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찬석 회화展
'살아가며'

살아가며 / 130×162cm / Acrylic, Oil on
Canvas / 2007
2007년 9월 4일
~ 9월 11일
스페이스
아침
서울 종로구 화동 138-7번지 Tel. 02_723_1002
www.mooze.co.kr
초대일시 : 2007/9/5 수요일
06:00pm
익숙한 현실 속의 낯선
만남
낯설게 하기 - 제유적 데페이즈망
주찬석의 이번 전시 타이틀 '살아가며'의 연작들에는 익숙한 것과 낯선 것의 만남이 교차한다. 달리 말하면, 그의 작업은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을 낯설게 만나게 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주찬석은 일상의 익숙한 이미지들을 '낯설게 하기'(Verfremdung) 전략을 통해 작품
안에 자리 잡게 해서 보는 이들로 하여금 심리적인 거리감을 갖게 만든다.

살아가며 / 117×91cm / Acrylic, Oil on
Canvas / 2007
원래 러시아 형식주의 문학가 쉬클로프스키의 문학 형식 구성(plot) 이론으로부터 유래한 용어인 '낯설게 하기'는 예술의 장에서 브레이트
식의 '소격효과(alienation effect)'를 창출한다. 즉, 예술 수용자들로 하여금 예술에 대한 시각적, 청각적, 심리적인 상태의
즉각적인 몰입을 방해하고 사유의 과정을 잠입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낯설게 하기는 미술의 장에서도 예외는 아니라서 모더니즘 시기의 초현실주의
미술에서 데페이즈망(depaysement) 기법을 통해 유행되었다. 초현실주의 시인 로트레아몽이 노래했던 '해부대 위에서 벌어지는 재봉틀과
우산의 기이한 만남'과 같은 '사물들의 낯선 만남'을 주도하면서 소격효과를 창출해 온 것이다. 마그리트 회화에서 익히 보아온 이러한 데페이즈망
기법은 오늘날 현대미술에서 '낯설게 하기'를 성취시키는 조형태도로 자리 잡은 지 오래이다.
주찬석의 회화에서, 낯설게 하기의 전략은 이러한 데페이즈망 기법이 주를 이루고 있다. '전치(轉置)'로 번역 가능한 데페이즈망이란 용어는
원래 '환경의 변화'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어떤 사물을 일상의 환경으로부터 새로운 환경으로 전치시켜 사물 고유의 성격을 벗어나면서 성취시키는
만남의 현상학'이라 정의할 만하다. 이번 전시에 출품되는 작품들은 기계부속과 꽃, 달팽이와 나뭇잎, 개구리와 바다와 같은 형식으로 개별
이미지들이 각자 다른 환경들로부터 와서 하나의 화면 안에서 만나고 있다.

살아가며 / 91×117cm / Acrylic, Oil on
Canvas / 2007
그것은 사물의 부분이 그 사물 전체를 가리키는 제유(提喩)적 전략으로 주찬석의 개별 이미지들은 그것의 대표성으로 확장되는 제유적 상징이
된다. 그러니까 주찬석 작품에서, 기계부속과 꽃은 문명과 자연으로, 달팽이와 나뭇잎은 동물과 식물로, 개구리와 바다는 생명체와 환경으로 확장되는
제유적 상징체이자 제유적 데페이즈망인 것이다. 한편, 실물의 크기를 확대와 축소의 방식으로 변조하는 태도도 낯설게 하기의 전략을 강화시켜낸다.
이를 통해 관객은 익숙한 이미지들을 즉각적으로 소비하지 않고 이들의 낯선 연결고리와 그 의미를 사유하게 되는 것이다.

살아가며 / 200×50cm / Acrylic, Oil on
Canvas / 2007
주찬석의 회화에서 '낯설게 하기'의 전략으로 실현된 데페이즈망 기법은 실상 1회 개인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창틀, 호수, 붓, 폴리코트로
만든 마스크 등 '발견된 오브제(objets trouves)'를 작품 안에서 '만들어진 오브제(objets crees)'로 치환시켜 오브제의
원래적인 속성을 변모시키면서 데페이즈망을 실현한 것이다. 회화에서 데페이즈망을 통한 낯설게 하기 전략은 사물 고유의 상투적 이미지를 전복시켜 또
다른 의미들로 되살려내는 것이라는 점에서, 오브제와 페인팅이 만나는 주찬석의 리얼리즘적 화풍에서는 그것이 더더욱 효과적이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어 보인다.
가두기와 열기 - 다중 프레임
이번에 출품하는 작품들은 이전의 오브제가 탈각되고 이미지들이 전면에 나서는 까닭에 프레임 안을 더더욱 주목하게 만든다. 회화에 있어
프레임은 출발과 종결의 지점이다. 재현의 대상을 사각형으로 된 시선의 틀 속에 가두는 시작이자 조형과 표현의 제스처를 액자의 양식으로 마무리하는
지점이다. 그러니까 프레임은 근본적으로 그 내부로 무엇인가 묶어두려고 하는 '가두기'의 역할을 수행하는 회화적 장치이다.

살아가며 / 73×100cm / Acrylic, Oil on
Canvas / 2007
그런데 우리는 주찬석의 회화가 이중, 삼중의 프레임으로 구성되어 있는 까닭으로, '가두기'라는 기본적인 역할을 넘어 '열기'의 역할마저
실행하는 새로운 지점을 흥미롭게 관찰하게 된다. 주찬석은 회화, 사진, 창틀의 프레임 형식을 다층적으로 적용한다. 그는 일차적으로 미적 대상을
화면 안에 가두는 회화적 프레임을 작동시킨다. 때로는 여기에 풍경이나 사물을 찰칵하는 셔터의 움직임과 함께 찰나에 가두고 마는 사진적 프레임을
부가시키기도 한다. 현상된 사진에서 발견하게 되는 인화지의 하얀 여백을 의도적으로 그려 넣는 것이 그것이다. 게다가 작가는 사진적 프레임을 다시
액자 형식의 창틀 이미지로 둘러싸서 프레임을 중층화시켜 내기도 한다.

살아가며 / 72.8×91cm / Acrylic, Oil on
Canvas / 2007
반대로, 사각형 프레임이 중첩되는 내부로 마치 화면을 파먹은 듯 동그랗게 열리는 비사각형의 변형 프레임은 프레임 내부에 형성되는 또 다른
프레임이 된다. 그러니까 주찬석의 회화는 다중 프레임으로 '가두기의 장치'가 중층화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다중 프레임안의 이미지들이 어떻게 '열기'를 실현시킬까? 일견, 주찬석의 이러한 복층의 프레임은 만화에서 보듯이 프레임과 프레임이
지속적으로 연결되어 단절된 이미지들을 내러티브 구조로 연결시키는 '연속적 기능(sequential function)' 을 감당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주찬석의 다중 프레임이 만화의 다중 프레임과 다른 지점은 개별 프레임의 이미지들이 서로 상충, 대비되거나 비연계적,
비연속적이라는 데 있다. 따라서 개별 프레임의 이미지들은 익숙하지만 비연속적인 개별 프레임 속 이미지들의 만남은 '낯설게 하기'를 촉발시킬
따름이다.
그렇다면 비연계적, 비연속적 상태로 가두어진 개별 프레임들의 '열기'가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주로 '끈'과 같은 매개체 이미지가
등장함으로써 가능해지거나 이미지들이 프레임의 경계 위로 걸터앉으면서 촉발되어진다. 실제 그의 작품에서는 이러한 '끈'의 형상이 프레임 밖으로
넘어 들어와 프레임 안과 밖을, 또는 하나의 프레임과 또 다른 프레임 사이를 연계하려는 소통의 제스처를 보여준다. 한편, 돼지나 개구리와 같은
이미지들이 프레임의 경계 위에 걸터앉게 되면서 프레임 내부와 외부의 소통을 도모하기도 한다.
살아가며 - 이미지의 알레고리와 삶의
리얼리티
그의 회화에서, 여러 패널들이 복잡하게 연결된 쉐이프트 캔버스(Shaped Canvas) 형식이나 복층적으로 구성된 다중 프레임의 장치는
우리들 일상의 복잡다단한 관계지형을 알레고리화한다. 개별 프레임은 나와 너, 주체와 타자, 인간과 환경, 인간과 문명 등 하나의 그룹과 또
하나의 그룹으로 경계를 짓는 '가두기의 장치'이자 상호간 '만남의 주체'들로서 알레고리화된다. '알레고리(allegory)'란 추상적인 개념을
직접 표현하지 않고 다른 구체적 대상으로 표현하는 우의(寓意)의 방식이듯이, 그의 개별 프레임의 이미지나 그것들의 낯선 만남은 우리의 일상과
삶에 대한 훌륭한 알레고리이다. 우리의 일상이란 늘 새롭고도 '낯선 만남'이 개입되고 그것이 다시 우리들에게 익숙해지는 관성들로 지속되지
않던가?

