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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omepage]님께서 남기신 글 (2008-04-16 21:50:34, Hit : 390)
[re] 전시 4.13



ILLUSIVE

이승민展 / LEESEUNGMIN / 李昇珉 / painting

2008_0418 ▶ 2008_0510



이승민_냄새_캔버스에 유채_194×132cm_2008_왼쪽
이승민_냄새_캔버스에 유채_194×132cm_2008_오른쪽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아트스페이스 에이치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8_0418_금요일_06:00pm






아트스페이스 에이치_ARTSPACE H
서울 종로구 원서동 157-1번지
Tel. +82.2.766.5000
www.hzone.in






블루닷 아시아를 통해 화려하게 데뷔한 이승민의 첫 번째 개인전이 종로구 원서동 "아트스페이스 H"에서 4월 18일부터 열린다. 회화와 조각을 통해 보이지 않는 폭력에 무감각해져 가는 현대인의 통점을 꼬집는다.




이승민_짝눈_캔버스에 유채_162×227cm_2006


"폭력은 악취다" ● 폭력은 고약한 냄새와 닮아 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반복된 자극은 역겨움, 메슥거림, 식욕감퇴를 불러일으키며 서서히 주변으로 스며들기 시작해 이내 자취를 감춰버린다. 그러나 사라진 것이 아니라 감각을 마비시키며 숨어버린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악취의 고통‘은 기억 속에 남아있다. 여전히 생생한 역겨움. 이 숨어버린 냄새의 정체를 찾아 지워버리고 싶다. 이승민이 냄새를 그려야 하는 이유다.




이승민_자꾸만닮아갑니다_캔버스에 유채_112×162cm_2006



이승민_자꾸만닮아갑니다_캔버스에 유채_100×100cm_2007


"냄새를 그린다" ● 이승민의 2007년 이후 신작은 평화로워 보인다. 인물의 눈동자까지 물들인 엷은 분홍색, 파란색, 붉은색 화면은 예쁘고 유혹적이다. 그러나 이 안개와도 같이 인물의 온몸을 감싸고 있는 유혹적인 색깔에 매혹된 관객은 지독한 냄새의 흔적과 폭력의 상처를 보지 못한다. 눈과 귀를 지워 버리고 코와 입만 남겨진 인물은 폭력에 의해, 제도권에 의해 억압 받아 기능을 상실한 현대인의 초상을, 일그러진 눈과 부푼 얼굴은 폭력에 무감각해진 현대인의 고통을 상징한다. 축축한 안개. 유혹적인 위장막 너머 폭력의 피해자가 여전히 살 냄새를 풍기는 인간임을 망각해선 안된다. 이승민의 안개는 감추기와 드러내기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아이러니한 공간이다. 그래서 소실점에 의존한 공간을 그리지 않는다. 공간을 추적할 단서를 지워버리고 살 냄새가 스며든 모노톤의 공간을 그려낸다. 그리고 그 공간에 대한 근간, 즉 냄새의 근원, 그리고 냄새와 폭력이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군대, 학창시절로 이어지는 기억 속에서 발견한다.




이승민_자꾸만닮아갑니다_캔버스에 유채_162×112cm_2006


"나는 짝을 원해!" ● 이승민의 그림은 짝을 이루고 있. 커플이다. 주체와 타자가 있다. 남자와 여자가, 빼빼와 뚱보가 나란히 있다. 짝은 쌍둥이와는 다르다. 처음부터 다름에서 출발한 만남이다. 유전적 공통점 보다는 차이점이 많고, 화합 보다는 마찰이 빈번하고, 동성이 아닌 이성이다. 이승민의 군대와 학창시절은 폭력의 가해와 피해자의 경험이 뒤섞인 시기였다. 그리고 지금보다는 훨씬 말랐던 시기이기도 하다. 지금의 여성적이고 섬세한 면과 대조적으로 거칠고 남성지향적인 마쵸이즘이 넘쳐나는 반항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이 두 대립은 하나다. 하나의 실체에 두 개의 얼굴. 갈등은 여기서 시작된다. 학창시절 왼쪽 가슴에만 달린 나이키 로고까지 못마땅했을 정도로 짝에 대한 갈증이 컸던 이승민에게 있어 주체와 타자의 위치는 중요하지 않다. 끊임없는 전복이 이루어지고 마찰이 이루어져 결국 하나가 될 것임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 H z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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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謙齋)에 고(告)함

