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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omepage]님께서 남기신 글 (2008-07-13 14:03:11, Hit : 869)
[re] 전시 7.11



삶의 의미로서 도장 - 기억과 시간의 은유

이관우展 / LEEKWANWOO / 李寬雨 / mixed media

2008_0716 ▶ 2008_0722



이관우_condensation_혼합재료_61×142cm_2008





초대일시_2008_0716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_10:00am ~ 07:00pm




인사아트센터
INSA ART CENTER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8번지
Tel. +82.2.736.1020
www.ganaartgallery.com






삶의 의미로서 도장-기억과 시간의 은유 ● 이관우의 작업은 도장으로 대표된다. 그의 작업에서 도장은 현대 미술사에 정착된 용어로서 오브제의 범주를 넘어 서 있다. 회화의 조형요소로 탈바꿈된 일상적 사물은 본래의 의미(용도)를 벗어나 자유롭게 재해석된 채로 화면에 배치된다. 반면 이관우의 도장작업에서 개개의 도장은 사물로서의 의미를 벗어난 것이라기보다 본래의 의미를 더욱 부각시키는데서 회화성을 획득하고 있다. 도장의 의미란 무엇인가? 일상적 사물로서의 도장의 의미가 화면에서 더욱 부각되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여기에 대한 대답은 도장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이름에서 찾을 수 있다. 이름이 새겨진 도장은 한 사람의 정체성을 암시한다. 개인의 정체성은 외적으로는 이름으로 대변된다. 또한 내적으로는 기억에 의존하고 있다. 한 사람이 변함없이 그이로 알려지는 것은 우선 이름이 동일한데서 알 수 있고, 이어 내가 나를 동일한 사람으로 기억하기 때문이다. 아침에 문득 눈을 떴을 때, 내가 누구인지 생각이 나지 않는 경우를 상상해 보자. 그와 동시에 나는 내가 아니다. 그러고 보면 기억과 이름은 마치 각기 두 가닥의 새끼줄이 꼬여서 하나가 된 것처럼 자기됨의 내외적 두 요소이다. 도장은 이와 같은 이름과 기억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게끔 고체에 새긴 것이다. 단단한 사물에 새김으로써 추상성을 가진 이름을 구체적 물질적인 상태로 기억하기 위한 사물이다. 그래서 도장의 의미는 기억의 은유인 셈이다. 이 기억은 보다 넓게 보면 시간의 문제로 소급될 것이다. 기억한다고 하는 의식적 행위는 과거를 현재에 되살리는 것을 뜻한다. 때문에 기억은 시간이라는 토대 위에서 재현될 수 있는 사건이다. 따라서 총괄적으로 볼 때 도장은 시간의 은유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을 단단한 사물에 새겨 넣어 물질화(공간화)한 것이므로. 그렇다면 고착된 시간은 어떤 시간인가? 혹은 무슨-누구의 시간인가? 여기서 다시금 도장에 새겨진 이름을 떠올림으로써 도장이 가진 본래적 의미를 되새길 수 있다. 도장은 추상적인 시간 일반을 은유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한 개인의 삶의 시간을 함축하는 것으로 삶의 시간에 대한 은유인 것이다.




이관우_condensation_혼합재료_59×71cm_2006


실존철학에서는 인간을 세계에 ‘내던져진’ 존재로 사유한다. 여기서 내던져졌다는 것은 흔히, 우리는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날 수 없다는 말로 대변된다. 이 말을 위의 문맥에 맞춰보면 우리가 스스로 제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는 말과 통할 것이다. 어느 순간 나는 ‘그 이름’으로 불리고 있을 따름이다. 이관우의 작업에 등장하는 도장은 이처럼 내던져진 존재로서의 인간들, 그 삶의 (시간의)의미들이 함축되어 있다. 거기엔 지금 살아 있는 사람의 이름, 세상에 내던져지기 이전으로 되돌아간 사람의 기억, 황제의 시간 등등 수많은 삶의 형태와 그 의미들이 복제된 채로 어우러져 있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고, 사회적 계급의 고하를 막론하고 사람의 삶, 그 시간의 흐름에 주목하면서 전체적으로 ‘사람사이’, 즉 인간과 인간이 만든 사회를 반영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의미의 해석은 도장이 가진 은유적이고 상징적인 의미로 인해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관우의 작업이 단지 의미 있는 사물을 재발견하고, 그 의미를 부각시키는 것에서만 의미를 가지는가? 완성된 작품 이전에 그것의 과정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작가가 작업하는 방식을 보고 있자면 전통적인 농작업 방식이 연상되기 때문이다. 작가가 물감 대신 도장을 사용해서 조형하는 것을 보면 마치 농부가 메마른 땅을 일구는 것처럼 느껴진다. 농부가 메마른 땅을 일구어 내듯, 그의 작업행위는 밭갈이나 논갈이에 해당된다. 그것도 기계화된 영농이 아닌, 예전 우리 할아버지들이 하던 방식대로 소와 쟁기를 이용해 논밭을 갈거나, 호미나 쇠스랑으로 일구던 방식대로 일일이 손으로 일궈나가는 방식 말이다. 형태적으로도 이미 화면은 구획된 밭이나 논과 흡사하다. 사각형의 화면은 작가에게 있어서 특히 의미의 농토이다. 농부가 쉴 새 없이 땅을 일구고 작물을 파종-수확하듯 작가는 셀 수 없이 많은 손놀림을 통해 빈 화면을 삶의 의미가 각인된 도장으로 채우면서 새로운 공간으로 일궈내고 있다. 그렇게 일궈진 공간은 거울과 같이 살아 숨쉬는 현실의 인간을 되비춰 주고 있다.




이관우_condensation_혼합재료_163×130cm_2007


이관우의 최근 작업을 보면 초기의 막도장 위주의 작업에 비해 도장의 크기와 형태가 다양해지고 있다. 크고 작은 도장들, 직인들, 한자도장까지 가미되어 자유로운 조형적 배치에 치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거기에서 우리는, 막도장을 빼곡히 채워 넣은 초기 작업에 비해, 고정된 도장의 의미를 확대해서 새로운 의미를 생산하고자 하는 작가의 마음을 읽게 된다. 또한 조형적 의미나 은유성에 좀 더 주목한 작품들도 등장하고 있다. 도자기 도장과 투명도장이 그것들이다. 통상적으로 사용되는 도장의 본 모습을 유지하면서 거기에 새겨진 문자의 형태를 재미있게 새겨서 활용하는 것을 넘어 그림 형태의 도장을 새긴 다음 그것을 화면에 재조합하고 있다. 그 첫 번째 형태는 그릇 형태이다. 그릇-실제로는 도자기, 옹기, 토기로 된 오래된 그릇들-은 이 세계 안에 있는 것들의 그 있음의 형식과 내용에 대한 광범위한 은유로 쓰이는 것이다. 그릇의 은유는 철학이나 언어학에서 세계 안의 사물의 있음과 인지에 관한 사유의 형식으로 폭 넓게 쓰인다. 이와 같은 그릇(도자기)의 은유를 연상하게 하는 그릇 형태가 화면 안에 등장하고 있으며, 화면 중앙을 차지한 커다란 그릇의 형태 안에는 다시 그릇이 새겨진 작은 도장으로 채워져 있다. 커다란 도자기 형태로서 화면을 분할하고 그 안을 다시 작은 도자기 도장으로 채우는 작업은 그리 생소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부분과 전체의 관계에 주목하는 미니멀리즘적 사유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런데 작가에게서 그와 같은 부분과 전체가 관계 맺는 조형방식은 보다 복합적인 의미를 내포한다. 그것은 무엇보다 오래 된 도자기를 소재로 그것을 축소해서 새긴 것으로부터 찾을 수 있다. 오래 된 도자기를 되새김으로써 조형적으로 해석된 도장이 가진 시간적 의미가 조형적 형식보다 더욱 강조되는 것이다. 그것에 더해서 전체적인 처지에서 보면 이름(문자)과 그림의 관계라는 사유의 도식이 개입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문자도장들이 밭두둑처럼 배경을 이루고, 가운데 분할된 그릇 형태의 내부가 그림도장으로 되어 있다는 것에서, 한 사람의 이름으로서의 문자가 가진 삶의 의미 및 시간적 의미와 인간의 문화적 기억이 공존하는 양상을 보이는 것이다. 그로써 보다 확대된 삶의 의미, 즉 개인의 삶과 역사적 삶-문화적 삶의 의미, 그 관계성이 사유되고 있다. 투명도장으로 이뤄진 작품 역시 도장이 가진 기존 의미를 벗어나진 않지만 다른 작품들에 비해 그 의미가 얼마간 변형된 느낌을 준다. 투명한 도장 너머에 있는 사람의 얼굴이나 그릇 등에서 보면, 그 형태의 윤곽은 분명하지만 세밀한 질감은 투명한 도장에 의해 변형된다. 또한 보는 각도에 따라서도 약간의 형태 변화를 느낄 수 있다. 이는 회화적 재미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투명도장 작업에서도 여전한 것은 도장이 가진 은유성이 돋보이는 것에 있다. 투명하다는 것, 속이 훤히 비쳐 그 뒤에 있는 사물을 볼 수 있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마음의 은유이다. 기억과 시간을 물질화한 형태로 재현하는 것에서 나아가 투명한 재질로 복제한 것에서 우리는 이름과 기억 및 시간에 대한 은유가 더욱 내밀하게 사람의 마음에까지 이르고 있음을 보게 된다. ■ 정석도




이관우_condensation_혼합재료_227×184cm_2008


인의 응결, 존재를 투영하는 거울 ● 사인(sign)은 자기의 이름을 통해 어떤 의사를 결정하거나 기록하는 서명이며, 신호이자 암호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대부분 수결이다. 사인의 행위는 ‘나’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이며, 그 자체로 ‘나’를 확보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완전한 실체로서 그것은 하나의 권위, 존재, 힘이다. 동양에서 사인은 수결이 아닌 인印에 의해 이뤄졌다. 인은 서구의 사인보다 좀 더 강력한 상징 기제라 할 수 있다. 지금도 우린 법의 보호를 받으며 주민자치센터에 인감을 신고하고, 오직 본인에 의해서만 관리되는 인의 ‘나’를 가두어 둔다. 또한 우린 인의 주체에 따라 주인을 구별하며, 그것은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관인官印과 장인長印처럼 인의 주체는 하나의 ‘기관’ 혹은 ‘자리’를 대표한다. 가장 상징적인 것 중의 하나가 국새國璽다. 국새는 국가의 표상이며, 그것의 상실은 그래서 국가의 상실과 동일시된다. 좀 더 근접한 상상을 덧댄다면, 인의 상실은 나의 상실이며, 곧 주체의 상실이라 할 수 있을 터이다.