살아가며 / 45.5×53cm / Acrylic, Oil on
Canvas / 2007
그의 전시 타이틀 '살아가며'에는 이미지의 알레고리가 꼬리에 꼬리를 문다. 힘겹게 나뭇잎에 매달려 있는 개구리, 드넓은 바다가 보이는
프레임 밖을 향해 천천히 벽을 오르고 있는 달팽이, 아슬아슬한 모양새로 줄타기를 하고 있는 달팽이들은 분주하고도 각박한 현실계를 살고 있는
현대인의 일상을 알레고리의 양상으로 비유하고 있다. 드넓은 바다나 하늘은 현대인이 지향하는 회귀의 근원이자 마음의 안식처이며, 톱니바퀴와
기계부속은 복잡다기하고 분주한 현실계의 모습으로 상정된다. 매듭이 지어져 있는 끈은 미묘하고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인간관계 혹은 풀기 버거운
현실계의 인간 굴레 등을 알레고리화한다. 그리고 프레임 사이에 드리워진 끈은 주체와 또 다른 개별 주체를 소통하는 매개자 혹은 법과 제도와 같은
질서의 체계를 알레고리화한다.
주찬석의 알레고리화된 모든 이미지들은 '살아가며'라는 타이틀과도 같이 복잡다기한 삶의 면면을 현실화시키기에 적격이다. 우의적 풍자와 제시가
돋보이는 그의 그림들이 손의 테크닉이 생생하게 전달되는 리얼리즘, 즉 '잘 그린 그림'으로 구현되고 있다는 점에서 알레고리의 효과는 극대화된다.

살아가며 / 52.5×96cm / Acrylic, Oil on
Canvas / 2007
그러나 주찬석의 과도하게 동화적인 방식의 알레고리는 단지 우리들 삶의 보편적 표상을 상투적인 방식으로 치환시킬 위험에 처할 수 있다. 그
알레고리의 과정이 지나치게 대비의 미학으로 상정된다는 점에서 그 상투성에의 혐의는 더욱 쉽게 노출될 가능성에 직면한다. 선명한 대비적 장치나
동화적인 공간 구성은 자칫 그래픽 디자인에서 볼 수 있는 '명징한 현현(顯現)'을 촉발해서 회화를 일상의 삽화 같은 차원으로 떨어뜨리고 삶의
미시적 리얼리티와 총체성을 적절히 담아내기에는 역부족일 수 있다.
한편, 루카치 식으로, 삶의 총체성 미학이란 '보편적 현실로부터 구별되는 자기 완결적 총체성'을 가리키고 있다는 점에서 작가 주찬석의
알레고리는 약해 보인다. 그의 알레고리가 보다 의미 있고 풍요로운 미학을 창출하려면, 현재의 낯설게 하기를 시도하는 성공적인 다중의 프레임
장치를, 고유하고 내밀한 자신만의 경험의 세계와 접목시키는 심도 있는 조형적 실험과 연구들이 병행되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주찬석의 '익숙한
현실 속의 낯선 만남'이라는 삶을 대면하는 주제 의식은 그것을 성취시키기 위한 훌륭한 출발점이다.
김성호(미술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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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dy & Talk
전수경 회화展
2007_0822 ▶ 2007_0902

전수경_Adam & Eve Bag_한지위에 먹, 분채_80×100cm_2007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갤러리 도올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7_0822_수요일_05:30pm
갤러리 도올 초대展
갤러리 도올
서울 종로구 팔판동 27-6번지
Tel. 02_739_1405
www.gallerydoll.com
Body & Talk ● 전수경의 작업은 몸의 사유로 시작된다. 인간 실존에 대한 성찰, 고독과 독백을 몸으로, 누드의 형상으로 표현해 왔다. 개별적 인물의 재현이 아닌 인간의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속성을 다루고 있다. 벗은 몸이라는 대상과 동양화의 결합은 화단의 관심을 받아왔다. 누드라는 서구의 개념과 조용하고 관조적인 동양화에서 그 결합은 드문 예이다. 화면안의 누드들은 얼굴도 시선도 없이 토르소(torso)로 등장한다. 완전한 형태의 몸이 아닌 형상들은 직설적 신체의 표현을 자제하고 공간을 부유하듯 자유롭다. 화면안의 하나, 둘 이상의 몸들은 섬이나 인간 군중들의 모습이 연상되며 흔들리는 듯한 드로잉 시점들은 동양의 산수풍경을 보는 듯하다. 그간의 작업에서 작가는 수묵을 바탕으로 가루안료와 목탄을 접목시켜 드로잉에 적용하고 벽화제작의 일부인 전사기법(transcription)까지 활용하여 다양한 표현기법을 탐구해 왔다.

전수경_Body & Talk_한지위에 먹, 가루안료, 콘테, 아크릴_80×10cm_2007

전수경_Hand in Hand_한지위에 먹, 분채, 아크릴_161×130cm_2007
인간이 사물을 보는 관점은 현 사회를 이루는 근거가 되어왔다. 구석기 시대의 알타미라 동굴벽화, 르네상스의 인본주의를 거쳐 여기까지 온 것이다. 인간이 만든 사물은 문명사회의 원동력이며 이것들은 무엇보다 사람의 몸을 근거로 시작하며 형태(Image)와 기능(function)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예술가에게 있어서도 몸은 중요한 소재인 것이다. 이번 신작에서 핸드백, 부츠, 선글라스, 소파 등 몸의 형상을 닮은 일상의 사물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온전한 인간의 모습 또는 일부인 손과 얼굴이 나오기도 한다. ● 더불어 성경속의 아담과 이브, 그리스 신화 중에서 남성과 여성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간의 시리즈에서 인간의 고독함과 내면적인 성찰을 추상적으로 표현해온 작가는 이번 시리즈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남과 여의 관계, 인간본성에 주목한다. 신의 창조물 중에 인간이 신의 형상과 가장 유사하다고 생각되지만 취약해 보이는 인간본성의 모든 것들 탐욕, 에로스, 갈망 등을 이루며, 각기 다른 성(gender)으로 부터 부여된 몸은 서로를 필요로 할 수 밖에 없으며 이러한 감정과 생각을 표현하고, 그리고 성(sex)을 통해 후손을 남긴다. 음과 양을 이루는 다른 성의 조화, 남녀관계에서 비롯되는 죄성까지도 포함한 보다 인간적인 인간의 모습으로 어쩌면 신은 인간이 자신의 영역과 한계를 본질적으로 깨닫도록 그런 의도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신은 인간을 남성과 여성, 두 가지 성으로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완성된 디자인을 지닌 몸은 우주자연과 같이 변모되어 왔으며 인간의 아름다움과 추함, 삶과 죽음 등 무한한 연속적 관계를 추구한다.

전수경_Pandora's Box_한지위에 먹, 분채, 한지위에 프린트_144×111cm_2007

전수경_David & Bathsheba_한지위에 먹, 분채, 아크릴_130×162cm_2007
Adam & Eve Bag 사과위에 아담과 이브의 누드는 백의 손잡이 모습과 같다. 이브는 아담의 발목을 잡고 있고 이브의 발목은 뱀이 휘감고 있다. 백의 형상처럼 보이는 이 작품은 아담과 이브의 친밀한 관계 연속성을 의미 한다. 화면 안에 흐르는 강렬한 색채와 누드는 에로스적인 요소들을 담고 있으며 성경 속에서 말하듯 신과의 약속을 어기고 쫓겨난 아담과 이브는 최초의 인간 파괴성을 보는 듯하다. ● Hand in Hand 핸드백의 긴 줄 모양으로 손들이 이어져 있다. 그 안에는 손으로 나타낼 수 있는 다양한 기호들이 숨어있다. 악수와 약속, 수화로 love, God, 남자와 여자를 비롯해 예수의 은총하는 손의 모습,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에서 맞닿는 신과 아담의 손 등은 우리 인생의 모습과 신이 인간을 창조할 때 손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의미와 예술가에게 있어 손은 같은 의미로 다가온다. ● David & Bathsheba 소년시절 골리앗과 맞서 싸우던 다윗은 나이 들어 음탕한 시선으로 여인 밧세바의 목욕하는 모습을 보고 있다. 고전주의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한 색채와 구도는 이 작품에서 배제된다. 화면 안에는 다비드라는 상징적 로고가 들어있는 선글라스와 핸드백의 형상으로 목욕하는 밧세바는 누드의 형상으로 표현된다. 고전주의 작품에서 얻어지는 신화의 내용은 이 작품으로 찾아볼 수 없다. 남자의 시선과 여자만이 은유적으로 표현될 뿐이다. 이전의 시리즈에서 이어온 몸에 대한 탐구는「다비드&밧세바」에서 구체화되어 남성과 여성을 이원적인 관계로 풀어내고 있다. ● Pandora's Box 신과의 약속을 어기고 인간의 호기심으로 상자의 뚜껑을 여는 순간 질병, 가난, 불행과 같은 재앙들이 나온다. 순간 뚜껑을 닫았지만 이미 다 나가버린 상자 안에는 미처 나가지 못한 희망이 남아 있었다. 과거 몽유시리즈에서 보여 진 몸의 형상들은 발묵을 근간으로 가루안료를 흩뜨리고 목탄을 접목시켜 다양한 드로잉을 선보인다. 이러한 결과물들은 현재의 작품에서 한 층 더 나아가 촬영된 후 그래픽 작업에 의해 재창조 되어 몸에 대한 왜곡과 긴장감을 더한다. 인간본성에 대한 좋은 것과 좋지 않은 것 모든 것을 안고 나아가 판도라 상자 속의 희망처럼 인간은 그것을 갖고 살아야 한다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 In the Dream 이전의 몽유시리즈에서 보여 진 몸들은 군집을 이루며 화면 안에서 공간을 부유하듯 자유롭다. 이 형상들은 이제 소파 안으로 들어와 이전 시리즈에서 보여 진 결과물에 새로운 의미를 더한다. 소파 등받이 안에 군집을 이루는 몸의 형상들이 보이고 아래에는 수면안대가 보인다.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벗은 몸으로 자유로웠던 것처럼 최초의 인간 모습으로 꿈속을 노니는 듯하다.

