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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명훈  [homepage]님께서 남기신 글 (2002-11-26 03:10:00, Hit : 594)
[펌]자아와 타자의 불협화음적 초상 - 이재성 글
신화에 반열에 오른 인물일 수록, 비평과 분석은 재미있다.     그리고...이건 개인적인 생각인데, 인상주의 화가중에선 가장 화면빨을 잘 먹는 그림같다.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이지만, 어떤 이에게는 매우 중요한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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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구두> 38×46cm 1886 어두운 색조의 음울함 속에서 가난과 고통이 느껴진다.
삶 자체에 대한 투철한 윤리의식, 현실에 뿌리 박힌 애타심, 약한 자의 고통에 동참하는 자세를 지닌 빈센트 반 고흐. 그는 미술에 대한 독특한 주관과 방법론을 가지고 수많은 초상화와 자화상을 그렸다. 자신과 타인의 얼굴을 그리며 그는 무엇을 추구한 것일까? 인간 영혼의 깊은 곳에 도달하는 예술 작품의 힘이 초현상적 ‘얼굴’에 담겨 있다고 설명하는 이 글은, 반 고흐의 자화상과 초상화에 대한 이해와 고통받은 천재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열어준다.



반 고흐 ‘작품의 얼굴’? 그렇다. 빈센트 반 고흐(1853~1890)가 그린 다른 사람의 얼굴이나 자화상은 대상으로서의 얼굴이 아니라 초현상적 얼굴이다. 이 말은 개개의 작품마다 얼굴이 있음을 뜻한다.



다음 질문에 우리의 가슴을 열어보자. 예술활동의 궁극적 목적은 무엇일까? 우선 인간 삶에 중요한 그 무엇을 이른바 예술적 방법으로 표현함으로써 보는 이, 듣는 이, 또는 읽는 이의 감성과 생각을 일상생활의 범주 밖으로, 혹은 그 근원으로 돌려주는 것, 그것이 예술이 지향하는 바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이것은 피로에 지친 우리에게 신선한 감각을 준다는 의미 이상을 함축한다.



예술은 인간 삶의 가장 깊은 곳을 다루는 행위이기에 긴 인간역사를 통해 여러 가지 형태로 삶의 각 분야에서 필수적인 역할을 수행해 왔으며, 인간 존재의 근저를 탐구하는 철학의 큰 분야인 미학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러한 인간 영혼의 깊은 곳에 도달하는 예술작품의 힘은 바로 내가 설명하려고 하는 초현상적 ‘얼굴’에 담겨 있다. 예술작품은 화가나 작곡가, 혹은 문학가의 인생경험과 그것을 통해 얻은 인생관을 각기 자신의 예술형태에 불어넣은 것임에 틀림없다. 이 점만 고려하면서 감상하는 이는 그 예술가의 의도를 잘 알아차려야 하고, 그 은유의 의미를 해석해야 좋은 감상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예술가의 인생 경험의 결정체 뒤에 모든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예술이 그 표현 수단을 통하여 도달하려 한다고 믿는다. 인간 삶의 근원을 이루는 것은 일상에서 겪는 사건들에 대한 견해나 인생관 따위가 아닌, 어떠한 훌륭한 예술의 수단으로서도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예술작품은 어떠 종류의 인간행위보다도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려 하기 때문에 인간과 더욱 가깝다.



다시 말해서 예술작품은 인간성 그 자체를 인간과 공유하고 있다. 인간을 인간이게끔 만드는 그 무엇을 지니고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하나의 예술작품을 인간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술작품이 인간 삶의 하나의 ‘예’만은 아닐 것이다. 그 예술작품이 절대 타자성을 지닌 나의 타자라고 높여 생각하는 방법이 내가 의미한 바의 윤리(학)적 감상 또는 비평의 자세다. 그 관점에서 보면 예술작품의 창조자인 화가나 작곡가 또는 작가의 중요성은 크게 제한받아야 하고 그 작품의 초현상적 ‘얼굴’이 중요하게 여겨져야 한다.



