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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abel  [homepage]님께서 남기신 글 (2003-04-21 21:16:55, Hit : 597)
[전시]도감전








도감전 (圖鑑展)을 위한 정언적 서론

최봉림 CHOI Bong-Lim (사진비평)


도감은 일정한 광물계, 식물계 그리고 동물계의 구성하는 표본들을 채집한 후, 그것들이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형상들의 구조를 그림으로 그린 후, 그 특징을 설명하는 책자이다. 그런데 이 도감이라는 낱말에서 흥미로운 것은 그림이라는 의미의 도(圖)와 거울이라는 뜻의 감(鑑)이 하나를 이룬다는 것이다. 도감 속의 그림은 현실에 존재하는 사물을 거울처럼 반영한다는 의미로 그림의 圖와 거울의 鑑이 합해졌다면, 도감은 그야말로 자연계 혹은 인공물의 표본들을 찍은 사진첩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인류가 발명해낸 이미지의 재현수단에서 사진만큼 현실을 거울처럼 반영하는 이미지는 없기 때문이다.

사실 사진과 거울은 중요한 점을 공유하고 있다. 이 둘 모두는 현실의 사물이 가시영역 안에 있을 때만 그것을 재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거울 앞에, 필름을 장전한 사진기 앞에 사물이 ‘실제로’ 존재할 때만, 거울과 사진은 그 사물을 재현할 수 있다. 세상에서 제일 예쁜 여자를 보여주는 요술거울이나, 구천을 맴도는 망령을 찍는 사진기는 우리가 알고 있는 거울과 사진이 아니다.

아울러 거울과 사진은 현실의 대상을 있는 그대로 가감 없이, 그 프레임 속에서 재현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거울의 이미지나 사진이미지는 현실의 대상을 그것이 발산하는 반사광을 통해 재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울이미지는 대상이 거울의 가시영역에서 사라지면 그것과 함께 이미지도 사라진다. 거울에 상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대상은 반드시 거울의 가시영역에 있어야만 한다. 반면 사진은 한번만 사진기 렌즈의 가시영역에 대상이 들어간다면, 항구적으로 그 대상은 이미지로 고정될 수 있다. 이러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거울을 의미의 메타포로 삼는 ‘도감’에 가장 근접하는 이미지는 의심할 여지없이 사진일 것이다.

그런데 일종의 모순과도 같은 현실이 존재한다. 도감의 본뜻에 가장 부합하는 듯한 사진이미지는 1839년부터 상용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도감의 이미지는 사진으로 완전히 대체되지 않았다. 여전히 많은 도감은 실수의 위험이 있고, 더 많은 돈과 시간의 수고가 요구되는 손으로 그린 그림을 도판으로 사용하고 있다. 사진은 광물이나 식물 혹은 동물을 보다 정확하게, 보다 간편하게, 그리고 보다 재빨리 재현함에도 불구하고, 일부 도감제작자들은 사진을 보거나, 혹은 실물을 관찰하며 그린 그림으로 도감의 도판을 사용하고 있다. 그림을 사용하는 도감의 제작자들은 시대를 거꾸로 사는 사람들이 아니면, 사진을 경멸하는 사람들로 보이기 십상이다. 그러나 정작 이유는 다른 곳에 있다.

예를 들어, 한 식물도감을 위해 사진으로 소나무를 찍는다고 가정해 보자. 그런데 사진이미지는 한 소나무 표본의 개체성 individuality과 유일성 singularity을 강조할 수밖에 없다. 새로 입주한 아파트의 조경을 위해 심은 소나무는 경주 남산의 소나무와는 판이하게 다르고, 군락을 이룬 소나무조차도 하나 하나를 살펴보면 적지 않은 차이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구체적 현실에 존재하는 소나무를 찍은 사진은 보편적 일반성을 간직하고는 있지만, 단 하나 밖에 존재하지 않는 소나무의 개체적 이미지이다. 언어 문법적으로 말한다면, 사진의 소나무는 ‘소나무’라는 보통명사 common noun라기 보다는 일종의 유일무이한 고유명사proper noun이다.