전수경_In the Dream Ⅰ_한지위에 먹, 분채, 한지위에 프린트_111×144cm_2007

전수경_In the Dream Ⅲ_한지위에 먹, 분채, 한지위에 프린트_111×144cm_2007
이전의 시리즈에서 보여 진 몸들은 구체적 형상이 아닌 당당함으로 홀로 있지 않고 둘이상의 관계성으로 은유적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그곳은 막연한 꿈이나 허상이 아닌 조용히 현실 세계이다. 최근작 「Body & Talk」시리즈는 좀 더 구체적인 상황으로 이야기 하고 있다. 아담과 이브, 판도라의 상자 둘 다 있을법한 일이다. 금기사항을 어기고 인간본성인 호기심으로 행동에 옮겨 지금의 현실세계와 재앙이 생기지 않았는가! 그러나 이런 재앙의 체험들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호기심과 체험들은 지금의 세계를 만들었고 체험은 자기실현과 꿈을 만든다. 세상은 그것들로 이루어진다. ■ 신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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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대화
김효나 사진·도자·오브제의 대화展
2007_0820 ▶ 2007_0916

김효나_마사이마을에서_디지털 프린트_50×60cm_2004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갤러리 현 홈페이지로 갑니다.
갤러리 현 기획 초대展
새벽의 대화01 ● 내가 네게 수아에 대해 이야기 했니?
데이빗 런치의 쇼파에서 우리는 안고 자곤 했어. 자주색, 털이 조금 까칠한 우리 키만했던 쇼파에서 우리는 마주보고, 혹은 뒤돌아, 안고 자곤 했어. 안고 자곤 했어.
키스는 하지 않았어. 우리는 볼을 만졌어. 우리는 안고 자곤 했어. 아무말 없이. 그래야 하는 것처럼. 조용히. 서서히. 남몰래. 오후에. 방과후. 그때에.
안고 자는 시간도 기다릴 줄 모르던 그 때.
안고 자는 것에 대한 아무 생각도 없던 그 때.
안는 것 자체에 대한 사랑과 따듯함과
네가 있고, 그 외엔 아무도 없다는 조용함과 안심.
너와 나는 그리 많은 말을 하지 않는다는 이해와,
쇼파털이 조금 까칠해서 얼굴에 자국이 베길 수도 있다는 믿음.
우리 주위엔 아무도, 공기도, 소리도 없었지만
빛, 오후4시, 방과후의 빛이 있었고
너의 숨소리 혹은, 나의 ... 외엔 아무 것도 없고, 기억에도 없고, 이불도 없이
겨울도 아니었고, 여름도 아니었고, 가을도 봄도 아니었던 그 때,
수아와.

김효나_그녀의 주름_디지털 프린트_40×56cm_2004
새벽의 대화02 ● 이제 수아에 대해 말할 시간이야, 벌써 새벽이야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시간이 지남을 보는 것. 사라지는 것을 보는 것. 새벽의 대화를 이어나가는 것. 이어가지 않으면 죽기 때문에.
페렉은 말한다.한 주제를 물고 늘어져라. 그것이 헛되고 그로테스크하고 바보같아질 지라도. 우리는 아직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 그저 우리가 계속 반복했던 것을 알았을 뿐이다. 더 보아라. 계속해라. 이어나가라 ● 사랑은 좀 다른 것 같다. 먼저, 사랑이라는 단어가 정말 있을까 의심스럽다. 다른 단어를 쓰길 바랬다. 그러나 소통하기 위하여 사랑이라는 단어를 쓴다. 사랑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다른 관계를 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결국은 사랑이다. 사랑과 시간은 어떤 관계를 가질까. 시간이 지남. 사랑의 지남. 혹은, 시간이 지남, 사랑의 결실. 새벽의 대화는 언제나 이어진다. 새벽은 언제라도 있기 마련이다.
이어가기란 쉬운 일만은 아니다. 삼일, 삼개월, 삼년이 힘들다. 삼십년을 같이 산 부부를 존경한다. 그들에게 시간은 정말 삼십년이었을까.
사랑하는 사람을 보는 것은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사랑이 지남을 보는 것. 사라지는 것을 보는 것. 그리고 혼자 새벽의 대화를 이어나가는 것. 이어가지 않으면 죽기 때문에.

김효나_케냐에서_파이버 베이스지에 손인화_8×10inch_2004

김효나_자화상_파이버 베이스지에 손인화_8.8×5.8cm on 8×10inch paper_2005-6

김효나_자화상02_파이버 베이스지에 손인화_8.8×5.8cm on 8×10inch paper_2005-6
새벽의 대화03 ● 그거 아니? 나는 널 보자마자 내 방으로 들어갈거야. 잠을 잘거야. 빠져들거야. 그리고 다음날 서서히 방문을 열고 나갈거야. 널 봤던 그 자리에 가보지만 넌 없을거야. ● 나가는 순간 들어가고 싶어 / 들어가기 위해 나가 / 보는 순간 헤어지고 싶어 / 헤어지기 위해 만나 / 거는 순간 끊고 싶어 / 끊기 위해 걸어 / 입는 순간 벗고 싶어 / 마시는 순간 취하고 싶어 / 걷는 순간 머물고 싶어 / 쓰는 순간 끝내고 싶어 / 쓰는 순간 이름 붙이고 싶어 / 쓰는 순간 정리하고 싶어 / 하지만 새벽은 달라 / 그 순간 사라지는 건 내가 아니야, 새벽이야. 끊임없이 머물고 싶어. 새벽안에.

김효나_바람 (자화상 시리즈 중)_파이버 베이스지에 손인화_8.8×5.8cm on 8×10inch paper_2005-6

김효나_이상한 여인들 (자화상 시리즈 중)_파이버 베이스지에 손인화_8.8×5.8cm on 8×10inch paper_2005-6
새벽의 대화04 ● 혹시 아니, 새벽이 허락하는 것을, 새벽이 우리에게 주는 공간과 시간을. 완전히 혼자인 것을 ■ 김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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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손님
홍원석 회화展
2007_0822 ▶ 2007_0828

홍원석_숲속에서_캔버스에 유채_162×259cm_2007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갤러리 홍원석 블로그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7_0822_수요일_06:00pm
청년의 힘 기획초대展
후원_갤러리 고도
갤러리 고도
서울 종로구 수송동 12번지
Tel. 02_720_2223_4
www.gallerygodo.com
일상에서 일탈로 진화하는 홍원석 내러티브● 만약 우리가 예술의 본질을 지식생산의 국면으로 파악하는 데 동의한다면, 예술작품의 생산, 그것도 회화라는 고전적인 방식의 행위를 통해서 예술가가 획득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오늘날 너무도 많은 ‘예술들’이 고유한 메커니즘 아래 작동하는 예술 시스템 속에서 의미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시장과 언론과 학교의 카르텔이 제조해내는 현대적인 예술들은 예술가의 사상과 의식과 감성을 언어게임의 논리에 귀속되고 있다. 삶을 깨치기도 전에 예술언어 게임의 논리를 체득할 수밖에 없는 오늘날 예술의 장 속에서, 나는 홍원석 같은 젊은 작가를 만나는 일이 참으로 반갑다. ● 홍원석은 밤과 차량을 그림으로써 현대사회 일상의 단면을 드러내는 작가이다. 일상담론이 제대로 된 창작과 비평으로 이어지기도 전에 매우 미적지근한 표현으로 전락해버린 우리 미술계에서, 홍원석 같은 젊은 작가가 일상을 내세우는 일은 일견 식상한 상투어로 들릴 위험마저 있다. 하여 나는 그에게 있어 일상이라는 것이 어떤 연유로 핵심적인 의제로 설정되었는지, 그리고 그가 어떻게 그 일상이라는 애매한 비평적 언술을 비상한 감성으로 시각화하고 있는지를 해명함으로써 홍원석이 바라보는 일상과 비일상의 함의를 헤아려보려고 한다.