대표적 예로 반 고흐의 회화작품들을 이야기하려 한다. 반 고흐는 광기의 힘으로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예술비평가들과 철학자들, 그리고 특히 정신분석가들에 의해 예술가의 창조력과 그의 정신적 질병은 직접적인 관련이 없고, 오히려 현실에서 그의 예술의 대상과 심층적 관계를 잘 형성할 수 있는 능력이 그의 작품창조 능력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이 사실은 많은 학자들이 오래 전부터 주장해온 바이지만, 그중 대표적인 인물로 헤겔의 변증법적 철학을 원초적 인간관계를 설명하는 데 이용한 정신분석학자 위니콧(D.W.Winnicott)을 들 수 있다). 그러한 비평방식의 변화에 따라서 반 고흐에 대한 재평가가 내려지고 있다. 자신의 정신적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그림이라는 표현수단에 의지했을지라도, 미술의 표현 그 자체가 그의 흐트러진 마음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반 고흐 전기들에서 보이듯이, 그는 에밀 졸라의 소설 등 문학에 심취했고 영어와 프랑스어도 잘했으며, 미술에 대한 독특한 비평관과 방법론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삶에 대한 윤리의식이 투철하여 전도사로서 광부들을 위하여 헌신하였을 뿐 아니라 일생을 통하여 눌리고 약한 자들의 고통에 동참하는 자세를 유지하고 살았다. 그의 강렬한 애타심은 종교성과는 사실상 무관한 것이었고 그 이상으로 현실에 깊이 뿌리 박힌 것이었다. 그는 생명 속에 내재하는 생명의 원천에 강력히 끌렸으며, 미술활동을 통하여 그것과 뛰어나게 소통했던 것이다.



우리가 그의 미술작품을 대할 때 작품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진리와의 소통방식은 대상인물의 세세한 얼굴표현을 무시하는 훌륭한 색깔 사용, 꼬불꼬불하지만 강하게 타오르는 불길 같은 선을 표현한 붓 터치 등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빈센트 반 고흐가 누구인지 모르는 현대인은 없을 것이다. 그의 <감자 먹는 사람들>(1885)이나 <해바라기>(1888), <도개교>(1888), 그리고 〈붕대를 맨 자화상>(1889) 등은 정규 학교교육을 받은 사람들에는 낯익은 작품들이다. 그의 화풍이 독특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그의 그림을 생각해보자.



반 고흐 그림의 진가는 어디에 있을까? 그의 그림이 재미 없다고 느껴질 수도 있다. 그의 그림에는 마네나 모네, 드가, 르느아르, 그리고 고갱 등의 그림에서 나타나는 파티장면이나 유유자적 유희를 즐기는 사람들의 장면도, 관능적인 여인의 나체화도 없다. 그는 순전히 일상생활에서 소재를 찾아 보통사람들의 평범한 일상 생활에 내재해있는 진리를 추구했다. 그는 사진처럼 실물을 그대로 옮기는 작업도 하지 않았는데, 자연을 대상으로 해도 세잔처럼 산의 풍경 그 자체를 대상으로 삼기보다는 사람의 손길과 연결되어 있는 장면을 많이 그렸다.



진리와의 소통방식인 초상화



<감자 먹는 사람들>이나 <낡은 구두>(1886), 〈비탄에 잠긴 노인>(1890) 등은 화려함과는 정반대인 가난·고통과 직결되어 있고, <베틀>(1884)이나 〈아를르의 침실>(1888), <의자와 담뱃대〉(1888) 등은 너무나 단순하며 무미건조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중에서도 초상화는 반 고흐의 작품세계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다른 사람들의 초상화도 많지만 자화상을 반 고흐처럼 많이 그린 화가는 드물다. 타인들의 초상화를 그리며, 그리고 렘브란트보다 더 많은 자화상을 그린 반 고흐는 무엇을 생각하며, 무엇을 추구했을까? 도대체 무미건조한 장면들과 고통의 장면들이 어떻게 미술사의 발전에 획기적인 작품들이 되었을까? 이제 이러한 반 고흐의 작품들 중 두 개의 초상화에 대하여 담론을 펴려 한다.



〈늙은 농부(인내의 계단)〉 68×65cm 1888 슬픔과 고난을 성실한 노동으로 극복한 농부의 인내심이 보인다. 청색 망토와 황토색 배경은 프로방스 지방의 하늘과 토양이 전도된 것. 지고의 것과 인간의 것, 하늘과 땅이 농부 안에서 그 통상적 구조가 무너져 하나가 된다.
하나는 〈늙은 농부(인내의 계단)>(1888)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최후의 〈자화상〉(1889)이다. 예술작품의 얼굴에 대한 이야기로 되돌아가자. 만일 〈늙은 농부>나 최후의 <자화상>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그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다면 그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래서 그 작품이 ‘얼굴’을 가지고 있다 함은 무슨 말인가?



