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대

1360  17/68   회원가입 회원로그인
  View Articles
  [homepage]님께서 남기신 글 (2008-01-09 22:31:39, Hit : 709)
[re] 전시 1.9



Project 行間 01_원혜연

원혜연展 / WONHYEYEON / paniting

2008_0110 ▶ 2008_0220



원혜연.멈춤-잠시 내려놓다.종이에 연필.160×85cm.2007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더 갤러리 홈페이지로 갑니다.




Opening / 2008_0110_목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월요일 휴무




더(THE) 갤러리
서울.마포구.서교동.367-13.W&H빌딩.B1
Tel. +82.2.3142.5558
www.gallerythe.com






Project 行間 2008.1_2009.12 ● '본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아는 만큼 보이거나, 보고 싶은 것만을 선택적 무의식으로 보고 있지는 않은가? 그것은 일상과 예술작품을 대하는 태도 모두에 해당한다. 문학적 용어인 행간은 그러한 표면적 해석에서 벗어나 좀 더 진지한 태도로 작품이나 창작자의 의도를 비교적 정확하게 접근하기를 바라며 마련한 방법론일 것이다. 줄과 줄 사이에 비어 있는 공간인 행간을 그저 문자 그대로 해석하기보다는 숨은 속내, 어쩌면 진정성에 더 닿아있을지도 모를 너무나 까발리길 원치 않는 작가적 속내일지도 모른다. ● 더 갤러리는 2008년부터 2009년 2년간에 걸친 아주 긴 기획전을 준비하고 있다. 이는 옴니버스 형식의 전시로서 개개의 개인전형식의 전시를 보여주면서 거시적으론 하나의 이야기를 펼치는 것이며, 펼쳐질 하나의 이야기는 다름 아닌 '행간'의 이야기들인 셈이다. ● 이 프로젝트 '행간'에서 보여질 작가들은 현대 대한민국 미술계의 허리에 해당하는 작가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들의 작업에 대한 진중한 태도는 이미 수차례에 걸친 그들의 전시로 보여진 바 있다. 그들이 읽어낼 행간은 개인적 작업구조와 미술이라는 오래된 가치에 대한 불변, 예술과 작가의 관계가 작업으로 등장할 것이며, 그들과 사회, 미술이란 영역 속의 작가적 위치, 대한민국 미술계의 현주소와 작가의 위치는 더 갤러리와 미술판 글쟁이들이 함께 읽어나갈 행간이 될 것이다. 자꾸만 무언가를 범주화 시키고, 또래를 묶고, 스팩트럼을 나누는 작업도 분명 필요한 일 일테지만 그것들이 수리적으로 완벽하게 분리되지 않는 예술과 인간의 이야기를 행간으로 읽어내는 작업도 반드시 필요한 지점이라는 생각이다.




원혜연.멈춤-잠시 내려놓다.종이에 연필.160×40cm,160×85cm.2007

바쁘게 돌아가는 현장에서 조금 무모해 보이는 이 긴 프로젝트는 보는 이의 힘이 함께 호흡해야만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100미터 달리기의 벅찬 숨과 산책로의 느린 호흡 중 어느 것이 더 아름답거나 가치 있다고 비교할 수 없는 일처럼 시대의 흐름을 빠르게 짚어내면 분류시키는 작업과 그 행간을 보고자 하는 일이 비교의 대상이 될 수는 없는 일이다. 2008~2009년 더 갤러리 프로젝트 행간에서 만날 작가는 원혜연, 홍지윤, 이기섭, 박현선, 박소영, 이상준, 이정렬 등이며 모든 전시가 완료된 후 작가론으로 묶여 책으로 발간하는 사업까지가 프로젝트 행간의 마침이 될 것이다. 자, 이제 느리게 준비 호흡을 하고 함께 시작해 보자. 시작은 2008년 1월 10일 원혜연의 전시부터다! ■ 더 갤러리




원혜연.멈춤-잠시 내려놓다.종이에 연필.각 85×40cm.2007

원혜연의 작업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작품 속 강렬한 시선을 기억할 것이다. 캔버스 너머를 꿰뚫어 보는듯한 인물의 시선과 표정, 모노크롬의 색채, 인간본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작업들이었다. 그런 그의 작업이 달라졌다. 강렬한 시선은 사라지고 그저 관망하는 듯한 시선과 흑백의 연필 선만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작가가 변하였다. 기존 작업들은 개념적이고 너와 나의 경계를 확실히 그으려는 것이었다. 독단적이고 단정적이었다. 집요하게 캐내고 쌓아올리고 세부적인 것은 현미경 들여다보듯이 했다. 작업이 주체가 되어 무의식적으로 따라가는 예술을 해왔다. ● 인생이 비극적이라 생각했던 그는 이상주의, 절대주의의 같음에 것을 찾기 위한 고발, 염원 의 작업을 했으며, 한 세계로 깊이 빠지다 보니 왜곡, 집착이 생겼으며 깊게 들여다보는 것이 색안경을 끼게 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알맹이를 찾겠다는 것이 편견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알고 있는 예술이 쫒아오는 속도, 긴장감에 희열을 느꼈으나, 그 안에서 평화로운 자신을 잃었다. 삶에 대한 아슬아슬한 희열은 한계가 있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쉬고 싶었다고 했다. 이번 작업은 멈춤이고 자신의 조율에 대한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인 것이다. 원혜연은 스스로 멈추고 기존의 감정들을 내려놓음으로서 자연스러운 흐름을 고요히 지켜보는 풍요로운 과정을 보내고 있다.




