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심에서 바깥으로의 여행
이윤석 조각展
2007_0711 ▶ 2007_0722

이윤석_宙-The Space of Ambiguities_철, 스테인리스 스틸_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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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0711_수요일_05:00pm
모란갤러리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7-28번지 백상빌딩 B1
Tel. 02_737_0057
www.moranmuseum.org
이윤석의 최근 작품에는 금속판으로 조밀하게 구성된 기하학적 형태와 거대한 기둥들이 등장한다. 응집과 확산을 동시에 내포하는 대칭적인 구성물은 차가운 금속성 표피와 단면을 가지며, 수직으로 뻗은 거대한 녹슨 기둥과 대비를 이룬다. 본래 기둥은 공간을 받치는 기능을 가지지만, 전시공간에 설치되는 기둥은 무대 장치 같은 효과가 있다. 그의 기둥(pillar)들은 무리를 지어 배열되면서 신전의 기둥처럼 주위를 압도한다. 작가는 이 기둥들에 ‘주(宙)’라는 명칭을 붙이는데, 그것은 단순한 건축적 구조물이라기보다는 신성한 공간을 축조하는 구성물로서의 성격을 강조하는 것이다. 기둥들은 오각형 단면을 가지며 위가 볼록한 형태, 아래가 볼록한 형태, 긴 기둥 작은 기둥 등, 일자형의 단조로움과 둔탁함을 벗어나 율동감을 부여한다. 금속판의 단면은 2mm에 불과하지만, 2.7m 높이로 용접된 기둥들은 무게감이 있으며, 기둥 50여 개가 호와 선으로 배열된 공간은 인공 숲이나 사원 같은 장관을 이룬다.

이윤석_宙-The Space of Ambiguities_철, 스테인리스 스틸_2006
가장 큰 전시 공간 한가운데는 길이 11미터의 배 형태의 구조물이 배치된다. 관객은 맞은 편에 놓여진 작품 [宙-space](2006)와 배의 관련을 묻지 않을 수 없기에, 양자는 흥미로운 스펙타클을 넘어 일련의 서사를 창조한다. 작가는 기둥 가운데에 위치한 알, 또는 누에고치 같은 형상을 자아, 그리고 그것을 둘러싸는 기둥은 환경을 상징한다고 말한다. 2004년의 개인전에서는 자아에 해당하는 부분이 다양하게 소용돌이치는 흐름이었는데, 이번에는 보다 정적인 형태로 바뀌었다. 그러나 무한한 겹을 가지면서 조밀하게 짜맞추어진 형식은 동일하며, 기둥과 세트로 설치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번 전시에서 공개되는 거대한 배는 알이 쪼개지고 변신하는 듯한 형태를 보여준다. 그것은 기둥에 고정되어 있는 알형태의 작품 [宙-space]에 비한다면, 기둥들을 먼 곳에 남겨둔 채 정처 없는 흐름에 몸을 맡기는 방주의 이미지를 가진다. 환경으로 상징되는 기둥들은 자아를 압박하기도하고 보호하기도하는 이중성이 있다.

이윤석_Pillar_철_2005
기둥이든 알이든 배이든, 이윤석의 모든 작업은 컴퓨터로 정교하게 설계되어 절단도에 의해 레이저 커팅된 금속판의 조립과 용접으로 이루어진다. 기계의 도움을 받기는 하지만, 기계적인 프로세스를 거치기 위해 컴퓨터 앞에서 하는 노동에 조립과 용접까지, 작업과정은 신전이나 배를 건조하는 것 못지않은 정신적 육체적 노동량이 투여된다. 배의 경우 양 날개에 각각 500개씩의 판이 조립된다. 아치형의 고정대가 받혀진 채 바닥에서 약간 뜨는 배의 유선형 실루엣과 그 안쪽을 빼곡히 채우는 금속판들은 거대한 규모에도 불구하고, 설계도면이 3차원 상에 그대로 구현된 듯한 느낌을 준다. 구성단위들의 조합이 만들어내는 조밀한 텍스추어는 단단한 물질적 덩어리나 대상물 보다는, 정교한 모형 같은 양상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배를 구성하는 원리가 구현된 작은 모형 같은 작품이 전시장 입구에 놓여있다.