배병우가 찍은 경주남산의 소나무는 일반 소나무를 총칭적으로 대표하기보다는, 신비롭게 승화된 ‘경주남산’의 소나무이다. 새로 지은 아파트 구석에 심겨진 소나무 역시 ‘특정 아파트 단지’의 소나무이지, 소나무에 대한 ‘도감’의 정의를 상기시키는 소나무가 되지 못한다. ‘고유명사’로서의 소나무만을 찍는 사진으로는 “나무껍질은 검붉고 비늘 모양이며 한 눈에서 두 잎씩 모여 나는 늘 푸른 큰키나무”를 재현하기가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분명 만만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러한 소나무의 특성과 잎의 ‘일반’ 구조는 약식그림인 도(圖)로 보다 손쉽게 재현될 수 있다. 현실에 존재하는 특정 사물을 그리는 화(畵)나 그것을 광화학적으로 재현하는 사진으로는 소나무의 일반 특성과 구조만을 시각화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야기한다. 많은 백과사전들과 도감들이 여전히 사진을 멀리하고, 그림 도판을 선호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도감의 도판은 한 종류의 전형 type을 재현하는 것이지, 결코 한 종류에 소속된 특정한 예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어떤 종과 유에 소속된 구성물, 구성원들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구조와 특징을 명료하게 시각화하는데 도감의 존재이유가 있는 것이지, 그 개체들이 또한 갖고 있는 부수적인 형상, 예외적인 일탈, 우발적인 변형을 기록하는데 도감의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비유적으로 동물의 예를 들어 말한다면, 종과 유의 명확한 형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온갖 다양한 외양의 껍질과 살을 발라내어, 뼈만을 보여주어야 한다. 해부학의 도감처럼, 뚱뚱한 사람이든, 마른 사람이든, 여자이건, 남자이건, 혹은 어른이든, 아이이든, 사람이면 모두다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장기의 구조를 시각화해야지, 관능적인 한 여인, 혹은 반항적인 한 젊은이를 기념하는 ‘초상’이어서는 안 된다. 도감주의자는 일종의 ‘구조주의자’이지 ‘리얼리스트’, ‘이상주의자’가 아니다.

이상일, 정주하, 오형근이 기획하고 참가한 ‘도감전’의 성공이 쉽지 않아 보이는 것은 사진이라는 ‘고유명사’ 채집기로, ‘보통명사’를 지향하는 도감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2002년의 ‘인물 도감전’이 보여줬듯이, 현실에 존재하는 10대 중반의 여학생들, 할머니들, 청년들이라는 유일 무이한 개체들을 통해, 즉 서로 다르면서도 공통점을 지닌 여러 다양한 고유명사들을 통해, ‘여고생’, ‘으므니’, ‘20대 남자’를 총칭적으로 지시하는 보통명사에 도달해야 하기 때문이다. 분명, 현실의 모든 사물은 보통명사이면서 고유명사이다. 단 하나 뿐인 개체이지만, 종(種)과 유(類)에 소속되면서, 그것의 공통특징과 구조를 간직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종과 유의 공통특성을 때에 따라서는 자신만이 갖고 있는 개체성과 유일성으로 가리우고 약화시키고, 경우에 따라서는 강화시킨다. 따라서 ‘도감전’의 작가들이 그들이 합의한 ‘도감’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종의 구조와 유의 특징을 무한히 감추고 변질시키는 개체들의 여러 양상들을 제거하는 방법을 고민하여야 한다. 혹은 그와는 반대로 개체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불변특성들에 효과적으로 도달하는 방법을 숙고하여야 한다.

서구는 사진의 발명과 더불어, ‘유형학 typology'이라는 이름으로 ‘도감’에 이르는 여러 방법을 지속적으로, 효과적으로 연구하여 왔다. 우선 보통명사의 구조와 특성을 파악하기 위해 특정한 종과 유에 소속된 구성원 혹은 구성물들을 다량으로 채집했다. 채집된 다양한 개체들의 비교와 분류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여러 형식적 전략들도 입안하였다. 정면성과 무표정의 선호, 균일한 조명, 일정한 촬영거리, 동일한 배경, 이미지의 선명성 등은 이제는 상식화된 규율들이다.

