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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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abel  [homepage]님께서 남기신 글 (2002-12-08 16:03:35, Hit : 270)
[펌]튜닝과 짝퉁
(사진찍어야 되는데....허긴 밖에 나가도 찍을 인간이 없으니...후우...진눈깨비는...비보다 카메라에 위협적이다...높은 습도에 온도차가 크기때문인데....쩝..관두자....일줄동안 안내린 비가 왜 오늘 오는거야.....)


꼭 한국만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참...많이 쓰이는 단어이다.    멀쩡한 차를 뽀갠다던지, 좀 더 정밀한 이미테이션을 찾아다는다는 것.     물론 둘다 시각문제이고 사회 환경에 엄청 닿아있는 문제이지만, 그것뿐 아니라 회화가 되든 사진이 되든 어떤 시각매체에서든 불거지는 상황이다.      베끼거나 비틀거나.
그런 면에서 지금의 디지털은 기존 미디어가 걸어야 했던 우울함과는 약간은 다른 선을 밟고 있다.      다른 미디어와 달리 엄청난 분량의 네트웤때문인지 아니면 기존 권력과는 다른 계층이 지배하고 있어선진 모르겠지만, 디지털이라는 미디어의 메인 유저들이 쓰는 연장/프로세스/사고 은 그전까지의 튜닝이나 짝퉁과는 조금은 다르다는 생각이다.      희망일 수도 있고, 악몽일 수도 있다.      어쨌든 난, 포스트 모더니즘이라는 말보다는 엽기란 말이 더 맘에든다.
디지털에 더 많은 독창적인 학습/연구 가 수혈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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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크놀러지에 취해버린 디지털 예술 - 우효기

시몬느 베이유(Simone Weil). 전형적인 유대인 가정에서 교육받고 철학을 전공한 그녀는 자신이 처한 상황이 이상적이고 정당한 일이라고 생각되었을 때에는 기존체제에 차분하게 반기를 들었다.

그녀가 교직에 있을 때, 자신의 이러한 태도에 위협을 가하며 면직(免職)을 감수하라던 동료에게 그녀는 “나는 항상 내 모든 노력이 반드시 면직이라는 보상으로 돌아올 줄 알았다”고 답하기도 했다.

이렇듯 유대인은 대부분 현실과 분리된, 신(神)과 자신이 끈끈하게 이어져 있다는 인식 아래, 탄탄한 자아를 형성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 안정된 심리는 놀라울 정도다. 한 유대인 친구는 내게 타인에게 행한 선의의 행동은 항상 최악의 보상으로 돌아올 것을 예상하라고 얘기해 주었다. 베이유도 가난한 사람과 목소리가 없는 사람을 위한 자신의 노력이 현세에서 보상받을 수 있다고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도 인간의 선의의 행동은 세속적인 사회에서는 미운 씨가 되기 쉽다. 경우에 따라서는 선(善)을 행한 인간의 자만을 신이 용서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며, 또 사회는 세 사람이 모여서 지내는 것으로 시작했고, 삼인(三仁)이라는 삼각형 관계에서 선은 자신이 행하지 않고서는 쉽게 믿기 어려운 일화가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인간이 선을 행하고도 신으로부터 현세에서의 따뜻한 보상을 기다리지 못할 때, 과연 그 다음 인생의 장(章)에서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현 사회에서 동료에 대한 믿음 없이 기계 또는 물질에 대한 기대를 키우는 것이 발전적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기계에 대한 인간의 기대는 곧 인간이 신이 원한 속죄하는 인간이 되기를 원했던 방향에서 이탈하여, 자아의 위대함을 찾으려는 데 만족을 주는 보이지 않는 허상의 대치가 아닐까? 아인슈타인(Einstein)은 노년에, 자신이 이룬 모든 연구결과를 통해 신의 존재가 없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고 했다.