이윤석_Pillar_철_2005
군집을 이루는 열주들은 중성적인 공간에 비균질적인 밀도를 만든다. 공중에 뜨는 작은 기둥들은 밀도의 차이를 더욱 세분화한다. 열주는 신성한 공간의 축조와 연관된다. 종교학자 M. 엘리아데는 [종교사 개론]에서 신성한 공간이라는 개념은 공간을 변화시키고 특수화함으로서, 요컨대 주변의 세속적 공간으로부터 격리시킴으로서 원초적 성현(聖賢)을 반복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카오스적 공간의 한가운데에 조직화되고 ‘우주(宇宙)화 된’, 즉 중심을 갖춘 공간이나 영역을 확보한다. 이윤석의 열주들은 이질적인 두 공간 사이에 만들어진 칸막이이자 주술적인 방어물이며, ‘비롯된 때’의 원형에 근거한 건조(建造)물이다. 작품 [宙-space]에서 가운데의 구조물을 견고하게 에워싸는 것도 기둥이다. 기둥 내부의 핵은 마치 만다라처럼 중심을 에워싸는 여러 겹의 구로 이루어진다. 거기에는 우주의 중심이 투영되어 있다. ● 엘리아데는 모든 종류의 신성한 기념물이, 광대한 우주론적 의미, 즉 각각의 건조물을 중심으로 만드는 여러 차원의 교차점이라는 의미를 나타낸다고 말한다. 자아 역시 사원이나 집짓기와 다를 바가 없다. 그것은 우주의 복제이며 세계 창조의 반복인 것이다. 하나의 동심원적 소우주를 이루는 겹겹의 구조물은 중심에 대한 향수를 보여준다. 그것은 하나의 원형적 상상력으로, 자아를 세계와 실재와 신성성의 중심에 위치하고 싶어하는 바람, 즉 인간적 조건을 초월하려는 욕망이 투사된 것이다. 기둥에 둘러싸여 있으며, 중심에 자리 잡은 성화된 공간은 무질서한 속세의 공간과는 구별된다. 구별을 통해 공간의 균질성을 파괴하는 기둥들은 성스러운 공간을 축조하면서, 저 너머의 초월적인 존재를 향한 열려짐을 표상한다. 성스러운 장소란 ‘이 세상과 저 세상 사이의 교통이 가능한 공간, 한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이르는 통로를 가능하게 해주는 곳’(엘리아데)이다. 이런 방식을 통해 점유된 지역은 혼란의 상태에서 질서의 상태로 전이된다. 즉 우주(宇宙)화 된다.

이윤석_柱_스테인리스 스틸_2006
이윤석의 작품에서 소우주는 겹겹의 구조로 확장되면서 대우주와 반향 한다. 이를 통해 소멸과 혼돈에 대항하는 질서를 형성한다. 이렇게 특화된 공간은 중심을 유지하고자 하는 주체의 욕망에 의해 구축된 것이다. 실재의 한가운데에 즉 세계의 중심에 있으려는 것은 인간에게 깊이 뿌리박혀 있는 욕망이다. 이러한 욕망에서 신화와 종교, 그리고 예술이 탄생한다. 이윤철의 작품에 중심에의 욕망을 반향 하는 또 다른 요소는 기둥이다. 그것은 세계의 축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신화적 상상력에서 세계의 축은 하늘을 받혀주는 기둥의 형태로 생각된다. 이러한 우주적 기둥은 상승과 비상, 그리고 이를 매개로 한 초월의 상징을 구성한다. 엘리아데는 종교와 예술의 상상력이 접목된 예를 살펴본 책 [이미지와 상징]에서 가장 널리 퍼진 중심의 상징은, 우주의 중심에 서서 축으로서 삼계(三界)를 지탱하는 기둥이라고 지적하면서, 이러한 주제의 변주로 가장 유명한 브랑쿠시의 무한주의 예를 든다. ● 이러한 기둥의 중개에 의해서 천지간의 소통이 가능해진다. 그것은 일종의 우주주(宇宙柱)가 되는 것이다. 이윤석은 구, 또는 기둥을 통해 질서화 된 영역은 완벽하게 체계화된 세계를 통해 창조의 범례적 모델을 모방한다. 알이나 누에고치 형상은 우추창조의 축약이다. 그것은 신화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우주적 상황이나 원초적 사건의 출현에 대해서 말한다. 그것은 모든 존재가 비롯된 때에 행해졌던 것을 보여줌과 동시에, 경험적이거나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의 구조를 계시한다. 그러나 이러한 자아-세계상은 최근의 작품에서 알의 조건을 극복하고 거대한 배로 변형된다. 알로서 상징되는 소우주는 부풀려지면서 두 쪽으로 갈라지고, 안전한 정착은 절대적 자유를 위해 출항하는 배의 이미지로 변화한다. 배 역시 자아를 상징한다. 또한 배는 ‘운송의 방편이기 이전에 주거 형태의 하나’(R. 바르트)이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다른 세계를 향해 혼돈과 죽음이 횡행하는 바다로 떠나는 배에서 교회의 이미지를 보기도 하였다.

