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대

1360  53/68   회원가입 회원로그인
  View Articles
장명훈  [homepage]님께서 남기신 글 (2002-11-08 23:03:47, Hit : 542)
[re] 무제
17세기의 거장 얀 베르메르. 미술사와 문화이론에서 다양한 이론적 근거로 자주 인용되는 그의 작품은 그만큼 많은 이야기 거리를 담고있다. 필자는 오늘날까지도 그림의 해석 방법론에 대해 뜨거운 논쟁을 일으키고 있는 작품<회화와 알레고리>를 통해 그림읽기의 상반된 해석방향을 말하고 있다. 도대체 그림을 본다는 것은 무엇이고, 또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천천히 필자의 안내를 따라가보자
〈회화의 알레고리〉 이 그림은 프란스 할스, 렘브란트와 함께 17세기 네덜란드 회화를 대표하는 화가 얀 베르메르(Jan Vermeer)의 작품이다. 베르메르하면 우리의 머리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그림이기도 한데, 인상주의 화가 르느와르가 죽기 전에 한번 꼭 보고 싶다던 그림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화가의 아틀리에〉, 〈모델과 화가〉, 〈회화 예술〉 혹은 〈회화예술의 영광〉 등의 다른 제목으로 불리우기도 한다. 하나의 그림이 이처럼 여러 가지 제목을 갖게 된 것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화가 자신이 따로 제목을 정해 놓지 않았을 경우 - 사실 옛시대의 작품들 중 그런 경우가 아주 많은데 -, 그림을 사고 파는 과정에서 화상들에 의해 화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제목이 정해지거나 화가의 유족 혹은 친근들에 의해 애칭 비슷하게 불리우던 것이 제목이 되기도 한다. 영어권에서는 〈회화 예술 (The Art of Painting)〉이라는 제목이 많이 사용되는데, 이는 화가의 미망인이 이 그림을 팔지 않고 보관하는 과정에서 회화 예술(Schilderconst)이라고 불렀던 데서 유래한다. 독일어권에서는 미술사학자들의 해석 의지에 따라 위에 열거한 여러 개의 제목들이 함께 사용되고 있다.
이렇듯 제목을 바꾸어 부를 정도로, 보는 이에 따라 하나의 작품이 다르게 해석될 수밖에 없는 건, 하나의 풍경 앞에서 다섯 명의 화가가 그림을 그릴 경우 다섯 가지의 서로 다른 풍경화를 얻게 되는 결과와 비슷하다. 앞으로 우리는 하나의 예술작품을 ‘어떻게’ 다르게 볼 수 있는지에 대한 방법론적 접근을 시도할 것이다. 누가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정말 그런가. 보고자 하는 만큼 볼 수 있고, 아는 만큼만 보일 뿐이다.


베르메르의 이 그림을 두고 1960년대 독일 미술사학계에서는 재미난 논쟁이 있었다. 요점인즉슨, 그림을 해석할 때 어디에서부터 먼저 시작을 해야 할 것인가였다. 논쟁의 주인공은 《중심의 상실》이라는 책으로 널리 알려진 한스 제들마이어(H.Sedlmayr)와 바르부르그 연구소의 쿠르트 바트(K.Badt)였는데, 이 논쟁을 정점으로 오늘날까지 독일에서는 그림을 어떻게 서술하고 해석할 것인가에 대한 뜨거운 논의들이 진행되고 있다.
우선 그림을 들여다보자. 누가 방금이라도 걷어낸 것 같은 커다란 커텐을 등지고 베레모를 쓴 한 화가가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아 곱게 차려 입은 한 소녀를 그리고 있다. 이 소녀를 두고 그 앞에는 여러가지 소품들이 널려 있는 책상과 의자가 놓여 있고, 그 뒤로는 커다란 지도가 벽에 걸려 있다. 방은 깨끗하고 조용해 보인다. 소녀의 이마 위로 햇빛이 떨어지는 걸로 봐서 왼편으로 창문이 나 있는 듯하다. 언뜻 봐서는 〈모델과 화가〉라는 제목이 이 그림에 가장 잘 어울릴 듯하다. 그러나, 어째서 〈회화의 알레고리〉라는 복잡한 제목이 붙게된 걸까.