자연의 원리를 연구하는 것은 신에게 접근하는 것이다. 이제 곧 나노(Nano) 테크놀러지가 수면 위로 드러나고 지금까지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나노미터로 관찰한 연구결과가 생활에 적용된다면 인간이 신의 원리에 접근할 수 있게 될까?

이미 개인 서버용량을 테라바이트(Terabyte)로 주문하는 것이 상식으로 통하는 시대가 10년 안에 온다고 한다. 수(數)와 픽셀(pixel)의 미학이 곧 우리를 지배할 것이다. 무한한 수와 제한 없는 미세한 픽셀이 과학과 예술의 재료가 될 것이다.

이렇듯 디지털의 매력은 수와 픽셀의 미학을 접목한, 신이 창조한 자연의 그늘 아래에서 벗어나 인간이 자체적으로 시도하는 행위라고 한다면, 자연과의 경쟁에서 자연이 갖는 완전함, 정신성, 신비로움 그리고 시공간적인 움직임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현재 디지털 예술의 전반적인 흐름은 수와 픽셀의 완전한 미학과는 다른 방향으로 그 맥이 잡혀 있다. 정신성이 배제된 채, 작가는 작품의 내용과 목적에서 벗어나 기계가 주는 날카로운 감성이나 시뮬레이션, 아니면 쉽게 얻어진 혼합영상에 현혹되어 작품 내용과 관계없이 스스로 창작물에 만족하며, 우매한 관객 역시 쉽게 감탄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현재까지 몇몇을 제외하고 내용을 덮을 만큼 우수한 기계로 만들어진 작품을 본 적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대부분 아마추어 비디오 작가의 작품은 영화를 전공하는 초보자가 만든 단편 영화보다 어설프다. 영화관에서는 용납되지 않을 어설픈 조명과 편집으로 만들어진 클립이 미술관이나 화랑에서 방영되고, 작품으로 인정된다. 물론 그 나름의 변명 속에서 영화의 세속적인 ‘룩 앤 필(Look and Feel)’을 의도적으로 무시할 수도 있다. 이런 경우에는 이론적인 억지가 작가의 목소리에 깔려 있다. 하지만 관객은 완벽한 디지털 프로세스를 거친 작품을 보면 신선한 공기를 마신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이론은 앞서나 미숙한 기술의 작품을 접할 때는 자신의 생각을 1980년대로 돌려야 하는 난감함을 느끼게 된다. 지금 디지털 미술계는 이러한 이중구조, 즉 완벽함과 졸렬함의 구조를 갖고 있다.


정신성이 배제된, 기계에 의존하는 예술


큐레이터는 영상작업을 하는 작가 사냥에 나서고, 과거와 미래의 선상에서 의미 있을 법한 영상작품을 제작한 작가와 다음해 전시를 기획한다. 하지만 얼마 후, 작가의 비디오에 사용된 이펙트(effects)가 모두 ‘Out of the box(바로 프로그램의 선택사항에서 만들어진)’ 이펙트임을 알게 된다.

물론 이러한 실수는 영화 제작자가 지원자의 포트폴리오를 검토할 때에도 생길 수 있는 일이니 반드시 모든 작가가 영상작업의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단지 튜브 물감을 사용하는 것이 작가가 직접 안료를 개어 재료화할 때와 다르다는 식으로 이러한 상황을 이해해야 하는 걸까?

과거에 추상표현주의가 화단에 등장하여 아방가르드적 성격의 회화로 인정받았을 때 나타났던 수많은 아류를 기억할 것이다. 서툴기 짝이 없는 아마추어의 작품은 미대 대학생의 눈으로도 구분할 수 있었으며 서투른 정신성과 색채의 조화는 답답할 정도였다. 현재 디지털 미술은 대부분 이 단계다. 물론 폴록(Pollock)과 프랑켄탈러(Frankenthaler)와 같은 작가가 없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브라운(Brown)대학에서는 얼마 전 IBM의 후원을 받아 영문학과 교수와 18명의 학생이 ‘버추얼 도서관’이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어두운 방 안에 들어가면 책 한 권 분량의 문자가 벽에 투사되어 부유하고 있다. 설치된 마우스를 옮겨, 특정 문자를 가리키면 그 문자가 서서히 커지면서 앞으로 다가온다. 디지털 비평가인 미라펄(Mirapaul)은 그들의 의도가 디지털 문학을 만드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들이 만든 것은 《백경》과 같은 문학보다는 3D로 만들어진 ‘디지털 조스(Jaws)’라고 말했다.