무엇보다 ‘도감’에 이르는 가장 큰 장애물은 사진작가들 내부에 있다. 작가들 자체가 이데올로기, 취향, 감정, 정신적 외상 trauma에 흔들리는 존재이기 때문에, ‘도감’ 대상을 객관적으로, 엄정하게 재현한다는 원칙에서 조금씩 비켜나간다. 그들은 종과 유의 구조적 특질에 도달하기 위해 채집하는 대상들에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주관적 요소들을 투사한다. 그리하여 개체들이 공유하고 있는 특질과 구조를 객관적으로 파악하려는 시선에 혼돈을 일으키거나, 혹은 작가가 욕망하는 바대로 분석의 결론을 은연중에 유도하고자 한다. 서구의 유형학적 사진들이 이미 얘기한 형식적 규범을 발명하고, 그것을 힘들게 준수하려 하는 것은 바로 객관적 인식의 장애물로 작용하는 이 주관성의 투사를 미연에 차단하려는 방책에서 비롯된다. 서구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 도상 주제의 발견, 이제껏 유형학적 사진이 보여주지 못한 새로운 도상 규범의 입안은 앞으로 ‘도감전’을 기획한 세 작가가 획득할 열매인 동시에 감당해야 할 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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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감의 욕망

이영준 <이미지비평, 계원조형예술대학 교수>


이 전시의 의미를 말하려면 양적, 질적으로 비약적으로 발전한 한국의 사진이 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먼저 지적하고 넘어가야 겠다. 특히 이 전시의 새로움을 분명하게 바라보려면 그것이 어떤 지평에서 펼쳐지고 있는지, 어떤 토대 위에서 자라나온 것인지를 밝혀야 하는 것이다. 그 토대란 한국사진의 진부함과 획일성이다. 그 진부함과 획일성이라는 가면 뒤에는 주관적 서정주의와 애매한 상징주의라는 질병이 도사리고 있다. 도대체 사진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도 분명치 않고, 그저 어슴푸레한 이미지 뒤에서 존재하지도 않는 내면성을 표현하고 주장하지만 내면성의 개념에 대해서 누구도 책임 있게 말하지도 않는 상황이 한국의 사진에 드리워져 있는 먹구름이다.

특히, 요즘 같이 사진이 주요한 미술관과 갤러리에서 많이 전시가 되고 있는 시점에서는, 그런 곳들이 미술의 장소라는 점을 생각해 볼 때, 동시대의 미술이 보이고 있는 행보와 비교해 볼 때 사진이 보여주는 궤적은 너무나 구태의연하다고 볼 수 있다. 인식론적으로나 기능적으로나 사진의 영역과 미술의 영역은 다를지 몰라도, 아무래도 양자가 비교되는 이유는 둘 다 ‘미술관’이라는 같은 자리에서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직은 ‘사진관’이라는 것은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다. 기껏해야 사진미술관이나 사진박물관이 있을 뿐이다) 한국의 동시대 사진이 미술에 비해서 가장 뒤떨어지는 지점은 개념적 사고가 약하는 것이다.

그것은 시각적 표상의 모드로서의 사진에 대한 사고가 약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사진이 단순한 자료가 아니라 예술적 반성의 지점이라면 물어야할 것들이 너무 많은데, 그런 물음들이 제기되거나 작품 속에 녹아들지 않은 채 많은 사진들이 전시된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그 물음들 중 극히 일부만 나열하자면 다음과 같다.

사진의 의미를 구성하는 것은 어떤 코드인가? 그 코드는 예술의 테두리 내에서 오는가, 아니면 다른 활동이나 학문의 체계에서 오는 것인가? 시각적 표상과 그것을 인식하는 주체는 무엇인가? 다양한 담론들이 만나는 자리인 사진을 미술의 담론을 위한 장소인 미술관에서 전시하는데 무슨 문제는 없는가? 미술관에서는 예술적 코드의 사진만이 전시될 수 있는가? 예술사진은 예술 자체의 테두리를 부술 만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가? 지금 사진을 보여주고, 사진을 통해 어떤 것을 보여주는 표상의 모드나 체계는 정당한 것인가? 사진을 통한 대안적인 표상의 모드는 없는가? 사진이 기존의 시각예술에 대한 대안적 표상을 제공할 수 있는가?

<도감전>은 주관적 서정주의와 애매한 상징주의의 늪에서 신음하는 한국의 사진계에 대한 대안이며, 또한 도감이라는 형태를 통하여 새로운 표상적 모드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그 핵심은 ‘도감’이라는 형식을 통하여 다른 표상의 모드를 실험해 본다는 것이다. 그 표상의 모드의 핵심은 사진과 사물과 시선이 만나는 그 지점에 다르게 짜본다는 것이다. 대체 사진가에게 사물이 뭐길래 그럴까?

