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실을 알리는 것에 있어 전시가 정말로 효용성이 있을까....라는 건 잘 모르겠다. 어떤 사실을 다큐멘트한다는 것이, 단순한 비주얼아트일 뿐이 아니라면....그 사실을 알린다는 문제도 심각한 일일 것이다. 아주 심하게 비약하자면, '너의 고통은 나의 예술이 된다'같은 개념으로 주름진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찍은 것이 아니라면, 다큐멘트 작가는 어느 정도는 액티비스트이어야 하지 않을까.
+++++++++++++++++++++++++++++++++++++++++++++++++


신동필. 한국인 원폭 피해자. 2002
▣ 오키나와 준 갤러리 : 2003. 6. 24 - 6. 29
▣ 오사카 시립종합학습센타 : 2003. 7. 9 - 7. 14
▣ 도쿄 신주큐 문화센타 : 2003. 7. 18 - 7. 23
▣ 서울 서초동 한전프라자 갤러리 : 2003. 8. 13 - 8. 22
▣ 전시 참여 작가
* 일본측 : 이시카와 마오, 히가 토요미츠, 배소, 존 마츠모토, 마키타 기요시
* 한국측 : 이용남, 안해룡, 국수용, 신동필, 노순택
▣ 일본측 실행위원장 : 토마츠 쇼메이 (사진가)
▣ 한국측 자문위원 : 현기영 (문예진흥원장), 문정현 (신부),
전만규 (매향리대책위원장)
▣ 한국측 고문 : 김승곤 (국립순천대학교 석좌교수)
"전쟁이 남긴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았다.
심지어 전쟁은 현재진행형이기도 하다."
지난 반세기 한국과 일본과 미국 세 나라 사이에 얽힌 핵심적인 코드는 무엇일까? 두말할 나위가 없다. 바로 '전쟁'이다.
사실 이 세 나라 사이에 얽힌 전쟁의 기억은 신미양요나 임진왜란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비단 지난 반세기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전쟁은 수 백년 전부터 계속돼 온 기억이다.
동시에 우리는 이런 전쟁의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았으며, 암울하게도 이 세 나라의 현재와 미래에 얽힌 공통의 코드 역시 전쟁의 공포와 위협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남북을 갈라놓은 한반도 전쟁의 발발부터 정전 50년을 맞는 오늘까지도 미국과 일본은 너무도 깊숙이 개입해 왔으며, '악의 축 제거'를 명분으로 한 미국의 한반도 MD구축 시나리오와 일본의 군국주의 패권부활 움직임은 논란과 우려를 낳고 있는 현재와 미래의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다.
21세기 벽두부터 전쟁으로 점철되고 있는 이런 현실 앞에서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인류가 떠안은 과제는 요원해 보인다. 오늘날의 미디어 테크놀로지는 전쟁의 충격과 공포를 가감 없이 전달하고, 그에 따른 전쟁의 진실을 알리기보다는 '전쟁의 오락화'에 앞장서고 있다. 이미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공격에서 보다시피 현대의 전쟁은 마치 시뮬레이션 게임처럼 우리에게 다가오며, 전쟁이 강요하는 민간인들의 희생과 공포, 상처는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남의 나라 전쟁은 말 그대로 "강 건너 '생생한' 불구경"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불이 꺼진 뒤에도 재난이 남긴 육체와 정신의 상처는 오랫동안 지속된다. 쉽게 지울 수 없어 평생의 고통이 되는 전쟁의 기억은 당사자들에게 '오락화'되지 않는다. 그 어떤 정책당국자가 '단기전'을 외치더라도 전쟁은 단기전이 될 수 없다는 것을 피해자들은 그들의 육체와 정신에 남긴 상처를 까뒤집어 보임으로써 증언한다.
그래서 한국과 일본, 미국 세 나라에 얽힌 전쟁의 실타래를 푸는 첫걸음은 그 상처를 기억하고 기록하는 것에서 시작될 수 있을지 모른다.
▣ 전쟁이 남긴 상처에 대한 기억과 기록
현재 일본 오키나와를 거쳐 오사카와 도쿄에서 작지 않은 반향을 일으키며 전시되고 있는 '한국 일본 오키나와에 대한 기록과 기억 - 사진가 10인의 눈' 전은 이런 전쟁의 기억과 그것이 남긴 상처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기억과 상처가 왜 더 이상 반복돼서는 안돼는 지 증거물을 내미는 것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전쟁은 침략국과 피해국의 시민들 모두에게 이런 쉽게 아물지 않는 상처를 주었다. 이것은 전쟁의 모순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전쟁의 본질이다.
