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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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omepage]님께서 남기신 글 (2008-02-20 14:39:36, Hit : 471)
전시 2.21



KWONKISOO 4 SEASONS

권기수展 / KWONKISOO / 權奇秀 / painting

2008_0212 ▶ 2008_0229



권기수_4seasons series 2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2×130cm_2007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권기수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8_0212_화요일_06:00pm




박여숙 화랑_PARKRYUSOOK GALLERY
서울 강남구 청담동 118-17번지 네이처포엠 3층
Tel. +82.2.549.7575
www.parkryusookgallery.co.kr






송신자가 목표한 의미 작용이 수신자에게도 동일하게 일어나지 않는다면 커뮤니케이션은 실패한 것이다. 특히 상징으로 표시되는 기호는 본질적으로 다의적이며, 의도했던 의미와 다르게 전달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실패한 커뮤니케이션에도 의미 작용은 역시 일어난다. 이것은 기호가 단일 의미만을 갖는 것이 아니며 다의성을 띄면서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권기수_Tim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227cm_4개셋트_2008


권기수의 '동구리'라는 기표signifiant는 이러한 의사소통에 대응하여 롤랑 바르트Roland Gerard Barthes의 외시denotation(동구리가 직접 지시하는 대상)와 공시connotation(동구리에 주어진 또 다른 내재적 의미)로 관객과의 의사소통을 시도한다. 언듯 보기에 가벼워 보이면서도 치밀한 구성과 한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정확성은 관객들에게 서로 다른 해석의 여지를 주고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상황에서도 권기수의 동구리가 커뮤니케이션에 실패하지 않는 이유는 철저하게 동양적인 사고방식에서 시작된 기표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권기수_A red river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130_2007


이러한 동구리는 각기 사람마다 주관적 해석에 따른 유추가 가능하며, 그것에 따라 계속해서 확장해가는 새로운 기의들이 존재한다. 류철하(월전미술관 학예연구원)의 해석에 의하면 권기수의 작품에 등장하는 기호화된 이미지는 억압된 힘, 관계 그리고 사회적 위치의 자각에서 나오는 폭력성을 잠재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하여 칼, 총, 몽둥이가 잠재적 폭력성이라면 꽃은 화합, 협력, 융화하려는 의지로 볼 수 있다고 하였다. 김기용(대안공간 아트스페이스 휴 디렉터)은 「기호 이미지와 심미적 재현」에서 권기수의 기호이미지는 의미의 우연성과 텅빔을, 대상의 실종과 주체의 실종을 상기시킨다고 하였다. 이렇게 동구리의 미소가 폭력성이나 주체의 상실로 해석되는 이유는 1998년 관훈 갤러리에서 그의 첫 개인전인 〈The Show〉의 작업 때문이라 보인다. 검은 복장을 한 인물들의 군상은 사회의 억압과 정체성의 혼란에 대한 표현방법이기 때문이다. 초창기 동구리의 이미지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다. 웃고는 있지만 드로잉의 붓터치가 괴기스러움과 속도감으로 인해 음울함을 나타내고 있다. 당시 정치적 사회적 상황에 대한 심도 깊은 생각으로 많은 것을 연구하고 있었던 권기수의 작업은 현재의 작업으로 발전했다.




권기수_flouting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82×227cm_2007


동구리의 웃고 있는 미소는 한국 특유의 고졸한 미소를 띈 온화한 표정을 의미한다. 특히 빛의 방향에 따라 웃는 모습이 변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 한국 불상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한국 불상은 위엄있는 중국이나 아기자기한 일본의 것과는 다른 관조적이면서도 온화한 미소가 있다. 이러한 미묘하면서 고졸한 미소를 차용하면서‘귀엽다. 장난스럽다.’를 벗어난 사람에 대한 대명사이자 상징으로써 만들었다. 권기수는“미국식 일러스트레이션illustration과는 다른 맥락에서 의미를 파악해야 할 것이다. 예로부터 부처는 옅은 웃는 미소를 지니며 인자한 보살의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동구리의 미소는 하나의 한국적 기표라고 볼 수 있다.”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발전은 더 이상 앞서 해석되었던 폭력성이나 주체의 상실로써 해석되기는 힘들다. 한국이라는 집단의 사회적 억압에 얽매인 것이 아닌 세계적 흐름 중 동양이라는 문화 자체를 파악하려 하기 때문이다. 권기수는“기호가 학문화 된 것은 서양이지만, 동양은 고대부터 문자 자체가 하나의 기호를 축약한 상형문자이므로 훨씬 발전되어 있다. 예를 들면 계자원 화집과 같은 도상을 하나의 덩어리로 만들어 놓은 기호는 서양에서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라고 하며 철저하게 동양적이고 한국적인 것에 대한 탐구를 한다. 극동아시아에서 재현은 얼마만큼 잘 되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면 표현력을 얼마만큼 담은 그림을 그릴 수 있는지가 중요했기 때문에 사의적(寫意的)인 요소가 강하게 나타났다. 그러한 점을 현대적으로 해석하고자 동양화의 매난국죽이라는 사군자 도상은 단순화 과정을 거쳐 하나의 기호로 만든다. 작품에서의 꽃은 매화를 뜻하며, 대나무는 여러 가지 색의 긴 막대모양으로 표상한다.




권기수_flying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194cm_2007


이렇게 권기수가 동양사상에 대한 정신적 탐구에 대한 깊이를 더하게 된 요인 중 하나는 아크릴이라는 서양화적 물질에 대한 이질성 때문이라고 본다. 그는 서양화의 물질로 동양화를 표현하는 작가로 초기에는 동양화단의 이단으로 취급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에게 있어서 어떤 재료나 물질을 사용해야 하는지, 어떤 방식으로 표현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실크스크린의 기법을 응용한다거나, 아크릴이라는 서양의 재료를 사용한다는 것이 그의 사상을 대변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더욱 정신적으로 작품에 다가가려 노력한다. 실크스크린이라는 밑 작업 이후, 덧칠을 10번 이상 하면서 철저하게 색감을 구분하여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리는 그의 작업은 ‘중첩’의 의미를 가진다. 수묵화의 먹이라는 재료에서 아크릴이라는 변화는 같은 검정색임에도 불구하고 물질적 차이를 보인다. 그 차이의 대명사로 대부분의 동구리를 검은 색으로 그린다. 이러한 정신적 교감으로의 승화된 작품은 결국 인간의 속세적인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되는 상태를 나타내고자 하며 그것은 불교적 용어의 해탈의 상태와 같다.




권기수_fountain-silver_캔버스에 아크릴채색91×117cm_2007


이렇게 한국 사회적 상황에서 동양사상 전체를 살펴보는 폭넓은 시야로의 전환은 그의 정체성 문제에도 확실한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다. 코리안 팝, 한국의 팝, K-pop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팝아트 계열의 작품들. 그 사이에서 권기수는 무분별한 수용보다는 한국적인 특징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그는 우선 영국의 팝아트가 사회비판적 의도를 가지고 기존의 규범이나 관습에 대해 비판적이며 대중문화의 속성을 나타내고 있고, 미국의 팝아트가 반복적으로 묘사, 임의적인 색채 가미, 일상적인 생활 소재의 사용으로 순수고급예술의 엘리티시즘을 공격하는 것이 특징임을 인지했다. 권기수는 순수예술과 대중예술이라는 이분법적, 위계적 구조를 파괴하는 측면에서 자신의 작품이 팝아트의 범주 안에 들어간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팝아트라는 장르 안에서 뿌리에 대한 생각을 하며 매화, 대나무를 차용하기 시작한다. 동시에 동심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오색창연한 동양적 색채가 나오게 된다. 그렇지만 그는 그의 작품이 팝아트라는 범주로만 보이는 것에 경계를 하며, 동구리가 캐릭터라는 용어로 쓰이는 것을 지양한다. 캐릭터상품을 연상하게 하는 대상물은 사실 대중적인 이미지 확보를 하면서 표현과 복제가 가능한 것으로 작용한다. 그렇지만 그는 유일무이성의 부정과 오리지널리티 파괴라는 것이 미래지향적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대신 동구리라는 고유 이미지를 내놓음으로써 자신만의 영역을 확보하고 있다. 연극에서 기초적으로 제공되는 성격을 배제하고‘배역이 아닌 배우처럼’연출을 하 듯, 작품을 받아들이고 싶다는 그는 현대 팝아트의 계보를 이으면서 동시에 자신만의 영역을 확보한다.




