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대

1360  4/68   회원가입 회원로그인
  View Articles
  [homepage]님께서 남기신 글 (2008-04-13 13:43:56, Hit : 548)
전시 4.13



자아의 물질적 구현

신현준展 / SHINHYUNJUN / 申鉉浚 / sculpture

2008_0416 ▶ 2008_0423



신현준_사춘기_나무, 동_12×12×34cm_2004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청화랑 커뮤니티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8_0416_수요일_06:00pm






청화랑_CHUNG ART GALLERY
서울 강남구 청담동 9-1번지
Tel. +82.2.543.1663
town.cyworld.com/ChungArtGallery






자아의 물질적 구현 ● 카라밧지오의 「의심하는 성(聖) 도마」(1600년경)에는 부활한 예수를 둘러싸고 있는 사도들이 등장하는데 이중 성(聖) 도마는 부활한 예수의 실체를 믿지 못해 창으로 찔린 옆구리의 상처에 손가락을 넣어 본다. 요한복음에 묘사되어 있는 이 장면에서 예수는 눈으로 본 것을 믿지 못하는 도마에게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하였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눈으로 본 것을 믿지 못하고 손으로 확인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E. H. 곰브리치는 이를 빗대어 “우리는 모두 의심 많은 도마와 같다”고 하였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갓난아기와 같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움켜쥐려고 하는 이 본성은 촉각적 특징을 갖는 조각 예술의 탄생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 촉각적 실체를 확인하려는 본성을 표현하고 있는 예화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나르시스이다. 목이 말라 호수에 다가갔던 나르시는 물에 비친 아름다운 자신의 모습에 반해 그 모습을 바라보며 붙잡으려 하지만 손을 내 밀 때마다 그 형상은 수면 위에 부서져 버리고 만다. 수면 위의 형상을 움켜잡으려 수없이 물 위를 할퀴던 나르시스는 결국 탈진하여 물에 빠져 죽게 된다. 허버트 리드는 나르시스 신화가 “인간이 자신의 정신적인 이미지를 물질적인 도상에 투사하려는 뿌리 깊은 갈망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고 했는데 그의 지적처럼 나르시스 신화는 손으로 물질적 실체를 확인해 보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 어떻게 조각 예술의 탄생과 연관되는지를 간접적으로 말해 주고 있다.




신현준_긴 하루_나무, 동_15×15×35cm_2004


작가 신현준의 조각 작품은 나르시스의 신화를 상기시킨다. 나르시스로 상징되는 자아도취의 의미에서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의 작품이 자신을 주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며 또한 자신의 모습을 구체적, 육체적인 실체로 표현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 자신의 모습을 조각이라는 촉각 예술을 통해 구현하려고 하는 신현준의 의도는 큰 오차 없이 성공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작가와 이야기도 나누어 보기 전에 우리는 그의 조각들이 작가 자신을 주제로 하고 있음을 잘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묘사 방식은 현재 화단에 등장하는 인물의 캐릭터와 비교해 볼 때 상당히 독특하다. 요즈음 작가들이 자주 묘사하고 있는 얼굴들은 사실적이며 사물화되거나 기계화된 모습이 많다. 또는 보통의 사람이라고 보이지만 화면을 자세히 살펴보면 사이보그인 경우도 있다. 이런 인물들과 더불어 그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 전혀 단서를 주지 않는 모호한 경우의 인물도 종종 등장한다. 사람처럼 보이지만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우주인처럼 생겼거나 성의 정체성은 물론 나이까지도 알아보기 힘든 모호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또는, 이와 반대로 아주 정확한 사실 묘사로 인간임을 거듭 확인할 수 있지만 그 인간이 다루어지는 방식은 마치 서로 쌓여지거나 1회용 음식처럼 랩으로 포장되어 있거나 심하게 뒤틀리고 절단되어 있어 관객으로 하여금 물체처럼 보이도록 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러한 캐릭터들은 공통적으로 거대한 21세기의 디지털 사회 속에서 익명화된 실존과 자아 그리고 인간주의의 소멸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신현준_평화_나무, 동_47×14×30cm_2007


위에 열거된 인물들과 비교해 본다면 신현준의 작품은 자아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음에도 돈키호테처럼 정직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서술적인 성격을 드러내고 있는데 여기서 서술은 1인칭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주인공은 동시에 화자인 “나”이다. “나”는 여기서 항상 혼자 등장한다. “나”는 말 잔등 위에 엎드려 있거나(평화 2007), 벤치에 앉아 있거나(가을 오후 2007), 가슴에 손을 얹고 있거나(소망 2007), 좌대를 이부자리 삼아 옹색하게 태아처럼 웅크리고 있는 모습으로(나만의 방 2005) 등장한다. ● 그런데 여기 등장하는 신현준의 자아는 인간주의의 신념과 확신으로 가득 차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은 보는 순간마다 항상 따뜻한 온기가 흐르고 있음을 느낄 수 있는데 이는 목조각이 주는 따뜻함 때문만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굳건한 신념으로 만들어진 온기이다. 물론 우리는 신현준의 조각이 인간으로 위장한 사이보그나 외계인이 아니었음을 끝까지 믿어도 좋다.




신현준_가을오후_나무, 동_28×22×33cm_2007


신현준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의 시선은 눈을 감고 있거나(「소망」, 2007),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경우가(「하늘 보기」, 2007) 많다. 그것은 대부분 자신과 실존에 대한 사색들로 채워져 있음을 상기시킨다. 그의 조각은 그러므로 ‘생각함으로써 존재’하는 실존의 입체적 구현이다. 허버트 리드는 “인간은 근본적으로 자신의 실존을 형상화하는 수단으로서 조각을 필요로 했다”고 하였는데 적어도 신현준에게 있어서 조각은 무엇보다도 자신을 표현하며 외부와 소통의 통로를 만드는 수단인 것이다. ● 지붕위에 올라가 엎드려 하늘을 바라보고 있거나(「지붕에서」, 2007), 옥상 위에 올라가 있거나(「고독」, 2007), 눈을 감고 있거나(「가을 오후」, 2007, 「평화」, 2007, 「꿈」, 2007) 또는 허공을 바라보는 시선의 처리들은(「지붕에서」, 2007) 그가 살고 있는 도시로 부터의 일탈을 꿈꾸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의 작품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도시와의 관계 속에서 규정되고 있는데 이는 나르시스처럼 수면위에 비추인 자신의 모습을 붙잡으려는 것이 아니라 중소도시의 일상이라는 거울 위에 비친 자아의 모습을 구현하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신현준_소망_나무, 동_14×14×38cm_2007_왼쪽
신현준_FLY_나무, 동_30×31×42cm_2006_오른쪽


메를로 퐁티는 작가를 가리켜 “삶에 있어서야 강인하든 나약하든 화가는 세계에 대한 자신의 묵상에 있어서 만은 말할 필요도 없이 탁월한 자이다. 오직 그의 눈과 손이 보고 그리는 중에 무엇을 발견하는 기술만으로써 그는 역사의 영광과 추문으로 떠들썩한 이 세계로부터 인간의 분노와 희망에 하등 보탬이 되지 않는 캔버스들을 계속 그려내고 있다”고 하였다. 우리는 신현준이 도시의 심연에 비추인 자신의 모습을 통해 실존의 심상을 탁월하게 형상화하고 있음을 목격할 수 있다. 그의 조각들에는 한 땀 한 땀 깎아 들어간 끌질의 자국들이 고스란히 표면에 남아 목질의 따뜻함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의 끌질은 담담하고 차분하며 집중적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전기톱으로 커다란 나무둥치를 거칠게 쳐낸 바셀리츠의 목조각처럼 강렬한 표현적 성향을 드러낸다. 세계와 자신에 대한 묵상을 정직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 그의 작품에서 주인공은 대부분 별다른 소품 없이 혼자 등장한다. 다른 등장인물도 별다른 소품도 없이 주인공 혼자 등장하는 정면성은 온통 시선을 주인공에게만 집중시키는 탁월성의 효과를 갖는다. 이러한 의도성은 마치 그리스인들이 조각적 형태의 조화를 위해 의도적으로 팔과 다리를 생략했던 토르소의 특징을 따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팔과 다리의 생략으로 더욱 강렬한 조각적 메스의 힘을 전달하는 토르소처럼 소품이나 별다른 장식 없이 혼자서 단일한 덩어리로 우직하게 드러나는 신현준의 조각은 전체감과 불가분리성의 응집력을 통해 강렬한 메스의 힘을 전달한다. ● 동작과 운동감의 절제와 더불어 단아한 동작으로 서있는 이 입상들은 주제의식을 더욱 고양시키고 있다. 그의 작지만 군더더기 없는 단일한 덩어리의 응축력이 발산하는 힘은 조각적인 매력으로 가득하다. 그것은 마치 로댕이 “형태를 결코 길이로 파악하지 말고 두께로 보라”고 했던 충고를 전적으로 의식하고 있는 듯하다. 그의 조각이 작지만 결코 작아 보이지 않는 이유이다.




