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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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omepage]님께서 남기신 글 (2006-08-03 05:58:04, Hit : 631)
전시 8.2



숨겨진 동양화가의 시점을 찾아서

조종성 개인展

2006_0801 ▶ 2006_0811



조종성_이동시점으로 본 집3_모형지_20×5.5×18.5cm_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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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6_0801_화요일_06:00pm




호기심에 대한 책임감
서울 종로구 부암동 254-5번지
Tel. 011_9087_9697
www.curiosity.co.kr






숨겨진 동양화가의 시점을 찾아서 ● 영화 ‘음란서생’을 보신 적이 있는가? ● ‘음란서생’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음란하지만, 마지막 장면에 움직이는 그림을 그리는고 서는 그 것이 ‘동영상’이라는 내용이 나온다. 그 시대 움직이는 그림이라? 생각할지 몰 라도 아마 동양화가들의 그림들 속을 자세히 쳐다보면 동영상 그 자체다. ● 동양의 화가 들은 어떻게 생활과 풍경을 관찰하고, 또 어떻게 이를 창작과 연결시키는가? 이에 대한 많 은 고사들이 전해오고 있는데 예를 들면 당의 현종이 가릉지방의 경치를 그리워하여 오도 자로 하여금 그려오게 하였는데 오도자는 가릉지방을 둘어보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현종이 그 이유를 물으니 ‘저는 비록 밑그림을 그리지 않았으나 모두 마음속에 담아 왔습니다’ 라고 답하였다. 훗날 오도자는 대동전이라는 건물에 벽화를 그리게 되었는데 여기에 3백여 리에 걸친 가릉지방의 풍경을 담아 하루만에 완성하였다고 한다.




조종성_동영상풍경_컴퓨터작업 후 프린트_21×29.7cm_2006



조종성_동양화가 바라보기_장지에 먹_20×20cm_2006



조종성_이동시점으로 본 집_모형지_9×2.5×9.3cm_2006



조종성_동영상풍경2_컴퓨터작업 후 프린트_21×29.7cm_2006



조종성_동양화가 바라보기2_장지에 먹_31.5×40.5cm_2006



조종성_이동시점으로 본 집2_모형지_14.2×3.5×20cm_2006


이러한 고사는 동양의 화가들이 그림을 그릴때 어떤 고정된 시점에서 특정한 시야 안의 사물을 관찰하고 묘사하지 않음을 설명해준다, 화가들은 걸으면서 보고 생각하면서 대상의 각 방면을 관찰하게 되며, 그 후 대상을 떠나 대부분을 형상기억에 의해 창작을 하였다는 것을 알려준다. ● 그 관찰의 중심은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의 생활공간과 그 주변공 간이다. 주거의 한 형태인 집은 그림속에 있지만, 집에서 항상 익숙하게 보던 풍경은 그림 엔 나타나지 않고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는 그런 부분이 바로 내가 관심을 가지는 풍경인 것 이다. 그것은 그림에서 보이는 풍경의 뒷부분이다. 그 뒷풍경은 보이지는 않더라도 그림을 그리기 위해 화가들이 직접 돌아봐야 했던 풍경인 것이다. ● 한 폭의 풍경을 그리기 위해 서 화가는 그림속의 사람들을 따라 보기만 해도 어질어질한 산을 타고 험한 벽을 기어서라 도 올라 갔었던 것 같다. 내가 보고 싶은 풍경을 그리기 위해 난 아직 그림 속 높은 산을 타고 있다. ● 그리고, 또 하나 재미나는 점은, 시야 안의 사물을 서양화의 고정시점과 다 른 이동시점을 가지고 있으면서 즉, 동영상 같은 느낌으로 산과 나무를 화폭에 그려 나갔 다는 말인데, 생활공간인 집은 그렇지 않고 고정시점으로 봤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림 속 의 집을 지우고 이동시점의 형식을 빌어 기와집을 만드는 것이다. ■ 조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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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요한 그리기;내면적 사유

2006 경기문화재단 기획

2006_0720 ▶ 2006_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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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6_0720_목요일_06:00pm