권기수_rest on the boxes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130cm_2007


이번 권기수 전시에서는 이러한 배경아래 자수 작업을 새롭게 선보인다. 생활 속의 이불이라는 의미는 한국적 일상생활을 의미하며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에서 스킨쉽이라는 자연스럽게 스치는 느낌에 대한 표현이다. 특히 전시의 부제인 〈4 seasons〉와 연관해 계절이 많은 우리나라에서 침대 매트+담요+홑겹이라는 형식이 많이 들어간 것을 생각하며 수공예로 작품을 만들어낸다. 캐릭터로 오인되곤 하는 동구리라는 작업과 마찬가지로, 이불과 자수라는 공예품적인 것을 작품으로 흡수시킴으로써 끝없는 매체에 대한 탐구심을 보여주고 있다. ■ 김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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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입 다문 것들의 대화

이진주展 / LEEJINJU / 李珍珠 / painting

2008_0220 ▶ 2008_0320 / 월요일 휴관



이진주_훔친일요일_장지에 채색_130×130cm_2007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갤러리 정미소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8_0220_수요일_06:00pm

전시관람_11:30am~08:00pm

이진주 홈페이지 www.omaum.net

협찬 및 후원
월간객석_운생동건축사무소_한국문화예술위원회_서울문화재단





갤러리 정미소_GALLERY JUNGMISO
서울 종로구 동숭동199-17번지 객석빌딩 2층
Tel. +82.2.743.5378
www.galleryjungmiso.com






이진주는 2007년 갤러리정미소 전시기획공모에서 선정된 작가로, 갤러리 정미소 기획초대 작가이다. 이번 전시『모든 입 다문 것들의 대화』는 이진주의 두 번째 개인전이다. 첫 번째 개인전에서보다 탄탄한 준비와 노력의 성과를 가감 없이 보여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 이진주는 2003년 홍익대 동양화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석사과정을 수료하였다. 2005년에 우수청년작가전(Etinne de Causana, Paris) 과 2006 한국화의 힘(예술의 전당)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하였다. 2006년 Gallery DOS 기획으로 첫 번째 개인전『무늬에 중독되다』에 이어 2007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젊은 예술 성장프로그램에 선발되었다. ● 2008년 2월 20일부터 3월 20일까지 갤러리정미소 기획초대전 이진주의 두 번째 개인전 『모든 입 다문 것들의 대화』는 이진주의 작업세계가 한층 깊어지고, 뚜렷해지는 계기가 되고 있다. 우선 작업 방식면에서 볼 때, 이진주는 동양화 전통 채색안료인 분채와 장지를 사용한다. 이는 몇 겹의 두꺼운 전통 한지를 사용한 평면회화 작업으로, 비교적 오랜 노력과 시간동안 안료를 거듭 쌓음으로써 완성해나가는 방식이다. 바탕지는 주로 한지 혹은 천을 사용하는데, 이 바탕 위에 물과 아교로 개어낸 색 물을 발라준다. 이로써 안료가 바탕 깊숙이 스며들게 함으로써, 안료를 부드럽게 얹는다. 그럼으로써 결과적으로 곱고 탄탄한 색감이 깊은 질감을 만들어 내게 된다. ● 이진주의 평면작업은, 처음에 볼 때에는 옅은 수채화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그렇지만 자세히 볼 수 록 미세한 알갱이들이 켜켜이 쌓여있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부드러운 느낌의 마티에르를 느끼게 된다. 이는 천 위에 유화나 아크릴 물감을 두텁게 쌓았을 때 얹혀진 느낌의 질감과는 상당히 다른 종류의 마티에르이다. 안료 고유의 색이 갖는 느낌은, 뭔가를 흡수하는 느낌인데, 이렇게 흡수되고 안정된 색은, 차분하게 고운 파스텔의 질감이나 벨벳과 비슷한 질감으로 발색한다. 이런 기법으로 이진주는 매우 현대적인 주제를 담아내고 있다. ● 이번 전시에서 주로 나타나는 ‘파편화된 신체’라든가 ‘분절된 이야기들’, ‘상처받고, 무의식적으로만 툭툭 튀어나오는 기억이나 꿈의 편린들’과 같이 현대 주체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는, 섬세한 작업들이다. 이런 주제들은 비교적 매우 날카롭고, 미묘한 것들을 포착하는 관찰 속에서 이뤄지는 것이며, 또한 오랜 시간동안 그 소재 혹은 주제를 숙고함으로써 작업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런 주제들을 사용함에 있어, 이진주의 작업방식, 즉 오랜 관찰, 오랜 작업, 그리고 섬세하게 거듭 색을 입혀 가는 과정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소재들에 대한 끈질긴 애정이라든가 투사의 과정이 포함되며, 이는 전체 작업과 어떤 하나의 맥을 이루는 것이다.




이진주_수줍은 악몽_천에 채색_128×100cm_2008


이번 전시에서는 다양한 소재들의 드로잉들과 함께 전체적으로 매우 세밀한 디테일을 포함하는 대작들이 함께 전시된다. 이런 대작들에는 곳곳에 작은 이야기들이 풍성하게 피어나는 풍부함을 자랑으로 한다. 또한 드로잉에서는 섬세하게 대상을 표현하며, 동시에 대상의 특성을 유연하게 살린 흐르는 듯한 선의 묘사가 특징적이다. ● 작가는 “드로잉을 통해서. 즉각적인 감각들은 드로잉으로 뽑아내고, 그 드로잉들의 연장선상에서 복합적인 정교한 무엇으로 자라 정교한 전체를 상상하게 한다.” 라며, 드로잉 작업을 전체 작업에서 매우 중요한 과정으로 보고 있다. 이진주의 작품에 등장하는 소재들은 지극히 일상적이며 개인적인 것들이다. “파편화된 신체, 머리카락 가위, 눈물 흘리는 크리넥스, 액자의 뒷면들 그 위에 펼쳐진 사진첩, 훔친 일요일, 하얀 까마귀, 알비노사랑, 기억땅굴 속아기, 백사 알비노(백화현상)된 뱀, 먹고 남은 사과, 읽다 만 소설...(작가노트 중에서)”● 이렇듯 ‘꿈과 기억의 편린들, 일상의 단편들, 신체와 사물의 파편들’이 이진주의 전체 작업에서 서로 공명한다. 아마도, 그 모든 것들의 공명이 ‘모든 입 다문 것들의 대화’가 아닐까. 그 속에서 우리의 모든 꿈이나 기억의 편린들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새로운 이야기는 또한 끊임없이 재탄생하게 될 지도 모른다. 이진주의 두 번째 개인전 「모든 입 다문 것들의 대화」 속에서 우리의 일상의 부분들, 조각들, 심지어 신체의 조각들 또한 새로운 일상, 새로운 신체의 다른 부분들로 증식하는 것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 이제 우리는 그녀의 제안에서처럼, 일단 가만히 현실을 구성하고 있는 이 작은 조각들을 들여다보면서, 거기에서 무엇인가를 교감하고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작은 것들, 짧은 순간들에 대한 세밀한 묘사에서처럼, 우리는 사물을 사물로 대하고, 사건을 사건 자체로 대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어떤 시작이지 않을까. ■ 갤러리 정미소




이진주_풀밭위의 식사_천에 채색_45×92cm_2008


꿈과 기억의 편린들, 일상의 단편들, 신체와 사물의 파편들 ● ‘애도’ 그녀의 이야기는 어디에서 시작하여 어디에서 끝을 맺는지 알 수 없다. 온전한 전체를 보여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뭔가 정해진 스토리를 따라가지도 않는다. 단지 그녀는 어떤 조각들을 매우 섬세하게 그려서 제시할 뿐이다. 때로 그 조각들은 꿈에서, 기억으로부터, 일상 속에서, 어떤 관계들로부터 기인한 수많은 편린들로 구성된다. 때로 어떤 사물들이 등장하는데, 그 사물들은 일상에서 흔히 버려지거나, 눈에 잘 띄지 않는 하찮고, 보잘 것 없는 사물인 경우가 많다. 게다가 이런 사물들은 신체로부터 연장된 어떤 부분이기도 하고, 혹은 신체를 담고 있기도 하고, 혹은 신체에서 버려지거나 잘려나간 부분들로부터 새롭게 자라나거나, 전혀 다른 새로운 사물로 탄생한 오브제들이기도 하다. ● 그녀가 시작한 하나의 작업은 ‘애도’ 작업이다. 그 대상 중에 하나는 ‘원피스’이다. 이것은 「원피스를 위한 애도」에서처럼 애도된, 즉 소멸되었거나, 죽었다고도 볼 수 있는, 버려진 원피스이다. 이제 더 이상 그 원피스의 주인은 그 원피스를 입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그 원피스는 끊임없이 ‘애도’되고 있다. 「훔친 일요일」과 「지울 수 없는」에서도 그 원피스는 등장한다. 이 원피스를 입은 여자는 나무에 걸려있거나, 빨래 줄에 걸려있다. 그런데 그 인물은 마치 원피스와 같이 애도되듯이 보인다. 살아있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는 채로 마치 식물이나, 종이나 헝겊과 다르지 않게 축 쳐져서, 걸려있는 것이다. ● 원피스는 많은 추억을 담고 있는 것으로 그려진다. 마치 그 추억의 눈물이 흐르듯, 물이 뚝뚝 떨어져 그 추억의 웅덩이를 만들고, 그 웅덩이는 한 장의 편지와도 같은 추억의 한 모금이 된다. 그 추억이 하나 하나 박혀있기라도 한 것처럼, 원피스는 온통 무늬로 새겨져있다. 실제로 ‘애도’하고 있는 것은 그 원피스의 무늬들에서 보이는, 그 추억들인 것이다. 하지만 그 추억들은 원피스가 버려짐과 동시에 과거의 것으로 묻히고, 현재에는 원피스와 함께 잊혀져가는 추억들에 대해서 슬프게 애도하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이진주_원피스를 위한 애도_장지에 채색_110×85cm_2007


‘하나인 전체’ 이진주의 전체 작품에는 동일한 모티브가 다른 여러 그림에 반복해서 등장한다. 그것을 통해서 전체의 이야기는 짐작된다. 그것은 그렇지만 완전한 스토리가 아니라, 어떤 부분들의 총합으로써만 제시되는 또 다른 부분이자 알레고리들일 뿐이다. 이는 하나이자, 여럿이고, 또한 자라거나 증식하는 경계나 끝이 없는 어떤 전체에 관한 상을 짐작케 한다. ● 작가의 이전 작품들에서는 일종의 분열된 주체의 모습이 등장하였다고 볼 수 있다. 가령 작품에는 어떤 여자의 모습이 등장하는데, 그 여자는 다양한 가면을 갖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샴쌍둥이처럼 이어져 있기도 하다. 그 여자는 단 하나의 전체로 등장하지 않고 마치 둘 인 냥, 혹은 그 이상인 냥 여럿으로 분열되어있는 모습이다. 그 그림들에서 눈에 띄는 것은 여럿의 얼굴들과, 여럿의 손들이다. ● 최근의 작업에서 ‘손’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그런데 그 손들은 이전의 작업에서처럼 여러 개의 손이 아니라, 하나의 손에서 자라나고 있는 여러 개의 손들로 이뤄진 하나의 자라는 전체로 보인다. 그 전체는 처음과 끝이 없이 계속 자라고 있는 연속된 전체로 나타난다. 이 ‘여럿이자 하나인’, 그리고 자라고 있는 손은 단순히 서로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의 전체의 여러 부분들에 상응함을 암시한다. ● 이진주가 그린 작품들, 즉 하나이자 여럿이고, 동시에 단편들이자 전체인 작품에서는 슬픔, 아쉬움 등과 같은 정서와 더불어 뭔가 연관되어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일상 속의 오브제들, 상실된 기억들, 명확하지 않은 꿈의 요소들에게 무엇인가를 염원하는 느낌이 전이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애도에서 이어지는 어떤 전체에 대한 염원이나, 지속에 대한 염원들이 신체와 더불어, 신체로부터 연장된 것에서 자라고 있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신체로부터의 연장, 분신들과 같은 것은 이전작업과도 연관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진주_지울 수 없는_천에 채색_113×193cm_2008