인간이 사물을 가두려 할 때 물체는 저항한다. 인간과 사물의 변증법은 인간의 역사를 통하여 계속해서 서로를 부인하고 서로를 인정하면서 진행되어 왔다. 사진의 발명과 더불어 양자의 변증법은 새로운 국면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여, 인간은 부드럽게, 상징적으로 사물을 가둘 수 있게 된다. 사물은 더 이상 조야한 물질적인 상태에서 인간의 가두려는 욕망에 저항하기 힘들어진다. 그런 가두는 장치로서 인간이 발명한 것 중의 하나가 도감이다. 우리가 초등학교 때 보던 자연학습도감 에서부터 의학이나 생물학, 지질학, 인류학, 천문학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펼쳐온 관찰과 기록의 역사에서 도감은 필연적으로 생산된다. 사진과 도감이 결합할 때 사물을 가두려는 인간의 욕망은 고차원적으로 도약한다. 사물은 관찰되고 기록될 뿐 아니라 학문의 각분야에 따라 체계화되고 분류되기 때문이다. 이제 사물의 상징성에는 각 분야의 과학이라는 좀 더 고차원적인 상징성이 부여된다.

한편, 많은 사진가들이 그런 도감의 형식을 차용하여 작업하는데, 1920년대에 독일인의 얼굴을 총체적으로 기록하여 분류한 아우구스트 잔더에서부터 비슷한 시기에 식물의 형태들을 꼼꼼히 기록하여 정리한 칼 블로스펠트 등의 독일작가들, 다큐멘타리 사진과 도감의 형식을 다소 느슨하게 결합한 워커 에반스, 좀 더 악질적으로 인종적 분류체계에 맞춰 유태인의 얼굴형태를 분류해낸 나치에 이르기까지, 도감적인 사진은 다양한 문화적이고 역사적이며 정치적인 맥락에서 상징적이고도 구체적인 기능을 하게 된다. 단지, 실제의 과학에서 쓰이는 도감과 이들 작가들이 작성한 도감은 그 기능과 사용처가 다르다는 점을 지적해두어야 겠다. 나치가 유태인의 얼굴도감을 만든 것은 그들을 박해하기 위한 것이었던 반면, 작가들의 도감은 사물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해와 박해는 종이 한 장 차이이다. 근대 자본주의로 들어서면서 인간은 자연과 사물을 단순히 이해할 뿐 아니라 그것들을 이용하기 시작했고, 그런 욕망은 필연적으로 사물을 지배하려는 욕망으로 연결된다.

이제 여기서 보려는 것은 그런 맥락과는 좀 거리가 먼, 한국에서의 도감사진이다. 일단 말해 두어야 하는 것은 서구 백인들, 특히 독일인들이 작성한 도감과 한국인들이 작성한 도감에는 여러 가지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최근 한네 다보펜(Hanne Darboven)의 작업에서 보여지듯이, 독일인들은 1920년대나 21세기에나 일정한 분류기준과 체계를 두어 사물을 가두는데 큰 관심이 있었던 반면, 한국인에게는 그런 기질은 상당히 약한 편이다. 한국인 스스로 한국인을 가리켜 독종이라고 표현하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한국인은 한번도 인간을 사물처럼 냉철한 체계에 따라 분류하고 이용하고 탄압하고, 심지어 살해한 적이 없다. 폭력적으로 나타난 유태인 박해가 겉으로는 합리성과 과학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반면, 한국에는 사람을 죽이고 탄압하는 과학은 존재하지 않았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유명한 책 <계몽의 변증법>에서 썼듯이, 나치의 비이성은 서구의 합리성의 또 다른 변증법적인 얼굴인 반면, 한국에는 계몽의 변증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한국에서 계몽이라는 것이 바깥에서 주어진 것인 반면, 서구의 계몽은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라는 차이에도 있다. 서구에서의 계몽의 변증법의 가장 큰 특징은 스스로 중세의 미몽에서 깨어나기는 했으되 미몽에서 깨어나게 만들어준 이성과 합리성의 굴레에 스스로 갇혀 버린다는 점이다. 변증법은 어떤 사태가 그 반대의 사태를 동시에 띠면서 양자 사이의 모순이 양가성을 가지고 진행되는 것을 말하는데, 한국에서의 이성과 합리성은 아직도 미완성일뿐더러, 스스로 전개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충분히 변증법적인 과정 속에 놓여있지 않다.