이윤석_舟-COSMOS_스테인리스_2006
이윤석의 거대한 배는 지상적 삶과 초월적 삶 사이에 끼어 방황하는 인간들의 욕망이 집적된 또 다른 사원인 것이다. 배의 거대한 수평적 형태는 수직적인 기둥과 비교해서 죽음을 떠오르게 한다. 죽음까지도 껴안는 자유로의 항해, 그것은 물리적인 이동만을 상징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여기를 떠나 저곳으로 가고자 하지만 여기나 저기나 마찬가지이다. 앙리 미쇼가 말하듯이, 우리가 어디를 가든 우리의 감금된 자로서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은 ‘모호한 이동’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단 하나의 모험은 내적인 것이며, ‘내부의 공간’만이 탐험될 가치가 있는 유일한 세계이다.

이윤석_自我의 COSMOS_스테인리스_2007
이윤석의 작품 모티브는 고풍스런 신화적 상상력과 연관되지만, 형식적으로 현대의 기술과학의 방법론이 관철되어 있다. 그것은 단순히 자연적, 심리적 뿌리를 넘어서, 미리 규정된 목적을 가지는 명료한 구조, 즉 하나의 인공적 조립품으로서의 면모를 보인다. 그의 작품은 웹에서 설계되고 그 도면에 따라 구성요소들이 기계로 절단되며, 정해진 방법론에 의해 다시 연결된다. 이 부분에서는 전통적인 조각가의 작업보다는, 엔지니어의 방식에 더욱 가깝다. 그것은 구성주의constructivism처럼, 구조와 제작방식의 종합으로 구체화된다. 양자의 종합에서 구조적 실재가 생겨난다. 도면을 바탕으로 구축된 3차원 모형은 현대의 기술공학적 수단과 부합되면서, 우주나 세계에 대한 조직적 모델로 제시된다. 이러한 방식은 자칫 초월성이나 관념성으로 편향될 가능성을 견제한다. 그의 작품은 구성요소와 조립방식이 제시되면, 굳이 작가가 직접 만들지 않아도 같은 생산물이 나올 수 있을 만큼 투명한 프로세스를 내포한다. ● 여기에서 구조는 물질이나 사물보다는, 모델이나 기호에 더욱 가까운 것이다. 구조란 하나의 집합 안에 있는 원소들 간의 관계를 말한다. 구조는 ‘대상의 물질적 형식이 아니라, 어떤 변형 규칙이나 함수’(가라타니 고진)이다. 구조적 방식은 실체보다 관계를 중시한다. 그것은 건축이나 기계 기술자의 방식과 유사하다. 가라타니 고진은 [은유로서의 건축]에서 플라톤이래 서구 철학의 근간을 이루었던 것은 ‘건축에의 의지’라고 본다. 이러한 의지는 혼돈스럽고 다양한 생성 속에서 구조와 질서를 구축하려는 하나의 비합리적 선택이다. 건축에의 의지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거대 서사의 근간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가라타니 고진은 ‘견고한 건축물을 구축하려는 의지’가 궁극적으로 하나의 토대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자신의 토대가 부재함을 드러낸다는 역설을 강조한다. 그는 하이데거를 인용하면서 ‘존재는 우리가 의지할 수 있고 지어 올릴 수 있고, 또 달라붙을 수 있는 어떤 근거와 토대를 제공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윤석_Spheres of EGO_2006
존재는 그와 같은 바닥 되기 역할에 대한 거절이다. 그것은 바닥 되기를 뿌리친다. 그것은 이윤석의 배처럼 바닥이 없다. 그래서 구조로의 환원은 곧바로 해체와 연관된다. 엄격한 구성원리에 의해 결합된, 자못 견고한 듯한 구조물은 복합적인 차이 작용에 의한 텍스트성을 가지고 있다. 차이적 관계들은 항상 단일하고 고유한 동일성의 범주에 저항한다. 그것은 일견 이윤석의 작품 내용이 가지는 중심에의 향수와 모순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앞서 인용한 바 있는 엘리아데 등 종교학자들이 말하는 ‘중심’은 기하학적 중심을 의미하지 않는다. 종교나 신화적 사유는 예술과 마찬가지로, 근대의 동일성의 사유에 의해 억압된 타자에 속한다. 따라서 ‘바닥 없음’에 대한 강조는 동일성이 아닌 타자로, 내부가 아닌 바깥으로 관심을 돌리는 것이다.