앞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그 ‘얼굴’은 늙은 농부나 반 고흐의 실제얼굴이 아니다. 늙은 농부의 상반신이 그려진 작품 <늙은 농부>의 얼굴이며 반 고흐의 상반신이 담긴 그 <자화상> 속의 얼굴이다. 물론 얼굴이라는 개념은 그 작품을 인간으로 취급할 때에만 성립된다. 작품은 기술자로서의 예술가가 만들어낸 물건이 아닌 한 인간으로 대해야 하는 것이다.



반 고흐의 정신과 인생관을 담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의도한 이상으로, 한 인간성의 근본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예술활동을 통하여 ‘인간’임이 무엇인가를 파헤쳐 표현하고자 했다. 그 ‘인간’임이라 함은 물론 약간 꾸부정한 자세로 우리를 바라보는 농부 할아버지나 신경이 곤두서서 이쪽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는 반 고흐 자신이 추측하는 인간성은 아니다. 그 할아버지나 반 고흐의 얼굴과 상체의 많은 부분을 담고 있는 ‘타자’로서의 그림 자체의 얼굴을 나는 지칭하는 것이다. 예술작품에서 ‘얼굴’을 말할 때 윤리적 예술비평이론 정립을 위하여 프랑스의 윤리 철학자 임마누엘 레비나스(Emma- nuel Levinas)의 “타자의 얼굴”이라는 개념을 내가 원용한 것이므로, 우선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의 얼굴이 무엇인지 간단히 생각해보기로 하자. 이 부분은 아무래도 철학적 사고를 요한다.



임마누엘 레비나스는 우리 나라 학계에는 미처 소개되어 있지 않은 형편이지만 유럽과 미국에서는 철학뿐 아니라 문학과 예술의 비평을 비롯한 인문학 최고의 관심을 얻고 있는 윤리학의 선구자로서 “윤리철학자라기보다 그 이상(a metaethical thinker than an ethicist proper)”이라고까지 평가되고 있다.1)



레비나스는 그의 철학 기반을 일반적 의미에서의 자아와 타자(the other; l’Autre)의 관계보다는 한 개인의 자아와 다른 개인으로서의 타자성을 지닌 타자(the Other; d’Autrui)의 관계에 두고 있다. 후자는 “내가 피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애버릴 수도 없고, 그 앞에서 내가 정의의 이름으로 불려나와 나 자신의 정의로움을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되는 다른 한 인간”, 즉 주체의 지각능력을 항상 초월하는 절대성을 지닌 절대 타자로서의 다른 한 인간이다.2)



인간의 근본적 윤리와 순수언어를 탐구하는 데에 주력했던 철학자 레비나스는 그의 윤리론을 이용하여 문학과 예술비평에 이용될 수 있는 해석학을 마련해놓는 작업을 하지 않았으나, 시의 언어를 높이 평가했으며 소설작품들에 대한 비평에세이를 쓰기도 했고, 미술가들 중에는 특히 반 고흐를 높였다. 얼마 되지 않는 그의 문학비평 에세이들에는 논리적인 설명이 결핍되어 있는데 그것은 그가 이성과 언어의 결정체인 예술작품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서 일부러 아무 설명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초현상 영역의 〈늙은 농부〉와 〈자화상〉의 얼굴



반 고흐의 작품에 대해서도 그는 설명하지는 않았다. 자아와 타자의 ‘윤리’는 레비나스의 말대로 의식이나 무의식의 차원을 넘어서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타자성이란 물론 타자를 타자로 만드는 것인데, 전혀 느낄 수도, 사고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 절대 타자성과 관계를 맺는 자아의 인간됨이 한 인간을 인간이게 한다. 이러한 자아와 타자의 관계는 타자의 얼굴이 자아에 접근해옴으로써 형성된다. 그 이성과 감성을 초월하는 얼굴이 바로 내가 이야기하는 예술작품의 ‘얼굴’이다. 단지 인간 삶의 한 예로서가 아니라 그것을 넘어선, 초현상의 영역에 있는 인간성의 정수를 내포하고 있는 예술작품은 그러한 초현상적 얼굴을 가진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자화상> 64×53cm 1889 세상을 떠나기 몇 달 전 그림으로 최후의 자화상이자 가장 훌륭한 작품의 하나. 교묘한 자제력과 관찰력, 선택된 행동에 필요한 제요소를 완벽하게 통합하는 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이제 두 작품을 이야기해보자. <늙은 농부>와 반 고흐 생애 최후의 <자화상>은 각기 1888년 8월과 1889년 9월에 탄생한 작품들이다. 약 1년의 터울치고는 화풍에 많은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으나 유사성도 강하게 존재한다. 전자는 일생을 윤리와 정의, 그리고 성실한 노동으로 살아온 듯한, 신선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한 농부 할아버지의 모습이고, 후자는 자신의 삶의 진실을 가로막는 힘을 신경증적이기까지 한 눈길로 강하게 응시하고 있는 청년과 중년 사이의 남자 초상이다. 이 두 예술작품의 미학적 가치를 윤리적으로 알아보기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각 작품이 그 알 수 없는 힘을 지닌 타자 앞에서 자기해체하는 것이다. 그 인간 삶의 근저를 이루는 힘은 그림을 보는 사람 안에도 있으므로 실질적으로 개인적 특별성을 지닌 타자(the Other; d’ Autrui)는 감상자다.



