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몸이 안따라 줘서겠지만.-_- 춤에 관한 관심이 생기기 시작하는 요즘.
자기 분야에 완전히 몰아하며, 모든 환경을 통제하여 온전히 자신을 분쇄하는 작업을 하는 분들은 당연 존명의 대상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들이 생산하는 제품들이 온전한 진성으로 발언하고 있는지 아닌지는 실상 별개의 문제일 수 밖에. 일전에 친구와 훌륭한 삶을 경영하는 사람들의 발언/생산의 윤리성에 대해서 논한 적이 있지만, 일정의 관계성을 제외하면 발언의 진성이 어디에서 연원하는 가는 또 다른 문제일 것같다는.-_-a 내가 저 공연을 본 것이 아니라 정말 그런진 알 수 없겠지만(보면 알겠나만..--;) 쓰신 분의 간지에 따르면 머...
춤에 관계된 일을 하시는 분이라 여겨지는 님의 블록에서 퍼온 글. 근자에 본 글들 중 가장, 스스로의 관찰을 왜곡없고 차곡하게 개어놓는 문장을 구사하신다는. 아마도 타고 나신 부분도 있는 듯한데, 암튼 존명.
.'
)
+ + +
출처 : Dance Routine
안은미와의 대화 | 불타는 춤의 연대기 2005/06/23 12:46
어제(6월 22일) 피나 바우쉬의 <러프 컷> 공연이 끝났을 때, 앞자리는 기립박수가 쏟아지고
뒷자리는 우루루 나가면서 극명한 대조를 이뤘다.
피나 자신이 탄츠테아터 전성기 시절부터 미적지근한 관객을 선호하지 않았고,
관객 역시 호불호가 분명할 수 있도록 통제된 안무를 구사해왔다. 그렇더라도 한국을 소재로
한 작품임에도 이렇게 칼로 그은 듯이 선명한 구분이 이뤄지는 것은 흥미로웠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맨 앞줄에 빡빡머리 안은미씨가 서서 열렬히 기립박수를 보내는 광경
이었는데, 작품 자체가 미진함이 많이 남아서 인터뷰를 뒤로 미루고 물러나왔다.
오늘 아침에야 문득 그녀의 마음이 궁금해서 전화를 했다.
"어떻게 보셨어요? 어제 피나 공연."
"잘 봤지요."
"사람들은 10억 갖고 안은미씨가 만들었다면 훨씬 더 나았을 거라는 말도 하는데..."
"피나가 만들었다는 게 중요해요! 나는 피나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그런 식이에요.
이게 뭐 물건 찍어내듯이 만든 작품이냐고요. 쇼를 기대한 사람들은 지루했을지
모르지만, 이건 피나가 아니면 못 만드는 작품이에요."
"하지만 한국적인 뭔가가 잘 잡히지 않는 것은 사실이 아닌가요?"
"거장이 사물을 보는 눈을 즐겨야지요. 우리가 기대하고 보면 실패해요.
나는 가슴이 터져 죽는 줄 알았잖아요. 우리를 뜨겁게 해줘요.
그 하얀 벽이 너무 차갑게 가다가 진달래꽃이 핀 산이 되고, 그 산을 오르는 사람들
있고. 피나가 우리를 얼마나 역동적이고 긍정적으로 봤는지를 나는 봤어요.
그게 너무 고맙더라구요. 가끔은 쓸쓸하기도 하고, 슬픔이 있기도 하고."
"그래도 좀더 한국적인 신명이 없다는 점은 인정하시죠?"
"난 그 점도 좋게 봤어요. 누군가한테 10억을 줬다면 아마 준 사람의 입맛에 맞게끔
요리해줬을 거에요. 피나는 늙어가면서도 타협을 안 하잖아. 너무 아이처럼 순수
하기도 하고... 집에 침대도 없이 쿠션 하나 깔고 자는 할머니에요. 이 할머니가.
나한테 그래요. 은미야, 시간이 없어서 치울 수가 없어. 집에 담배하고 라이터밖에
없다고 해요. 일, 일이 너무 많아서 그렇게 사는 할머니에요."