원혜연.멈춤-잠시 내려놓다.종이에 연필.85×40cm.2007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그 과정이 많이 평화로웠다고 한다. 치열함, 절박함, 긴장도 좋지만 자기안의 균형의 아름다움을 느끼며 작업을 하면서 작은 해답을 얻었다. 생을 노래해야 한다고 생각이 들었다했다. 예전엔 심심하게만 생각됐던 마티스에 끌리는 것은 수직으로 달려오던 것을 멈추고 마음에서 잠시 내려놓음으로서 관망의 풍요로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예전에 느꼈던 감정들, 예술은 소중한 경험으로 남기고 자료수집과 같았던 그동안의 것들을 덜어내는 작업을 통해 작품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자신만의 무늬를 짤 수 있는 시기를 보내고 있다. ● 작품 속 심상의 인물. 이것은 여전히 인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인물에 성격을 부여하는 것은 어떠한 언어를 떠나 지시하는 바이고, 그것을 그저 따라가는 것이다. 그저 흐름에 맡긴다. 시작과 끝도 그러하다. 인물들은 그릴 때마다 진화한다. 작가의 그릇만큼 남기고자 하는 심상까지 그려진다. 그래서 덧붙이기도 하고 빼기도하는 훈련이 필요한데 요즘 개념적인 것이 싫다는 작가는 영화나 음악 같은 다른 외부의 창작물이 자신 속의 나무를 자극하고 흔들면 감흥을 느끼는 외부적인 훈련을 하고자한다. 결국 자신을 단련하고 정화시키기 위함이다. 기존 작업과는 다른 심상으로 인물을 만들어내고, 그 인물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에너지를 전파한다. 대상성은 없다. 자기 자신을 알아가고자 한다. ● 작품 속 공간. 그는 항상 공기층을 느끼면서 그림을 그린다. 기본적인 시간의 층, 시간의 누적을 느끼면서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그만의 공간을 표현한다. 규정짓고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친절하게 형태를 보여주지만 그에게 확실하게 제시되는 공간은 불편하다. 작가의 인생은 그렇지 않았다. 친절하지 않다. 그래서 그의 공간은 고요히 흘려보내는 자신만의 시간층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인물들의 시선도 고요히 그 흐름을 지켜보고 있다. 그 시간의 흐름을 내 것화 하지 않고 그저 고요히 흘려보내는 것이다. 자연스레 내려놓음으로서 나갈 것은 나가고 채워질 것은 채워진다.




원혜연.멈춤-잠시 내려놓다.종이에 연필.160×85cm.2007

색을 떨쳐버리고 흑과 백으로 완성된 작품은 그의 관망하는 심상을 잘 드러내준다. 하얀 종이에 2B에서 8B의 다양한 연필로 그만의 심상의 공간을 만들었다. 연필의 사각사각하는 맛이 좋아, 공기층이 느껴지는 게 좋아 연필로 그렸다는 작가. 길이가 짧아지면 맛이 나지 않아 긴 연필만 쓴단다. 머든지 맛있어야 작업을 하는 것이다. 20다스는 충분이 넘을 것 같은, 잘 깎아놓은 연필은 유화작업시 두세 양동이에 가득했던 세필과 같이 작가의 손이 가는대로 하얀 종이에 좋은 맛을 내며 화면을 채우고 있다. ● 원혜연은 이번 작업을 통해 자신이 추구하는 강렬했던 예술들을 잠시 내려놓음으로서 자연스레 흐름을 바라보는 풍요를 깨달았다. 그동안의 작업의 끝에서 느낀 절망과 결핍은 작가를 스스로 멈추게 함으로서 기존의 마음을 열고 환기시켜주었고 관망의 심상으로 바라볼 때 느껴지는 풍요를 얻게 해주었다. 인간이 구조화 시키는 것이 아닌 그저 흘러가는 자연스러움에 대해 가슴으로 느끼었다. 그의 이번 전시 《멈춤_잠시 내려놓다》는 그의 10년 동안의 예술세계를 잠시 멈추고 자신을 조율하는 시간이었다. 이 시기가 지나고 새로운 작업을 하면서 또 언제 위기가 닥쳐올지 모른다. 그러나 작업이 절망이며 구원이듯, 아픔을 겪어도 또 다시 사랑을 하는 것처럼... 이 시간을 딛고 벌써 다음 작업을 구상하고 있는 작가의 새로운 작품이 기대된다. ■ 백숙영


--------------------------


Magic Land

김정주展 / KIMJEONGJU / sculpture.photograph.drawing

2008_0108 ▶ 2008_0203



김정주_Magic Land_디지털 프린트_100x75cm_2007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가인갤러리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8_0108_화요일_05:00pm






가인갤러리
서울 종로구 평창동 512-2번지
Tel. 02_394_3631
www.gaainart.com






높이 솟은 고층건물과 고딕양식의 성곽이 하나의 화면에 공존하는 화려하면서도 황량한 느낌의 이 사진 속 도시는 영화 <배트맨>의 고담시(Gotham City)를 연상케 한다. 고담시가 뉴욕을 배경으로 하여 부패와 탐욕을 상징하는 가상의 도시로 변모하였듯, 스테이플러 철침으로 만들어진 김정주의 사진 속 도시는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서울이 작가의 상상력과 만나 변형된 새로운 도시다. 현대식 빌딩, 중세시대의 성체, 모노레일, 회전관람차가 복잡하게 한데 어우러진 금속성의 이 어둡고 생경한 도시는 이름하여 매직랜드(Magic Land)다. 김정주의 매직랜드는 고담시가 그러하듯 서로 상충된 요소들이 공존하는 가운데 도시의 여러 가지 모순을 담지하고 있어 흥미롭다.