다시 말해 작품은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타자에게 인간의 언어와 정신활동의 한계를 뛰어넘어 생의 중심을 일견하도록 하며, 그것은 전적타자 앞에서 그 타자를 위한 자기해체를 전제로 한다. 비평자로서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역할도 그 작품이 구체적인 한 명의 타자의 타자성을 위해 자기해체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감상자/비평자는 타자로서의 작품을 향해 자기해체의 입장을 지켜야 한다는 취지에서, 작품의 초현상적 얼굴에 대하여 “Yes”의 답을 보내야 한다. 타자의 절대 타자성에 “Yes”의 답을 보낸다 함은 그 얼굴이 초대하는 길을 따라가는 것이다. 그 작품이 자기해체를 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나를 초대하는 길을 따라가는 것이다. 작품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다 보면 작품이 어떻게 자기의 구조를 해체시키는가를 파악하여 언어로 옮겨놓을 수 있다.



그림을 그린 반 고흐는 자신의 가장 친숙한 주제인 농부와 자신의 모습을 그려놓았지만, 그가 의식하든 하지 않든 그의 그림은 감상자를 향해 자기해체를 하고 있다. 그림의 창조자인 화가는 이러한 그림과 감상자의 뒷전에 있다. 화가는 실질적인 그림과 감상자의 사적 대화에는 큰 의미를 두지 않았던 것이다.



작품 〈늙은 농부〉에서의 농부는 부제인 ‘인내의 계단’이 보여주듯이 일생을 통해 많은 시련을 인내로 극복해왔고 지금 다시 새로운 시련의 단계를 맞이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의 모습은 전혀 슬픔과 고난에 찌든 모습이 아니다. 그의 모습은 지극히 평범한 한 농부다.



이제 그의 눈을 보자. 두 눈은 강력한 희망과 겸손을 함께 내포한 광채를 감상자인 나에게 전해주고 있다. 두 눈동자는 그의 강직한 성격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눈동자는 여느 노인과 같이 약간 피로한 것 같은 기색도 지니고 있다. 이 검정과 갈색의 두 눈동자 청색과 적색으로 나뉘어 노인의 몸 전체로 그 힘이 확산된다. 눈에서 눈동자를 제외한 부분은 청색이다. 이 청색은 노인의 눈썹·머리·수염 그리고 망토로 이어진다.



반면 배경은 이 농부가 일생을 의지하며 경작해온 대지의 색이다. 손은 거칠고 시커멓게 때가 끼어 있어 그가 농부라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몸의 윤곽을 받쳐주는 지팡이도 땅과 지저분한 때와 같은 색이다. 그러나 청색빛, 특히 눈은 그 노인을 땅으로 한정시키지 않는다. 그의 눈은 그가 평생동안 땅에서 일해왔어도 천상의 것을 많이 알고 있는 현인임을 말해준다.