우정展 / WOOJUNG / 禹正 / steel craft

2008_0416 ▶ 2008_0422



우정_겸재에 고함3_스텐레스위에 알곤용접_20×37.5cm_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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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8_0416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_10:00am ~ 07:00pm




모로갤러리_GALLERY MORO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8-165번지 남도빌딩 1층
Tel. +82.2.739.1666
www.morogallery.com






겸재에 고함, 형태와 본질 ● 일본 나라의 법륭사 금당. 오층탑 천장. 아스카 유리금속공방 우물터 등 도처에 섹스 장면의 그림들과 야한 낙서들이 있다. 이영희의 “노래하는 역사”에서 이들이 백제인들에 의해서 세워진 문화재들이란 것과 그 낙서들을 우리말 음담패설로 해석하여 풀어내고 있다. 우정의 예술과 작품들에서 1300년 전 백제의 목공들의 야한 낙서와 그 예술혼을 연상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내가 주목하고자하는 것은 그 야한 낙서와 그림이 아니라 그 쓰임과 본질에 접근해 보면서 우정의 작품을 보려는 것이다.




우정_겸재에 고함5_스텐레스위에 알곤용접_28×34cm_2008


현대인의 시각에서 본다면 그 문화재들은 이미 역사에 길이 남은 걸작의 예술품이다. 그 예술품에 불경한 음화와 음담패설이 용서될 리 없다. 그런데 그 낙서가 무슨 암호같이 버젓이 가장 신성한 곳에 눈에 띄게 또는 엄밀하게 숨겨져 있는 것이다. 우리는 또한 낙서를 한 사람들이 그들 장인 스스로라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 현대가 앓고 있는 부조리들을 봄과 동시에 그 해법도 제시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정치와 경제 노동과 사회 그리고 문화와 예술의 해법과 예술과 예술가의 본질이 혼재되어 나타나고 있다. 그 낙서와 건축물과 그림과 조각과 불상들은 각각 다른 것인가? 하나인가? 다르면서도 하나인가? 일본에 있지만 우리의 손으로 우리가 만든 우리의 문화재 (지금 현대의 생각으로는 무리가 따르겠지만)들에서 장인들의 혼이 그 건축물에서 보다도 그 건축물에 부과된 낙서에서 더욱 응축되어 보인다.




우정_겸재에 고함6_스텐레스위에 알곤용접_28×31cm_2008


우정의 생활과 작업이 역사를 이루는 법륭사 금당의 목공 같지는 않을지라도 미쳐서 날뛰는 자본과 노동이란 호랑이 등에 타고 조련하고 있는 산신령 같지 않는가? 쇠를 녹이는 필력으로 기운생동 하는 호랑이 등에 쇳물로 금강산 준을 치는지 호피를 지져서 호랑이에 무늬를 새겨 넣고 있는지? 우정의 형태와 본질은 아직도 호랑이 불알 만지고 놀고 있다.




우정_겸재에 고함8_스텐레스위에 알곤용접_20×20cm_2008


현대에 있어서는 권력과 자본이 민중과 노동을 착취 수탈 할 때 예술은 그들의 노리개로 전락하여 시녀를 자청하고 있다. 일제에 의해 서양의 제국주의적 현대의 교육제도와 예술사조가 이 땅에 들어온 이후 해방과 전쟁과 독재를 거쳐 오면서 자본주의가 민주주의와 상생하지 못하고 민주주의를 잠식하고 파괴하는 극심한 병폐를 앓고 있는 현금이다.




우정_형태와 본질1_스텐레스위에 알곤용접_25×22cm_2008


미술에 있어서도 그 수많은 외래의 사조와 기법 족보를 달달 외우고 익히고 배워왔어도 정작은 우리 것은 하나도 지키지도 내어 놓을 것도 없을 뿐 아니라 관심조차 없다. 그러면서 아직도 물 건너 온 남의 그림 몇 점에 초등학생들까지 줄 세워 관람시키고 돌아 앉아서 코 묻은 돈을 세고 있다.