김정주_Magic Land_디지털 프린트_75x100cm_2007

먼저 성(城)에서 출발해보자. 성은 무언가를 높이 쌓아 올려 자신의 방어막을 만들려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에 충실한 구조물로서 인류의 등장 이래 계속하여 다른 형태로 변모하며 존재해왔다. 누구나 어린 시절 블록이나 모래를 쌓아 올려 성을 만들었던 기억을 갖고 있을 것이다. 무언가를 쌓아 올리는 것은 학습하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갖게 되는 인간의 기본적인 행위 중 하나다. 이러한 수직적 쌓기에 대한 본능은 인간이 거주하는 건축물에도 반영되어 오늘날 높고 견고한 고층건물로 가득찬 도시를 형성하게 되었다. 성은 오늘날 도시에서 외형적으로는 사라졌지만 본질적으로 내재하여 여전히 기능하고 있는 셈이다. 가로로 길게 연결된 스테이플러 철침을 필요에 따라 다른 길이로 잘라 레고 블록을 쌓듯 쌓아 올리는 김정주의 작업은 이러한 인간의 쌓기 본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기술자들이 고도의 건축술로 고층건물을 올리듯 그녀는 그녀만의 숙련된 기술로 아찔한 높이의 빌딩을 쌓아 올린다. "유년기에 하던 놀이에서 발견되던 그 즐거움이 철침으로 집적된 오브제로 이루어진 공간들을 쌓게 만들었고, 이곳은 매우 정직한 놀이세계이자 현실에 휩쓸리는 동안에 유일하게 나를 보호해준 공간이었다. 즉 이상(理想)을 꿈꾸며 세운, 나의 욕망이 드리운 곳이다." 작업노트에서 밝히고 있듯이 김정주의 작업은 쌓기에 대한 본능과 유년시절 경험한 쌓기의 즐거움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집적 자체에의 관심으로부터 출발한 그녀의 작업은 더욱 높고 강력한 변형된 성들이 밀집해 있는 도시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김정주_Magic Land_디지털 프린트_75x100cm_2007



김정주_Magic Land_디지털 프린트_75x100cm_2007

첫 번째 연작인 에서 작가는 빌딩숲, 고가도로, 대형교각, 건설현장의 타워크레인 등으로 구성된 도시의 수직적 이미지를 잘 보여주었다. 'The City'에서 진수를 보인 이러한 김정주의 수직적 쌓기는 이번 <매직랜드> 연작에서 다양한 형태로 변형, 발전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매직랜드>에는 성의 현대식 변형체인 고층건물뿐 아니라 첨탑을 가진 그야말로 중세시대의 성이 등장한다. 또한 회전관람차, 모노레일 혹은 롤러코스터 등이 공존하여 매직랜드라는 제목과 함께 놀이공원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이 <매직랜드>의 놀이공원은 꿈과 환상의 나라이기보다는 삭막한 도시와 뒤엉켜 있는 낯선 곳이다. 사실상 어린 시절 모든 동화 속에 어김없이 등장했던 성은 많은 이들에게 동경의 대상으로서 성인이 되어서까지 일종의 판타지로 남게 된다. 이른바 유년의 상징으로서 성은 자연스럽게 상상과 환상의 공간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이러한 지점에서 김정주는 성을 수직적 쌓기의 상징물에서 비현실적인 공간의 상징물로 확장시켜 비현실성의 대변체인 놀이공원으로 연결한다. ● 놀이공원은 자본주의 사회의 대표적인 허구적 공간으로서 의도적으로 인간을 현실로부터 차단해 일상의 삶을 망각하도록 만든다. 놀이공원의 형형색색 화려한 놀이기구와 미니어처 구조물은 그곳에 머무는 동안 일시적으로 사람들의 주의를 빼앗고 한정된 공간 안에서 소비를 극대화하도록 완벽하게 짜여 있다. 이러한 연유로 놀이공원은 역사적으로 보다 높은 생산성을 가져오기 위한 일시적인 유희의 공간으로 끊임없이 세워져 왔으며, 대부분 도시의 외곽에 위치해 도시의 인위적 확장에 기여해왔다. 꿈과 환상이라는 기치아래 사람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존재의 목적을 은폐하는 놀이공원이야말로 자본주의의 논리가 가장 잘 반영된 공간인 셈이다. 김정주는 성을 이러한 놀이공원을 대표하는 구조물이자 나아가 도시 전체의 상징물로 바라보고 있다. 오늘날 도시는 소비의 극대화를 위해 치밀하게 계획되고 그 사실을 의식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굴러가고 있다는 점에서 놀이공원의 확대판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판타지를 대변하는 성과 그것이 확장된 허구공간인 놀이공원, 그리고 그 변형체인 도시의 구조물, 이 모두는 인간의 욕망과 자본주의라는 전체적인 맥락 안에 서로 연결된다. 김정주의 <매직랜드>에 성과 여러 놀이기구들이 도시의 구조물들과 자연스럽게 공존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이다. 뿐만 아니라 어디까지가 놀이공원이고 어디서부터가 도시인지 구분할 수 없도록 짜여진 <매직랜드>야말로 실재와 허구가 뒤엉켜 있는 오늘날의 현실을 매우 적절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김정주_Magic Land_디지털 프린트_100x75cm_2007

이렇듯 김정주의 <매직랜드>는 작가의 분명한 논리 아래 치밀하게 조성된 가상의 도시다. 이 새로운 도시는 날것 그대로의 금속성 재료와 어두운 색조의 화면으로 인해 꿈과 환상의 결정체인 성과 놀이공원의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차갑고 황량하며 심지어 퇴락의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이는 겉으로 화려해 보이는 놀이공원이나 도시 이면에 숨겨진 어두운 부분을 암시하고 있어 흥미롭다. 치밀하게 계산된 산업논리에 의해 유지되는 사회구조와 이에 종속된 대다수의 사람들이 가시적 성장에 의해 가려져 있는 자본주의의 냉혹한 현실을 은연중에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김정주는 놀이기구와 도시의 구조물을 어두운 배경에 차가운 금속으로 재현함으로써 대상의 형태와 이미지를 미묘하게 상충하도록 하여 그 효과를 배가시키고 있다. 전작인 에서 스테이플러 철침의 금속성 재질이 일차적으로 근대적 산업구조물의 느낌을 불러일으켰다면, <매직랜드>에서 동일한 재료는 구조물의 특성상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도시의 인상을 주는데 기여한다.