이 그림을 예술작품 해석 이론의 대표적인 예로 끌어들인 사람은 바로 제들마이어였다. 그의 해설에서 이 그림은 〈회화예술의 영광〉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왜냐하면, 화가의 모델을 서고 있는 소녀를 파마(Fama), 즉 영광의 알레고리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제들마이어는 전체 화면을 지배하는 모티브로 모델을 지적하는데, 그에 따르면 벽에 걸린 지도의 왼쪽 귀퉁이 부분, 소실점의 위치, 모델이 입은 옷의 파란색과 그녀가 들고 있는 책의 노란색이 보여주는 뚜렷한 대비, 약간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는 화가의 시선, 가운데 놓인 책상의 모서리가 가리키는 방향 등이 이 중심 인물을 강조하는 장치라고 설명한다. 책상 위에 놓인 여러 가지 소품들은 회화예술을 설명하는 상징물로 설명된다. 즉, 활짝 펼쳐진 스케치북은 디제뇨(disegno), 즉 소묘. 석고마스크는 조각. 옷감 뭉치는 장식. 이처럼 이태리 미술이론의 개념들을 끌어다 대상물을 해석하는 건 제들마이어의 특기이다.
바트와의 논쟁 얘기를 꺼내기 전에 잠시 제들마이어의 설명 중 수정되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그가 그렇게 강조하는 모델에 대한 해석이다. 베르메르 시대 때 화가들이 꼭 참조하곤 했던 책 중에 체자레 리파의 《이코놀로지아》라는 도상학 책이 있다. 이 책은 여러 가지 개념들, 예를 들면 사랑, 우정, 믿음, 정의같은 개념들을 그림으로 어떻게 표현해야 될 것인가를 사전처럼 정리해 놓았는데, 이를 보면 화가의 모델을 서고 있는 소녀가 헤시오드가 얘기한 아홉 뮤즈 중의 하나인 클리오(Klio)라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 머리 위에 얹은 월계관과 오른손의 트럼펫, 왼손의 책은 역사기술을 담당하는 클리오가 지녀야 할 상징물들이다. 리파의 이 책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제들마이어가 어떻게 이런 실수를 하게 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화가의 모델을 클리오라고 바로 설명하고 있는 바트는 그녀의 등장에 한층 더 깊은 의미를 부여한다. 물론, 그림 속의 클리오는 진짜 뮤즈가 아니다. 그저 한 여자 모델이 클리오의 차림을 하고 있을 뿐이다. 보통 옛 그림들에 등장하는 뮤즈들은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는 존재로 묘사되기 마련인데, 여기서는 화가가 자신의 모델을 클리오로 재현시켜 다시 그림 위에 재현하고 있다. 이 이중의 재현을 바트는 베르메르의 전략으로 파악한다. 즉 화가의 ‘그리기’라는 행위가 지상의 존재를 천상의 존재로 바꾸어 화폭 위에 영원히 남길 수 있는 특별한 기술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역사기술을 담당하는 클리오가 화가의 모델을 서게 된 걸까. 여기서 역사와 회화의 대비는 우연이 아니다. 역사는 언어를 통해서, 회화는 선과 색을 이용해서 영원의 제국에 들어선다는 의중을 담고 있는 것이다. ‘회화의 알레고리’가 역사 즉 언어 혹은 문자의 상징을 빌어 재현된 건, 그림과 언어의 오랜 경쟁을 다시 빗대어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까지가 이 그림에 대한 대강의 설명이다. 