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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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omepage]님께서 남기신 글 (2008-07-23 15:18:35, Hit : 692)
[re] 전시 7.23



갤러리 각 초대 박승예展

'자화상: 괴물'

 

 

 

2008년 7월 23일 ~ 8월 5일

갤러리 각 [약도보기]

서울 종로구 관훈동 23번지 원빌딩4층 T.02-737-9963

www.gallerygac.com

 

 

 

박승예의 전시 <자화상: 괴물> 전은 인사동 갤러리 각의 개관3주년 초대전으로 기획되었다. 작가 박승예는 뉴욕 롱아일랜드에서 드로잉과 페인팅을 전공했고, 2003년 귀국 후 첫 번째 전시로써 이번 전시를 개최하게 되었다.

2003년 뉴욕 World Fine Art Gallery에서의 전시 이후 지난 5년간 작가는 창작행위 자체에만 몰두하여 총 70여개(60호~120호)의 작품들을 완성했다.

 

 

대부분이 자화상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들 중 일부를 이번 전시를 통해 공개하게 되었다. 작가는 자화상을 통해 사회와 분리될 수 없는 존재인 자신을 보여줌으로써 세상의 일면을 투영하고자 한다. 또한 내면의 자아와 목소리가 외면의 모습과 충돌해 갈등하고 융화되어가는 과정을 <괴물>로 상징화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작가의 작업 의도는 본능적이거나 의식적으로 분열되어온 자아가 서로의 정체와 의미 자체를 인지해 가는 과정에서 '깨어남' 이라는 영적이고 의식적인 각성의 상태를 찾아 유지해가기를 바라는 소망을 담고 있다.

 

 

<자화상:괴물>展

- 박승예

괴물들의 존재는 명확하다.

내안의 그것은, 익숙한 적응력과 단련으로 외부적 요구에 자신을 잘 끼워 맞춰 제 유형을 바꾸어갈 줄 아는 외부의 그것을 흉악스런 괴물로 단정한다. 내 밖의 괴물은 내 안의 존재가 질러대는 태초적 열망과 진정眞正의 갈증을 위험스럽고 불리한 것으로 경계하려 한다.

군중 속, 거울속의 나와 긴 꿈과 정적속의 나는 서로를 노려보며 두려워하고, 불안을 느끼게 된다.

 

 

내 안의 괴물과 내 밖의 괴물은 공생의 방법을 모색한다. 공생하는 방법은 '회피'가 아니라 '직면'임을 알아가는 과정을 그림 속에 담아온 것이 내 작업의 결과이고, 미래다. 그 상반된 개념과 기준 속의 두 괴물이 서로를 만나 하나의 지점에서 공생을 모색할 때, 그들은 결코 동일한 존재일 수 없기에 찌그러지고, 흘러내리며, 초점을 잃어 흔들거리고, 불안을 쏟아낸다.  '인지'로 시작된 '의식'이며 '공생'을 통한 나의 '각성'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이다. 거대한 사회 속에서 개인으로서의 존엄을 잃지 않기 위해 '각성'은 나에게 가장 큰 동기를 부여한다.

 

 

'색안경'의 막과 같은 흑백의 표현은 나의 눈에 씌어진 '필터'를 의미한다. 굴곡과 반사의 화학적 작용인 '색'이 아닌 단지 '빛'만으로 진실을 보고자 하는 것이다. 흑백필름을 장착한 카메라로 세상을 찍듯, 내 망막과 사고속의 필터는 주어진 대로를 보기보다는 나의 선별적인 시각을 간직하고자 하는 단련의 행위와 같다.

그 흑백의 필터 안에 괴물들이 보인다.

 

 

내 안과 밖을 스멀거리며 넘나들려 다투고, 생채기를 내어가며 자신의 존재를 우겨대고 있는 괴물들을 보고 있다. 누구의 편도 들 수 없다. 그들의 공존이 나를 이 시스템 속에 적응된 존재로 살아남게 해주며, 한편으로 잠들지 않도록 흔들어 깨워주는 각성의 존재들임을 알기 때문이다.

 

 

인간은 각자의 괴물을 안과 밖에 가지고 있다. 수많은 괴물을 가진 자도 있을 수 있고, 단 하나의 괴물만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도 있을 것이다. '깨어남'이나 '깨어있음'은 이 괴물에 대한 인지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작업 과정은 내가 가지고 있는 괴물들 간의 직면과 공존의 모색, 그리고 두려움의 극복에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나의 '생존을 위한 각성 방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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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꼴이 반쪽

2008_0724 ▶ 2008_0824



별’꼴이 반쪽展_2008




초대일시_2008_0724_목요일_06:00pm

참여작가
김다영_김지아나_김지혜_나진숙_박근우
이수영_이정배_이현배_정연현_현정아

관람시간 / 11:00am~09:30pm





갤러리 잔다리_GALLERY ZANDARI
서울 마포구 서교동 370-12번지
Tel. +82.2.323.4155
www.zandari.com






『별’꼴이 반쪽』展 - 반쪽의 별들이 모여 만드는 하나의 우주 이야기 ● 밤하늘에 총총 떠있는 별들이 우주를 무대 삼아 그들만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붉은 별이 들려주는 가슴 따뜻한 이야기, 푸른 별이 들려주는 꿈같은 이야기, 보랏빛 별이 들려주는 신비로운 이야기들이 신기루처럼 펼쳐졌다가 기억 속에 자리한다. 어린 시절 한번쯤 꿈에 그렸던 우주, 누구나 한번쯤 닿아보길 바라며 귀 기울여 봤을 법한 우주, 이제 『별’꼴이 반쪽』展이 그 곳으로의 여행을 안내한다. 반쪽 별의 이야기 ● 평범한 전시 공간과 엘리베이터가 우주와 우주선으로 탈바꿈하여 독특한 우주를 만들어낸다. 개개의 항성이 일궈내는 신비로운 풍경은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가득 담고 있으며, 우주 속 어느 별들보다도 더 영롱한 빛을 뽐낸다.