오키나와 출생으로 30년 동안 오키나와 주둔 미군들에 대한 다큐멘터리 작업을 해온 이시카와 마오의 <기지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 아물지 않은 전쟁의 상처를 담은 히가 토요미츠의 <지금도 사라지지 않은 육체에 새겨진 전쟁의 상처>, 재일한국인 2.5세로서 조선인학살에 대한 사진작업을 해온 배소의 <일본의 전후배상>, 미군과 일본인 사이에 태어난 혼혈인들의 삶을 다룬 존 마츠모토의 <또하나의 오키나와 문제>, 재일한국인 등 일본 내 마이너리티들의 삶을 담아 온 마키타 기요시의 <마이너리티 포츄레이트>, 경기도 파주의 미군문제를 지속적으로 작업해 온 이용남의 <미국의 두 얼굴>, 일본군 종군위안부 할머니들의 삶을 기록한 안해룡의 <과거의 사진첩에서 찾아낸 기억들>, 미7공군의 폭격훈련장으로 신음하고 있는 경기도 화성 매향리의 아픔을 담은 국수용의 <매향리 이야기>, 히로시마 원폭 당시 피해를 입었던 한국인들에 대한 얘기를 담은 신동필의 <한국인 원폭피해자>, 지난 2002년 경기도 양주에서 발생한 두 여중생 사망사건과 그 후 뜨겁게 불타올랐던 시민운동에 대한 기록을 담은 노순택의 <아이들은 열네 살이었다> 등 전쟁과 그로 인한 상처를 꾸준히 필름에 담아온 10명의 다큐멘터리 사진가가 260여 점의 사진으로 이 전시에 참여하고 있다.
이번 전시는 오키나와 준 갤러리(6.24-29)를 시작으로 오사카 시립종합학습센타(7.9-14), 도쿄 신주큐문화센타(7.18-23)를 거쳐 서울 서초동 한전프라자 갤러리(8.13-22) 전시를 끝으로 막을 내릴 예정이며 현재 미국전시를 기획중이다.
이 전시는 한국과 일본의 시민들이 보고 기억해야 할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이는 동시에 오늘날 미국의 정책당국자와 시민들이 보고 기억해야만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지난 200년 동안 150여건의 크고 작은 전쟁의 당사자였던 미국은 왜 양심적인 미국인이 스스로 미국인의 정체성을 거부하고 떨쳐버리려 하는지 고민해야 한다.
* 글 : 한국측 실행위원회
● 일본측 참여사진가 프로필 및 서문
1. 이시키와 마오 - 기지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 / 히노마루를 보는 눈
 
* 기지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
오키나와는 일본이 패전한 1945년 이후 본토와 분리되어 1972년까지 27년 동안 미군 지배 하에 놓여 있었다. 이 기간 동안에는 미국의 군인이 사고·사건을 일으키더라도 범인은 일본에서 재판을 받지 않고 미국으로 송환되었다. "일본에 속하게 되면 평화헌법에 따라 더 이상 불평등한 취급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미군기지도 일본 본토처럼 철수할 것이다." 모든 오키나와 사람들은 '조국복귀운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아직도 일본에 있는 미군기지의 대부분은 여전히 오키나와에 집중되고 있고, 미군이나 군속에 의한 사건·사고는 끊이지 않고 있다. 오키나와의 신문에 미군 관계 기사가 실리지 않은 날은 없다. 나는 내가 태어난 오키나와의 사람들을 촬영해왔다. 사람들의 인생만큼 흥미로운 것은 없다. 나는 앞으로도 <기지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을 촬영할 것이다.
* 히노마루(일장기)를 보는 눈
1987년 오키나와에서 개최된 <오키나와 국민체육대회> 대회장에 게양된 '히노마루'를 "전쟁 시기 오키나와 사람들을 집단 자살을 하게 만든 군국주의 상징이다"라며 불을 태운 협의로 체포된 치바나 쇼이치. 그의 집안 벽장에서 '히노마루'가 나왔다. "1960년대 교직원조합이 '히노마루 구입운동'을 추진하고 있을 때 학교에서 사왔다. 그 히노마루가 벽장에서 나왔다. 하지만 불태우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은 국민체육대회 때 게양된 히노마루와는 다르다. 미군의 독재에서 벗어나기 위한 깃발이었다." 번개처럼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히노마루를 사용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표현하도록 해보자. 그 사람의 삶, 사상, 신념을 알 수 있는 지름길이다. 자기 자신, 일본인, 일본이라는 나라를 표현하도록 해보자." 그렇게 해서 6년 동안 일본의 전역에서 100여 명의 사람이 히노마루를 가지고 표현한 것을 촬영했고 그 작업은 무척 흥미로웠다.