홍원석_슈웅~_캔버스에 유채_97×162cm_2006
홍원석이 스스로 자신의 작품을 해명하기 위해서 일상이나 풍경이라는 단어를 동원한다고 할지라도 엄밀한 의미에서 그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관찰자 시점에서 도시를 파악한 관조의 결과가 아니라 구조적인 반복을 통해서 현대인의 삶을 지배하는 메커니즘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매우 차가운 비판적 리얼리즘의 시선으로 구조를 파고드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삶의 체험으로부터 나온 따뜻한 감성적인 차원에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따라서 홍원석의 그림은 야간에 달리는 자동차가 등장하는 풍경만을 다룬다기보다는 그 풍경 속에 담긴 행위(자)의 정황을 다룬다. 그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달리는 자동차 자체이기 보다는 그가 체험한 야간운전이라는 행위가 함의하고 있는 정황이라는 뜻이다.
홍원석은 검푸른 하늘과 헤드라이트를 켠 자동차를 그리는 작가이다. 대부분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땅과 하늘은 어두운 밤의 그것이며, 어둠속을 질주하는 차량은 헤드라이트를 켜고 있다. 그의 푸른색은 깊고 짙은 어두움을 담은 푸른색이다. 홍원석은 그 속에 한줄기 빛을 던진다. 초기작 〈야간배달〉(2005년)은 그가 밤과 자동차를 그리는 이유와 방식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충남 논산에서 나고 자란 그의 집은 한 때 식당을 운영했는데, 이때 경승용차나 트럭으로 음식을 배달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야간과 운전이라는 두 가지 주제에 관련한 체험을 얻었다. 푸른 배경에 단출하게 트럭 한 대를 그려넣은 이 작품은 눈에 보이는 대상을 옮겨 그린 것이 아니라 유년의 체험을 끌어낸 것이라는 점에서, 홍원석의 그림은 오늘날과 같이 다원화한 매체환경 속에서 회화의 의미있음을 매우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있다.

홍원석_낯선도시_캔버스에 유채_97×193cm_2007
홍원석에게 있어서 운전은 아련한 추억이기도 하며 냉혹한 현실을 살아내는 실질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그는 유년시절 택시운전을 했던 그의 아버지로부터, 한때 가업으로 삼았던 식당의 배달 체험 이후, 20대에 접어들어서도 지금까지 운전대를 잡는 일을 자신의 부업으로 삼아왔다. 홍원석은 이러한 추억과 현실을 바탕으로 해서 철저하게 자기 체험으로부터 나오는 그림을 그린다. 이점을 나는 예술가의 진정성의 국면으로 파악하고자 한다. 자신이 경험한 것, 자신이 잘 알고 있는 것, 자신이 절실하게 느낀 것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예술이다. 이러한 전제가 부재한 예술은 공허한 언어의 미망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는 수많은 사이비 예술가들을 통해서 보아오지 않았던가. 뉴미디어의 화려한 수사들과 달리 회화는 몸의 언어로 자신의 체험과 기억을 재현해낸다는 점에서, 화가에게 있어서 체험은 진정성의 여부와 더욱 각별하게 직결한다.

홍원석_낯선데이트 II_캔버스에 유채_97×193cm_2007
그러나 배달의 기억만이 홍원석으로 하여금 이러한 작업을 만들도록 한 것은 아니다. 야간배달이라는 상황을 목격한 후 그것을 그림으로 옮겨낸 작가와 자신의 직접체험을 바탕으로 그 그림을 그리는 작가의 작품에 대한 이해의 국면은 분명 다른 층위를 가지고 있다. 두말할 나위 없이 작품에 대한 충분한 이해는 작가의 체험과 의도를 관통해야한 가능하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이 그에게 있어 운전은 기억에서 멈추지 않고 현실 삶 깊숙이 들어와 있다. 따라서 홍원석은 과거만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그리고 있으며, 이것이야말로 그의 작품이 현실을 보다 전일적인 가치와 감성 체계 속에서 파악할 수 있도록 하는 저변의 힘이다.

홍원석_낯선만남_캔버스에 유채_97×193cm_2007
야간과 운전의 조합은 고요한 낭만에 그치지 않고 급박한 사건으로 치닫는다. 2005년에 그린 〈버스〉나 〈진흙탕 야간운전〉, 〈쌍라이트〉 같은 작품들은 불안한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어두운 밤길에 한줄기 노란 불빛이 사선으로 화면을 가르는 극적인 대비는 이후에 그가 다루는 비일상과 도발의 예고판과도 같다. 홍원석 내러티브는 1:3 비율의 가로 그림 〈야간 구급차〉(2006년) 이후에 본격적인 궤도에 오른다. 군대에서 앰뷸런스 차량 운전병을 지냈던 그에게 있어 이렇듯 긴박하고 다급한 상황들은 일상이자 비일상이었다. 검푸른 하늘 아래 녹청색의 풀밭 사이에서 푸른 여름밤을 가르는 헤드라이트 불빛은 긴장을 넘어 역설적이게도 창백한 낭만을 부른다. 그것은 태백 탄광촌의 황재형이 그렸던 구급차와는 완연하게 다른 차원에서 젊은 작가의 날카로운 기억을 보여주고 있다.

홍원석_애완보호_캔버스에 유채_72×116cm_2007
같은 해의 도시 풍경 〈택시〉는 화면의 왼쪽 위아래를 길게 가르는 도로 위에서 순행 차선을 넘어 역주행하는 차량들을 담고 있다. 삼성과 맥도널드 간판이 보이고, 도로 한가운데로 흘러내리는 불빛들 등 고만고만한 도시 풍경 속에서 거꾸로 달리는 자동차가 비상한 도발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야간운전〉연작 두 점은 비상구를 향해 열린 전면의 통로 앞에서 불안하게 서있는 자동차들과 지상으로 내려오는 낙하산들을 통해서 폭격, 테러, 습격 등과 같은 불안요소에 휩싸인 현대인의 삶을 은유하고 있다. 앰뷸런스 운전병으로서의 체험과 택시운전을 했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오버랩된 작품이다. 구름과 난간의 구획으로 화면을 삼등분한 후 낙하산들과 자동차를 배치하는 솜씨도 눈에 쏙 들어온다. 〈낯선 손님〉은 우주복을 입은 인물과 낙하산을 배치한 그림인데, 〈야간운전 II〉와 한쌍을 이루도록 근경과 원경의 선을 맞춤으로써 현실 너머의 낯설고 이상한 것에 탐닉하는 그의 몽환취미를 드러내고 있다.

홍원석_환상_캔버스에 유채_72×116cm_2007
이번 전시의 출품작들은 밤, 자동차, 운전 등의 모티프에서 출발한 홍원석의 전작들을 변주한 작품들이다. 〈행복한 상상〉이나 〈만원의 행복〉, 〈환상〉 등은 예의 야간 자동차 배경에 풍선이나 돈, 로또번호 등과 같은 요소들을 가미해서 유년의 기억과 현실의 기원을 담고 있다. 〈슈웅~〉이나 〈코카콜라〉 등과 같이 하늘과 땅을 가르는 수평구도를 변형한 작품들과 더불어, 강가에 우주인이 등장하고 말이 풀을 뜯고 있는가하면 교각 위에 차량이 지나가고 몽환적인 가로등 풍경이 이어지는 〈낯선 여행〉과 〈낯선 만남〉, 〈낯선 데이트〉 등은 기존의 작품을 보다 풍부하게 해석하는 것인 동시에 향후 작품성향의 변모를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 다른 경향으로 긴박한 역주행을 그린 〈pm 9:00 야간 구급차〉나 〈June 2002〉, 〈애완 보호〉 같은 그림은 이 작가가 기억과 체험을 몽환으로만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날카로운 현실인식으로 연결하고 있다는 점을 실감하게 한다. ●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5년전에 한국사회를 들었다 놨던 2002년 유월에 대한 상황인식을 담은 그림 〈June 2002〉이다. 월드컵 게임이 열렸던 그 해, 온 나라가 축구공 하나로 열광과 흥분의 도가니에 빠진 사이에 미군의 장갑차에 치어 목숨을 잃은 효순이와 미선이 사건은 연말까지 묻혀 있었다. 차량이 질주하는 도로에는 차에 치어 내장이 터진 개가 있고, 하늘에는 축구공 애드벌룬과 붉은악마 티셔츠가 두둥실 떠있다. 홍원석은 이렇듯 정황을 담은 풍경을 통해서 일상 속에 내재한 비상한 사건의 잔혹함을 담아낸다. 그는 글로벌 스포츠마케팅과 국가주의의 위력 앞에서 동시대의 사건으로 인식되지 못했던 효순이 미선이 사건을 월드컵과 동시에 보여줌으로써 매스 미디어 시스템에 길들여진 대중의 현실 인식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 고양이와 개가 죽어있는 모습을 애완보호라는 글씨가 적혀있는 연등과 함께 보여주는 그림 〈애완 보호〉도 비슷한 맥락을 가지고 있다. 차량 앞에서 고사를 지내고, 구급차, 택시, 트럭, 초상집 근조등, 주차금지 사인, 차에 치이는 강아지, 신호등, 우주인 등이 등장하는 〈숲속에서〉는 이러한 경향을 종합한 그림이다.