그러나,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이러한 도상학적 문제가 아니다. 독일미술사학계를 뜨겁게 달구었던 두 미술사학자의 논쟁은 해석학적 입장의 차이에서 시작되었다. 줄거리는 이렇다. 구조분석으로 이름을 날린 바 있는 제들마이어는 이 그림을 세 가지 층으로 분할한다. 즉, 전경, 중경, 후경. 그런데, 주목할 점은 제들마이어의 그림 설명이 언제나 관람객의 위치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후경, 즉 화가의 모델에서부터 시작한다는 점이다. 물론, 회화라는 것이 일차원적 평면 위에 재현되는 것이기에,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눈이 가늠하는 가상의 거리감을 상정해야 한다. 제들마이어가 이 모델을 두고 파마, 즉 영광의 알레고리라고 해석한 것은 여기서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러한 잘못이야 위에서 보았듯이 몇 가지 문헌만 뒤져보면 금방 가려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림의 전체 맥락을 강조해야 한다고 말하는 제들마이어가 화면의 가운데 부분을 너무나 강조함으로 해서, 오히려 전체 화면의 구조를 파악하는데 실패를 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제들마이어를 비판하고 나선 바트의 입장이다. 그림을 뒷 배경에서부터 설명하는 건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것이 비판의 핵심이다. 그에 따르면, 전통적인 유럽 회화에서는 그림의 진행이 보통 화면 왼쪽 아래에서 시작해 오른쪽 위에서 마무리된다는 것이다. 그는 원근법의 발달이 우리 눈의 습관과 몸의 체험에서 비롯되었다고 설명하면서, 그림 감상의 원리를 ‘마주침’에 비교한다. 즉, 방금 막 도착한 사람이 그림 속으로 들어서서 거기에서 펼쳐지는 장면에 맞닥뜨린 것 같은 느낌을 전해주기 위한 하나의 도구가 원근법이라는 설명이다. 그러니, 정교하게 원근법이 적용된 이 그림에서도 감상자인 우리가 뒷배경의 모델보다는 우리 쪽에 더 가까운 전경에서 먼저 이해의 첫 단추를 끼워야 한다는 것이다.
즉, 문제는 그림을 읽는 방향이라는 얘기다. 올바른 방향을 놓칠 경우, 참된 이해를 향한 감상자의 항해는 좌초하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그림 해석의 방향이 곧 화가가 머릿속에 그렸던 작품의 이상향에 도달케 하는 중요한 키잡이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예로 독일의 르네상스 시대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 rer)의 동판화 〈성 히에로니무스〉를 보자. 상황은 비슷하다. 하나의 방이 보인다. 다른 사람이 들여다 볼 수 있도록 전면이 열려 있다. 보는 이의 시선은 화면 하단에 보이는 턱을 살짝 넘어, 휴식을 즐기고 있는 사자와 강아지를 방해하지 않도록 조용히 방에 들어선다. 왼쪽으로 난 커다란 창문에서 쏟아지는 한 무더기의 햇빛은 강아지의 잠을 돕기에 충분하고, 그 아래 기다란 의자 위에는 책과 쿠션마저 길게 누워 있다. 이 조용한 방에서 깨어있는 이는 성 히에로니무스, 성경을 라틴어로 열심히 옮기고 있는 중이다. 번역을 하는데라야 이러한 조용한 방이 제격일 것이다. 일하는 모습이 마치 명상에 잠겨있는 듯이 보이는 이 성인의 등 뒤로는 여러 가지 소품들이 벽에 가지런히 걸려 있고, 천정 위에는 호박 넝쿨 하나가 그 흔한 풍경화에서처럼 잎줄기를 늘어뜨리고 있다.