도감사진에서의 이런 변증법에 대해서는 “신체와 아카이브”를 쓴 알란 세큘라가 집중적으로 논의하고 있다. 그는 그 글에서 변증법이라는 말은 한번도 쓰고 있지 않지만 그가 펼친 내용은 인물사진이 처한 변증법적인 운명에 다름 아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사람을 멋지고 존엄하게 표현하던 인물사진이 경찰이나 기타의 근대적 관리기관의 손에 들어갔을 때 그 얼굴은 잠재적인 범인의 얼굴이 된다는 것, 그리하여 인물사진의 의미가 180도 방향을 틀게 된다는 것은 도감사진의 변증법을 잘 말해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진을 정리해두는 체계인 아카이브는 바로 그 합리성에 의거하여, 인간을 지배하고 관리하는 수단이 되며, 이것이 근대 사진의 운명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여기서 세큘라는 사진도 계몽의 변증법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의 사진가들이 작성한 도감사진에 계몽의 변증법이 작용하고 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물론, 한국의 사진가들도 사물을 가두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으나, 그들은 독일인처럼 그렇게 차갑고도 비인격적으로 자신들의 사물을 다룬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작가적 스타일이라는 다분히 주관적인 색채를 사진에 입혀서 도감을 만들고 있다. 따라서 이런 도감에 이름을 붙인다면 개인적 관심사와 취향의 도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이 도감들은 사물의 체계를 어느 정도는 보여주기는 하지만, 작가적 취향의 매핑을 보여주는 것이다. 어쩌면 그런 의미에서 차가운 보편성을 지향하고 있는 서구의 도감보다 다분히 주관적이고, 또 다른 방식으로 상징적이다.

예를 들어서 범죄인물형을 찾아내기 위해 범인들의 얼굴사진을 체계적으로 모아서 통계조사하듯이 작성된 도감 속의 인물들 얼굴은 다들 ‘범죄형(criminal type)’이라는 원형, 혹은 동질적 보편성을 부분적으로 상징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즉 어떤 인간이 범죄인이 되는데 필요한 특질을 어느 정도는 가지고 있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세큘라가 지적하고 있듯이, 그런 것은 아무리 냉정하고 체계적인 분류와 분석, 해석의 방법을 쓰고 있다고 해도 결국은 사이비과학(pseudo science)일 뿐이다. 왜 그런가. 우선, 추상화된 체계 속에 존재하는 범죄형은 실제의 인간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통계적인 인간형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추상형을 실제의 사람에 적용하여 어떤 특정한 집단의 사람은 이러저런 특질이 있으니 우수하고, 어떤 다른 집단의 사람은 다른 특질들 때문에 열등하다고 판단한다면 그것은 큰 오류일 수 밖에 없다. 나치의 오류는 사이비 과학을 실제의 인간에 적용했다는데 있고, 그것이 큰 역사적 비극을 가져 왔다는데 있다.