신현준_고독_나무, 동_22×17×49cm_2007


신현준이 선택한 재료도 기법도 그리고 그의 이야기조차도 별반 새로운 것은 없다. 저마다 새로운 재료와 기법과 표현형식을 찾아 앞을 다투어 나가는 중에 오히려 우직하리만큼 전통을 고집하는 그의 작품에서 오히려 작가로서의 힘과 가능성을 거듭 확인한다. 그는 자신의 실존에 대해 정직하게 대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조각적 문제에 있어서 조차 형식적인 새로움 보다는 전통적인 기법과 자세로 임하고 있다. 조용히 서 있는 그의 조각들은 그러나 그 조각에 흐르고 있는 인간주의적 체취와 온도로 인하여 우리들로 하여금 손길을 뻗쳐 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인간주의적 신념으로 가득찬 신 현준 조각의 매력이 바로 그것이다. ■ 전강옥

--------------------------------------------


BARNMIRYUNG

반미령展 / BARNMIRYUNG / 潘美齡 / painting

2008_0416 ▶ 2008_0429



반미령_꿈꾸는 창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16.8×91cm_2008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가나아트갤러리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8_0416_수요일_05:00pm

가나아트 갤러리 기획초대展




인사아트센터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8번지 3전시장, 제 1특별관
Tel. +82.2.736.1020
www.ganaart.com






초현실적 풍경에 담긴 내면세계, 중견작가 반미령의 신작전 ● 시작과 끝을 알 수 없이 이어진 벽면 너머로 보이는 광활한 자연의 전경. 그 환상적 풍경 안에 삶에 대한 사색을 담아내는 화가 반미령 (1965- )의 개인전이 인사아트센터에서 열린다. 반미령은 홍익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동경예술대학 대학원에서 유화를 전공한 중견작가이다. 그녀가 보여주는 섬세한 풍경과 은유적 의미의 사물들은, 보는 이를 고요하고 신비로운 내면의 세계로 안내하여 의식 너머의 ‘나’를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한다. 이번 전시는 이러한 자신의 철학의 이어감과 동시에 15년 작업의 저력을 보여주는 100-150호의 대작 10여 점이 선보인다. 또한 그간의 평면 위주 작업에서 벗어나 천천히 회전하는 구 모양의 설치작업을 처음으로 선보여 작가 반미령의 다양한 작업을 볼 수 있는 전시가 될 것이다.




반미령_신세계를 꿈꾸며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162cm_2008


붓을 사실적으로 그린 그림으로 유명한 화가 이정웅의 신작전!● 하얀 한지 위에 붓을 극사실적으로 묘사한 그림으로 잘 알려진 중견작가 이정웅(1963-)의 신작전.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했지만 작업 초기부터 한국적인 정서를 화면에 담아내기 위한 다양한 작업을 모색해 온 작가는 90년대에 도자기와 꽃, 과일 등의 정물을 선보이다가 2000년 이후 부터 붓이라는 대상에 주목하고 있다. 한지 위에 먹을 듬뿍 머금은 붓을 유화물감으로 그려내는 작업은 소재와 기법 면에서 동양화와 서양화, 추상과 사실적 구상을 아우르는 것이다.




반미령_신세계를 꿈꾸며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162cm_2008


빈 화면을 채워나가는 상상의 이야기● 반미령은 대상의 표현을 최대한 절제하는 대신, 빈 공간과 신비스러운 상황연출을 통해 보는 이의 상상력을 자극한다.긴 벽면과 하늘과 바다 등으로 이루어진 단순한 공간 분할, 벽면에 드리워진 근원을 알 수 없는 그림자와 내부와 외부의 경계가 모호한 상황 등, 작가는 의도된 여백과 비현실적 요소들을 적소에 배치하여 관객들에게 그려진 것 그 이상을 상상하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현실에서 만날 수 없는 공간과 상황 일상적 사고의 굴레에서 벗어나 ‘나’와, 나를 둘러싼 ‘세계’에 대해 명상 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분주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로 하여금 잠시 호흡을 가다듬을 수 있는 시간을 선사한다.




반미령_꿈꾸는 창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27×162cm_2008


벽 :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결하는 시간의 미학● 반미령의 그림에 항상 등장하는 벽 또는 벽 안의 창은 과거와 현재를 지나 미래까지 끝없이 존재하는 무한한 시간을 의미한다. 롤러로 여러 번 색을 겹쳐 오랜 세월을 견딘 유적과 같은 단단하고 견고한 질감이 느껴지는 벽에는, 한 사람의 삶은 유한하지만 그 흔적은 세대를 거쳐 무한히 지속된다는 작가의 ‘시간과 인간’에 대한 생각이 담겨있다. 또한 작가는 종종 거대한 벽면 앞에 서랍장이나 화병 같은 일상의 소품들을 그려 넣어, 무한한 시간 속에 찰나를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렇게 반미령은 시간에 대한 은유와 암시를 통해 인간과 시간에 대한 사색을 절묘하게 표현하며, 그만의 철학적인 분위기로 쉽게 잊히지 않는 잔상을 남긴다. ■ 가나아트갤러리

-----------------------------------------


Colorful Life_by Kwak Yun Jung

곽윤정展 / KWAKYUNJUNG / 郭潤楨 / painting

2008_0417 ▶ 2008_0430



곽윤정_Colorful life_캔버스에 유채_91×65cm_2008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소헌컨템포러리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8_0417_목요일_05:00pm






소헌컨템포러리_SOHEON CONTEMPORARY
대구시 중구 봉산동 220-3번지
Tel. +82.53.253.0621
www.gallerysoheon.com






긍정적 시선에 담긴 회화의 지층-새로운 형식의 감각적 모색을 읽다 ● 온갖 미사어구로 포장되곤 하지만 본디 그림이란 작가의 ‘의식’과 ‘무의식’의 교집합체이며 동시에 전의식(preconsciousness)의 무게가 어느 방향으로 기우는가에 따라 무한한 변화가 담보된 ‘기호의 산물’이라는 것을 벗어날 순 없다. 내재성을 해석하지 못하는 한 외피적인 드러남이 확연하다하여 의식화된 소산물이 전부인 냥 치부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시각적 인식력이 나약한 관념위주의 화풍이라 하여 그것이 무의식의 지배현상을 변별의 가치로 판단하기도 어렵다. 그림을 논하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의식과 무의식의 문지기역할을 하는 전의식이 표현의 궁극성을 가름한다는 점이며 그것이 어떤 형식으로 발현되느냐, 그리고 내외적인 기표가 어느 지점에서 상정되는지에 있다는 사실이다.




곽윤정_Colorful Life_캔버스에 유채_91.0×72.7cm_2008


작가 곽윤정의 작업들을 언급함에 이처럼 전의식을 서두에 둠은 그의 그림들이 일상에서 수확한 모티프를 통해 감각적이고 톡톡 튀는 여운을 전달하기에 보편적 의식의 수반이라는 측면을 고찰케 하지만 현재와 예전의 작업들을 모두 아우를 경우, 그 양극에서 발하는 자아에 대한 개념과 실현 방식이 다소간 다른 성향을 내포하고 있음은 물론 그 결과물 역시 차이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그가 과거 러시아 레핀 미술원 유학시절 작업들을 보면 지극히 정직하며 직접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인물을 중심으로 배경을 이루는 전체적인 구도는 일견 도식적이라는 느낌이 강하며 예술적 묘사의 진실성과 역사적 구체성에 있어 모범적이고 엄정한 화풍이 균질하게 나열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쉽게 말해 오랜 시간 답습된 철저한 회화적 기록들이 사실적인 언어들로 치환, 분포되어 있었다는 것이지만 다른 의미로는 시각적 인식력이 충만한 것들이자 망막에 대한 항거를 유보시킨 우리네 실존을 확인할 수 있는 지평으로 읽혀질 수 있었다.