우정_형태와 본질10_스텐레스위에 알곤용접_65×31cm_2008


서양의 시민혁명전후의 졸부들은 그들의 부를 과시하기위하여 그들이 타도한 왕실과 귀족들의 흉내를 내었고 그래서 그림을 사서 꾸미고 자랑했다. 우리의 졸부들은 부와 돈을 숨기기 위해서 가능한 비싼 외제그림들을 사모아 동물원 창고 속에 위장하여 숨겨 놓는다. 큰 놈들이 그 짓 이니 졸개들이 멋모르고 편성하여 미술 경매시장이 호황이다. 우리나라에도 현대에 있어서 미술 사조나 운동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소위 민중미술이라 불리는 운동이 민중을 타고 넘어 정치로 돌진한 그래서 그곳에서 자리차지하고 넘실대면서 떠내려가고 있는 일꾼들이 있기는 하다.




우정_형태와 본질11_스텐레스위에 알곤용접_15.5×41cm_2008


지금 우리는 우리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고, 우리가 있는 곳을 알고, 가야할 곳을 찾아야한다. 그 길에 화가 우정이 있으면 심심하지는 않을 거다. 대중과 같이 서민의 삶을 사는 예술가와 그들에게 삶의 가치와 예술의 의미를 되돌려 주는 작가를 작가 우정의 작업과 작품을 보고 꿈꾼다. ■ 도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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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비현실을 유영하는 드로잉

The drawing, which swims an actuality and an unreality

다발킴展 / DABALKIM / drawing.mixed media

2008_0416 ▶ 2008_0429 / 일요일 휴관



다발킴_미혹_Self-Delusion_종이에 아크릴채색, 혼합재료_155×110cm_2006~2008




초대일시_2008_0416_수요일_05:00pm



2008년 갤러리NV 기획 공모작가

관람시간_10:00am~06:00pm / 일요일 휴관





갤러리 NV_GALLERY NV
서울 종로구 인사동 186번지 3층
Tel. +82.2.736.8802






일상의 풍경에 삽입된 환각적인 장면의 연출과 연계는 기이한 상황으로 보는 이들의 눈과 마음을 끌고 간다. 흘러 다닌다. 익숙하면서도 낯설고 구체적이면서 동시에 초현실적인 장면들은 한 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은 별개의 세계가 아니라 하나의 세계이자 이원적인 공간이 아니라 통합적 공간이다. 다발 킴은 의식과 무의식, 기억과 환상 사이를 미끄러지면서 이를 유연하고 매력적인 드로잉 아래 거느린다. 그 드로잉은 현실의 관찰과 기억의 회로를 탐사하는 작업의 교차선상에서 풀려나오고 그 사이로 또 다른 상상과 일탈이 얹힌다. 현재의 시간과 과거의 시간이 공존하고 구체적 세계와 비가시적 세계가 뒤섞여있는가 하면 드로잉과 장식적 패턴, 그리기와 설계도면 같은 구성, 회화이자 일러스트레이션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드로잉, 그리기는 자기 몸과 의식의 진솔한 받아쓰기처럼 화면 위를 유영한다.




다발킴_결혼식_wedding_종이에 아크릴채색, 혼합재료_150×110cm_2006~2008


상이한 것들끼리 만나서 또 다른 장면을 만들고 다시 어디론가 이동하면서 단계적으로, 구축 적으로 균형 잡힌 하나의 상을 추적하는 이 드로잉은 상상력과 문학적 감성에 힘입고 있다. 대부분의 형상은 안정되고 견고한 지지대나 인체로 귀결되고, 인간의 형상을 흉내 낸 무수한 사물과 자연으로 직조된 기이한 세계상을 가시화한다. 뿌리와 깃털, 꽃과 저울, 못과 끈 혹은 신체를 떠올리게 하는 선들이 반복해서 등장하고 그것들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나가면서 독특한 풍경, 정물을 형상화한다.




