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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재가를 받지 못했음. 없어지더라도... ㅡ.ㅡ
견고한 폐쇠성으로 스므살까지 연명을 해온 입장에서 절절할 수 밖에 없는 글. 선택이 가능하다면 아직도 난, 고아이고 싶다.
고독이 발전의 토대가 될 수도 있고 毒일 수도 있겠으나. 산만한 링크보다는 훨 가능성이 높은 것이 나의 입장이다.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는 만큼 나는 나를 감금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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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아케이드 프로젝트
fragments
1. 생각보다 신속하게 성적처리를 했고, 나의 메카닉 모드가 민활하게 작동하고 있음에 안도와 씁쓸함이 교차되었다. 시험지가 나를 잡아먹을까 리포트가 나를 집어삼킬까 두려워 내 왼손은 컨베이어 벨트가 되고 내 머리는 스캐너가 되며 내 오른손은 엑셀 워크시트를 쓰고 있다. 보나마나 몇몇은 어김없이 볼멘소리를 하거나 편집증을 발동시키겠지. 이럴 때는, 아는 전화번호 이외에는 받지 않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사람들은 커뮤니케이션 미디어에 대해, 그것이 수신의 욕망 못지 않게 '수신거부의 권리'가 있음을 종종 간과하곤 한다. 거부권 없는 커뮤니케이션 미디어는 폭력이다. 수신거부가 폭력이 되는 관계에 있어서는 중요한 예외조항이 붙지만, 알고보면 이 두 경우의 차이는 크지 않은지도 모른다. 이제는 오래된 상투구를 빌리자면, 수신거부당하는 것이 두려워 먼저 수신거부를 할 수 있는 윤리는 분명 성립된다.
2. 역자후기에 '무리지어 공부하는 편이 아니었기에 번역은 외부의 간섭이나 공동체의 도움 없이 이루어졌다'고 썼다. 선배가 번역한 [시간-이미지]가 교보 강남지점에 적신호처럼 꽂혀 있음을 발견한 후 점심을 먹으며 생각했다. 이 선배도 딱히 어떤 '무리'에 속하지도 않았고 - 물론 내가 아는 선배들 몇몇과 한국영화사 스터디를 했지만 이건 그런 '무리'와는 다르게 봐야 한다 - 특별히 외부의 훈수를 받은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는 훌륭한 일을 해냈다. 내 책과 [시간-이미지]에는 공히 철학자 모 선배의 이름이 들어 있다. 이 선배 또한 '무리'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지인들이 있지만 그 지인들의 결속으로 그 이상의 헛된 욕망을 뽐내는 일은 없다. 그렇지만 이 선배는 분명 '철학자'로 불릴 만한 - 그리고 스스로도 그렇게 부를 만한 - 자격이 있다. 나도 그렇지만, 이 두 선배들은 어떤 시점, 어떤 국면에서 고독과 대면할지도 모른다. 여기서의 고독은 공부하는 자나 글쓰는 자가 필히 대면해야 하는 '공간으로서의 고독', '극한으로서의 고독'과는 다른 것을 말한다. 대자적이며 상대적인, 그러기에 외부의 범주화와 무리짓기에 쉽게 영향받는 그런 종류의 세속적 고독. 일 년 전쯤, 철학자 모 선배는 모 계간지용으로 작성한 논쟁적 반박문을 읽어달라고 부탁했고, 나는 미력한 앎으로나마 꼼꼼히 읽으려 노력하면서 몇 가지 코멘트를 들려 주었다. 그때의 얊은 눈썰미로도 나는 그 선배에게서 두 종류의 고독을 모두 보았다. 세속적 고독과 절대적 고독 모두.