곽윤정_Colorful Life_캔버스에 유채_91.0×65.2cm_2008


그러나 규범적인 리얼리즘이 지닌 한계성은 외견상 고풍스럽거나 혹은 클레식한 분위기를 담보하는 매력적인 결과물들을 도출시켰을지는 몰라도, 반면 우리 화단에 팽배해 있는 기성 질서와 체제의 언저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을 인정한다는 것이기도 했다. 작가 스스로에게도 이는 무한한 다변성을 특징으로 하는 동시대 미술에 대한 부적응, 마음껏 날개를 펼 수 있는 발판이 되는 자의식을 스스로 억제하는 증거일 수 있었다. 특히 필자의 생각에 자신을 틀 지우는 것들을 전복하지 못한 유무형의 ‘자발적 지연’은 작가에겐 확장된 미적 개념을 차단하는, 꽤나 답답한 이유로 작용하곤 했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통념을 넘어선 고찰은 구체적 실천을 이행시키기 마련이다. 다행히도 곽윤정은 지난해부터 주변의 고언과 의도 아래 자신이 무엇을 고민하고 우려하는가에 대한 이해를 재빠르게 수용하기 시작했으며 마음 깊숙이 각인되어 있던 전의식의 무게가 어느 방향으로 설정되어야 하는지를 체감한 이후부터 그의 그림은 확실한 선을 긋게 된다. 그리고 그의 심도 있는 변화는 탄탄한 데생력과 탁월한 색채 감각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조형언어를 만들어 내기에 이르렀고 그 경유점이 바로 작금 선보이고 있는 〈Colorful life〉연작이라고 할 수 있다.




곽윤정_Colorful Life_캔버스에 유채_91.0×116.7cm_2008


그의 그림들은 인간이 지닌 본질, 또는 우리가 지닌 삶의 의미를 ‘나’를 중심으로 새롭게 정의하려는 데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습관적인 일상성과 피상적인 논리 그리고 효용성에 입각한 실증주의적 사고에 대한 깊은 사색이자 정신적 힘과 욕망이 억압당한 상태를 건너기 위한 효과적인 기제로 작용한다. 그는 도시 속의 낯익은 풍경(자신이 보고 느끼며 접하는)과 사람들을 그리면서 그 관계성에 주목하고 자신이 건져 올린 개척된 전의식을 바탕으로 한 응집된 결과물들을 한껏 펼쳐내고 있다. 채도가 높지만 어울림이 상호간 배척하지 않는 색감, 안락한 듯, 행복하게 여울지는 사물들과 형상들이 전달하는 미감은 언뜻 가볍고 자칫 비성찰적으로 비춰질 수 있으나, 긍정적인 관점이 침잠된 속 깊은 상징을 포박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가 보여주는 현대적인 풍경들은 그의 이전 작업들은 물론 여타 그림들과 다른 조형영역을 유추케 한다.




곽윤정_Colorful life_캔버스에 유채_91.3×116.7cm_2008


매체의 측면이나 형식이 그림의 내용, 주제와 결코 무관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상기할 때 그의 그림을 구성하는 빼어난 컬러 감각이나 디테일한 듯 공간감 어린 인물, 원근법을 일정 무시한 주변 배경은 시각 체제를 형성하는 회화의 기본적인 골격임을 환기시킨다. 다만 그것이 올곧게 전달되느냐, 또는 제대로 기능하느냐에 문제가 있다면 곽윤정의 그림들은 레핀 수학 시절의 체험한 색의 온도와 냉정한 관찰력을 바탕으로 매우 성공적인 전개를 보인다. 작가는 마치 조리개를 한참동안 열어 놓듯 오픈된 시선으로 실내·외를 들여다보며 그 중앙에 자신이 좋아하는 다양한 상징들을 외삽 한다. 일예로 그림 속에 곧잘 등장하는 여인들은 도시인으로써 자신의 세계를 간직하고 있는 당당함의 상징이며 그들의 귀를 덮은 헤드폰은 도시 생활 속 여유로움을 전달하는 매개로 구분된다. 모델들이 들고 있는 서적은 일반인들이 갈망하는 지식적 욕망을 대변하고 도넛 가게나 선물가게 등은 누구나 겪는 일상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보편적 이상을 담고 있다.




곽윤정_Colorful Life_캔버스에 유채_112×162cm_2008


곽윤정은 이러한 것들을 보임과는 다른 상징의 연속으로 구현하며 몽환적이거나 마술적 환각처럼 밝고 화사하게, 흡입력이 강하게 그려내는 재주를 보인다. 그리곤 도시인으로서 느끼는 보편적 공허와 생경함, 번잡스럽고 아옹다옹하며 살아가는 삶에 작가는 함축적인 언어들(색깔이나 익숙한 사물들)을 얹힘으로써 고루한 일상이 전혀 다른 세계로 거듭나게 유도한다. 여기에 그는 상상력과 경험이 맞물리게 하여 무제한의 예술적 자유를 끌어들이고, 기존의 실존적인 관념성과 버무려 의식의 자유로운 기술과 연상을 근거로 가능한 꿈의 세계를 펼쳐 놓는다. 비록 과거 보여줬던 즉지성과 사실성이 오버랩 되는 부분이 없지는 않으나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담아내려는 자의식의 실현은 표현의 명징함과 미적 가치를 더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비로소 자신이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겠다는 욕망이 실현되는 단계에 이르렀음을 읽을 수 있게 하는 셈이다.




곽윤정_Sweet Shoulder_캔버스에 유채_130.3×194cm_2008


한편 그림에 있어 도시와 도시인, 그 속을 영위하는 삶이라는 주제는 참으로 지루하고 진부하다. 만약 그것이 곽윤정이 내보일 수 있는 카드의 전부였다면 하품 나는 텍스트 덩어리에 불과할 것이 뻔해 애초부터 그리 탐탁지 않은 청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그림에서는 그리 신선할 것 없는, 도시인에 대한 주제의식 따위가 아닌, 새로운 회화적 형식과 기법의 모색이 두드러져 있다. 그렇다고 과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제 남은 것은 그의 작업들이 타인과의 소통과 공감을 통해 실존성을 보다 객관적으로 확보하는 일일 것이고 전의식의 확장을 일궈 잠깐 반짝거리다 마는 시한부 생명과 같은 스타로 남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 홍경한

------------------------------------------------


의식의 형상_State of Consciousness

유관석展 / YUKWANSEOK / 柳官錫 / painting

2008_0414 ▶ 2008_0502 / 일요일 휴관



유관석_Untitled_캔버스에 유채_85×60×6cm_2006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문신미술관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8_0414_월요일_05:00pm

작가와의 만남_2008_0414_월요일_05:00pm

관람시간_10:00am~05:00pm





숙명여자대학교 문신미술관 빛갤러리
Moonshin Museum Light Gallery
서울 용산구 효창원길 52 르네상스 플라자 B1
Tel. +82.2.710.9134
www.moonshin.or.kr






유관석의 미술세계는 의식의 고찰을 통해 형상화되는 존재의 공허함이나 허무함, 또는 의식의 흐름에 관한 심리적이고 철학적인 소재를 바탕으로 한다. 무거운 색감과 숨막히는 붓의 덧칠을 통해 형상화된 얼굴들은, 고독한 듯, 좌절한 듯, 혹은 자포자기한 듯, 자못 실존적인 인상들을 가졌다. 그의 그림 속에 인물들은 현존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작가는 거리에서 남모르게 찍은 사진이나, 인터넷과 같은 대중매체를 통해 모여진 이미지들, 또는 기억이나 꿈에서만 존재하는 얼굴들을 재배합-구성하여 하나하나 회화 속의 인물들로 만들어 나간다. 여기에서 있는 이미지 선정 및 재구성 과정의 기준이 그에겐 직관적이고 본능적이라 한다. 무의식으로 작가에게 친근하거나 의미심장한 사람의 모습이 있을 것이고, 성적인 호감이나 반발감을 유발시키는 모습도 있을 것이다. 그는 동시에 회화적으로 표현하고 싶은 욕망을 불러 일으키는 이미지들을 작업의 근간으로 하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형성된 인물들은 성별이나 인종이 불분명 하고, 아름답지도 추하지도 않으며, 작가에게 의미심장한 동시에 그 의미가 공허하다. 이들은 작가의 회화적인 소재로서만 존재하는 도상적인 인물들이다.