김정주_Magic Land_디지털 프린트_100x75cm_2007

작가의 상상력이 가미되면서 한층 작가의 주제의식이 분명해진 이 가상의 도시 <매직랜드>는 전작에 비해 내용 면에서도 심화되었지만, 형식면에서 또한 발전된 면모를 보이고 있다. 집적의 형태와 공간의 구조가 훨씬 다양하게 표현된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최종적으로 사진으로 남게 되는 김정주의 작업은 기본적으로 엄청난 시간이 걸리는 조형물 제작의 과정을 거친다. 스테이플러 철침을 일일이 손으로 뜯어 붙이는 이 무념무상의 노동집약적 과정에 있어 작가는 별다른 드로잉 없이 즉각적으로 구조물들을 만들고 전체적인 공간을 완성해 나간다. 그 곳에는 그 안에서만 작동하는 기계적 메커니즘이 존재한다. 구조물 하나하나는 실제 건물이 세워지는 것처럼 매우 정교하게 구축되며, 전체 공간은 실제 도시가 세워지는 과정처럼 중심 구조 위에 세부적인 요소들이 추가되어 하나의 거대한 도시로 완성되는 것이다. 물론 이 거대 도시는 실제크기의 몇 천분의 일로 축소된 미니어처이다. 에서 구조물들이 주로 스테이플러 철침의 직사각형 모양을 토대로 한 수직수평의 구조로 이루어졌다면, 이번 <매직랜드>에서는 곡선형 구조가 새롭게 시도되었다. 곡선을 만들기 위해서는 철침을 보다 작은 단위로 잘라 매우 정교하게 이어 붙이는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곡선은 회전관람차, 롤러코스터, 원형경기장 등에 적용되어 <매직랜드>의 핵심적인 조형 요소로 자리하게 된다. 김정주의 <매직랜드> 연작은 수직적 형태의 기본적인 도시 구조물에 이러한 곡선 형태의 놀이기구들이 더해져 보다 풍부한 조형성을 선보이고 있다.




김정주_Magic Land_종이에 펜_42x59cm_2007

그러나 무엇보다 김정주의 작업이 경쟁력을 갖는 것은 이러한 실제 조각물을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해 효과적으로 변모시키는 최종적인 결과물의 이미지에 있다. 처음 김정주의 사진을 맞닥뜨린 사람은 차갑고 생경한 도시의 강렬한 인상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스테이플러로 만들어졌음을 인식하고 다시 한번 놀라게 된다. 아무리 정교하게 만들어냈다 하더라도 사실상 그것은 폭 1센티미터의 작은 철침을 이어 붙여 만든 작은 미니어처 도시에 불과하다. 만일 이 미니어처를 실물로 제시한다면 사람들은 그저 솜씨 좋게 잘 만들어진 조각이라고 고개를 끄덕일지 모른다. 어쩌면 접착제가 묻어있거나 매끈하지 않은 형태에서 허점을 잡아내기에 바쁠지 모른다. 그러나 사진으로 재현된 김정주의 작품은 보는 사람을 압도할 정도의 힘을 가지며, 실제 도시의 이미지로 받아들여진다. 이것은 분명 사진의 힘이다. 화면 속 대상을 실제로 느끼도록 환영(illusion)을 제공하고 사람의 눈과 다르게 이미지를 한정된 프레임 안에 담는 사진의 기본적 속성 덕분인 것이다. 또한 김정주의 작품은 다양한 각도와 부분 확대와 같은 카메라 워크에 의해 보다 풍부한 장면을 재현한다. 도시의 전체 구조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부감 이미지나 구조물의 표면 질감을 강조하는 클로즈업 이미지는 사진으로만 포착할 수 있는 훌륭한 조형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김정주는 이처럼 조각과 사진이라는 두 장르의 경계를 관통하고 있다. 조각을 사진으로, 즉 삼차원의 입체를 이차원의 이미지로 전환함으로써 발생하는 효과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김정주_Magic Land_종이에 펜_15x25cm_2007

또한 김정주의 이번 두 번째 개인전에는 사진 연작 외에 작가의 세밀한 펜 드로잉이 함께 선보일 것이다. 새롭게 시도된 이 드로잉 연작은 <매직랜드>의 연장선상에서 도시의 구조를 매우 가는 펜으로 정밀하게 묘사한다. 동식물 조직의 세포처럼 도시의 특정 지점마다 내재되어 있는 하부 중층(重層) 구조를 그린 이라는 제목의 이 드로잉들은 마치 <매직랜드>의 도시 아래 감춰진 복잡한 부분을 드러내는 듯 하다. 편집증에 가까울 정도로 치밀하게 스테이플러 철침을 쌓아 올리는 것과 같이 놀라울 정도의 밀도로 그려낸 드로잉들은 작가의 고유한 특징을 잘 보여준다. 오늘날 장르간의 뚜렷한 경계가 무너지고 인접장르와의 혼성을 가장 큰 특징으로 하는 현대미술 안에서 필요에 따라 여러 장르를 아우를 수 있는 능력은 작가로서 매우 유리한 조건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뚜렷한 자신만의 주제를 가지고 여러 장르를 하나의 결로 변주해낼 수 있다면 말이다. 김정주는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으로서의 도시를 자신만의 시각을 가지고 하나의 큰 틀 안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풀어내고 있다. 이제 이십 대 중반의 가능성 많은 이 젊은 작가의 행보에 앞으로 귀추가 주목된다. ■ 신혜영


-------------------------------------------


Metropolis in Sub-Way-World

책임기획_김상우

2008_0109 ▶ 2008_0122



강홍구.서울역.디지털 프린트.2007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덕원갤러리 홈페이지로 갑니다.