그렇다면 한국의 사진가들은 도감사진을 통해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가? 만일 그 사진에 도감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면 잔더나 블로스펠트, 나치와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이다. 그것은 ‘동시대 한국사진가들의 취향의 도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는 동시대 시각문화의 특성과 기능을 설명해야 하는 평론가에게는 좋은 자료이자 발판이 된다. 동시대의 사진가들이 어떤데 관심이 있고, 그 관심을 어떤 식으로 사진으로 형상화하는지에 대한 지형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즉 사진가들의 욕망의 지형도를 보여주는 도감이라는 것이다. 아마 이 정도가 한국의 사진가들이 할 수 있는 맥시멈이 아닐까 싶다. 왜냐면 계몽의 변증법을 겪지 않은 한국의 사진가들에게는 서구적인 분류와 체계화는 애초에 체질에 들어 있지 않고, 한국사람 특유의 주정(主情)주의는 이들에게는 다소 약하게 작용하고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 흔적을 내비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사진가들에게 사물을 가두려는 욕망은 사물과 친하려는 욕망과 섞여 있다. 서구인들이 사진을 통해 사물을 가둘 수 있었던 것은 시선과 욕망을 분리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시선과 욕망이 한데 얽혀 있는 대표적인 사례가 시각문화의 이론가들이 절시증(竊視症; scopophilia)이라고 부르는 현상이다. 절시증에서는 보는 것은 욕망의 한 형태이다. 어떤 이론가는 “눈이 발기한다”는 말을 쓰기 조차 하는데, 이는 눈과 신체적 욕망은 뗄 수 없는 관계임을 말하는 것이다. 반면, 서구의 근대과학은 욕망의 혐의를 벗어나기 위해 눈과 신체를 떼어놓으려 애쓴다. 인간의 주관이 개입돼 있지 않은 객관적인 묘사를 위해 15세기부터 카메라 옵스쿠라를 발명하고, 이어서 19세기에 사진을 발명한 것, 그리고 현미경, 망원경, 레이저와 적외선을 이용한 각종 보는 장치들의 개발은 눈과 신체를 떼어 놓기 위한 노력들의 산물이다. 따라서 이런 장치들에 의존하는 근대과학의 관찰에서는 눈, 혹은 시선에 욕망이 끼어 들어갈 자리가 없어 보인다. 과학은 객관적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이론가들이 주장하듯이 과학도 대상을 이해하고, 나아가 지배하고 통제하려는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과학과 욕망은 별개의 것이 아니다. 단지, 욕망이 다른 이름을 달고 나타나고 있을 뿐이다. 여기서 객관적인 시선은 분열을 겪는다. 즉, 객관성의 겉모습 뒤에 욕망의 또 다른 모습이 있는 것이다. 물론 이때의 욕망은 조야하고 원시적인 차원이 아니다. 그 분열은 체계성과 배타성, 미몽으로부터의 해방과 또 다른 지배, 보편성과 특수성 등 여러 자리에서 나타난다. 도감은 합리적인 체계를 지향하지만 그것은 체계에 맞지 않는 것은 배제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단지 배제해내 버린 변이들이 보이지 않게 비가시성의 그늘 속으로 감추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시선은 인간의 인식을 모든 억압과 편견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역할을 했지만 그 시선의 체계가 다시 인간과 사물을 좀 더 전문적이고 치밀한 지배의 체계 속에 넣었다는 점에서 아이러니한 분열이 생겨난다. 또한 도감은 보편적인 유형을 지향하지만 그런 유형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으며, 실제로는 개별적이고 특수한 ‘사례들’ 뿐이라는 사실은 도감이 욕망하고 있는 그 목표는 도달하기 어려운 것이라는 사실을 반증할 뿐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사진가들을 움직이는 욕망은 무엇일까? 오형근의 여고생 사진에는 두가지 차원의 욕망이 얽혀 있다. 그것은 우선 여고생을 보는 작가 자신의 관음증적 시선이다. 작가는 여고생들을 카메라를 통해 들여다 보고 있다. 물론 작가와 여고생은 상호합의하에 작업하고 있지만, 작가가 보고 있으리라고 여고생이 상상하는 그 국면 이외에도 작가는 많은 것을 볼 수 있으며, 더군다나 카메라가 그 시선을 매개하고 있을 때 작가의 의도와도 별개로 카메라가 여고생 스스로도 몰랐던 부분, 예를 들어 얼굴 한구석의 여드름이나 다리에 난 종기 등이 드러나기 때문에 작가의 시선과 그 시선을 예상하는 여고생 모델의 시선 사이에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 카메라의 시선이 또 다른 관음증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진을 통해서 본다’는 특징이 여기서는 충분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사진이 사물의 모습을 왜곡한다는 사실이 여기서는 사물의 감춰진, 혹은 평소에 주목받지 못하던 것을 보게 만든다는 미덕으로 작용한다. 그런 미덕은 여고생 자신도 몰랐던 자신의 욕망을 잘 드러내주는데, 그것은 자신을 ‘어떠한 것’으로 표상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즉 이 여고생들은 연예연기학원 수강생들로서 미래의 배우나 모델을 꿈꾸는 인물들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보다도 자신에게 가해지는 욕망 어린 시선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어린 나이에 이미 현시욕의 화신이다. 단지, 그들이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모르고 있을 뿐이다. 그들의 외모는 전적으로 그런 욕망의 소산이다. 그들의 얼굴표정, 몸가짐, 헤어스타일, 교복의 허리선, 바람에 날리는 머리결에 이르기까지, 섬유에 물감이 베이듯이 그런 욕망이 속속들이 베어 있다. 평소에 그들은 ‘무엇무엇이 되고 싶은 나’라는 식으로 아주 애매하게만 표상되기 때문에 스스로나 주변사람에게나 그런 욕망의 디테일을 들키지 않는다. 그러나 카메라는 그것을 놓치지 않는다. 그리하여, 매우 수치스럽게도, 이 인물들은 스타가 되고 싶고 유명해지고 싶고 매력적으로 되고 싶은 욕망이 머리카락 끝에까지 숨어 있는 그 모습을 들키게 된다. 만일 카메라가 없었더라면, 그리고 여고생들을 그런 미장센 속에서 사진 찍은 작가가 없었더라면 이 여고생들은 그런 모습을 전혀 들키지 않은 채 순조롭게 배우나 모델이 되거나, 아니면 순조롭게 거기서 탈락하여 도로 모범생이 되었을 것이다. 결국 작가/카메라의 시선의 욕망과, 여고생의 현시욕이라는 두가지 욕망이 겹치는 곳에 인물이 평소에 의식하지 못했으나 실은 그의 무의식 속에 깊숙이 숨어 있는 캐릭터라는 새로운 타입이 생겨난다.

