쥔장이야 침묵하든지 말든지 입니다. ^0^
미술인회의에서 지난 2월 1일 주최한 공공미술 세미나 이후 게시판에 올려진 댓글입니다.
'창조적 개입'이란 말이 제 가슴을 탁탁.. 치는군여.
꼭히 '공공미술'이 아니더라도, 활동가도 작가도 뭣도 아니지만
걘적으로 여러가지 다가오는 바가 많다는..
How about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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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관계상 종합토론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아서 아쉬운 자리였습니다만, 활동가들의 '땀과 노력'은 잘 전달되는 자리였다고 생각합니다. 여러 가지 중요한 논점들이 지적되었고, 이후 이어지는 세미나들을 통해 구체화되겠지만 한가지 짚어보고 싶은 것은 '공동체'의 개념입니다.
사실 공동체는 많은 경우 공공미술 프로젝트에 있어서 절대적인 조건으로까지 인식되고 있습니다. 행동주의적 참여를 추구하는 뉴장르 공공미술의 경우 공동체란 프로젝트의 시작이자 끝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지난 시기 예술의 지나친 사유화, 개인주의화에 대한 반작용 때문이겠지만 또한 이것은 오늘날 공동체가 외부로부터의 예기치 못한 충격, 나아가서 해체의 압력에 항상 노출되어 있다는 위기 상황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공동체의 위기를 해결하는 미술이야말로 지금의 야심적인 예술가들이 씨름하고자 하는 멋진 미술이 아닐 수 없습니다만 토론 중에 우리는 두 그룹의 활동과 관련하여 이 위기를 명확히 하지 못한 듯 합니다. 다시 말해, 이것은 두 그룹의 활동을 공동체의 위기라는 관점에서 충분히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이고, 일정 정도 그들이 공동체의 위기를 이용하고 있다는 점이 함의하는 바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반지하의 드라마고씨는 토론 내내 송림동 빈민공동체의 존재를 강조했고, 믹스라이스 역시 이주노동자 공동체의 위기와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일단 ‘빈민’, 혹은 ‘이주노동자’라는 규정 자체가 어떤 비정상 상황을 암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황적인 규정임에 틀림없습니다. 양쪽에 모두 문제되고 있는 것은 그러한 정치, 경제적 상황이 초래한 문화적 결과입니다. 빈민 공동체에는 열악한 교육환경과 경제사정 때문에 자기계발의 기회를 충분히 누리지 못하는 청소년들이 존재하고, 반지한의 송림동 그림수필은 기본적으로 이 기회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입니다. 믹스라이스의 영상교실은 이주노동자들의 인권상황 때문에 발생하는 어떤 왜곡(대중매체의 휴머니즘적 시선과 같은)에 대해 이주노동자들 스스로 활용할 수 있는 자기 재현의 수단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한편, 양쪽 모두 전통적인 의미의 미술교육보다는 실험과 발견, 재맥락화 과정을 중요시하는, 어떻게 보면 아방가르드 미술의 핵심적인 원리를 원용하고 있다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위기상황이 허락한 많은 틈새들이 그러한 전체과정에 긍정적 모멘트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특히 매체를 보는 관점이 그러한 위기로부터 태어날 수 있었다는 것은 시사적입니다. 그림수필에서 텍스트와 이미지의 결합이라든가, 사진 이미지를 재전유하는 것, 영상교실의 작품들에서 많이 활용되는 셀프 인터뷰, 의도적으로 일상의 액면적 리얼리티를 연출하는 것 등이 그러한 모멘트들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들을 매체의 자동권력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것으로 읽든지, 차이들을 맥락화하는 것으로 읽든지 간에 매체의 엄숙성을 우회하는 차이의 선들을 가시화시키는 것은 분명합니다.
공동체 개념과 관련하여 이제 문제되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사회 일반에 긍정적으로 제시하려 할 때 발생하는 것 같습니다. 프레젠테이션에서도 어느 순간 그랬고, 대중매체를 통해 제시될 때 더욱 그렇지만 이들의 활동은 갑자기 ‘차이의 선들을 발견해 내는 확산의 움직임’에서 ‘소외된 사회 집단을 위한 활동’으로 결론지워져 버립니다. 드라마고씨가 프로그램 참가자들의 빈민성을 강조할 때, 송림동 지역의 특수한 역사적 맥락을 강조할 때, 믹스라이스의 영상에서 이주노동자들의 대화가 그들의 소박한 꿈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결론 날 때 그렇습니다. 빈민, 이주노동자 등의 존재는 앞에서 지적했듯이 상황적 공동체입니다. 본질적으로 스스로가 원해서 형성된 공동체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송림동의 빈민성을 지역적 정체성으로 등치시킨다든지, 이주노동자들의 한국사회 고찰을 또 다른 휴머니즘적 공상(이를 테면 가족의 형성과 같은)을 위한 근거로 제시한다든지 하는 것은 예민하게 다루어야 할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쉽게 말해, 그들의 꿈은 원래 그랬어야 하는 것으로 나타나면 안되고, 새롭게 욕망하는 것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겁니다.
