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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각한 것을 볼 수록 웃기고, 웃긴 짓거리들을 볼 수록 고민하게 된다.
공허해서 표현하는 것인지, 표현하기때문에 공허한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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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04년 01월 08일 09시 02분
이름 고규흔(evildoll)
제목 플래쉬몹(flashmob), 문명과 원시의 이중주 (성균관대 공연예술저널 2003 겨울호)
아톰(원자, 물질)이 지배해 왔던 지금까지의 세상이 점차 비트의 세상으로 변화될 것이라는 네그로폰테(Nicholas Negroponte)의 예견은 일단 그동안 있어왔던 미래학자의 어느 예언들보다 적중도가 높은 것으로 판명 된 듯 하다. 인터랙티브미디어, 유비쿼터스, 사이버스페이스, 버츄얼리얼리티, 매트릭스...등등 당장 머릿속을 맴도는 최근의 유행어들만 짚어봐도 그 예언은 고개를 끄덕이게 할 만큼의 위력은 충분히 지닌 셈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현 시점에서 비트화 되어가는 세상에 대해 호들갑스럽게 떠든다한들 그리 신선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그의 예언이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 아니라 비트의 세계가 오히려 물질의 영역도 함께 부추기고 있다는 의외의 사실을 우리는 이미 피부로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데, 사무실과 가정 곳곳에 고속통신망이 깔린 뒤에도 실물거래량과 교통량은 늘어만 가고, 인터넷의 수많은 정보들이 올드미디어의 전형인 종이의 소비를 대폭 증가시키고 있음은 누구나 인지하는 부분이다. 이것을 과도기적 현상으로 여긴다 하더라도 분명 네그로폰테의 예언 적중도 평가는 잠시 보류될 필요성이 있지 않을까.
그런데 이채로운 것은 이 비트의 문명이 물질계를 활성화시킬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뒤로, 종종 현대에 잠자고 있던 문화의 원시적 측면을 부추기는 모습 또한 발견된다는 점이다. 고도로 문명화된 세계에 대한 반성적 움직임에서의 문명거부 운동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비트, 그 자체가 원시적 회기성을 고양시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필자가 이러한 증후를 감지한 것은 휴대폰의 사용에서 비롯된다. 97년도에 처음 구입을 한 뒤, 점차 대중화 되고 이제는 완전히 필수품이 된 시점에서 느끼는 것은, 휴대폰이 전통적 약속의 의미를 점차 희석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약속은 늘 정확한 시간의 개념을 동반한다. 누가 누구를 만나기 위해선 약속 시각에서의 오차범위 20분을 넘겨서는 안되고 그것을 넘긴다면 그 약속은 깨어진 것이 되어버린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적어도 개인적인 만남에서, 정확한 시간의 개념이 개입된 약속이 더 이상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음을 경험한다. 항상 휴대폰으로 “우리 오늘 한번 볼까?”라는 즉흥적이고 모호한 합의로 시작해서 “응.. 나 어딘데.. 장소 옮기면 이야기 해.. 천천히 그리로 갈께..”라는 통화로 약속에서의 시간과 장소는 매우 유동적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휴대폰이 정확한 지점과 시점을 소멸시킨 덕분에 지금의 약속 개념은 마치 시와 분 단위의 개념이 모호해 하루를 적당히 네 부분으로 쪼개어 생활하던 시대의 ‘서산에 해 넘어 갈 때 앞마을 우물가에서 만나세’와 같은 식의 비문명적 기약으로 그 체감의미가 변화되었음을 감지한다. 마치 비트의 문명이 ‘punctuality’로 대표되는 산업사회의 문명에 도전하는 듯.