이렇게 청색과 땅의 색은 지고의 것과 그 아래의 것이 대조를 이루면서 노인의 모습에서 일치감을 형성한다. 농부는 땅을 의지하고 살았지만 순수함을 잃지 않은 사람이다. 내가 이 그림을 본 느낌은 이 늙은 농부는 참으로 비범한 노인이구나 하는 것이었다. 농부이기는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이 하늘과 대지의 도를 깨친 사람 같아 보인다. 두 색의 본래 위치가 뒤바뀌어 청색이 그림의 아랫부분인 망토 색깔이 되고 땅의 색이 그 위에 위치한 지고의 것과 땅의 기가 이 노인 안에서 대치되고 어우러져 제 위치가 뒤바뀔 정도로 본래의 정체성이 깨졌음을 내포하는 듯하다. 하늘과 땅, 즉 우주의 질서를 깨친 노자나 장자와도 같은 모습이다. 깨침은 현실 도피가 아니라 현실에서 중심을 이루는 근본의 힘과 지혜를 가지게 되는 것이기에 그의 모습은 활력이 넘친다. 이러한 농부의 초상을 그린 반 고흐 역시 우주는 계속하여 파괴되기에 항상 변화한다는 진리를 깊이 깨달은 사람이었다.3)



나·타자·교류·아우라



이 작품은 이렇게 청색과 땅색의 대비를 통해서 자기해체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자기해체는 감상자인 나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므로 내가 그 그림의 타자가 되는 것이다. 물론 내 느낌과 생각을 통해 이루어진 관계이지만 이렇게 위(하늘)와 아래(땅)의 고정관념이 무너지며 하나가 되는 느낌은 그리고 더 나아가 그 느낌 위의 초현상적 감성으로까지 초대하는 것은 바로 이 작품의 현상 뒤편에 있는 초현상적인 얼굴일 것이다.



<비탄에 잠긴 노인> 82×65.5cm 1890 비탄 자체가 강조되지 않고, 알 수 없는 대상을 향한 불안한 감정이 연한 녹색과 흰색이 주는 차디찬 느낌과 뒤틀리는 형태로 표현되어 있다.
파랑과 갈색 외에 특별히 눈에 띄는 색은 붉은색이다. 깊이가 있으며 밝은 힘을 보여주는, 하늘과 땅에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영적, 지적 힘을 가진 듯한 이 노인의 모자에서 시작하여 눈·귀·뺨·수염·목도리 그리고 속옷의 소매까지, 붉은색은 그의 모습 전체를 지탱해주고 있다.



이렇게 이 작품은 하늘과 땅의 대치와 위치의 뒤바뀜을 통해 그 둘의 고정관념과 역할을 해체시키고, 그로써 자기해체를 하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늙은 농부의 두 눈을 통해 확산되고 있다. 그 두 눈이 주는 느낌은 나로 하여금 하늘과 땅의 완전한 결합과 하나됨을 나타내기에 부족하지 않다. 예술작품의 절대적 타자성을 받아들인다 함은 자기해체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타자로서의 작품의 얼굴은 초현상적이지만 그 얼굴은 자기해체를 통해서 모습을 드러낸다.



이상은 내가 작품에 대해 흔히 느낀 바를 서술한 것이 아니라 이 작품과 나의 현상적 표현 단계에서 이루어지는 현실적 교류의 언어화였는데, 왜냐하면 내가 작품의 자기해체를 설명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작품과 나의 교류는 표현이 불가능한 초현상적 윤리의 단계에 기초하고 있다. 초현상적 윤리관계는 나의 윤리적 자아가 고흐 회화작품의 얼굴을 절대긍정함으로써 받아들임을 의미하는데, 이 관계는 철학적 사고의 차원을 높이기 위한 모델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작품에 대한 감성을 가능케 하는, 즉 지금까지 내가 설명한 현상적 느낌 이전의 감각으로서 맺어지는 관계다.4)



이 감각은 예술작품에서 느껴지는 신비한 기운과 관련되어 언급되어 왔는데, 발터 벤야민의 “아우라(aura)”는 감상자가 평소 경험하지 못하는 초현상의 세계로 통하는 길을 지칭하는 단어다. 미술작품에서 풍겨 나오는 표현을 초월하는 기운은 인간이 창조한 예술작품에 대한 연구와 비평의 중심을 차지해야 할 것이다.



원초적 인간성 자체를 긍정하는 그림



레비나스의 타자에 대한 절대긍정의 철학적 관점에서 볼 때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절대적 윤리가 형성되는 단계는 논리의 바탕에서 지금껏 지탱해온 서양의 형이상학이 발견해내지 못한 그 어떠한 종류의 논리와 분별도 초월하는 -- 타자에 대한 아무런 조건도 없는, 원초적 인간성 그대로의 상태를 긍정하는 -- 가장 근본적인 감각의 단계라는 것이다. 즉 타자는 내 앞에서 자신의 구조를 해체함으로써 나를 그 얼굴로 이끌고 있으나 그 얼굴은 평상의 의미에서의 얼굴이 아니라 윤리적·초현상적으로 감지되는 얼굴이며,내가 그 얼굴을 절대긍정으로 받아들인다 함은 언어화의 단계에서 작품의 자기해체를 받아들이며 기술해놓는 것이다.