유관석_Untitled_캔버스에 유채_85×60×6cm_2006



유관석_Untitled_캔버스에 유채, 왁스_116×96×6cm_2007



유관석_White Room_캔버스에 유채, 레진_152×89×6cm_2007



유관석_Untitled_캔버스에 유채, 왁스_94×99×6cm_2007



유관석_Untitled_캔버스에 유채, 왁스_94×99×6cm_2007



유관석_인간의 끊임 없는 자기 합리화에 대한 고찰_캔버스에 유채, 왁스_270×180×6cm_2008


유관석이 관찰자적인 입장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현실의 부조리함이나 존재의 공허함은 이들의 얼굴 속에 투영되어 나타난다. 인물화임에 불구하고 결국 그림 안에 남는 이는 그림 속의 인물이 아닌 작가 자신인 것이다. 라캉이 거울의 단계에서 말하듯, 여기서 유관석은 자신의 현실적 존재와 비현실(공상)적 존재 사이에서 일어나는 욕망적이고 무의식적인 대립을 가상적 인물을 통해 회화적으로 의식화 하고 언어화 하는 것이다. 유관석의 작업에서 드러나는 존재의 공허함은 경제적이나 문화적, 시대적인 차이를 넘어선 보편적인 것이며, 이는 작가와 우리가 공유하고 공감하는 본질적인 소재이기도 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유관석의 작업은 전통적이고 사실적인 인물화라기 보다는, 구체적이면서도 추상적인 의식의 조형물이다. 이는 작가의 내면적 고찰을 통한 의식의 형상이자 우리 모습의 일부이다. ■ 오유영

-----------------------------------------


뒤틀린 공간

천대광展 / CHENDAIGOANG / 千大光/ installation

2008_0412 ▶ 2008_0509 / 월요일 휴관



천대광_뒤틀린 공간_목재, 형광등, 설치_562×1100cm_2008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커뮤니티 스페이스 리트머스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8_0412_토요일_05:00pm

작가와의 대화_2008_0412_토요일_06:00pm

관람시간_01:00pm ~ 07:00pm / 월요일 휴관





커뮤니티 스페이스 리트머스
안산시 단원구 원곡동 786
Tel. +82.31.492.4595
www.litmus.cc






보이지 않는 힘을 따라 형성된 “뒤틀린 공간”
“이 공간의 흐름은 한옥의 지붕이나 산의 모양 혹은 땅의 지형, 자연과 접촉했던 나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내가 만들어낸 공간이지만, 이미 내 안에 있었던 자연의 형상일 수 있다. 나는 그저 그 흐름을 따르고 있을 뿐이다.” ■ 천대광




천대광_뒤틀린공간_목재, 형광등, 설치_562×1100cm_2008


천대광은 지난 7년간 나무를 활용하여 다양한 공간을 구성하는 작업을 진행해 왔다. 그의 독일 유학시절 뮌스터 쿤스트 아카데미 교정에 설치했던, 〈보청기 Das Hoerrohr〉, 〈테라세 Die Terrasse〉, 〈십승지 Der Leuchttrum〉(독일어의 Holzweg은 ‘나무로 만들어진 길’, 이란 뜻도 있지만,‘잘못된 길’, ‘엉뚱한 길’, ‘예기치 못했던 길’ 이란 뜻도 가지고 있다.) 작업을 필두로 루어지역에 있는 자연공원 베어카멘에 설치한 〈나무길 Der Holzweg〉(인도의 의학 아유르베다에는 ‘인체는 외피와 내피로 이루어져 있고. 여기서 내피는 내장기관이다.‘고 기술 되어 있다. 천대광은 이 작업을 통해 내피로서의 공간 안의 공간을 만들어 냈다.) 에 이르면서 그의 작업은 장소 특정적(site specific) 성격을 더욱 현저하게 드러내게 되었다. 그가 초기에 시도했던 작업들은 조각으로부터 확장된 일상의 테라스와 물위를 가로지른 다리와 같은 용도로 사용될 수 있는 구조물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관람객들은 그가 만든 공간에서 빛, 냄새, 주변의 환경 등을 경험할 수 있었다. ● 그는 뮌스터의 베베르카 파빌리옹에 설치됐던〈안에 있는 밖 Das Auessere des Inneren〉에서 야간에도 관람객들이 작품을 볼 수 있도록 작업에 조명을 설치하게 되면서 빛을 공간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로 끌어 들이게 된다. 그는 이 작업을 계기로 공간이 빛에 의해서 다각적으로 변화한다는 사실과 관람객 또한 작품의 일부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후에 그는 살아있는 나무를 감쌌던 초기 테라쎄 작업을 발전시켜서 〈공간과 호흡, Der Raum und Atem〉과 같은 작업으로 또 〈물, 나무과 불 Wasser, Baum und Feuer 〉작업을 통해서 물 위에 떠있는 수상설치 작품으로 자신의 작업을 변화시켰다. 천대광 작업의 변천과정에 대해 계열화된 분석을 시도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글에서는 생략하고자 한다. 그의 작업들이 현학적인 언어를 통해 설명되는 것을 작가는 좋아하지 않는다. 작업은 단지, 조형 그자체로 강렬한 상징이 될 수 있는 것들이라는 것이다. 그는 작품을 분석하려는 언어들에 대해서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분석과 해체가 결국 전체와 총체적인 것들을 볼 수 없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작업이 분석을 떠나 총체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를 원한다. ● 그의 작업설치 과정은 매우 변화무쌍하다. 그가 한 공간에 첫 발을 내 딛을 때, 그는 공간에 흐르는 기류를 본다. 그 흐름은 ‘조형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무형의 것’이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총제적인 기운이다. 공간에 흐르는 기류를 따라 한 두 개의 나무 조각들을 배치하면서 이 기운들은 나무와 함께 조응하기도 하고 나무 사이를 빠져나간다. 놓인 나무들을 가로 지르는 긴 나무 한 가닦을 비틀면 나무는 자기 탄성을 따라 버티기도 하고 유연하게 구부러지기도 하면서 공간의 모양을 보여준다. 이처럼 그의 공간은 나무의 탄성을 통해 그려낸 드로잉처럼 자연스럽다. 그는 나무를 겹겹이 쌓아 공간을 구성하고 공간을 가로지르는 나무들을 휘어 뒤틀린 채로 그가 원하는 공간에 견고하게 부착시킨다. 견고한 물질로서 나무는 유연한 선처럼 공간을 그려낸다. 이 모든 형상은 사실 나무 자체가 지니는 물질성에서부터 연유한 것이다.




천대광_뒤틀린 공간_목재, 형광등, 설치_562×1100cm_2008


그는 자신의 작업에서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을 응시하는 방식 또한 자연스러운 삶의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세상의 만물이 끝없이 변화하는 것처럼, 예술도 진화한다. 여기서 진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은 한 시대의 제도적 약속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내 작업도 예술의 약속이나 제도적 진화과정을 유추해서 움직이는 예술이 아니라 그 흐름에서 독자적인 삶의 에너지를 만들어 갈 수 있는 움직임이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동시대 젊은 작가들은 자신의 내적 동기와는 무관하게 동시대 예술의 흐름과 유행을 의식하고 그 안에 들어가려고 노력한다. 그것이야 말로 무의미한 것이다.”고 말하는 그는 예술을 통해 자기 스스로를 찾아가는 수행자처럼 보인다. “나는 예술을 통해 도를 닦는다. 도를 찾아가는 방식은 수도 없이 많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작업은 내가 삶을 찾아가는 한 방식이다. 사람들이 나의 노동에 대해서 ‘힘들지 않느냐?’고 하는데, 나는 작업을 하면서 논다. 작업을 하지 않는 동안 내 상태는 ‘완전한 쉼’의 상태가 아니다.”는 작가의 고백을 보면, 그에게 있어서 예술행위는 일과 삶이 동떨어지지 않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산업시대 이후에 우리에게 있어서 ‘노동’은 생산성과 동일시되는 경제적 가치였고, 자율적 의지를 바탕으로 자기를 실현하는 자아실현이 아니라, 끝없이 노동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소외시키는 것에 일조해 왔다. 하지만, 천대광의 노동은 ‘놀이’에 가까운 것이고 ‘놀이’는 자아를 실현할 뿐만 아니라, 많은 것을 학습할 수 있는 호기심을 동반한 창조적 과정이다. ● 한 달이 넘는 시간동안 안산의 원곡동 ‘국경없는 마을’내에 위치한 커뮤니티 스페이스 리트머스의 지하공간에서 작가는 나무를 통해 ‘뒤틀린 공간’을 만들었다. 반듯하고 평평한 인위적인 사물들이 뒤덮인 우리 삶의 공간에서 천대광은 뒤틀리고 울퉁불퉁하며 불규칙적인 표면들을 상상한다. 여기서 ‘뒤틀림’은 예측 가능한 구조가 아니라, 예측할 수 없고 완벽한 재현이 불가능한 형태에 가깝다. 천대광은 예를 들어 설명한다. “잔디밭과 길을 나란히 만들 수는 있지만, 잔디밭 위로 가로질러 난 길을 막을 수는 없다. 잔디밭 위에 난 길은 길을 설계했던 이가 예측할 수 없었던 길이다.” 천대광은 이런 길들을 자신의 작업 안에 남기고 싶어 한다. 이번 전시는 다양한 나라에서 온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함께 어울리고 있는 원곡동의 다문화공간 안에서 진행된다.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는 이곳에서 우리는 혼성적인 삶의 변종이 생성되는 과정을 목격한다. 천대광의 작업이 이 공간의 역사적, 사회적 ‘뒤틀림’을 따라 기우뚱한 불균형을 만들어 낼 것이다. ■ 백기영