1953년 오키나와 출생.
1973년 스무살 때 도쿄의 <워크샵 사진학교 토마츠 교실>에서 사진을 공부했다.
이후 30년 동안 오키나와에 관심을 두고 오키나와 사람들의
'인간 드라마'를 촬영해 오고 있다.
■ 저서
1982년 사진집 캠프 한센의 <뜨거운 날들> (공저, 아만기획)
1989년 사진집 <필리핀> 자비 출판
1990년 사진집 <항구도시 엘레지>를 자비 출판
1991년 사진집 <나카다 사치코 한 행 이야기>를 자비 출판
1995년 사진과 글로 구성한 <오키나와와 자위대> (高文硏) 출판
1996년 사진과 글로 구성한 <이것이 오키나와의 미군이다> (공저, 高文硏) 출판
1998년 사진과 글로 구성한 <오키나와 해상 헬리콥터 기지> (高文硏) 출판
2002년 사진과 글로 구성한 자서전 <오키나와 소울> (太田出版) 출판
2. 히가 토요미츠 - 지금도 사라지지 않은 육체에 새겨진 전쟁의 상처

매우 중요한 오키나와전쟁의 기억을 섬사람들에게서 들었다. 당시 사용했던 섬쿠둬바(방언)로 기억을 불러오고 희박해진 전쟁의 리얼리티, 그리고 섬들의 아이덴티티를 들었다. 그것들은 현대를 사는 우리들의 애매해진 거처, 그리고 지금을 모색하는 한 방법이기도 할 것이다. 이번 사진전 <한국 일본 오키나와에 관한 기록과 기억 '사진가 10인의 눈'>에는 특히 육체에 새겨진 전쟁의 상흔을 가진 사람들의 기록을 출품했다. 50여 년 간 몸 안에 방치되어 육체와 동화된 포탄의 파편은 지금도 X선 사진에는 찍히지만 통증은 느껴지지 않는다. 육체에 새겨진 전쟁의 상흔. 죽어서 화장되고 재가 된 다음에야 겨우 살아지는 '물건'이다.
1953년 오키나와현 요미탄손 출생. 류큐대학 미술공예과 졸업
■ 전시
1976년 아만 자주 갤러리 설립에 참여
1977년 <오늘의 사진전77> 가나가와 현립 현민 갤러리
1978년 <합동전> 도쿄 신쥬쿠 갤러리 PUT
1979년 오키나와 大和 <누쥰전> 나하시 다이나하
1980년 <누쥰 in 오키나와전> 나하시 다이나하
1987년 화랑 匠
1992년 <주목하는 눈展> 출품
1995년 <95 여름 오키나와 50년째의 진혼가> 현민 아트 갤러리
2000년 <나나무이의 기록> 미야코 니시하라 공민관
2001년 <南風 신들 나나무이눈마들> 도쿄 신쥬쿠 코니카 플라자
2002년 <빛나는 나나무이의 신들> 나하시민 갤러리
<풍양의 기억> 마에시마
<포토네시아/빛의 기억 시간의 열매> 나하시민 갤러리
■ 저서
1982년 <뜨거운 날들 in Camp Hansen> 이시카와 마오와 합동 사진집
1995년 <95 여름 오키나와 50년째의 진혼가> (私家版)
2001년 <빛나는 나나무이의 신들> (風土社)
3. 존 마츠모토 - 또하나의 오키나와 문제

일본 전국의 미군기지와 시설 가운데 75%가 집중되어 있는 오키나와에는 나처럼 미국인의 피를 몸에 지니고 있는 사람은 4천5백여명을 헤아린다. 미군이 오랜 세월 동안 주둔하고 있는 한국에도 역시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있다고 들었다. 미 군인·군속 아버지가 남긴 아이들의 대부분은 아버지에게서 양육비를 받지 못하고 있다. 아이들은 태어난 땅의 인간으로서 지역의 언어나 습관을 익히면서 성장한다. 그래서 외모는 서양인이지만 언어나 행동거지는 지역 주민이라는 불규형이 생긴다. 그것이 원인이 되어 집단 따돌림이나 놀림, 때로는 편견으로 인한 폭행 등의 박해를 받기도 한다. 또한 미 군인이나 군속과 관련한 사건, 사고가 일어나면 아무 상관이 없는 당사자들이 편견 때문에 피해를 입는다. 학교에서는 몰지각한 교사의 대응이 아이들의 따돌림을 조장하기도 한다. 오키나와와 한국에서는 갈 곳 없는 그들을 받아들이기 위한 민간학교가 생길 정도다. 인간이라면 가지고 있는 '민족'이라는 근원적인 소속 욕구가 채워지지 않은 채 자란 우리들은 가끔 "나는 누구일까?"라는 자기정체성의 위기를 맞는다. 산신 연주자인 히가 바이론에게도 그런 위기가 찾아왔다. 오키나와 사람인 양부모 밑에서 자라나서 영어를 말할 수 있는 환경에 있지 못했던 그는 20대 시기 미국으로 건너가 필사적인 노력으로 영어를 익혔다. 그러나 인종차별 등 미국의 어두운 부분을 눈으로 직접 목격한 그는 "나는 미국인이 아니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자신이 태어난 섬 오키나와에서 전통악기인 산신과 만나면서 '오키나와 사람'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지면서 희망을 발견했다. 