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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성실한 인간만이 할 수 있는...작업들임에는 확연하고, 굉장히 주부적인 색채가 강하다는 것도 알아야 할 것같다. 작업으로서의 성취도는 상당히 높을 것으로 사료되지만, 웬지....볼 수록 심심한 결과들이 되지 않을까란 공포 또한......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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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규철(조각가,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교수)
예술가들은 누구나 슬럼프를 경험한다. 시대와 국경을 초월하는 예술가들 간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작업을 위한 신통한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는다고 생각되거나, 자신이 계속해서 과거의 작업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될 때, 그들은 흔히 자신의 재능 부족을 한탄하면서 슬럼프의 공포에 시달린다. 그것은 작가적 죽음의 공포, 작가적 치매의 공포이다. 이 증상은 예술가들에게 연령과 성별을 불문하고 광범위하게 퍼져 있으나, 아무도 이를 남에게 고백하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실태파악이 불가능하며, 이로 인해 진단과 치유가 극히 어렵다. 소심한 성격의 예술가들은 이를 혼자 고민하다가 작업을 포기하고 나아가 스스로를 학대하고 파멸시키는 치명적인 파국에 이르곤 한다. 한편 이와는 달리 작업이 너무 잘 되고 영감이 넘쳐난다면서, 자신이 손을 대는 모든 것이 훌륭한 예술작품이라 믿으며 과도한 흥분상태에 있는 예술가들을 흔히 발견하게 되는데, 이런 경우 실은 슬럼프 공포 증상이 일종의 유포리아(euphoria)적인 양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닌지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문제는 아직까지 이런 증상들에 대처할 특별한 처방이 없다는 점이다.
다음 다섯 가지 작업은 자신이 매일같이 무언가를 창작하고 있다는 믿음과 위안을 줌으로써, 작가적 슬럼프의 공포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제공한다. 아무리 의미 있는 일일지라도 그 일이 반복되면 의미가 탈각되고 결국 무의미로 수렴되는 것과 같은 이치로, 무의미하다고 생각되는 단순한 일의 반복이 뜻밖의 의미를 만드는 원천이 될 수 있다.
1. 머리카락 드로잉
준비물 : 켄트지 전지, 핀셋, 접착용 풀(스틱), 달력
매일 자신의 머리카락 하나씩을 뽑아서 켄트지 전지에 붙여나간다. 40대 이후의 작가들은 자연스런 탈모 현상을 겪게 되므로, 매일 아침 머리를 빗을 때 조금만 유의하면 별도의 조치 없이도 무난히 머리카락 한 올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전날 붙인 머리카락의 모근 반대쪽 끝점에 당일 뽑은 머리카락의 모근이 닿아서 선이 자연스럽게 하나로 이어지도록 붙인다. 작업에 임할 때 임의로 머리카락의 형태나 방향을 변화시켜서는 안 된다. 조형적인 배려를 철저히 배제하고 전적으로 머리카락의 자연스런 형태를 받아들이도록 한다. 이 작업의 목표는 조형적인 드로잉 자체가 아니라, 자시에 대한 매일매일의 객관적 기록임을 잊지 않도록 한다. 다만 이 원칙을 따랐을 때 머리카락의 끝점이 화면 밖으로 벗어나게 되는 경우, 그 방향을 반전시켜서 다시 화면 안쪽을 향하게 할 수 있다.
곱슬머리의 경우는 크게 문제될 것이 없으나, 직모의 경우는 드로잉이 원치 않은 시점에 화면을 벗어남으로써 작업이 조기에 중단될 수 있으므로, 머리카락을 물에 적셔서 자연스러운 곡선을 얻어 작업할 것을 권한다.
접착제는 머리카락을 지탱할 수 있는 최소량만을 사용한다. 잘못하면 머리카락 드로잉이 아니라 접착제 드로잉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곱슬머리는 직모보다 회화적인 드로잉을 만들 가능성이 높다. 직모인 사람은 작업도중에 일정기간 파마를 하거나 염색을 함으로써, 선의 다양성을 얻을 수 있다.
시작한 날짜를 기록하고 매일 작업을 했는지 여부를 달력에 체크할 필요가 있다. 건망증이 있는 사람의 경우 하루에 두 번 이상 같은 작업을 반복하거나 반대로 잊어버리고 하루를 넘기는 수가 있다. 이 경우 그 다음날 두 차례의 작업을 하여 만회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것은 매일매일의 충실한 기록으로서의 작업의 의미를 훼손하고 작가적 진실을 왜곡하는 자기기만 행위라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머리카락으로 형성되는 선은 서로 중첩되어 교차되면서 다양한 형태와 음영을 이루게 될 것이다. 작업이 진행되어 더 이상 새로운 머리카락을 붙일 여백이 남지 않게 되면(혹은 더 이상 뽑을 머리카락이 남지 않게 되면) 작업이 끝난다. 완성된 작품을 액자에 넣는다.