그러한 묘한 분위기는 반 고흐의 어느 작품에나 있다. 특히 반 고흐의 그림들 중 타오르는 불길같이 꼬불꼬불한 선은 역동적인 인간의 힘을 보여주는 특별한 화법이다. 이 선은 <별이 빛나는 밤>(1889)이나 <올리브나무가 있는 풍경>(1889) 등과 지금 이야기할 최후의 자화상에서 두드러진다. 비슷한 붓의 사용법이나 최소한 그것이 만들어내는 분위기는 한 인간과 세상의 초현상적 관계의 실체를 표현하는 방법이다. <올리브나무가 있는 풍경>과 최후의 〈자화상〉을 그린 1889년은 그가 죽기 얼마 전인데, 초현상적인 무엇인가를 강하게 추구하는 마음이 표현된 것임에 틀림없다. 정신활동의 상태를 영혼의 문제와 관련하여 탐구했던 정신분석학자 칼 구스타프 융은 정상인이든 정신병 환자든, 그 정신활동의 궁극적 대상을 원으로 표현하는 사실을 발견하였고, 티베트 라마불교가 만다라에 원의 형태로 신비한 대상을 담고 있는데 큰 관심을 보였다.



그것은 마음의 불안으로 인해 자기 인생의 궁극적 대상을 향한 초조한 마음에서 이 무늬가 생겨났다는 사실과 고갱과 다투고 귀를 자른 후 같은해 붕대를 대고 그린 자화상이 다 녹색으로 칠해진 데서도 알 수 있다. 그 자화상에서는 진하고 연한 녹색이 그대로 사용되었는데, 흰색이 녹색과 섞여서 무늬를 형성하고 있다.



이런 붓놀림은 다음해에 그린 〈비탄에 잠긴 노인>(1890)에서 볼 수 있다. 이 그림에서는 비탄 자체가 강조되지 않고, 알 수 없는 대상을 향한 불안한 감정이 연한 녹색과 흰색이 주는 차디찬 느낌과 뒤틀리는 형태로 표현되어 있다. 남자의 뒤쪽보다 앞부분에 더욱 완전한 원 형태의 무늬가 많이 그려져, 그의 자아가 그 대상을 향해 있음이 강조되었다. 종교화에 나타나듯이 성인들의 머리 뒤에 있는 후광은 형태가 머리에 떠오른다. 그렇지만 반 고흐는 평범한 한 인간으로서 그 절대대상과 관계를 맺고 있다.



<감자 먹는 사람들> 81×112cm 1885 고흐의 솜씨와 연구가 집대성된 작품. 그는 농민들의 일상적인 식사 시간을 그들의 인간성과 도덕적 아름다움이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때로 보았다.
그 대상을 바라보는 남자의 얼굴은 약간의 녹색을 포함한 살색으로 자신의 대상이 이미 자신에게 엄습하고 있음을 느끼는 듯하다. 생을 강하게 느끼고 생의 저편으로 빨려 들어가기를 거부하지 않는다. 그의 두 눈은 더욱 녹색이고, 두려움과 신경증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두려움과 초조함 외에 그 대상을 그저 아무런 느낌 없이, 그러나 강하게 응시하는 시선이 분명히 내포되어 있다. 그의 왼쪽 눈과 왼쪽 팔이 오른쪽의 그것들보다 큰 것은 원근법의 효과이다. 한 사람이 앉아서 차지하는 참으로 작은 공간을 그리는데도 원근법이 강조되어 있어, 남자가 현실의 저편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준다.