김성룡_김 을_유승호_윤석만_이재삼_임만혁_전민경_정경희_정용성




경기문화재단 전시장
경기 수원시 팔달구 인계동 1116-1번지
Tel. 031_231_7289






육체적 서사 혹은 실추된 삶의 승화로 서의 회화 ● 갈망된 시선은 눈꺼풀을 반쯤 내린다. 나는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의 그림들을, 그 놀란 듯한 정중함을 좋아했다. 오직 이곳만을 보고 있지 않은 눈. 예전 세계에 중독된 얼굴들. 두 눈으로 바라 보는 것과 동시대가 아닌 눈. 반쯤 감은 눈. 포식한 사자의 눈. M과 함께 우리는 1997년 여름 동안 반쯤 감은 이 놀라운 눈꺼풀들을 조사하러 갔다. 그것들은 마치 보이는 것을 가리기 주저하는 동시에 드러내지도 않으려고 주저하는 베일, 인간의 두꺼운 피부에 씌워진 매끄럽고 희미 한 베일들 같았다. -파스칼 키냐르- ● 오늘 왜, 미술계는 다시 ‘그리기’에 대한 집요한 관심으로 뜨거운가? 회화는 여러 차례의 사 망 선고에도 불구하고 한번도 미술계에서 퇴출당한 적도 자발적으로 떠난 적도 없었다. 주지하듯 1839년 다게레오-타이프 사진의 발명과 더불어 유 명해진 폴 들라로쉬의 “오늘부터 회화가 죽었다”는 선언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더니즘 시기 내내 주기적으로 회화에 대한 사형집행서가 재발행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그것을 집행하려고 하지 않았다. 아서 단토(Arther C. Danto)는 회화의 종말에 대해 언급하면서 사형집행이 계속 꾸물대는 바람에 사형집행대에 세워진 생명이 결국 장수하게 된 셈이라고 말했지만, 그것보다는 미술계가 본질적으로 회화의 죽음을 원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미술사적 패러다임 내에서 회화의 자성(自省)을 촉구하는 자발적이고 자생적인 발전적 사건으로 전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실질적으로 이런 선고의 배경에는 회화가 과거 수세기 동안 자신을 내맡겼던 그런 유형의 진보적 발전을 허용할만한 여지가 거의 남아있지 않았기 때 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회화가 아닌 다른 장르의 미술이 그 대안의 열쇠를 거머쥐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바도 아니다. 어쩌면 이는 회화가 더 이상 역사 발전의 주된 운반체가 아니라는 것과, 따라서 회화는 미술계를 정의하는 여러 매체들과 실천들의 개방적인 연접성 속의 하나의 개체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이처럼 회화는 아주 오랫동안 지배적인 미술양식이었다가 이제는 다양한 미술 양식 중 하나가 되었지만, 현재는 분명 집중적인 관심의 대상이 된 것만큼은 사실이다. 젊은 작가들의 회화가 대형화랑의 기획전에 초대되고, 하이 퍼리얼리즘류의 구상미술이 국공립미술관에서 개최되는 등 가히 회화의 춘추전국시대라도 된 느낌이 들 정도니 말이다. 그것도 형상성 혹은 구상성이 강한 회화가 대세를 이루고 있으니, 벌써부터 젊은 작가들의 새로운(?) 추상회화가 머지 않아 등장할 것이라는 예측이 회자되고 있는 것도 무리가 아니 다. 어쨌거나 오늘날의 회화는 하이테크놀로지와 미디어 아트의 등장과 범람이라는 시대적 추이로 인해 이전 시대와는 변별되는 새로운 위기에 직 면한 감이 없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시기에 진입했음을 자각한 회화들은 다시 한번 자신의 존재 근거를 되짚어보고 기존의 양식과는 다른 새로운 조형언어를 주조해내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오늘의 회화가 갖는 그 이전의 회화와의 변별성은 무엇이고, 그것이 시대정신(zeitgeist)과 연동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공하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 투성이로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술 을 구원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장르가 회화라는, 거부할 수 없는 암시(?)의 근원은 대체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