천대광_Unhasoo_혼합재료_200m_안양 아트 밸리_2005


“내가 만들고 싶은 모양은 내가 고안하기 이전에 이미 거기에 있었고, 내가 손에든 재료의 탄성 안에 이미 들어있었다. 나는 공간이 가르쳐 주는 대로 작업하고 재료가 인도하는 대로 못질한다. 태껸이나 가야금의 선율이 자연스러운 몸짓과 운율을 따르는 것처럼, 내 공간들의 표면은 그렇게 주변의 자연과 공간의 표면을 타고 흐른다.” ■ 천대광




천대광_So verschwand der Konig_혼합재료_15.92×59.5m_Kunstakademie, Muenster_2006


안의 밖, 밖의 안 ● 1928년도에 철학가 "헬무트 플레스너"의 대표작 "유기성과 인간의 단계들"이 출판 되었다. 그는 그 책을 통해 "기발함"이라는 법칙 속에서 도달 할 수 있는 정점에 대해 인류학의 철학적 분야를 발전 시켰다. 플레스너는 완벽성 너머에 도달하는 능력은 재능이며 외부와 내부 사이의 인식을 뒤집어주고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진고, 감상자가 그 공간 안에서 스스로의 존재를 객관화 할 수 있는 시발점을 제시한다고 묘사 했다. 천대광의 작업은 주어진 현실 공간속에 또 다른 독특한 미학적 공간을 제시하여 관객에게 실제적인 경험을 유도한다. 이 부분에서 작가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우리는 뮌스터 쿤스트 아카데미의 여러 전시와 여러 공공 예술 프로젝트를 통해 알고 있듯이 그의 작품은 기술적으로 매우 정교하고 치밀하게 만들어진 것 뿐 만 아니라 새로운 공간의 창출을 통해 사물을 바라보는 관객의 시점을 변화 시키는, 절대적으로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서만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작업이다. 그 때문에 그의 작업중 하나인 숲 속의 산책로는 다른 장소로 가장 빨리 이동할 수 있는 지름길이 아닌 천천히 돌아가야만 하는 명상을 위한 길인 것이다.




천대광_Raum in Raum_혼합재료_24×11m_Galerie Januar, Bochum_2007


베베어카 파빌룡에 설치된 천대광의 나무 터널은 한쪽 문에서 다른 쪽 문으로 이어져 있고 그 터널의 중심에 위치한 반구의 목재구조물과 만난다. 처음으로 유리진열장과 마찬가지였던 베베어카 파빌룡은 입장이 허용되었고 더 나아가 통행을 할수 있게 되었다. 관객이 그 통로로 처음 발을 들여 놓는 순간 그 유리구조물은 시야에서 사라지게 된다. 유리구조물에 대한 관객의 기대가 허물어지면서 좁게 느껴졌던, 그러나 그렇게 좁지 않은 통로를 따라가며 색다른 체험을 하게 한다. 내부는 2중으로 되어 있다. 파빌룡 안과 터널 안, 그러나 관객은 단지 터널 안에만 머무를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생명체의 내장 속을 여행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통로를 이루고 있는 잘 대패질된 판목은 가는 틈을 가지고 있어서 내부에서도 외부와 완전히 차단되지 않았다. 적어도 주변 경관과 아아 호수 공원의 주위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살필 수 있다.




천대광_Raum in Raum_혼합재료_24×11m_Galerie Januar, Bochum_2007


또 다른 중요성은 그 작품이 시간의 흐름을 따라 변하는 빛을 염두에 두었다는 것이다. 목재 구조물 안에서 관객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태양의 움직임과 그림자의 변화를 경험하게 되고 황혼이 저물 무렵 중심부에 위치한 반구의 내부에 설치된 조명이 작동하여 빛은 다시 내부에서 외부로 비쳐지게 된다. 그것은 내부와 외부의 하나의 반전이며 순환이다. 덧붙여, 그것은 편의상 공간 설치로 구분되어졌지만 전통조각의 영향도 엿보인다. 빈 장소나 공간을 이용 한다는 면에서, 특히 20세기 영국 조각에서 헨리 무어, 토니 크랙, 리차드 베이컨 혹은 애니쉬 캐퍼의 표현 양식과도 연관성이 보인다. 공식적인 전시 예술가로 불리는 헨리 무어는 2차 대전 당시 독일군의 공중 폭격으로부터 피신했던 런던 지하철 내에서 제작된 "벙커 드로잉"은 유명 하다. 지하 대피 시설의 모습은 무어에게 새로운 예술적 영감을 불러 일으켰고 피사체 위의 면과 무수한 그물 선을 이용해 그림자 없이 볼륨을 표현하는 드로잉을 탄생 시키게 했다. 천대광의 작업에서도 터널의 목재의 무수한 틈도 비슷한 느낌을 주는 작용을 한다. 재료를 이용하는 과정에서 조형적인 형태를 도출해 내는 것이다. 그것이 작품의 격을 결정짓는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목조는 재료의 성격상 변형이 쉽고 보존 기간이 짧지만, 그 보다 더 생명력을 느끼게 하는 재료는 없다. 현대 미술의 목 조각가들은 그 매력에 사로잡힌다. 현대 미술의 구상, 추상 조각 분야에서는 데이비드 낫쉬와 루돌프 박흐터를 인물 조각 분야에서는 칼 만프리트 렌너츠와 카츄라 후나코시를 대표적인 작가로 들 수 있다. 작가 천대광과 같은 목재가 단순히 건축적 개념의 재료로서 이용한 작가로는 건축적 조각의 클라우스 부리와 길, 다리 와 사회 문제에 대한 질문의 도구로 집을 감싸는 공간 설치작업을 했었던 타다시 카와마타에게서 찾을 수 있다. 건축과 조각이라는 쟝르를 초월했다는 것은 마지막 두 작가 그리고 역시 천대광에게도 유효하다. 그들의 작업은 실용적임과 동시에 무 목적적이다. 베베어카 파빌룡은 천대광의 인상적인 외형의 조각적 구조물을 통해 실험되어지고 재조명되어 내부 공간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그것은 장소, 상황 특정적 작품이다. 주어진 환경, 새로운 형태의 구조물 그리고 작품과 인간의 실질적 소통 이 모든 것들이 다 같이 맞물려 있다는 것에 천대광의 작업은 미학적 의미를 가진다. 결정적으로 관람객들의 육체적인 직접 참여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공간과 하나가 된 작업의 한 부분으로서 관람객은 전혀 색다른 체험을 할 것이다. 그의 작업은 완벽하다. ■ 페르디난트 울리히_Ferdinand Ullrich

----------------------------------------------


진리와 욕망

남대웅展 / NAMDAEWOONG / 南大雄 / painting

2008_0411 ▶ 2008_0424 / 월요일 휴관



남대웅_Ecstacy_캔버스에 유채_45.5×53cm_2008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갤러리 쿤스트독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8_0411_금요일_06:00pm

기획_정용도

관람시간_10:00am ~ 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쿤스트독_KUNSTDOC
서울 종로구 창성동 122-9번지
Tel. +82.2.722.8897
www.kunstdoc.com