‘역설적인 염원’ 부분들, 혹은 신체와 관련된 어떤 행위와 염원들은 연속된 전체를 향한다. 이진주의 전체 작업을 보면, 부분들로 하여금 전체를 암시하고, 부분들이 자라서 무한한 전체를 향하게 한다. 이와 같은 이진주의 반어적인 표현은, 애도의 행위에도 적용된다. 즉 특정 소재들이 반복해서 등장하는 것은, 버려지거나 잊혀진 것에 대한 애도의 행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간직하고 싶은 염원의 강한 표출이기도 한 것이다. 이진주의 소재들은 잊혀지고, 버려지는 것들이다. 즉 그것에 대한 애도의 그림이다. 그렇지만 한편 그 소재들은 이 그림, 저 그림에서 ‘자라고 있으며’ 동시에 ‘다른 새로운 것을 탄생’ 시키고 있다. 이는 버려진 것에 대한 완전한 망각, 완전하게 버리기가 아니다. 오히려 이런 소재들은 몸에서, 우리 일상에서 뻗어 나가서, 비록 하찮은 것이 되었지만, 다시 자라나서 새로운 사물로 다시 태어나기를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소재들이 된다. 동시에 여러 편린들, 단편들, 파편들이 이러한 역설 속에서 새로운 전체로 재구성되고, 그것이 지속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조각들은 단지 그 조각들로 떼어져 나가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이제 막 새로 태어날 씨앗이거나, 아니면 더 큰 전체를 증식시키고 있는 세포와도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 부분들은 서로 서로 이접하여 전혀 새로운 부분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하나에서 둘로, 그 이상으로 무한히 증식해나가기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진주_자유롭지 않을 자유를 위한 노래_천에 채색_ 40×36cm_2007


‘멜랑꼴리에서 생성으로’ 물론 이진주가 이야기하듯, 그리고 우리가 늘 상 이야기하듯, 현대의 주체들은 모두 분열된 주체이다. 우리의 일상은 파편화 되어있고, 우리의 언어는 통일되어있지 않다. 우리가 일상에서 꾸는 꿈은 뭔가 부조리하기만 하고, 전혀 예측과 어긋나며, 우리의 인생사나 역사는 뭔가 일관성이 없다. 망각 속에서만 완전한 기억이 존재하는 것인지, 도무지 우리가 기억할 수 있는 것이란, 빈 곳 투성이일 뿐이다. 게다가 명확히 표현할 수 있는 공인된 언어로는 도저히 무엇인가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고, 전부가 아닐 것이라는 인식에서 오는 아쉬움만 끊임없이 남길 뿐이다. ● 과연 우리의 삶은 이러한 아쉬움으로, 이러한 부조리함으로, 또한 어긋남 속에서 지속되고 있는 것일까. 이렇듯 망각과 무의식의 영역이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 어떤 것이라면, 우리는 하나의 통일된, 완전한 전체란 것을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이때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전체란, 완결되지 않고, 열려있고, 뭔가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는 그런 전체일 것이다. ● 이진주의 그림이 이런 우리의 현실,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면 어떨까. 즉 분열된 현대인들의 삶, 그들의 언어, 그들의 기억과 꿈, 일상들을 있는 그대로 그리고 있다고 한다면 어떨까. 얼핏 보면, 이진주의 그림들에 등장하는 소재들은 매우 개인적이고, 그 내용을 알기 힘든 알레고리적인 요소들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그림 속에서는 전혀 새로운 무엇인 등장하는 것도 아니다. 머리카락, 사과, 휴지, 원피스, 성기, 태아... 이런 것이 새로운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단지 우리가 일상 속에서 무심결에 놓치고 있거나, 아니면 우리에게 잠재하고 있을 뿐인, 아니 우리 자신의 일부들이다. 단편들이지만 분열된 주체나 불안과 불완전으로밖에 규정할 수 없는 전체의 일부인 것이다. ● 그런 우리 자신이면서 분열된 부분들로만 감지될 뿐인 것들은 어떤 틈새에서만 불쑥 불쑥 튀어나오고, 뭔가 우회하여 자신을 표현한다. 마치 그런 순간은 어릴 적 어떤 추억이 불현듯 누군가를 만나고 있을 때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순간이기도 하다. 때로 우리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어떤 느낌이 갑자기 되살아나서,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이러한 알 수 없는 멜랑콜리함의 순간들, 바로 그것이 우리의 일상에서 우리를 지탱하고 있는 것이다. 이진주의 작품 속에서도 이러한 멜랑콜리함, 즉 상실된 것들에 대한 어떤 슬픔의 감정들이 배어있다. ‘원피스’의 끊임없는 애도와 마찬가지로, 버려지는 것, 상실된 것에 대한 멜랑콜리적 태도가 저변에 깔려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손 나무’의 경우는 좀 달라 보인다. 손은 자라고 있다. 일단 잘려나간 손은, 애도를 넘어서, 새로운 손을 자라게 하는 터전이 되고 있다. 그리고 버려진 머리카락들로 만들어지는 가위라든가, 버려졌지만 새롭게 씨앗을 배태할 사과 속이라든가, 아직은 묻혀있지만 태어날 태아들이라든가, 이런 것들은 작가 뿐 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소망이나 염원을 담고 있을 것이다. ● 상실한 것에 대한 멜랑콜리적 태도, 상실 자체를 아이러니하게 즐기는 태도로부터 벗어나 상실한 것을 재발견하고 그 발견이 새로운 생성의 맹아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 그것은 풀기 힘든 현대 주체가 처한 어떤 곤궁의 지점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이진주는 이번 작품들에서 우리의 현실에서 도망가거나 일탈을 제시하는 것 같진 않다. 오히려 그녀는 우리 현실에의 작은 조각들, 잊혀지고 버려지는 것에 대해 애도의 행위를 반복한다. 그 속에서 꿈이나 기억의 편린들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새로운 이야기로 재탄생하기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속에서 일상의 부분들, 조각들, 심지어 신체의 조각들 또한 새로운 일상, 새로운 신체의 다른 부분들로 증식하고 있다. 여기에서 무엇인가가 새롭게 탄생할 수 있다면? 이제 우리는 그녀의 제안에서처럼, 일단 가만히 현실을 구성하고 있는 이 작은 조각들을 들여다보면서, 거기에서 무엇인가를 교감하고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작은 것들, 짧은 순간들에 대한 세밀한 묘사에서처럼, 우리는 사물을 사물로 대하고, 사건을 사건 자체로 대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어떤 시작일 수 있지 않을까. ■ 이병희




