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얼마전에 집사람하고 같이 송환을 보았다. 물론 컴으로, 참고로 말하자면 울 집근처에는 모든 비됴 대여점이 망한 상태이다. 불법으로 봤다고 머라하지 마라. -_-
김동원 감독이 꾸준히 의문을 가졌던 것중 하나가, 왜 저 이들이 저런 극악한 위해까지 견뎌가면서 신념을 지켰냐는 거였다. 간단히 말해 전향서 써주고 나와서, 더 활발한 활동을 하는 것이 모든 이에게 이롭고 자신에게도 낫잖겠냐는.
이유는 간단하다. 신념을 지키는 것이 궁극의 삶의 이유가 된다는 것, 그 신념을 꺾으려 콧구멍으로 부어지는 고춧물과 한도 없는 매질이 더욱 그들의 신념을 공고히 했고 결국에는 자신이 숨쉬는 모든 이유가 전향거부가 되어 버렸다는 것. 그래서 어떤 이유로든지 전향을 한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출소 후의 궤적이 결국 달라질 수 밖에 없단 사실. (물론 그런 신념이 아집으로 화해버리는 미묘한 간극은 적극 경계할 일이다)
어떤 사람이 투사가 되어 버리는 것은 내/외적인 필연의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그가 스스로를 지킬 힘/근거가 있느냐 그렇잖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살아남아라, 반드시 정당하게." 이 한마디 말만으로도 전사가 될 근거는 충분하다.
.'
)
+ + +
출처 : www.culturalaction.org
7년 간의 투쟁, 혹은 새로운 시작 : 김민수
성완경 인하대 미대 교수는 <관악문화> 2000년 2월호에 기고한 ‘서울미대품성론’에서 김민수 교수의 사건 속에는 현 미술대학 교육의 위기를 날카롭게 드러내는 징후가 있으며, 그 위기는 대학미술교육의 상이한 품성 간의 갈등, 즉 상이한 패러다임 간의 충돌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그는 서울미대의 구성원들을 '종가집'에 비유하면서 "이 종가집 사람들의 신중함이 예술가의 본원적 품성과 얼마나 대조적인가를 생각해보라. 몸을 누일 때와 몸을 세울 때를, 머리를 숙일 때와 머리를 들 때를, 시대의 바람 속에서 누구보다도 민감하게 빨리 알아채는 것이 예술가의 본성이며, 지식인의 사명이 아니던가. (...) 그러고 보면 얼굴이 없다는 것, 실명이 아니라는 것, 실명을 밝힐 수 없는 이 제도를 교묘히 이용한 음해이자 모욕이라는 점, 그것이 애초부터 이 사건의 특징이었다. 우리가 주목하고자 한 것은 얼굴 없는 이 가해자 집단의 품성론이었다(230쪽)"고 글을 마무리하고 있다.
지난 1월 28일 학내의 과거사, 불합리한 제도와 보이지 않는 폭력에 대항해 싸워왔던 김민수 교수의 문제에 대하여 법원은 김 교수의 해직이 부당하다며 원상회복 판결을 내렸다. 이에 싸움의 막바지, 혹은 새로운 시작에 당면했다고 할 수 있는 김민수 교수를 서울대본부 앞의 농성 천막에서 만나 보았다.
판결 이후 대학 측에서 재판결과에 승복겠다는 제스처를 취하면서 이제 사건이 마무리된 것 마냥 세간에 알려지고 있는데..
그동안 서울대는 사건 해결을 촉구하는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재판결과에 따르겠다고만 앵무새처럼 말했다. 1월 28일 고등법원 판결이 나온 후, 서울대는 정작 내가 승소하자 재판부의 판결에 따르지 않고 있다. 판결의 내용은 98년의 재임용 심사에서 충분히 통과했기 때문에 탈락 처분을 취소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번 고등법원 판결이 난 시점부터 나의 교수신분은 회복되어야한다. 그러나 학교 측은 이미 소송의 피고로서 총장 결정까지 이미 끝나 위법하다고 판결난 재임용절차를 다시 밟겠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재임용 절차 밟기는 교수의 신분이 유지된 상태에서나 가능하다. 나는 교수의 신분이 박탈당한 상태이므로 학교 측의 이야기는 모순이다.
이번 판결문의 취지는 원상회복이다. 신분이 회복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재임용이 되나. 이미 서울대의 위법성은 명확해졌으며, 원상회복이 될 경우 나에게는 신분과 급여 등 지난 7년 간 기대할 수 있었던 모든 것들을 되찾을 권리가 있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은 칼자루를 학교가 쥔 채로, 선처를 베푸는 듯한 몸짓을 학교가 보인다는 것이다. 나에게는 부당해직으로 받은 모든 불이익을 법적으로 보상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이것이 나와 나의 원상회복을위한공동투쟁위원회(공투위)에서 의미하는 ‘원상회복’이다. 이는 고등법원 판결에 의해 마땅히 회복되어야 할 부분을 명확하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재임용절차는 이미 98년에 끝났다.