김지아나_Three moon_백색 자기, 푸른 LED, SUS(hair line), 전등_90×90cm×3_2008



나진숙_The Wave III_비디오 영상, 혼합재료_가변크기_2007


처음 이야기를 시작하는 항성은 은은한 불빛을 내며 떠오르는 김지아나의 별이다. 김지아나의 은은한 빛은 도자기 재료와 제작 방식의 고유한 속성을 드러내는 듯 물과 불의 효과를 잘 보여준다. 물에 서서히 물감이 퍼지는듯한 느낌과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불을 보는듯한 느낌은 이중적 미감을 함께 느끼게 한다. 또한 도자기 파편들을 조합하여 또 다른 하나의 편(片)을 만들어낸 것은 수많은 별들이 모여 만드는 우주를 연상케 한다. 두 번째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항성은 풍부한 질감의 효과를 통해 빛을 내는 나진숙의 별이다. 동일한 나무 조각 위에 새겨진 다양한 이미지들은 개개로써 독립적인 동시에 하나로 통일되는 이미지이다. 이러한 작업 방식은 작품의 완결 상태를 보류하는 특성, 즉 언제라도 다양하게 변화할 수 있는 열린 상태를 보여준다. 또한 작품 위에 뿌려지는 빛의 무리는 양각을 두드러지게 하고, 빛나게 함으로써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기억의 파편들을 조합하고 다시 분해하는 이러한 작업은 특유의 영상과 어우러져 그 빛의 깊이를 더한다. 곧이어 이야기를 잇는 별은 우주의 다양한 빛깔을 평면에 펼쳐놓는 이현배의 별이다. 캔버스 중앙으로 모여드는 물감의 동선도, 바람에 의해 퍼져 나가는 물감의 자취도 모두 우연적인 그의 작업은 물감이 스스로 자율성을 획득한다는 점에서 매우 물질적이고 실제적이다. 또한 거친 듯 포근하게 스며든 물감이 그려낸 실루엣은 지구라는 별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사람의 실루엣이자, 저 멀리 어떤 항성이 작열하며 폭발하는 이미지, 또 어느 차가운 별에서 얼어버린 그 어떤 것 등 다양한 이미지들을 상상케 한다.




이현배_Wanted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2.2×112cm×3_2008



이수영_World flowers_스타킹, 아크릴, 라이트 박스_75×75×60cm_2007


이야기가 무르익을 무렵, 이수영의 별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수영의 작품은 가지각색의 무늬와 패턴이 만들어내는 소우주의 조합인 동시에 하나의 대우주이다. 올록볼록하게 솟아오른 개개의 우주들은 큰 우주 속에서 자신만의 색과 무늬로 눈길을 사로잡고, 은은하게 피어나는 빛은 개개의 빛을 하나로 모아주는 역할을 하며, 나아가 전체적인 밝기를 형성한다. 우주를 각각의 꽃으로 형상화한 그의 작업은 만개한 꽃들이 모여 만드는 진한 향기를 닮아 볼수록 향기롭고 달콤하여 눈길을 끈다. 저 멀리서 한참 동안 이야기를 경청하던 김지혜의 별이 멀리서 조망하는 우주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김지혜의 와르르 쏟아지는 별무리는 미끄러지듯 배열되어 눈앞까지 닿는다. 온기를 가득 품은 노란 빛과 다양한 형태의 도자기들은 공간을 놀이터 삼아 자유롭게 유영하며, 살아있음을 온몸으로 드러낸다. 태아의 모습 같기도 하고 미생물의 모습 같기도 한 도자기들은 그 자체로 살아있음을 만끽하게 하며, 흡사 만져질듯한 빛으로 우리를 유혹한다.




김지혜_만져지는 빛_도자기_가변크기_2004



정연현_쉿_인터랙티브 설치_2008


머나먼 우주를 조망한 후, 다시 우주선을 타고 내린 곳은 어느 행성의 낯선 대지이다. 신비롭고 이색적인 풍경이 우리를 놀라게 하는 이 행성에서 우리는 좀 더 가까워진 우주를 만나고, 우주의 다양한 생물들과 조우한다. 행성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우리를 맞이하는 것은 행성을 안내하는 외계인이다. (정연현) 벽면을 가득 채우는 외계인의 얼굴은 우리의 반응에 따라 움직이며 함께 소통한다. 이렇듯 서로의 얼굴에서 낯선 세계를 보는 상황은 한 공간에서 색다른 긴장감을 만들어내는 동시에 서로 다른 것에 대한 생각을 나누게 한다. 그러나 「쉿!」이라는 작품명에서도 드러나듯 완전한 소통에는 한계를 두는 작가의 작품은 한정된 소통을 통해 고유의 신비함을 유지하려는 성격을 가진다. 조금 큰 소리로 말을 건네자 외계인이 고개를 갸우뚱 하며 바닥을 가리킨다.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니 단단한 돌 사이로 강렬한 초록색 불빛이 새어 나온다. (박근우) 행성의 표면을 연상시키는 이 암석들은 그 자체로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듯, 다양한 세기의 빛의 고리를 형성한다. 초록색 빛줄기가 바닥에 긋는 드로잉은 또 하나의 그림이자 작품의 일부로써 신비스러운 느낌을 배가시키고, 돌 표면에는 누군가 조몰락거리다 던져 놓은 듯 강한 지문이 남아있다. 우주 속 거대한 어떤 존재가 뿌려놓은 공기알 마냥, 어느 행성에서 부서진 파편들 마냥, 우주의 신비로운 돌은 바닥에 놓인 채 초록색 빛줄기를 새긴다.