Opening / 2008_0109_수요일_06:00pm

참여작가 / 강홍구.금혜원.김정주.노충현.권순관.인효진.정윤석.이혜승.민지애
필자 / 김상우.이재준.민병직.이종님.양기민

관람시간 / 10:00am~06:00pm
후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덕원갤러리
서울 종로구 인사동 15번지
Tel. 02_723_7771
www.dukwongallery.com






대도시의 지하세계: 전도된 세계, 길 잃은 유목민 ● 낮에는 도시의 인간이란 피가 땅 아래로 흘러 심장으로 들어가고, 밤에는 이 지하의 관이 중심부로부터 덩어리를 비워내는 정맥이 된다.(세넷 1994)




권순관.Configuration_S no.3-339.투명필름에 디지털 프린트.70×765cm.2007.부분



권순관.Configuration_S no.3-339.투명필름에 디지털 프린트.70×765cm.2007


신화의 공간, 현실의 공간 ● 예부터 지하는 명부의 세계였다. 죽어서만 가는 곳이지, 살아서는 못가는 곳이다. 오르페우스를 비롯해 숱한 인간들은 잃어버린 존재를 찾으러 북망산도 넘어갔고 레테의 강도 건너갔지만, 그들은 바랐던 것을 얻지도 못한 채, 오히려 현세의 사람에게 배척을 받기에 이른다. 금기를 어긴 결과, 스스로 금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왕이었던 오르페우스조차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그곳은 인간이 아닌 것이거나, 인간을 넘어선 존재만이 거주하는 이계인 까닭이다. 이계의 면모는 현대에도 형태를 달리해 흔적을 남겨 놓았다. 공포영화의 사건은 언제나 어둑한 지하실에서 일어난다. 얼핏 투명해 보이는 현실에 구멍이 뚫리며, 지금까지 ‘의식 밑에’ 눌러놨던 무엇이 괴물로 튀어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문은 현대에 들어서 굳게 닫히게 되었다. 실제로 뚫려 버렸기 때문이다. 지하철이 등장하면서, 신화적 공간은 현실적 공간으로 완전히 갈음됐던 것이다. 이것은 무엇보다 현대적 대도시의 ‘출현’과 ‘논리’와 밀접히 관련된다. “도시의 참된 모습만큼 초현실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벤야민) 이것은 결코 은유도 농담도 아니다. 지상에서 아름답게 반짝이는 대도시의 밤하늘을 생각해 보라. 인공의 조명은 대도시를 본격적으로 ‘예술작품’으로 탈바꿈시켰다. 그것의 논리는 기술문명이고, 그것의 현현은 ‘인공현실’이겠다. 자연을 밀어내고 인공으로 구획된 거리, 그곳을 쉴 새 없이 오고가는 각종 철마들, 빈칸을 채우듯 솟아오른 갖가지 철골구조 등등, 인공의 질서와 산물은 곳곳에 새겨져 있고 채워져 있다. ‘지하철’은 이러한 논리를 전개한 결과 가운데 하나다.




금혜원.Abstract Space 4.디지털 프린트.76.2×50.8cm.2007



김정주.Cell 1.종이엔 펜.35×25cm_2007


전도된 세계형성 ● 이러한 ‘지하철’은 오늘날 더 이상 적절한 용어가 아닐지 모른다. 왜냐하면 지상세계와 견줄 만큼 자신만의 ‘지하세계’를 이뤄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지상과 똑같이 먹고 마시고, 놀고 말하고, 심지어 잠까지 잔다. 지상에서 영위하는 모든 종류의 행위를 그대로 수행한다. 하지만 그곳은 은폐된 세계였다. ‘지하’에 마련된 세계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이것은 세계가 형성되는 방식이 지상과 달랐기 때문에 빚어진 것이 크다. 즉 지상의 세계가 ‘길에 대한 터의 우위’를 바탕으로 구성됐다면, 지하세계는 ‘터에 대한 길의 우위’를 기초로 건립됐다. 세계형성의 벡터가 전도된 셈이다. 그랬던 탓인지, 사람들에게 그곳은 이동하는 통로지, 거주하는 터전은 아닌 것으로 비쳤다. 유목민의 역사가 그랬던 것처럼, 길에서의 삶은 보이지도 기록되지도 못했던 것이다. 정주민과 유목민의 대립은 여기서도 유효하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노충현.역729.캔버스에 유채.350.1×181.8cm.2007



민지애.구룡역에 용이 나타났다 01-1.디지털 프린트.2007


철마를 타는 유목민 ● 생각해보면, 지하철만큼 현대적 삶의 형식을 명확히 보여주는 것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시공간의 범주에서 봤을 때, 현대인의 하루와 동선을 아우르기 때문이다. 지하철은 현대인의 하루가 시작되는 곳이자 마감되는 곳이지 않은가. 그것은 단순한 일상적 습관의 문제만도 아니다. 현대인의 일상을 압축해서 보여주는 핵심적 상징일 수 있기 때문이다. 여러 다양한 장르에서 현대인이 과연 어떤 식으로 재현되는지 생각해 보라. 떼 지어 이동하는 군중의 모습, 거기서 ‘개체’는 소멸한다. 이때의 ‘주체’는 개별인간이 아니라, 거대하게 무리지은 검은 점들의 행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양상은 특히 아침저녁 지하철에서 명확하게 표현된다. 걷는 것이 아니라 떠밀려 이동하는 상황, 묵묵히 지정된 목표에 배달‘되는’ 사물에 가깝다. “군중은 움직이는 장막이었다.” 말보다 훨씬 큰 차를 타지만, 의지와 의욕을 상실한 ‘유목민’이라고 하면, 농담일까 진담일까. 어쨌든 어떤 모습을 봐서도 세계를 헤아리며 다스렸던 ‘근대주체’의 모습을 찾기란 난망한 일이다. 그렇기에, 지하철에서 일렬로 바삐 이동하는 군중은 ‘현대’의 완벽한 우의겠다. “이 장막을 통해 보들레르는 파리를 보았다.”(벤야민)