자, 어떤가. 만약 우리의 시선이 화면 가운데 위치한 중심인물 히에로니무스에서 출발하여 거꾸로 전면으로 향해 흘렀더라면, 우리는 이 방안의 분위기를 거의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작품의 작가는 보는 이로 하여금 직접 방안에 들어올 것을 권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는 이의 직접적인 체험없이는 이 그림의 구조가 제대로 파악될 리 없다. 문지방처럼 버티고 앉아 이쪽을 향해 얼굴을 돌리고 있는 사자와, 화면 윗 부분에 묘사된 방천정의 모서리 마감재, 그리고 그 천정에 달려 있는 호박 넝쿨 등은 바로 감상자의 시선으로 하여금 하나의 가상의 육체를 상정하여 직접 그림 안으로 들어서게끔 유도하고 있다. 비록 한 장의 종이 위에 찍힌 판화이긴 하지만, 미술가가 사용하는 일차원의 테크닉은 감상자의 육체적 개입으로 인해 그 한계를 극복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우리의 눈의 활동은 동시적이라는 사실이다. 비록 순서가 있기는 하겠지만, 그 사이의 시간의 차이란 감지할 수 없기 마련이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해석의 방향이란 어디까지나 언어로 설명된 작품 설명 텍스트의 방향을 일컫는다. 왜냐하면, 오늘날 현대인의 미술감상의 시작은 미술작품 자체보다는 그것을 설명한 해석을 읽는 것에서 먼저 시작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어떤 해석에 귀를 기울이느냐에 따라 올바른 작품 이해의 향방이 결정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다음 기회에는 이러한 해석의 방향을 논의의 중심으로 끌어들인 장본인인 독일의 미술사학자 하인리히 뵐플린(Heinrich W lfflin)의 얘기를 들어보도록 하겠다. 그는 라파엘의 〈시스틴 마돈나〉의 예를 들어 그림 해석의 방향 중 ‘앞과 뒤’가 아닌 ‘오른쪽과 왼쪽’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우리 눈에 아주 익숙한 명작들의 좌우가 바뀌었다고 상상해 보자. 예를 들어, 다빈치의 〈모나리자〉의 슬라이드를 좌우가 바뀌도록 거꾸로 뒤집어 보면 우리는 아주 다른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우리의 그림 읽기의 여정은 앞으로도 계속된다.


이현애/미술사

장명훈 ▒

국번없이에 베르메르 그림을 볼 수 있는 사이트가 적혀 있습니다. 물론 찾아야하는 번거로움은 있겠지만서도.

  2002/11/08   
번호별로 보기
여러개의 게시물 정리 제목별로 보기 이름별로 보기 날짜별로 보기 조회별로 보기
320     [re] 아라키와, 장갑차 zabel 2002/12/04 505
319     [re] 브로드밴드 마스터 [4] 2003/09/23 465
    [re] 무제 [1] 장명훈 2002/11/08 542
317     [re] 랭보님에게 알려주고 싶은 이야기 [5] intuition 2003/11/17 370
316     [re] 김기찬 사진에 대한 글 zabel 2003/09/09 408
315     [re] 관련기사 [3] zabel 2003/02/16 508
314     [re] 공간을 위하여 [1] zabel 2003/11/03 382
313     [re] [펌]포럼A 주재환 인터뷰(잘린 것 나머지) [1] zabel 2002/12/20 8528
312     [re] [펌] 雨期의 기억 [11] 양정은 2003/12/03 428
311       [re] [펌] 雨期의 기억 [1] 양정은 2003/12/03 377
310         [re] [펌] 雨期의 기억 [2] 수 2003/12/04 379
309     [re] [전시인상] 진경, 그 새로운 제안. [1] 2003/10/06 478
308     [re] [전시]환각의 공간 [1] zabel 2003/04/14 428
307     [re] [전시]이정진 사진전 장명훈 2002/10/28 953
306     [re] [전시]마이클 케냐 [1] 2003/09/08 438
305     [re] [잡글4] 지나가는 이야기 2 [5] 2003/09/29 444
304     [re] [기사]김기찬의 길 혹은 옐로 브릭 로드 [1] intuition 2003/10/01 412
303     [re] [공지]a ear-end part _ Y2 [5] zabel 2003/12/24 408
302     [re] [za]갯벌에 꽃핀 바비인형 [1] 2003/09/29 442
301     [re] Zwelethu Mthethwa [4] zabel 2003/07/11 392
 ◀ [1]..[51][52] 53 [54][55][56][57][58][59][60]..[68] ▶ 
Copyright 1999-2026 Zeroboard / skin by uZ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