박근우_Renew_화강암, HQI_가변크기_2008



이정배_L씨의 분재_지본수묵, 라이트패널_가변크기_2008


앞서 나가던 외계인이 뒤를 돌아보다 저 멀리 전선줄을 타고 뻗어 나오는 화분을 손짓한다. (이정배) 달을 배경으로 그려진 식물들은 한지와 라이트 패널로 만들어진 분재들로, 재료적인 면-라이프 패널과 먹, 한지의 조합-에서나 의미적인 면-순수한 의미의 자연과 정원이라는 인공적인 자연의 조합-에서 퓨전의 성공적인 예를 보여준다. 또한 은은한 빛이 새어 나오는 달에는 생경한 듯 익숙한 풍경들이 자리 잡고 있으며, 옥토끼가 방아를 찧던 달의 모습이 다양한 풍경으로 대체되어 펼쳐진다. 이러한 풍경들은 달 내부의 이미지이자 거울에 비치는 상(像)처럼 달 반대편에 위치한 다른 행성의 이미지를 대변한다. 화분을 함께 지켜보던 외계인이 눈길을 돌려 수조를 향한다. 푸른빛이 서서히 올라오는 수조 속에는 수많은 전구들이 물고기 마냥 자유로이 헤엄친다. (김다영) 각 전구에 들어있는 흥미진진한 물건들은 어릴 적 가지고 놀았던 장난감을 연상시키며 눈을 즐겁게 하고, 하나의 수조임에도 수많은 이야기 거리를 담고 있다. 상반되는 요소인 전구와 물을 조합한 우주의 수조는 생각과 꿈이 담겨 있는 빛나는 수조로써 존재하며, 우주의 연못 속에 있을 법한 다양한 생물들을 연상시키며 재미를 더한다. 우주를 떠나오는 길, 마지막으로 외계인이 소개하는 것은 다양한 크기의 병을 이용하여 신비로운 생물을 배양하는 현장이다. (현정아) 세포와 각종 미생물들이 숨 쉬며 자라는 병들은 그 자체가 하나의 생명이다. 또한 살아있는 것들을 잉태하여 자라게 하고, 살아있는 것을 박제함으로써 영원히 살아있게 한다. 생명의 순환,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운 생명, 이 두 가지의 생명성을 담고 있는 유리병은 우주에만 존재하는 신비한 병으로 영원히 존재한다. 아쉬운 마음으로 외계인과 인사를 나누고 돌아선 후 다시 우주선에 오르고, 그렇게 『별’꼴이 반쪽』展에서의 우주여행은 막을 내린다.




김다영_유유히 놀다_설치_2008



현정아_희망 세포 cell-hope_병 설치, LED_가변크기_2008


또 다른 반쪽 별의 이야기 ● 손전등을 든 관람객들이 하나 둘 전시장 공간으로 들어선다. 어두운 공간을 비추는 손전등은 자그마한 빛으로 또 다른 항성들을 그려내고, 이윽고 숨겨진 항성에게로 다가가 빛을 건네주며 살아 숨 쉬게 한다. 또한 자신들도 빛나는 항성이 되어 온전한 우주의 일부로써 존재하며 공간 속에 녹아든다. 반쪽의 별로써 존재하는 이러한 관람객들의 참여는 반쪽의 별을 찾아 나서는 여행이자, 자신을 온전히 채우려는 여행이다. ● 직접 반쪽의 별이 되어 나머지 반쪽의 별을 채워가는 여행의 즐거움은 즐기고자 하는, 믿고자 하는 사람에게 있다. 굳이 우주에 발을 내딛지 않더라도 별들이 말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고, 그 빛의 온기를 느낄 수 있다면 우주의 언어로 소통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말하지 않아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느낌이야말로 온전히 소통하고, 온 마음과 몸으로 느끼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항상 꿈꿔왔지만 어차피 닿을 수 없는 곳이라 느꼈다면 『별’꼴이 반쪽』展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 기울여보자. 오롯이 느끼고자 한다면 더 많은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을 테니! ■ 김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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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otless Tree

정용국展 / JEONGYONGKOOK / 鄭容國 / painting.installation

2008_0716 ▶ 2008_0812 / 공휴일 휴관



정용국_Rootless Tree_한지에 수묵_90×90cm_2008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이미지 속닥속닥 Vol.070904d | 정용국 수묵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8_0716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09:30am~07:00pm / 일요일_10:00am~06:00pm / 공휴일 휴관




표갤러리 서울_PYO GALLERY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258-79번지
Tel. +82.2.543.7337
www.pyoart.com






인큐베이터 키드의 탈출기 ● 인큐베이터는 미성숙의 세계이다. 그곳에는 세상에 나왔으나 아직 독립하지 못한 이들이 기거한다. 그들은 온전한 시간을 채우지 못했기에 스스로 생을 이어가지 못한다. 필연적으로 그들은 타인의(혹은 타인에 의해 제공되는) 자양분에 기생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들의 최종 목표는 이 공간에서 벗어나 존재론적 정당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즉, 자양분을 지급하고 있는 타인으로부터 분리 될 수 있는 그 때를 암중모색하고 있다. 왜냐하면 모체와 동일한 육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며, 동일한 욕망을 가진다는 것 역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나’와 ‘타인’의 존재론적 투쟁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타인에게 결별을 고하면서 자신의 생을 시작한다. (그렇다고 이 투쟁이 이 시점에서 마감되는 것은 아니다. 투쟁은 삶의 과정에서 끊임없이 반복된다.) 그러나 거부할 수 없는 것은 자신들이 결별하고자 하는 그 타인이 지금의 자신을 존재하게 한 모체라는 사실이다. 인큐베이터는 이러한 이중성을 내포하고 있는 공간이다. 육체적으로 분리되어 있으나, 아직은 완전히 독립하지 못한, 즉 타인과 차이를 인식하면서도 그것을 전면에 내세우기 보다는 공생의 방법을 모색해야만 하는 공간이 인큐베이터이다.