오키나와의 산신에 주목하여 유연한 발상으로 이 악기의 가능성을 넓힌 독자적인 그의 음악성. 오키나와발 월드 뮤직은 이제 주목받게 될 것이다. 또한 일본 본토와의 동화교육 등으로 인해 사라질 위기에 있는 오키나와 전래의 '우치나구치(오키나와 토박이말)' 보존과 부활에 그는 온몸과 혼을 다해 정성을 기울이고 있다. 앞으로 '우치나구치'학교와 방송국을 만들어서 오키나와의 '혼'을 되살리고자 생각하고 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그의 뜻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꿈은 커져간다. 과거에 나도 "나는 누구인가?"라는 마음의 외침에 흔들렸던 적이 있다. 하지만 이제 내가 태어난 섬으로 다시 돌아와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최근 내 몸 안에 흐르는 '피'에서 '자유'를 느낀다. 민족이라는 틀에 얽매이지 않는 나는 자유로운 존재다. 히가 바이론이나 나와 같은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들 안에 자신의 인생을 투영하고, 희망의 빛을 찾아가면서…
1962년 오키나와현 金武 출생.
아버지는 미국인이고, 어머니는 아마미사람이다. 아마미 오시마에서 자랐다.
신문기자 등을 거쳐 프리랜서 사진작가가 되었다.
1988년 부터 가고시마시에서 중증 심신장해자 수용시설인
<보리싹 공동작업소>를 촬영. 2001년 4월 그가 태어난 오키나와로 이주했다.
■ 사진집
1992년 사진집 <있는 그대로> (보리의 싹 복지회)
1996년 <속편 있는 그대로> (보리의 싹 복지회)
■ 사진전
1988년 <일하는 벗들의 사진전> 가고시마시
1997년 <또 하나의 메이데이 가오루 미소 사진전> 가고시마시
4. 배소 - 일본의 전후 보상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44초 돌연 간토지방을 덥친 진도 7.9의 격진은 미증유의 재해를 가져왔다. 사망자 9만1천3백44명, 가옥 전파·소실 46만4천9백9호라는 숫자가 그 규모의 크기를 말해준다. 이 와중에 6천명을 넘는 조선인이 학살당했다. 또한 중국인, 노동자, 사회주의자들도 희생당했다. 지진이 발생한 9월 1일 오후부터 간토 각지의 경찰서 안에서 유언비어가 나오기 시작했다. "괘씸한 센진(조선인을 비하하는 말)들이 와서 우물에 독을 넣고, 방화, 강도, 강간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파출소 앞에는 '조선인폭동'이라는 벽보가 붙여졌고 경찰은 당황하는 민중들에게 메가폰을 통해 알렸다. 등사해서 만든 인쇄물을 뿌리는 사람도 있었다. 3일에는 내무성 경보국장 이름으로 "조선인 중에는 도쿄 시내에서 폭탄을 소지하고 석유를 뿌리며 방화하는 자가 있다"는 타전이 일본 전국 지방장관에게 전달되었다. 헌병대, 계엄령부대를 선두로 경찰, 자경단(소방단, 재향군인회, 청년단)이 가세해 조선인 학살이 시작되었다. 경찰은 조선인을 총칼로 찔러 죽였다. 학살 후, 20마리의 말을 탄 기병이 여러 곳을 뛰어다니자 민중들의 박수와 만세 소리가 나왔다고 한다. '유언비어'는 경찰, 군대의 통신, 각 행정기관의 통지문, 신문, 언론 등에 의하여 증폭되었고 이성을 잃은 일본 민중들은 아주 쉽게 이러한 유언비어를 믿었던 것이다. 대지진으로 출동한 군대는 도쿄, 가나가와, 치바, 시즈오카, 사이타마의 1부(府) 4현에 걸쳐 보병 21개 연대, 기병 6개 연대, 포병 7개 연대, 공병 18대대, 기타 6개 사단이었다. 계엄령은 9월 2일부터 11월 15일까지 75일 동안 계속되었다. 지진 발생 당시 경시총감은 경찰력만으로는 치안유지가 불가능이라고 판단하여 도쿄위수사령관인 근위사단장에게 병력 보충을 요청하였다. 나아가 재난지역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할 것을 내상에게 직언하였다. 경시총감은 5년 전에 일어난 쌀 소동의 체험 때문에 민중의 소란을 특히 두려워했다. 내상과 경시총감 두 사람은 대지진 전에 조선총독부의 정무총감과 경찰국장으로서 1919년의 3·1 독립운동 '만세사건'을 탄압한 당사자였다. 일본의 지배층은 일본에 의한 식민지 지배, 조선인들을 차별·학대해온 역사적 사실, 또한 독립을 희구하는 조선 민중의 투쟁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식민지 조선에서 유입되고 있는 조선인 노동자는 일본의 하층사회를 형성하고, 일본인 노동자들과 교류를 넓혀가고 있었다. 조인승씨는 일본에 건너 온지 6개월만에 간토대지진과 만났다. 아라카와 제방으로 고향 친구 3명과 도망가는 도중에 눈앞에서 동포 3명이 학살당했다. 조인승씨도 소방대의 쇠갈고리에 다리가 잘렸다. 자연재해 발생 하에서의 타민족에 대한 학살은 인류 역사상 매우 드문 만행으로 아직도 해결되지 않는 채 남아 있다.