스위스의 정신분석학자 칼 구스타프 융은 현실의 과도한 억압적 상황에서 벗어나 깊은 무의식의 심연으로의 복귀 혹은 원시적 언어상황으로의 복귀를 인간의 정신병적 징후로 해석했다. 그리고 프랑스의 구조주의 철학자로 프로이트를 자신의 관점에서 재해석한 라캉은 욕망―여기서의 욕망은 원형적인 것이다―의 거세가 정신병적인 상황을 초래한다고 말했다. 여기서 우리는 두 학자의 두 가지 견해를 대하고 있지만 정신병적 상황으로의 전이가 분명 현실에서의 억압적 사건들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현실에서의 억압은 소통의 불가능성, 한 개인이 수용하기 힘든 특정한 사회적 체계 등을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현실은 우리 삶의 대상이자 인간들이 자신의 삶을 그려 나아가는 캔버스라고 할 수 있지만, 현실의 많은 구체적인 사건들은 우리 인간들에게 끊임없이 삶의 다른 측면을 이야기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상징적이든 혹은 개개인의 욕망에 의해 발현된 상황이든지 간에 우리 삶을 억압하는 비효율적인 기제들(mechanisms)로 작용할 확률이 많다는 것이다―여기서 억압은 긍정성 혹은 부정성을 지닌 원인이라는 차원과는 관계가 없는 삶의 실존적인 문제이다.




남대웅_Jim_캔버스에 유채_194×130.3cm_2007


남대웅의 이번 전시는 그의 작가로서의 입장을 라캉적인 의미에서의 ‘욕망’으로 정리하고자 하는 것이다. 즉 회화, 조각, 미디어 아트 등 여타 다른 장르들의 최종 생산물로서의 예술작품은 개인으로서의 예술가의 삶의 투영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그런 투영의 문제가 명확히 정리되지 못한다면 작가적인 행위의 결과물인 작품들이 예술적인 진실을 드러내지 못한다거나 혹은 심지어는 예술작품이라고 불릴 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질적인 차원의 문제들이 인정될 수 있다는 전제하에 우리는 그것이 개인적인 가치든 혹은 보다 좀 더 넓은 의미에서 문화적 가치들과 관련하여 예술작품의 본질이 드러내는 철학적 문제들(philosophical problems)에 대해 집중할 필요가 있다. ● 예술적인 문제들에 대한 본질적인 접근은 작품으로 구현된 의미의 철학적인 존재론적 근거들을 향한 개인적이자 문화적인 욕구와 관련된다. 남대웅에게 현실은 욕망이 확장되어야 하는 장(field)이다. 그에게 현실의 예술적 상황이 요구하는 미학적인 규정들은 욕망이 거세된 현실의 대응물(counterpart)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문화적인 관점에서 생각해 볼 때 욕망이 예술가에게는 미학적 원형의 개념으로 생각될 수 도 있다. 남대웅의 이번 작품들이 그의 예전의 작품들과 다른 모습들을 보여주는 것은 그가 미학적 전통의 경계를 넘어 그 자신의 욕망의 영역으로 넘어왔다는 것이다. 즉 자신만의 예술적 세계를 향해 무엇인가 존재론적인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남대웅_Madame 미숙_캔버스에 유채_97×162cm_2008


남대웅의 이번 전시의 작품들은 몇몇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여성들 이미지로 구성되어 있다. 영화나 TV에 등장하는 여배우들 혹은 성인 영상물의 여성 이미지들이다. 미술사적인 면에서 여성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생산적인 의미와 관계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원형으로서의 어머니 혹은 성녀 마리아의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거리의 여성으로서의 이미지 혹은 세속적인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론적 의미를 획득하는 여성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의 환경 속에서 여성의 이미지는 앞에서 말한 듯이 두 가지 면으로 정확하게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다. 예를 들면 영화나 TV 속에서의 다양한 역할은 배우의 개인적 삶의 태도를 넘어 하나의 캐릭터로서의 전형성을 창조하고, 그렇게 창조된 캐릭터들은 삶의 현실적 경계들 안으로 파고들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삶과 이미지는 하나의 통일적인 삶의 아우라를 만들어내게 된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가 일반 관객들과 여성들의 이미지가 맺는 관계가 단순히 우리가 알고 있는 전형성을 바탕으로 형성되는 시대는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이다.




남대웅_Marilyn 보희_캔버스에 유채_97×162cm_2008


바로크시대 조각가인 베르니니의 성테레사의 엑스터시 중의 얼굴 부분만을 취해 그린 〈Ecstasy〉는 전형적으로 미술사적인 면에서의 여성의 이중적인 면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성테레사는 신으로 부터의 계시를 받는 순간의 엑스터시를 경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 관객은 현실에서 성적으로 대상화되는 여성의 이미지는 물론 또 한편으로는 여성이라는 본질 자체가 가지고 있는 원형적인 존재로서의 의미를 상기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상징적인 구조는 현실의 개입으로 인해 우리 삶의 한 부분으로 변화된다. 1954년 정비석의 『자유부인』을 원작으로 1956년에 제작된 영화 〈자유부인〉의 여배우를 그린 작품인 〈Menthol〉을 통해 작가는 현실의 여성을 상징적 구조 속에 존재하는 여성적 이미지에 개입시킴으로서 여성의 이미지는 ‘기표’(signifier)적인 의미에서의 물리적 현실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남대웅_Mask_캔버스에 유채_130.3×194cm_2008


남대웅의 이번 작품들에서 기표적인 이미지들은 현실적인 동시에 상징적으로 다양한 여성성의 의미들을 구축하는 체계적인 구조를 만들어낼 수 있는 실제의 표상(눈으로 보여지는 것)들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실로 개입한 그의 이미지 언어들은 더 이상 그의 예술적인 자아를 보장해주지 못한다. 이는 그의 이미지들이 이미 정체성의 차원이나 삶의 본질에 대한 차원을 넘어 다른 영역으로 진입해 버렸기 때문이다. 즉 그의 작품들이 대중문화라는 또 다른 상징적인 체계로 진입해버렸기 때문에 이제 그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는 삶의 차원과 예술적인 차원이 관련되는 철학적 문제로 전이되어 버린 것이다. 이런 태도는 그가 그린 남성들 이미지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Jim〉, 〈애국〉, 〈Untitled〉에서 남성들은 온전한 얼굴로 드러나지 않거나 혹은 뒷부분만을 보여주는 존재이다. 그러나 여성들은 유혹하는 존재이거나 자신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존재로 제시된다. 성인 영화에서 채취한 이미지인 〈Mask〉, 〈Pink Nose〉, 〈Breezed〉, 〈Big Sleep〉 같은 작품은 남성에 의해 지배당하는 이미지로서의 여성으로 설정되어 있지만 오히려 대중매체를 통해 드러나는 이미지라는 본래의 상황에서 본다면 이미지에 의한 역전이 일어난다. 즉 1960년대 이후의 팝아트가 적극적으로 보여주기 시작하는 매체를 통해 드러나는 이미지의 재현이라는 차원에서 본다면 남성과 여성의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는 역전되어 버린다. 이런 상황들이 관음증(Voyeurism)적인 맹목성을 자극함으로써 대중매체적인 지배를 표현한 〈Le Dejeuner〉과 〈Artist's hand〉 같은 작품들을 통해 좀 더 구체적으로 강조되고 있고 그리고 작가는 이런 상황들을 현대사회의 아이콘에 대한 문제로 진행시켜 왔다.