정주하의 건축/풍경사진에도 도감의 욕망이 작용하고 있는가? 여기에도 상충하는 두가지 욕망이 얽혀 있다. 분류가능한 사물과 분류불가능한 사물을 동시에 하나의 도감에 넣으려는 욕망이다. 건축물에 대한 수많은 책들이 보여주듯이, 건축물은 얼마든지 분류가 가능하다. 어떤 건축물이든지 나름의 범주 속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주하의 사진에서도 광주 상무지구의 관공서, 아파트, 쇼핑센터 등 다양하게 분류가능한 건축물들의 유형이 등장한다. 그리고 정주하의 사진은 신시가지를 메우는 건축물들에 대한 어느 정도의 분류적 지식을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풍경은 분류할 수 없다. 풍경에 등장하는 나무와 돌, 흙과 구름의 종류는 분류할 수 있지만, 그것들이 한데 얽혀서 나타나는 풍경, 혹은 장면은 일회적이며, 근본적으로 분류불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정주하가 묘사한 풍경들은 도감의 형식에 들어올 수 없는 것이다. 그의 사진에는 건축물들의 유형 뿐 아니라, 그것들이 처해 있는 장소들-길, 풀밭, 그것들 사이의 여백 혹은 버려진 땅-가 같이 묘사돼 있고, 나무나 전봇대들은 일부러 사진의 구도를 흐트러트리는 위치에 (부)적절히 배치돼 있다. 그 결과, 상무지구를 메우고 있는 건축물들의 (비)역사성이 한낮의 쨍쨍하고 평면적인 햇살 아래 모든 입체감과 개성을 빼앗기고 발가벗기운 채 드러나고 있다. 그것들은 사진가의 시선에 의해 발견된 풍경이고, 그 발견의 순간 속에 이 사진의 역사성이 들어 있다. 물론 더 큰 틀에서 1980년 5.18 이래로 민중봉기의 도시에서 신시가지로 둘러싸인 탈근대적 도시로 변모한 광주의 역사성을 추적해 볼 수 있으나, 그런 역사성보다는, 작가가 어떤 길거리, 어떤 건축물 앞에 서서 사진을 찍을 때의 그 짧은 찰나의 역사성이 훨씬 우위에 있다. 즉, 찰나의 역사라는 단편들의 무수한 모임이 거대담론으로서의 역사인 것이다. 그리고 살아 있는 역사는 내러티브로 꾸며지고 담론의 옷을 입고 정당성과 평가의 수사로 치장되기 전에, 살아 있는 개개인, 사진가가 그 살아 있는 순간에 체험한 그 순간들이다. 그 안으로 메시아가 들어오든지 권태의 지옥이 들어오든지 꼭 어떤 것이 낫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순간은 살아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장구한 역사의 연속성 속에 억지로 편입되어 지나친 의미를 부여받는 순간은 죽은 것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진이 중요한 이유도 거대담론의 일부로서가 아니라 작가의 시선이 체험한 살아 있는 순간의 증인이기 때문이다.

