주의자'이길 예나 제나 간절히 희망만 할 뿐 '자신'은 여전히 못하고 삽니다. 민중/민중운동을 '거처'에 비유컨대 내 사유와 실천은 사글세 살이에도 못 미치는 형편이지요.
'박불똥'의 주제가 엄살 없이 이러한데, 민중운동을 "전세" 내다니요? 하물며 "비 민중적인 자는 민중운동에 낄 자격도 없다"면서 내가 자발적 민중숭배자 최진욱 선생을 내치다니요?
거듭거듭 미안합니다. 뭐가 어디서 어떻게 잘못됐는지는 모르나 일단 미안합니다. 앞으로 최 선생의 어떤 막말에도 장딴지 걸거나 대꾸 삼가겠습니다. 못 말리는"옹고집과 무례"가 드러나지 않도록 쥐 죽은 듯 더욱 더 조용히 살겠습니다. 다만 "왜 그동안(포럼a가 만들어진 이래 지금까지) 쭉 침묵하고 있었느냐"고 더는 다그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전 어디선가 최 선생 스스로 밝혔다시피, "그 치열하던 '80년대 상황에 왜 '싸움'을 거들며 같이 나서지 않았느냐"는 힐책 아무도 최 선생한테 아니했듯 말이지요.
그리고 이 "정세구분!", 솔직히 나는 잘 안되네요. 나도 한 때는 세상을 명명백백히 바라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좀체 갈피 잡기 어렵습니다. 눈을 비비고 봐도 '그놈이 그놈'만 같아요. 시력 좋고 머리 좋은, 그래서 여전히 세상을 명명백백하게 "정세구분" 잘 하시는 최진욱 선생에게 모든 걸 맡깁니다. '허상'을 깨고 실상을 바로 세우고자하는 최 선생의 분투가 모쪼록 진일보하길 바랍니다. "미술판의 '무지'와 싸워 나가는 일"이 부디 성공하길 빕니다. 그리하여 결국 이 '사이비 민중주의자 박불똥'의 꽉 막힌 꼴통도 제발 속 시원히 뻥! 뚫리기를 진심으로 기대합니다.
내가 "이 세상 사람들이 두 가지의 색깔만을 갖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딱 부러지게 최진욱 선생을 "반민중적인 사람으로 매도"한 게 사실이라면, 나는 누워서 침을, 가래침을 내 얼굴에 뱉은 셈입니다. 바로 위 단락에도 적었지만 나는 이 복잡다단한 '인간들의 세상살이'를 딱 부러뜨려 볼 수 있을 만큼 근력도 시력도 좋지 못합니다. 내가 쓴, 길지도 않은 글을 너무 요약압축해서 읽지 않으셨으면 싶네요.
내겐 더 이상 '적'이 없습니다. 아니 있습니다. 딱 하나인 적, 나 자신입니다. 내 안에 있어 보이는 '최진욱의 어떤 것'도, 따라서 내게 적이 비로소 됩니다. 나는 '나'를, 내 '안'을, 내 '편'을, '우리'를 적으로 삼습니다. 그 나머지는(여섯 살배기 꼬마아이 꺼가 '꼬추'고 그 형 것은 '자지'고 그 아비 것이 '좆'이면 그 할아비 것은, '좆도 아니'듯이) 내게 적도 아닙니다. 나는 현실계의 '부조리'에다 별수 없이 발 딛고는 살되 그것을 즐기지는 않습니다.
'박불똥'과 '최진욱'의 이 세계관의 차이를 어쩌겠습니까? '산소'로도 '용접'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당장 걷어낼 수 없는 앙금이거든 그대로 두고 당분간 구정물을 감수한 채로 각자 '최선'을 다합시다. 나는 '최고' '최대' 따위는 별로 좋아하지 않으나 '최선'만큼은 전폭 지지합니다.
오늘 새벽 꿈에 '최진욱 개인전'을 보았습니다.