이 사건에는 조직 이기주의, 과거사 문제, 지식권력 문제 등 여러 문제들이 겹쳐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한국 대학사회의 속성과 맞닿은 몇가지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첫번째는 서울대학교의 과거사로서 초창기 원로교수의 친일행적을 거론한 나에 대한 괘씸죄가 적용된 것이다. 현재 사회적으로 과거청산에 대한 의제가 논의되고 있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과거사를 청산하지 못한 업보가 어떤 것인지, 그것이 서울대 내의 뿌리를 어떻게 장악하고 있는지를 말해준다.
두번째는 학문의 자유가 심각하게 훼손된 것이다. 96년, 서울대 미대의 디자인ㆍ공예 50년사를 발표했다가 학장실에 불려가 문제된 부분 삭제를 강요당하고, 이를 거부하자 자체 검열을 통해 논문을 학내 학술지 게재에서 제외시키는 등.. 이런 과정에서 학문의 자유가 심하게 훼손되었다. 당시 학장실에 불려가서 무려 4시간 동안 학장은 마치 독재시절의 안기부 취조실에서처럼 내게 '국가관이 의심스럽다'는 등 온갖 협박을 했었다. 이는 청산되어야 할 일제 잔재, 학문연구에서의 자유 수호의 문제, 교수사회의 구조화된 병폐 등 많은 문제를 말해준다.
세번째 부분은 식민권력화된 교수사회의 패거리문화이다. 이는 비단 서울대뿐만 아니라 한국대학사회 전체에 만연한 문제이다. 달리 말해 '밥상의 윤리'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즉 교수사회는 가부장적인 가족주의 관계로 서열화되어 있다. 마치 원로가 밥숟갈을 떠야 줄줄이 엮인 사탕처럼 식사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이는 학문의 서열화를 초래한다. 이것이 교수들로 하여금 자유로운 토론을 있을 수 없게 한다. 또한 이러한 조직에서는 누군가 학과의 지배체제에 대해 거스르는 발언을 할 경우 배제, 즉 왕따 당한다. 대체 '밥상의 윤리'는 어디서부터 왔는가? 바로 일제 잔재다. 일제의 식민지 조선 지배는 천황제(텐노제)라는 가족주의 국가관에 기초했다. 천황제는 천황을 중점으로 모든 황국신민이 대동단결하여 대동아공영권의 성전을 치르기 위한 국가전략으로서, 일제가 동양의 유교적 가족주의와 군국주의를 혼합해 파시즘을 정당화하고 제도화하기 위해 창안해 낸 제도적 장치였다.
해방 후 친일파가 청산되지 못한 결과, 사회 주요 요직을 친일파가 장악하게 되었다. 이 친일파의 기회주의적 생존원리와 가치들이 사회 속에 가장 안전하게 은폐되어 확대 재생산된 곳이 바로 교육기관이다. 따라서 일제잔재로서 천황제 지배질서가 식민권력화된 주종관계, 노교수와 젊은 교수, 혹은 교수와 대학원생 사이의 관계를 형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바로 이점을 지난 10월 서울대 국정감사에서 민주노동당의 최순영 국회의원이 해결을 촉구하면서 내 사건의 핵심이 바로 학문사회의 식민권력화에 있다고 표명했다. 따라서 이는 나 개인의 문제 차원을 넘어서 과연 대학이란 무엇이며, 대학의 주체로서 교수와 학생들이 자유롭게 생각하고 연구할 수 있기 위해서는 시설과 투자 이전에 무엇이 먼저 전제되어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최근 대학개혁이 종종 논의된다. 나는 그 논의에서 구조도 중요하지만 그 안의 내용에 해당하는 부분에 대해 깊은 반성과 변화가 따르지 않는다면 대학의 희망은 있을 수 없다고 본다. 현재 대부분 대학생들은 대학과 교수들에 대해 냉소적이며, 대학을 자신들의 삶과는 무관한, 마치 자동차 운전면허 시험학원 정도로 여기고 있다. 게다가 대학 정책이 신자유주의 쪽으로 기울어지면서 대학의 본질이 흐려지고 있다. 산업체처럼 직능적 인력 개발에만 관심을 두도록 요구받는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 대학은 전방향에서 직무유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사회적 역할과 기능도 하지 못하면서 대학 본연의 학문연구의 자유 추구는 고사하고, 학내의 온갖 비리, 교수임용비리문제, 몰상식한 커리큘럼 운영, 일탈적인 대학행정 등 현재 대학은 어디에서부터 치료를 해야할지 모를 정도로 심각한 중증질환을 갖고 있다. 내 사건은 이런 부조리 중 한 부분에 위치해 있었던 것이다.