정용국_Rootless Tree_한지에 수묵_167×137cm_2008



정용국_Rootless Tree_한지에 수묵_137×167cm_2008


인큐베이터에서 들리는 두 목소리 ● 정용국의 화면은 나와 타인이 분리되기 이전 공간인 인큐베이터를 닮아 있다. 그곳에는 생명의 근간을 잃어버린 「뿌리 없는 나무」가 있다. 그러나 그들은 끊임없이 증식하는 유기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뿌리가 없기에 스스로 삶을 지속하지 못하고 인간의 육체에 기생하는 것으로 자신의 삶을 시작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인간의 육체에서 분리되는 것을 꿈꾼다. 인간의 육체에 기생하면서, 그리고 증식하면서 그들은 스스로 새로운 형상(나무 혹은 그것들이 모여 있는 정원)으로 변이한다. 즉, 존재론적 정당성을 타인에게 기생함으로 확보한다. 그러나 그것이 형태상 변이를 했다고 해도 여전히 그것은 인간의 육체라는 모체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정용국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인간의 육체 일까? 아니면 「뿌리 없는 나무」일까? 그도 아니면 이 모든 것일까? 정용국의 작업은 이 모든 질문에 긍정의 대답을 할 수 있다. 그러기에 그곳에는 ‘나’의 목소리뿐만 나와 공생할 수밖에 없는 ‘타인’의 목소리가 있다. ● 그들의 입장 차이는 극명하다. 「뿌리 없는 나무」의 입장에서 기술하면, 「뿌리 없는 나무」의 삶은 인간의 육체에 기생함으로 시작된다. 그들은 생명을 지속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증식한다. 그리고 육체의 미세한 부분까지 잠식해 들어간다. 얽히고설킨 그들의 몸부림은 증식하면서 인간 생명을 유지시켜주는 자양분과 피를 자신의 것으로 빨아들인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자양분으로 전환하여 자신의 몸을 완성하는데 적극 활용한다. 「뿌리 없는 나무」는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자신의 모체로부터 서서히 분리될 준비를 한다. 인간의 육체 입장에서 기술하면, 「뿌리 없는 나무」가 기생하면서 인간의 육체는 자양분을 잃기 시작한다. 「뿌리 없는 나무」가 미세한 곳까지 증식하여 자양분과 피를 빨아먹어 생을 얻어 가면 갈수록 인간의 육체는 죽음에 가까이 간다. 인간의 육체에게 「뿌리 없는 나무」는 자신을 갉아 먹고 있는 두려운 존재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의 육체가 가지고 있는 불안은 이중적이다. 그들은 불안을 느끼면서도 그것을 필연적으로 감수한다. 그것은 「뿌리 없는 나무」가 자신을 모체로 한 또 다른 자신이기 때문이다. 「뿌리 없는 나무」가 비록 모체인 자신을 벗어나 자신의 존재론을 입증하려 하지만 말이다.




정용국_Rootless Tree_한지에 수묵_70×69cm_2008



정용국_Rootless Tree_한지에 수묵_70×69cm_2008


그들만의 공생법 : 무한증식 ● 그들의 개별 입장에서 알 수 있듯이,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한 쪽은 생명에 또 다른 한 쪽은 (자의건 타의건)죽음에 다다르게 된다. 그러나 정용국이 포착해 놓은 지점을 살펴보면, 이들은 자신의 지향점에 다다르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생과 죽음 사이에서 끊임없이 미끄러지고 있다. 그러기에 뚜렷한 지향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작 그들에게서 삶과 죽음은 구별되지 않는다. 그저 화면에서 그들은 모두 여백을 향해 끊임없이 증식하고 있는 유기체로 보일 뿐이다. 그러나 화면을 조금만 목도해보면 그것들이 이미 출발점에서 죽음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식물에게 뿌리가 없다는 것, 그리고 인간의 육체가 신체 장기와 핏줄, 근육 등 그 내부를 보이고 있는 인체 해부도라는 사실은 이들이 죽음에서 출발했음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이들이 죽어 있다는 제시된 사실이 아니라 이들에게서 보이 생의 근원을 밝히는 것이다. 정용국은 죽음을 실존의 본질적인 양태로 형상화하고 있다. ‘죽음’이라는 변화 과정을 거친 육체를 흔히 시체라고 부른다. 시체는 죽음을 기점으로 인간의 육체가 물리적으로 급격한 변화를 일으킨 상태를 말한다. 정용국에게 있어서 죽음은 작업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죽음 이후 시간은 시체가 아닌 생(生)으로 전환된다. ● 정용국의 작업에서 일차적으로 보이는 것은 바탕 없는 화면에 놓인 알 수 없는 식물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식물의 형태를 띤 그 무엇인가이다. 대상에 집중하도록 되어 있지만, 정작 그것의 존재론적 가치는 모호하다. 식물의 줄기를 닮아 있는 것을 따라가다 보면 과다하게 뭉쳐져 있는 덩어리들이 발견되고, 그것들은 또 다른 줄기를 타고 어디론가 증식한다. 그것들을 식물이라고 보기에는 그 배열이 기이하다. 진행방향도 수직적으로 상승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은 수평적으로 펼쳐져 있다. 이것들은 식물의 최소한의 외형을 유지하고 있어서 유사 식물처럼 보이지만, 그것의 기저는 인체 해부도이다. 그렇다고 그것을 실사로 옮겨 놓은 것은 아니다. 두 죽음을 있는 그대로 설파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중첩시켜 그곳에 새로운 생명을 부가하고 있다. 배경에 갇혀 고착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대상은 어딘가로 모르게 증식하는 느낌을 준다. 이것은 대상을 죽음(시체)의 단계에서 생의 단계로 전환하는 기제이다. 그것은 정용국이 사용하는 매체(특히 먹의 번짐)와 관계있다. ● 정용국의 작업에서 작가/붓/먹/한지의 관계는 단순히 매체를 사용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작가는 붓을 통제한다. 붓에는 작가의 심리 상태 하나까지 그대로 전이된다. 그러나 그것이 한지와 만났을 때, 그 통제에는 우연의 요소가 개입한다. 물론 그 지점까지 계산하고 있겠지만, 먹의 번짐은 예상대로만 흐르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 붓을 거둬들일 수도 없다. 그러기에 한지에 붓을 가져가기까지의 관찰과 긴장관계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그리고 그것은 무한증식이라는 논리적 타당성을 부여한다. 이러한 논리적 타당성을 바탕으로 다른 매체 사용에 기반을 마련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수채화를 이용한 컬러 작업과 스티커를 이용한 작업을 선보인다.)