이혜승.조감 1.종이에 드로잉.30×33cm.2007



인효진.The Collection of Gaze: Metro Louis Vuitton Collection.디지털 프린트.125×75cm.2007


역사의 굴곡, 장소의 기억 ● 흥미롭게도 한국의 지하철은 역사의 굴곡을 뚜렷하게 새겨놓았다. 1호선이 70년대 근대화를 알리는 깃발이었다면, 2~4호선은 80년대 거침없이 질주하는 산업자본주의의 상징이었고, 5~8호선은 90년대 본격 소비자본주의를 드러내는 신호탄이리라. 물론, 호선들이 엄밀하게 시대의 궤적과 일치하진 않지만, 적어도 지하철의 ‘운동’은 자본의 ‘질주’와 대략 상응한다. 따라서 1호선부터 8호선까지 조금씩 구획되는 양상을 시간의 축에다 옮겨놓으면, 그것 자체가 약동하는 대도시 서울의 공간적 역사가 되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서울의 큰 역사는 개인의 작은 기억과 자연스럽게 접속된다. 70년대 1호선으로 서울시 내외를 오고갔던 민중들과 80년대 2호선으로 대학교를 다녔던 학생들이 지하철을 동일하게 기억할 리 만무하다. 한발 나아가, 세대와 노선이 아예 고착되는 양상 또한 드러난다. 예를 들어, 1호선은 노인들이 상용할뿐더러 그들만의 생활공간으로 점령되는 경향을 보인다. 이것은 지하의 노선을 넘어서 지상의 지역까지 확장되어, 장소의 가치를 변용한다. 1호선 종로3가역과 파고다공원의 ‘접속’을 생각해보라. 이런 현상을 모든 세대와 모든 노선에 적용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개인별 노선별 지역별 기억의 ‘편차’가 존재하는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정윤석.'그'를 찾아서.실험영상.00:19:30.2007


길 잃은 사람들 ● 이렇게 형성된 지하철을 재현한 노선도도 흥미로운 대상이다. “지도는 계몽을 유발하는 도상적 표현이다. 하지만 그 계몽은 꼭 무엇을 단순화하거나 사실적으로 설명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필립스) 그것은 과연 그 이상의 역설적 의미가 있었다. ‘전근대인’의 경우, 이 지도를 읽지 못하고, 오히려 혼란스러워한다. 즉 지도에서 길을 잃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인들은 대형지도를 아랑곳 않고, 사람들에게 직접 물어 정보를 얻어 간다. 반면에 ‘현대인’은 따로 배우지 않고도, 손쉽게 지도의 기호를 읽고서 갈 곳을 찾아간다. 하지만, 그들의 행로와 목적지는 너무도 뚜렷하여, 그들은 자신의 몸놀림조차 의식하지 못할 정도다. 요컨대, 현대인이 별다른 의식 없이 지하철이란 삶의 미로에 빠져든다면, 전근대인은 뚜렷이 의식해도 지하철이란 삶의 미로에 사로잡히는 셈이다. ■ Metropolis in Sub-Way-World


-------------------------------



삶의 터-기와

류성환展 / RYOOSEONGHWAN / 柳晟桓 / painting

2008_0109 ▶ 2008_0115



류성환_samsara_캔버스에 유채_130×162cm_2007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가나아트 스페이스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8_0109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_10:00am~07:00pm




가나아트 스페이스
서울 종로구 관훈동 119번지
Tel. 02_734_1333
www.ganaartgallery.com






사람들의 초상과 살아가는 모습을 그려 전시를 가진 몇해 동안 개발로 사라질 현재 살고 있는 집에 주목하며, 기와를 그리고 있다. ● 깨질듯 서로에게 층층이 설켜있는 세월의 기록자로 묵묵히 자리하는 기와를 바라보고 있자면 다수의 힘없는 사람들이 그 긴 세월동안 세월의 온기를 품어 왔던 정겨움과 따스함 그리고 한숨 섞인 비움의 빛 바램이 자연스레 우리의 모습과 닮아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류성환_이탈_캔버스에 유채_91×116.7cm_2007



류성환_터4412_캔버스에 유채_91×116.7cm_2007



류성환_동행_캔버스에 유채_112×145.5cm_2007



류성환_늘_캔버스에 유채_72.7×91cm_2007



류성환_검은춤_캔버스에 유채_72.7×53cm_2007

이번 전시 『삶의 터-기와』이야기는 사라져 가는 유산의 소중한 가치를 윤회적(samsara) 염원을 담아 우리의 삶을 기와 속에 자유로이 풀어내고, 삶의 되새김질을 가슴 속 깊게 고르는 과정에 있다. ■ 류성환



-----------------



Gelams and Glimmers in Seoul

안세권展 / AHNSEKWEON / 安世權 / video.photograph

2008_0109 ▶ 2008_0120 / 월요일 휴관



안세권_2005년 5월 2일 서울 청계천_디지털 프린트_132×268cm_2007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gallery175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8_0109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_10;00am~07:00pm_월요일 휴관