다발킴_풍만한 미인_A plump and voluptuous beauty
종이에 아크릴채색, 혼합재료_145×110cm_2006~2008


다발 킴의 드로잉, 회화는 시간과 의식의 흐름에 순응하고 그 사이로 순간적으로 부풀어 오르는 기억을 우연히 만나 파생한 형상과 선, 상징들이 기이한 풍경 상을 만들어 보여준다. 이 파편적이고 분열되어 보이는 낱낱의 장면은 어느덧 또 다른 존재로 연결되고 이내 하나의 몸을 형성한다. 몸 안에 일상의 생활공간과 자연과 풍경, 공학적인 설비와 구조, 가구 같은 것들이 촘촘히 맞물려 균형을 이루면서 펼쳐진다. 독특한 구성이자 기이한 장식성, 몸에 대한 흥미로운 사유, 낯선 것들끼리의 매혹적인 결합 혹은 초현실적인 조우 등은 익숙하면서도 신선한 그림이란 생각이다.




다발킴_여왕개미의 방_The chamber of the queen ant
종이에 아크릴채색, 혼합재료_75×90cm_2008


그와 한 쌍으로 사실적으로 그려나간 개미 그림이 등장한다. 여왕개미에 관한 섬세한 관찰과 흥미로부터 출발한 이 그림은 작은 개미들을 그리고, 프린트해서 조합한 것으로 하나의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그 모습은 흡사 우리네 인간의 생애를 떠올려주고 또한 그 가운에서 정체성을 찾아가는 것과 매우 유사하다고 보고 있다. 작가는 여왕개미의 일생을 관찰하고 흥미롭게 여기며 그로인해 느껴진 것들을 간결하고 명징하게 그려놓았다. 독특한 공간구조 및 기호와 함께 등장시킨 개미는 개미를 빌어 그려나간 인간의 삶과 현실에 대한 은유로 빛난다. 사실 개미의 삶과 여왕개미의 일생은 생명의 부분 단위에 유전적으로 각인된 활동을 한 것뿐이지만 여기에 인간적 해석을 가해 하나의 장면으로 연출해놓았다. 그것은 단지 개미의 극사실적인 재현이 아니라 개미를 빌어 그린 자신의 자화상이자 삶에 대한 강한 열망과 그로부터 교훈적인 이야기를 이미지화한 것이다.




다발킴_공간의 영역_The domain of space_종이에 아크릴채색, 혼합재료_110×75cm_2008


아울러 작가는 자신이 신고 다녔던, 이제는 다 헤지고 쓸 수 없게 된 신발을 해체해 그 겉과 안쪽에 이미지를 개입시켰다. 사실 자신의 구두는 그간의 자기 생애의 모든 것을 낱낱이 추억하고 기억한다. 지난 시간이 온전히 저장되어 있는 것이 다름 아닌 신발인 것이다. 신발에는 많은 이야기가 담겨있다. 신발은 우리의 삶의 방식과 노동 양태 그리고 여가생활에 대해 다른 어떤 개인 소유물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작가는 그토록 오랜 시간을 거닐어 다니고 어딘가에 갔었음을 묵묵히 증거 하는 신발을 보면서 서사적 이야기와 초현실적 이미지를 결합시켰다.




다발킴_수개미의 꿈_The dream of male ants_종이에 잉크, 혼합재료_90×150cm_2008


“닳고 닳은 신발의 안쪽을 들여다보면, 신발 주인의 발가락이 남긴 오목한 부분과, 부드럽게 파인 뒤꿈치 자국이 눈에 띈다. 신발 밑창의 상처들로부터 우리는 신발 주인의 몸의 자세, 걸음걸이 그리고 그가 얼마만큼 돌아다녔는지 까지를 유추할 수 있다.”_낸시 렉퍼드




다발킴_일기 2002-2007_Diary 2000-2006_신발가죽에 아크릴채색_48×15cm×2_2008


작가의 이 독특한 드로잉은 서사적이고 개인적인 이야기 그림이다. 동시에 그것은 흥미로운 일러스트레이션이자 카툰 또는 이야기그림들로 다가온다. 고된 손의 노동과 치밀한 연출공간, 구체적인 세계와 비가시적인 세계의 공존, 일상과 환상의 교차 등등 시간의 흐름을 가로질러 가면서 화면 안에서 자유로운 시공간을 펼쳐 보이는 것이 다발 킴의 드로잉이다. ■ 박영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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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그리고 시선

