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디셔먼을 여성성, 내지는 페미니즘 비스구리로 보는 것에...좀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입장이다.
언타이틀드 필름 스틸...시리즈 같은 것은 읽을 수 있는 방법이 매우 풍부하다고 생각하는데, 너무 정치성 있게만 해석하는게 어쩐지 재미없는 것같아서.
아래 쓰여 있는 관점도 주지할만 하지만, 지금까지 신디셔먼 사진을 이야기하던 라인안의 이야기이긴 한 것같다.
다른 열분들은 어케 생각하시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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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디 셔면 <무제 #172> 컬러프린트 186.4×124.6 cm 1987
여기 극명한 이미지를 보여 주는 신디 셔먼의 1987년 사진작품이 있다. 사진에는 ‘징그럽게’ 보이는 것들이 바닥에 쏟아져 놓여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시간이 오래 지났는지 부패되어 곰팡이가 극성스럽게 퍼져 있다. 이 이미지는 보는 사람들에게 어떤 느낌을 불러일으킬까? 내 관심은 이렇게 시작된다.
식탁 위에 차려진 먹음직스럽고 향긋한 음식을 상상해 보라. 그 맛있는 음식은 보기에도 아름답다. 어떤 사람은 오래오래 씹으며 그 맛을 느낄 것이다. 마치 소(牛)가 되새김질을 하듯이 말이다. 그런데 그 음식을 먹다 말고 그대로 토해 놓았다고 상상해 보자. 신디 셔먼은 바로 이런 상황을 사진 이미지로 재현하고 있다. 신디 셔먼의 작업은 바로 그 ‘아름다움’의 실체에 대항하는 것이다. 억지 같지만 입 속의 음식물과 뱉어 낸 그것이 어떻게 다르다는 것인가? 언젠가 좀 더러운 음식점에서 깔끔 떨며 타박하는 나를 보고 한 친구가 잠결에 달게 먹었던 물이 아침에 일어나 보니 해골에 담긴 물이었다는 원효대사의 일화를 들먹이며 나를 질타했다. 그 일화를 전하며 친구는 더럽다고 여기는 그것이 ‘관념덩어리’라고 나를 일깨운 적이 있다.
나는 사진 수업시간에 사람들에게 “왜 당신은 사진을 공부 하려고 하십니까?”라고 질문한다. 이 질문에 대한 사람들의 답은 거의 같다. “아름다운 것을 촬영하고 싶어서요”라고. 그런데 그런 대답은 나를 자극한다. ‘아름다움’이라는 그 찬란한 이데올로기, 그 착각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억압하고 가슴 멍들게 하며, 그 같은 고정관념이 어떤 일을 자행하는지를 철저히 파헤치려는 돌격자로 나를 변하게 한다.
신디 셔먼은 자신의 몸을 재현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녀의 초기 작업은 영화나 텔레비전에서 문화적으로 스테레오 타입화한 여성들의 이미지를 패러디하며 자신이 그 영화 속의 여인으로 분장한 이미지를 재현했다. 그 재현은 다시 보게 하기와 낯설게 하기로 동시대 문화의 ‘현상’들을 꼬집는다. 그녀의 이미지는 여성의 실재를 드러내 보임으로써 다시 생각하기를 촉구한 것이다. 그런데 ‘여성의 이미지’를 나타내는 데 남성들의 시선을 의식할 수 있을 뿐, 자신의 삶을 살아내는 주체로서의 여성은 거기에 없었다. 신디 셔먼은 뒤이은 작업에서 ‘심리적 위축현상’을 드러낸 작품을 선보였다. 하루종일 남편의 전화만 기다리는 여성, 자신의 공간은 그 어디에도 없는 듯한 귀퉁이에 소외된 여성 등. 그녀는 공포, 불안, 초조, 극도의 긴장된 여성 이미지를 그녀는 창출했다. 1985년부터 신디 셔먼의 작업은 전격적으로 바뀌었다. ‘재앙(Disasters)’이미지가 바로 그것이다. 그 이미지들은 쓰레기더미에 버려진 듯한 여인으로, 해체된 신체로, 쥐들이 득실거리는 곳에 웅크리고 있는 여인으로, 생각의 저 깊은 곳에서 절대로 그것들과 함께할 수 없음을 선언했지만 어쩔 수 없이 거기에 거처할 수밖에 없는 형편을 느끼게 한다. 마음 저 밑바닥으로부터 거부할 수밖에 없는 그것들을 ‘대상화’ 한 신디 셔먼의 작업에는 ‘아름다움’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전복하려는 전략이 숨어 있다. 아름다움/추함, 깨끗함/더러움, 좋다/나쁘다, 옳다/그르다… 이 모든 것의 기준과 가치개념은 과연 누가 만들었단 말인가? 전통이, 문화가, 제도가 그렇다고 주장한다면 그 개념들은 영원히 진리라는 말인가? 신디 셔먼의 작업은 그것들에 말걸기를 하는 것이다.
추함에서 발견하는 아름다움
나는 최근 어렵사리 ‘비천함(Abjection)’이란 개념을 접하게 되었다. ‘여성적 그로테스크’에 대해 논한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는 ‘비천함’을 여성적 그로테스크의 표상으로 제시, 오이디푸스 전 단계, 즉 여성적·모성적 공간을 은유하며, 출산을 학살과 생명의 정점(외부와 내부, 자아와 타자, 생과 사)으로 본 어머니와의 외상적(traumatic) 분리를 통해 상징계로 진입하기 직전의 감각적·잠재적 지대로 규정한다. 즉 ‘주체로도 객체로도 불릴 수 없는, 그 무엇에 의해 점령된 지대’를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아기가 엄마의 양수 속에서 행복했던 시간을 잃고, 엄마와 분리되는 상황의 시·공간의 경험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부터 아기는 엄마의 양수를 ‘더럽다’고 느낀다는 것이다. 여성의 출산이 내부가 외부로 치환되고, 내가 타자로 도치되는 전환의 순간에 ‘비천함’의 실체가 성립되는 것이다. 그 실체는 ‘비천함’을 모성성과 여성성에 중첩시켜 그 수많은 무상의 이분법적 이데올로기, 이성과 감성, 여성과 남성, 문명과 자연, 자아와 타자, 주체와 객체 등을 희화한다. 크리스테바의 이러한 이론들은 나로 하여금 신디 셔먼의 작업을 새롭게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몸의 외피만을 재현해 온 미술의 역사를 전복하려는 그녀는 ‘정상’과 ‘비정상’의 고정관념을 뒤흔들고, 아름다움의 이데올로기를 정면에서 공격하며 더러움, 추함, 장애, 기형, 파손, 흉함 등을 직설적으로 드러낸다. 그리고 우리가 소외하고 천시하는 모든 것을 다 끌어안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작업은 우리의 또 다른 상상을 촉구한다. 생태계의 미래와 인간존재의 위기까지 체험케 하는 그녀의 작업들을 내가 이해하듯이 그 기호적 체계의 의미망인 여성의 경험, 여성의 시선, 여성의 재현을 진정 남성들이 이해할 수 있을지 염려하게 된다. 이쯤 되면 나도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누가 이것을 더럽다고 했느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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