2. 종이비행기 드로잉
준비물 : A4 용지, 달력
A4용지 한 장으로 매일 종이비행기를 접는다. 완성된 종이비행기를 한번 시험적으로 날려본 다음 선반에 보관한다. 다음날 종이비행기를 펼쳐서 같은 모양으로 다시 접는다. 전날과 마찬가지로 1회 시험비행을 한 다음 보관한다. 작업이 계속되면 종이의 접히는 부분이 점점 헐어서 원래의 비행기 형태를 유지하기 어렵게 된다. 더 이상 날릴 수 없는 상태에 이르면 작업이 완성된 것이다. 이때 종이비행기를 조심스럽게 펼쳐서 액자에 넣는다.
* 비행기 외에 배나 종이학, 모자 같은 모티브를 채택할 수 있으나, 배는 시험운행(세면대, 욕조 등에서 가능할 것이나) 중 훼손의 위험이 있고, 종이학은 그것의 작동여부를 시험하는 것이 무의미하기 때문에, 그리고 모자는 A4용지로 만들 경우 시험적인 착용이 불가능한 크기가 되기 때문에 적절한 모티브라 할 수 없다.
* 특히 작업의 실행여부를 잊기 쉬운 작업이므로 시험비행을 마친 직후 달력에 체크를 해둘 필요가 있다. 또는 종이비행기 자체에 작업일자를 매일매일 기록해두는 것도 한 방법이다.
3. 토스트 드로잉
준비물 : 켄트지 전지, 토스트, 접착용 풀(스틱), 연필, 자
켄트지 전지에 3 3cm 크기로 격자를 그리고, 매일 아침 식탁의 구운 토스트에서 떨어지는 빵가루를 모아 각각의 격자 내에 풀칠을 해서 붙이고 달력에 체크한다. 4각형 내에 정확하게 풀을 바르기 위해서는 종이에 격자 크기의 창문을 뚫은 간단한 도구를 만들어 사용할 수 있다. 매일 토스터의 작동시간을 조절하면 연한 갈색에서 검정색에 이르는 색조의 미묘한 변화를 얻을 수 있다. 79 109cm 크기의 전지를 사용하는 경우 이 작업의 완성에는 936일(약 2년 7개월)이 소요된다.
* 버려지는 빵 부스러기로 할 수 있는 일은 고작해야 그것을 모았다가 산책길에 비둘기 모이로 주는 것 외에 아무것도 없다. 이 작업은 거의 무(無)에 가까운, 영원한 사라짐의 여정에 이미 오른 물질을 영원한 있음의 세계로 되돌려 놓는 것이며, 작가가 나날의 일과를 예술행위로부터 시작하게 된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어떤 위대한 예술가도 이처럼 아침식사와 동시에 작업을 시작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음미함으로써, 작가적 자신감을 갖고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
* 아침식사를 밥으로 하거나 잦은 과음으로 인해 껄끄러운 토스트를 먹을 수 없는 사람, 습관적으로 아침을 거르거나 조찬회의 참석이 잦은 사람의 경우에는 이 작업이 적합하지 않다. 그런 이들은 식사의 잔여물로 무언가를 만드는 다른 방식을 찾을 것을 권한다.
4. 먼지 드로잉
준비물 : 하드보드지, 양면테이프, 커터
30 30cm 크기의 하드보드지 위에 양면테이프를 이용하여 원하는 도형 또는 문자의 형태를 부착한다. 형태가 완성되면 양면테이프의 껍질을 벗겨 접착면이 노출되도록 한다. 이 하드보드의 우측 하단에 작업을 시작하는 날짜를 표기하고 테이프가 붙은 면을 위로 하여 먼지가 가장 많이 쌓이는 공간에 둔다. 방구석, 창문가, 텔레비전이나 오디오 근처, 장롱이나 침대 밑과 같이 눈에 잘 띄지 않고 손길이 잘 닿지 않는 곳이 적당하다. 집안의 청결도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대략 한달 정도 그대로 방치하면 먼지로 만들어진 형상을 어느 정도 식별할 수 있게 되며, 접착면이 완전히 먼지로 뒤덮여 테이프의 점성을 더 이상 느낄 수 없는 상태가 되면 작품이 완성된 것이다. 완성 작품의 여백면에 쌓여있는 먼지를 조심스럽게 털어내고 액자에 넣는다.