이관우_condensation_혼합재료_73×50cm_2008


인의 집적 ; 모든 ‘나’의 주체성을 묻다 ● 이관우는 이러한 인의 집적을 통해 미학적 형상을 구축한다. 그는 화면에 동일하지 않은 인을 붙여 나가는 방식으로 작업을 하는데, 인이 작고 길쭉한 둥근 오브제라는 사실 때문에 평면의 성질이 뒤틀리는 집적이 이뤄진다. 여기서 중요한 화두는 인이 단지 오브제로 등장하느냐 아니면 주체의 상징으로 등장하느냐다. 오브제일 때 인은 하나의 점이거나 터치, 전체를 향한 부분적 마티에르로 가벼워진다. 수십, 수만 개의 인이 빼곡히 자리를 점유하면서 독특한 느낌을 자아낼 뿐 어떠한 인의 의미를 구축하지 않는단 얘기다. 반대로 그것이 본래적 의미를 확산하는 주체가 되면 상황은 달라진다. 마치 촛불문화제의 촛불처럼 거대한 존재로 부각되기 때문이다. 낱개 촛불이 흘러 장강을 이루는 불의 제전은 인의 장강과 다르지 않다. ● 그의 작업은 두 개의 의미를 횡단하는 듯하다. 딱 잘라 어느 것이라 단정할 수 없는 작업들이기 때문이다. 그가 처음 이런 형식을 실험하던 시기, 투명성이 있는 재질로 인을 떠내 가족(할머니, 할아버지)의 이미지에 덧댔다. 초상 사진 위에 집적한 이 작품은 인의 속성을 그대로 내장한다. 즉 나의 ‘나’인 어떤 주체의 이미지 위에 다른 이름이 새겨진 수 천 개의 인으로 덧 씌웠다는 것은, 나의 복수(단수가 아닌)가 아니라 나와 타자(복수로서)로 이뤄진 ‘삶’의 시간을 응축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거기엔 사회적 주체들 사이에 투영된 ‘나’가 있다. 그의 첫 시작은 그런 ‘나’의 인식과 발견에 있다 할 것이다. ● 2003년, 그가 본격적인 작업에 임하면서 인의 ‘응집’을 드러낸 것은 그렇기 때문에 ‘주체’를 떠난 인의 인식은 불가능할 수 있다. 화면 면적 102×202cm에 1만 여 개의 인으로 집적해 놓은 「Condensation」을 보자. 이 작품에는 어떠한 형상적 모티프 없이 오직 인의 응결만 있을 뿐이다. 이때 낱개의 인은 한 주체다. 나이며 너다. 모든, 서로의 주체가 모여 면을 포위하고 있다. 회화적 평면이되 거의 부조에 가까운 면의 굴곡이 발생하고, 일부는 기울기에 따라 유동적 흐름을 만들어 낸다. 이 카오스의 현장에서 어떤 리듬, 어떤 질서, 어떤 규율이 발생하는 지점은 그것이 자기장처럼 방향성을 지시하게 되거나 병렬의 기운으로 일정한 사이를 두었을 때이다. 그러나 엄청난 숫자로 집적되고 응결된 이런 작품들은 원거리에서 서로 주체성을 상실한다. 색과 면으로 혼합해 들어가는 양상을 지울 수 없다. 이관우는 이처럼 근경과 원경의 스펙트럼에서 발생하는 ‘나’의 주체성에 대해 의문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 근경에서 바라 본 주체는 ‘욕망하고 향유하는 개인’을 드러낸다. 거기, 둥글고 네모 난 작은 면에 이름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똑 같은 길이로 재단되지 않은 인의 응집은 들쑥날쑥 이고, 이름의 방향도 제각각이며, 어떤 것은 많이 기울었다. 중간에 끼어든 네모난 인은 마치 그것이 도시사회학의 구조 틀을 가진 게 아닌가 생각게 한다. 전체는 이런 부분들의 속성에 의해 매우 흥미 있는 형국을 제시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인의 면이 똑같은 곳을 바라보는데, 몇 몇 부분을 누워있다. 원경에서 그것은 뚜렷한 형상으로서 도자기, 지문이 되고, 때론 바람결이나 구름 같은 이미지가 된다. 인의 색은 대체로 붉은 색이지만 그는 검은 색을 주로 쓴다. 하여 그의 화면은 노란 인의 몸과 검은 이름들이 조화를 이룬 중성이다. 거기에 본래 색인 붉은 색을 끼워 넣는 방식으로 어떤 형상을 드러낸다. 이 ‘드러내기’에는 인위적 형식을 극대화하지 않으려는 작가적 고민이 있어 보인다. 그의 붉은 색은 결코 거칠지 않다.  




이관우_condensation_혼합재료_227×368cm_2008


인의 응결 ; 까다로운 주체의 형상 ● 최근 작업들은 형상을 지향한다. 2004년의 관훈갤러리 작품들이 보다 추상적인 원경 이미지를 가졌다면, 이제는 특정한 형상을 의도적으로 드러낸다. 이것은 주체를 형상에 감추는 전략이 깔려있다고 본다. 쉽게 어필할 수 있는 인물의 초상 - 가족 외에도 부처 - 이 실험적 대상인데, 보다 본격적인 형상성은 ‘그릇’이다. 전통적 도자기 형상의 이 그릇들은 인의 집적, 응집, 응결로 드러낸 방식이 아니라 낙인에 의해 표현된다. 인은 인이 존재하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상징이다. 그러나 그것의 실체는 존재와 더불어 낙인이 되었을 때라 할 수 있다. 인의 실효, 인의 존재성, 그 실체성이 표출되는 순간이 바로 낙인이기 때문이다. 인과 낙인의 관계는 존재와 실천의 관계와 같다. 모든 서류는 낙인에 의해 결정되고 현실화 된다. 낙인 없는 서류는 어떠한 실효성을 획득하지 못한다. ● 그의 낙인 회화는 그런 실효적 의미가 어떻게 구체화 될 수 있는가를 묻고 있다. 마치 시위 현장에서 서명운동에 동참하기 위해 수결하는 행위처럼 낙인은 인의 존재를 실천적 방식으로 다시 집적하는 행위다. 그런데, 작가의 의도가 그런 실천의지와 맞닿아 있는지는 의문이다. 그것이 하나의 점에 불과한 것이라면 인과 낙인의 존재성을 부정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하면, 반드시 인의 주체성을 가지지 않더라도 회화적 이미지로 치환되는 낙인의 꼴도 있을 터, 그가 제시하고 제의하려고 하는 이 행위의 근거는 무엇일까? 하나는 주체에의 개입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가 있다고 본다. 그는 작가로서 인의 성질(주체를 드러내는 도구)을 너무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다. 그의 작업들이 2002년 월드컵 응원을 위해 모인 광화문과 세종로의 시민들과 동일한 장소에 다시 모인 촛불문화제 시민들을 상상케 하는 어떤 지점을 묘파하고 있다 할 때 인의 응집은 보다 높은 차원에서 주체의지의 응결로 볼 수 있다. 그는 인이라는 주체와 그 의지를 재배치하면서 화면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그는 화면을 조직하는 조직자이자 연출자다. 그는 욕망하고 향유하는 개인의지를 매개하면서 화면에 개입한다. 그 과정에서 작가는 하나 개인이 아닌 전체의 이미지를 구상하게 된다. 이때 개인은 무시되고 주체화되지 않는다. 전체 이미지에 구속된 파편화된 점일 뿐이다. 이런 개입의지에 의해 인은 회화적 장치로 탈바꿈 되는 것이다. ● 또 다른 것은, 그런 이미지 욕구를 왜 그릇으로 표현했는지 이다. 이것은 존재의 도구를 미학적 도구로 바꿔 생각해 본 ‘나’의 형상이 아닐까 한다. 이때 잠시 고려할 것은 앞에서 언급했던 ‘나’와 다른 ‘나’라는 점이다. 앞의 ‘나’가 나의 존재 근거라면, 후의 ‘나’는 내가 편재된 숱한 ‘나’의 얼굴이라 할 것이다. 그러니까 그릇과 나는 이 경우 동의어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이 해석은 1차적 사유에서 벗어날 수 없다. 더 깊이 들어가 보자. 인이라는 오브제 즉 도구로 낙인을 해 그릇이 되었다는 것은 그릇의 미학을 적극 드러냄으로써 그동안 제기해 온 주체 혹은 존재의 상징을 물 밑 아래로 감추는 방식이 된다. 작가는 큰 화면에 오직 하나의 그릇(도자기로 만들어진)을 상정한다. ● 노자 도덕경 11장의 해제는 이렇다(신영복 역본). 서른 개의 바퀴살이 모이는 바퀴통은 그 속이 비어 있음으로 해서 수레서의 쓰임이 생긴다. 진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드는데 그 비어 있음으로 해서 그릇으로서의 쓰임이 생긴다. 문과 창문을 내어 방을 만드는데 그 비어 있음으로 하여 방으로서의 쓰임이 생긴다. 따라서 유(있음)가 이로운 것은 무(없음)가 용(쓰임)이 되기 때문이다. 이 글의 핵심은 ‘비어있음’에 있다. 결국 이로운 것은 이 비어 있음에서 오는 것인데, 이것은 ‘빔’ 즉 ‘빈 공간’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면서 존재와 비존재로 드러나는 존재론이기도 하다. 물론 그것의 해석을 있는 그대로가 아닌 상징어법의 해석에서 가능한 부분이지만. 존재를 이롭게 하는 것은 비존재의 쓰임에 있기 때문이라고 말을 바꾸어 보자. 조각이 조형을 이룬 물성에 의해 의미가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3차원적인 공간에 의해서 보다 큰 의미가 발생하고, 조형의 흐름과 그 내부 혹은 조형의 빈틈에 의해 물성의 맥락이 짚어 지듯이 존재 또한 존재의 자국, 흔적같은 비존재의 영역에서 훨씬 명확하게 그 ‘존재성’을 표출하지 않던가. 정석도가 간파했듯이 “무수한 ‘비어있음’으로 직조된 ‘채움’이라는 것도 내용적으론 같은 의미라 생각된다. 이관우의 그릇은 존재의 비존재성을 닮아 있다. 그릇에 휩싸인 존재의 낱낱은 이미 존재성을 가라앉힌 채 묵묵히 미학을 위한 도구가 된다. 그러나 감추어진 그 이면에서 존재를 찾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아 보인다.