이진주_간편한 환기-Easy Refresh_천에 채색_40×40cm_2008


무언의 대상들의 귀환, 혹은 비범한 일상 ● 나는 새로운 리얼리즘의 도래를 예감한다. 이미 도래한 것인지는 확신하지 못해도 말이다. 그런데, 온갖 포스트모던적 회의와 해체에도 불구하고, 본래 리얼리즘이 아니고서는 적극적 건설 작업은 불가능할 것이었다. 요컨대 나는 리얼리즘의 반복을 예감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회화 영역에서 대상들의 귀환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이진주는 이러한 대상들을 “언어와 같은 체계적인 구조와 아귀가 맞아떨어지는 시나리오를 넘어 부조리하고 모순된 어떤 비밀스러운 사건”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스스로 기술하고 있는 것을 작품 속에서 그려내고 있다. 우울한 심리적 장에 틀어박힌 그 기억-대상들을 말이다. ● 우선 작가가 동양화의 기법으로 작업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보자. 그녀는 빛깔에 집착하는 서양화 기법의 묘사적 한계를 정확하게 자각하고 있는 화가에 속한다. 예를 들어 그녀의 작품들은 명암을 결여하고 있는데, 이는 작가 자신에 의해 의도된 것이며, 실재를 묘사하기 위한 적극적인 기법상의 제스처인 것이다. 결여를 한낱 결여로서 인식하지 않는 순간, 우리는 어떤 새로운 리얼리즘의 영역 안으로 진입한다. 실로 그것은 과감한 제스처이다. 많은 작가들이 여전히 어떤 묘사의 한계에 직면하고 있을 때, 다시 말해서 많은 작가들이 그 한계에서 모종의 형이상학으로 비상할/퇴행할 유혹을 느끼고 있을 때, 그것은 실로 단도직입적인 묘사에로 한 걸음을 내딛는 제스처이다. 우리는 이진주가 실행하는 동양화적 기법의 모토를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명암은, 표현하는 것은 고사하고, 숨기는 일에서도 실패한다. ● 두 번째로 주목해야 할 것은 그녀의 그림들이 역설의 겪음을 매우 기본적인 논리로서 전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논리는 또 다른 논리를 파괴하고 자라 나온 논리이다. 나는 '자유롭지 않을 자유를 위한 노래'에서 어떤 견고하고도 유동적인 물질감을 느낄 수 있는데, 이는 이를테면 매우 “수학적”이다. 잠시 저 제목 자체에 대해서 사변적으로 궁리해보자. 오늘날 일체의 표현의 자유가 표현의 자유 그 자체를 침식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오늘날은―이렇게 말해보자면―자유가 자유를 침식하는 바로 그러한 시대이다. 따라서 “자유롭지 않을 자유”라는 역설은, 그것을 감당해내는 자들에게, 자유의 새로운 차원을 지칭한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진주의 작업에서 우리는 자유 그 자체에 대한 매우 예리한 감각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인데, 이는 소박하고 순진한 낭만적 자유를 그려내는 작업과는 거리가 멀다. ● 우리는 정확히 이러한 것을 배경으로 이번 전시회의 제목 그 자체인 “모든 입 다문 것들의 대화”를 이해할 한 가지 관점을 획득한다. 우리는 입을 다무는 것과 대화 사이에 어떤 대립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하지만 동시에, 입을 다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혹은, 좀더 정확히 말해서, 바로 입을 다물고 있기 때문에―발생하는 대화 같은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 어떤 영층 위에서의 대화, 혹은 대화 그 자체 같은 것 말이다. 이진주의 작업에는 확실히 무언가가 불가능해진 바로 그곳에서 바로 그 무언가를 시작해내는 차원이 있다. ● 대상들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우선 기억들은 왜 또한 대상들인가? 혹은, 기억들은 정확히 어떤 순간에 대상으로서 (재)인지되는가? 작가는, 그것들을 “지울 수 없는” 순간에 그렇다는 답을 제공하는 것 같다. 우리는 기억들을 지울 수 없는 순간 그 기억들은 지울 수 없는 물질성을, 즉 대상의 차원을 획득한다고 말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작가의 말을 들어보자. ● 잘 짜여진 틀에서 잘라져 버린 군더더기들을, 일상의 미미하고 하찮은 오브제들을 껴안고 가만가만 소리 없는 그들의 이야기를 따라, 그 속에 숨겨진 무의식적이 감각의 층위를 발견하게 된다. 순간 우울한 나는 감각의 탐험가 되고 일상은 비범함을 갖춘 것들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 작가는 탐험가인데, 이 탐험가는 “숨겨진 무의식적인 감각의 층위”를 발견한다. 그리고 예술가의 긍정적 작업 일체는 바로 그 층위의 대상들을 묘사함으로써 일상을 비범함을 갖춘 것들로 다시 태어나게 만드는 데 있다. 한국어는 빛깔과 색깔을 구분할 줄 안다. 아우라는 확실히 빛과 관련된 것이다. 아우라는 확실히 명암의 기법에서가 아니라면 태어나기 힘든 어떤 것이다. 동양화의 기법을 응용하는 이진주의 작업은 빛깔보다는 색깔을 다루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나는 이제 “색깔”이라는 것을 개념적으로 규정하려는 시도가 미술에서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매우 흥미로운 시도일 것이라는 감각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이 색깔을 정의해내기 위해서는 그것이 빛깔과는 무관하다는 데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저 오래된 인상주의적 관점과의 근본적 단절을 통해서만 색이라는 개념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실로 이진주의 작품들은 어떠한 명암도 두드러지지 않도록 대상을 전체적으로 일정하게 밝게 조명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러한 전면적 조명의 효과를 우리는 비조명의 효과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모든 곳을 차별 없이 밝게 비춘다면 실로 그 어떤 곳도 비추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리고 정확히 그러한 비조명의 조명을 통해서 드러나는 사물의 국면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진주 작품들의 예쁜 색채에 섬뜩함이 묻어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아름다운 것도 숭고한 것도 아닌 그것에 대한 명칭을 나는 아직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의 언어는 어딘가에 가지고 있을까? ● 그런데 일상이 비범함을 갖춘다면 이제 그 일상에 아우라가 다시 부여된다는 말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는 데 내기를 걸겠다. ■ 이성민

모든 입 다문 것들의 대화 ● 나의 작업은 훼손된 정서의 기억과 일상들에 대한 은밀한 상상으로부터 출발한다. 상처받은 일종의 소외된 사건과 그로 인한 고통과 슬픔 같은 부정적인 감성은 끈질기게 남겨지기 때문이다. 언어와 같은 체계적인 구조와 아귀가 맞아떨어지는 시나리오를 넘어 부조리하고 모순된 어떤 비밀스러운 사건을 짐작해본다. 잘 짜여진 틀에서 잘라져 버린 군더더기들을, 일상의 미미하고 하찮은 오브제들을 껴안고 가만가만 소리 없는 그들의 이야기를 따라, 그 속에 숨겨진 무의식적인 감각의 층위를 발견하게 된다. 순간 우울한 나는 감각의 탐험가 되어 일상은 비범함을 갖춘 것들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훔친 일요일_사는 건 외롭고 죽는 건 두렵고 / 읽다만 소설은 결코 끝을 알 수가 없었고 / 서두른 건 서투른 것과 비슷했고, / 믿지 않던 사랑에 훌렁 속아 넘어갔고 / 욕망은 개미떼 같은 기억을 불러들였고 / 경계심은 무엇을 상대해야 하는지 모르고 / 부러진 가지는 처음 싹을 틔운 그때를 그리워하고 / 앵두를 먹고 낳은 무서운 아이들은 영영 어른으로 자라지 않았다. / 고요히 묻어 버린 것들의 기억들의 아름다운 디스토피아.

그 애가 말했다_나의 기억을 사 주세요. ● 그래서 그 애 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도 그 기억은 팔린 것이라 육십네번째 계절이 지나도록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로 산 참숯에 볶은 도미니카 원두를 그라인더 속으로 집어넣는 찰나 문득 육십네번째 계절 전과 같은 생생한 날 것같은 기억이 찾아왔다. 그 순간 눈은 커졌고 손은 떨렸고 하늘은 파랬고 의자는 삐걱거렸다. 입을 벌리려했지만 입술은 움직이지 않아 웅웅거리고 음음거린다. 이제 그 아이는 언어 대신 허밍을 갖게 되었다. 감각은 깨어났고 소통은 닫혀진다. 입이 열린다면 사람들이 얼마나 끔찍한지 알 수 없게 아주 예쁘게 빚어 팔 수 있을 꺼라 생각한다.

박제되는 원피스를 위하여 ● 이 원피스는 너랑 어울리지 않아. 사소한 너의 희망에 나의 조각 하나를 스스로 허물기로 한다. 다시는 따뜻한 속을 가질 수 없을 원피스를 나는 죽이고 봄날 같았던 무늬를 그리면서 길고 긴 애도의 시간을 보내고 함께 보낸 사랑의 봄날을 꼭꼭 숨겨 박재 시키고 껍데기에 불과한 아무것도 아닌 것을 기념하고 추억할 것이다. ■ 이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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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en House

윤소연展 / YOONSOYEON / 尹素蓮 / painting

2008_0220 ▶ 2008_0305



윤소연_부엌_캔버스에 유채_112×162cm_2007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이미지 속닥속닥 Vol.041214b | 윤소연 회화展으로 갑니다.




서울展 초대일시_2008_0220_수요일_05:30pm
대전展 초대일시_2008_0228_목요일_06:00pm






가나아트 스페이스 1층
GANAART SPACE
서울 종로구 관훈동 119번지
Tel. +82.2.734.1333
www.ganaart.com

대전 롯데화랑
DAEJEON LOTTE GALLERY
대전시 서구 괴정동 423-1번지 롯데백화점 8층
Tel. +82.42.601.2827~8






일상, 암시적이고 개인적이고 심리적인 지층 ● 윤소연의 그림은 작가 자신의 생활공간이지 싶은 실내정경을 보여준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 신발들이 가지런히 정돈된 신발장이 눈에 들어온다. 작가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성별을 단언할 수는 없지만 신발장 하단에 줄지어선 부츠로 보아 여성일거라고 짐짓 짐작할 수는 있다. 그리고 이러한 짐작은 옷장 밑에 놓인 구두나 옷걸이에 걸린 옷가지를 보고 보다 분명해진다.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낼 응접실 한쪽에는 벽면에 면해 긴 탁자가 가로 놓여 있고 탁자 위에는 일상적인 물건들이 어지럽지만 자연스레 놓여 있다. 응접실 옆 의자 밑에 종이 상자가 놓여 있고, 그 상자에서 꺼내어졌을 하이힐 한 켤레가 탁자 위에 자리하고 있다. 그 구두는 작가 자신이 최근에 직접 구입한 것이거나 아니면 누군가에게 선물 받은 것일 것이다. 어느 경우이건 상자를 막 열어 새 구두를 꺼낼 때의 작가의 들뜬 마음을 보는 듯하다.




윤소연_수다중_캔버스에 유채_60×90cm_2008


응접실에 앉아서 보면 그 정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부엌에는 싱크대와 식탁이 놓여 있다. 가스렌지 위에 주전자가 끓고 있고 식탁에 막 끓여냈을 커피 한잔이 놓여 있다. 커피 한잔. 왜 한잔일까. 그녀는 미혼일까 아니면 기혼일까. 혹 애인이나 손님이라도 찾아온 것일까. 옆 접시에 놓인 봉지로 보아 그 커피는 인스턴트임이 분명해 보이는데. 누군가를 접대하기 위해 커피 한잔을 끓여내는 일이 없지는 않겠지만 쉽게 상상되지는 않는다. 새 구두도 그렇지만 특히 인스턴트커피 한잔에서 왠지 모를 외로움(혹은 삶의 여유?)이 묻어난다. 그림 속에 정작 사람은 그려져 있지 않지만, 사람의 흔적을, 막 일어났었을 일상적인 사건을, 때로 작가 자신에게 각별한 의미로 와 닿았을지도 모를 사건을 상기시켜준다. 미처 그려지지 않은 것들, 다만 암시적인 것들의 개입으로 인해 그림이 갑자기 경직된다. 너무나 일상적인 정경이 불현듯 불러일으키는 이 긴장감은 무엇일까. 관음증. 엿보기. 타인의 방. 나는 과연 이 그림을 그린 작가의 주체를 완전히 재구성할 수 있을까. 그런데 그 일이 그림을 읽는 독해행위와 무슨 결정적인 관계가 있을까.