후원_한국문화예술위원회





갤러리175
서울 종로구 안국동 175-87번지 안국빌딩 B1
Tel. 02_720_9282
gallery175.egloos.com






2000년대 서울 비사(秘事)-안세권이 이미지에 담은 서울의 속성들

몰락한 주변부: 월곡, 청계천 ● 안세권이 영상과 사진으로 담아낸 공간은 대부분 이제는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몰락한 곳들이다. 이 공간의 ‘몰락’은 애초 그 곳들이 선진 자본주의를 경원하는 대한민국의 ‘토건주의’ 경제속도와 ‘과시형’ 문화 취향에 발맞추지 못했기에 강제적으로 집행된 해체의 형태를 띠고 있다. 역설적이지만 그래서 또한 이 영상과 사진들에는 대한민국 대도시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성냥갑 형 아파트나 국적불명 절충주의 양식의 대형빌딩 같은 ‘발전’의 표상이 담겨있다. 말하자면 한 이미지에 ‘몰락’과 ‘발전’이 야누스적으로 동거하고 있는 셈이다. 가령 포클레인으로 깎이고 뒤집혀 줄 쫙쫙 그어진 희멀건 몸체의 땅덩어리 옆으로 수직 상승형 아파트 군락이 열과 행을 맞춰 불 밝히고 있는 성북구 월곡동 개발지대 사진을 보라. 또 가령 ‘1950년 6?25 동란 때 폭격 맞은 서울이 이랬을까’ 싶게 처참할 정도로 바스러져, 철근과 콘크리트의 사체(死體) 안치소 같은 청계천 복원공사 초기(2004년 5월경) 현장 사진을 보라. 물론 우리는 그 사진에서 불가피하게 다음과 같은 것들도 보아야 한다. 원근법적 소실 선을 만들어내고 있는 눈부신 가로등과 난무하는 플래카드와 규칙적으로 처진 방진막. 이것들은 앞서 서술한 죽음의 공간 청계천에 병존했던, 쇠락한 현존과 신화적 발전의 뒤얽힌 기표다. 그리고 그마저도 2005년 10월 1일 화려하게 변신한 ‘행락지로서의 청계천’ 개막과 함께 휩쓸려 사라져버린 파편성과 일과성의 대한민국 엠블럼(emblem)이다. ● 서울에서 공간의 변화는 점진적인 것이 아니라 앞선 시간과 단절하며, 한 장소가 이전에 가졌던 독특한 성격을 급히 털어버리며, 비약적으로 이루어진다. 안세권의 영상과 사진에서 서울 곳곳이 ‘몰락한 주변부’라는 반면(半面)과 ‘발전의 중심’이라는 반면을 하나의 얼굴로 한 채 등장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안세권_뉴타운 풍경, 2006 서울, 월곡동_라이트 패널_2007



안세권_뉴타운 풍경, 2007 서울, 석관동_라이트 패널_2007



안세권_뉴타운풍경, 2004년 서울 삼선동, 2007년 서울 월곡동_라이트 패널_2007


침묵의 시간: 새벽 5시, 2003년 7월 1일 이후 ● 모든 사진가들에게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기본적으로 사진을 찍는 일은 어느 정도 고독한 상태와 일정량의 침묵을 강제한다. 주변의 부산함이나 혼잡으로부터 떨어져 나와야만 대상을 정확하게 바라볼 수 있고 이미지화할 수 있으며, 셔터를 누르는 시간은 절대적으로 정중동(靜中動)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이런 요소는 안세권의 경우, 사진의 분위기를 통제함으로써 구현되고, 그 분위기는 사진의 색조(tone)를 통해 집약적으로 나타난다. 이를테면 사진을 찍는 이에게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고독과 침묵이 이 작가 작품에서는 이미지 톤을 통해 감상자에게 전달된다는 얘기이다. 안세권이 찍은 서울 사진들 대부분은 예외적일 정도로 푸른 색조를 띠고 있다. 그 색조가 어떻게 보면 피사체 ‘서울’을 매우 투명하고 선선한 공간으로 현상한다. 마치 푸른 수족관의 내부처럼, 겨울 새벽녘 환경미화원의 입 주위에서 피어나는 서릿김처럼 맑고 차가우면서도 단단해 보이는 이 서울의 이미지는, 작가가 아무도 깨어나지 않은, 여타의 존재와 사물이 숨죽이고 있는 시간에 피사체가 된 공간과 마주했음을 증명한다. ● 새벽 5시. 재개발 공사의 해체 과정에서 폐허더미로 변한 월곡 산동네 사진에서 전면에 포착된 온갖 건축 쓰레기, 절단난 생활의 부스러기들은 그 ‘파편성’으로 무척 소란스러울만한 피사체들이다. 그런데 안세권의 사진에서 이 개발의 노이즈(noise)가 너무나 고즈넉한 모습을 띠고 있는 것은, 오로지 사진가의 사진 찍는 목적과 그가 피사체와 마주한 시간이 ‘물질적 발전’ 이데올로기로부터 궤도를 이탈한 데 있을 것이다. 불도저식 개발과 국민의 ‘경제적’ 성공을 부르짖는 지금 이 곳의 목적론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과거에 대한 존중, 그 목적론의 시계바늘이 시끄럽게 가리키고 있는 생산성의 시간과는 다른 성찰의 시간. 이 심리와 시간성이 안세권의 서울 사진에 푸른 색조와 차가운 서리 기운으로 기입돼 있는 특수한 미장센이다. 그 미장센은 때로 늙고 추한 얼굴에 범벅된 짙은 화장처럼, 피사체가 된 대상의 현실적 곤궁과 신체적 고통을 나쁘게 미화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그의 사진에서, 월곡의 산동네 철거 주민들이 당장에 겪었을 약자로서의 배고픔, 내쫓김, 모멸은 청명한 사진의 분위기 속에서 억압되거나 가상이 되어 버리기도 하는 것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세권의 사진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이미지들이 돌이킬 수 없는 서울의 실재했던 과거들, 이제는 ‘침묵’과 ‘망각’ 속으로 사라져버린 현실의 순간들을 표지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찾을 것이다. 여기서 말한 ‘침묵’은 앞서 말한, 사진가가 사진 찍을 때 필수적으로 강요받는 침묵이 아니라 역사에서 버려져 더 이상 현재의 의식에 회부되지 않는 과거가 강요당하는 침묵이다. 예를 들면 2003년 7월 1일 청계천 복원공사 개시 이후, 우리가 더는 관심두지 않는 그 이전 시기의 청계천이 겪는 침묵이다. 거기 잡다한 노점상들 속에, 지저분한 상가 건물들 속에, 헌책방의 누런 책들과 불법비디오의 유치한 딱지 속에 너무나 분명하게 우리의 한때 삶이 기입돼 있었는데도 우린 그것들에 대해 말하지 않았고, 잊어버렸다.