이윤석_spiral galaxy
이윤석의 작품에서 배나 구, 그리고 다양하게 배열된 기둥 역시 하나의 실체나 사실이 아니라, 미세한 차이적 관계의 결과물이다. 여기에서 존재는 차이에 의해 구성된다. 그의 작품은 동일성의 구성성분이 되는 분열과 차이를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 여러 무늬로 구멍이 뚫린 판들의 수많은 집적은 ‘유한의 무한한 운동’(데리다)과 관련된다. 이러한 과정은 이질적인 형태를 낳는다. 현대의 해체주의적 사고는 구성요소들의 동일성은 타자성otherness, 혹은 이타성alterity에 의해 가능하다고 말한다. 단일한 사물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은 관계라고 말하는 것은 ‘이타성이 동일성에 선행하며, 동일성을 생산한다’(데리다)고 말하는 것이다. 타자는 보이지 않고 의식되지 않으며 언급되지 않지만, ‘우리의 존재 양식을 안으로부터 묶는다’(가라타니 고진). 알에서 거대한 배의 구조로 확장, 변형되는 이윤석의 자아는 유아론이라는 동질적인 체계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 바깥의 세계를 향하고 있다. ■ 이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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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사진 찾기
사진 기획展
2007_0711 ▶ 2007_0717
숨은 사진 찾기_2007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동덕아트갤러리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7_0711_수요일_06:00pm참여작가_권순관_김안영_방병상_유지의_이윤지_정동석_최봉림_한문순
기획_최봉림
동덕아트갤러리 서울 종로구 관훈동 151-4 동덕빌딩 B1 Tel. 02_732_6458 gallery.dongduk.ac.kr
사진은 현실의 사물을
있는 그대로 광학적으로 재현하기 때문에, 현실의 복사 혹은 현실의 부본 (double)으로 통한다. 사진은 시각 재현매체들 중 재현된 사물의
정체성 확인에 있어서 가장 자명하고 손쉬운 매체로 인지되는 까닭에, 그 의미도 재현된 현실의 대상과 동일하다고 믿는다. 그리하여 백두산을 찍은
풍경사진은 ‘백두산’에 대해 일반이 갖고 있는 의미그대로 해독되며, 유재석의 인물사진은 대중이 ‘유재석’에 대해 품고 있는 의미 자체로
읽혀진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사진 이미지는 사진이 재현한 대상 자체로 의미가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재현 대상의 의미를 구성하고
조작하는 재현 매체다. 실제 ‘백두산’의 의미를 만든 것은 수필, 그림, 사진과 같은 ‘재현’이 구축한 것이며, 연예인 ‘유재석’의 의미도 TV
방송과 사진 이미지, 대중 잡지의 인터뷰가 꾸며내고 기획한 것이 때문이다.

권순관_영역으로부터 고립되다 Isolated
from the Territory : 전화통화 후 한참을 고개를 떨구고 앉아있는 줄무늬 티셔츠의 남자_Digital c-print on
Metallic Silver Paper_120×150cm_2004