반 고흐 자신도 이렇게 인생의 저편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가졌던 것은 아닐까? 속옷의 하얀색 역시 이미 생의 저편에 존재하는 자신을 나타낸 것처럼 보인다. <늙은 농부>에서와 같이 이 작품에서도 눈이 모든 요소를 시작하고 끝내는 정점이 된다. 반 고흐는 타인인 농부는 활력을 담고 감상자에게로 초점이 정확히 잡혀 있는 눈을 그린 것과 달리, 자신의 눈은 확실한 기운은 있으나 초점은 감상자에게 잡혀 있지 않게끔 그렸다. 초점이 정확하지 않은 녹색 눈을 통해 화가가 표현하려고 하는 절대적인 힘과 그림을 보는 이가 만난다. 그러면서 또한 보는 이의 타자로서의 이 그림 전체의 타자성, 즉 그 얼굴이, 보는 이에게 다가온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인생의 절대적 대상과 자신이 대치되어 있음으로 인해 작품 전체가 감상자와의 대화를 원한다는 점이다. 절대의 힘에 끌려 화면의 저편으로 빨려 들어가지만 그 힘에 굴복할 수가 없는 인간임이 격렬하지만 정제된 붓의 사용으로 잘 나타나 있다. 그러한 중간자세는 〈늙은 농부〉에서보다 더욱 대화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으며 그것은 남의 초상화보다 자신의 모습을 그릴 때에 더욱 강하게 나타나 있다.



그 표현되지 않은 영혼의 대화란 곧 나의 타자로서의 이 작품과 내가 직면하는 것이다. 말할 수 있는 단계에서의 감상은 바로 이 영혼의 대화를 위한 것이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굴복을 용납할 수조차 없는, 자신의 생의 위치를 지워버리는 남자의 눈과 작품 전체는 작품의 철두철미한 자기해체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런 자기해체는 보는 이를 위해 행하는 것이므로 보는 이와의 윤리적 관계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이 〈자화상〉은 〈늙은 농부>에 비해 훨씬 강렬한 자기토로와 자기해체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현상과 초현상의 매개수단인 타자의 얼굴



빈센트 반 고흐는 정신병을 앓으며 무명의 화가로 10년 동안 팔리지도 않는 그림만 그리다가 사후에 인정받아 그의 그림이 최고가에 팔리는 화가로 유명하다. 예술가의 자질은 과연 무엇인가? 이 질문은 내가 이 글의 서두에 제기했던 “예술활동의 궁극적 목적은 무엇일까?” 하는 질문과도 통한다. 말할 것도 없이 예술가의 자질이란 예술활동의 궁극적 목적에 다른 사람들보다 가까이 갈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하류 예술이 아닌, 반 고흐와 같은 화가가 가지고 있던 능력은 바로 자신의 고통을 통해 인간의 생 그 자체를 뚫어볼 수 있는 능력, 생의 저편을 뚫어볼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정신의 혼란 그 자체가 아니라 자신의 고통을 의식하는 바로 그 마음이, 그리고 남의 고통도 의식할 줄 아는, 바로 그 윤리적 마음이 그를 성장시켰던 것이다.



생의 근저에 대해, 인간성의 기저에 대해 고민하며 남의 고통을 생각할 줄 아는 그 윤리적 마음은 성자들이 가지고 있던 마음이기도 하다. 그것은 인생 그 자체의 절대 타자를 만나고자 하는, 절대 타자의 얼굴을 보고자 열망하며 살기를 원하는 성스러운 심성이다. 빈센트 반 고흐, 그는 그렇게 그 어느 누구도 가지지 못한 고귀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고통과 비극적 생이 만들어낸 그의 미술은 그렇게 불협화음이 만들어내는 완전한 조화를 보여준다.



이 글에서 내가 이야기한 두 작품은 그러한 불협화음이 만들어내는 완전한 조화가 각기 다른 분위기에서 풍겨 나오는 작품들이다. <늙은 농부>는 지고의 것과 인간의 것, 하늘과 땅이라는 그 통상적 구조가 무너져 하나가 됨을 보여주고, 반 고흐가 최후로 그린 <자화상>은 생의 절대적 대상을 직시하며 그 대상과 자신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두 작품 모두에서 나타나는바, 과연 반 고흐는 그 자신이 말한 바와 같이, “영원한 것을 탐구”하고 있었던 것이다.5)



<별이 빛나는 밤> 73×91cm 1889 종교적인 분위기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으로 변형된 밤하늘을 표현하는 반 고흐다운 특징을 보여준다. 꿈틀거리는 성운과 같은 것의 엉킴이 화면 전체에 비현실적인 장대한 운동감을 부여한다.
그러한 그림들은 대치되는 느낌들을 생성함으로써 자기해체를 감상자인 나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 자기해체를 받아들이는 것은 절대 타자성을 지닌 작품에게 “Yes”로서 답하는 것이 된다. 현자의 눈과 모습을 가진 <늙은 농부>와 생의 지고의 대상과 그 자신의 인생과 감상자인 나를 모두 직시하는 <자화상>은 그렇게 그 각기의 초현상적 얼굴로서 나에게 다가오고 있으며, 그 얼굴을 받아들이는 나의 현상적인 방법을 적어 보았다.