비극일지도 모르고, 필연적인 결말일 수도 있고, 자초한 사안일 수도 있지만, 언젠가부터 내게도 이 두 종류의 고독이 점점 수렴의 극한에 가까워지고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3. 내 언어에 파편처럼 맺혀 있었던 시적 언어의 습기들도 언젠가부터 드라이클리닝되어 시스템이라는 건조기에서 냉동건조되어 왔다고 생각했다. 가끔 쓰는 잡글에도 그런 흔적이 남아 있어, 언젠가부터 내 글은 전반적인 저습상태에서 고온과 저온, 농밀함과 희박함의 변화만을 나타내게 되었다. 공부를 한다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체계를 선택하는 것이고, 설령 시적 언어와 찰나적 사유의 생명력을 보존하더라도 시스템이라는 인큐베이터 속에서 그렇게 해야 한다. 습한 언어가 나의 건조함과 만나 이상한 가역반응이 일어날 때, 점액질의 언어라는 기형이 태어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이런 두려움은 특별한 경우에만 현실이 된다. 정서상의 내적 독백이 체계화의 요구를 넘어서 엑스타시로 분출할 때가 그렇다. 그런 상황들이, 달력과 시계의 세계에서는 과히 좋을 리가 없다. 더구나 내 삶을 바로 그런 세계 속으로 프로그래밍하기로 굳게 마음먹은 이후라면. 혹은 반대일 수도 있다. 점액질의 언어를 뱉어낼 수 있다면, 더 이상 이 세계에서는 그런 언어가 무용하거나, 그런 언어들의 파급효과에 대한 사후수습의 언어를 애써 고안해낼 필요를 느끼지 못할 때일 것이다. 오늘 내내 생각했다. 나는 지금, 어떤 경우인지.
4. 6년 전에 그런 말을 나누었다. '내가 남들이 쉽게 던질 수 있는 위로의 말을 두려워함은, 더욱 커다랗고도 뼈저린 위로의 가능성을 찾기 위해서다.' 지금, 이런 말을 던진 이는 없어도, 그 말에 대한 공감의 파장은 면면히 남아 있다. 나도 결국은 그런 부류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겉으로는 예의 없고 무신경하고 뻔뻔하다는 말을 들을지언정 잠재적 위무의 지대를 찾기를 포기한 것은 아니다. - 물론 요즘은 거의 포기상태여서 자기위로라는 플라시보 효과에 의존할 때가 종종 있다. 나와 같은 부류의 인간들이 위로의 말을 던지는 것은 일종의 방어적 제스처로도 볼 수 있다. 일상적인 인사와 기원과 안부의 언어 이외에 당신과 더 이상의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다는.
그래서인지, 이런 종류의 언어를 습관처럼 던지는 사람의 경우는 흥미로운 분석대상이다. 나와 같은 부류일지, 정말로 내밀한 위로의 언어를 모색하는 자일지, 그러기에 그런 언어를 애써 공유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는 타자에게는 방어적으로 일상적 안부와 기원의 언어를 내미는 것인지, 물어보고 싶을, 드문 때가 있다. 최근에 그런 습관을 가진 이를 알게 되었는데, 이 사람과 대화(정확히는 메시지)를 나눌 때 심야라디오를 청취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어떤 사연을 던지고, 그는 그에대한 간단한 코멘트를 들려주면서 '좋은 밤', '좋은 꿈', '알찬 여름계획', '좋은 주말' 등으로 방점을 찍는다. 나는 그에게 엽서를 보내고, 그는 준비된 - 혹은 스스로 준비한 - 큐사인에 맞춰 멘트를 들려준다. 라디오를 듣듯이 이런 상황을 방임할 수도 있다. 고정팬이 되는가, 어쩌다 다이얼을 돌려 방송을 듣는가는 청취자의 선택이기에. 라디오를 뜯어보고 싶을 때가, 라디오 안의 회로와 그 속에 흐르는 전자적 신호를 관찰하고 싶을 때가 문제다. 방송을 듣지 못할 수도 있다. 방송을 중단하거나, 수신기가 고장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라디오를 뜯어보고 싶을 때'를 다른 언어로 번역하자면, 어떤 관계에 대한 메타적 분석의 욕망이 솟아날 때다. 내적인 추론으로 그치다가 질의와 심문의 단계로 이행할 때, 이러한 분석은 위험한 생명체가 된다. 그 생명체를 내 마음의 우리에서 뛰쳐나오게 할지, 아니면 내적 요동을 감수하면서 그것을 계속 가둘 지는 아직 정하지 못했다.
- flane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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