홍원석_June 2002_캔버스에 유채_97×193cm_2007
나는 홍원석의 그림이 무절제하게 쓰이는 일상담론에 휩쓸리는 것에 찬성하지 않는다. 스스로를 현실과 몽환의 세계를 평면회화로 드러내는 ‘예술운전사(art-driver)’로 표현하고 있는 홍원석은 일상 너머 비일상의 세계를 그린다. 홍원석이 도달하고자하는 세계는 비록 그 출발은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것일지라도 일상 그 이상의 것이다. 그는 일상을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 비일상의 세계를 갈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상의 체험을 일탈의 세계로 전이하는 과정이기도 하고, 현실에 대한 인식을 넘어 몽환의 세계로 넘김으로써 역설적으로 기억과 현실을 되돌아보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홍원석이 일상을 그리면서도 일상담론에 안주하지 않는 일탈의 내러티브를 형성하는 이유이다. 일탈의 내러티브야말로 우리가 예술로부터 기대하는 강렬한 희망이 아니던가. ■ 김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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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침반
자기동일성이나 전통 같은 잇쓔에 대한 육감적 각주
책임기획_김학량
2007_0822 ▶
2007_0918
강홍구_화단-원추리_디지털 프린트_200×100cm_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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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0822_수요일_06:00pm조주현_정승운_강홍구_홍명섭_임동식_박기원_이우연_백기은_한상혁_이호신_이일훈_김형관_이정_김윤호_그리고 시사문제 관련
자료 몇 가지, 경매 도록, 또 겸재 · 공재 등 과거 거장의 작품 복제본 몇 점 등등
갤러리 눈 창덕궁점 서울 종로구 와룡동 5-14번지 Tel. 02_747_7277 www.110011.co.kr
전시를 위한
화두 ● “거울 들판 // 저편에서 누가 부른다 // 누구요? // 거울 속으로 새 신 신고 들어간다 / 거울 속에서 헌 신 신고 나온다
// 누구요! // 저편에서 누가 묻는다 // 거울 들판” (허수경의 시, 「거울 들판」 전문)

김윤호,
Untitled, DVD, 2004_Sequence 1~4

김형관_Long Slow Distance
0712_천에 유채_125×125cm_2007

백기은_드로잉; 이상한 나라의
동물들_철사_가변크기_2005~2007
이 전시 “이상한 나침반”은 어디서 부대끼고 있는가? ● 요 몇
년 사이에 “옛 예술가들의 작품과 모종의 연관을 맺고 있”(온고이지신, 2006, 대전시립미술관 기획전 서문)는 작품들과 더불어 제작된 기획전이
많아졌다. REMAKING KOREA(스페이스*C, 2005), 세화견문록―전통과 현대를 잇는 현대미술가 16인의 시각(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 2005), 온고이지신(대전시립미술관, 2006), 등등. 그리고 하산하라(대전 비비스페이스, 2006),
차도살인지계(카이스갤러리, 2006), 아직도 한국화인가, 비로소 한국화인가(대전 이안갤러리, 2007)도?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이런
기획이 과거 예술의 이미지, 모티프, 매체, 방법론 같은 걸 바탕으로 삼고 변용하거나 ‘새 길’을 찾아나선 와중에 유독 ‘눈에 띄는 것(the
visual elements/dimension)’에 유의하는 데서 멈칫하고 있지 않은가 묻게 되는데. 그러니까 마음 차분히 가라앉히고 좀더
관조적인 매너를 갖추고서, 전통 문화예술에 감추어져있거나 드러나있는 이념과 장치, 수사학, 미의식 들을 담담하게 음미하거나 뒤집어보는, 그런
자세는 엿보기 힘들다는 것. 특히 그 몸 씀씀이, 마음 씀씀이에 대해서는 더더욱.

이우연_소총소대_고무풍선, 나무 막대기, 고무줄,
유토_설치, 디지털 프린트_96×100cm_2007

이정_클럽겐키4_C-type
Print_120×90cm_2002

이호신_달이 솟는 산마을_현암사_2004 /
좌 이호신_쇠똥마을 가는 길_열림원_2002 / 우
위 전시들이 적어도 선언의 차원에서는 통시적으로 전통과
현대의 문제에, 공시적으로는 동시대적 감수성에 관여하여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려 하므로 흥미롭지만, 자칫 이른바 전통이라는 이데올로기적 명목에
사로잡혀 있다가는 지금 이 자리에서 처참하게 연명하는 나 자신의 호흡을 까먹어버릴 공산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전통이라든지 자기동일성 혹은
자기정체성 같은 이슈를 그 자체로서 전시에서 대상화한다는 건 아무래도 김 빠지는 일인 것 같다. 그래서 이번 이 “이상한 나침반”은 지금까지
다른 사람들이 그런 문제를 다루어온 자취를 짚어보면서 거기에 매우 육감(肉感, 六感)적인 일종의 ‘각주(脚注)’이다. 그렇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이 기획은 ‘여기가 어딘고?’, ‘내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 거지?’ 같은 질문처럼, 내내 창호지에 구멍 하나 뚫고 바깥
내다보다 문득 시선을 휘-익 나 자신에게 되먹이는 그런 순간처럼, 어떤 전통(?)들에게 돌려드리는 하나의 ‘방작(倣作)’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과거 언어의 어휘나 매체보다는 그것에서 파생하는 살기와 철학하기의 스타일, 상상력, 변통능력 등이 문제될 것이다. 문제는 바로
이 순간이다. 나를 나답게, 혹은 나답지 않게 하는 순간순간의 그 실(實)다움, 또한 그 허(虛)다움을 쩌릿하게 나의 육감으로 겪고자 하는 것.

임동식_친구가 권유한 풍경-되돌아온 나루_캔버스에
유채_130.3×97cm_2000~2003

정승운_무제_거울 위에
오브제_52.2×131.5cm_2007

조주현_움직이는화이트_나일론천, 서브모터,
CPU, 센서_91.5×73cm_2005

한상혁_무지개를 지나서_글루건에 채색_물방울
크기_2007
전시 연출 ● 대체로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하는 물음과 같이 자신이나
대상의 이름씨(정체)를 묻고 따지고 비평하는 투로 이룩되는 작품보다는, 이승 이쪽저쪽을 떠돌다가 어느 순간 멈칫하고서 ‘내가 대체 어디서 왔고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고 있는가,’ 혹은 ‘내가 어떤 인연의 네트웍에 가담하여 호흡한다고 했을 때, 나와 더불어 숨을 나누어 가지는
연고(緣故)들과는 어떻게 교유(交遊)하는가,’ ‘나는 어떻게 나타나고 어떻게 스러지는가’ 하는 물음들처럼 생성소멸의 꼬락서니를 더듬고 그 안에서
웃고 울고 엎어지고 자빠지고 허우적거리고 하는 투로 그러다가 마치 무명초의 천연덕스러움에서 보는 듯이 그 실(實)다움과 허(虛)다움의 관능적인
내통으로서 소리 없이 생기는 몸짓. 그즈음 잠시 작품의 탈을 얻어가지는 그런 거시기. 그래서 아무래도 전시장은 떠들썩하기 어려울 터이고, 서로
색다른 표정을 가진 작품과 사물, 자료 들이 얽혀 얼마간 상호 어색해할지도 모르고, 헙? 곁눈질에, 꿔다논 보릿자루모냥 웅크리거나, 어느 한미한
구석에서 더부살이하거나 빌어먹거나, 빨아들이거나 토해버리거나, 어디서 누군가는 아악! 비명 내지르거나, 또 어디서 누군가는 지그시 눈 감고서 저
남루한 목숨의 세계를 묵상하거나, 그렇게 접혔다 펴졌다, 내었다 들였다, 마치 나비의 짓처럼. 아무튼 기획자는 전시장에서 음악 연주의 휴지부에서
새어나오는 숨소리 듣기를 큰 꿈으로서 바라고 있거나, 연주 도중 청중의 기침소리도 딱 좋다고 여긴다. 그런 것. 또, 느닷없이 터져버리는 아기
울음소리. 그리고 이런 속삭임― “근데요, 저..., 지금... 어디 계세요?” ■ 김학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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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그리다 그를 그리다
신창수 유작집
지은이_신창수 || 분류_예술 || 판형_188×257 || 면수_264 ||
이미지_200컷 발행일_2007년 8월 1일 || ISBN 978-89-91437-79-1(03600) || 가격_30,000원 ||
다빈치기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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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sing him as he painted. 신창수
유작展 2007_0801▶2007_0814 갤러리 포토하우스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4번지 Tel/
02_734_7555 www.topohaus.com
“돌아다니가 발견한 나무 사진. / 저 사진을 보니, / 대학 때 물고기와 나무 시리즈 작업들이 생각난다. / 난, 저
나무 몸통의 가지 자르고 남은 흉터에서 / 눈을 보았다. / 인간의 필요에 의해 잘려진 흉터지만 / 나무본성의 분노랄까. 고통의 흔적이 저
눈에서 읽혀졌기 때문에 꽤 오랜 시간동안 그 시리즈를 그렸다. / 여름에 학교에서 서면까지 걸어 다니면서 / 도로변에 있는 나무들의 사진을 찍던
기억이 난다. / 아직 자료집에 남아있는 그때의 사진들을 / 다시 꺼내보니 참 아쉬운 시간대에 있었다는 게 / 다시 느껴진다. / 반가운
사진...” ■ 신창수