윤소연_신발장_캔버스에 유채_130×97cm_2007


윤소연의 그림은 자신의 일상적인 모습을 그려서 보여준다. 그의 일상은 실내에서 진행되고 그의 사건은 실내에서 일어난다. 일종의 실내 정경화로 범주화할 수 있는 작가의 그림은 현대인의 달라진 자기 정체성을 반영한다. 현대인은 다만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도회인이며 도시적 감수성을 소유하고 있다. 그가 비록 전원생활을 하거나 나아가 실제로 농사를 지을 때조차 그의 생활방식과 생활철학만큼은 도시적이다. 따라서 그에게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자연이 없다. 있을 때조차 그 자연은 별반 의미가 없거나 적어도 아무런 실질적인 감동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그에게 한 송이 꽃은 플라스틱 조화로 대체되고, 모니터의 파르스름한 빛깔이 하늘을 대신한다. 그는 실제로 여행하기보다는 공상과 더불어 여행하기를 즐긴다. 모니터 속의 자연은 실제보다 더 감동적이며, 여행사의 선전 리플릿에 실린 환상적인 풍경은 현실에서처럼 결코 꿈을 배반하는 일이 없다. 무엇보다도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과 대면해야 하는, 그래서 꿈꾸기의 흐름을 단절시켜 재차 현실로 되돌려놓는 일 같은 것은 일어나지가 않는다.




윤소연_옷걸이_캔버스에 유채_162×97cm_2007


MP3와 워커맨, 이어폰이나 해드셋, 그리고 슬라이딩 도어 형의 핸드폰 등 첨단의 장비들로 무장한 디지털노매드인 그는 오늘도 현대판 정글인 도시를 배회한다. 자연광보다 더 감동적인 네온사인 불빛이나, 자연광보다 더 마음을 들뜨게 하고 진정시켜주고 편안하게 감싸주는 조명빨의 세례를 받을 때 나는 더 아름답게 빛난다. 조명빨 아래서만큼은 심지어는 고독조차도 찬란하다. 그 고독이 부조리한 삶과 부닥치면서 빛바랜 현실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온통 무의미한 일상들, 진부한 삶들에 점령당한 내가, 이 공허하고 권태롭고 막막하고 정지된 것처럼 아주 느리게 흐르는 공기에 둘러싸인 내가 과연 무슨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래, 일상을 낱낱이 기록해보자, 여하튼 그것들은 나 자신이지 않은가. 진부한 일상을 기록하기. 틀에 박힌 일상을 지겹게 옮기다 보면 혹 그것들이 나를 구원해 줄 의미를 한줄기 섬광처럼 열어 보여줄지도 몰라. 진작부터 사소설이 발달한 일본에서는 진부한 일상에서 의미 찾기, 무의미한 일상을 유의미한 이상으로 승화시키는 종류의 감성이 탄탄한 지층을 이루고 있다. 그들은 처음부터 형이상학이나 이데올로기와 같은 거대담론에 견인되는 이상주의자보다는 미시담론과 개인서사에 이끌리는 미시적인 종족, 체질적으로 미시적인 감수성이 발달한 종족이었는지도 모른다. 일상을 기록하는 윤소연의 재현행위는 태생적으로 도회적 감수성에 물든 대부분의 신세대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이런 미시담론과 개인서사에서의 의미 찾기에 맞닿아 있다.




윤소연_옷방_캔버스에 유채_162×130cm_2007


윤소연의 그림은 사실적이기보다는 회화적이다. 사실적으로 보일 뿐 드로잉의 경향성이 강한 그림들이다. 이 그림들은 사물의 즉물성(핍진성)을 손에 쥐어주기보다는 사물의 암시적인 태(잠재태)를 드러내면서 그림을 심층적이게 만든다. 밋밋한 평면과 오일 조밀한 사물들, 단조로운 색면과 어질러져 있는 것 같으면서도 자연스레 자리하고 있는 물건들, 타일과 같은 복잡한 패턴과 벽면이나 간이벽체와 같은 상대적으로 심플한 구조가 대비되면서 어우러진다.




윤소연_작업실_캔버스에 유채_97×162cm_2008



윤소연_흰색테이블_캔버스에 유채_112×162cm_2007


이 일련의 그림들은 자신의 일상을 소재로 한다는 점에서, 진부하고 세속적인 현실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최근의 일상성 담론과 맞물린다. 그림일기처럼 사사로운 사건을 기록해 보여주는 작가의 행위가 자기 고백적이고 자기 반성적이며, 때로 관음증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도회적인 감수성을 자아내는 실내정경에 그 초점이 맞춰진 그림들이 신세대작가들에게서 나타난 미시담론과 개인서사에 맞닿아 있으면서도, 대동소이한 생활방식으로 인해 쉽게 공감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보편성을 획득한다. 일상성 담론과 강하게 연동된 실내정경화는 원래 인상주의 화가들에 의해 재조명된, 실내를 은근하게 감싸는 빛과 연예 감정으로 나타난 얀 베르메르에게서 그 정점을 확인해볼 수 있지만, 작가의 그림에서 감지되는 인상은 이보다는 팝아트의 그것에 더 가깝다. 일상의 전체 맥락으로부터 일정 부분을 떼어내 클로즈업해 보여줌으로써 일상에 내재된 의외성을 드러내고 암시하는 것이다. 그 태도는 생리적으로 전통적인 회화보다는 사진과 영상 이후의 변화된 감수성을 반영한다. 이를 통해 윤소연은 무의미한 일상에서 유의미한 이상을 캐내는 행위를 보여주며, 그 행위나 과정은 일정정도 예술의 본질과도 통한다. ■ 고충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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夜色_야색

이도수展 / LEEDOHSOO / 李洙 / mixed media

2008_0220 ▶ 2008_0226



전시 포스터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김진혜 갤러리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8_0220_수요일_06:00pm






김진혜 갤러리_KIMJINHYE GALLERY
서울 종로구 인사동 149번지
Tel. +82.2.725.6751
www.kimjinhyegallery.com






우리가 만드는 야색 ● 밤 9시가 조금 넘어가는 시각, 저는 지금 방에서 컴퓨터와 80와트짜리 형광등 2개를 켜 놓고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바로 이 시간 멀리서 누군가가 야경을 보고 있다면 저는 수많은 불빛 가운데 하나의 작은 하얀 점으로 보일 것입니다. 그리고 어디선가 나머지 수많은 불빛들도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저와 같이 조그맣게 야경의 한 부분을 만들어 가고 있겠지요. 그리고 그 사연들이 더 많고 시끄러워 질수록 야색은 더 아름답게 빛날 것입니다.




이도수_한강1_종이, LED, 음향센서_30×100×7cm_2007



이도수_한강2_종이, LED, 음향센서_30×100×7cm_2007



이도수_밤섬_종이, LED, 음향센서_30×100×7cm_2007

이렇듯 이 도시에서 우리들은 모두 아름다운 야경을 같이 만드는 작가입니다. 그 불빛을 밝히는 사연이 무엇이던 간에 태양이라는 거대한빛이 거두어 지면 개개인의 목소리가 빛이 되어 야색에 녹아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바라보며 결국 아름답다고 느끼게 되지요. 그 아름다운 야색을 작품으로 표현해 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저 혼자 완성하지는 못했습니다. 여러분께서 작품 앞에서 시끄럽게 소리를 내주셔야만 비로소 작품이 완성됩니다. 바로 사연들이 더 많고 시끄러워 질수록 야색이 아름다워 지듯이 말이죠.




이도수_강남대로_종이, LED, 음향센서_30×100×7cm_2007



이도수_경부고속도로_종이, LED, 음향센서_30×100×7cm_2007



이도수_주거지역1_종이, LED, 음향센서_30×100×7cm_2008

이번 전시주제는 야경의 또 다른 말인 "夜色"으로 도심 속 밤의 아름다운 색채와 그 아름다운 빛을 만드는 우리들의 희비애락을 작품으로 표현했습니다. 우리들의 이야기가 아름다운 야색을 만들기에 이 작품은 관객의 소리에 따라 작품의 색이 바뀌는 인터렉티브 작품입니다. 전시에 방문하셔서 아름다운 야색을 함께 만들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이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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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경 . 狂景

유영우展 / YUYOUNGWOO / 劉永祐 / photography

2008_0220 ▶ 2008_0304



유영우_충남강경_디지털 프린트_43×120cm_2006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학고재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8_0220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_10:00am~06:00pm




학고재_HAKGOJAE
서울 종로구 관훈동 100-5번지
Tel. +82.2.739.4937
www.hakgojae.com






사진작가 유영우의 세 번째 개인전 광경 . 狂景 이 오는 2월 20일부터 26일까지 인사동 학고재에서 열린다. 1985년 첫 번째 개인전 ‘시카고 풍경’(토탈미술관)을 시작으로 1988년 두 번째 개인전 ‘또 다른 고향’(갤러리 현대)으로 이어진 풍경에 대한 그의 오랜 집착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그는 이번 전시에서 새만금, 영종도, 난지도, 하늘공원, 김포 쓰레기 매립지를 돌아다니며 소유와 지배라는 현대인의 욕망이 투사된 풍경을 카메라에 담아낸다. 그가 잡아낸 수많은 풍경들은 우리들에게 “오늘의 사진은 무엇을 담아야 할 것인가? 우리는 무엇을 증언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조심스럽게 던지고 있다.