최홍준展 / CHOIHONGJUN / 崔洪準 / photography

2008_0416 ▶ 2008_0422



최홍준_Untitled-1(서울)_젤라틴 실버 프린트_20×24inch_2007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스페이스 아침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8_0416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_10:00am ~ 06:00pm




스페이스 아침
GALLERY SPACE A-CHIM
서울 종로구 화동 138-7번지
Tel. +82.2.723.1002
mooze.co.kr






그리기, 훔치기, 잃어버리기 ● 최홍준의 사진들은 자연 풍경들을 보여 준다. 펼쳐진 들판, 흐르는 산줄기, 눈 덮인 산마루 그리고 흰 파도가 밀리는 바다 풍경들이 그것이다. 최홍준의 사진들은 말하자면 풍경사진이다. 하지만 최홍준의 사진이 보여주는 자연 풍경들 안에는 그 풍경들에 인위적으로 부가 된 풍경 외적 요소들이 함께 들어 있다. 그건 이젤의 삼각대 위에 놓인 비인 캔버스와 그 캔버스 앞에 서있는, 등을 돌리고 방한복의 모자에 가려서 얼굴이 은폐된 익명의 사람 (혹은 화가)이 그것이다. 그러니까 최홍준의 프레임 공간은 자연 풍경과 의도적으로 그 풍경 안에 삽입된 풍경 외적 오브제들로 짜여진 중층 구조의 공간이고 그 중층 구조가 사진 공간을 단순한 풍경 이미지의 공간이 아니라 복합적인 의미화의 공간으로 만든다. 이 공간 의미화를 통해서 최홍준이 보는 이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최홍준_Untitled-2(전라남도 영광)_젤라틴 실버 프린트_20×24inch_2007


내가 보기에 최홍준의 사진 메시지를 독해하기 위해 주목해야 하는 코드는 세 가지다. 우선 ‘자연 풍경’이 있다. 이 자연 풍경은 최홍준의 사진들을 풍경 사진이라는 잘 알려진 사진 장르의 코드로 읽게 만든다. 프레임 공간의 거의 전부를 차지하는 자연 풍경들은 최홍준의 사진들이 여타 풍경 사진과 마찬가지로 자연의 재현이라는 오래 된 조형 예술의 목적을 따라서 촬영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사진들을 풍경 사진의 코드를 따라 읽을 때 풍경 안에 삽입된 빈 캔버스와 손에 연필을 든 화가의 존재 또한 풍경 외적인 이질적 요소가 아니라 자연에의 미메시스라는 목적을 보다 강화시키기 위한 작가의 의도적인 장치로 이해된다. 이 경우 프레임 내부에 병치 되어 있는 자연 풍경과 풍경 외적 요소들의 관계는 최홍준의 사진 공간을 복합적인 메시지가 아니라 단선적이고 평범한 메시지의 공간으로 응시하게 만든다.