이와 함께 놀이, 유희 문화에서 비트의 문화가 비문명의 원초적 성격을 지니며 표출되는 사례 또한 드물지 않다. 최근의 비디오게임, 가상캐릭터, 아바타 등이 말해 주듯 본격적으로 탈물질화를 지향하는 것이 유희문화의 중요한 축을 이루지만, 반대로 가상의 것을 현실로 끌어내어 물질화 하는 역주류(逆主流)의 기세도 만만치 않다. 우리나라에선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던 액션 피규어(action figure)가 붐을 일으키고 폭넓은 매니아층이 형성된 것은 이 역주류 문화의 한 예로, 이는 인터넷과 그것을 통해 형성된 동호회 문화와 무관하지 않다. 동시에 만화와 게임의 캐릭터를 현실에서 스스로 재현하는 코스프레(costume play)문화와 코스프레어들이 보여주는 상징적 퍼포먼스 또한 가상의 존재를 현실에 재현하는 문화의 전형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모습들은 가상의 현실적 감각화라는 측면에서, 고대인들이 신화와 전설상에 존재하는 신들과 영웅의 모습을 조각으로 형상화하고 제의식을 통해 환상과 마법의 존재를 사람들에게 각인시켰던 모습과 많이 닮아 있지 않은가. 물론 요즘 아이들의 작은 흥미거리로 고대의 신성스런 문화를 떠올리는 것은 무리가 따를 지도 모른지만, 원시 세계인들이 가지고 있던 미메시스의 원초적 욕구가 디지털 매체를 통해 현대인들에게 활발히 자극되고 있음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최근 ‘플래쉬몹(Flashmob)’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게시판과 방송에서 자주 회자되더니, 결국 ‘블로그’, ‘얼짱’ 등과 함께 2003년도의 인터넷 문화를 대표하는 하는 10대 키워드, 10대 뉴스의 다양한 챠트에 선정된 바가 있다. 지난해 6월, 뉴욕 맨하탄에 위치한 하야트호텔 로비에서 군중들이 아무 이유 없이 15초 동안 장내가 떠나갈 듯한 박수를 쳐대며 주변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든 행위로 신호탄을 쏘아올린 이 문화는 유럽과 일본에서 유행하더니 우리나라에까지 빠르게 스며들어와 네오와 무한 복제된 스미스요원을 흉내내는 ‘매트릭스 놀이’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지만, 어찌보면 우리에겐 신종문화 치곤 마냥 새롭기만 한 꺼리는 아닐지도 모른다. 이미 우리는 람보놀이를 겪어보지 않았던가. 친구들 몇 명이 가위바위보를 하고 진 사람이 지하철 플랫폼에 기다리고 서 있다가 열차의 문이 열리면 “우하하핫~! 나는 람보다! 두두두두.!!!” 하며 사람들을 놀래킨 뒤, 문이 닫히기 전에 열차를 빠져 나오는 이 깜찍한 깜짝쇼는 80년대에 중딩 고딩 시절을 겪은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체험하거나 구경한 적이 있을 것이다.
플래쉬몹은 람보놀이의 모든 요소, 즉 그것이 매우 짧은 시간동안 이루어진다는 것과 상식 밖의 돌발행위로 놀이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로 하여금 어안이 벙벙케하는 해프닝을 연출한다는 점에서 닮아 있으면서도, 람보놀이에서의 소집단 약속이 대집단(mob)의 공모로 대체되었다는 점, 그리고 이 군중들이 모이게 된 경위에 있어 서로 간의 개인적 연계성이 전혀 작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두드러진 차이를 보여준다.