유영우_부안군 계화리에서 본 갑문_디지털 프린트_85×110cm_2007


그곳은 내가 기억하는 바다가 아니었다. 끝없는 바다 한가운데에 거대한 역사가 진행되고 있다. 기억하던 자연의 풍광을 넘어서서 인간의 욕망이 드리워진 그 풍경은 더없이 낯설고 한편에선 기괴하리만큼 아름다운 스펙터클을 연출하고 있었다. 막힌 갯벌은 처참하리만큼 황폐화되었고 수 백리에 걸쳐 황량한 바람이 쓸고 지나간다. 조용하게 한 떼의 검은 구름이 한여름 드넓은 바다를 덮는다. 이것은 과연 어떤 ‘풍경’인가. 풍경에 대한 우리의 오랜 집착은 회화를 지나서 사진에 이르기까지 한번도 놓치지 않는 소유의 욕망으로 표현되어 왔다. 어떻게 보면 그 욕망이 뻗어서 나아가는 지점에 우리가 풍경을 대하는 근대적인 태도 또한 성립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소유하고 변형시키며 지배하려는 현대적인 스펙터클의 욕망을 우리는 자연스럽게 풍경에 투사시키고 있는 게 아닐까. 이 낯설디 낯설은, 그리고 놀라운 광경. 狂景 의 체험은 도처에서 일어난다. 소비되는 대상으로서의 공간과 장소는 더이상 자신의 흔적을 제대로 남기지 못한다. 우리는 그 ‘효율’의 신화를 맹신함으로서 ‘소비’의 미덕을 찬양하고 그로 인한 잔인한 생채기를 여기저기에 남긴다. 우리가 오랫동안 알아왔고 사랑해왔다고 믿어온 수많은 풍경들은 우리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사이에 우리의 욕망을 전적으로 받아들여 ‘변신’해간다. 이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혹은 ‘드러내지지 않은’ 현대의 흔적들은 새로운 풍경의 모양새를 구축하고 있다. 여기서 잡아낸 수많은 앵글들은 그 미처 눈여겨보지 않은 변화를 주목하고 있다. 욕망의 투사물로서 새로운 풍경은 점점 자라고 어느새 산이 되어버리고 우리가 알아왔던 모든 것들의 인식을 재점검할 것을 강요한다. 그때의 ‘아름다운 것들’은 사라져버리고 끔찍하게 ‘아름다운 것들’을 감내해야 한다. 오늘의 사진이 비쳐내야 할 것들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증언하고 있는가.




유영우_난지도_디지털 프린트_100×600cm_2007


난지도_蘭芝島 ● 김포 신곡수중보가 생기기 전까지 물이 들고 났던 난지 샛강은 난지도 형성의 근원이었다. 망원정 근처에서 한강과 갈라진 난지 샛강은 행주산성께에서 다시 한강과 합쳐지며 100여만평의 모래섬을 빚었다. 조선 때는 꽃과 풀이 많다고 해서 ‘중초도(中草島)’, 오리가 물에 떠 있는 모습이라고 해서 ‘오리섬(鴨島)’이라 불렸고, ‘꽃섬’이란 이름도 있었다. 1970년대 중반, 박정희 정부는 잠실과 상계동, 구의동 등 소규모 쓰레기매립지들이 아파트 단지로 개발되자, 교통이 편리한 서울 외곽의 난지도로 눈을 돌렸다. 수도권 중심 산업화 정책으로 55년 156만명이던 서울의 인구가 78년 782만명으로 5배 이상 늘어났기 때문이다. 난지도는 1977년 제방이 만들어진 후 서울의 쓰레기 매립지로 이용되었으나, 92년 10월 포화상태에 이르러 폐쇄되었다. 꽃과 풀이 많았다던 아름다운 섬은 9200만t의 쓰레기가 쌓인 높이 98m의 밋밋한 산 두 개로 바뀌었다. ● 검단동-쓰레기 매립지_黔丹洞 ● 인천광역시 서구 검단동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쓰레기 매립지가 위치하고 있다. 원래 이곳은 광대한 갯벌였으나 1980년대부터 시작된 간척사업으로 매립되었고, 10년이 지난 후 대규모의 해안 간척지로 변화하였다. 본래 간척지는 농업용지로 이용하려고 했으나, 이 시기에 기존의 수도권 쓰레기장이 포화상태가 되면서 새로운 부지를 찾던 정부는 간척사업으로 조성된 이땅을 쓰레기장으로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 25년이 지난 지금은, 15톤 트럭으로 1500~2000대 분량의 쓰레기가 매일 땅속에 매립되고 있다. 쓰레기 매립지는 4개의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2022년이 되면 이 곳도 사용할 수 없게 된다.




유영우_검단동 쓰레기매립지_디지털 프린트_120×350cm_2001


새만금 ● 새만금 개발사업은 전라북도 군산, 김제, 부안 앞바다를 연결하는 방조제 33km를 세우고, 그 안에 땅 28,300 ha, 호수 11,800 ha를 만드는 사업으로 면적은 전주시 면적의 두 배, 여의도의 약 140배에 이른다. 사업 자체는 정치적 이유에서 출발하여 저개발 상태의 전북지역에 개발 공약으로 제시되었다. 초기에는 흉작시의 쌀 공급 부족 대책을 세우기 위한 국가적 명분으로 사업시행이 허가되지만, 현재 쌀 공급이 수요를 웃돌고 외국 쌀의 개방이 가시화된 시점에서 농업용지의 가치가 줄어들자 매립용지를 공업, 상업, 도시용도로 사용하기 위한 계획이 추진중이다. 이에 대해 국내외의 환경단체는 개발로 인해 방대한 영역의 갯벌과 해양 생태계가 파괴될 것을 우려해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벌이는 등 개발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또한 최근에는 새만금 갯벌의 생태적 가치가 월등히 높다는 2004년 환경부의 보고서가 공개되어 한때 논란이 지속되었다.




유영우_인천영종도_디지털 프린트_75×100cm_1997


영종도_永宗島 ● 백제에서 조선 중기까지 자연도로 불리던 이 섬에 영종이란 이름이 붙은 것은 숙종 때로 주변에 북도와 용유도(龍遊島)를 거느리고 있다고 하여 영(領)자로 하였다. 동쪽에 인천을 머리에 이고 서쪽에 신불도(薪佛島)가 양 옆을 받치고 있다(示)하여 ‘宗’ 자를 사용해서 긴 마루의 뜻을 가진 영종이라 부르게 되었다. 1973년 부천군의 폐지에 따라 옹진군에 편입되었다가 1989년 인천에 편입되었다. 1990년대 들어서 동북아지역의 중심축으로 거듭나기 위해 신공항 시설을 건립하기로 하고 2001년 영종도의 남서부에서 삼목도와 신불도를 지나 용유도까지 약 1400만평에 달하는 갯벌을 매립하여 인천국제공항을 건설하였다. 2009년에는 송도와 영종도를 잇는 인천대교가 건설될 예정이며 2014년에는 영종도 투기장 300만㎡가 개발이 완료될 예정이다. ■ 유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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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워즈_에피소드 I

김정욱_김산영_신영미_신창용_변웅필_이태경

2008_0220 ▶ 2008_0312 / 월요일 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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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8_0220_수요일_05:00pm

스타워즈_에피소드 I展_Star Wars_Episode I展




UNC 갤러리_UNC GALLERY
서울 종로구 사간동 126-1번지
Tel. +82.2.733.2798
www.uncgallery.com






『스타워즈_에피소드 I』展의 1000자 이야기 ● 최상의 블록버스터 기획전- 최고여야만 참여할 수 있는 ‘별들의 전쟁’_동시대 가장 핫(hot)한 스타 작가들만의 작품들을 선별하여 매년 초에 선보이는 ‘스타워즈 특별 기획전’은 UNC 갤러리가 야심차게 내놓는 히든카드 중 하나다. 작가 이름만으로도 ‘별들의 전쟁’을 방불케 하는 블록버스터급 작가들만이 참여할 수 있는 이 기획전은 이후, 미술 시장에 인정받는 작가라면 꼭 참여하고 싶은 스타 작가의 교두보로 우뚝 설 것이다.




김산영_20060629_종이에 아크릴 채색_60.5×121cm_2007



김정욱_무제_한지에 먹, 채색_162×130cm_2007



변웅필_한사람으로서의 자화상 응시4_캔버스에 유채_120×100cm_2007


동시대 가장 뛰어난 ‘블루칩’ 스타작가들의 작품향연 ● 동시대에 인정받는 스타 작가라 해서 반짝 작가를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대부분 절대 운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듯이, 탄탄한 기본기를 바탕으로 끈질긴 성실성과 치열한 인내와 기발한 상상력으로 최고가 된 작가에게 주어진 명칭인 ‘블루칩’이란 단어가 그들에게 어울린다. 이 작가들의 진정한 면모를 『스타워즈_에피소드 I』展으로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는 의미가 클 것이다.




신영미_01[1].08-048734_Blooming Soul_캔버스에 아크릴 채색_112×146cm_2007



신창용_people_캔버스에 아크릴 채색_90×130cm_2003



이태경_Heedo0701_캔버스에 유채_120×60cm_2008


2008, 미술시장을 사로잡을 그 첫 번째 이슈아트웍을 미리 만나다. ● 김정욱, 김산영, 신영미, 신창용, 변웅필, 이태경(총6인). 각각 자신들만의 개인전으로 새로운 이슈를 만들었던 작가들의 신작을 만나는 일은 미술시장에 불을 붙이고 컬렉터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일이다. 2008년, 그 신선하고 생생하며, 생동하게 흐르는 이슈 아트웍을 가장 먼저 만나러 가는 이번 특별기획전은 그 작가들의 작품만으로도 강력한 포스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 UNC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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花生_생의 첫걸음展

갤러리 꽃 기획展 3부

2008_0212 ▶ 2008_0221



서보람_상상-들여다보기Ⅰ_ 종이에 채색_145.5×111.8cm_2007




초대일시_2008_0212_화요일_06:00pm

관람시간_12:00pm~08:00pm


2008년 花生_생의 첫걸음展 3부





갤러리 꽃_GALLERY COTT
서울 마포구 서교동 337-36번지 지하1층
Tel. +82.2.6414.8840






대학을 막 졸업하고 화단에 들어선 신진작가들의 의욕은 최근 미술시장의 활황과 더불어 열정적으로 발화하고 있으며 그동안 ‘갤러리 꽃’을 기반으로 자기 색을 찾아가고 있는 역량 있는 작가 층은 어느덧 국내외 대형 기획전에 참여하며 긍정적인 희망으로 우리 곁에 함께 하고 있습니다.