이관우_condensation_mixed media_71×59cm_2008


문제는 있다. 이 응결의 존재성은 아시아적 상상을 키우는 특이한 소재로서 좋은 아이템인데 반해 평자가 해석하는 존재 운운의 치열함이 적극적이지 않아 보인다는 점이 그것이다. 또 하나는, 해석의 차이를 인정한다 할지라도 그가 작업에 임하는 집요함과 정열에 비해 작품의 집적이 만들어 내는 예술의지의 힘과 퀄리티가 다소 약한 것도 흠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아마도 그것은 그의 작업 개념이 몇 갈래로 흩어질 수 위험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소재로서의 인과 주제로서의 인, 형상구축의 인 등 인의 속성을 풀어가는 방식이 다양해질수록 작품의 성격은 오히려 취약해 질 수 있다는 함정을 간파해야 한다. 오히려 점진적 개념 확장을 통해 작품의 형식을 변화시키거나 내용을 만들어가는 긴 전략이 필요할 것이다. 화면을 획정하는 틀(액자)과 그 내부, 인의 집적방식, 색, 성질을 절대화 하여 군더더기 없는 시적 응축을 성취한다면 한 차원 높은 작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뿐만 아니라 인의 속성을 더 파고들어 몇 개의 개념으로 작품의 방향을 잡고, 그 갈래치기 형식을 통해 작업을 풀어나간다면 작품의 향방도 뚜렷해 질 수 있을 터이다. 그러기 위해선 서구미학의 틀보다는 아시아의 미학적 전통을 다시 살펴서 개념에 투영시키는 방법론도 고려해 보았으면 한다. 형식의 답습이 아니라 정신의 통섭이 일어나야 한단 점이다. 그의 작품들은 서구와 동양의 미학적 전통이 잘 녹아 있는 한편의 시적 구현체이면서 무거운 철학적 존재론에 치우치지 않고 현실적 양태로 승화된 하나의 자연, 인간, 생태론을 엿보게 한다.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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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천-몽유낭만산수도

홍주희展 / HONGJUHEE / 洪周憙 / painting

2008_0716 ▶ 2008_0722



홍주희_푸른 별의 아담과 이브_한지에 수묵, 채색_163×130cm_2008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_10:00am ~ 07:00pm
후원_서울문화재단,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인사아트센터
INSA ART CENTER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8번지 1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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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 속의 낙원을 찾아서 ● 홍주희의 그림은 아름답고 기기묘묘한 것들을 모두 모아놓은 듯 한 별천지를 보여준다. 산수화가 가지는 이상향적인 시공간에 현대적인 스펙타클이 결합되어 있고, 밝고 다양한 색채가 칠해진 광경에 천체의 빛이나 강한 인공광까지 가세하면서 화려함은 도를 넘는다. 예술이 가지는 유토피아적 기획이 극대화된 그것은 중용과 절제를 요구하는 현실에 반하여, 환상의 끝까지 닿아보려는 광란의 질주 극이다.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가 짙듯이, 화려함의 배후에 깔린 허무함은 실루엣으로 등장하는 은유적 주인공들에 투사된다. 2006년에 열린 ‘몽유낭만산수도夢遊浪漫山水圖’전에 이어, 2년 만에 열리는 개인전에는 기존의 전시부제에 ‘비천飛天-’이라는 접두어가 더 붙었다. 비천, 몽유, 낭만, 산수라는 어휘의 조합은 차이를 둔 반복의 효과를 통하여 더욱 짙어지는 환상의 전조를 보인다. 무한 환상 속에서 시공간의 질서는 자유롭게 재편된다. 밤과 낮이, 사계절이, 동양과 서양이, 자연과 인공이, 대우주와 소우주가 아무 모순 없이 공존하며 서로 조응한다. 고상한 문인화에서 먹의 정신성과 민화 및 채색화의 특징인 화사한 색깔과 자유로운 구성이 결합되고, 산수화에 어울릴법한 토속적인 정자 대신에 서양 동화 속 공주와 왕자가 사는 궁전이 등장하곤 하지만, 화면은 이물감 없는 통일성을 보인다. 하나의 시점에 얽매이지 않는 동양화의 관념적인 공간은 환상 속의 낙원에 존재할 법한 이질적인 것들을 넉넉하게 품어준다. 화려하지만 부질없는 환영의 느낌을 주는 자연적 모티브는 활짝 핀 꽃, 무지개 등이며, 인공적 모티브로는 폭죽이나 루미나리에 같은 도시의 야경 등이다. 이것들은 실재성이 없는 가변적인 것으로, 작품마다 서로 다른 조합으로 짜여지면서 환상적인 분위기와 기조를 유지한다. ● 홍주희의 그림에는 이러한 풍경을 향유하는 주인공이 삽입되어 있다. 주인공들은 풍경 속에 있고 관객은 풍경 밖에 있지만, 화면의 크기가 커질수록 관객들도 주인공과 같은 시점을 공유하게 된다. 입체작품은 작품 속 주인공들이 몽유의 풍경을 품은 채 3차원 현실로 뛰쳐나온 효과가 있다. 화면 속 주인공들은 보통 쌍이며 검은 실루엣으로 나타나면서 다채로운 색과 빛으로 물든 주변 환경과 구별된다. 그러나 그림 속의 장면들과 마찬가지로 실체적인 느낌을 주지 않는다. 그들은 꿈속의 인물처럼 풍경 속에서 떠다닌다. 몸통이 없는 얼굴, 실체가 없는 실루엣들이 꿈속의 인물처럼 움직인다. 정신분석학에서 꿈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심리적, 육체적인 의미에서 꿈꾸는 이의 일부로 간주된다. 작품 『상상된 낙원』 (2008)은 해변 가에 종려나무가 있는 따뜻한 남국의 이미지이다. 그 속에서 묵상하고 있는 상상의 주체가 절벽 사이에 낀 돌 머리로 나타난다. 보통 이국의 휴양지는 현실적인 낙원의 이미지와 중첩된다. 그러나 작가는 그림엽서처럼 전형적인 휴양지의 이미지를 재현하기 보다는, 스케일과 차원의 변주 보여준다. 작품 『푸른 밤』 (2008)은 달빛 아래 파도가 치는 여름 해변 가의 풍경이지만, 해저 식물을 지상으로 끌어내고, 일상적 경험에서는 낯선 각도인 정면의 소라를 거대한 산처럼 표현한다. 이러한 변주를 통해 야자수가 있는 오후의  해변 가는 우수와 기억에 물든 시공간으로 전환된다. 작품 『푸른 별의 아담과 이브』(2008)에서 시공간감은 거대한 항성과 푸른 색, 노란 색의 달들이 존재하는 우주적 차원으로 이동한다. 아름다운 지구별이나 그 안에 살고 있는 인간들은 미소한 존재로, 실루엣만으로 표현된다. 시공간은 매우 자유롭게 구성되지만, 밤은 몽환 성을 표현하기에 더욱 적절한 시간대이다. 작품 『빛의 풍경』(2008)은 도시의 풍경으로, 후경의 노을과 근경의 소나무 사이로 굽이치는 길이 보인다. 봄과 겨울이 공존하는 작품 『밤으로의 여행』(2008)은 만월을 배경으로 자전거 타는 한 쌍이 떠있는 장면으로, 순수한 동심의 시간으로의 회귀를 그린다. 작품 『밤의 무대』(2008)는 강변의 오페라 극장 위로 폭죽놀이를 하는 밤 풍경이다. 검은 실루엣으로 표현된 연주자는 현실 속에서 일시적으로 존재할 뿐인 가상의 세계를 무대로 전치시켰다. 홍주희의 그림에서 이상향을! 꿈꾸는 주체는 보통 산수화나 낭만주의 풍경화에서 그렇듯이 미소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러나 장면 자체가 관념적인 공간이라는 특징을 통해, 주체는 다시금 비대화 된다. 작품 『화려한 활주로』(2008)는 왜소한 인간과 꿈의 화려함을 극적으로 대조시킨다. 작품 『비워진 얼굴』(2008)은 비상하는 새떼가 만드는 깊은 공간의 흐름 속에 존재하는 화려한 해변 풍경을 비워진 얼굴로 표현한다. ● 입체 작품에서 주체와 객체 간의 관계는 보다 긴밀하다. 2006년 전시에서는 실루엣으로 표현된 도자 판 안에 낭만적인 산수를 그려 넣었다면, 이번 전시에서는 폴리로 뜬 입체적 구조물 위에 몽유하는 형상을 그려 넣는다. 풍경이 내부에 존재하는 형태들은 주체와 대상 간의 완전한 소통과 합일을 보여준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한 쌍으로 표현된다. 작품 『한 쌍의 사슴』(2008)은 사슴 두 마리를 붙여서 그 안에 풍경을 그리고, 뿔은 밤하늘의 별을 그려 넣었다. 작품 『한 쌍의 풍경』(2008)은 실루엣으로 표현된 남녀 한 쌍에 붙은 거대한 날개를 보여주는데 날개에는 낙원 풍경이 그려진다. 날개는 현실을 자유롭게 탈피하고 싶은 상징이며, 작품 『몽유낭만산수』(2007)에서 날개 짓과 더불어 합일하는 한 쌍의 남녀로 집약된다. 회화와 입체 작품에 등장하는 한 쌍의 존재는 현실의 모순과 갈등, 비극을 낳는 모든 분리된 것들이 합일되는 원초적인 상태에 대한 본능적 공감을 나타낸다. 기독교의 창세기를 비롯한 많은 창조신화에서 성스러움이 세속성으로 전락하는 단계는 이원적 분리를 거친다. 낙원의 회복은 존재의 통일성으로 회귀하는 것을 의미한다. 주체와 객체의 화해, 만물과의 교류가 일어나는 마술적인 장소가 바로 낙원이다. 특정한 계절과 무관하게 꽃이 만발하고, 보석 같은 별빛이 쏟아지며, 궁전 같은 거처가 있는 곳은 만물이 주체의 욕망에 즉각 화답할 준비를 갖추었으며, 현실을 지배하는 권태로움과 가혹함이 없다. 그곳은 시간 밖에 존재하기 때문에 심리적으로는 순진무구한 유년기를, 육체적으로는 생로병사와 무관한 절정의 육체를 구가한다. 가령 작품 『푸른 별의 아담과 이브』(2008)에 나오는 남녀 한 쌍은 전락하기 이전의 원초적인 순수성을 가진 인류를 상징한다. 낙원은 현세적 삶을 지배하는 노동과 금욕 그리고 소유가 아니라, 자연과 동화되는 향락적인 삶에 바쳐진다.