김 을_종이위에 볼펜, 수채_Φ50_2004



김성룡_무제_판화지 위에 볼펜, 색연필, 아크릴_106×155cm_2005



윤석만_벌거벗은 임금님_종이위에 펜_100×71cm_2006


오늘날의 회화는 그 자체의 본질인 ‘그리기’ 중에서 도 형태적인 동시에 물질적이며, 물질적인 동시에 행위적인 ‘드로잉’(drawing)에 천착하는 방향으로 선회하고 있다는 느 낌마저 든다. 뿐만 아니라, 드로잉 혹은 그리기라는 근원적이고 함축적인 장르에 따라붙는 원초적 질료들, 예컨대 목탄, 콘테, 연필, 수채 등 의 재료적 특성에 근간한 작업에 대한 집중 혹은 관심은 미술이 다시 ‘원초적 그리기’라는 회화적 본질로 돌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어쩌면 이것은 그리기를 통해 이 시대에 화가로 사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며, 왜 하필 이 시대에 화가가 되기를 원하는가라는, 당연하지만 절박한 질문과 맞닿아 있다. 그러니까 근대를 전후한 예술가의 패러다임이 환기하는 모범적인(?) 예술가적 전형이라는, 그 전설적 신화가 요구 하는 무명과 궁핍과 고통의 시기를 겪을 필요가 없을뿐더러, 즉각적인 인정과 물질적 행복을 기대할 수도 있는 이 시대적 상황에서 화가가 되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냐는 질문이 그것이다. ● 원초적 질료의 사용과 원초적 감각의 소유자로서의 화가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단 말인가? “화가 는 눈에서 손놀림을 통해 붓에 이르는 긴 과정 동안에 얼마나 많은 것을 잃어버리는가?”라는 폴 발레리의 언급대로라면, 이들 작가들은 이 괴리감을 최 소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원초적 재료에 집중하는지도 모르겠다. 이는 곧 회화가 다시 감각의 문제로 환원될 수밖에 없음을 천명해주는데, 실재 적으로는 회화가 사유와 감각의 일치라는, 즉 ‘체화된 의식’으로서의 몸의 사용이라는 문제와 맞물려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20세기 현대회 화는 지적이고 존재론적인 회화와 정적(情的)이고 실존론적인 회화라는 양대 산맥의 패러다임으로부터 그다지 자유롭지 못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더군다 나 지난 십 수년간 미술은 ‘그린다’는 원초적 행위로부터 떨어져 나와, 카메라와 컴퓨터와 비디오가 대신하는 단일하고 기계적인 메커니즘에 몸을 맡기고, 그로부터 파생되는 육체의 심각한 정체와 둔감함을 느껴야만 했다. 몸의 심각한 위기라는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문제에 당면한 것이다. 이때, 원초적 질료를 통한 ‘그리기’는 세계와 주체와의 생태론적 친화성을 위한 가장 원초적 훈련의 일환이며, 신체적 역능의 잠재력을 치유하는 복원기능 을 지닌 최적의 장르가 아닐 수 없었다. 주지하듯 근대 이후의 미술은 장르와 양식, 사조와 코드들로 무장한 채 그리기에 내포된 이런 야생적 의 미를 외면함으로써 스스로의 회화의 종말을 초래한 면이 없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회복되어야 할 것은 단순히 ‘회화의 회복’이 아 니라, ‘신체적 사건’으로서의 회화의 진정성을 회복하는 일일 것이다.




