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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물에 관한 의견중에 하나인데 그닥, 견고하지는 않다. 그러나 중독이 가지고 있는 편견 내지는 그것의 광범위성을 짚어내고 있다는 의미로 올리는 바.
또한 팔년전 이야기인데도 작금의 상황을 보면, 그닥 나이진 세상은 아니라는 반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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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조 97년 10월 (제11호) 불타는 육체의 연대기
[마약] 아름다운 중독
박준희
항상 예수님께 감사하는 이들과 항상 마약에 쩔어 사는 사람의 차이는 어디있을까. 모든 것이 신의 뜻인, 하나님의 은총으로 자신의 은혜로운 일상이 비로소 가능한 자들에겐 기도가 마약이다. 기도하지 않는 일상의 예측불가능성이 주는 불안은 그들에겐 참기 어려운 것이다.
만족할만한 일상이라는 차원 외에도 몰아, 초월이라는 성스러운 체험의 경우 역시, 환각제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과 신의 은총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 사이에 큰 차이가 존재한다고 보기 어렵다.극단적인 종교 행위를 통해 인간이 도달하는 경지와 마약을 통해 도달하는 활홀경; 뿐만 아니라 그것이 행사하는 효과면에서도 양자는 거의 구분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악마적인 의식과 종교의 기능간의 완벽한 구분이란 별로 쉬워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마약이 육체를, 나아가 인간을 헤친다고 일방적으로 단정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해 보인다. 한편에서는 마약은 이성의 종말에 다름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다른 한 쪽에서는 새로운 감수성의 시작으로 주장할 수도 있다. 부언하지만 이성의 종말이라는 차원에서 보자면 종교 역시 면밀한 논의가 필요할 뿐이다.
무엇에든 중독되지 않은 삶은 우선 편하고 그래서 자유롭다. 우리는 그것을 건강하다고 하거나 건전하다고 한다. 중독된 것들이 없는 자들, 중독된 대상이 적은 자들은 당당하고 거침없고 분리된 자아를 주장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중독은 필요하다. '잊게'하는, 자신을, 자신의 조건을, 어떤 대상을 잊게 하는 중독성의 물질은 현실적으로 어차피 필요악이다. 마약은사라지지 '못한다'. 종교도 사라지지 않는다.
새로운 감수성의 시작의 매개로서의 중독은 생산적이다. 밝음에 속한 것들이 놓치는 틈새에 존재하는 그 미세하게 억압적인 것들, 당신과 나의 이 화해할 수 없는 불화를, 세상이 대수롭게 알아주지 않는 나의 이 치명적인 죽어감을 무언의 언어로 늘어놓는 그 드러냄이, 중독과 중독아님 사이에서 긴장되게 자신을 유지하고 설명할 수 있다면 이렇게 숨막히는 세상에서 마약만큼 전복적으로 생산적인 물건도 어쩌면 드물는지 모른다.
아무것에도 중독되지 않은자, 그들이야말로 반동이고 기득권자이며 '등따시고 배부른' 자들이다. 약하게는 88과 디스, 말보로와 윈스턴에서 맥주, 소주, 위스키, 보드카. 섹스 중독 쪽으로는 남자(혹은 여자), 마스터베이션 기구. 혹은 도박, 게임. 그리고 약물로는 대마초, 아편, 마리화나, 코카인, 필로폰. 그리고 기독교 불교, 천주교, 남녀 호랑이교 등등 - 아무래도 종교도 마약 같다 - 우리 주변에 중독물질은 널렸다.
당신은 어디에 중독되어 있는지. 아무것에나 중독된 당신이 거기에서 새로운 '언술'을 할 수 있다면, 당신의 존재의 정당함을 '주장'할 수 있다면, 스스로를 설명하는 말빨을 세상을 향해 갈겨 댄다면 세상은 또 어떤 식으로건 달라질 수 있다. 어쩌면 달라진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야 할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기에 마약에 대한 일방적인 폄하와 마녀사냥은 전혀 현실적이지 못한, 가진자들의 도덕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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