홍주희_비워진 얼굴_한지에 수묵, 채색_130×162cm_2008


그러나 그곳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곳’(토마스 모어Thomas More), 즉 유토피아Utopia이다. 그곳은 삶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를 추구하는 희망에 의해 구축된 장소이지만, 지금 이곳을 벗어나 떠나는 여행의 종착지는 한 장의 그림에 불과하다. 그것은 예술의 위대함이자 기만성이라 할 것이다. 산수화라는 기본형식은 자연에 투사된 이상향으로 서구의 낭만주의적 세계관과도 상통한다. 그것은 구속 없는 자유와 자연과의 조우를 의미하며, 작가는 근대 시대에 발생했던 낭만주의적 정서와 산수화의 관념성을 뒤섞는다. 예술은 이 세상에서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희망을 구현하는 주요한 매체이다. 낭만주의 이후 예술의 유토피아적 성격은 ‘부정의 변증법Negative Dialectic’(아도르노Theodor Wiesengrund Adorno)을 통해 화해의 가상을 단호히 거부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예술은 질곡의 현실을 부정하지만, 이러한 부정 속에서 어떤 가능성의 빛을 던져준다는 점에서 유토피아적이다. ● 아도르노는 완결된 사회라는 이상은 완결된 예술작품이란 이상처럼 의심스러운 것이라고 본다. 자율적인 예술, 즉 진정으로 새로운 예술의 형식의 해방 속에는 무엇보다도 사회적인 해방이 감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예술은 피안彼岸에 대한 알레고리Allegory, 진정한 행복에의 약속, 사회변혁을 위한 도식과 새로움에 대한 동경을 보여준다. 이러한 논리는 모더니즘Modernism 미학의 근간을 이루어 왔다. 그러나 한 장의 아름다운 그림에 압축된 홍주희의 낙원은 모더니즘을 추동했던 새로움과 진보에의 약속을 더 이상 믿을 수 없는 근대 이후의 세계관과 상통한다. 여기에서 하늘 아래 더 이상의 새로움은 없는 것이고, 그림은 행복에의 가상과 전격적으로 화해한다. 그녀의 작품에도 낙원이나 유토피아에 대한 희구가 있지만, 모더니즘의 그것과는 방식이 다르다. ● 홍주희는 추상화 같은 부정의 어법이 아니라, 감정 이입되는 형상이 남아있는 긍정의 어법을 구사한다. 그것은 모더니즘 예술과 더불어 근대가 낳은 쌍생아라 할 수 있는 키치kitsch에 더욱 가깝다. 어려서부터 그림을 시작한 작가는 자신이 아는 많은 전통적 모티브와 기법을 능숙하게 끌어오며, 여기에 동시대를 사는 젊은이로서의 발랄한 감수성을 보탠다. 만족의 끝없는 유예가 아닌, 지금 여기에서 감각적인 행복을 구가하려는 욕망은 주체가 선호하는 모든 것들을 한곳에 모아 놓는다. 화면은 다양한 것들이 공존하며, 같은 도상이 반복되기도 한다. 아름다운 가상 속에서 현실에 대한 도피가 이루어지며, 대용물을 통해 읽어버린 낙원을 되찾으려 한다. 시각적 포만감을 주는 도상들이 비록 한 장의 그림으로 나마 낙원을 약속한다. 그것은 자기 향수를 위해서 환상을 창조하려는 키치적 경향이다. 홍주희의 작품은 낭만주의 이후에 전개된 본격 모더니즘이 가지는 냉정한 거리감보다는 스스로 연출한 상황에 푹 빠져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무관심적인 관조의 미학이 아닌 열렬한 관심이 존재한다. 직접적인 소통의 효과라는 면에서 그녀의 작품은 고급! 문화보다는 대중성에 경도된다. 그것은 전문가적인 솜씨로 생산되어 보다 많은 대중과 소통하려는 대중문화의 요소를 가진다. 대중문화처럼 취향에 따라 긁어모아진 도상들을 동일한 차원에 배열시킨다. 독창성과 진보라는 기치 아래의 현대미술이 소통보다는 충격에 집중하면서 ‘파괴를 위한 파괴’와 ‘새로움을 위한 새로움’에 매몰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것은 더 이상 19세기 식의 ‘예술을 위한 예술’은 아니지만 그것과 닮을 꼴이다. 제도화의 보호 속에서 연명하는 고급예술로서의 모더니즘적 전략이 아니라, 민화나 만화같이 삶 속에서 강인하게 생존하려 한다. 그것은 삶과의 닮음 꼴이 아닌, 삶과의 대조를 통해 현실 속에서 자기 위상과 필연성을 정립한다. 환상은 즉물적인 현실을 덮는 아름다운 가상이 되기도 하지만, 현실 자체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다시 파악할 수 있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수수께끼 같은 환상을 즐기는 듯하지만, 사실은 현실이 더욱 수수께끼이다. 딱딱하게 굳어 물화된 현실 속에는 간파하기 힘든 요소가 있다. 그에 비하면 환상의 유희적 측면은 물화된 현실을 가변적이고 융통성 있는 것으로 만든다. 홍주희 작품의 유희적 측면은 바르트Roland Barthes가 말한, 모방적mimetic 구성과 대립되는 기호적semiotic 구성과 가깝다. 작품은 현실을 반영하거나 진실을 지시하기 보다는 어떤 완벽한 도해의 완성을 즐길 따름이다. ● 홍주희의 작품 속에 나타나는 강한 픽션Fiction적인 요소는 허구의 조작자로서의 작가의 위상을 강조한다. 상징적 도상들은 복잡한 조합의 방식을 통해 그럴듯한 가상을 연출하고, 어디선가 빌려오거나 스스로 고안한 언어적 구조물로 현실을 완전히 대체해 버린다. 기호들은 잡다하지만 통일적이고 강력한 흐름을 생성한다. 쇄도하는 기표들은 대상의 부재를 가리고 있다. 이미지화된 자연과 현실, 주체 속에서 실재는 사라진다. 거기에는 모든 심층적인 구조의 부정과 표면 위로 모든 것을 불러내려는 충동이 있다. 사실상 극도의 환상성과 비참한 현실인식은 동전의 양면이다. 작품이라는 틀 속에 현실에 부재한 것들을 기호화하여 모아놓으며, 이 만화경 같은 표면들은 사실적 지시물들을 대신한다. 그것은 대안의 현실이 되는 것이다. 이 대안의 현실은 참과 거짓으로 가늠할 수 없으며 그 자체의 전제와 맥락으로 효과를 발휘한다. 이렇게 재구성된 완벽한 환상은 현실을 다시 낯설게 조명하는 역할을 한다. ■ 이선영




홍주희_푸른 밤_한지에 수묵, 채색_100×160cm_2008


찬란한 환상의 세계 ● 창공의 별 빛에 매료되어 가던 걸음을 멈추어 본 적이 있는가? 어두운 밤거리에 저 먼 하늘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별들. 많은 사람들은 그 별을 보면서 사랑을, 행복을 노래했었다. 그러나 낮보다 밝은 밤이 유지되고 있는 지금은 저 먼 곳까지 시선을 이동하기 전에 우리를 현혹하는 발광체發光體가 도처에 놓여 있다. 온갖 자극적인 색으로 치장한 레온사인, 계절마다 찾아오는 루미나리에, 그리고 그곳에서 사진을 찍기 위해 터지는 플래쉬, 도심을 질주하는 자동차 헤드라이트, 하늘 높이 솟은 건물들에서 뿜어져 나오는 조명들, 최근 LED 등. 각종 발광체들이 밤거리를 수놓고 있다. 분명한 것은 이전의 별빛과 달빛 보다는 화려해졌으며, 따라서 볼거리가 많아졌다는 점이다. 그리고 또 하나 분명한 것은 별을 찾으며 조근 조근 속삭이던 낭만은 도심을 가득 메운 뿌연 먼지로 사라져 가고 있다는 점이다. ‘낭만浪漫’이 사라진 이 지점에 사람들은 흔히들 ‘삭막한’이라는 수사를 즐겨 사용한다. 여기서 낭만과 삭막한은 이분법적 체계로 서로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모든 것이 그러하듯 이분법으로 명확하게 구별되는 것은 없다. 단지 그 범주화를 통해 세상을 쉽게(자기의 방식으로) 보고자 하는 도구이다. 즉, 이분법은 절대적 진리가 아니다. 뿌연 먼지 속으로 별빛이 사라졌다는 것은 없어졌다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그것들은 현실계에 존재하고 있었다. 단지, 쉽게 보이지 않을 뿐이지 말이다.