한때 ‘책의 종말’에 관한 글을 썼으며, 현재 이 프로젝트를 맡고 있는 교수는 문학과 디지털 프로세스를 접목하려 했다고 한다. 하지만 누가 보아도 이 프로젝트는 한 공간 내에서 개발자와 교수가 의도했던 의미를 찾기 어려운 프로젝트임을 알게 된다. 만약 이것이 예술작품으로 미술관에 전시되었다면 문제가 달라졌을까? 개발자가 알려진 작가이고, 작가의 의도가 관객이 선택하는 단어를 통해 시각적으로 엄습하는 존재가 되어 다가온다면 어떤 느낌이 들 것인지 시험하는 것이었다면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물론 예술작품인 경우, 전시된 방 안의 어두움의 정도, 프로젝션의 선명도, 작가가 선택한 마우스의 모양 등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전시되어야 할 것이다.


완벽함에 도전하는 디지털 예술이 되어야


휘트니미술관에서 열리는 온라인 전시(artport. whitney.org)도 넷 아트, 즉 웹브라우저를 이용한 작가의 작업이 한계에 이르렀다는 평을 받았다.

개발자의 태도에 서서 넷 아트를 만들어야 한다는 전시기획자의 의도는 분명했다. 이론에 불과한 개발자의 코드를 관객이 시각적으로 읽을 수 있게 함으로써 작품의 자세한 제작과정 및 배후에서 작품을 가능하게 하는 메커니즘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이러한 의도는 넷 아트에서 식상해졌다. 관객은 그 이상을 원하고 있다. 개발자가 인터랙티브 작품을 만드는 것에는 찬성하지만 이번 전시에 출품된 작품같이 수많은 팝업(pop-up) 윈도로 엔드 유저를 당황케 하고, 시각적인 치밀함이나 세련도가 떨어지는 작품은 온라인 아트에 대한 기대를 떨어뜨렸다.
치밀하고 섬세하다는 평가를 받는 힐먼 커티스(Hillman Curtis)는 로드코(Rothko)를 인용하며 자신이 원하는 온라인 공간에 대한 컨셉트를 얘기한 바 있다.

로드코는 “나는 작품을 만들기보다 하나의 공간을 만든다”고 하였다. 커티스 역시 웹브라우저 내에서 생성되는 공간이 분리된 색면의 조합이기보다 하나의 공간이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하나의 공간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과제인지는 웹 관련 일을 해본 사람은 쉽게 알 것이다. 하나의 집이 되기 위해 하나하나의 요건, 지붕과 기둥, 바닥재료 모두 치밀하게 계획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주어진 공간은 헛간이 되고 말 것이다. 현재 우리는 헛간과 같은 온라인 미술을 쉽게 접할 수 있다.

루이스 칸(Louis Kahn)은 지식에서 중요한 것은 더 많은 양의 지식을 가지는 것보다 배움의 자세 자체가 자신이 헌신하는 분야에서 존경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칸은 건축에 대한 공부를 통해 인간을 공부했다고 한다. 디지털 분야에서도 인간은 자연을 경쟁자로 삼아 자연의 아름다움과 완벽함에 도전하여야 한다. 자연의 어떤 면과 경쟁해야 할지는 저녁 무렵 노을을 바라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신은 아직까지 선의의 행동을 하는 자에게 현세에서 얼음 같은 벌을 주었어도 신의 창조물을 모방하려는 자에게는 기회를 주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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