이런 면에서 플래쉬몹은 축제의 모든 형성 과정을 압축하고 또 압축한, 초미니 축제라 할 수 있다. 전통적인 축제와 의식은, 그것이 수십명, 혹은 수백명이 모이는 대규모의 행사라면 그 안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혈연이나 지연 등,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된 관계성을 지니며, 여러 세대를 통해 그 형식이 다듬어지고, 행사 전까지 사람들의 분주한 움직임에 의해 준비되고 연습되는 과정을 거치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 기간은 며칠씩, 심지어는 몇 달씩 지속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하지만 플래쉬몹은 이러한 과정을 모두 생략시킨다. 참여자의 구성 과정도 이메일과 인터넷 게시판의 공지를 통해 익명의 타인들이 모아지는 순간성을 띄며, 단지 정해진 곳에서 몹 행동규칙이 적힌 쪽지를 건네받는 것으로 완성된다. 그리고 아무런 연습이나 예행 없이 쪽지에 적힌 지시사항을 수행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이어지는 것은 신속한 해산. 본격적인 몹 행위가 시작되어 종료될 때까지 짧게는 불과 몇 십초, 길게는 7분 정도 소요될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진행되는 장소 또한 넓은 범위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맨하탄 메이시(Macy's) 백화점의 양탄자 매장 안, 강남역 지오다노 앞 횡단보도 등등, 매우 구체적이고 협소하게 구획된 장소에서 진행되곤 한다. 한마디로 어떤 번거로움도 없는 너무나도 편리한 놀이이다. 플래쉬몹의 이 같은 특성은 지극히 ‘인스탄트’스런 문화의 일면으로 비추어질 여지를 제공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신종 문화를, 요리하는 사람의 정성과 손맛이 제거된 맥도날드 햄버거처럼, 간편하게 즐길 수 있을지언정 어떤 창조적 의미도 발견하기 어려운 몰개성의 문화로 치부해 버리기엔 왠지 꺼림칙한 무게감이 느껴진다.
정작 플래쉬몹이 지니는, 영컬쳐(young culture)를 비롯한 타 문화와의 차별성은 간편하게 치러진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놀이와 축제의 매우 원초적 형태를 현대에 구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플래쉬모버들에게 왜 이런 짓들을 하냐고 물으면 그들의 답은 “그냥”이다. 말하자면 목적이 전제되지 않은 무상한 행동들. 더군다나 어떤 정교함이나 세련미 없이 투박하고 때로는 난장판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분명 우리가 감탄해 마지않는 인류의 훌륭한 축제의 유산과 그리 닮아 보이지는 않지만, 그런 의식들이 원래부터 그렇게 정교한 형태를 띄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인류가 즐기는 놀이와 경기들이 처음부터 세세하고 복잡한 규칙으로 시작되었을 리도 없다. 축제를 비롯한 많은 놀이는 현실의 효용성을 생각하지 않는 엉뚱하고 헛된 기분전환의 시도에서 싹트기 시작했다. 인간의 종족 보존과 그다지 관계없는 발상과 별 뜻없는 단순한 행동들이 모여 변형되고 세련화 되면서 후대에까지 지속되는 문화로 발전된 것, 그것이 우리가 참여하여 즐기는 놀이이며 축제임을 기억하는 것은 플래쉬몹을 해석하는데 적잖이 도움이 될 것이다.
카이와(Roger Caillois)는 놀이와 인간(Man, Play and Games)을 통해 즉흥(improvisation)과 희열(joy)을 추구하는 원초적 욕구인 파이디아(Paidia)가, 장애 요소를 만들어서 굳이 어려움을 추구하는 헛된 취향인 루두스(Ludus)와 결합하여 문명의 가치를 지니는 놀이를 탄생시킨다고 이야기한다. 파이디아의 욕구를 원초적 무질서와 충동의 자연 상태라 한다면, 루두스는 말하자면 규칙과 제약, 그리고 질서의 연장으로 파이디아라는 원석을 깎아 정제하는 세공사 역할을 하는 셈이다. 물론 둘이 서로 만나지 않고는 보석이 탄생될 수 없듯이 놀이도 파이디아와 루두스 중 어느 한 요소가 빠져버린다면 온전한 놀이라고 이야기 할 수 없다. 그렇지만 각각의 놀이 안에서 두 가지의 요소가 이뤄내는 비율의 차이는 분명 존재한다. 예를들어, 체스보다는 알까기가 지니고 있는 파이디아의 비율이 높을 것이고 어린이의 소꿉장난 보다는 극장에서의 배우 연기에 훨씬 더 높은 비율의 루두스가 개입될 것이다.
