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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도 기획으로 좌우되는 판에 하물며 전시야 말해 뭣.
근데 정말 심각한 것은 이런 판짜임이 지금처럼 일정의 주류로 상정이 되면 소규모의 타 전시들이 찌그러들 것은 자명한 일.
정말로 좋은 전시들은 모두 소규모였던 것을 경험한 내 입장에서는 먼 산만 바라보게 되는 기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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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월간 GQ

우리에게 샤갈은 무엇이었나? <샤갈 전>은 여러모로 충격적인 ‘퍼포먼스’였음에 틀림없다. 여타의 전시에서는 볼 수 없었던 수많은 인파들 - 그들이 만든 행렬은 미술관 내부를 몇 겹으로 싸고 앞마당으로 진출, 마침내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300미터가 넘는 인간 띠를 형성했다. 그 무더웠다던 올 여름의 땡볕에도 아랑곳없이 말이다. 하루 최다 관람객 1만5천 명, 튼튼한 폐활량을 자랑하는 나조차도 호흡곤란을 일으킬 정도였는데, 고작 생후 몇 개월 된 유아도 부모의 가슴에 안겨 곤욕을 치렀다. 복잡한 전시장 안을 놀이터마냥 뛰어다니는 아이들부터, 거동이 불편한 노구를 이끌고 온 어르신네들까지. 대체 그들에게 샤갈은 무엇이었을까? 이 모든 것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내가 하게 된 생각? 솔직히 고백하자면 섬뜩했다. 대체 언제부터 우리나라가 그림 몇 장 보겠다고 이 난리를 쳤단 말인가?
2002년 <밀레 전>을 시작으로 기획사들은 이러한 류의 대형 전시를 황금알을 낳는 거위쯤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런 블록버스터 전시의 레퍼토리는 뻔하다. 문제는 전시 콘텐츠와 전시 공간인데, 일단 콘텐츠가 확보되었다면 성공 여부는 전시장 섭외에 달려 있다고 보면 된다. 규모 면이나 공신력 측면이나 국·공립 미술관을 잡아야 한다. 그래야 외국에서 전시를 확정하기도 편하고, 협찬받기도 좋으니까. 이 두 부분이 해결되면 그 뒤부터는 거저 먹고 가는 셈이다. 신문사나 방송국 한두 군데를 메인 스폰서로 등에 업으면 홍보문제는 저절로 해결이 되고, 공신력은 더욱 공고해진다. 이쯤 되면 필요한 자금쯤은 저절로 걷힌다고 보면 된다.
그런 측면에서 서울시립미술관은 좋은 타깃이다. 기획사들은 어떤 수를 써서라도 줄을 대려고 공을 들인다. 심지어 계약 이전부터 미술관 이름을 팔고 다니기도 하는데, 일단 계약서에 도장이 찍히면 본격적인 총력 홍보전에 돌입, 파상공세를 펼친다. 놀라운 건 이쯤 되면 미술관과 맺은 계약서는 별로 중요한 문건이 안된다는 것이다. 이미 신문지면에 활자화가 되어버린 상태에서 기획사 측의 행위가 애초 계약과 다르다고 모든 걸 백지로 돌리기엔 공립미술관이 감수해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다. 이런 점을 잘 아는 기획사들의 횡포는 가히 폭력적이다. 도장 ‘꾸욱’ 찍은 계약서에 정확히 명시된 입장료 분배 부분도 하루 아침에 없었던 일이 되고, 사무실을 내달라, 뭐를 해달라, 뭐를 해달라 이것저것 끝도 없는 요구사항을 언론 플레이와 각종 압박용 제스처를 통해 획득해낸다. 전시 시작일도, 전시 종료일도, 심지어는 연장하는 문제도 슬금슬금 언론에 흘려서 기정사실화해 버린다. 미술관에 이미 잡혀 있는 전시일정쯤은 알 바 아니다.
물론 이러한 기획사들의 등장으로 해외 유명작가들의 작품들을 시민들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어차피 세금으로 운영되는 시립미술관에서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콘텐츠를 제공할 수 있다면 그깟 물밑 횡포쯤이야 뭐 그리 대수겠는가. 하지만 돈벌이를 목표로 하는 기획사에서 이런 콘텐츠를 적정한 가격에, 적정한 형태로 제공할 리 만무하다. 입바른 소리를 게시판에 쏟아내는 지극히 상식적인(?) 시민들의 지적대로, 관람객이 일정 수 이상 차면 입장 인원을 제한한다거나, 보다 쾌적한 전시 관람을 위한 전시 내외적 노력을 기울여야 할 이유가 그들에게는 없는 것이다. 하긴 입장을 제한한다고 그 지시에 조용히 따를 관람객이 과연 얼마나 있을지도 의심스럽지만 말이다. 입장료 수입과 입장료보다 더 비싼 도록 판매를 통한 100억대를 넘는 순수입을 제공한 블록버스터 전시 <샤갈 전>의 위력은 ‘샤갈이 부도위기의 모 언론사를 살려냈다’는 우스갯소리에서 잘 드러난다.
물론 이번 전시를 통해 서울시립미술관이 얻은 것도 있다. 3개월간 틀어제낀 에어컨의 전기 값도 못되는 수익 배분금과, 비오는 날 조를 짜서 우산 말아 우산꽂이에 꽂아주는 대민 서비스에 동원된 공무원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벌이에 급급해 전시장을 시장통으로 만들어버린 모든 책임과 운영 미숙을 질타하는 분노의 글들로 도배된 게시판. 그것을 통해 수준 이하의 공무원과 수준 이하의 미술관으로 전락해버린 평판 말이다.그럼 시립미술관이 자체적으로 그런 기획과 운영을 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글쎄, 일단 원하고 원하는 바라는 정도만 말해두자.