나는 최 선생이 개인전을 언제 어떻게 얼마나 가졌는지 모릅니다. 초대장을 받은 적도 관련 기사를 접한 적도 전시 현장 가까이를 지나쳐본 적도 기억에 없습니다. 선생과의 상면도 거의 모두 '오다가다 마주친' 식으로 도합 열 번이나 될까요? 선생과 나는 고작 서너 차례 기획전에 함께 출품한 인연뿐 이렇다 할 교분은 전혀 없는 사이지요. 그 흔한 오프닝 뒤풀이자리의 밥 한 그릇 소주 한잔 못 나눈 사람끼리 이런 '모니터'를 통하여 말도 아닌 글로 네가 어쩌네 내가 저쩌네, 떠들고 앉았으려니 사실 마음 한 구석이, 켕기면서 허전키도 하였습니다.
그 꿈, 아마 그래서 현상한 걸 테지요. 꿈속의 '최진욱 전'은 성황이었습니다. 내 안목으로 봐도 매우 매력적인 회화작품이 여러 점 눈에 띄더군요. 그런데 전시장 저 안쪽에 즐비하게 늘어선 방송취재 카메라들을 발견하자마자 나는 서둘러 그 자리에서 벗어져 바깥으로 나와버렸습니다. 그러고는 곧 잠이 깼지요. 뭔 영문으로 꾼 꿈인지 얼추는 알 듯 합니다.
생뚱같이 들려드린 꿈 얘기로써 양자간 껄끄러운 돌기들이 다소 '뻬빠질' 될지 어떨지 모르겠으나 속옷 까뒤집어 보이는 심정으로 자못 용기를 낸 것이니 최진욱 선생, 한 번쯤 고찰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나 '박불똥'은 아무래도 무방하나 '상당수 민중작가들'을 적으로 삼겠다한 '의분'만큼은 이내 삭여내시리라 믿으며, 긴 시간 대담, 곤혹 속에서도 즐거웠습니다.
박불똥 :
이영욱 선생께:
질퍽댈 뿐 공전 중인 '대담'에 일부러 다가와서 어렵사리 '총평'까지 해주셨는데 반응 없이 묵묵히 지나쳐 가버린 것이 결례인 듯하여 짧게나마 소감을 남기고자 되돌아왔습니다만, 사실 별 할말이 없네요.
이 선생을 포함하여 여러 사람이 자꾸 오인하는 한가지-포럼a 자유게시판에서 있었던/있지 않았던 최진욱 박불똥 간 논쟁(!)/논쟁(?)에 대해서 새삼 분명히 밝혀두는 걸로 '인사'를 대신하겠습니다.
간단히, '실명 박불똥'은 '실명 최진욱'과 어떤 형태로든 '논쟁'을 벌인 일이 없습니다. 최진욱 씨가 추계예대 동료교수 구영모 씨 개인전을 포럼a 자유게시판에 극구 칭찬으로 소개한 글 <구영모의 전시를 보아야 할 때>에다 대고 내가 <그는 달을 가리키는데 나는 왜 자꾸 손가락을 보나?>라는 참견을 낸 적은 있지만 그건 '논쟁'이라 부를만한 게 못됩니다. 일종의 '딴소리하기'에 불과하지요. 그 글의 전문은 이렇습니다.
"역시 최진욱 씨는 당대 최고의 화가요 비평가요 교육개혁가이다. '안하무인'이라는 유일한 기준에서 그렇다. 야단법석의 중심에 홀로 우뚝하니 올라서서 사위를 무엄히 휘둘러보는 씨의 저 도도무쌍한 멸시 아래 만인은 부득불 중생, 아니 학동이 되고 마는 느낌이다. 그의 총수적 호통 앞에 부동의 '차렷' 자세를 취하지 않는 자는 당장 퇴출을 각오해야만 할 것 같다. 하긴, 식민지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 할 정도의 국보로 칭송 받은 셰익스피어를 들먹이며 과대망상을 부추긴 '종자기'를 곁에 둔 '백아'이니 세상 무어 두려울 리 있겠는가? 기고만장도 그럴 듯하다. 어쨌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 어떤 '잡것'과의 비견조차 용납지 않는 안하무인의 제 일인자, 최진욱 씨가 주창하고 가담하는 미술개혁이라! 나는 기대가 당연히 클 수 없다"
최진욱 씨 글이 "미니멀리즘 회화에 있어 한국 최고" 작가 구영모를 최씨 특유의 '이빨'로 추켜세운 내용인데 비하면 내 글은 거의 동문서답인 셈입니다. 논쟁커녕 입씨름도 아니지요.