작품의 내용은 취향에 따라 다양하게 선택할 수 있다. 구상적인 그림을 원하는 사람은 예를 들어 자신의 옆얼굴을 실루엣으로 표현할 수 있다. 먼지로 그려진 자신의 모습, 자신의 피부와 의복과 가구들에서 떨어져 나온 미세한 편린들이 다시 모여서 자신의 모습으로 되살아난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지적이고 건조한 작업취향을 가진 사람은 예를 들어 테이프로 '먼지'라는 단어를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표현매체와 표현내용(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이 완벽하게 일치하는 전형적인 개념미술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다.
* 이 작업은 매일 규칙적인 작업을 하는데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작가가 일상적인 생활을 지속하는 동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작품이 완성된다는 것이 이 작업의 가장 큰 매력이다. 이런 사실을 때때로 되새기며 자각하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작업에 대한 조바심과 슬럼프의 공포를 줄일 수 있다.
* 가족이 있거나 파출부가 있는 경우, 이것이 자신의 작업이라는 사실을 이들에게 미리 알리고 그 의미를 충분히 이해시킬 필요가 있다. 또한 지나치게 오래 방치할 경우, 작가 자신마저도 이 작업을 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을 우려가 있으므로, 작업을 시작하면서 곧바로 달력에 다음 달 점검일을 표시해두는 것이 좋다.
5. 소유물의 목록작업
준비물 : 여행가방용 꼬리표, 매직펜, 양면테이프, 목록기록용 공책, 연필
공항에서 사용하는 수화물 꼬리표를 구해 자신의 방 또는 사무실의 물건들에 1번부터 매일 번호표를 붙여나간다. 가족과 함께 거주하는 사람은 사전에 이 작업에 대해 충분히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는 것이 좋다. 꼬리표는 의류와 같이 빈번히 물에 젖는 물건들을 위해 비닐로 제작된 것이 적합하며, 고무줄을 끼울 고리가 없는 그릇과 같은 물건들의 경우는 양면테이프를 사용해 접착한다. 꼬리표는 우선 1년치 365장 정도를 구해서 시작한다. 작업 대상은 과일이나 음료, 식료품처럼 소모되어 버려지는 물건을 제외한 자신의 모든 소유물들이며, 하나의 물건에 두 개 이상의 번호표를 붙여서는 안 된다. 구조상 분리되어 있더라도 서로 연결되어 작동되는 물건(예를 들어 오디오에서 스피커와 앰프, 컴퓨터의 모니터와 본체, 책상판과 책상다리 등)은 하나의 물건으로 취급하여 한 개의 꼬리표를 부착한다.
숫자는 자신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물건에서 시작하여 점점 거리가 떨어져 있는 물건의 순서로 붙이는 것을 원칙으로 하며, 자신과의 거리가 동일한 경우 그 사물과의 친밀도(혹은 자신의 삶에 있어서의 중요도)에 따라 순서를 정하도록 한다. 꼬리표에 그날의 번호를 적어서 사물에 부착하는 작업이 끝나는 즉시 어떤 물건에 어떤 숫자를 붙였는지를 곧바로 공책에 기록해두어야 한다.
초기단계에 이 작업은 극히 단순하고 손쉽기 때문에 작가는 지루하다거나 자신의 작가적 재능이 무시된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인내심을 갖고 작업을 진행하다보면 완성단계에 가까워질수록 작업이 어려워지며 상당한 수준의 노력과 긴장이 요구됨을 느낄 수 있다. 시간이 갈수록 써넣어야할 숫자의 단위가 커지는 동시에, 작업 대상이 되는 사물의 수는 계속 줄어들게 된다. 작업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물건을 찾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며, 자칫하면 이미 꼬리표를 붙여놓은 사물에 실수로 두 번째 꼬리표를 달아놓게 될 위험성도 증가한다.
재산과 소유물의 양에 따라 이 작업의 지속기간은 편차가 크다. 그러나 매일 하나의 물건에 하나씩의 꼬리표를 붙여갈 경우 평균적으로 1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된다. 아직 번호를 붙이지 않은 사물을 찾는데 적어도 20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된다면, 작업의 완성이 임박했다고 보면 된다. 이 단계에 이르면 몇 개의 사물이 남아 있는지를 전체적으로 점검해봄으로써 작업의 종료시점을 미리 예측해볼 수 있다.
최종적으로 자신의 소유물 전체에 대한 번호붙이기 작업이 완료되면, 작업의 결과물들을 여러 장의 사진으로 기록하여 공책의 비어있는 페이지들에 부착한다. 소유물의 목록과 사진자료가 든 공책으로 작업이 완성된다.
* 만약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이 작업을 통해 자신의 인생을 적극적으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사람은, 소유물의 전체목록 중 매달 일정한 퍼센트를 정하여 커트라인 밖에 있는 사물들을 자신의 주거공간으로부터 과감히 제거함으로써 점차적으로 무소유의 삶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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