98년, 문제가 된 논문을 발표하면서 어느 정도의 반발은 예상하지 않았나?
당시 서울대 미대가 내게 개교기념 50주년 심포지움에서 발제를 요청했을 때 암묵적으로 내 역할은 아마도 용비어천가를 부르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국립대학의 교수로서,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관 史官의 입장에서, 과거 역사에 대해 ‘이런 사실도 있으니 반성하자’라고 말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50주년 기념학술대회의 취지가 단순히 과거공적을 기리고 찬양하는 자리가 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반성과 대안제시에 있다고 보았던 것이고, 그 부분을 털고 나가야 하기 때문에, '반성하고 가자’라는 시각에서 언급을 했던 것이다.
물론 학술자료를 앞에 두고 쓰느냐 마느냐를 고민할 수는 있겠으나 나는 학문연구에 있어 이런 몰상식한 반응을 예상할 필요도 없었고 해서도 안 되었다. 그건 자기검열과 학문연구의 자유 사이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자기검열 대신에 연구의 자유를 선택한 것이다. 최근 개봉된 <그때 그 사람들>에 대한 표현의 자유 침해도 연계될 수 있는 문제이다. 학문의 자유이건, 표현의 자유이건 침해되었을 때 가장 무서운 것이 자기검열이다. '내가 이 부분에 대해 발표해도 괜찮을까?'하고 연구자나 창작자들이 고민하는 그 순간에 학문과 예술은 죽는 것이다. 물론 자신의 안위를 생각한다면 충분히 피해갈 수도 있는 일이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다른 시각에서 보면 그렇게 보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학문이라고 하는 본래의 영역에서 이야기할 때, 적절한 생각은 아니다.
지적한대로 예술적, 학문적 자유가 우선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는 아직까지도 한국사회에서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하는 듯 하다.
현재는 순간 순간의 판단들이 만들어낸 결과라고 본다. 나는 그게 역사라고 생각한다. 96년 당시에 나는 써야만 했기에 그런 글을 발표했다. 내가 만약 그 때 문제된 부분을 피해갔거나, 학장이나 일부 미대 교수들의 삭제요구를 받아들여 문제가 된 부분을 자진 삭제했다면 그 후의 일은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그때 그 순간에 나는 지난 시간 동안 싸울 수 있었던 양심과 힘을 모두 잃어버렸을 것이다. 내가 그 순간 그 부분을 잃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여기까지 싸울 수 있었던 힘과 정당성이 확보되었던 것이다. 당시 미대의 압력에 못견뎌 내가 문제된 부분들을 스스로 삭제했더라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후회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오랜 투쟁으로 힘들었지만, 내가 스스로 감내하고 견딜 수 있었던 것은 그 당시 그 부분을 지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법원에 제출했던 당시 미술대학 청문회의 녹음기록들을 지금 다시 들어 보면 나는 내 판단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미대 교수들은 내가 ‘왜 서울대 외부의 쓰레기 같은 교수의 논문을 인용 언급해 은덕을 주신 분들을 친일했다고 욕보였는지 해명하라’고 청문회까지 소집했었다. 서울대에선 외부교수들을 인정하지 않는다.
7년은 적지않은 시간이다. 어려웠던 점은?
그동안 410명이라는, 역사상 유례없이 많은 수의 서울대 교수님들이 서명을 해 주었다. 그러나 타 대학교수들과 달리 대부분의 서울대 교수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좀더 특별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옆에서 누가 죽어도 아무 관심도 없다. 더욱이 조직윤리에 벗어난 내 경우엔 매우 냉소적인 시선을 보냈다. 나는 힘없는 혼자였고, 미대 교수들은 학내에 조직적으로 명예훼손에 관계된 온갖 악의적 루머를 퍼트렸다. 현재도 나의 부당해직을 주도했던 교수가 교수협의회 부회장까지 맡고 있다.
작년 10월 서울대 국정감사 이후, 민노당 최순영 의원이 밝힌 재임용 심사보고서 대필의혹을 비롯해 공문서 조작 혐의 등 자신들의 불법행위를 은폐하고 정당화하기 위해 그동안 미대 교수들과 대학본부는 내게 인권유린 차원의 정신적 살해행위를 저질렀다. 전후좌우 주변으로부터 들어오는 보이지 않는 조직적 폭력이랄까, 그게 엄청났던 거다. 그걸 견뎌야만 했다, 온몸으로. 그런 부분이 가장 힘들었다. 그런 시선들을 어떻게 감내하는가.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사람들은 조직 뒤에 숨어 집단적으로 개인을 몰아세우고.