안세권_2004 하이서울 페스티발 기간중 청계천 축제, 서울 청계 9가_라이트 패널_2007



안세권_2005년 그해 마지막날 청계천_라이트 패널_2007


빛의 양면적 이미지: 표면의 환상들 혹은 유령들 ● 어느 때부터인가 서울의 곳곳이 인공 빛으로 반짝이기 시작했다. 구두쇠 스크루지 영감의 어두운 침실 같았던 서울은 현재 마리 앙투아네트의 베르사유 궁처럼, 혹은 19세기 파리의 불르바르(Boulevards)처럼 광휘로 빛나고 있다. 한강 다리는 밤마다 연중무휴 365일 크리스마스 장식처럼 반짝이고, 서소문과 을지로에 집결된 대기업 사옥은 각종 조명 이미지로 굴뚝 산업의 황혼을 자축하는 분위기이며 그 주변 백화점들은 상품 물신을 첨단 조명장치의 광휘로 전파한다. 서울 시청 앞 광장과 청계천 물길은 또 어떤가? 루미나리에(luminarie) 축제 속에서 오색 빛이 군중 또한 장식으로 만들며 넘실거린다. 한편으로는 황홀하게 반짝이며 도처에 넘치는 이 빛들이 대한민국 서울의 강퍅한 삶을 위무해줄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그 강렬한 조명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만들어지는 그늘 또는 어둠이 이 매트로 시티를, 첨단 건축물을, 소위 ‘명품’을, 그리고 우리 개인을 유령처럼 실체 없고 기괴한 어떤 것으로 만든다. 손전등을 아래서 비추면 누구라도 귀신 얼굴이 되는 것처럼, 권위의 소도구로 애용되는 서울시의 조명들, 환상의 촉매제로 동원되는 후기 자본주의 상업 공간의 빛 장식들은 우리 현존의 얼굴을 유령화 한다.




안세권_Gelams and Glimmers in Seoul_라이트 패널_2007



안세권_Gelams and Glimmers in Seoul_라이트 패널_2007


완전히 어두운 전시장 공간에 설치되는 안세권의 라이트 패널(light panel) 사진작품들도 이와 같이 ‘유령적’ 속성을 갖고 있다. 인화지에 출력한다면 일반적인 도시 풍경 사진처럼 견고하고 안정적으로 보일 안세권의 일련의 사진들은 자체 발광하는 ‘빛 판’ 형식으로 제시됨으로써 공간 속에서 부유하는 비물질에 근사(近似)해진다. 내부에 빛이 없을 경우 우리의 상상력은 그 대상의 내면적 깊이를 탐사하지만, 자체 빛을 통해 스스로의 내장까지 비춰 보이는 대상에서 우리 감각이 하는 일이란 표면을 훑는 것이다. 그것은 테러시대 공항검색대가 요구하는 투명비닐가방과 닮은꼴로서, 드러난 이미지의 세부를 검사하거나 양상의 표피를 일견하기에 유용하다. 안세권의 라이트 패널 형식 사진을 두고, 우리가 서울을 기만적인 빛으로 유령화 할 수 있다고 우려하는 것과 동시에 그 자체 발광하는 사진들이 우리 일상 표면에 ‘숨은 그림’처럼 공존하고 있는 비밀스런 사실을 노출시켜 우리를 각성시킬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는 것은 이러한 문맥에서만 타당하다. ■ 강수미




번호별로 보기
여러개의 게시물 정리 제목별로 보기 이름별로 보기 날짜별로 보기 조회별로 보기
1040     [re] 연필 한 자루 [6] zabel 2003/12/21 729
1039     [re] 이야기 정은 2004/05/03 499
1038     [re] 자벨님 토욜에 시간되시거든 번개나 한번 하죠 [5] intuition 2003/09/14 438
1037     [re] 자정 혹은 후희 [5] 랭보 2003/12/29 424
1036     [re] 저작권(2) zabel 2005/01/12 384
1035     [re] 전시 1.25 2008/01/25 624
    [re] 전시 1.9 2008/01/09 709
1033     [re] 전시 11.8 2007/11/08 774
1032     [re] 전시 2012.11.27 2012/11/30 2477
1031       [re] 전시 2012.11.27 2012/12/09 2452
1030     [re] 전시 3.16 2009/03/16 1199
1029     [re] 전시 3.30 2009/04/01 1064
1028     [re] 전시 3.9 2008/03/17 662
1027     [re] 전시 4.13 2008/04/16 830
1026     [re] 전시 4.2 2007/04/02 722
1025     [re] 전시 4.2 2008/04/04 971
1024     [re] 전시 4.23 2008/04/27 875
1023     [re] 전시 6.27 2008/06/28 667
1022     [re] 전시 6.28 2007/07/08 555
1021     [re] 전시 7.11 2008/07/13 869
 ◀ [1]..[11][12][13][14][15][16] 17 [18][19][20]..[68] ▶ 
Copyright 1999-2026 Zeroboard / skin by uZ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