정용국_Rootless Tree_캔버스에 수채_90×90cm_2008



정용국_Floating Dreame_스티커_가변크기_2008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스티커로 구성한 「몽유(夢遊)」는 하나 일 수 없는 개별 단자를 무수히 증식시켜 새로운 꿈의 세계를 보여준다. 전체적으로 조망하면 「몽유도원도」라는 큰 틀에 갇혀 있다. 그러나 세부적으로 들여다보면, 그곳에는 스티커 한 장 한 장의 의미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춤을 추는 남자와 여자, 그리고 각종 모양의 스티커들이 마치 꿈을 유희하듯 그곳에 놓여 있다. 남자가 여자를 만나고 여자가 또 다른 여자를 만나고, 그들이 또 다른 형태와 조우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들의 증식이 무질서적이지 않다. 그들의 움직임은 철저하게 「몽유도원도」의 세계에 갇혀 자신들이 지나온 길을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는 정용국의 이전 작업에서 방법론을 사용한 필연과 우연의 교차를 통한 절제된 증식이 확장된 모습으로 보존된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주목되는 것은 전시 제목『뿌리 없는 나무』이다. 배경 없는 곳에 부유하듯 놓여 있는 (유사)식물들은 뿌리가 없다. 그것들은 중간 어딘가에서 생성되어 증식하고 있다. 정갈하게 놓여 있는 식물들에 담겨 있는 필연과 우연이 충돌하고 있는 붓의 기록들은 「몽유도원도」를 완성하고 있는 개별 단자(스티커)들의 의미와 중첩된다. 이제 정용국의 작업에서 보이는 것은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어떤 형상뿐만 아니라, 개별 단자와 작가 자신이 맺고 있는 긴장관계, 그리고 필연와 우연의 충돌의 현장이다.  ● 자생할 수 있는 시기가 오면, 인큐베이터는 더 이상 필요 없다. 정용국이 인큐베이터 안에서 키워온 두 대상은 각자의 길을 가는 것을 포기하고, 그곳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나아가 둘이 공생할 수 있는 길을 모색했다. 그리고 인큐베이터 안에서 무한증식 했다. 그들이 있기에 그곳은 이제 비좁다. 더 넓은 세상으로 나오고자 한다. 그곳에서 터득한 삶의 견고한 방법론을 가지고 말이다. 이번 전시에 처음 선보인 수채화 작업과 스티커 작업은 이러한 맥락에 놓인다. 그렇다면 이제 그들 앞에 있는 것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또 다른 타인과의 관계, 그리고 그들과의 존재론적 투쟁이다. 이제 그 첫걸음이 시작됐다. 그리고 그들은 새로운 타인을 만날 것이다. 그들이 살아 있는 한 반복적으로 말이다. 인큐베이터 안의 투쟁은 안전한 보호막에서 행해진 것이라면, 이제 그에게 그 보호막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이 과정에서 얻을 정용국의 다음 답이 궁금하다. ■ 이대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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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인 스토밍-위대한 상상력!

최정훈展 / CHOIJEONGHOON / 崔廷勳 / painting

2008_0723 ▶ 2008_0729



최정훈_브레인스토밍!-Whoops!!_캔버스에 아크릴, 먹_116.7×80cm_2008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최정훈 홈페이지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 ~ 07:00pm




영아트 갤러리_YOUNGART GALLERY
서울 종로구 관훈동 105번지 2층
Tel. +82.2.733.3410






"브레인 스토밍-위대한 무한(無限)상상력!" ● 작가 최정훈의 작품 쉽게 즐기기- “나의 관심사는 내 눈에 비친 세상의 여러 웃기는 상황들을 보고 즐기고 배설하는 것이다!" 보고-즐기고-싸고-채집하고-나의 방식으로 나의 분신들을 창조한다. ● 웁스!/내머리의 뚜껑이 열리던 날/나의 머리에는 노랑오리가 산다!/세상에 똥침을 가하는 남자!/세상의 부를 획득한 된장녀!/복날에 인기짱인 DOG!/세상일에 뚜껑열리는 안경잡이!/인터넷을 지배하는 전사들!/화장실 샤워기 청소용 인간!/등.. 현실에서 보고 느끼는 인간적인 욕구와 불만 등을 우스꽝스러운 나의 분신캐릭터로 만들어 내가 끌리는 대로 그리고 있다.




최정훈_세상에 똥침을 날려라! Counter Attack!_캔버스에 아크릴, 먹_116.7×80cm_2008



최정훈_세상의 부를 획득한 된장녀! Grow Rich!_캔버스에 아크릴, 먹_116.7×80cm_2008



최정훈_뚜껑열린 토스트맨!-Brains Power!_캔버스에 아크릴, 먹_116.7×80cm_2008


"블랙/옐로/화이트"를 쓰는 이유 ● 명시성,주목성을 노골적으로 노린 색이다! 타이틀문자 ● WHOOP S!/GROWRICH!/COUNTERATTACK!/SUPERPOWER!/BRAINS POWER!/FREEDOM!/HELLO!WHOOPS!BOB!/은 작품의  제목을 적은 것이다. 흔히 보는 광고포스터를 응용하였다고 생각하면 매우 쉽다. 블랙라인 ● 작품의 배경에는 블랙의 선들이 꿈틀댄다. 스모그(세상의 잡먼지)또는 나의 분신들이 뿜어내는 (에너지)를 표현한 것이다.




최정훈_변기탈출!-Freedom!_캔버스에 아크릴, 먹_116.7×80cm_2008



최정훈_우주를 클린하라! 샤워기맨-Super Power!_캔버스에 아크릴, 먹_116.7×80cm_2008



최정훈_핼로우!웁스!스폰지밥!-Hello!Whoops!Bob!_캔버스에 아크릴, 먹_116.7×80cm_2008


채집 ● 사냥꾼이 사냥을 하듯 나는 일상에서 벌어지는 사건들과 나의 머리속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손바닥만한 포스트잇에 적고 채집한다. 나에게 있어 포스트잇은 사냥총이며 펜은 총알인 셈이다. 미치도록 그리고 미치도록 배설한 후 창조한다..그것이 나의 무한(無限) 상상력이다. FREEDOM ● 나는 내가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린다. 나의 언어와 표현법으로! ■ 최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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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시대의 휴머니즘과 감성 텍스트