그리고서 즉각, (최진욱 씨가 아닌)박찬경 씨로부터 '간곡한 꾸지람'을 나는 들었습니다. 왜 박찬경 씨가 끼어 들었는지 물론 압니다. "미술개혁"과 백아의 "종자기"때문이지요.
그리하여 나는 문제의 게시물 "도와주십시오"를 썼습니다. 박찬경 씨의 느닷없는 '짜잔'에 대한 당연한 응수, '쪼잔'이었지요. 그 '일 합'은 넓은 의미에서 '논쟁'이라 여길 만합니다.
이어 박찬경 씨는 또 다른 반론을 올렸다가 금세 '자진 삭제'하였고, 최진욱 씨가 두 차례에 걸쳐 "내부적으로 싸워야 할 때라니 한 말씀 드립니다" "내부적으로 싸워야할 때니 한 말씀 더 올리겠습니다"라며 '싸움'을 걸어왔지만 나는 아예 대꾸 않고 버텼습니다.
따라서 이후 최진욱 박찬경 박불똥 삼자 간 '논쟁'은 더 이어지지 않은 채 중단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내가 최진욱 씨의 입질을 굳이 외면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 "새로운 미술인 단체 결성에 관련한 논의 건을 포럼a 게시판에서는 더 이상 떠들지 말아다오"하는 '여러분'의 당부/압박 때문입니다. 물밑작업이 한창인 미지의 예정단체의 '객관성'을 담보하기에는 포럼a 게시판이 '비객관적'이라는 설명이었는데, 포럼a 자유게시판 만큼 활성화 된 '공론의 장'=언로/언론이 미술계에 거의 전무하다시피 한 현실에서 내 입장은 퍽 난처하기도 했습니다. (가칭) 미술인 회의의 홈페이지를 서둘러 만든 다음 그 곳에다 '광장=자유게시판'을 설치하여 '실컷 떠들 것'을 약속하고 일단 기다렸지요. 그러나 열흘이나 지나도록 감감무소식이라, 나는 마냥 짱구 될 수 없어서 "꿀꿀하다"며 다시 투정을 내색했던 거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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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가지 이유는 최진욱 씨의 독법에 대한 거부감 때문입니다.
그는 "내부적으로 싸워야할 때(라고 박불똥이 말했다)"에 유난히 집착하였습니다. 박찬경 씨가 "지금 '내부'에서 싸울 때는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한 말을 그대로 받아서 나는 "지금이야말로 '내부'와 치밀하게 싸울 때라고 생각한다"고 답했습니다. 여기서 내가 말한 '내부'와 '싸움'의 의미는 '팥 대롱 안의 소란=내분=편가르기'가 아닙니다.
그래서 나는 "이합집산에 관한 한 내가 믿는 상식은, 발의와 절차가 옳아야 뒤탈이 없더라/적더라는 거다. 지금은 나/우리 안에 어긋나 있는 상식부터 엄정히 점검할 때다"라고 말했던 것이고, 그야말로 노파심에서 "지금 '내부'에서 싸울 때는 아니"라면서 '민미협'을 두고 왜들 왈가왈부하느냐고 따졌습니다. 덧붙여, "(박찬경)님이 말하는 '내부'는 그 범위가 어느 만큼인가"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최진욱 씨는 '존경하는' 민미협이 '내부'인지 '외부'인지 밝히지 않은 채, '내부'와 '싸움'의 의미를 시종일관 '팥 대롱 안의 소란=내분=편가르기'로 해석하면서 오광수 하종현 이용우 씨 등을 어찌 생각하느냐고, '진짜 비린내'를 어디 한번 맡아보라며 내 코밑에다가 그 '썩은 어물'을 바짝 디밀었지요. 그래저래 나는, '당분간' 자의반타의반 묵상에 잠기는 것 외에 달리 상책이 없겠다 라고 판단하게 되었던 겁니다. 사설이 길어졌는데 아무튼 그리하여, 최진욱 대 박불똥의 '논쟁'은 이 대담 이전에는 펼쳐지질 않았습니다.
'논쟁'이 있었든 없었든, 진작 있었든 이제야 있든 그 딴 걸 가리는 게 뭐 그리 중요하냐고 혹 눈흘길까 싶어서 미리 막음하는 말입니다.
"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모든 '소통'을 중시하며 따라서 그것을 그르치는 오기와 오독을 크든 작든 신경질적으로 '증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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