글/ 박파랑(서울시립미술관 큐레이터)
큰놈, 작은놈 할 것 없이 전시는 스펙터클의 각축장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전시는 언제나 눈요깃거리를 제공해 주어야 하며, 관객들에게 규모의 충격 혹은 내용의 충격 등을 제공해 주어야 한다. 따라서 대형전시라는 것은 오히려 가장 전시다운 전시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박람회였든 비엔날레였든 혹은 무엇이든 전시가 제공하는 스펙터클의 경험을 동시대 문화현상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전시 보다는 영화나 광고 심지어 나이트 클럽이 우리의 오감을 자극하면서 ‘새로움의 충격’을 더욱 능동적으로 제공하고 있으니까. 이러한 상황에서 전시와 가장 밀접하게 관계 맺을 수밖에 없는 미술이라는 장르는 보다 유의미한 담론을 생산해 내기 위해 규모의 문제를 떠나서 전문성에 기대어 새로운 차원의 미학적 담론을 생산할 수 있는 전시의 형식을 개발하게 되었을 것이고 전시는 점점 심각해져 갔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대형전시는 대중에게 다가간다고 하면서 더욱 기형적으로 변화되어가거나 혹은 테마파크화되어 버리고 그렇지 않은 전시들은 너무 어려워지거나 혹은 미술계 내부에서만 소통 가능한 어떤 것 아니면 자위적인 행위와 같은 전시로 변화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최근 우리 주변에서 만나게 되는 대형전시들에 대해서 미술계는 어떤 미학적 입장을 증명해 내고자 하는 것 같은데 그것을 좀 포기해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대형전시들 심지어 그것이 비엔날레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엔터테인먼트를 위해 조직된 하나의 문화상품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동시대는 취향과 욕망 심지어 지적 허영까지 상품으로 기획되고 판매된다. 대형전시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 설사 거창한 개념이나 관념을 내걸었다고 해도 문화와 예술이 갖고 있는 사회적 아우라를 포장해서 그것을 통해 관객에게 어떤 만족감을 주고 그것으로 돈을 벌어들이는 이벤트의 현장일 뿐이다. 오히려 문제는 전시의 규모를 떠나서 어떤 것에도 성공하고 있지 못하는 현재의 전시들에 있다. 스펙터클에서 엔터테인먼트에서 혹은 미학적 논쟁에서도 확실한 어떤 것을 보여주고 있지 못하다. 요즘 전시들은 규모를 떠나서 다들 어중간한 어떤 지점에서 끙끙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한다.
글/ 김장언(큐레이터)
비엔날레를 어찌할 것인가 2년에 한 번 열린다는 의미의 비엔날레는 소위 대형 전시의 대표적 유형이다. 그런데 최근 비엔날레의 강박적인 양상들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비엔날레의 그 2년마다라는 의미에는‘지역의 혹은 국민의 세금, 그리고 기타 자금을 긁어 모으는 데 적어도 2년은 필요하다’는 뜻으로 풀이함이 당연한 것 같다.
큐레이터들에게 비엔날레는 ‘새로운 담론과 진보적인 시각 미술의 실천의 장’이며, 그간의 자신의 이상을 펼치는 도전의 기회이다. 특히 작은 규모의 전시들은 보여줄 수 없는 스펙터클함이나 다양성, 다이내믹함을 훨씬 자유롭게 실험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분명 매력적이고도 욕심이 나는 기회가 될 것이다. 그러나 최근 국내의 대형 국제 비엔날레들을 돌아보면 전시 내부의 풍경이 정말 실험적인 그 무엇으로 다가오기보다는 지방 자치단체의 관료주의와 지역 정치, 국제 큐레이터계의 정치, 그리고 그 수십억대의 전시 자금들을 놓고 벌이는 한판의 게임에 불과하다는 인상이 강하다.
특히 오늘날 비엔날레들은 존립 양상으로 보자면 두 가지 상이한 분야가 전략적으로 제휴하고 있는데 그것은 현대미술과 지역 정치의 만남이다. 이는 단지 국내의 경우만은 아니다. 예술이라는 이름의 지자체 홍보물 및 성과물이 되어야 하는 비엔날레의 운명 때문에 수십억원에 이르는 돈이 투입되고, 그 돈의 효과를 계량적으로 증명해 내기 위해 입장관객 수와 흥행에 대한 부담 역시 꼬리표처럼 따라다니게 된다. 계량하기 힘든 것을 계량하려는 성과주의에 목을 매는 몽매한 관료주의적 상황은 대형 전시들의 실험성을 가장 일선에서 위협하고 타락시키는 제일 원인이 되곤 하는데, 문제는 또한 이 공허한 물량주의를 위해 미술의 고고한 전략들을 포기하고 현대미술과 위배적인 상황들을 묵인하면서 분명한 입장과 태도를 고수하지 못하는 전시와 큐레이팅에서도 발생된다.
최근 선임된 두 명의 이스탄불 비엔날레 큐레이터들은 작금의 이 거대 비엔날레들의 열병들이 빗어내는 많은 문제들을 수정하면서 특히 규모를 줄이고 내용을 좀더 밀도있고 정교하게 하는 전시를 만들겠다는 계획을 발표하기도 했다.
비엔날레 큐레이터는 거대 규모의 자금과 스태프, 전시장의 지원을 받고 막대한 권력을 누리지만, 그 만큼 합당한 예술적, 윤리적 책임감을 부여받는 자리다. 그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할 원칙은 그들이 다루는 것이 ‘예술’이고 ‘현대미술’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대중적 성과에 열을 올리기 이전에, 비엔날레가 예술적 태도와 입장에 충실한 실천적 장이 되도록 세부적인 논리의 명징성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글/ 김현진(프리랜스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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