1956년생. 재일 코리안 2.5세
■ 저서
『사진보고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외
주로 주간지, 월간지, 신문 등에 사진 르포를 발표
5. 마키타 키요시 - 마이너리티 포츄레이트

이번에는 <마이너리티 포츄레이트>라는 주제로 사진을 출품했다. 특별히 정치적인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모두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내 자신이 확인하고 싶었던 사진들을 출품한 것이다. 관람하여 주기 바란다. 인간이라는 말에는 모든 사람들에게 빛이 있다는 뜻이 있다고 들었다. 제 주변의 사랑스러운 벗들인 재일 한국·조선인이나 '장애자'(차렌지도)나 모두 원래는 힘든 일을 많이 안고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부족하나마 나는 사진으로 "함께 당연히 살고 있다", "왜 차별 당해야 되는지"하는 그런 마음이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1952년 오사카부 야오시 출생.
1988년 부터 5년 동안 한국에서 취재. 현재 오사카를 중심으로 인간주의적인
포토 저널리스트로 활약 중. 보도사진 <북방영토를 가다> (아사히그라프)
■ 사진전
<사할린의 한국인> (리버티 오사카)
<휴먼 포토 갤러리 - 피차별 부락 활동 르포>
■ 저서
<궤도> (新泉소)
<양심수의 어머니들> (일본판/耕文소, 한국판/도서출판 공간)
<홈레스의 시> (遊タイム出版)
<도시가 사라졌다 - 한신 대지진 코베 나가타의 기록> (遊タイム出版)
<이곳에서 산다> (解放出版소)
<나가타 隨想>
<힘이 있어 KOBE>(ひごろ書房)
<我肝 오키나와 와치무 오키나와>
<원상> (解放出版소)
<차렌지도> (2002년 9월), 吉本음악출판사
● 한국측 참여사진가 프로필 및 서문
1. 국수용 - 매향리 이야기

지난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은 한민족을 남과 북으로 갈라놓았고 한국인들은 아직도 그 전쟁으로 인한 많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 서울에서 자동차로 1시간 30분 거리에 위치한 작은 어촌마을 매향리에서는 지난 십수 년간 미군 폭격장 폐쇄를 외치는 주민들의 끊임없는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그 발단은 1951년 8월 당시 한반도의 전쟁 중이라는 명분으로 한국정부와는 사전협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미 공군 폭격장이 들어서면서부터 시작된다. 현재 마을 앞 바다에 위치한 농섬을 해상 폭격장으로 삼고 인접한 해안지역에 또 다른 육상 사격장을 갖추고 있다. 이곳의 지형은 밀물과 썰물의 간만의 차이가 커서 바닷물이 빠질 땐 갯벌이 농섬까지 넓게 드러난다. 따라서 자연 생태적으로 어패류나 물고기의 자원이 풍부해서 대대로 이곳 주민들의 귀중한 삶터이었다. 대다수의 주민들은 농사나 어업을 주업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이들에게 있어서 농섬은 대단히 중요한 존재이다. 농섬에 폭격이 있는 날에도 그들은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바다에 나아가야만 한다. 물론 농섬을 중심으로 폭격이 되는 위험 반경거리는 피해서 작업을 하고 있지만 지난 50년 동안 폭격기에서 쏟아지는 총알이나 포탄에 맞아 피해를 입은 주민은 수십 명에 달한다.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현장에서 즉사하거나 평생을 불구로 살아가야 했고 그 충격으로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한반도에 휴전이 협정된 지도 반세기가 지났지만 이곳 매향리 사람들은 아직도 그 전쟁의 포화 속에 살아가고 있다.