최홍준_Untitled-3(전라남도 진도)_젤라틴 실버 프린트_20×24inch_2007



최홍준_Untitled-4(수원화성)_젤라틴 실버 프린트_20×24inch_2007


다음으로 주목되는 코드는 풍경 외적 요소의 하나로 사진 안에 들어 있는 캔버스, 더 정확히 ‘빈 캔버스’다. 풍경 사진의 코드를 따라 읽으면 미메시스적 자연 재현이라는 평범한 메시지의 한 요소로 작용하는 캔버스는 그러나 그것이 이미지 부재의 공간이라는 특성 때문에 그 의미 작용이 역전된다. 최홍준이 의도적으로 사진 공간 안에 배치하는 캔버스는 자연 풍경이 그려진 공간이 아니라 텅 비어있는 캔버스, 즉 공백의 공간이다.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그 공백의 캔버스는 우선 보는 이에게 아직 자연 풍경이 그려지지 않은 공간, 즉 이제 화가의 손에 의해서 외부의 자연 풍경이 가득 들어서게 될 기대의 공간의 여겨지지만 그러한 시각적 기대는 캔버스의 공백 공간을 코드화 하는 또 하나의 요소인 화가의 손 그림자와 더불어 그 의미를 곧 취소당한다. 왜냐하면 빈 캔버스 위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이미지인 화가의 가늘고 검은 손 그림자는 비어있는 캔버스 공간 안에 담길 수 있는 것은 결코 자연 풍경이 아니라 다만 그 자연을 주관적으로 재현하고자 하는 화가의 자기 투사적 이미지일 뿐이라는 사실을 비판적으로 암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캔버스의 두 특성인 공백성과 검은 손 그림자는 재현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을 소유하고자 하는 오래 된 미메시스적 시도의 나르시시즘과 그 무모함을 보는 이에게 새삼 상기시킨다.




최홍준_Untitled-5(경상북도 청송)_젤라틴 실버 프린트_24×20inch_2007


마지막으로 주목해야 하는 코드는 프레임 공간 안에 배치된 또 하나의 풍경 외적 요소인 익명의 인물, 더 정확히 ‘얼굴 없는 화가’이다. 두꺼운 방한복을 입고 그 방한복의 모자로 얼굴을 가린 채 등만을 보여주는 이 인물 오브제는 그 익명성 때문에 다양한 독해를 가능하게 한다. 캔버스를 앞에 두고 자연 풍경과 마주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풍경 속의 인물은 당연히 화가로 받아들여지지만 다른 한편 두꺼운 방한복으로 몸을 감싸고 더구나 방한복 모자로 얼굴을 숨기고 있다는 특성을 강조하면 그는 자연을 재현하려는 화가인 동시에 자연을 훔치고자 하는 절도범을 또한 연상 시킨다. 그리고 어둡고 두꺼운 방한복의 이미지를 통해 화가와 절도범이라는 이중 코드의 존재로 변형된 그 익명의 인물은 자연을 예술적으로 재현하는 행위가 단순히 주관적 나르시시즘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절취하고 소유하려는 행위, 요컨대 자연을 훔치고자 하는 절도 행위와 다르지 않음을 암묵적으로 시사한다.




최홍준_Untitled-6(강원도 동해)_젤라틴 실버 프린트_20×24inch_2007


하지만 보다 중요하게 파악되어야 하는 건 사진 속 인물을 특성화 하는 또 하나의 요소인 그 인물의 익명성, 즉 얼굴 없음이다. 빈 캔버스와 방한복의 인물이 자연을 소유하고 훔치고자 하는 자연 재현의 지배적 속성을 비판하는 것이라면 방한복 모자로 얼굴이 은폐된 익명적 인물의 코드는 그러한 자연의 지배가 인간 자신에게 어떠한 결과를 불러들일 수밖에 없는가를 암시하는 의미화의 장치로 여겨진다. 일찍이 아도르노가 말했듯, 자연을 지배하고자 하는 인간은 그 끝에서 자기 자신의 자연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면, 최홍준의 얼굴 없는 화가라는 사진적 은유 안에 담겨 있는 메시지 또한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방한복에 묻혀 얼굴이 사라진 익명의 화가는 재현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을 훔치고 지배하고자 하는 인간의 행위가 궁극적으로 인간 자신을 익명의 존재, 다시 말해 스스로의 자연성을 잃어버린 얼굴 없는 존재로 만들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아프게 환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최홍준_Untitled-7(경상북도 영주)_젤라틴 실버 프린트_24×20inch_2007


최홍준의 사진들은 풍경 사진의 장르를 대상화 하면서 자연의 예술적 재현과 그 우울한 아이러니를 메시지로 전달한다. 하지만 그 자연 훔치기와 자연 잃어버리기의 아이러니가 반드시 예술의 영역에만 해당되는 건 아니다. 자연을 다만 개발과 개척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자연 도구화의 시대가 현대라면 그 현대성을 모방하며 살아가는 우리 또한 그러한 자연 상실의 아이러니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최홍준의 사진들은 아마도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자연 상실에 대한 경고인지 모른다. ■ 김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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