홍주희_한 쌍의 풍경_FRP에 도자안료_122×250×35cm_2008


어디에나 있을 수 있는 찬란한 환상의 세계 ● 우리 삶은 낮과 밤, 의식과 무의식, 꿈과 현실 등 공존할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되는 것들로 가득하다. 그러나 이것은 자명한 사실이 아니다. 그들은 있음과 없음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그들 사이를 오가며 상호 개입하는 공간이 있다. 홍주희는 현실계와 상상계 그 중간지점에 머물러 있다. 『밤의 무대] (2008)는 ‘밤’을 지칭하고 있지만, 전혀 어둡지 않다. 어둠 가득해야할 창공에는 별빛과 달빛이 빛나고 있으며, 뿐만 아니라 땅에서 쏘아 올린 폭죽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다. 땅에는 원색에 가까운 빛을 발광하는 발광체로서 사물들이 놓여 있다. 그것들을 면밀히 살펴보면, 개별 형태는 산수풍경에서 볼 수 있는 전통 준법을 사용한 전형적인 모습이다. 그러나 그것들의 구성은 자유롭다. (중요한 것은 이 구성 논리가 자유로움을 취하고 있지만, 전통적 산수풍경과 비교했을 때 이질적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전통적인 구성에서 벗어나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자리에 현실 혹은 서구의 사물들이 마치 그곳이 제자리인 듯 안착되어 있다. 이러한 이질적인 상황들의 조우는 때로는 현실계와 때로는 상상계를 오가면서 완성된다. 이러한 특성은 [밤으로의 여행] (2008)에서도 나타난다. 이 작업에서도 홍주희는 이질적인 그러나 낯설지 않게 조우하고 있는 자신의 초현실적인 세계를 구축한다. 밤과 낮이, 동양과 서양이, 상상과 현실이 상호간 개입하면서 조우하고 있다.  ● 이번 전시의 작품들의 큰 변화는 공간의 확장이다. 이전 작업에서 두드러지게 보이는 것은 산수풍경의 전면적 배치이다. 화면 가득 전통 준법을 유지한 산수가 가득하다. 그리고 그곳에 현실적 대상들이 숨어 있듯 안착해 있다. 이러한 배치는 산수풍경이 지니는 ‘이상향’이라는 의미와 현실적 대상들의 ‘현실’이라는 의미가 공존하고 있다는 의미를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로 사용됐다. 이것에 보충물로 현실과 환상, 해와 달, 여름과 겨울, 밤과 낮이 배치되었다. 이러한 방법론은 초현실적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것에 성공적이었다. 즉, 환상적이기는 했으나, 찬란하지는 못했다. 그것이 찬란하기 위해서는 ‘이상향’에 대한 구체적 의미망을 구축해야 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다양한 공간으로 이상향이 확장되었다. 『비워진 얼굴』(2008)에서는 산수풍경은 축소되고 바다의 심연이 화면의 전면에 두드러진다. 파고가 있으며, 바다의 생물체들이 있으며, 갈매기가 하늘을 날고 있다. 『빛의 풍경』(2008)에서는 그간 숨어 있듯 존재했던 현실의 사물들이 상상적 모습으로 전환하여 전면에 나타나고 있다. 현대에서 이상향을 상징하는 루미나리에가 전통적 이상향을 상징하는 산수풍경과 만나면서 당대 현실의 이상향을 보여준다. 『푸른 별의 아담과 이브』(2008)에서는 우주로 그 이상향을 옮겨 갔다. 그곳에는 아담과 이브가 있다. 그리고 이 작업에는 에덴동산으로 유추되는 도상들이 있다. 에덴동산은 인류가 가졌던 최초의 이상향이다. 아담과 이브에게 최초 그곳은 삶의 공간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언약을 어기면서 그곳에서 쫓겨나게 되고 그곳은 더 이상 삶이 영위되는 공간이 아닌 이상향이 되었다. 『푸른 밤』(2008)은 『비워진 얼굴』(2008)과 마찬가지로 바다를 그리고 있다. 이 작업에서는 산수풍경을 찾아 볼 수 없다. 나무들도 야자수이다. 이 작업에는 산수풍경이 주는 노골적 이상향에 대한 암시가 전혀 없지만, 화면의 구성과 소재의 배치, 그리고 색의 사용을 통해 이상향을 나타내고 있다. 이렇듯 이번 전시에서는 산수풍경에 고착되어 있던 이상향의 장소를 확장했다. 그렇다고 이것은 이번 전시에서 제시한 장소가 이상향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곳이 어디이건 이상향이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장소가 아니라 그곳을 바라보는 관점에 있다. 장소가 다양하게 변하고 있지만, 그것을 다루는 홍주희의 태도와 회화적 형식은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있다. 즉, 이상향은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심정)의 문제이다.    




홍주희_몽유낭만산수_FRP에 도자안료_173×200×42cm_2007


불안하고 헤매고 있어도… ● 그림 속을 거닐던 걸음을 잠시 멈추고 잠시 눈을 들어 창공을 보자. 낭만 가득한 이상향의 세계는 뿌연 먼지에 가려 여전히 잘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해도 쉽게 시선을 거둘 수 없다. 그것은 홍주희의 작업 속에서 이곳저곳 발걸음을 옮겨 다니며 찾았던 이상향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저 먼 곳의 빛을 따라 아무 걱정없이 무심히 갈 수 있었던 시대도 행복했겠지만, 그것을 찾아야만 하는 불안감을 가지고 헤매고 있는 지금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다. 이것이 표피적이지 않은 진정한 찬란한 세계가 아닐까. ■ 이대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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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E BUG

주정아展 / JOOJUNGA / 朱姃牙 / painting

2008_0716 ▶ 2008_0730



주정아_스쿠터 보이_장지에 목탄 채색_181×227cm_2005





초대일시_2008_0716_수요일_06:00pm

주정아 추모展

관람시간 / 10:00am ~ 07:00pm





가나아트센터 갤러리 미루_Gallery MIRU
서울 종로구 평창동 97번지 가나아트센터
Tel. +82.2.720.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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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E BUG-주정아 추모展 ● 『LOVE BUG-주정아 추모展』은 주정아(1981-2007)를 기리는 유작전이다. 개인전을 앞두고 안타깝게 생을 마감한 주정아 작가는 유머와 위트로 한국화를 젊은 감각으로 재탄생시킨 촉망받는 작가였다. 작가는 인간이라면 기본적으로 갖고 있을 질투, 사랑에 대한 목마름, 일상의 권태 등의 감정을 해학적으로 표현한 작품을 통해 자신과 그리고 그림을 보는 모든 이들이 웃음과 함께 인생을 관조하는 태도를 얻을 수 있기를 희망하였다. 이번 유작전은 주정아 작가의 작품세계를 조망하는 동시에 작가의 희망이 이루어질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주정아_쯧, 쯧, 쯧_장지에 목탄 채색_130×262.2cm_2006



주정아_love bug-올드미스_장지에 목탄, 천연염색_46.5×54cm_2006



주정아_노란가을_장지에 목탄_130×130cm_2006


비슷한 말로 위트가 있어 똑같이 웃음을 인식하고 표현하지만 위트가 순수하게 지적 능력인 데 반해 유머는 그 웃음의 대상에의 동정을 수반하는 정적인 작용을 포함하고 있어 인간이 지닌 숙명적인 슬픔을 느끼게 하는 데 그 특색이 있다.




주정아_이 죽일 놈의 연애_장지에 목탄_34×23cm_2006



주정아_개도 남자다_장지에 목탄_100×100cm_2006



주정아_love bug-복서_오선지에 목탄, 꼴라쥬_50×50cm_2006


높은 곳에서 초연한 태도로 내려다보며 인간의 어리석음을 웃어젖히는 웃음이 아니라, 인간의 어리석음을 가가대소 하면서 그것이 자신을 포함한 인간들의 슬픈 천성이라는데 연민과 사랑을 던지는 약간 복잡한 웃음이다. 그런 뜻에서 위트처럼 단순히 눈앞에 보이는 하나하나의 현상에 대한 반응으로서 나타나는 데 그치지 않고 보다 포괄적인 인생관조의 한 태도에 직결된다고 할 수 있다. ■ 주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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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경계