1964년 전남 광주 출생
현재 프랑스의 뉴스사진 에이전시 COSMOS의 소속 사진기자
■ 개인전
1994년 곡예사 Pinehill Gallery 서울 / 광은 Art space 광주
2003년 매향리 이야기 Kodak Photo Gallery 서울
■ 그룹전
2001년 제1회 Photo Journalism Festival (Imagepress주관) 서울
2001년 매향리 국제문화제
2002 한일 월드컵 사진전 서울 및 전국 순회전 외 그룹전 8회
■ 출판
2001년 오래된 폐허 (사진집. 도요새출판)
2001년 곡예사 (e-Book 사진집. 와이즈북출판)
2002년 중등역사교과서 표지 및 사진수록 (휴머니스트 출판)
2002년 AGAIN 2002 (한일월드컵 사진집. 이레출판)
2003년 곡예사 (사진집. 눈빛출판)
2003년 표류하는 섬 (사진집. 눈빛출판)
2. 노순택 - 아이들은 열 네 살이었다

지난 2002년 6월 13일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56번 지방도로에서 주한미군 2사단 44공병대� 소속 장갑차에 두 여중생이 압사 당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54톤에 달하는 부교운반용 장갑차의 육중한 무게에 여학생들의 온 몸은 으깨어졌고, 내장과 뇌수가 터져 나와 바닥을 흥건하게 적셨다. 이날 참변을 당한 신효순, 심미선 두 여학생은 친구의 열네 번째 생일잔치에 가던 길이었다. 한 동네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단짝이었던 효순이와 미선이는 14살이라는 꽃보다 여린 나이에 함께 고통스런 죽음을 맞았다. 사고는 주한미군 측의 잘못이 명백했다. 하지만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에 따라 한국경찰은 조사권을 행사하지 못했고, 미군 측은 자체조사 결과 아무런 잘못이 없다며 발뺌했다. 당시 한국은 월드컵의 열기에 폭 빠져 있었고, 두 여중생의 억울한 죽음은 여론화되지 못한 채 잊혀질 뻔했다. 그러나 미군의, 미군에 의한, 미군을 위한 조사와 재판과정에서 사고가해자들이 모두 무죄평결을 받으면서 한국인들은 분노하기 시작했다. 조사과정에서 철저하게 배제됐던 한국정부는 재판과정에도 아무런 참여를 하지 못했다. 불평등한 SOFA협정 때문이었다. 시민단체와 언론의 집요한 추적과 조사로 미군 지휘관과 운전병의 과실이 백일하에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미군법정은 운전병 마크 워커 병장과 관제병 페르난도 니노 병장에 대해� 면죄부를 안겨주었다. 심지어 지휘관 메이슨 대위는 기소조차 하지 않았다. 한국정부는 철저하게 무기력하고 한심한 태도로 일관했다. 시민의 양심과 분노가 폭발했다. 시민들은 촛불을 들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수만 명의 시민들이 미대사관을 에워싸고 미국의 사과와 SOFA 개정을 요구했다. 역사상 유례 없는 자주권 회복 운동이 벌어진 것이다.� 이 사진은 그 뜨거웠던 현장의 기록이다.