■ 본문
속으로 “작가 신창수가 독특한 체험으로부터 시도한 시리즈 작업 ‘길’에서 우리는 바슐라르 식의 상상(력)과 이미지의 현상학을 목도한다.
어둠이 감싸고 있는 풍경의 개별 요소들은 숲과 같은 거대한 덩치의 실루엣 속에 스며들어 개체의 구체적 이미지들을 상실하면서도 우리로 하여금 나무
혹은 숲, 잡초, 넝쿨, 논두렁과 밭두렁, 바위 들을 희미하게 분간케 한다. 우리의 기억의 경험이 일으키는 상상작용이 그 안에서 일어나게 하는
것이다. 작가는 길이 있는 풍경을 재현(representation)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 그 이미지를 현시(presentation)하는
데 일차적 관심이 있는 탓에 은은한 어두움의 실루엣 안으로 자연 개체의 사물들을 녹여 낸다.” ■ 김성호

신창수_무제(길시리즈)_103×73cm_2004
“누구라도
그러하겠지만 / 나도 큰 병이 있다. / 사람을 그리워하는 병이라고 / 말하고 싶다. / 난 남들보다 / 밝은 구석보단 / 어두운 쪽의 에너지가
/ 많다고 말하고 싶다. / 내 그림에서도 / 그 기운이 많이 감지되고 / 생각은 비워야지 하면서도 / 아직도 / 버릴 것이 많다고 말하고
싶다. / 아마 / 내 인생에서의 대부분은 / 어두운 에너지를 / 다 소진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중략) 여기 양평에 와서는 / 사람을
만나는 일이 힘들다. / 사람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 그 사람들이 / 다음날 떠나야 할 시간이 다가 오는 것, / 그것이 힘들다. / 그래서
갈 때는 마중을 안 한다. / 천천히 사라지는 실루엣을 보고 있으면 / 마음이 너무 저려온다. / 난 아직도 / 그 병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 오히려 만나 좋은 시간보다 / 헤어지는 시간이 너무 힘들기 때문이다. / 난 아무리 생각해도 / 산속 깊이 숨어 있어야 하는 / 팔자인가
보다.■ 신창수

신창수_섬_장지에 먹,
아크릴채색_73×103cm_2001
작가는 밤중에 몇 시간씩 지쳐서 쓰러질 만큼 걸어본 경험을 말한다. 그때, 길을
둘러싼 풍경들, 어둠에 묻힌 길과 그 어둠을 뚫고 길을 나설 때 만나게 되는 것들의 모습이다. 어둠은 모든 것을 묻어 버린다. 그러나 그 어둠
사이로 사물은 다시 일어서고 자신을 보이려 한다. 어둠에 눈이 익어갈 쯤에 시선은 사물에 가 닿지만 보이는 풍경은 낮에 봤던 것들과 다르다.
음영과 입체와 소리와 색상과 형태들이 어둠에 묻히고 어둠에서 다시 일어선다. 그것들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걷는 것이 아니라 어둠 속의 걸음으로
이제 모든 것이 비롯되는 길을 나선 것이다. 그의 풍경이 여느 풍경과 이곳에서 갈라선다. 길과 창, 그리고 집과 무덤이라는 이중 장치로 연결된
그의 세계는 어둠에 묻혀서 모든 것들이 창을 닫고 무덤이 되고 있지만 그 어둠 속에 길을 내는 걸음에서 비롯된 세계를 만나게 하는 통로이다. 그
길은 어둠에 묻히지 않고 새로운 통로로 자신의 내면을 보여준다. 그 내면은 어둠을 뚫고 가는 걸음에 의해서 난 길이다. 그것은 내 속으로, 풍경
속으로 접어들어 객관이 아니라 주관이 되게 하고, 표층이 아니라 내면이 되게 한다. 어둠이 아니라 은폐된 것들을 들추어낸다. ■
강선학

신창수_폭우_장지에 먹,
아크릴채색_54.5×70.5cm_2002
미술잡지 〈Voila〉 2006년 3월호 인터뷰 기사 중에서
● 내가 하고 있는 작업이 무엇인지 모르는 거 보다는 알고 가는 게 좋아요. 길은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길을 가는 사람은 어디로 가야하는지 알고
있어야 하지요. 재미있는 길은 뚜렷한 길보다 보일 듯 말 듯한 길이고, 실제로 밤길도 생각 이상으로 어둡지는 않아요. 처음에 보이지 않는 풍경을
어떻게 표현할까 막막했는데, 욕심을 버리니까 자기들이 알아서 나와 준 거 같아요. 그림은 흔적이에요. 유품이라고도 할 수 있죠. 얼마나
진실되냐에 따라 좋은 유품을 남기는가 아닌가 하는 거죠. 그런 면에서 항상 자기관리를 하고 꾸준히 그리고 준비를 해야 하는 거 같아요. 준비가
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려가고 있는 사람이 프로라고 생각해요. ■ 신창수
■ 책구성 신창수 작품 -
약 200점 신창수 스틸 및 작업실 사진 ● 평론 무제 - 故 신창수 작고 1주기 기념 유작전에 부쳐 /
김성호(미술평론가) 신창수의 회화 - 풍경의 깊이, 존재론적인 풍경 / 고충환(미술평론가) 밤에 난 길을 나서다 /
강선학(부산시립미술관 학예연구관) 감성의 풍경-신창수 / 강선주(부산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밤에 난 길을 나서다 / 미술잡지
〈Voila〉 2006년 3월호 인터뷰 기사 ● 유고 및 지인들의 추모 글 일기 및 싸이에 남긴 유고 모음 그를
만나고 그를 보내다 / 李창식_하성봉_백성준_김형근
작가소개_畵家 신창수 1964-2006 ● 1964 경남 거제 생
/ 1983 부산 경남상고 졸업 / 1993 부산 경성대 회화과 서양화 전공 졸업 / 1992 구상작가 14인전(후인갤러리/서울) /
1993-1996 1985-이후전(타워갤러리/부산) / 1998 제1회 개인전 〈어/인/전〉(관훈갤러리/서울) / 2002-2005
제3,5,6회 양평 미술인협회전(맑은물사랑미술관/양평) / 2006 제2회 개인전 〈밤에 난 길을 나서다〉(용두산미술전시관/부산) / 2006
천상병미술전 〈함속에 함〉(의정부예술의전당/의정부) / 2006. 5. 1 담낭암으로 사망 / 2007. 8. 유작전 〈그가 그리다, 그를
그리다〉(포토하우스갤러리/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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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panese Contemporary Art
일본 현대미술展
2007_0810 ▶ 2007_0826
Mayuka Yamamoto_Yellow rabbit_캔버스에
유채_146×112cm_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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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니다.
초대일시_2007_0810_금요일_05:00pm히로유키 마츠라_히로토 키타가와_타카푸미
하라_마유카 야마모토 모토히코 오다니_아키노 콘도_토모코 코노이케
갤러리 선컨템포러리 서울 종로구 소격동 66번지 Tel. 02_720_5789 suncontemporary.com
잔잔한 반향을
일으키며 일본 현대 미술의 흐름을 주도하는 7인의 작품을 갤러리 선 컨템포러리에서 8월 10일부터 26일까지 선보인다. 세계의 미술시장이
아시아를 주목하고 있는 지금, 항상 새로운 기법과 표현을 받아들이며 대중문화를 성공적으로 포용하면서도 전통적인 감성을 잃지 않는 일본 현대
미술에 초점을 맞춰, 작품의 다양성과 작가 각자의 뚜렷한 특징을 회화, 사진, 영상, 조각, 드로잉 등 다양한 장르를 통해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기획되었다. ● 단순한 작품 감상의 차원을 넘어 관람자들의 상상력과 감각의 긴장을 투영하며 일본 현대 미술과의 직접적인 소통을
목적으로 하는 이 전시에는 히로유키 마츠라, 히로토 키타가와, 타카푸미 하라, 마유카 야마모토, 모토히코 오다니, 아키노 콘도, 그리고 토모코
코노이케의 작품이 소개된다.