김안영_WHERE AM i?_Digital
c-print_64.5×200cm_2002

방병상_낯선 도시를 걷다 :
검은가방_C-print_120×158cm_2001

유지의_Complex : 은희 (29세,
여)_Diptych with text, Digital c-print_86×105cm_2005
사진 기획전 〈숨은
사진 찾기〉는 사진 이미지가 현실의 의미를 재구성하는 재현매체임을 새롭게 확인하려는 시도이다. 현실을 조작 없이 극명하게 재현함에도 불구하고,
주제 대상과 환경과의 관계, 사진 제목과의 상호 관련성, 혹은 딥틱diptych과 시간과 공간을 절단하는 프레이밍을 통해 사진의 의미작용이
‘대상 자체’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재현 대상 속으로 숨어버리는 이미지들의 생산에 전념하는 작가들을 초대하는 것이다. 관객들은 선명하게
재현된 그들의 사진 속에서 이미지의 ‘주제’ 혹은 ‘주체’를 찾아야 하고, 그 숨은 주제가 이미지 전체 혹은 제목, 혹은 인접 이미지들과의 관계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질문하여야 한다. 이 시각적 탐색과 더불어 ‘대상’ 자체로 환원된다고 여겨지는 사진 이미지의 의미작용은 불투명하고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윤지_사북의 시간 : 사북,
지장산_Gelatin silver print_100×150cm_1997/2001

정동석_Dreamscape_Inkjet print
on Korean paper_207×147cm_2002

최봉림_Photographic
Reconstruction중, Untitled_Selenium toned gelatin silver print on museum
board_22.5×32cm_1992. / Untitled_Chinese ink, Selenium toned gelatin silver
print on museum board_101.6×148cm_2005

한문순_Prima Donna_Digital
c-print_100×132cm_2005
〈숨은 사진 찾기〉는 사진이 단번에 손쉽게 인지되는 이미지가 아니라,
관객이 그 의미를 발견해야 하는 이미지라는 것을 알려주는 전시회다. 은폐되어 있는 이미지를 찾는 시각적 노력과 인접 이미지와 비교하는 지적
노력을 통해 사진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이미지가 아니라, 현실 속에 숨겨져 있는 의미를, 현실이 은닉하고 엄폐한 의미를 재구축하는
이미지임을 보여주는 기획전이다. 자 이제 눈을 크게 뜨시고 ‘숨은 사진’을 찾으세요. 그러면 먼 훗날, 장담할 순 없지만, 신도시 예정지, 크게
뛸 주식종목을 찾아낼 수 있을 겁니다. ■ 최봉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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펀스터즈(Funsters)
2007 미술과 놀이展
2007_0713 ▶ 2007_0826
김정희_Sp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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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페이지로 갑니다.
주최_예술의전당 협찬_현대자동차
관람료_일반 5,000원 / 36개월 이상 미취학아동 및 초중고생
3,000원 20인 이상단체 정가에서 1,000원 할인
관람시간_10:00am~08:00pm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서울 서초구 서초동 700번지 Tel. 02_580_1279 www.sac.or.kr
빨대, 루이뷔통 그리고
가상공간 ● 원래 미술과 놀이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니었다. 예술의 뒷면에는 늘 놀이가 자리 잡고 있었다. 선사시대의 동굴벽화도 제의의
놀이, 기원의 놀이였으며 그 놀이를 통하여 인류는 큰 위안을 받았다. 놀이는 그 위안과 더불어 기쁨과 충만을 이루는 시작이었다. 되돌아
생각해보면 누구나 어릴 적에는 예술가였다. 도화지에 그림을 그린다든지 찰흙을 통해 사물을 만드는 일은 곧 놀이행위라 할만하다. 누구에게나 그
놀이에 대한 나름대로의 추억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사람은 성장해감에 따라 그 놀이를 잊어간다고 한다. 놀기에 대한 관심이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가고 감성보다는 이성이, 감각보다는 판단이 앞서기 때문이라는 이유다. 지성이 앞설 때 감성은 후퇴해가고 놀이의 경험이 가져다주는 기쁨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일찍이 아이들의 놀이에 큰 관심을 기울였던 이는 프로이트였다. 그는 사람들은 성장하면서 유희를 그만두고, 그들이 거기에서 얻었던
즐거움을 포기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하였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실제의 삶이라고 애써 위안한다. 이제는 소수만이 예술가라는 이름으로 그 놀이를
간직하게 되었다. 그러나 예술작품이 가지는 원천적인 즐거움은 늘 관심의 대상이 되어 왔다. 비록 모든 이들이 놀이에 삶의 가치를 두지는
못할지언정 예술가들의 경험을 공유하는 일은 또 다른 놀이유형을 만들 수 있다. 제작자의 생각과 느낌도 감상자들에게 정서적 공감을 불러일으키도록
유도한다. 이러한 일치감을 통하여 우리의 삶의 질은 더욱 풍부해지는 것이다. 〈미술과 놀이-펀스터즈〉에서 주목하려는 것도 예술은 놀이가 될 수
있고 그 놀이가 우리에게 기쁨의 원천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놀이를 즐길 수 있는 기회와 동기를 이 전시회를 통해 만들려고 한다. 모든
이에게 잠재된 상상력을 이끌어냄으로써 또 다른 놀이를 체험할 수 있도록 하려한다. 창작에 고통만이 따른다면, 창작의 즐거움이 없다면 결코 놀이로
부르지 못할 것이다. 여기 소개하려는 미술가들은 창작의 어려움을 놀이로 전환시킨다. 놀이영역 속에는 갖가지 형태의 개별적인, 혹은 사회적인
발언이 잠재되어 있다. 이러한 시도를 통하여 동 시대 미술이 놀이로서의 미술이라는 흥미로운 기능을 추가하게 되기를 원한다.