이재삼_저너머_캔버스위에 목탄_681×181cm_2004



임만혁_현대인06-1_한지위에 목탄_210×181cm_2006


실상 이런 회화의 역사적 연원의 시초는 메를로-퐁 티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체적 사건으로서 회화를 강조한 메를로-퐁티에 따르면, 회화는 우리의 신체 속에서 일어나는 사 물의 비밀스러운 발생, 즉 존재의 얼개다. 화가는 감각적?지각적 요소들을 통해서 존재를 회화화하는데, 이때 몸의 떨림으로부터 발생하는 야생적 행위로서의 감각과, 사고와 판단과 같은 인식적 행위로서의 지각이 공감각적으로 결합하게 되는 것이다. 이로서 회화는 신체적 사건의 공 감각적 기록이라는 인간학적 역능을 일깨우고 성장시키는 임무를 새롭게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지금까지의 전통적인 시각개념에 근간한 회화는 폐기되고 새로운 ‘육화된 시각’을 필요로 하는 회화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 ‘육화된 시각’은 이미 회화의 존재론적 사건으로서의 메를로-퐁 티가 주목한 세잔느로부터 태동하여 들뢰즈가 선택한 베이컨의 ‘회화의 외침 혹은 히스테리’로 진화하게 되었다. 어쨌거나 감각과 사유의 통합, 예컨대 화가의 원초적이며 야생적인 행위와 대상을 사고하고 판단하는 인식적 행위 사이의 역동성에 관한 회화적 표현을 구가하는 작품들은 여전히 하 나의 대안적이면서도 본질적인 회화로서 유효한 것일 수 있다. 다시 말해 회화가 여전히 살의 외침을 그리고 있으면서도 고도의 사유를 매개할 수 있다는 통합적 모색의 가능성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과 같이 영상 이미지가 범람하는 시대, 미적인 것과 비미적인 것이 변별성을 잃어버린 시대, 예술이 더 이상 없기 때문에 예술이 죽는 게 아니라, 예술이 너무 많기 때문에 예술의 종언을 고하는 시대, 이 시대를 성찰할 수 있는 미술이 바로 이런 기초적 질료를 통한 몸의 원초적 사용과 더불어 생장한 회화가 아닐까? <집요한 그리기-내면적 사유>전은 지난해부터 올 상반기에 걸쳐, 경기문화재단이 발행하는 <기전문화예술>의 기획물의 일환으로의 ‘작가 대 작가’라는 컬럼에서 비롯된 것이 다. 이 기획은 흔히 미술의 기초 재료라 일컫는 연필, 목탄, 펜, 콘테, 수채를 주재료로 작업하는 작가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재삼·임 만혁(목탄), 유승호·윤석만(먹과 펜), 정경희·최용석(목탄, 펜) 김을·전민경(수채, 펜), 정용성·김성룡(목탄, 볼펜)이 서로 짝을 이뤄 다루어졌다(전시의 구성조차 이런 그루핑(grouping)의 유기적 연동 속에 이루어졌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전시에는 최 용석이 제외되어 있다).. 기획자의 변에 따르면, 소위 이런 작업들이 “미술장르에서 하위 생산품이라는 식으로 천대를 받으며 작품으로 인 정받지 못하는 수난을 받아왔다”고 지적하면서, 애당초 하위적 범주라는 인식의 문제를 넘어서 단색조의 회화만의 소박과 투명성, 그리고 내밀한 진정성 을 보여주고자 한다고 밝히고 있다. 어쩌면 이런 작품들이 미술시장에서의 홀대가 있을지언정, 회화의 자기지시성 혹은 진정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암 묵적으로 긍정적인 평가가 존재했을 것이다.




전민경_neverending story_롤위에 펜_2004



정경희_기억 을 날리다_캔버스 위에 한지, 목탄, 펜, 오일_130×80.5cm_2005



전시전경


그렇다 면 이들이 그리기 혹은 쓰기에 유달리 집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실상 그리기 혹은 쓰기는 일종의 행위이며, 감각의 연장이며, 사물을 보는 시선에 다름 아니다. 이는 작가의 내적 충동을 가장 잘 반영하는 동시에 회화 자체의 육체성을 담 보하기에 가장 적합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욱 절실한 것은 선정된 작가들이 원초적 의미에서 화가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태생적 존재가 아닐까하는 생각이다. 이들 회화적 작업이 돋보이는 것은 실추된 삶을 회복하고자 하는 예술가적 자의식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점, 이것이 작업실에 서의 지난한 시간과의 고투와 인내로부터 생산된다는 점, 따라서 여전히 진지한 존재론적 고민을 담고 있는 밀도 있는 인간적인 행위라는 점 때문이 다. 예컨대 이들 작품들은 흐물흐물한 점액질의 상상력이 분비해낸 이미지들로 가득 찬 회화적 파토스로 표현되거나, 새로운 재현의 코드로 만들어 지거나, 언어와 사물의 관계가 메타언어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그러나 어딘지 클리셰(Cliche)적 혐의를 부인하기 어려워 보이는 까닭은 무엇인가. 예술이 관자의 발걸음을 오랫동안 붙잡아두는 까닭은, 보통 그 표현기법이 새롭거나 기발한 경우 혹은 그 의미가 쉽사리 해독되지 않아 관자의 지적 호기심을 유발하는 경우일 것이다. 이들 작업에서 아쉬운 점들 중 하나는 더 이상 새롭지 않은 진부한 질료지만, 독특하고 독창적인 표현기 법으로 가시화되었으면 하는, 늘 까다로울 수밖에 없는 관자로서의 바램이고, 다른 하나는 질료라는 형식의 문제를 떠나 내용적으로 중층적 의미 의 결여를 수사학적으로 해결하는 문제이다. 어쨌거나 상징적인 의미의 그물망에 포섭되지 않는 실재계적 요소인 ‘응시’라는 것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인 데, 이것이 예술의 본질로부터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결국 ‘응시’ 혹은 ‘물자체’를 상정하는 회화야말로 쉽사리 해독을 허용하지 않는 ‘non-sense’의 세계인 동시에 ‘para-doxa'의 세계로 관자를 초대하는 것이다. 이런 회화야말로 긍정적인 의미에서 낯설 고 불편하게 만드는 회화, 기존의 패러다임에 지속적으로 의문을 제기하는 회화일 것이다. 이런 회화야말로 절대적으로 필요할 뿐만 아 니라, 이 시대에 지속 가능한 회화가 아닐까? ■ 유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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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조각 프로젝트