"저는 안은미씨의 <렛츠 고>가 가진 한국적인 몸성, 한국적인 문화가 유럽의 몸과
섞이는 무대를 더 흥미롭게 봤어요. 그러니까 피나의 공연은 한수 접어주고 봐야
한다는 말인가요?"
"이 할머니의 영향이 없으면 안돼요. 아직도 모두 탄츠테아터 하잖아요. 그렇다고
너무 기대감을 갖고 동시대 예술의 예리한 잣대로 볼 필요도 없죠. 피나 바우쉬가
한국을 소재로 작품을 만들고, 무용수들이 목숨 걸고 추는 것을 보는 것이 즐겁지
않아요? 그 무용수들 십년을 매일같이 추는 사람들이에요. 돈도 얼마 안 받고
평생 춤을 목숨 걸고 추는 사람들이에요."
-----------------------------------------------------------------------------------
피나 바우쉬의 <러프 컷>에 대한 러프 커팅 | 불타는 춤의 연대기 2005/06/23 00:32
여행자의 시선.
하나의 문화 내부에 들어가 심층을 맛보지 않는다면, 원형질의 질감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건 천하의 피나 바우쉬라고 해도 실패할 수밖에 없는 기획이리라.
표면 위를 '빨리 빨리' 줄달음쳐서 그럭저럭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은 한국인들로 족하다.
휴양하는 기분이 아니라면 왜 이렇게 느슨하고 공허한 작품을 내놓는 것일까.
과연 한국의 무엇과 만나기라도 한 것일까.
저 은회색 벽에 나타난 진달래 가득한 산의 풍경, 물결치는 파도, 동대문의 두타에 가득한
쇼핑객들의 표정 등등이 한국의 무엇이 될 수 있을까.
끊어내어 이어붙이는 충돌몽타주는 편리하지만,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아
삶의 뿌리 근처를 더듬지 못할 때는 지나치게 편리한 듯하다.
스치며 지나칠 수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표면 위를 슬쩍 스치며 미끄러지는 수밖에.
에피소드들을 나열하며 상식적인 의미, 상식적인 은유를 늘어놓는 방식이 피나 바우쉬의
탄츠테아터라면 그건 좀 이상하다. 그런 상식적인 커팅 속에서 피나의 '고통의 문법'이
가졌던 강한 빛을 찾는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아니, 피나는 이제 행복한 듯하다. 행복을 찾은 듯하다.
그녀는 한국의 문화 앞에서도 행복하고, 한국인 역시 낙천적인 기분으로 굽어본다.
그것은 이미 서구인이 주변 문화를 둘러보며 자기화하는 습속화된 눈과 관련이 있다.
하지만 피나조차 행복감 속에서 그렇게 보편과 특수의 폭력적인 시선을 가질 줄은 몰랐다.
보편성이란 서구인의 자기중심주의로 수렴되는 것이어서는 곤란하다.
그것은 각각의 문화마다 중심이 새롭게 서고, 그 독자적인 문화들이 상대적인 입장에서
서로를 긍정하는 것이 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피나에게 이미 한국인은 많이 낙천적이고 다소 강박적이고 다소 맹목적인 사람들이다.
여인의 뒷덜미에서 쫓아가는 남자, 여인과의 섹스 앞에서 차곡차곡 자신의 관물을 개는
남자, 위로위로 벼랑을 올라가는 남자들이 등장하는 것이다.
한국 남자들에 대한 피나의 관찰은 한국인의 심성과 직접 관련있다기보다 그저 자신의
컨벤션이 확장된 결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 구체적인 습속화된 표현을 얻지 못했기
때문일까.
확실히 피나는 한국의 문화적 습속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공부를 하지 않았다는 것은
명백하다. 해학적 정서, 엇과 허튼의 감각, 씻김 다음의 진정한 화해, 기타 등등.
그녀의 안무는 결국 서구인의 몸성을 통해 우리 문화를 다시 번역해내어 기묘한 질감을
얻는 정도이다. 그것이 잘된 결과인지, 못된 결과인지는 나로서도 잘 모르겠다.
문제는 몸성은 문화적으로 형성된 것인데, 이처럼 몸성과 몸성의 대체, 문화와 문화의
겹쳐쓰기가 어떤 미학적 원칙 없이 그저 거장의 브랜드로 감행되는 것이 옳은 일인가
하는 것이다.