성동훈_Blue
일상과
사회, 공감으로서의 놀이 ● 창작행위의 과정이나 결과물에서 발생하는 즐거움이야말로 창작의 직접적인 이유가 된다. 이러한 사실에서 놀이의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견해와는 달리 우리에게 있어서 ‘놀이’라 함은 어린 아이들의 전유물처럼 느껴질지 모른다. 보는 이에 따라서는
이 전시도 아이들의 놀이체험 정도로 비춰질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미술가들은 기왕이면 어른들이 자신의 작품을 보아주길 바란다. 한걸음 더
나아가 전문가들이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기를 원한다. 그들의 작품 속에는 단순한 놀이 이상의 이야기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 놀이 속에는
놀이 이면에 감추어진 시대언어가 감추어져 있다. 예술가들은 누구나 다 아는 놀이에 대해서는 무지하다. 그들은 새로운 놀이를 만들고자 한다.
그래서 이들 예술가는 기존의 통상적인 이야기 거리도 비틀고 뒤집는다. 세상의 온갖 이야기를 유희라는 씨줄과 상상이라는 날줄로 엮는다. 유희와
상상은 놀이와 하나의 실타래로 이어져있다. 예술가들은 그 이야기의 실타래가 모두를 위한 것임을 말하고자 한다. 그들은 지극히 개별적인 이야기라도
서슴없이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기꺼이 놀이의 세계에 동참한다. 이들은, 놀이의 제작자는 이 세상이 얼마나 흥미로운 상상력으로 가득한지에 늘 관심이
가 있다. 그리고는 이내 관람객들로 하여금 그 놀이에 동참하기를 권유한다. 예술작품이란 누군가 보아주어야 하는 것이다. 관람객들이야말로
예술작품을 최종적으로 완성시키는 이들이다. 더욱이 현대미술에 이르러 최종 사인은 관중이 해야 할 성격의 작품이 날로 늘어가고 있다. 이와 같이
〈미술과 놀이-펀스터즈〉는 오늘날의 미술이 작가 개인의 놀이임과 동시에 관객의 놀이임을 말해준다.

양태근_터-생명
본
전시회는 그 놀이의 유형으로 우선 ‘우리 일상에서 발견되는 놀이성’을 염두에 두었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주변에서 마주칠 법한
도구들, 또는 자질구레한 물건에 시선을 고정시키는 경우라 하겠다. 평범한 혹은 진부할 수 있는 오브제가 창작의 대상이 됨으로써 드러낼 수 있는
유희의 장을 소개한다. 일반성에 대한 도전과 상식적 가치에 대한 반기를 든 작가들. 이들의 눈은 세상에 대한 부정의 눈이 아니라 방향을
돌려놓음으로 얻을 수 있는 의외성에 주목한다. 가령 기록용 테이프를 털실인양 뜨개질하여 각종 구두나 옷을 만드는 손현태, 국수나 빨대로 근사한
조각 작품을 만든 홍상식, 솜으로 비행기나 구름을 연출한 노동식, 지퍼를 온갖 캐릭터로 재탄생시킨 우혜민, 철사로 캔버스에 금속 못을 수놓아
도자기를 만드는 김용진, 스펀지로 가방이나 책을 만든 안진우 등이 그 예가 될 것이다. 이들은 일상의 모든 사물이 작품의 재료이자 놀이의 대상이
된다. 디지털기술을 통하여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벌어지도록 한 김상균과 류호열, 정겨운 동물을 소재로 조각을 선보이는 김근배, 물고기를 매달아
희망과 꿈꾸기를 보여주는 옥현숙과 경수미의 설치에서 일상의 즐거움을 만날 수 있다.