남대웅_Menthol_캔버스에 유채_50×50cm_2008


사실 아이콘의 문제는 단순히 어떤 이미지가 어떤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 아이콘이 만들어지는 사회적 원인이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받아들여지거나 제시되고 있는 시대적 요청의 문제들과 맞물려 있다는 것이고, 그리하여 그런 아이콘들의 집합이 하나의 기능적인 시스템의 표상들이 된다는 것과 관련된 문제로 변화하는 것이다. 작가는 표상들의 기능적 효과나 의미론적 상황의 가능성을 〈Marilyn 보희〉, 〈Madame 미숙〉 이라는 80~90년대 영화와 TV라는 대중매체에서 당시의 인기 여배우들의 이미지를 통해 제시한다. 이들이 등장하는 것은 단순히 영화에서 어떤 한 장면의 이미지를 작가가 지독히도 좋아했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어린아이가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에 몰입하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에게 이미지는 그의 존재에 선행하는 것으로 이미 하나의 체계를 가지고 있는 세계이고 그것은 예술작품이라고 하는 구체적인 활동에 의해 완성되는 체계이다. 결국 욕망의 문제이기는 하지만 그 욕망은 삶의 체계화에 관련된 철학적인 질문이 되는 것이고 그리고 작가적인 상상력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남대웅_Spy_종이에 유채_26×33.5cm_2007


정신분석학의 입장에서 볼 때 모든 인간에게 욕망은 삶의 충동을 자극시키는 중요한 에너지에 속하는 것으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희망 혹은 꿈과 관련이 있다. 우리 인간은 스스로가 고민하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통로를 마련하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인다. 그런데 그런 노력들에 의한 목적이 성취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상상력과 창조성이다. 즉 창조적이지 못한 노력은 인습의 반복이 되고, 상상력이 부재하는 연구는 필연적으로 어떤 결핍상태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결과만을 만들어내게 된다. 남대웅의 이번 전시 작품들은 욕망, 상상력, 창조성과 같은 이런 과정들에 대해 개인적일 뿐만이 아니라, 이미지적인 차원에서 그리고 또한 사회적인 차원에서 어떤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그 질문을 굳이 말로 한다면 “예술이 인간의 삶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고 어떤 의미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가?”에 관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단순히 현상적인 차원에서 바라본다면 쾌락과 유희 그리고 이미 드러냈기 때문에 상실된 욕망이라는 병리학적인 차원의 관찰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예술작품이 가지고 있는 치유적인 기능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몬드리안의 작품에 대한 평가가 장식적이고 자기충족적인 것이라고 단정하게 되면 예술이 인간의 삶에 제공할 수 있는 새로운 삶의 관점에 대한 몬드리안의 기여, 즉 자기 성찰의 내적인 가능성에 대한 시각적 제시 같은 그런 관점들이 불러일으키는 삶에 대한 해석의 차원들은 전혀 고려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남대웅의 이번 작품들이 가지고 있는 욕망의 새로운 해석 가능성, 드러남으로서 다시 성찰해보게 되는 욕망의 예술적 차원들에 관해 관객들이 생각해봐야 할 것들은 바로 우리 자신들의 삶 속에서 기능적으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왜곡되어 있는 상황들에 대해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만든다는 것이다. 결국 남대웅의 작품을 통해 현대 사회와 컨템퍼러리 아트에서 우리가 욕망하게 되는 문제는 철학적인 진리성의 문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정용도

----------------------------------------------


우리는 항상 시간의 옷을 입는다_We always wear time

박미정展 / PARKMIJUNG / 朴美貞/ painting

2008_0412 ▶ 2008_0424



박미정_Circus_캔버스에 유채_130×130cm_2008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스페이스 함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8_0412_토요일_06:00pm

관람시간_10:00am~06:00pm




스페이스 함_space HaaM
서울 서초구 서초동 1537-2번지 렉서스빌딩 3층
Tel. +82.2.3475.9126
www.lexusprime.com






이토록 낯선, 불편한 동거
나는 무엇인가의 결여이다. 나는 그것을 애도하고 있는 중이다._자크 라캉
외부세계가 존재하기 시작하는 것은 우리가 고통스러울 때부터다. 그러나 우리가 지나치게 고통스러워지면 외부세계는 사라진다. 고통은 외부세계를 자각하게 하지만, 단지 외부세계의 비현실성을 보여주기 위해서일 뿐이다._에밀 시오랑

박미정은 세계 속에 기투된 자신의 존재의 이질성을 견딜 수 없어 한다. 그의 작품 속에서는 일상의 풍경에서 떨어져 나와 소외된 나를 나 자신이 보고 있는 장면들이 목도된다. 그러니까 그의 작품의 근간은 거울 속에 비친 나와 거울을 보는 나의 간극의 발견에 있다. 이런 불일치감은 역설적으로 지독한 나르시시즘의 한 변형일지도 모른다. 오늘날의 젊은 예술가들은 더 이상 자아와 자아의 불일치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무거움으로부터 탈주하고, 반성적 부재로서의 내면세계에 익숙한 세대들이기 때문이다. 그토록 진지한 문제가 휘발된 환경이 바로 2000년대 삶의 본질이 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박미정의 작품은 역설적으로 다시 존재와 실존의 문제로 회귀한다. 박미정은 자아라는 불편한 이질성을 보충하기 위해 가상세계를 재창조해나간다. 낯선 세계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세계 자체가 늘 낯선 것이다. 낯섦을 은폐하고 있는 일상, 그 일상에서의 삶은 작가에게 불만족이라는 저주를 퍼부었고, 그것은 곧 축복이 되었다.




박미정_Rainny Day_캔버스에 유채_130.3×162.2cm_2008


공포와 멜랑콜리 ● 장면 하나 : 마룻바닥에서 바닷물이 밀려오고, 군중은 양배추 단면의 결 속의 인간형상과 대비되고, 문턱 너머는 검은 얼룩말의 세계가 보인다. 건물이 하늘 위를 나는 게 아니라, 구름과 하늘이 건물을 휩싸고 있다. 발밑에서 식물이 자라고, 식물의 줄기부분에 신체가 걸려있다. 양과 사슴은 침대를 벌판삼아 노닌다. 세 명의 내가 함께 식사한다. ● 장면 둘 : 수영장의 물이 검푸르다. 검푸른 밤의 수영장에 여러 개의 우산이 떠있다. 불이 켜진 낡은 아파트와 불이 꺼진 낡은 아파트가 있다. 자고난 이불에서 사람의 흔적이 보인다. ● 첫 번째로 그가 만들어낸 이미지는, 절대 합일할 수 없는 장소에 이질적인 사물이 놓여 진다는 의미에서 초현실주의의 데페이즈망을 환기한다. 그러나 그것은 낯선 사물들의 적극적인 결합이라기보다는 겨우 이미지의 중첩에 가깝다. 단지 일상현실에서 공존할만한 사물들의 결합, 즉 하나의 이미지 위에 다른 하나의 이미지를 슬쩍 얹혀놓는 것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의자는 잔디로 덮여 있고, 그것도 모자라 윗부분은 살짝 얼룩말의 몸이 얹혀져 있다. 어쩌면 그것은 낯선 사물들의 결합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스며있는 것처럼, 마치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하나의 물체처럼 보이도록 은근슬쩍 ‘위장’된 것이다. 이러한 그의 이미지의 중첩은 어딘지 아마추어리즘적으로 미흡하고 미숙해 보이는데, 그것은 정교한 의미의 중층성의 구조가 희박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극히 안전하고 안정적이며 인습적인 전치에 불과했던 것이다. 우연에 의한 이미지의 중첩이 필연적으로 보이는 순간까지 적극적으로 끌어올렸어야 한다. ● 두 번째로 그가 만들어낸 이미지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늘 그렇게 주변에 존재하는,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아주 낯익은 풍경에서 느껴지는 섬뜩한 느낌에 관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가 만든 환상의 공간은 현실과 달라서가 아니라 현실과 너무 닮아 있어서 섬뜩한 장면이자 비극적 풍경처럼 보이게 된다. 수영장의 검푸른 물은 ‘공포’이자 ‘멜랑콜리’이며, 낡은 아파트에 꺼지거나 켜진 불빛은 삶과 죽음 혹은 빛과 어둠에 대한 순간성의 아이러니를 환기한다. 오히려 이런 낯익은 풍경에서 느껴지는 낯선 느낌이야말로 일종의 억압된 것이 귀환하는 두려운 낯설은 감정 즉 언캐니(uncanny)의 환기에 가까워 보인다. ● 다시 말해, 〈스위밍 풀〉은 그의 원초적 불안과 시원적 공포를 환기한다. 불안과 공포는 쌍생아처럼 작가의 내면을 가로질러 사물로 치닫는다. 물을 통해 드러난 심층 무의식에 깔려있는 공포의 근원을 추적해본다면, 그것은 분리불안의 원초적 형상이다. 물은 모성의 근원으로서 품어주고 다독여주는 포용력을 지니는 동시에 매정하게 내치고 혼란스럽게 만드는 위협적인 요소를 지닌다는 점에서 양가성을 담보한다. 따라서 박미정이 보여주는 물의 풍경은 원형으로서의 모성이 주는 위협과 공포가 극단적으로 시각화된 형태이다. 이처럼 공포스럽게 표현된 물은 상상계적 충만에서 벗어나 상징계적 결별의 세계로 진입하면서 최초의 상실의 기억이 멜랑콜리아로 기록되는 차원에 생긴 상징물로 해석할 수 있다. ● 이처럼 박미정의 일련의 작업들은 그것이 엽기적이거나 잔혹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관자들의 무의식을 불편하게 만드는 측면이 있다. 억압으로부터 야기된 결핍을 보상하기 위해 끌어 들여진 환상, 상상력의 스펙트럼은 존재의 일탈성이 아니라 존재의 허약함의 강조에 바쳐진다. 작가에게 세상이란 심연의 깊고 어두운 닻이고, 작품은 참혹한 현실을 견디게 하는 미적 가상이다. 작가는 참을 수 없이 무거운 현실을 지극히 일상적인 이미지로 편집, 중첩시킴으로써 세계의 단순성을 재편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박미정이 드러내는 세계는 현실에 대한 전복이라기보다는 현실의 냉혹함에 대한 우회적 묘사이자 그것의 무대화에 가깝다. 그로써 현실의 상황에 대한 하나의 성찰이자 비유가 되는 것이다.