문진영_이영빈_이보라

2008_0721 ▶ 2008_0731



문진영_동물_캔버스에 유채_120×180cm_2005




초대일시_2008_0721_월요일_06:00pm

참여작가_문진영_이영빈_이보라

관람시간 / 11:00am ~ 07:00pm





갤러리 아트다_GALLERY ARTDA
서울 종로구 효자동 40-1번지
Tel. +82.2.722.6405
www.artda.co.kr






현상을 진리와 동등하게 생각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진실과 사실의 동등성도 명확하게 주장할 수 있는 시대적 상황도 아니다. 이는 전통과 새로운 시대의 현실적 가치들이 우리들 삶의 상식적인 가치들과 새로운 범주의 관계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일 뿐만이 아니라, 그로 인해 인간 존재의 인식론적인 범주적 재정의가 필요하고 또한 시대적으로 요청되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다원화된 주체의 균열이 포스트모더니즘적인 탈중심의 주체를 넘어 마치 하나의 거대한 동력처럼 작용하고 있고, 그로 인해 초래된 문화적 항등성 (globalizati on)이라는 전지구적인 보편성이 혹은 삶과 문화 현상으로서의 거시적인 일반성이 인간과 인간 세계의 삶의 구체적 차원들에 개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물질적인 조건들이 본질을 구성하고, 진리의 과정과 결과를 결정한다는 유물론적 시각이나 기술결정론적인 시각을 주장하고자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현재 눈으로 보여지고 있는 우리 세계 현상들의 다양한 발현에서 삶의 질적인 측면들에 영향을 주고 있는 기술적인 동력의 근거들을 과정적으로 무시할 수 없을 뿐만이 아니라, 결과적으로도 많은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을 예술적 관점에서는 어떻게 생각해야만 하는가를 고민해보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기술은 진리가 아니다.' ● 인간의 역사와 전통 속에서 휴머니즘이 삶의 활동과 행위에 대한 정의에서 근본적인 지향성임을 아무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나 대중매체를 통해 기술은 휴머니즘의 본질과는 대립적인 것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았고, 또한 기술은 종종 인간의 감성을 기계적인 경직성에 가두어 버리는 것으로 생각되어 왔다. 그러나 기술 또한 인간의 지각활동에서 보면 넓은 의미에서 하나의 텍스트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기술이 인간 지각활동의 텍스트로 간주될 수 있는 중요한 이유는 백남준 이후로 기술이 예술적 가치를 혹은 예술이 기술의 진보성을 삶의 활동의 본질과 관련된 차원에서 수용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점을 이번 기획 전시의 존재론적 근거를 구성하는 가정적인 진술(statement)로 주장하고자 한다. ● 휴머니즘은 흔히 인문학적 전통의 기반 위에서 형성된 세계관, 개인적인 삶의 정당성을 중시하는 모더니즘적인 맥락에서 형성된 관점들을 보편화 시키는 문제들과 관련이 있고, 그런 과정 속에는 인간의 정서적인 차원의 활동들이 끊임없이 삶의 사실적인 차원들과 화해를 쌓아가는 감성적인 범주들이 존재한다. 즉 이런 과정들은 삶의 경험들을 역사적 장(field)이라는 범주로 의식화시키는 과정들인 것이다.




문진영_에너지 생성_캔버스에 유채_122×179cm_2005



문진영_내 생각_캔버스에 유채_94×122cm_2006


이번 전시에서 문진영의 작품은 개인과 역사, 환영적인 것과 무의식적인 자아의 차원들이 혼융되어 기존의 문화적 단일성을 넓은 의미에서의 본질(자연)과 연결시키고자 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자유로운 몸과 자유로운 행위가 작가의 심리적 단일성을 분열시키고, 그렇게 분열되어 생물학적인(biomorphic) 형상들과 같은 형태들로 분화된 요소들은 다른 차원의 경험적 주체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기술시대에 분열적으로 존재하는 자아의 재조합이자, 기술 환경의 중심에서 존재할 수밖에 없는 현대적인 자의식에 의해 구성되는 수동적인 존재성을 재정의 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는 정체성을 가변적인 개체로 다중화 시키는 멀티미디어 기술의 경향과는 달리, 개인의 정체성이 단자화된(monadized) 환경에서 어떻게 정의되어야만 하는 것인가에 대한 주장일 수도 있는 것이다. 문진영의 화면에서는 과잉과 절제가 반복되고 있지만, 화면에 숨겨진듯이 드러나는 형태들을 통해 결국 작가가 추구하는 것이 자아와 타자의 화해를 지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영빈_보라_종이에 연필, 화장품_51×489cm_2008



이영빈_정물화_종이에 혼합재료_25×28cm_2008


반면에 이영빈은 파편화된(fragmented) 신체를 세상이라는 여백 속에 제시한다. 이 작가에게서도 개인의 존재론적 성격에 대한 정의의 문제, 즉 개인의 정체성 문제가 작가적인 자의식의 중심에 존재한다. 작가에게는 팔루스(phallus)와 같은 근원적인 원상의 결핍이 여성적인 인간조건이 아니라 제도의 결핍으로 생각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작가에 의해 제시되는 형상들이 표면적으로는 인간의 관점에서 받아들여지는 완성된 형상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고, 파편적으로 분열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로운 행위로 확산되지 못하는 몸의 부분들은 의미가 형성되지 않는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주체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작품에서 행위는 발생하지 않고, 의식의 첨예함만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경향은 여백을 통해 다시 한 번 강조된다. 작가는 행위와 침묵의 경계 속에 갇혀있는 자아 혹은 자의식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영빈_보라_캔버스에 연필, 화장품_53×73cm_2008



이영빈_풍경화_캔버스에 혼합재료_53×73cm_2008


문진영과 이영빈 이 두 작가는 텍스트로서의 자아와 텍스트의 내용으로서의 정체성, 그리고 그런 존재론적 시각에 21세기적인 기술적 의식의 지평이 확대되면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우리의 삶과 밀접해진 타자(인터넷 의식 혹은 무의식과 같은 우리 삶의 일부가 되어버린 기술적 감성들)의 감성을 해체하고 조합하는 것을 반복한다. 이런 행위(deconstruction)는 시각적으로 표현되기도 하고(문진영), 의식적으로 본질화 되기도 한다(이영빈).




이보라_시티라이프_단채널 비디오_가변크기_2008


이 두 작가와는 달리 이보라는 이 두 작가가 평면 작업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존재와 의식의 표현과 본질화 과정을 기술매체의 특성을 활용해 종합한다. 그녀는 인간 이성의 역사, 그리고 특히 모더니즘의 가장 대표적이자 상징적인 문화적 표현의 도구인 언어와 20세기 이후 언어적 영역을 대체하기 시작한 이미지를 예술적인 객관성(기술시대의 탈중심화된 자아)의 시각에서 제시한다. 작가는 삶의 고유성(authenticity)이 인간의 가장 대표적인 문화적 생산물(언어와 이미지)과 맺는 관계를 물리적이고 물질적인 기반이 아닌 인식의 확장이란 측면에서 제시한다. 그녀가 제시하는 컨텐츠는 기술적으로 확장된 자아가 아니라 인식으로 감각되는 기억의 경험들인 것이다. 촉각, 후각 등과 같은 물질적으로 구현된 감각의 대상이 아니라는 면에서 미디어 아트의 비경험적 존재성과 연결되어 있지만, 인간의 문화적 차원의 기억들을 종합하려 하고 있다는 면에서 디지털 시대의 미학적 비판성을 지닌 휴머니즘적인 가치들을 생산하고자 하는 노력인 것이다.