강나리_몽상_장지에 먹과 채색_192×130cm_2007_좌
고은미_바벨-red_장지에 채색_192×130cm_2007_우



권은주_미인해부도1, 2_장지에 채색_각 160×80cm_2007


한 사람의 작가가 탄생되기 위해서는 주변의 수많은 상황과 부딪히게 되고 이를 부단히 극복해 내야만 하는 긴긴 여정을 지나야 합니다. 이러한 외롭고 고단한 과정 속에 작품발표의 기회를 갖지 못하고 많은 이들이 작가로서의 꿈을 열지 못한 채 다른 직업을 구하거나 작품 활동을 포기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김수연_ Show window_드라이포인트_100×70cm_2007
김방훈_묘령(描靈)I, II_캔버스에 유채_각 117×80cmcm_2007



김아리_악어의 눈물_장지에 채색_72.7×90.9㎝_2007
박혜훈_빨강 그림 I, II, III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종이에 오일파스텔_각 162×130cm_2007


대안공간 갤러리 꽃은 미래에 대해 불안정한 신진작가들과 함께 하며 이들의 숨은 끼를 보여주고 작가로서의 앞길을 위한 준비와 희망을 열어주고자 2005년부터 신년 벽두에 기획전시를 열어오고 있습니다.




양유연_소녀세계_장지에 채색_162×130.3cm_2007_좌
정재윤_shopping! shopping!_장지에 채색, 혼합재료_가변크기_2007_우



하지원_Hello Mr.Warhol_장지에 혼합재료_160×130cm_2007_좌
한민희_스미듯 파고드는 자유_장지에 채색_193.9×130.3cm_2007_우


2008 테마 프로젝트 『花生-생의 첫걸음』展은 올해 대학을 졸업하는 17개 대학 40여명의 작가들로 구성되었습니다. 각 미술대학 한국화 관련학과에 자료를 받아 미술평론가와 전시기획자 여러 분들의 공정한 심사를 거쳐 선정된 작가들이 5부에 걸쳐 전시의 꽃을 피우게 됩니다.




이유선_Dualism _도시Ⅲ_장지에 혼합재료_130×162cm_2007
함영희_Untitled-city Man no.1_디지털 프린트, 전구_60×40cm_2007


『花生-생의 첫걸음』展을 통하여 새롭게 화단에 선보이는 이들 작가들의 신선하고 활기찬 목소리는 한국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첫발을 내 딛는 신진작가 여러분들에게 깊은 관심과 성원을 기대해 봅니다. ■ 박종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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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동_The Wave

김지민展 / KIMJIMIN / 金志旻 / mixed media

2008_0222 ▶ 2008_0229



김지민_The Wave_라벨, 바느질_240×780cm_2008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이미지 속닥속닥 Vol.060616b | 김지민 개인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8_0222_금요일_05:00pm




한전프라자 갤러리
서울 서초구 서초동 1355 한전아트센터 전력홍보관 1층
Tel. +82.2.2105.8190
www.kepco.co.kr/plaza






김지민의 라벨 작업은 2004년 영국 유학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리바이스 라벨 수천 개를 이어 붙여 바지, 스카프, 장갑 등을 만들었다. 리바이스의 진본을 증명하는 리바이스 라벨로 제작된 바지는 소비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심리를 유쾌하게 드러낸 시도였으며, 더불어 새로운 재료의 가능성을 모색한 과감한 실험이었다. 우리가 실생활에서 자주 접하는 상품의 라벨. 상품에 비해 작고,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있어 종종 그 실체를 잊기 쉽지만, 라벨은 그 상품의 가치를 직설적으로 보증한다는 점에서 매우 커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는 이 평범하고 독특한 재료를 활용함으로써 하나의 입체적 형태를 만들고, 그 형태를 공간에 위치시켜 공간과 조응할 수 있는 예술작품을 탄생시킨다.




김지민_The Fan_라벨, 설치_2006


라벨이 가진 고유의 의미와 역할은 오로지 라벨 앞면에 존재한다. 즉 헝겊에 어떤 문자와 어떤 이미지를 새겼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진다. 나아가 고급 브랜드 라벨의 경우, 라벨은 라벨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소비사회에 있어 자본의 속성을 보여주는 지표로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의외로 라벨 뒷면에는 관심이 별로 없다. 만약 우리가 우연히 라벨의 뒷면을 본다면, 정돈이 잘된 앞면과 달리 실들이 엉성하게 얽혀 있는 모양을 보게 될 것이다.




김지민_The Oxymoron_라벨, 바느질_2007


이전까지 앞면을 주로 이용했던 김지민은 이제 로고가 보이지 않게 라벨을 뒤집는다. 로고에 새겨진 복잡한 의미를 뒤로 하고, 라벨 뒷면을 형성하는 실들의 색깔에 주목한다. 다시 말해 라벨 뒷면을 일종의 색채로 인지하여, 회화의 물감처럼, 라벨을 하나의 물감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김지민_The China Flag_리바이스라벨, 바느질_200×300cm_2008


이 당시 경향의 대표작이 바로 ‘the fan’ 시리즈이다. 그는 라벨을 규칙적이고 정교하게 나열하여 커다란 원을 만들었다. 작업이 완성되어 추상적 문양의 원이 되었을 때, 시각적 착시 현상이 발생하여, 뭔가 돌아가거나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나타난다. 그것은 마치 사람들이 소비주의에 매몰된 것과 흡사하다.‘the fan’ 시리즈는 특정 공간에 작품을 설치하기에 공간과 깊은 연관성을 가진다. 비록 ‘fan’ 작업이 평면적 형태를 띤다고 생각할 수 있더라도, 엄밀히 말하자면 라벨도 높낮이가 있다. 작가는 이 평면 같은 입체를 공간에 배치하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공간을 해석하며, 그 해석을 통해 공간을 하나씩 점령해 나간다. 따라서 ‘the fan’ 작업은 설치 개념에 가깝다. 물론 설치를 위한 시간도 상당히 필요하다. 그래서 김지민은 종종 그 설치 과정을 영상에 담기도 하였다.




김지민_The China Flag_부분_2008


특정 공간에 일시적으로 설치하는 ‘the fan’ 작업을 위해서는 붙였다 떼었다 할 수 있는 블루 택(Blu Tack)이라는 접착제가 동원된다. 그런 측면에서 ‘the fan’은 일회성과 장소성이 강할 수밖에 없었다. 2005년 11월 한국 귀국 후, 갤러리로부터 많은 시간을 배정받을 수 없었던 김지민은 새로운 방법을 연구한다. 그것은 라벨들을 ‘바느질’로 고정시켜 영속성을 갖게 하는 것이다. 당연히 설치 시간을 줄이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바느질한 작품의 한쪽은 라벨의 앞부분으로 구성되었고, 다른 쪽은 라벨의 뒷부분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므로 보는 방향에 따라 각기 다른 무늬와 색채를 접하게 된다. 작가는 이러한 양면성에 기초하여 ‘oxymoron’ 연작을 발전시켰다. ‘oxymoron’은 상반된 두개의 개념이 합쳐진 수사학적 표현을 지시한다. ‘oxy’는 그리스어로 ‘sharp’를 뜻하고, ‘moros’는 ‘dull’을 뜻하기에, ‘oxymoron’이란 단어 자체도 ‘oxymoron’이다. (例, alone together, same difference, jumbo shrimp 등)




김지민_The Head_라벨, 바느질_240×160cm_2008


이 시리즈의 대표작은 물고기를 시각화한 〈the oxymoron 2007〉이다. 사람의 앞과 뒤라는 기준에서 보면, 물고기의 앞과 뒤는 비교적 모호하다. 오히려 물고기는 옆면이 앞면의 역할을 한다. 이와 같이 우리의 통념을 교묘하게 빠져나가는 것을 포착하기 위해 아마도 그가 물고기를 소재로 선택한 것 같다. 이 작품에서 라벨 앞면으로 이루어진 물고기 형상과 라벨 뒷면으로 이루어진 물고기 형상은 개념적으로 서로 거리가 있다. 뒷부분은 작가가 추구하는 색의 미 혹은 색의 조합에 대한 이야기이고, 앞부분은 로고의 덩어리, 즉 단순히 물고기 형상을 뛰어넘어 다른 어떤 것을 시사한다. 물고기라는 하나의 형상과 공간 안에, 성질이 다른 것들이 함께 존재하게 된다. 이는 oxymoron의 의미와 마찬가지로 이질적인 것의 공존이다. 또한 김지민은 〈the oxymoron 2007〉를 바닥에 놓거나 벽에 걸지 않았고, 6폭의 병풍에 물고기를 붙였다. 조각을 전공한 그는 이 물고기가 공간과 마주하여 보다 입체적 생기를 갖기를 원하였다. 병풍의 꺾이는 각도에 따라 물고기를 다소 굴곡 있게 부착하여 물고기가 살아 움직이는 듯한 운동감을 강조한다.




김지민_The Mickey Bomb_리바이스라벨, 바느질_300×300×300cm_2008


이번 개인전에는 〈The China Flag〉, 〈The Head〉, 〈The Big Mickey Bomb〉, 〈The Mickey Bombs〉, 〈Drawing〉, 〈The Wave〉 등의 작업이 출품되었다. 먼저 〈the China flag〉를 멀리서 보면 중국 국기 같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면 리바이스 라벨로 구성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오성기가 발산하는 폐쇄적인 공산국가의 뉘앙스와 개혁?개방 정책에 따른 자본주의의 침입이라는 이중적 시각이 이 작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the head〉는 스포츠용품 회사 ‘헤드’의 라벨로 닭의 머리를 제작한 것이다. 닭은 일반적으로 지능이 떨어지는 조류로 알려져 있는 반면, 헤드는 우두머리를 상징한다. 역시 모순어법과 반전의 위트가 돋보인다.