박미정_Afternoon_캔버스에 유채_×33.4×53cm_2008


이불 페티시- 잔혹한 오브제 ● 박미정의 작품에는 유독 침대와 이불 그리고 베개가 자주 등장한다. 이런 오브제들은 심리적 이유기를 탈피하기 못한 자아를 감금하는 도구들이다. 그것은 최초의 상실에 대한 보상으로서 모성적 육체의 대리물이며, 젖가슴의 대체물이다. 그는 특별히 흰색, 부드러움, 둘러싸임을 욕망하고 천착한다. 그것은 구순기적 욕망이 적당한 시기에 항문기와 성기기로 진입하지 못한 채 고착되어 여전히 손가락을 빨고 있는 어린아이를 연상케 한다. 인간이 구순기에 고착되면 어린아이처럼 의존적이고 수동적인 태도를 보이게 된다. 침대에 등장하는 사슴, 양들도 바로 구순기의 단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자아충동의 산물들에 다름 아니다. 그뿐 아니라, 가끔씩 등장하는 검정 우산도 얼굴과 몸을 가리고 품어준다는 의미에서 오이디푸스 전단계-어머니와 나와 둘만의 합일이 이루어진 이상적인 세상-로의 회귀를 환기한다. 그러니 여전히 그것도 일종의 구강충동의 산물인 셈이다. 구순적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것은 침대여도, 이불이어도, 베개여도, 옷이나 스타킹이어도 상관없다. 대상은 중요하지 않다. 이것이 바로 라캉적 의미에서 헛것을 짚는다는 의미의 오브제 아, 즉 페티시에 해당되는 것이다. 페티시는 잔혹하지만, 그것이 또 우리를 견디게 하고 살게 한다는 측면에서 죽음을 방지하는 안전망이다. 그런데 사실, 침대와 이불을 오브제로 한 여타의 작가들의 일련의 작업들과 변별되는 박미정만의 구순기적 이불은 거의 실패에 가까워 보인다. 그것은 더욱 치열하게 그의 구순기적 욕망과, 성인이 되어서도 해결되지 않는 원형적 애정결핍의 증후를 드러내는 기제로 작용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이기에는 그것은 마치 어떤 ‘흔적’과 ‘물성’에 치중한 작업처럼 살짝 전도된 방향으로 드러난다는 모순점을 보인다.




박미정_Lunch on the lawn_캔버스에 유채_162.2×130.3cm_2007


길들이고 싶은, 길들여질 수 없는 응시 ● 박미정에게 낯선 것은 오히려 숨김없이 드러나 있는 것들이며, 거기에 더불어 시선이 중첩되는 장면들이다. 따라서 박미정이 그려내는 그림들은 그 스스로 선택한 장면이라기보다는 사물과 대상의 시선을 그가 응시로서 느끼고 있을 때 비로소 형성되는 장면들이다. 메를로-퐁티가“모든 봄에는 근본적으로 나르시시즘이 있다”고 말한 것처럼 작가는 사물들에 의해 주시되고 있음을 느낀다. 즉 작가는 거주하고 있는 사물의 윤곽을 바깥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사물 바로 그것에 의해 보여 진다는 것이고, 그 사물 속에 존속하는 것이고, 그것으로 이주하는 것이고, 그 환영의 유혹에 매혹되어 자신을 양도하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보는 자와 가시적인 것의 분별이 없어지는 것이다. 즉 내가 저 풍경을 보는 것은 저 풍경을 대신하여 본다는 것이고, 따라서 내가 저 풍경을 보는 것은 저 풍경이 나의 봄을 통해 제 스스로를 본다는 것이다. ● 그런 의미에서 박미정의 작품은 시선과 응시가 교차하는 지점에 놓여있다. 자신을 바라보는 자신을 그리고, 사물들은 모두 서로 응시를 주고받고 있다. 박미정은 이렇듯 현실세계의 지각이 시점에 따라 변화무쌍하고 다중적이며, 언제나 새로운 컨텍스트 속에 놓여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응시를 인식했을 때 모든 사물은 그에게 늘 낯선 타자인 동시에 바로 나르시시즘적인 알터에고(alter-ego)일 수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의 풍경은 언제나 낯익음과 낯설음의 변증법적 순환 속에 드러나게 되며, 그것이 실존의 근원이고, 그 속에서 작가는 세계를 견디고 삶을 구축하는 것이다.




박미정_The Play_캔버스에 유채_31.8×40.9cm_2007


지금까지의 박미정의 전작을 살펴보면, 형식적인 면에서 조형적 통일성과 내용적인 면에서 주제적 일관성이 부족함을 느낄 수 있다. 하나의 주제를 심도 있게 천착하는 공력이 부족하거니와 아직까지 그런 필연성조차 작가에겐 익숙하지 않은듯 보인다. 어쩌면 하나로 응집되지 않는 방만한 편재적 상상력 자체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작가들의 집단무의식은 아닌가 생각되는 측면 또한 부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미정의 작품은 일종의 미적 취향에 근거한 이미지 채집을 통한 몽타주를 적절히 구사하는 듯 보이는 순간에도, 이런 사물들이 왜 한 화면에서 공존해야하는지에 대한 심리적 ? 미학적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매우 빈약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 세심한 숙고가 필요하다. ● 무엇보다 박미정의 작가로서의 가능성은, 그가 바로 사물 속에 내재하는 낯선 근원을 파악함으로써, 진실로 존재하는 자아를 만나고 삶의 공포와 불합리를 견뎌내고자 한다는 점에 있다. 그에게 중첩된 환상적 공간이 욕망의 소진의 차원이 아닌 생을 견뎌내는 실존의 차원에 가까워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앞으로도 박미정은 역설적으로 스스로를 부정하고 배반하는 데 열중하며, 길들여진 응시를 거부하고 저항하는 미적 자의식의 소유자로 존재할 것을 예감한다. ■ 유경희


번호별로 보기
여러개의 게시물 정리 제목별로 보기 이름별로 보기 날짜별로 보기 조회별로 보기
1300   전시 5.2 2008/05/02 419
1299   전시 4.23 2008/04/23 457
1298     [re] 전시 4.23 2008/04/27 469
  전시 4.13 2008/04/13 548
1296     [re] 전시 4.13 2008/04/16 390
1295   전시 4.2 2008/04/02 390
1294     [re] 전시 4.2 2008/04/04 445
1293   [기사] 애울리는 노전대통령 [2] 2008/03/26 310
1292   전시 3.25 [3] 2008/03/24 428
1291   전시 3.20 2008/03/20 441
1290   전시 3.9 2008/03/09 426
1289     [re] 전시 3.9 2008/03/17 311
1288   전시 3.5 2008/03/06 450
1287   [강좌] ACC 2008/02/27 306
1286   전시 2.27 2008/02/27 420
1285   . 2008/02/24 409
1284   [text] 예쁘고 잔혹한 2008/02/21 382
1283   [song] Daft Hands / Daft Bodies 2008/02/20 328
1282   전시 2.21 [1] 2008/02/20 459
1281   전시 2.18 2008/02/18 357
  [1][2][3] 4 [5][6][7][8][9][10]..[68]  
Copyright 1999-2022 Zeroboard / skin by uZ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