Hiroyuki
Matsuura_Frecles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16×116cm_2007

Motohiko
Odani_Rompers_컬러인화_80.5×66.7cm_2003

Hiroto Kitagawa_Black
Coat-orange_테라코타, 아크릴채색, 알루미늄판_83×34×14.5cm _2007
먼저 소개될 히로유키
마츠라는 상하이 현대 미술관의 디렉터인 빅토리아 루에 의해 이 세기의 새로운 미학적 맛을 창조하는 작가 중 하나로 지칭된바 있으며 도쿄갤러리에서
가진 첫 개인전-다카시 무라카미에 의해 조직된 게이 사이 아트 페스티벌에서 발탁되었다- 에서는 그의 모든 작품이 판매되는 성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그리고 망가(manga)에서 막 뛰어나온듯한 캐릭터를 주제로 새로운 세기의 전달자를 조각하는 히로토 키타가와의 조각상과 탁월한 드로잉
맛으로 동물의 캐릭터를 인간의 형상에 도용함으로 미완성된 존재로서의 소년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마유카 야마모토의 회화가 소개되는데 일본작가들의
독특한 감성을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또다른 작가 타카푸미 하라는 작품을 통해 상징적인 텍스트와 그림으로 작가와 관람객의 대화이기보다
개인과 공중, 과거와 현재의 소통을 이끌며, 그의 드로잉은 평범한 사람들과의 소통이 있을 때 더욱 빛을 발한다. 또한 초현실적인 사진과 오브제,
머리카락을 이용한 드레스를 만들어 이미 국내 미술계에서 주목을 받고 있는 모토히코 오다니의 사진작품과 기발한 상상력을 고도의 테크닉으로 표현하여
하나의 내러티브를 들려주는 도모꼬 코노이케의 회화도 소개된다. 마지막으로 카요코 고바야시와 망가를 제작함으로써 18세에 데뷔하여 2002년
야오이 쿠사마상을 계기로 미술계에 알려지기 시작한 아키노 콘도의 2002년 Disista 애니매이션 수상작 The evening
traveling 이 상영된다.

Pocket
Book 2007 No.18_종이에 과슈, 아크릴채색_14×18cm_2007

A small extraordinary hairy
animal brought out from her own womb. from "Kobiki" 디지털 프린트에
드로잉_132×102cm_2007

Akino Kondoh_The Evening
Traveling DVD_00:03:56_2001~2002 Music copyright_Toshiaki
Chiku
이 전시를 통해 아크릴 피부를 가지고 프레임 안에 존재하며 프레임이라는 벽으로 인해 인간과 분열된 삶을
살아가는 마쯔라의 캐릭터는 무의식 중에 우리를 찾아와 상상력을 지배할 것이며, 프레임 안에서 Tama의 음악에 맞춰 율동적으로 움직이는 검은
단발머리 소녀는 우리를 아키노 콘도의 영상세계로 초대할 것이다. 또한 토모코 코노이케의 회화를 보며 포스트 모던시대의 페어리 테일즈, 즉 우화를
읽고 히로토 카다가와의 조각상에서는 테라코타의 거침과 에나멜의 광휘로 사실주의와 팝 아트의 조화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모토히코
오다니의 사진 속 소녀는 출입을 제한하는 밝은 숲에서 하나의 기이한 생명체와 노래를 부르는 신비한 삶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 갤러리
선컨템포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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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무릉도원(Neo-Utopia)
어느 조각 모임, 관훈갤러리 공동기획展
2007_0815 ▶ 2007_0828
김민애_A Scene_혼합매체_220×120×11cm_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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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0815_수요일_06:00pm1부 / 2007_0815 ▶
2007_0821 이서준_이기칠_황준현_도학회_김민애_이수영_성경화_김종구_노진아_최혜광 2부 / 2007_0822 ▶
2007_0828 송지인_최수앙_김지민_임수진_백연수_조정화_장준혁_김창세_정상현_양진우
新무릉도원(Neo-Utopia)
● 인간에게 있어 ‘무릉도원(武陵桃源)’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오래 전부터 끊임없이 갈구되어 온 환상의 개념이다. 시대에 따라 그 이상향의
기준은 달라졌지만 그 염원과 바람만은 현재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다. 인간은 ‘무릉도원’이라는 환영의 장소에 도달하기
위해 끝없이 그곳을 좇는다. 하지만 20명의 작가들에게는 기존의 생각처럼 무릉도원은 ‘어디에도 없는 곳(nowhere)’이 아닐지도 모른다.

김창세_신무릉도원
보여주기(platopia)_돌_10×4(m)_2007 / 위 도학회_산을 쓰다. / 아래

김지민_The Fan 가변설치_2007 /
위 이기칠_작업실_청동_가변설치_2006 / 아래

최수앙_The
Day-Dreaming_가변설치_혼합재료_2007 / 좌 조정화_쥴리엣_폴리코트_50×17×66cm_2007 / 우

황준현_From the Series
Reaction_디지털 프린트_24×20inch_2007 / 위 성경화_상자2560_혼합재료_400×200×4cm_2007 /
아래

정상현_톰의
분노_싱글채널비디오_00;07;27_2007 / 위 이수영_The way_디지털 프린트_2006 / 아래

임수진_구름인간 (cloud
man)_180×90×60_120×90×60_스티로폼 젯소 드로잉들 / 위 장준혁_여행_혼합재료_62×180×42cm_2007 /
아래

백연수 The
ram_27×38×40cm_merbau_2007 / 좌 이서준_스카이 다이버를 위한 야쿠르트 음용기(beverage feeder for
skydiver)_ 폴리코트 위에 도료 온도계 밸브 호스 컨넥터 천 벨브 낙하산 motorFan
miniLantern_250×300×400cm_2005 / 우

양진우_농구대 프로젝트 _resin,
acrylic, 오브제_100×80×320cm_2004~2005 / 좌 최혜광_기린인척_혼합재료_가변설치_2007 /
우
20명의 작가들은 다양한 매체를 사용하여 그들이 지향하는 21세기적인 이상향을 1, 2부로 나누어 보여준다.
그리고 각 작가들은 자신만의 조형언어를 통해 작품의 형성과정을 시각적으로 제시함으로써 그들이 생각하는 새로운 개념의 무릉도원을 단계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들에게 있어 ‘新무릉도원’은 우리들이 존재하고 있는 현재 - 바로 지금(now), 여기(here) - 가
유토피아(Utopia)인 것이다. ■ 최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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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ape : summer
박상희 회화展
2007_0815 ▶ 2007_0826
박상희_다이빙_캔버스에
유채_130×89.5cm_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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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0815_수요일_05:00pm작가와의
만남_2007_0819_일요일_03:00pm
협찬_진선출판사
박상희의
작품에는 세 가지 요소들이 조합된다. 인물, 넓고 텅 빈 색면, 그리고 구체적인 배경의 이미지가 그것이다. 그러나 형식적으로 분류해 본다면,
여기에는 다시 세 가지 레이어가 고려의 대상이 된다 : 인물화, 기하학-건축적 구성, 심리적 무대가 그것이다. 인물화의 전통 속에는 배경의
이미지를 통해 인물의 내면이나 정황, 혹은 그에 대한 서술을 드러내는 뚜렷한 방법론이 있다. 다시 말해 박상희의 그림 속에서 인물화의 요소 역시
배경의 구성과 그것이 드러내는 의미요소들에 의해 인물에의 접근이 허락되는 방식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데이빗 호크니나 에드워드 호퍼의
하드-보일드 내러티브를 연상시키는 인물의 배치와 구성은 우선적으로 인물과의 심리적 거리감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물들은 사진이나
화보 등에서 발췌된 듯 상당히 전형적인 인물들처럼 보인다. 경우에 따라서는 인물 자체의 묘사가 완결되지 않는 경우도 있으며 인물과 다른 요소들
간의 균형이 오히려 중시되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박상희_머라이언_캔버스에
유채_130×162cm_2007