이보라_어떤욕망_단채널 비디오_가변크기_2008



이보라_부끄러움_단채널 비디오_가변크기_2008


이번 전시 『기술시대의 휴머니즘과 감성텍스트』의 기획 의도는 매체의 상이함을 넘어서, 21세기 나노시대(nano age)의 새로운 감성이 젊은 작가들의 작업을 통해 어떻게 구체화되고 있는지를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미국 모더니즘 비평가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는 회화에 대해 그 매체만의 고유한 특성으로서 "평면성"이라는 개념을 부여했다. 현재 우리는 디지털 기술시대에 예술에 대해 이야기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이 시대 예술의 가장 고유한 특성은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이것은 앞으로 우리가 찾아야만 할 답이 될 것이고, 이번 전시를 통해 새로운 시대의 미학을 발견한 가능성을 열어놓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애매하나마 결론적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예술적으로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새로운 시대의 외면할 수 없는 미학과 인간조건이 될 것이다. ■ 정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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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히어로_Super Hero

유혜리展 / YOOHYEREE / 柳惠利 / painting

2008_0726 ▶ 2008_0804



유혜리_고독한 슈퍼히어로 Lonely Super hero_캔버스에 유채_33×24cm_2008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30pm ~ 06:30pm




아카 서울 갤러리_AKA Seoul Gallery
서울 종로구 낙원동 283-38번지
Tel. +82.2.739.4311






‘슈퍼 히어로’를 통한 영웅 이미지와 익살의 표현 ● 유혜리의 이전 작품세계는 일상 이미지를 표현하는 것이었는데 기쁨과 슬픔, 즐거움과 지루함의 일상적 체험을 마치 일기를 쓰듯이 그려내었다. 그 일상의 세부적인 내용들은 특별한 사건의 이미지가 아니라 반복되는 평범한 하루의 주변적 일상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집안에서 일어나는 일과를 표현하던 작품세계는 변화하여 집안이 아니라 집밖 외부에서 활동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표현하였는데 커피숍에서 차를 마시는 사람들이나 차가 달리는 도시 도로변의 모습, 홀로 앉아 창밖의 사람들을 보고 있는 모습들을 표현해 내었던 것이다. ● 그러다가 점차 동물이 등장하면서 동물과 인간의 관계와 인간과 주변과의 관계를 희화화 시켜 갔다. 나아가 이번 작품전에서는 ‘돼지’를 ‘슈퍼히어로’으로 탄생시켜 이상적 영웅주의에 대한 꿈과 욕망을 희화적으로 표현하였다.




유혜리_슈퍼히어로 그 후... After be a Super hero_캔버스에 유채_33×24cm_2008


유혜리의 이번 작품전에서는 「슈퍼히어로」연작이 중심이 된다. ‘슈퍼히어로’는 돼지의 모습을 지니고 있지만 미국의 만화나 할리우드 영화에서 보여지던 ‘슈퍼맨’과 비슷한 이미지이다. 가슴에 ‘S'자를 새기고 마스크와 망토를 착용한 점이나 ‘슈퍼히어로’라는 이름 등이 ‘슈퍼맨’을 연상하게 된다. 메트로폴리스의 기자로 일하는 슈퍼맨은 평소에는 얌전하고 눈에 띄지 않는 일상을 보내다가 세계가 악당들에 의해 위험에 빠지면 악당들과 맞서 싸우고 그들을 물리친다. 세계가 그를 필요로 할 때면 영웅으로 변신하여 ‘진리’와 ‘정의’를 수호하기 위해 결연하고도 꿋꿋한 자세로 싸운다. 유혜리의 작품에서도 슈퍼맨의 역할과 같이 슈퍼히어로가 자유의 여신상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몸에 자유의 여신상을 묶고 바다 위를 날아다니는 장면이 있고, 파리의 개선문 위를 날아다니는 모습이 있는가 하면 이집트의 스핑크스를 배경으로 활동을 하는 장면이 있다. 슈퍼히어로가 세계 각지를 날아다니면서 위험에 빠진 지구를 구해내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는 것이다. ● 유혜리는 왜 슈퍼맨을 모델로 하여 ‘슈퍼히어로’를 탄생시켰을까? 세계 어느 곳에서나 슈퍼맨을 모르는 곳은 없다. ‘S’라는 마크만 보아도 세계인이 알 수 있는 슈퍼맨은 진정한 영웅의 이미지이다. 항상 정의로 무장되어 어떤 악당이든 무찌르며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슈퍼맨은 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이상적 영웅이다. 모든 것이 급속하게 변해가는 시대에서도 수퍼맨은 ‘정의’ 와 ‘선’이라는 절대 가치를 추구해왔고 많은 사람들에게 그 정신이 각인되어 있다. 그리고 여러 세대에 걸쳐 지구의 수호자이자 강력한 영웅으로서 존재해 왔다. 유혜리는 그러한 슈퍼맨의 아이콘을 잠시 빌리는 것이다. 즉 사람들에게 영웅으로 인식되어 있는 슈퍼맨의 아이콘과 정신을 ‘슈퍼 히어로’를 통하여 부분적으로 빌리고 있는 것이다.




유혜리_슈퍼히어로의 선물 Gift _캔버스에 유채_130.3×89.4cm_2008


이와 같은 ‘슈퍼히어로’를 탄생시킨 이유를 유혜리는 “어린 시절 영웅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나 신데렐라 스토리의 영화를 좋아했다. 그러한 영화를 보면 주인공은 보잘 것 없거나 사회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다가 영웅이 되거나 신데렐라가 되면서 사회로부터 인정받고 주목받게 된다. 나는 그러한 영화를 볼 때마다 마치 주인공이 된 듯 짜릿한 쾌감을 느끼곤 하였으며 영화를 보고 나서도 한 동안 주인공의 모습에 열광하며 대리만족을 느꼈다. 겁 많고 자신감이 부족했던 나에게 영웅은 꿈이자 목표가 되었는데 ‘슈퍼히어로’는 그러한 나의 욕망을 해결해주는 이상적 이미지로 나타낸 것이다.”고 하였다.