공동체의 경계는 우리가 어떤 본질 규정에 종속되면서 발생합니다. 경계가 확정되는 순간 확장의 움직임들은 내부화되어 버리고 그들은 수많은 소수 그룹중의 하나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오직 문화적 인식의 차원에서만, 즉 재현의 차원에서만 일어납니다. 공동체의 경계가 확정된다고 해서 그들의 정치, 경제적 문제가 해결되고 안정되는 것과는 실상 별다른 관련이 없습니다. 상정할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는 정치, 경제적인 공동체 형성(실질적인 힘이라 할 수 있는)은 실패하고 문화적 구별 짓기의 기호들만 남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화적 공동체란 우리가 비난하는 예술의 순수주의에 비해 얼마나 덜 공허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왠지 인디안 보호구역과 같은 것을 상기시키는 시나리오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성완경 선생님께서 토론 중에 제기하신, 활동 거점을 어떻게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구축할 수 있을 것인가와 관련하여도 중요한 부분입니다. 과연 반지하는 송림동이 완전 재개발된 이후 다른 동네를 찾아 떠나야 할 것인가? 믹스라이스의 영상교실은 인권단체를 통한 섭외나 정책 이슈와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생존 가능한 모델이 될 수 있는 것인가?
지금으로서는 어중간하게 정치, 경제, 문화의 문제설정에 걸쳐있는 것보다는 오히려 훨씬 문화적이 되는 것이 보다 가능성 있어 보입니다. 경제적, 정치적으로 공동체는 직접적인 힘의 싸움에서 파괴될 수 있지만, 유럽의 스콰터 운동에서 볼 수 있듯이 문화적 생존은 오히려 경제적 부분과 연결되면서 새로운 영역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반지하의 대안적 재개발 강좌 같은 것은 따라서 보다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했습니다. 토론 중에 제기되었던 교육프로그램의 정책적 가능성도 비슷한 문제설정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 문화적 기호, 혹은 그 생산방식은 개방적인 공간에 재위치되기 위해서 과거의 공동체 개념과 분리되어야만 합니다. 그렇다고 송림동 그림수필에서 그림수필만 남거나, 영상교실의 프로그램만 기계적으로 강조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훨씬 문화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그것 자체가 하나의 공동체 프로그램으로 발전하기 위해서 문화적 전략이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한다는 것으로, 또한 활동가들이 정해진 프로그램만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참가자들의 반응에 현장에서 적절하게 대응하는 예민한 감각을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로 그것이 드라마고씨가 강조하는 자본주의적 관계망으로부터의 탈주 자체가 아닐까 합니다.
결론적으로 요약한다면 공공미술 활동들을 바라볼 때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공동체의 규정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그룹의 활동이 특정한 두 공동체를 재현함에 있어서 문화적 전략을 활용하고 있는 것은 명확하지만 공동체 개념의 폐쇄적 기능을 생각한다면 문화적 재현 자체를 자기비판의 차원에서 가동시키는 것 또한 중요한 지점이라고 여겨집니다. 여기서 자기비판이란 활동가의 윤리적 결단 따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활동 중에 우리가 휩쓸려 들어갈 수 있는 ‘우리가 남이가!’ 의식에 대한 견제를 말합니다.
상황적 공동체라고 말할 때 중요한 것은 그들의 사회적 움직임이 고정된 상징을 공유하고 자기와 남을 구분 짓는 경계로부터 이점을 취하기보다는 경계의 혼란으로부터 이점을 취하고 예외적인 시선을 획득하는 표류하는 공동체라는 겁니다. 역설적으로 바로 그렇게 움직일 때만이 그들은 생존할 수 있습니다. 그 움직임의 세부가 중요하다는 생각입니다. 많은 작가들이 자신의 진정으로 창조적인 순간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도 토론에 있어서 본질적 규정들을 통해 사고한다면 프로젝트의 중요한 순간들을 망각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세미나에서 공동체 개념은 별다른 점검 없이 당연히 정당한 것으로 여기고 지나치지 않았나 하는 의문이 이 글을 쓰게 된 동기입니다. 활동가들의 땀과 노력에 대해 앞에서 지적했는데, 그러한 헌신의 정체가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조금 더 나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외부로부터의 충격에 창조적으로 적응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내부화된 결과 사라져간 공동체의 사례는 무수히 많습니다. 두 그룹이 선택한 공동체 - 빈민 공동체와 이주노동자 공동체는 그렇게 역사적 스케일에 있어서 생성과 소멸의 궤적이 뚜렷한 그룹은 아니지만 그런 만큼 더더욱 큰 해체의 압력 하에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듯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중요시해야 할 것은 공동체가 아니라 (언제나 그래왔듯이)창조적 개입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전용석/ 플라잉 시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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