부자와 빈자에 대한 사소한 단상展

2006_0804 ▶ 2006_0814 / 일요일, 공휴일 휴관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신한갤러리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6_0804_금요일_05:00pm

백승호_안경진_오수연_전성원_최혜광_박민섭_설총식_박헌열

퍼포먼스_2006_0812_토요일_02:00pm
공연명_부와 빈의 양극화의 조화
팀명_자각몽

후원_한국미술협회

기획/연출_조은정
www.orangespace.or.kr

개관시간_10:00am ~ 06:00pm





신한갤러리(구 조흥갤러리)
서울 중구 태평로 1가 62-12 신한은행 광화문지점 4층
Tel. 02_722_8493
www.chohungmuseum.co.kr






부자와 빈자에 대한 사소한 단상-갈구와 욕망 편 ● 본 전시가 시작되어진 배경은 다음과 같다. 프리랜서 전시기획자의 전시가 하나 만들어 지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시행되어져야 할 것은 장소의 결정이다. 어디에서 전시를 만들 것인가. 전시장을 찾거나, 혹은 전시장이 아닌 곳을 전시장으로 만들거나 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전시장의 기능도 다양하여 상설전시로 작품을 판매하는 상설화랑, 정해진 대관료로 일주일 단위의 대관을 하는 대관화랑, 기획전을 우선하는 유명작가만의 화랑 등등 작가가 전시를 할 수 있는 공간은 무수히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경험한 느낌처럼 그러한 곳이 한군데도 없을 수도 있을 것이다. 전시 안을 만들면 심사를 통해 기회를 제공하는 시스템을 갖춘 화랑들이 간혹 있으며 부자와 빈자에 대한 사소한 단상의 막은 그렇게 올라가게 되었다. 기존에 극장을 찾는 사람들이란 주제아래 매회 다양한 부제를 만들어 전시회를 만들어 가며 내가 잠시 머물렀던 대안공간은 국립극장이었다. 거대하고 삭막한 건물은 마치 사회주의 국가의 스산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아주 고요하고 외로운 외관이었지만 반대로 그 속에선 변화무쌍한 극적인 무대가 있었다. 아주 예전, 난 그곳의 담 길을 걸으며 그 공간에 매료되었고 수 년 후 복합문화 공간의 한 부분을 전시형태로 만들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백승호_object&shadow_철, 라인테이프_가변설치_2004