죠엘 샤피로


Joel Shapiro展 / drawing.sculpture

2008_0201 ▶ 2008_0330

href="http://im3-fan.infomail.co.kr:8888/bin/checker?mode=4&module=20&mailidx=1584&dmidx=320991&emidx=0&service=3&cidx=&etime=20080229000000&seqidx=0&objidx=28&url=http://www.ganaart.com"
target=_blank> border=0>


Joel
Shapiro_Untitled_브론즈_24.1×26.7×13.3cm_2003(2005)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가나아트센터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8_0201_금요일_05:00pm

color=#aa0000>가나아트센터
2008_0201 ▶ 2008_0224

가나아트
부산

2008_0228 ▶ 2008_0330
관람시간_일~목_10:00am∼08:00pm /
금~토_10:00am∼09:00pm






가나아트센터_GANA ART CENTER
서울 종로구 평창동 97번지
Tel. +82.2.720.1020
href="http://im3-fan.infomail.co.kr:8888/bin/checker?mode=4&module=20&mailidx=1584&dmidx=320991&emidx=0&service=3&cidx=&etime=20080229000000&seqidx=0&objidx=29&url=http://www.ganaart.com"
target=_blank>www.ganaart.com


가나아트 부산
부산시 해운대구 중동 1405-16번지 노보텔 앰배서더 부산 4층
Tel.
+82.51.744.2020
href="http://im3-fan.infomail.co.kr:8888/bin/checker?mode=4&module=20&mailidx=1584&dmidx=320991&emidx=0&service=3&cidx=&etime=20080229000000&seqidx=0&objidx=30&url=http://www.ganaart.com"
target=_blank>www.ganaart.com






생각의 면들
● 조엘 샤피로는 20여 년 동안 자신의 사고와 작품 제작의 과정들을 반영하는 직사각형 형태에 천착해왔다. 그는 특유의 복합적인 명쾌함을 얻기
위해 가장 단순한 수단을 선택했다. 철저히 무생물적인 직사각형은 자연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그것은 순전히 인간의 발명품이다. 물론, 직사각형은
도시와 산업 및 후기 산업 사회 어디서나, 즉 사원, 주택, 마천루, 상자, 영화 스크린, 피에트 몬드리안 Piet Mondrian의 정신적
본질의 추구, 애드 라인하르트 Ad Reinhardt의 예술의 정수에 대한 추구, 우표, 그리고 다른 수많은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Joel
Shapiro_Untitled_브론즈_35.2×22.9×17.8cm_2005

샤피로의 막대인형 같은 형상을
구성하는 단순한 직사각형 블록들은 어린 시절의 블록 쌓기 놀이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한 현실과의 유사성을 최대한 없앤 샤피로 조각이 출발했으나,
그것에 반해 발전했던 1960년대 후반과 70년대 미니멀리즘 기하학의 엄격하게 잰 듯한 기하학적 구조로 보이기도 한다. 미니멀리즘의 깎아낸 듯한
형태와 개념적 엄격성은 샤피로의 초기작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는 도널드 저드 Donald Judd의 냉정하고 현실적이지 않은
계산적 기하학보다는 토니 스미스 Tony Smith의 섬세하게 자연과 연결된 기하학에 더 가깝다. 또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점은 샤피로의
동남아시아 조각에 대한 경탄이다. 동남아시아 조각은 심지어 성적인 자세를 표현할 때에도 정신적 고요함의 숨결을 전달하는 형태와 볼륨의 억제로
가득하다. 인체의 움직임을 나타내는 데 있어 크메르 시대 이전 혹은 크메르 캄보디아의 사암 조각이나 남부 인도의 콜라 브론즈 조각, 그리고
태국의 중세 브론즈 조각에서 보여지는 형태의 간결함과 예리한 표현은 동남아시아 조각에서 너무도 자주 나타나는 특징인데, 이 특징들이 샤피로의
춤추는 듯한 기하학에 영향을 미쳤다.




Joel
Shapiro_Untitled_종이에 초크_46.3×60cm_1995

샤피로의 조♣?팔다리와 머리의 형태가
뚜렷한 오귀스트 로댕 Auguste Rodin이나 엘리 나델만 Elie Nadelman의 조각처럼 재현적이지 않다. 오히려 좀더 추상적인
기준에서 봤을 때 구성된 방식이 구상적이라 할 수 있다. 감상자들은 때때로 작품에서 인체의 형태를 알아내려는 갈망이 너무 심하여 실제로 드러나는
것보다 더 많은 재현적인 형태를 찾아낸다. 어떤 시점에서 보면, 브론즈 조각, 「무제 Untitled」(2001)는 비정상적으로 긴 팔을
위쪽으로 늘이면서 몹시 불편한 자세로 절을 하여 심한 고통을 당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른 시점에서 보면, 처음에 목처럼 보였던 직사각형 형태는
이제 아주 강한 원근감을 표현한 두 번째 팔처럼 보인다. 또 다른 시점에서, 조각은 전혀 불가능해 보이는 고도의 균형을 이룬, 더 추상적으로
결합된 직사각형 막대들처럼 보인다. ● 이 모든 시점에서 형상은 실제적으로나 은유적으로 불확실한 상태에 있다. 다섯 개 구성 요소들의 접합부는
빈약하게 임시 변통되어 있고 불안정해 보인다. 샤피로의 조각에서 이 접합부는 결코 매끈하거나 깔끔하지 않으며, 항상 그것들을 조합할 때 일어나는
사고의 과정을 반영한다. 그것들은 기쁨이나 애도, 또는 명상으로 결합된 사고의 면들이다. 작품의 구조는 미리 결정되지 않는다. 샤피로와 그의
조수는 조각이 미묘한 균형을 유지하도록 하기 위해 흡사 보철물과도 같은 가지들을 더하거나 제거함으로써 최초에 제안된 형상의 균형을 맞추는데 몇
시간 동안 공을 들인다.




Joel
Shapiro_Untitled_브론즈_48.9×71.1×29.9cm_2000

브론즈 조각은 거의 모든 경우에 목재
조각을 틀로 해서 주조된다. 따라서 그것의 금속 표면은 목재 조직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 결국 브론즈 주조 과정은 더 상하기 쉬운 목재를
불침투성의 갑옷으로 대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브론즈의 무게감을 가지고서도, 조각은 안정감 있게 서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끊임없는
움직임과 미끄러짐이 조각의 변화로 관객을 끌어들이면서 휩싼다. 변화하는 직사각형의 구성 단위들은 실제적이고 은유적인 내부와 외부의 상태들 사이를
넘나든다. ● 커다란 브론즈 조각 「무제 Untitled」(1997)는 한 시점에서는 떨어지면서 바닥에 내팽개쳐진 인간 형상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러나 이 형상은 그것의 명랑한 움직임을 방해하는 과도한 수의 팔다리를 가지고 있다. 또 다른 시점은 인간의 형상과 비슷한 면을 추상적인 각진
부분들로 해체하는 것처럼 보인다. 작품을 감상하는 가장 좋은 시점은 없다. 정확한 시점도 없다. 완전한 시점도 없다. 조각 자체가 해답을 찾으려
애쓰는 동안, 관객 역시 해결에 매진한다. 작품과 관객은 각자 실현 불가능하지만 시도할 필요가 있는 조화를 찾기 위해 노력하여 구성을 이루는
것이다.




Joel
Shapiro_Untitled_브론즈_91.4×121.9×210.8cm_1994-95

다음으로 2001-2년에
제작된 브론즈 작품 「무제 Untitled」은 곡예를 하듯 중력에의 저항에 환희하고 있는 하나의 혹은 두 개의 과장된 형상처럼 보인다.
언제나처럼 구성 요소들의 접합부는 조각에 계속적인 움직임을 담기 위해 매우 우아하게 조정되어 있으며, 작품의 3차원성은 관객의 어떤 회전과
이동에도 변함없는 생동감을 준다. 중력을 동반한 작품의 불안정한 움직임은 마치 육체가 정신을 반영하듯, 그것의 창조에 있어서의 인위성과 정신의
대담함, 그리고 존재의 연약함을 강조한다.




Joel
Shapiro_Untitled_브론즈_417×366×229cm_2001-2002

1960년대와 70년대 소위
미니멀리스트들에 의해 창조된 많은 드로잉에서, 솔 르윗 Sol LeWitt처럼 냉철하고 정확하게, 아그네스 마틴 Agnes Martin과
브라이스 마든 Brice Marden의 경우는 더욱 특이하고 감정적으로, 격자가 종이의 면을 지배했고 그것과 조화를 이루었다. 샤피로의
드로잉에서 그의 직사각형들은 격자로부터 자유로워졌고, 마치 면 위의 형상들에 숨결과 역할을 부여하는 것처럼, 부드러운 색조, 스친 듯한 자국,
때로는 희미한 손자국들에 의해 특징 지워진다. 구상적인 직사각형들의 축적은 - 마치 조각이 공간을 탐색하면서도 결코 공간을 압도하지 않고 서로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 그려지는 면으로부터 자신의 크기를 결정짓는다. 심지어 누워있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형상은 공간 속으로 뻗어나가
그것으로부터 생명력을 얻는다. 그것은 가능성의 반복들이며, 드로잉으로서는 완전할지라도 그것 자체로 끝은 아니다. 그의 조각이나 드로잉에서,
샤피로는 직사각형의 표면적인 중립성에 생생한 정신을 불어넣고, 작품을 생각으로 가득 차게 만든다. ■ 클라우스 커티스


  2008/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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