대학본부 앞에서 천막농성을 시작한지 500일이 다 되어가고 있다. 나는 지금까지 이 문제가 대학의 자정능력으로 해결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천막농성을 해 오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군가 길바닥에 아파서 쓰러져 있으면 이 사람이 어디가 아픈가에 대한 일말의 마음이라도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한데 관악산의 인간들은 이번 지율스님의 경우처럼 저 사람이 언제 죽나, 그것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인간들이 행한 일은 인간이 결자해지해야 되는 것 아닌가. 그동안 서울대 내부에서는 문제가 신의 영역에서나 해결돼야 할 것처럼 뒷짐지고 방기로 일관했다. 결국 7년을 방기하고 법의 심판을 받은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대 당국과 정운찬 총장은 내게 ‘미안하다’는 사과 한마디 하지 않고 있다. 이성적 학문집단이라는 대학에서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그건 대학의 자격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렇게 법원판결로 해결될 일이었다면 나는 천막을 칠 필요가 없었다. 비록 전화, 인터넷선이 끊겼지만 미술대에 있는 내 연구실에 편히 있을 수도 있었다.
아직 공식적인 사과 한마디도 없고, 책임자 처벌에 대한 언급도 없다. 한 국회의원이 몇 달에 걸쳐서 조사해 밝힌 현 미대학장의 심사보고서 대필의혹에 대해서도 해명은 커녕 무시한 상태다. 지금의 나를 단순히 강단으로 복귀시키고 급여 정도 보상해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생각은 천민자본주의 경제학의 잣대로 사건을 축소 은폐하는 것이다.
나는 개인적인 차원으로 싸움을 계속 해 온 것이 아니다. 그간 서울대보다 더 많은 급여를 주겠다는 다른 대학의 제안도 있었지만 거절했다. 왜냐면 언론에서 기사 한 줄이라도 더 다뤄주는 서울대에서 발생한 일이었기 때문에 내 몸만 편한 선택을 할 수가 없었다. 일반 사립대학에서 나와 같은 부당해직 사례는 밤하늘의 별처럼 많지만 한국 언론의 속성 상 별로 다루지 않는다. 언론에도 문제가 많다고 본다. 언론의 시선 자체가 한국사회에서 서울대를 정점으로 대학 서열화를 부추기는 셈이다. 이번에 승소판결을 이끈 법무법인 태평양에서 애초부터 내 사건을 공익사건으로 간주해 변호사들이 최선을 다했던 것도 그런 이유였다.
나는 디자인문화비평가로 활동하며 이 땅에서 산다는 것과 문화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문화적으로 내가 중요하게 고려하는 것은 과거, 현재, 미래를 연결하는 종합적 시선과 태도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과거는 과거이고, 미래는 미래라는 분리의식이 강한 것 같다. 그러나 나는 과거사 청산과 미래로 향한 비전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을 이루는 피할 수 없는 조건으로 본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사를 어떻게 해결하고 그것을 현재의 시공간에 어떻게 상호작용하게 하는가의 과정에서 새로운 많은 가능성들이 생성될 것이다. 이를 위한 중요한 인터페이스가 바로 내가 생각하는 ‘문화적 상징의 해석과 창조’로서의 디자인이다. 나는 과거와 미래의 양방향을 동시다발적으로 다루는 멀티미디어적 시선이 앞으로 더욱 필요할 거라 생각한다. 내가 관심을 두고 있는 과거사 청산은 이런 생각들과 맞닿아 있다.
김민수 교수 사건에 대하여 침묵으로만 일관하던 서울대 교수협의회는 지난 4일 공식견해를 발표했다. 교수협의회는 "대학당국이 대승적인 차원에서 김민수 교수의 교단 복귀 및 그간의 희생에 대한 보상을 위해 법률과 학칙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할 것"이라면서도 "'재임용'이냐 '복직'이냐 하는 지엽적 문제에 구애받는 것 또한 학내의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이에 김민수 교수는 7일 개인 성명서를 통해 ”원상회복을 지엽적 문제로 어물쩍 물타기하는 교협의 태도는 기본 양식과 도덕성에 의문을 갖게 한다“며 사건 관련 책임자들의 확실한 처벌 등을 교수협의회에 촉구했다. 아직, 사건은 끝나지 않았다.
최소연 기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