이이남_8폭
병풍

장영진_파괴된초상
두
번째는 ‘놀이와 사회의 관계 맺기’에 대한 이야기가 담긴다. 한 시대의 놀이문화는 그 사회가 처한 환경과 구성원의 특성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이다. 속 깊은 곳에서는 우리 사회가 처한 갈등구조가 상존하지만 그 표현방식은 놀이의 경계 내에서 실현된다. 예술이란 사회와 분리될 수 없고
운명을 같이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운명이 우리가 짊어져야할 짐이 되지 않도록 한다. 기지 넘치는 미술가의 트릭을 발견할 수 있는
장이다. 빈 페트병을 이용하여 결핍의 미학을 보여주는 변대용, 석고붕대를 감아서 수백 개의 군상을 만든 주라영, 스티로폼 알갱이를 깔아 이
시대의 아이콘을 생산하는 장영진, 샤넬, 구찌, 루이뷔통 등 명품 브랜드 로고에 화려한 장식을 붙인 체니츄 Chen Yichu의 조각은 그
일부에 해당한다. 먹을거리를 늘 달고 다니는 탐욕의 인간상을 재미나게 조각한 강필웅, 시대의 아픔을 시지각적 유희로 바꾸는 손봉채의 작업도
관람자의 눈을 사로잡는다. 이들은 놀이를 빌어 은근히 우리 사회가, 그리고 우리 현대인이 가진 여러 가지 욕망의 구조를 낱낱이 해부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야기가 결코 난해하거나 밉지 않다. 유머와 해학이 놀이의 중심으로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주라영_Here &
Now

Chen Yi
Chu_Louis Vitton
마지막으로, '경험과 공유'라는 예술의 동 시대적 흐름을 반영하고자 하였다. 예술이
일부 천재에 의한 사유의 장이라는 관점에서 벗어나, 예술이란 나눌 수 있는 것이라는 입장이다. 여기에서는 관객이 직접 작품을 작동하고 작품
속으로 들어가며, 접촉함으로써 예술경험을 얻을 수 있도록 마련하였다. 마우스로 화면을 작동하여 화상과 같이 놀도록 한 추은영의 영상작업,
예술가와 공학자가 만나 가상현실의 세계를 재현해 보이는 안광준과 서영호의 공동작업, 이주영의 홀로그램, 우리의 전통회화를 패러디하여 영상으로
실감나게 움직임을 구현해 보이는 이이남의 디지털 작업은 관객과의 소통 가능성을 활짝 열어 보인다. 이와는 달리 전통적인 방식으로 관객과의 소통을
추구하는 작가도 있다. 조각 작품을 만들 때 아예 관람객이 작품에 걸터앉아야 할 공간을 미리 고려한 한진섭, 약 5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수세미를
만들어, 그 내부가 얼마나 치밀한 구조를 지니고 있는 지 들여다보게 만든 김정희의 조각은 스쳐지나가는 사물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킨다. 도시의
풍경을 통하여 우리의 혼성문화를 여행할 수 있도록 한 박종국은 성곽과 같은 건축물 구조에 조명을 설치, 관객으로 하여금 감성공간으로 이끈다.
또한 전시장 벽면에 구름과 동물, 식물이 자라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이상향에 대한 희망을 재현한 최혜광, 초원 위에 구슬로 만들어진 사슴의
몸체에서 빛이 흘러나오게 함으로써 자연생태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성동훈과 서성희의 공동작업, 전시장 높은 천정에 수백 개의 나뭇가지 인형을
매달아 놓은 이점원의 설치작업에서 미술과 관객과의 행복한 만남이 이루어진다. ● 〈미술과 놀이-펀스터즈〉는 미술작품으로서 다루어지는 놀이의
유형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 놀이의 유형은 미술가에 따라서 혹은 새로운 시도에 의해서 무한히 창안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미술가들의 순수하고 천진한 생각에 우리의 자아를 비추어보기를 바란다. 삶의 그림자에 감추어진 상상력을 재발견하게 될 때 경직된 사고의 껍질은
깨지고 보다 유연한 사고를 끌어낼 수 있다. 예술작품으로 인하여 우리가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부드럽고 풍부한 사고에 연유하고 있지
않나 싶다. ■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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