박상희_스핑크스_캔버스에
유채_80.5×130cm_2007

박상희_야외수영장_캔버스에
유채_90.9×65.1cm_2007

박상희_orange sky_캔버스에
유채_65.1×90.9cm_2007

박상희_탈출_캔버스에
유채_45×53cm_2007
기하학적 구성에 있어 화면의 구분과 절단은 그의 그림 속에서 실질적인 주제에 해당한다고
할 만큼 중요성을 띠고 있다. 화면은 의도적으로 날카롭게 나뉘는 색면에 의해 거의 대부분이 할애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그의 그림은
인물화라기보다는 하드에지 추상화에 가까워 보이는 구성을 하고 있다. 화면에서 이러한 시각적 구성이 자아내는 균형감의 중요성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그 이유다. 다만 여기서 시각적 균형감은 인물의 위치와 시선, 성격을 중요한 균형점으로 삼고 있으며, 또 다른 요소로서 화면의
배색과 인물, 그리고 무대적 공간이 빚어내는 심리적 연출이 또 다른 무게 요소로 활용되고 있다. 박상희의 그림은 언뜻 파악되는 추상적 요소들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연극적 공간에 가까운 이미지를 다루고 있다. 즉 인물의 심리적 정황과 알 수 없는 이야기의 분위기, 그리고 그것을 서술하기
위한 공간의 배치에 이르기까지 화면 전체가 특정한 위치에서 바라본 무대를 떠올린다. 특히 하나 이상의 인물이 등장하거나 또 다른 구체적 사물들,
개 등이 등장할 때 이들의 관계가 불분명한 함축적 수준에 머물 경우 이러한 효과는 더욱 두드러진다. 무대가 생산하는 것들은 다음과 같다 : 1)
서술, 2) 공간, 3) 지속이 그것들이다. 즉 이야기의 알 수 없는 부분, 즉 함축을 강조하고, 무대 공간이 무한한 공간으로의 연장을 암시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가 관객의 현재적 시간 속에서 무한히 반복된다는 것이다. 회화의 경우, 이러한 생산은 더욱 더 함축적인 것이
된다. 즉 회화적 요소들을 동원하여 그러한 생산적 요소들을 더욱 강력하게 압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 유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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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선
박지혜 회화展
2007_0817 ▶ 2007_0826
박지혜_시선_캔버스에
유채_97×145.5cm_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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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0817_금요일_06:00pm
노암갤러리 서울 종로구 인사동
133번지 Tel. 02_720_2235 www.noamgallery.com
화가의 시선
● 자주 느끼는 거지만, 화가들은 본다는 사실에 특히나 민감한 것 같다. 물론 화가들만이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오래전부터 본다는 사실이 보는
이와 보이는 것의 마주 대하는 관계가 아니라 원래부터 애매하게 섞여 있음을 화가들만은 동물적으로 지각하고 있었다는 생각에서 이다. 이러한 사실은
얼마 안 된 지금에서야 일반적으로 정당화되었고, 또한 사유되면서 나타나고 있으나 근대철학으로는 허용할 수 없었던 문제였다. 왜냐하면 근대에는
인간의 주체성을 강화시키기 위해 보여 지는 것들을 대상으로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감각하는 신체를 객관적인 몸으로 규정했다. 현대에
와서야 자신들이 보여 지지 않는 한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다양한 철학이 시작하게 되었다. 하지만 기껏 합리적 이성에 도움을 준다고
여겨졌던 화가들은 진즉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멀리 짚지 않고도 확인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시선의 교차를 확인시켜준 반아이크의 작품
〈아르놀피니의 결혼〉이나, 벨라스케스의 〈라스메니나스〉가 제작된 시대가 데카르트적인 시대 - 전자는 이전 사람이긴 하지만 - 이었음을 봐도 알
수 있는데다가, 훨씬 이전부터 대부분의 화가들이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즐겨 그렸다는 점도 이를 충분히 뒷받침해 주는 증거가 된다. 여하튼
현대에 와서야 일반화되고 있으나, 우리가 알게 된 개념적이든 미학적이든 무언가를 본다는 것이 동시에 무언가에 의해 보여 지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은 전적으로 화가들의 공로로 인정해야 한다.

박지혜_시선_캔버스에
유채_97×145.5cm_2007

박지혜_시선_캔버스에
유채_91×116.8cm_2007

박지혜_시선_캔버스에
유채_112.1×145.5cm_2006
박지혜는 시선이라는 주제로 그림을 그린다. 앞서 말한 시선의 섞임을 그녀는
몸소 잘 이해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림에는 온통 시선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그림에서 시선의 흐름을 순서대로 나열하자면, 우선
그릴 때 화가의 눈으로 보여 지고, 그 다음 화가의 손에 의해 그려지는 모티브(대상)들이 화가를 보고, 세 번째로 관람자에 의해 보여 지고,
마지막으로 모티브들을 통해 보여 지게 된다. 말하자면 약간은 복잡한 단계가 있는 것 같지만, 사실 간단한 문제인데다 누구나 이미 알고 있는
바인데, 보여 지고 보는 행위 내에서 만큼은 시선의 섞임이 동시에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말이다. "그림이 나를 보고, 나는 그림에
의해서 볼 수 있다." 세잔이 쌩빅투와르 산을 그리면서 "풍경이 나를 보고, 나는 풍경의 의식이다"라고 항상 되뇌었던 말을 살짝 고쳐 쓴 거긴
하지만, 박지혜의 그림에서는 유난히 그러한 시선의 섞임을 잘 확인 할 수 있다. 잠시 여기서 정확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는데, 본다는 것은
抉봉犬?정신에 의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단지 눈에 의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 포함된 모든 것들은 이미 전부 시선의 주체이다.
외설스러운 목덜미, 가슴팍의 옷 레이스, 또는 머리를 한껏 올리고 있는 손도 보는 주체이다. 간혹 직접적인 시선을 피하기 위해 가면을 그린다거나
썬그라스를 쓰는 경우도 있지만 말이다. 그녀는 자신의 노트에 ‘거죽’을 그린다고 쓰고 있는데, 이러한 점에서 그 '거죽'은 실제 나의 피부와
완전히 같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보여 지는 나의 다른 측면에 있는 시선으로서 작용하므로 완전히 다르다고 말할 수도 없겠다.

박지혜_시선_캔버스에
유채_150×150cm_2007

박지혜_시선_캔버스에
유채_193.9×97cm_2007

박지혜_시선_캔버스에
유채_162.2×112.1cm_2006
시선을 주제로 그리는 이들은 많았다. 하지만 앞서 되짚었던 이러한 사유가 잘
드러나는 그림은 만나기 쉽지 않다. 왜냐하면 그러한 화가들이 시선의 관계를 몸소 체험하고 예민하게 잘 느낌에도 불구하고, 표현하려는 순간, 항상
그려지는 모티브를 완전히 파악된 대상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실적인 기법을 고수하는 작가들에게는 이러한 난제가 더욱 풀기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래서 시선의 동적인 순간을 경직되게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면에서 박지혜는 유심히 쳐다봐야 할 작가이다. 그녀의 그림은
단지 잘 그린 그림이 아니라 시선을 잘 그리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자신의 그림을 시선이라고 명명했듯이 그녀의 그림을 보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림에 가득 채워져 있는 시선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물론 다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겠지만 말이다. ■ 박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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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 바이러스 (Anxiety virus)
성유진 회화展
2007_0817 ▶ 2007_0831 / 월요일 휴관
성유진_anguish_천에
콘테_130×97cm_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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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0817_금요일_06:00pm부대행사 / opening and
workshop_2007_0817_06:30pm
관람시간_11:00 - 6:00pm
대안공간 반디 부산 수영구 광안2동 169-44번지 Tel. 051_756_3313 www.spacebandee.com
고양이에어리언의
탄생 ● 인간과 동물을 결합한 이미지, 반인반수는 신화와 전설을 통해 등장했던 숱한 이미지 가운데 가장 놀라운 것이었다. 인간의 욕망을
차마 인간적인 차원에서 표현할 수 없어, 날 것 그대로의 동물적이고 야생적인 이미지를 통해서 인간의 욕망을 대입시키려는 문명의 소산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인어, 늑대인간, 소인간, 새인간, 말인간 따위는, 모두 인간화할 수 없는 가공할 만한 위력을
지닌 존재들, 즉 동물과의 결합을 통해서 인간의 욕망을 우회하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그런데 다른 존재와의 결합을 통해 인간을 넘어서고 싶은
욕망은 사실, 현실에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나약하며 매우 불안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말해준다.

성유진_my
room_천에 콘테_130×97cm_2007
이런 관점에서 보면 성유진이 만들어낸 캐릭터, 고양이인간 역시
인간존재의 불안을 보여준다. 고양이인간은 온 몸이 털로 감싸져 있지만 인간의 신체, 얼굴, 손, 발 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인간적인
신체들이 정상적인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이는 과장된 눈과 기이하게 변형된 몸을 통해서 여실히 드러나는데, 의식이
통제하지 못한 잉여들, 즉 고통을 보여준다.

성유진_blooming_천에
콘테_122×122cm_2007
그런데 작가는 불안을 굉장히 안정적인 구도로 잡아낸다. 사실, 불안을 안정적으로
형상화한다는 것은 아이러니 한데, 대부분의 작품에서 캐릭터는 화면의 중심을 점하고 있다. 때문에 정적인 공간과 대조적으로 변형된 신체는 불안을
극대화 한다. 변형된 신체를 통해 불안을 표현하는 것, 그 중에서 불안을 내면화하는 대표적인 장치가 바로 ‘눈’이다. 〈자화상〉연작에서 알 수
있듯이 ‘눈’은 아무 것도 응시하지 못한 눈, 동공을 지워버린 눈, 여러 방향을 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