유혜리_슈퍼히어로 인 뉴욕 Super Hero in New york_캔버스에 유채_80×40cm_2008
유혜리_슈퍼히어로 인 파리 Super Hero in Paris_캔버스에 유채_80×40cm_2008



유혜리_슈퍼히어로 인 이탈리아 Super Hero in Pisa-Italy_캔버스에 유채_80×40cm_2008
유혜리_슈퍼히어로 인 인도 Super Hero in India_캔버스에 유채_80×40cm_2008


그러므로 ‘슈퍼히어로’는 유혜리 자신의 모습을 의인화하여 나타낸 것이다. 슈퍼맨의 모습 위에 자신의 얼굴을 직접 그리지 못하고 간접적으로 돼지의 모습에 슈퍼맨의 모습을 결합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돼지의 모습은 의인화된 유혜리 자신이며 돼지의 몸을 통하여 자신을 슈퍼맨과 동일시시킴으로서 영웅의 강한 힘에 대한 경외와 자신의 욕망을 부분적으로 해소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영웅과 스타는 일시적으로 욕망을 실현시켜 줄 수 있는 대리의 대상인데 슈퍼맨을 슈퍼히어로와 동일시 시켜 욕망을 대리만족하고 있는 것이다. ● 이상과 같이 유혜리의 작품세계는 ‘돼지’와 할리우드 영화나 만화 등에 등장하는 영웅적인 ‘슈퍼맨’의 아이콘을 교배시켜 ‘슈퍼히어로’를 만들어 내었다. 그리고 그 슈퍼히어로는 의인화된 돼지의 모습으로 태어났다. 슈퍼히어로는 하늘을 날아다니면서 위험에 빠진 지구를 구하기도 하고, 때로는 권투를 하기도 하며,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담배를 피우기도 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여기서 유혜리는 ‘슈퍼히어로’를 통하여 ‘영웅적인 힘’과 ‘정의’ 그리고 ‘인간적인 모습’을 나타내려 하는 것이다. ● 한편 돼지는 사람들에게 지저분하고 욕심 많은 동물로 인식되어 있다. 이와 같은 돼지에 대한 인식을 유혜리는 역으로 이용하여 하찮은 돼지를 영웅의 이미지로 변화 시켰다. 그리하여 욕심 많고 지저분하다고 조롱받던 돼지는 영웅이 되어 하늘을 날아다닌다. 잘생기고 강력한 근육질의 영웅 슈퍼맨 이미지를 돼지의 모습으로 의인화 시켜 감상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익살스러움과 유쾌함 주고 있는 것이다. ■ 오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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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yage to Vanishing Landscape(사라져가는 풍경), Cinema -4D animation video, 2008  

 

 

 

 

    2008 대안공간 풀

    작가지원 4

   < Voyage to Vanishing Landscape

       -사라져가는 풍경, Project I >

    

 

     전시_ 2008년 7월 30일 (수) - 8월 12일 (화) / am11:00-pm7:00, 매주 월요일 휴관

      초대_ 7월 30일 (수) 오후 6시

     장소_ 대안공간 풀 alternative space pool

     후원_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서울문화재단

 


내가 본 가장 깨끗하고 순수한 지구의 시간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그곳.

이 전시에서 나는 지구영토에서 조용히 사라져가는(실은 점유되어가는) 장소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그것은 때로 역사 속에서 권력에 의해 사라진 왜곡된 공간이거나 혹은 ‘남극풍경’처럼 개발과 과학 연구라는 목적에 가리워진 생태 파괴적인 장소이다.

이제 인간의 손길이 쉽게 닿지 않는 곳은 어디에도 없으며, 극지 또한 예외일 수 없다.

에너지와 지구환경 연구는 기초과학의 도전이라는 프로퍼갠더(Propaganda)로 개발 사업이 진행 중이며, 각 나라의 과학 기술이 자존심과 푯대로 연결되는 경쟁적인 공간으로 모습을 바꾸고 있다. 자국의 고유한 ‘기지’가 없는 국가는 남극 조약에서 회원국으로서의 발언권이 없기에, 21세기의 신대륙과 에너지 확보에서 우선순위가 박탈된다는 위기감에서 각국의 연구와 기지 건설은 무척 활발하다.

 

 

Voyage to Vanishing Landscape(사라져가는 풍경), Digital print, 2008

 

 

점점 녹아가는 극지. 마지막 남은 신대륙.

정복이라는 인간욕망의 새로운 대상이 되어 점점 뜨거워져만 가는 지극히 하얗고 차가운 공간. 이번 전시 <Voyage to Vanishing Landscape-사라져가는 풍경, Project I> 에서 나는 국경 없는 영토, 극지에서 벌어지는 각국의 영역 확보를 위한 행위들을 애니메이션 시뮬레이션(simulation)과 파노라마 형식의 'Real-3D' 입체영상 설치로 재현한다.

남극여행의 기억은 3개의 애니메이션비디오 연작(Trilogy)으로 재생되고, 녹아가는 빙산, 높아지는 수면, 하얀 빙판대륙에 끊임없이 철제 컨테이너 박스를 날라대는 헬기와 시속 30km의 느린 트랙터 행렬이 이어진다. 조디악 보트를 타고 하는 항해는 더 이상 고요할 수만은 없고 빠르게 움직이는 연필로 그린 파도 물결처럼 불안하기만 하다. 이렇게 리노베이션(renovation)되어가는 남극의 풍경은 인간 행위에 내재되어있는 테리토리즘(territorism)의 욕망을 드러낸다. 그러나 나 역시 이 프로젝트를 위해서는 공격적인 활동의 한 형태로써만이 이 공간에 비집고 들어갈 수 있었다는 것, 이 또한 아이러니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글 - 릴릴

 

 

 

Transport Helicopter (나르는 헬기), 3D animation video, 2008

 

 

 

Container Road (컨테이너로드), 3D animation video,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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