그런 순간들은 근본적으로 분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타오르는 불꽃을 분류할 수 없는 것과 같다. 풍경이나 장면도 하나의 불꽃 같이 타오르기 때문에 분류할 수 없다. 그리고, 풍경을 사진 찍는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풍경 속에 사진가의 신체를 위치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환경 속에 섞여 들어가지 않으면 풍경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풍경사진은 인물사진이나 정물사진과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론적 위상을 지니고 있다. 풍경 속의 시선은 작은 한 점에 불과하다. 사실 풍경사진은 풍경을 보고 찍은 어떤 것이라기보다는 풍경 속에 처해 있는 자기 자신이 흘려버린 어떤 자국과도 같은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도감의 욕망은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분류가능한 것과 분류불가능한 것 사이의 갈등은 도감의 욕망을 분열에 처하게 한다. 그러나 그 분열이야말로 우리가 논리와 비논리, 이성과 비이성 사이에서 살아가는 모습이 아닐까?
이상일의 사진에서도 분류가능한 대상과,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그리고 그것들이 처해 있는 분류불가능한 장면들 사이의 분열은 중요한 주제로 떠오른다. 물론 이 주제는 작가가 작업의 목표로 했던 것은 아니다. 그가 과거 신앙숭배의 대상이었던 석물들이 길가에 전시된 모습을 찍은 것이나, 거제도포로수용소의 밀랍입형으로 된 디오라마를 찍은 것은 다 사물들이 얽혀 있는 장면들을 보여준다. 여기서도, 정주하의 사진에서와 마찬가지로 도감화하려는 욕망은 사물의 두가지 상태 사이에서 분열에 처한다. 그러나 그 분열은 이 글의 맨 앞에서 언급했던 사물의 저항과는 다른 얘기다. 사물은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장면 속에 처해 있을 뿐이다. 우리가 도감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사물을 장면에서 끄집어 내서 도감을 위한 세팅 속에 넣을 때 뿐이다. 그 세팅이란 범인사진이나 실험결과를 찍은 사진에서 볼 수 있는, 단순화된 배경이고 규격화된 프레임이고 균등한 빛이고 객관적인 앵글과 시선이다. 그러나 사물들이 장면 속에 처해 있을 때는 그런 것과는 존재론적으로 근본적으로 다른 상황에 놓여 있다. 결국 도감화하려는 시도는 성공하지 못한다. 이상일이 사진 찍은 삶의 상황 자체를 도감화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실패는 한국의 사진가들의 역사적 체험에서 계몽의 변증법이 차지하는 비중이 아주 작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장면 속에 처한 사진가가 셔터를 누르는 그 짧은 순간 속에는 분류나 표준 같은 큰 물건들은 들어오기 힘들어 보인다.
그렇다면 도감에 대한 욕망은 욕망으로 그치고 말 것인가? 그리고 도감이 실현하려고 했던 과학적 관찰의 시선도 분열된 욕망에 그치고 말 것인가? 서구의 도감이 겪었던 분열들을 한국의 사진가들도 그대로 겪을 것인가?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이 당장 나올 수는 없지만, ‘도감’이라는 표상의 모드에 대해 사진을 통해 탐색한다는 점, 도감이 무엇을 보여줄 수 있고 무엇은 보여줄 수 없는지, 거기에 어떤 욕망과 분열이 깃들어 있는지 보여준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 전시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zabel ▒

그렇게 생각지 않으려...노력을 참 많이 한다고 생각합니다만..
아무래도 이 전시는....구립니다. 여러가지 정황이나 각 작업/작가의 연결 고리등도 혐의가 짙습니다만, 그런거 보다.
이런 태마로 이런 글들을 배경으로 깔면서 나오는 저 제목의 사진들이 목표로 하는 것들이... 개인적으로...구려보입니다.

  2003/04/22   
▒

오늘 점심 시간을 이용해서 서울역에서 충무로까지 걸어가서 전시회를 둘러보고 왔습니다.

개인적으로 사진들이 맘에 안들더군요. 이제 한시대를 풍미하던 작가들이 갔다고 생각되는 전시회였습니다. 오형근씨는 전에 소녀 시리즈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고, 이상일씨의 작품은 개인적으로 사진을 찍은 관점이 맘에 안들더군요. 같은 형식을 작업하는 외국 작가들과 너무 비교된다는 느낌을 지울수 없습니다. 특히 pkm갤러리에서 하는 전시회에 스기모토 사진과 비교한다면 너무 무리일까요. 여하튼 환경이 그래서 그런지 아니면 작가의 관점의 한계인지 모르겠지만, 전쟁 도감은 약해보입니다. 정주하씨 사진은 할말 없습니다. 넘 썰렁해 보인다는...

여하튼 점심 먹고 날씨 좋아서 열심히 걸었었습니다. 보람은 별로 없었지만...

  2003/04/24   
zabel ▒

오늘....갔다왔습니다만.
세 작가를 모두, 다시 볼 수 있게되었습니다. 작가로서의 성분을 분석할 수 있게 되었으니, 저로선 도감전 최고의 수확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본인들은 사람들이 전시 초입에 이영준이 썼던대로 생각할 꺼라고 생각할까요. 그것마저도 세 사진가에게 우호적이기만한 문장은 아닙니다만.

  2003/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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