〈시놉시스〉1.전시의 배경 이미지로 대변되는 무대 배경_백승호


사실 전시제목의 극장을 찾는 사람들은 바로 나 자신 이였다. 극장이란 단어의 의미를 욕망, 염원과 동일시한 셈이다. 아주 힘든 일이어도 무척 귀찮고 번거로운 일이라도 누구나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은 반드시 하고자 염원한다. 모든 번뇌는 욕망에서 비롯된다고 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버려야 산다는 욕망이 없다면 희망은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인간은 누구나 자신만의 욕망을 소유하며, 결국 그 욕망은 삶을 영위해 나가는 희망이자 목적으로 이어져간다. 언젠가는 이루고자 염원하며, 이미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꿈을 향해 정진해 가고 있는 것이다. 아주 사소할지라도 그러한 희망마저 없이 삶을 영위해 나감은 너무 절망적이지 않을까. 불가능을 가능으로 무미건조한 일상에 작은 기대감이라도 안겨줄 듯 사람들은 어느 곳이나 목적을 부여하며 목적지를 찾는다. 여기서 찾는다는 개념은 분명 수동적이 아닌 스스로 원한 능동적 자율의지에 근거한다. 바쁜 현대인들, 일상에 힘겨워 잠시도 쉴 틈이 없다. 그들이 스쳐 지나가는 곳의 욕망과 갈구로 연결되는 바람과 목적은 과연 무엇 일까.




안경진_점심시간_가변설치



오수연_바라보기_혼합재료_가변설치



전성원_지하철_혼합재료_가변설치



최혜광_거울보기_폴리코트_270×100×130cm_2004

〈시놉시스〉2.양극화의 현상을 보여주는 상대적 이미지 거인과 소인들의 집단적 군상
안경진_오수연_전성원_최혜광


기획전[부자와 빈자에 대한 사소한 단상]은 현대사회의 양극화의 단면을 조각 작품을 통해 희극적이며 비극적, 혹은 복합된 희비극적인 풍자를 시사적으로 설치하게 된다. 전시주제에 맞게 각자의 작업을 보여주는 형태로 진행되며 모든 작품은 결국 하나의 작품으로 공통되는 연극의 한 장면 같은 전경을 보여준다. 구름이 떠다니는 하늘과 관조하듯 부유해 있는 골조 지붕으로 빈과 부의 허와 실을 보여주고자 하는 백승호의 지붕작업을 무대배경으로 제시하여 보았으며 안경진, 오수연, 전성원, 최혜광, 박민섭, 설총식의 극적인 요소가 가득한 군상 작업들을 전시의 연극배우로 설정하였다. 박헌열의 이상향에 존재하는 상상의 형상들은 볼륨이 뒤바뀐 그로테스크한 괴물, 요정, 곤충과 같은 미물로 표현되며 결론적으로 덧없는 것이 인간의 삶이지만 그 안에서 행복과 존귀함을 찾는다는 무언의 암시로 전시는 암전된다. 2006년 7월 21일 잠실동 고시원 화재사건이 보도되었고 그 주변으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는 고층 호화 아파트들이 보인다. 고시원은 고시생이 아닌 빈자들의 숙소로 대부분 사용된다고 한다. 3만원의 차이로 창문의 유무가 정해지고 하늘을 볼 수 있는 행복은 단절되었다. 부자와 빈자에 대한 양극성은 지금도, 앞으로는 더욱 더 간극이 넓혀질 것 같다. 절망과 희망, 현실과 이상, 부자와 빈자. 허와 실, 상대성, 비극과 희극, 울고 웃는 상반된 논리는 영원히 함께 가는 진리이다. 연극 같은 인생논리에서 우리가 염원하고 갈구하는 것은 무엇일까.




박민섭_생존_숟가락, 젓가락, 무쇠솥_130×70×250cm_2004



설총식_Making my position_합성수지에 아크릴 채색_100×43×60cm_2004

〈시놉시스〉3.희로애락이 복합된 현대인의 실상과 충돌_박민섭_설총식





박헌열_N603_합성수지에 아크릴 채색_217×60×58cm_2006

〈시놉시스〉4.결론적인 이상향에 존재하는 상상의 형상_박헌열



본 전시에는 거인과 수많은 소인들이 개체로 등장하며 삶을 표현하고 있다. 과연 거대하게 확대되어 정상성을 추월해버린 일탈적인 거인의 모습은 유아독존인 모습인가.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집단적 움직임은 거인이 있기에 소인의 모습으로 보여 지며, 상대적으로 위축된 소인이 있기에 거만한 거인으로 보여 진다. 극과 극이 존재해야만 성립되는 양극성, 상대성의 현실과 세계를 직시하며, 그 속에서 살아나가야 할 존재논리를 찾아보고자 조각으로 아주 사소한 연극 시나리오 한편을 만들어 보았다. ■ 조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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