그 사이에서 느껴지는 이질감은 한국 관객들 스스로 '이것이 과연 한국에 대한 공연인가'
라는 강한 의구심을 유발할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김장용 배추로 남자의 몸을 덮고 배추 잎사귀로 부채질하는 여인들이 나온다.
여인들이 남자들에게 등목을 해주는 장면도 나온다.
하지만 이런 한국적 소재 역시 미묘하게 한국적인 맥락에서 벗어난다는 느낌을 던져준다.
즉 배추는 김장 김치를 담그는 용도가 아니었고, 등목하는 남자들은 팬티 차림이다.
결국 피나의 세계 여행은 뱃사람 신뱃드처럼 풍물기행에 가까운 여행자의 시선으로
남아있는 인상이 짙다.
그 와중에 소녀풍의 여인이 히스테리를 부리며 무대를 원형으로 도는 피나 특유의
동작이 나오거나 난해한 손동작을 채용하며 음악적 계기에 반응하는 독무가 나오곤 했다.
음악 선곡은 매우 훌륭했다. 하지만 그런 음악적 계기를 표현하는 방식은 실망스러웠다.
김민기의 <가을 편지>를 한국 춤의 자산과는 관계없이 무용수 개인의 정서적 재현을
시도하는 독무라든가 어어부 밴드의 백현진이 부른 톱날연주 같은 보컬에 그저 편승하는
연출은 이 공연을 다분히 심심하게 여기도록 만들었다.
북소리와 풍물 소리의 격동은 매우 세심하게 준비된 계기였지만, 마구 뛰어다니는 동작
이나 그저 그런 일차원적 대응으로 그치고 말았다. '빨리 빨리'나 '도망치다' 정도의 의미
외에 별다른 다의적 열림이 없는 것이다.
피나는 심지어 자기 표절, 자기 복제의 혐의에서 자유롭지도 못하다.
'세계 도시' 시리즈를 하면서 많은 부분에서 그런 지적을 당해왔는데, 이번 <러프 컷>에서
단적으로 파도치는 영상 장면이 그러했다. 그 장면 아래에서 남녀가 부둥켜 안고 있는
설정은 '포르투갈' 편인 <마주르카 포고>를 강하게 연상시켰다.
탄츠테아터는 음악을 효과로 사용하며, 삶의 뿌리를 진정성있게 더듬는 무대의 메소드로
각광을 받아왔다. 아직 독일의 사샤 발츠나 벨기에의 빔 반데키부스 등등은 진정성의 모험
을 회피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 당면한 문제로부터 출발하여 '고통의 문법'을 극도로 추구하는 현대
예술의 한 정점이기도 하다. 이번 <러프 컷>처럼 단순히 '낙천성'으로 추상해낸 휴머니티의
보편성이 아니라 보다 확장된 몸성의 탐구에서 흘러나온 '고통'의 보편성이 탄츠테아터의
장점이자 충격의 원천이었다.
하지만 이미 세상과 거짓 화해라도 한 것인 양 낙천성의 물결에 휩싸이자, 거장도 배가
불렀다는 탄식이 나올 만도 하다.
물론 한 소녀의 소박한 독무의 갈피 사이로 홍신자의 <미궁> 소리를 연상시키는 삽입음이
엇비치고, 백현진의 사당패 목소리에 비극적인 포즈가 잠시 등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것은 균형잡기나 구색맞추기로 보일 뿐, 우리 문화의 내부로 성큼 발길을
옮겼다가 나온 자연스런 결과로 보이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낙천적이고 역동적인 것이
한국의 기본 색깔이라고 단정이라도 한 것 같다.
확실히 이런 문화적인 겹침, 혹은 섞임의 작업에서는 '산다' '거주한다'는 개념을 생략해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인도를 안다고 말할려면, 최소한 몇년을 살아봐야 하는 것처럼 복합문화주의라는
어려운 작업은 시간과의 싸움인 셈이다.
피나 바우쉬는 그 하드코어의 생략할 수 없는 싸움을 거칠게 커팅해버린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