박주경展 / PARKJOOKYUNG / 朴珠囧 / photography

2008_0712 ▶ 2008_0726



박주경_드라마-경계_2008




Mid-Party_2008_0719_토요일_07:00pm

즉흥음악공연과 퍼포먼스 예정

관람시간 / 11:00am~08:00pm





요기가 표현 갤러리
EXPRESSION GALLERY YOGIGA
서울 마포구 합정동 412-1번지 B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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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경계’에 부쳐(‘드라마-경계’는 작가가 부친 전시명이다.) ● 오늘, 우리는 우리의 삶이 도대체 무엇인지 모른 채 살아간다. 아마도 이처럼 되묻는 질문은 오랫동안 그때그때 마다 자신의 삶에서 그 질문이 유효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같은 어려움을 주었을 것이다. 우리에게 어려움은 여전히 ‘모른다’에 걸려 있다. 자신의 삶인데도 불구하고 그러하다. 예술가들에게 있어 한없이 자유로운 상상력을 허용하게 되는 것은 ‘도대체 모른다’에 대한 시각적 앎을 사회가 요구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가장 탁월한 예술적 대응 방식은 물론 ‘글’을 이용하는 예술적 기능이다. 글이 만들어내는 시각성은 닫쳐지는 법이 없이 자유롭다. 이에 비해 시각 그 자체를 표현매개로 삼는 모든 예술형식은 근본적으로 상상력에서서 열악하다. 회화가 그렇고 사진은 더 할 나위 없이 그러하다. 아무래도 우리가 사진 한 장에 담겨진 것에 대해 ‘아마도 그렇게 있을 것’이라는 신뢰를 가지기 때문에 사진에서 작가의 자유로운 상상력은 늘 한계를 가진다. 물론 다른 예술장르와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그렇다. ● 예술가에게 있어 창작의 소재가 되는 것들은 저마다 제 각각이 ‘그 대상파악의 한계’ 안에서 창작동기로 재가공 된다. 당연히 사물을 다루는 소재와 인간을 다루는 소재는 예술가에게 전혀 다른 이해방식으로 접근을 허용한다. 동시에 예술가들은 완전히 다른 이해방식으로 그것들을 스스로 창작동기화 시킨다. 인간이 대상이 될 때, ‘행복한 사람’은 최소한 ‘행복해 보이는 듯 한 한 사람’으로 그 표현 가능한 창작동기가 소재에 맞물려져 있다. 그러나 ‘인간의 행복’ 또는 ‘행복한 삶’을 다루려 할 때 예술가들은 같은 방식으로 창작동기를 스스로 소재에서 동기 부여할 수 없다. 그럼으로 예술가들은 삶을 묘사하거나 어떤 설정으로부터 드러낼 때 그것을 보편화시키지 않는다. 예술가 자신이 만들고자 하는 예술창작의 동기를 스스로 만들어 내는 한, 그러한 소재에 관심을 가지면서, 창작되어지는 최종적인 표현결과는 언제나 딱 ‘그것만 한 것’으로 규정될 뿐이다. 이 부분에서 사진은 가장 취약한 표현 기법이다. 사진은 그래서 다큐멘터리에 대한 가장 탁월한 방식이자 상상력의 제한이라는 측면에서 가장 취약한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진은 상상력 안에서 그 기능적 한계를 극복하려 할 때, 그래서 부연되는 ‘글-맛’을 필요로 한다. 발터 벤야민은 이런 측면에서 “단 한 줄의 설명이 없는 사진은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 한다”고 사진의 속성을 간파했는지 모르겠다. ● 박주경은 사진으로 자신의 첫 번째 개인전을 만들면서 기이한 상상력을 동원하고 있다. 그 상상력은 사진에 대한 일반화된 견해들을 뒤집는 상상력이 아니다. 또한 애초에 예술가에게 주어진 기능으로서 사진에 대한 상상력이 아니다. 기이함은 상상력이 발휘되는 장소성에서 비롯되고 있다. 따라서 그의 상상력은 사진이 있어야 할, 가장 사진다운 조건 중 하나로서 ‘사진이 있어야 할 장소성’에 걸려 있는 것이다. 장소성이란 공간의 다른 이름이 아니다. 장소는 ‘무엇이 있어야 할 곳’으로서 최소한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는 그런 성질을 요구한다. 하나는 ‘그 곳’이어야 할 이유다. 둘은 그 곳에 ‘있어야 할 무엇’과 관계다. 셋은 그곳에 있어야 할 ‘그것의 적절한 시간’이다. 따라서 박주경은 자신의 사진작품에서 이 장소성을 묻고 있다. 웨딩사진이라는 ‘시각적 앎’을 하나의 단서로 제공하면서 그러하다. 이 세 가지 성질을 묶으려하는 상상력이 그래서 기이한 것이다. 이러한 기이함은 언제나 상상에서만 가능하며 하필 그는 사진을 매개체로 삼아 상상력을 통해 알게 된(작품) 삶의 단면을 말하려 한다. “웨딩”(wedding)이라는 소재를 가진 사진(?)들을 가지고서 말이다. ● 박주경의 작품은 그 결과물로서 사진의 구성과정이 이미 ‘판단’이 아닌 ‘해석’을 향해 있다. 판단할 수 없는 대상이란, 그것도 판단할 수 없는 예술작품으로서 ‘대상화 됨’이란 판단하려는 모든 시도들을 무효화 한다. 가령 진정한 사랑에 대해 말 할 때, 이미 ‘그 사랑’은 대상화되지 않을 뿐 아니라 어떠한 대상화의 시도도 거부한 채, 대상화된 판단을 무효화 하고 있지 않는가 말이다. 그렇게 그의 작품은 판단을 거부한 채 ‘해석’으로서 열려져 있을 뿐이다. 이는 사진이라는 매개체 안에서 이 작품들이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을 먼저 말하는 것이다. 박주경이라는 이 작가가 내 보이는 것은 사진이 아니라 ‘사진이라는 하나의 사태’다. 이 사진(들)은 사진첩에서 꺼내 보는 그런 사진으로 우리에게 제시되지 않았다. 이 사진(들)은 ‘작품’으로 우리에게 제시되는 한 “웨딩”이라는 사건으로부터 사진으로 결과지어진 ‘그 곳’(예식장, 결혼식 날-그 장소, 신부와 함께 한 그 곳)에 어떤 부연(敷衍)을 달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동시에 ‘그 사람들’(신부까지 포함해서)은 그 곳에 모인 관계로부터 “웨딩”이라는 사건을 부연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웨딩사진”인 한 딱 들어맞는 ‘시간’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기념촬영은 그 시간을 기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박주경의 사진은 이 부연되고 있는 것들을 당연시 하는 것 그것을 문제 삼는다. ● 대개의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이 하나의 사물을, 하나의 정치(精緻)한 상황을(이것은 사건이다!) 또는 하나의 의미를 메시지로 다루고 있다고 판단한다. 그것은 좋은 그리고 옳은 예술가적 판단이다. 그러나 작품은 항상 하나의 사건만을 다룰 것인가? 작품 제작행위의 동기와 창작동기의 유발성은 그렇다면 사건이 전제되는 한 사건의 충족 조건일 뿐인가? 우리는 항상적으로 모든 결과를(그것이 정신의 영역일지라도, 추상된 그 것일지라도)대상화 하려는 경향이 있다. 오랜 서구 이성주의의 폐해가 아닐 수 없는 이 지경에서 우리의 각성은 이제 대상화된 사유를 사유 자체로 파악하려는 노력으로 치환되어야 한다. 그것은 예술의 새로운 영역이다. 사실 이 부분을 예술가들은 모른다. 그들은 자신의 창작방법론이 타고난 재능으로 착각할 뿐이다. 그러나 그런 재능은 재능이 아니다. 재능은 하나의 사태를 만들어 내는데 긴요하지 대상을 세련되게 만들거나 표현하는데 연관되지 않는다. 서커스에서 고공 줄타기 하는 재능을 보아라. 옛 민예품에서 발견되는 장인의 재능을 보아라, 그러한 예술가의 당착된 재능은 정확하게 말하자면 숙련된 기능적 세련됨이다. 재능이란 이야기를 만들어 그 말빨이 살아있게 하는 것이고, 사건을 보고서 그 앞뒤좌우의 정황을 읽어내는 사태에 대한 이해다. 예술가에게 필요로 하는 재능은 그와 같아서 재능 있는 작가의 작품은 언제나 사건을 드러내지 않고 하나의 사태를 드러낸다. 그 차이는 크지만 누구나 이를 판별할 수 없다. 예술가 스스로도 그러하다. 그런 의미에서 사진은 그 자체로 하나의 사태이어야 한다. 하지만 사진작가 중 누가 자신의 작품을, 제작 전 과정을 하나의 사태로 이해하고 있는가? 사태(事態, the state of the thing)는 모든 연관 안에서만 밝혀진다. 그럼으로 예술가는 모든 연관을 다루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의 재능은 그것에서 재능답게 드러난다. 예술가는 그럼으로 사람에 대하여 질문한다. 생각해보라, 유리컵이나 짱돌 또는 코끼리가 연관에 대하여 물음을 가질 수 있는가? 예술가는 그래서 항상 사람을 바라본다. 정시(正視)함은 예술가의 사태파악 결과인 것이다. 박주경은 무엇을 정시하는가? 그가 사진으로 다루고 있는 이 사태는 우리의 삶에서 무엇을 드러내고 있는가? 동의할 수 있나? 아니면 지나칠 뿐인가? ● 예술작품은 오늘 날 보고도 본 것으로 알 수 있다고 할 수 없다. 의미를 담아내는 담지자로서 예술가와 예술작품이 역할하기 때문이다. 또는 실재로 알 수 없는 것들로서만 가득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삶’을 문제 삼는 예술가와 그것을 다루고 있는 예술작품은 단박에 알아차릴 수 없다 할지라도 궁극적으로 알 수 없는 것은 없다. 박주경은 자신의 개인전에 몇 가지 부연을 달아 이 거북한 소통을 서로 터놓으려 한다. 이 글은 그 부연을 읽어 해명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다만 부연을 소개하자면 이렇다. “웨딩”을 기념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기념은 제 각각의 삶 안에서 보편적으로 정당한가? (태어남과 죽음을 기념하는 것과 단순히 비교해보아도 그러하지 않은가?) “웨딩”의 성립은 최소한 사진으로 기록되어지는 한 무엇인가? 대개의 기념사진이 가지는 사진 그 자체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이러한 부연들로부터 우리는 장소성을 문제 삼았던 박주경의 기이한 상상력과 어떤 연관을 만들어내면서 ‘해석’을 시도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이 전시에 부치는 ‘물음’이면서 동시에 이미 우리 앞에 놓인 단순하고도 분명한 ‘삶에 대한’ 하나의 현답이기도 하다. ■ 이섭

전시는 내가 부케를 들고 예식장 앞에서 찍힌 스냅 사진으로 시작된다. 뒤에 펼쳐지는 사진들은 모두 다른 신부 대기실 안의 풍경이다. 단조롭고 익숙한 풍경. 그 속에서 관객들은 내가 모두 다른 신부들과 신부친구들 사이에 섞여 같은 자세와 표정으로 찍혀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이상하다. 전시 제목은 <드라마-경계>인데 모든 사진이 너무나 일상적이다. 경계를 보여주는 지점을 찾기도 쉽지 않다. ● 나는 관객들의 손을 잡고 다시 한 번 전시장 안으로 들어간다. 한 장의 사진 속에서 신부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신부친구들의 표정을 관찰하고, 다음 사진과 비교해보며 반복되어지는 신부친구들을 찾아보라고 귀띔한다. 그리고 내 자신이 27살이던 해에 모두 40여 번의 친구결혼식에 참석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나와 친구들(신부도 포함해서)의 나이가 모두 달라 보인다. 이상하다. 일상적인 풍경인데 한참을 쳐다보고 있으니 갑자기 사진 속 저 관계들이 낯설고 어색해진다. ● 나는 끝끝내 관계의 비밀을 밝히지 않는다. 그대로 삶의 경계에 내버려두려고 한다. 내가 원하는 방식은 사진을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사진이라는 사태로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 박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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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 QUINN

마크 퀸展 / MARC QUINN / painting.sculpture

2008_0711 ▶ 2008_0803



MARC QUINN_RHONE VALLEY CATARACT_캔버스에 유채_169.5×263cm_2008




초대일시_2008_0711_금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가나아트센터
서울 종로구 평창동 97번지
Tel. +82.2.720.1020
www.ganaart.com






마크 퀸의 작품 가운데 내가 제일 처음으로 보았던 것-그리고 이것은 국면의 전환에 불과했다-은 작가의 얼린 피 4리터로 자신의 두상을 본떠 만든 작업 「Self」(1991)였다. 이 첫 만남은 휑하고 무표정하며 비행기 격납고마냥 널찍한 런던 사치 갤러리에서였다. 영하의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했을 유리 상자 너머로 우중충한 브라운 톤의 얼굴이 파라오의 험상궂은 태곳적 눈빛을 하고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작품의 재료에 대해 모르고 있던 상태였지만 나는 작품의 구성에서 어딘지 불안하면서 본능적인 무언가를 느꼈다. 얼룩덜룩한 색채, 표면의 깊숙한 균열들, 꾹 감은 눈. 이 모든 것들이 음침하고 불길한 프락시스, 형태와 내용의 불유쾌한 결합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 최근에 보았던 작품은 아직 완성단계 전의 것들이었다. 작가는 열혈 보디빌더, 극단적인 신체 변형자나 극성 성형수술 자처럼 독특한 외모를 가진 인간 군상들로 조각 작품을 만들기 위해 센트럴 런던에 있는 자신의 작업실에 드로잉, 사진, 노트들을 모으고 있다. ● 1991년부터 현재까지 마크 퀸은 엄청난 양의 작업을 해왔고 그럼으로써 아방가르드의 변방으로부터 문화적 중심의 위치로 옮겨왔다. 이처럼 비타협적이고 지적인 현대 작가치고는 전대미문의 행보였을지 모른다. 2006년 그는 무게가 15톤에 달하는 대리석 조각 「Alison Lapper Pregnant」을 런던 트라팔가 광장의 네 번째 기둥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 이후 지금까지 그곳은 비워져 있다. 중증장애를 가진 임산부를 실물 크기의 몇 배로 확대하여 표현한 이 작업이 넬슨제독이나 네이피어 장군 같은 영국의 국민영웅들이 입성해있는 곳과 동일한 공공광장에 들어서게 되어야만 했다는 사실은, 마크 퀸의 작업이 성취한 무게가 어느 정도인가 뿐만 아니라 그 작업이 지닌 대단한 타당성까지 방증한다. ● 마크 퀸은 골드스미스 대학 출신이라는 출발선상의 공통분모가 없음에도 ‘YBAs’로 불리는 젊은 개념주의 예술가군(데미언 허스트, 트레이시 에민, 사라 루카스, 앵거스 페어허스트 등)에 속하는 작가로 분류된다. 1988년 데미언 허스트가 기획했던 『프리즈』展에는 참여하지 않았으나 1997년 로열아카데미의 『센세이션』展이 열릴 즈음에는 트레이시 에민, 데미언 허스트와 함께 당시 영국미술의 새로운 흐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표 작가 3인 방으로 당당히 군림하게 된다. ● 확실히 마크 퀸과 일부 YBAs 작가의 작품 사이에는 근친성이 있다. 특히 허스트의 경우처럼 신체, 죽음, 조각상의 미에 대한 집착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그만큼의 두드러진 차이 역시 존재한다. 마크 퀸이 본격적인 작가로 출발하기 전의 시기와 그에게 영향을 주었던 요소들이 부분적으로나마 이 차이에 대한 설명이 될 것이다.