1971년 서울 출생
전 교수신문, 오마이뉴스 기자
현 이미지프레스(www.imagepress.net) 편집장
현 국제민주연대(Korean House for International Solidarity) 편집위원
■ 출판
2003 생각하는 한국인을 위한 반미교과서 (공저 / 도서출판 당대)
■ 주요작업
2000-2001 매향리 주민의 미공군폭격장 폐쇄투쟁
2000 소파개정 시민운동
2001 방북취재
2001-2002 주한미군 고압선 감전 전동록 씨 사건
2002 주한미군 트레일러 사고사 박승주 씨 사건
2002-2003 주한미군 궤도차량 압사 두 여중생 사건
2003 미국의 이라크침략을 반대하는 한국의 반전운동
■ 전시
2001년 포토저널리즘 페스티벌 / 포토아이 갤러리
- 매향리주민의 미공군폭격장 폐쇄투쟁에 대한 보고서
3. 신동필 - 한국인 원폭피해자

세계 최초의 원폭투하가 올해로 58년을 맞이하고 있다. 일본은 종전기념일인 8월15일보다 폭탄이 투하된 8월 6일에 더 큰 의미를 두고 대대적인 평화집회를 개최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원폭피해 직후 정부 차원의 관련법이 제정되어 일본 내 모든 거주자들이 지원 받고 있지만 한국내의 피폭자들은 법률적 지원근거가 부족해 소외 받고 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징용으로 끌려갔거나 돈벌이를 위해 체류 중 피폭 당해 억울하게 숨진 한국인은 3만여명으로 추산된다. 한국인 피폭자 6만명 중 살아남은 사람은 3만명 정도이다. 이중 30%에 이르는 중환자는 귀국 후 또는 일본현지에서 후유증으로 숨졌다. 현재 남북한에 생존해 있는 원폭 피해자는 5000여명. 이중 2200여명이 전국 7개 지부에 등록돼 있으며 북한에도 900여명의 생존자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합천 원폭피해자복지회관에는 한국 원폭피해자 80여명이 악몽의 한을 달래고 있다. "한 명이라도 살아있을 때 일본의 사죄와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원폭피해자의 절박한 외침에 대하여, 민간인들에게 폭탄을 떨어뜨린 미국 정부, 전쟁을 일으키고 한국인을 동원한 일본 정부, 지금까지 자국민의 피해에 대해서 어떠한 대책도 내놓지 못하는 한국 정부는 원폭 피해자의 고통에 귀기울여, 진정한 평화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할 것이다.
1965년 원주 출생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 졸업.
상명대학교 대학원 사진학과 포토저널리즘 전공 졸업
청주대학교, 동명정보대학교, 용인대학교, 연변대학교 사진학과(중국) 강사
■ 개인전
1999 '교토 40번지' [문화일보 갤러리, 원주문화원 전시실]
2001 '광부 이춘하' [02갤러리]
2002 '또 다른 가족' [코닥포토살롱]
■ 단체전
2001 제1회 포토저널리즘 페스티벌 (비전향장기수). [포토아이갤러리] 외 8회
■ 출판
2001 사진집 '우리 다시 꼬옥 만나요' :비전향장기수 63인의 남녘생활 [도서출판 창]
2002 Again 2002 (이레출판사 : 공동 참여)
2002 종군위안부할머니사진집(여성부) [공저]
4. 안해룡 - 과거의 사진첩에서 찾아낸 기억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모습을 처음 카메라에 담은 것은 93년의 일이다. 한 할머니의 장례식 소식을 접하고 달려갔다. 용산역 앞 광장에서 장례버스를 무대의 배경삼아 치러진 장례행사는 쓸쓸하기 그지 없었다. 동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헌화가 진행되는 모습을 감정없이 묵묵히 몇 장의 사진으로 담았다. 촬영을 위해 이후 일본대사관 앞에서 매주 수요일에 열리는 수요시위 현장을 나갔지만 그것은 단순한 교감이 없는 '사진 작업'에 지나지 않았다. 다음해 중국에 잔류해 50여년간 호남성의 한 산골마을에 살고 있던 '남조선(南朝鮮) 국적'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를 취재하면서 처음으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 당사자들의 피맺힌 경험을 피부로 체험했다. 하지만 취재 과정에서 '남자'로서 제일 가혹했던 여성으로서의 '경험'에 관해서는 감히 직접 질문하는 것은 생각해보지도 못했다. 집회나 모임에 나와 할머니들이 토해내는 체험을 듣거나 증언집을 읽으면서 결코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감히 건드릴 수 없는 상처를 가슴으로 접하고자 했다. 그리고 할머니들의 모습과 투쟁을 담는 사진 작업을 그만두었다. 사진 기록은 거기서 끝났다. 작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부탁으로 30여분의 할머니들의 '체험'을 비디오에 기록하는 작업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체험을 남자로서 듣는다는 것은 여전히 부담스러웠다.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듣는 일은 함께 했던 여성 작업자들의 몫이 되고 말았다. 여성 작업자들이 할머니들과 인터뷰를 하는 동안 낡은 사진 파일을 다시금 끄집어내어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 대부분의 사진은 시위 현장에서 기록한 투쟁의 장면이었다. 사진에는 할머니들이 '여자로서 자신의 수치스러움'을 드러내고 역사에 일본의 전쟁범죄를 고발하는 당당한 분노의 현장이었다. 하지만 사진에 담긴 여러 할머니들은 이미 흙으로 돌아가셨다. 할머니들이 죽음의 순간까지도 외쳤던 일본의 사죄와 배상을 받아내지 못하고… 이 한 장 한 장의 사진들은 결코 지울 수 없는 식민지 여성에 대한 일본의 전쟁범죄를 당당하게 역사에 기록하고자 외쳤던 할머니들을 과거가 아닌 현재로, 또 미래로 '재현'하는 것이다.