물론 예술작품은 인간이 아니어서 한 인간으로서의 타자의 얼굴을 대하고 그것을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만일 레비나스가 이야기하는 바의 초현상적인 자아와 타자의 윤리적 관계가 한 인간의 자아와 타자로서의 다른 한 인간의 자아의 대면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 그리고 사회 관계에도 응용할 수 있는 것이라면, 즉 이 세상을 이루고 있는 모든 것이 수많은 자아와 타자의 관계로 이루어졌음을 인정한다면, 보통 예술작품뿐 아니라 기독교의 성상이나 불교의 불상 등에서 풍겨 나오는 표현 이상의 표현인 그 기운은 그 작품이 그것의 타자와의 관계를 갖는 영역인 초현상의 세계에 대한 표현일 것이다. 즉 그 표현은 현상과 초현상의 매개수단이자 초현상세계에 속해 있는 상태이리라.



작품의 주체를 이루는 자아가 그 대상과의 관계에서 윤리적 차원을 형성하는 연쇄는 현상의 영역을 초월하는 차원이다. 미술작품은 그것이 보여주는 형태와 색채를 통해, 음악작품은 음을 통해, 그리고 문학작품의 경우는 역시 그 언어 활동인 스토리나 시어를 통하여 듣는 이나 독자를 보통의 자아영역의 바깥에 있는 초현상의 감성세계로 이끈다. 폴 리쾨르(Paul Riceur)의 말에 따르면 예술 작품이 간직하고 있는 “무드(mood)”는 주어진 하나의 대상을 향한, 그 작품의 자아가 다시 그것으로 돌아오기 전의 상태다.6)



이 무드는 이미 감각의 상태를 떠난, 혹은 떠나고 있는 중간상태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그것은 그 작품의 현상적 느낌의 세계를 초과한 부분이다. 초과이기 때문에 예술가도 의식하지 못하는, 그래서 다만 (다른 말로는) “아우라”라는 단어로 될 수밖에 없는 영역이다.



이렇게, 현상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작품 속의 상징들과 그것들에 대한 각기 다른 감상자의 미적 경험을 통해 이루어지는 의사소통이 초현상적으로 이루어지는 타자와 윤리적 자아의 관계를 위한 것임은 현재와 미래의 예술에서도 가장 중요한 주제가 될 것이다. 작품이 추구하는 절대적 대상과의 관계가 종교적인 의미를 담고 있지 않음은 이미 서두에서 말한 바 있다. 지면 관계로 미래의 예술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으나, 사이버예술에서 이루어지는 작품과 감상자의 대화 등도 역시 어떠한 방법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절대타자성과 자아의 윤리적 교감을 위해 이루어지는 예술활동이 되어야 한다고 확신한다.
주

1. Bruell Lawrence. 〈In Pursuit of Ethics〉 《Publications of the Modern Language Association of America》 Vol. 114. January 1999, p.7∼19.



2. Critchley, Simon. 《The Ethics of Deconstruction: Derrida & Levinas》 Oxford, UK: Blackwell Publishers, 1992. p.5.



3. Serullaz, Maurice, 《The Concise Encyclopedia of Impressionism》 Trans. E.M.A. Graham. Secaucus, New Jersey: Chartwell Books, Inc. p.107.



4. 장 룩 낸시(Nancy, Jean-Luc)는 그의 《The Sense of the World》 〈Trans. Jeffrey S. Librett.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97, p.15)에서 “오감”을 “통과”하며 그 오감을 가능하게 하는 감각의 “감각”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5. Serullaz, p.113.



6. Riceur, Paul.〈Aesthetic Experience〉 《Philosophy & Social Criticism》 Vol.24(2/3). p. 25∼39 참조.
이재성은 1960년 출생. 영문학을 전공하여 학사·석사·박사 학위를 모두 뉴욕 주립대(버팔로)에서 받고 현재 명지대 교수로 재직중이다. 레비나스·데리다·하이데거 등의 철학에 기초한 문학과 예술의 윤리적 비평이론이 주된 연구분야이고, 19∼20세기 영문학과 동양학의 연결 등도 연구하고 있다.
contents 2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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