MARC QUINN_solar Activity Monitor_캔버스에 유채_168×169.5cm_2008



MARC QUINN_Hudson River Tide Line_캔버스에 유채_169×256cm_2008


마크 퀸은 캠브리지 대학에서 역사와 미술사를 전공했다. 나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예술계 쪽으로 접어든 것은 상당히 이른 시점이었으나 이목을 끌만한 작품을 ‘제작’하는 작가보다는 자신에게 적절한 매체를 찾기 위해 예술적 노력의 기록과 자취들을 찾아헤매는 원형개념주의자(proto-conceptualist)에 가까웠다고 말한다. ● 자신의 신체를 작업의 출발점으로 삼게 된 동기 역시 다음과 같은 이유이지 않을까 한다. 곧 그것은 신체적 경험의 중심성에 대한 어떤 관습적인 반응도 아니었고,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 같은 전형적인 공식의 답습은 더욱이 아니었으며, 다만 작가 자신이 좌지우지 당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그가 장악할 수 있는 어떤 것을 가지고 작업해야 할 필요성 때문이었다. 이것 외에도 작가가 경험했던 알코올중독 증상이 있었다. 정신을 병든 신체가 던지는 광폭한 요구의 꼭두각시, 노예로 만드는, 신체를 상하게 하는 그 질환. 과장된 발언일 수 있겠지만, 이 알코올중독자의 세계인식 체험이 자신의 신체를 한층 더 객관화하고 나아가 그것을 인공물처럼 만들고자 하는 마크 퀸의 충동을 형성했으리라 충분히 예상해볼 수 있을 듯하다. ● 마크 퀸의 첫 번째 시기-「Self」를 필두로 하는-는 무수히 다양한 작가의 ‘아바타’들로 이루어져있다고 말해도 무방하다. 그는 빵으로 자기 모습을 만들었고, 자신의 배설물을 이용해 자신 얼굴 모형을 제작했으며, 자신의 신체를 모델로 투명한 모형을 만들어 와인을 가득 채운 뒤 비워버렸다. 유리를 불어 만든 섬세한 형태 속에 작가의 신체 일부-페니스, 토르소, 머리 등등-를 수은으로 만들어 집어넣기도 했다. 더욱 특이한 것은 신체 모형을 뜰 때 썼던 재료에서 뜯어낸 부스러기로 만든 작품들이다. 작가는 이 거품과 고무의 탈피들을 ‘간(肝) 없는 생명체의 사례들’이라고 묘사했다. 이것만이 아니다. 자신의 얼굴과 두상을 뜨고 남은 빈 틀을 활용한 작품도 있었고, 무엇보다 가장 도발적인 작품이라면 자신의 배설물로 온갖 얼룩과 소용돌이, 아라베스크를 커다란 캔버스 가득 그려놓은 작품 「Shit paintings」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 전반적으로 볼 때, 「Self」작업들은 프란시스 베이컨이라는 막강한 영향력의 아버지를 뒤잇고자 했던 어느 현대 영국 작가의 누구보다 꾸준한 노력의 산물이다. 하지만 추상 시대의 위대한 구상화가 베이컨은 인체형태 속에 내재한 심리적 내용을 드러내고자 3차원 공간 속에서 피사체를 회전시키는 방식으로 인체 형태를 왜곡했다. 반면, 마크 퀸은 재료, 시간, 정체성 의식 등을 돌려가며 자신의 신체형태를 왜곡했고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겉으로 보이는 모습을 배반하는 것들에 항상 매료되어 왔다. 빵을 이용해서 조각-빵 두상-을 만들고, 청동으로 형태를 떠서 표현주의적인 청동조각처럼 보이도록 했다. 조각의 형태는 순전히 빵이 구워지는 과정에서 생긴 자의적인 효과에 의한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전복시키는 것을 좋아 한다… 이것과 저것의 경계지점에서 나타나는 것들을 사랑한다.”




MARC QUINN_Nile Flood_캔버스에 유채_169.5×263cm_2007


1980년대 후반부터는 새로운 작업들이 등장한다. 「Self」 작업과 분명한 단절을 이루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면서 크게 “나와 타인”이라는 주제로 묶어볼 수 있는 작품들이 선을 보였다. 이 변화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은 미우치아 프라다를 위해 제작된 「Garden」(2000)일 것이다. 몇 개의 극저온 유리상자 안에 나눠 담겨 결코 함께 자랄 수 없는 식물들로 만들어진 이 정원은 분명한 미학적 규범에 부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낯설고 비현실적인 미를 보여준다. 작품은 관객들을 마치 갤러리에 갇힌 앨리스처럼, 빨간 하트 여왕의 장미정원에서 추방당한 뒤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숲들 사이를 여기저기 떠도는 상태로 이끈다. 「Garden」은 2000년 이후부터 마크 퀸을 사로잡기 시작했던 환경에 관한 질문들(‘관심’이라는 표현은 이 자리에서 쓰기엔 지나치게 선동적이다)을 뚜렷이 예고하고 있다. ● 그러나 마크 퀸의 작업을 이러한 도식으로 환원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은 일이며 나아가 주요 대표작들만큼이나 그의 작품세계를 특징짓는, 주된 몸통으로부터 뻗어 나온 무수한 곁가지들을 무시하는 일이 된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관절이 탈구된 동물사체를 표현한 브론즈 작품, “고기 조각(meat sculptures)”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기괴한 형상을 취한 생체부위들은 기념비조각의 파괴된 흔적들을 연상시킨다. 또는 작가의 피를 얼려 화병을 만들고 그 안에 얼린 난초 생화를 꽂아두었던 「Ressurection」 (1999) 같은 작업에서처럼 작가/작품의 혼융을 심화시키려는 일관된 시도를 떠올리게도 된다. ●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나에게 작품이란 두뇌구조와 같다. 나의 작업들은 모두가 신경세포 같은 연결 망들로 이어진다. 새로운 작품은 태어나는 것도 그 안에서이다. 다른 작품들에서 신경망이 촉발되어 나와 내가 제작 중인 새로운 작품을 창조하는 것이다. 그 때 작품은 제 스스로 당신에게 무언가, 당신도 알지 못하는 무언가를 말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따분한 전시가 되고 만다.”




MARC QUINN_Meditation on Illusion_브론즈에 채색_81.5×43.5×64.5cm_2007


하지만 2000년도 중반에 이르면 마크 퀸의 작품세계를 구성하는 세 가지 주된 흐름이 굵직하게 부각되기에 이른다. 이번 전시는 그 흐름들을 대변한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과학일반,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첨단 테크놀로지가 인간의 -인간으로서의 인간인, 그리고 세계 안에서의-자기 인식에 미친 영향이다. 마크 퀸이 시대정신에 입각한 작가임은 더 이상의 부연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또한 앞으로도 누구든 「The Selfish Gene」(2007)이나 「Early Self-Portrait」(2007), 「Big Bang Pop」조각 두 점-「Tarantual Nebula」와 「White Dwarf」(2006)등을 보게 된다면 그 작품들을 인간게놈의 ‘배열’과 함께 ‘배열’시키는 데 조금도 어려움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이것들의 명증한 설명성-뭉개진 표면이나 다듬지 않은 가장자리는 일절 없으며, 질감 역시 정확히 필요한 곳에 표현되어 있다-일종의 개념적 냉담함의 표현이다. ● 「Big Bang Pop」에 대해 마크 퀸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그 작품들은 ‘팡’ 터지는 폭발의 순간에 포착된, 그래서 이미 그 자체로 ‘폭발’ 조각이라 할 수 있는 팝콘의 핵들이다. 나는 팝콘을 컴퓨터로 스캔한 뒤 팝콘의 폭발을 정확히 묘사한 시뮬라크럼을-로봇이 하듯-조각하는 데 그 정보를 활용했다. 나는 그 작품들이 정지된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 대체로 환경을 주제로 했던 작업들, 예컨대 이번 전시에 등장하는 대형 꽃 그림이나 화분식물들로 대표되는 작업과는 달리, 청동으로 형태를 뜨고 크롬으로 마감한 돌연변이 식물들-난초에 열린 토마토-은 ‘접합’이라는 정원사가 키우는 정원을 보여준다. 이 작품들은 정지순간이 아니라 오히려 시간으로부터 추상화된 순간에 가깝다. 마치 외계행성의 어느 크레이터에 건설된 인류문명이 낯선 침입자들을 골탕 먹이거나 어떤 정보를 주기 위해 남겨놓은 유적처럼 보이는 이 작품은, 혹 아서 클라크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나온 정체 모를 진화 촉매제 모놀리스에 대한 작가의 재빠른 응수일지 모를 일이다.