물론 플래쉬몹에는 루두스의 요소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몹 지령서 안에 적혀있는 행동규칙은 나름대로 타이트하게 준수될 것을 요구함으로써 군중을 효과적으로 통제하는 틀로 작용하고 지령의 준수 자체가 놀이의 유일한 목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놀이로서 성립될 수 있는 최소한의 룰이다. 게임의 규칙은 아주 미니멀한 상태에 머물게 하고 그 안에서 자유로운 응용과 파격이 이루어지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이 몹 행위 지령이 가지고 있는 일반적 특징이다. 예를들어, 동물의 울음소리를 1분동안 내게 한다든지, 약속 장소에서 한동안 시체처럼 쓰러져 있기 등은 행위에 대한 지시사항일 망정 누가 먼저하고 나중에 하는 순서라든지 모버(mobber)들이 취해야 할 자세에 대한 특별한 규정이 없기 때문에 놀이공간에는 필연적으로 무질서하고 혼돈스런 장면이 연출되기 마련이다. 이것이 바로 플래쉬몹의 매혹적인 요소이다. 잠자고 있던 원초적 파이디아의 본능이 루두스의 기운을 만나기 시작하여 이제 막 놀이로서 성립되려고 하는 그 순간의 놀이모습, 문명화 되기 이전에 아직 불완전하지만 놀이로서의 기본 요건을 갖추기 시작한, 말하자면 놀이와 축제의 프로토타잎이 어렴풋이나마 복원된다면 플래쉬몹과 매우 유사한 형태를 띌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그렇지만 플래쉬몹이 지니고 있는 원시성은 고의적으로 퇴행을 추구하는데서 비롯된 것일망정 문명을 거부하지는 않는다. 아니 오히려 그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이미 이야기한 바와 같이 군중들이 모이고 연락을 취하는데는 첨단의 미디어가 동원되고 그것을 이용함으로써 놀이를 풍성하게 만들어 간다. 게다가 모버들이 현장에서 보여주는 엉뚱한 행위들은 사실 플래쉬몹이 출현하기 이전 각종 엽기 유머 사이트에서 디카 사진으로 배포되던 폐인들의 모습과 시체놀이의 장면을 응용하거나 재현한 것이 상당수를 차지한다. 몹에 참가하는 사람들 중에는 물론 그 사진속의 주인공이 될만한 부류의 사람들도 있겠지만, 참여자의 대다수는 ‘에구... 도대체 어떤 놈들이 이런짓들을 하는거야..’라며 궁금해하던 평범한 인터넷 유저들이며, 이제는 그들이 스스로 엽기 사진속의 주인공처럼 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된 것이다. 이렇듯 비트에 의해 자극된 원초적 욕망과 그 발산 욕구가 이 신종 문화의 자양분이 되는 셈이다.
지겹도록 목표 지향적인 현대의 이성과 합리주의로부터 한참이나 떨어져 있는 문화가 그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또다시 문명의 이기를 활용하는 모습은 아이러니하다. 그리고 고도화된 문명의 산물이 극단적인 비이성의 문화를 부추기는 것도 놀라운 뿐이다. 지구촌의 90년대 말, 얼터너티브 운동이 시들해 질 때쯤 유행한 트랜스(trance), 레이브(rave)문화 속에서 샘플링, 루핑 같은 기계조작의 결과물들과 전자음의 규칙성이, 레이버들의 광란, 약물과 뒤섞이는 모습을 보며 비슷한 아이러니를 경험한 적이 있었는데, 플래쉬몹은 그 전파력과 대중 노출의 정도에 있어 그보다 더 노골적인 성격을 드러낸다. 가장 낙관적 시나리오는 이러한 놀이들이 문명과 인간이 서로를 상처주지 않고 공존하게 하는 요소로 작용하는 것이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아직 더 두고 볼 일이라고 말할 수에...
출처/사이버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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