1961년 한국 전라북도 정읍 출생
주한 미군 문제, 일본군 위안부 문제, 재일 교포 문제, 한국인 출신 미국 입양아
문제 등 재외 한국인의 역사와 이민사에 관한 취재를 계속하고 있다.
사진 취재와 함께 비디오 다큐멘타리 작업 등을 함께 하고 있다.
현재 아시아프레스 인터내셔널 서울사무소 대표.
■ 다큐멘타리
2003년 <침묵의 외침> 안해룡·박영임·김정민우 공동 연출
2002년 일본군 '위안부' 비디오 증언집 <침묵의 외침> 27편 제작
2002년 <억압의 사슬 아내 폭력>
2001년 <끝나지 않은 법정>
1999년 <한국인 철강왕 백영중>
■ 전시
2002년 <침묵의 외침(일본군 '위안부' 출신 할머니들의 목소리) 展>
일주아트하우스 미디어 갤러리
1994년 <아시아, 격동하는 역사의 현장>전
1992년 <사진집단 사실>전
1990년 <사진집단 사실>전
5. 이용남 - 미국의 두 얼굴

2000년 1월 경기 파주에 있는 캠프 에드워드 미군부대에 긴급 철수 명령이 떨어졌다. 미국의 정보기관이 부대 안에 폭발물이 설치되어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이었다. 주한미군은 부대 앞에 살고 있는 2000여 명의 한국 주민들에게 이같은 사실을 알리지 않은 채 한밤에 자신들만 긴급 대피했다. 이같은 사실을 뒤늦게 안 대한민국 행정당국 공무원 500여 명이 마을에 긴급 투입돼 주민들을 대피시켰다. 아찔한 순간이었다. 결국 폭발물 소동은 헤프닝으로 끝났지만 대한민국 국민을 지켜주기 위해 한국에 왔다는 미국의 두 얼굴을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었다. 경기북부 지역의 미군에 의한 범죄와 훈련으로 인한 피해는 대단히 심각한 상태다. 탱크에 사람이 깔려 죽거나 집이 무너지고 농경지가 짓밟혔다. 기지촌 주민들은 술취한 미군들에게 툭하면 얻어터진다. 또 훈련을 이유로 탱크를 비롯한 훈련 차량들이 마을 한가운데를 헤집고 다니는 바람에 그 일상의 삶이 파괴되고 있다. 주민들의 항의에 주한미군은 "우리는 당신들을 지켜주기 위해 가족과 헤어져 이곳에 왔다. 한국민들은 그것을 알아야 한다"는 말로 주민들의 피해를 묵살했다. 미국 독립기념일이나 성탄절이 되면 주한미군은 한국의 고아원 아이들과 기지촌 주민들을 초청해 파티를 연다. 그러나 미국은 대형참사를 가져올 수 있는 폭발물로부터 한국 주민들의 안전을 뒤로한 채 자신들만 부대를 몰래 빠져나가는 두 얼굴의 행태를 보이고 있다. 초콜릿의 달콤함을 나누는 듯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철저히 외면하는 미국의 두 얼굴을 과연 어떻게 볼 것인가. 그럼에도 미국은 지금 이 시각에도 여전히 한국민을 초청 가공할 무기와 초콜릿을 자랑한다.
1955년 경기 파주 출생
현장사진연구소 소장. 파주바른신문사 대표
■ 출판
1998년 사진집 우리땅이야기 (바른신문출판부)
2003년 사진집 어머니의 손수건 (도서출판 민중의 소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