MARC QUINN_Marie Antoinetten_빵, 브론즈_124.5×40.6×30.5cm_1989


마크 퀸은 반자연적인 것에 대한 자신의 이 같은 천착에 대해 다음처럼 말했다. “그것들은 욕망과 진화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지금 자연 속에서는 절대 같은 시간대에 존재할 수 없지만 순전히 인간의 욕망 때문에 시장에서 같은 날 한꺼번에 구입할 수 있는 이런 다양한 종류의 행성들을 가지고 있다.” 내게 이 말은 쇼펜하우어의 세계관 그리고 모든 생명은 존재하기 위해 영원한 투쟁 중에 있다는 도교적 관점을 떠오르게 한다. ● 작가의 생각은 이렇다. “그들은 생성되기 위해 투쟁 중이다. 하지만 그들이 실제 무엇이 되는가를 결정짓는 것은 우연이다. 내가 「Self」에서 마음에 들었던 것은 이 조각이 철저히 어떤 하부시설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전기가 나가면 이 조각은 망가지고 만다. 작품이 녹아버린 다음 누군가가 ‘형상이 어디로 갔소?’라고 묻는다면 ‘아무 데도 가지 않았다’고밖에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과거에는 존재했지만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나에게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대단한 은유로 다가왔다. 인간은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아무 데도 가지 않는다. 단지 존재했다가 지금 존재하지 않는 것뿐이다.” ● 정체성, 선천적 본성 대 후천적 양육, 우주의 기원과 특정 장소의 기원. 키메라, 반인반수, 그리고 돌연변이. 「Beauty and the Beast」(2005)이나 「To Be or Not to Be」(2006) 등의 작업들, 상호참조적인 텍스트로서의 타이틀, 게슈탈트를 구성하는 재료와 주제. 이런 것들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머릿속은 어느덧 과거나 미래로 이어지는 통로들을 동시에 헤매게 되고, 개체의 필멸성과 종의 사멸이라는 문제를 직면하게 된다. 하지만 현재 마크 퀸의 작업이 보여주는 세 가지 흐름 중 가장 두드러진-그리고 심지어 충격적인-것은 영국의 수퍼모델 케이트 모스의 신체를 모형으로 뜨고, 변형하고, 개조한 작품이다.




MARC QUINN_To Be or Not To Be_브론즈_26.7×15.2×12.7cm_2007


이번 전시에는 10세기에서 12세기의 남인도 촐라 왕조를 연상시키는 「Endless Column」의 모핑 이미지에서 순금 조각 「Siren」의 모형에 이르기까지, 케이트 모스를 모델로 한 작품들이 다수 있다. 이 부분에서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인용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듯하다. 2007년 봄 나는 그와 함께 유명한 “모아이”, 곧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어느 고대문명의 종교적 삶에서 핵심을 차지했던 그 거대조각상을 보기 위해 태평양의 이스터 섬을 방문한 적이 있다. 이 거의 훼손되지 않은 오지만디아스들을 보는 동안 작가는 현대의 유명인사 숭배와 과거의 제의적 예술작품의 관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 “나는 조각 작품이 만들어지고 그것이 무엇에도 점유되지 않는 방식, 오로지 그 안에 정신이 깃드는 과정에 흥미가 있다. 촐라 청동상 같은 고대인도 조각들을 보라. 이 조각들은 남신과 여신을 표상한다. 적절한 조건만 주어진다면-제대로 씻기고 올바른 장소에만 놓는다면-그것들은 신이 된다. 온당하지 않은 곳에서는 고철 조각에 불과하다. 바로 5분전에 그것을 경배했던 사람들이 지금은 아무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내가 만든 케이트 모스의 조각들도 같은 기능을 수행한다고 본다. 그 조각들은 우리의 욕망과 열망이 깃든 이미지이다. 그리고 나는 그 이상이라고 말하고 싶다. 곧 어느 면에서 모든 구상조각들은 우리의 정신적 갈망이 담기기를 기다리는 빈 그릇인 것이다.” ● “케이트 모스의 조각을 제작하면서 내가 매료 당했던 부분은 그녀가 내게 현대판 여신처럼 느껴진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가진 많은 문제들 중 하나가 우리의 신들이 그 안에 어떤 도덕적, 영적, 형이상학적 구조를 가진 신성이 아닌 인간의 욕망을 채워놓았다는 점이었다.” ● 케이트 모스가 신격화된 상은 「Siren」일 것이다. 이 실물 크기의 순금 18캐럿 조각 작품-고대 이래 가장 큰 순금 조각-은 완성되고 나면 명성이라는 마크 퀸의 합성 종교가 지닌 잠재적 함축을 훌륭히 현실 속에 실현할 것이다. ● 올 봄에 있었던 마크 퀸의 가장 최근 전시 『Evolution』에서 나는 그가 자신의 작품이 전개되고 발전되는 과정을 어떻게 보고 있느냐에 관련하여 광범위한 대화를 나눌 기회를 가졌다. 앞에서 말한 내용들을 차분히 되짚어본 후, 우리는 그의 작품들이 한편으로는 구체적이고 특수한 대상들-신체, 유기체, 물질-을 여전히 다루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어떻게 자체적인 내러티브, 신화적 성격을 띤 내러티브를 구축하기 시작했는가 하는 문제로 되돌아갔다. ● 그는 말했다. “글쎄, 신화란 사회의 꿈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꿈은 개인의 신화이다. 케이트 모스의 조각과 관련하여 내가 흥미 있어 했던 부분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 신화적인 이미지, 우리가 지닌 꿈의 일부지만 만질 수도 볼 수도 없는, 그저 부유하는 이미지인 그것을 만들어보려는 시도. 꽃 조각을 만들었을 때 했던 생각도 다르지 않았다. 움직이지 않는 꽃을 얼리는 순간, 그것은 실제 사물로부터 이탈되고 분리된 이미지가 된다. 우리가 ‘케이트 모스’라고 알고 있는 것은 한 사람의 인간 케이트 모스로부터는 분리된 그녀의 이미지일 뿐이다. 이미지는 마치 블랙홀처럼 정신의 에너지를 빨아들이는 거대하고 혹독한 무엇이 되었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속에는 자신을 형상화하는 이미지를 만들고픈 본능이 사실 있는 것 같다. 바로 그래서 우리는 이미지를 만들고 또 이미지는 우리를 만들지 않는가.” ● 이 말은 퀸의 작업을 직접 그리고 아마도 처음 접하게 될 관람자들에게 가장 적절한 출발점이 되어 주지 않을까 싶다. “우리는 이미지를 만들고 또 이미지는 우리를 만들지 않는가?” 이것은 기분 좋게 당황스러운, 그리고 겸손하면서도 야심만만한 명제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마크 퀸이 현대 서구사회의 한복판이라는 작업 현장에서 연구를 수행하는 인류학자로서 자신의 임무를 어디까지 수행할 수 있는가를 암시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 by WILL 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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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nning-진지한 유희

박정홍展 / PARKJUNGHONG / 朴正洪 / ceramics

2008_0705 ▶ 2008_0805



박정홍展_2008




초대일시_2008_0705_토요일_05:00pm

한향림갤러리 기획展

기획_이진숙

관람시간 / 11:00am~07:00pm / 토~일요일_11:00am~08:00pm





한향림갤러리_Hanhyanglim Gallery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법흥리 헤이리 예술마을 A-1-1
Tel. +82.31.948.1001
www.heyrigallery.com






예술 작품의 감상은 관찰자 쪽에 제작자 못지않은 상상력의 활동을 요구한다. 이것은 예술가의 정신과 관람자의 정신이 창조활동에 서로 관여한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다. 예술가의 창조성은 관람자를 필요로 하고, 관람자의 입장에서 예술은 다양한 차원에서의 경험을 제공해준다.




박정홍_2007 기록_17×23×23cm_2007


한향림갤러리 기획 박정홍 도예전 『punning : 진지한 유희』는 주목받는 젊은 작가 ‘박정홍’의 첫 번째 개인전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가 직접 만든 기호체계인 ‘색상 바코드’를 이용하여 일상에서 느꼈던 진지한 감정들을 기호화하고, 그것을 언어유희로(punning) 재치 있게 표현하는 과정들을 선보인다.




박정홍_기호 체계



박정홍_blooming(memento mori)-꽃 피 어 나 며_지름 8×20cm_2008


「blooming(memento mori)-꽃 피 어 나 며」 ● 작품의 내용은 각각 화병에 한 글자를 반복해서 ‘꽃’, ‘피’, ‘어’, ‘나’, ‘며’ 라고 쓰여 있다. 각 화병의 바닥에는 ‘메’. ‘멘’, ‘토’, ‘모’, ‘리’ 라고 글자가 숨어 있으며, memento mori는 ‘죽음을 기억하라’라는 라틴어 구절이다. ● 작가는 도자기 ‘그릇’이라는 고유의 영역에서 출발하여 색상 바코드가 만들어 내는 아이러니한 표현, 즉 개체로 나열되어진 의미가 서로 합쳐지면서 만들어 내는 이중적이면서도 새로운 메시지를 작품 안에서 풀어내고 있다.




박정홍_mother love-당부_13.5×31×10cm_2008


「mother love-당부」 ● 이것은 과일 그릇이다. 어느 날인가 전화통화를 하던 중 엄마께서 "과일도 꼭 챙겨 먹어"라고 말씀 하신 적이 있다. "밥은 먹었니?"라는 말은 자주 들었기 때문에 그냥 인사처럼 들렸었지만, 그 날 들었던 그 말은 조금 다른 느낌을 갖게 했다...




박정홍_2008 기록 접시_5×43×28cm_2008


유희는 단순한 오락이 아닌 차원에서 진지한 것일 수 있다. 박정홍의 기호화된 언어들은 단순한 오락차원이 아닌 언어유희(punning)의 진실성을 추구하며, 작품에 담긴 작가의 언어세계에 관람객이 함께 참여하기를 희망한다. 또한, 작가 삶의 흩어진 일상을 소재로 하여, 관람자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려는 제스처(gesture)를 취하기도 한다.




박정홍_2007 기록_지름 37×8cm_2007


예술은 일종의 유희이며, 예술가와 청중이 함께 작품 감상에 직접 참여한다고 생각한다. 그 의미는 개념화하거나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상징적인 것이다. 즉 그것은 단순한 오락을 넘어서 관람자의 창조적인 자유유희를 이끌어내는 것이며, 작가 그리고 관람자의 공동체적 활동의 산물로서 예술을 지향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 박정홍은 ‘흙’이라는 매체를 통해 자신의 개인적인 주제에서 삶에 대한 보편적인 문제들로 확장해 가며, 궁극적으로 삶과 예술에 대해 끊임없이 성실한 문제를 기록하고 있다. 우리에게 항상 주변부의 문제들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그것이 우리에게 항상 우리주변 삶과 예술의 문제에 대해 재고해볼 것을 촉구하며, 자신의 작업 속으로 관람자를 초청하고 있다. 이러한 전달방법은 관람자에게 하나의 주제를 던져주고 관람자 스스로 그 속의 의미를 판별하고 풀어 나가야 하는 도전과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 박정홍에게 있어 도자기는 더 이상 도자기가 아닌, 이야기(story & essay)이다. 그가 추구하는 예술의 ‘진지함’은 쉽게 개념화하거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상징적인 기호(sign)로서 그 의미가 더욱 돋보이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결국 작가에게 있어 흙이라는 매체는 ‘어떤 것도 규정하지 않고 구분 짓지 않는’ ... 그 모든 것의 가능성을 끌어들이는 열린 ‘텍스트(text)’인 것이다. ■ 이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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