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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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abel  [homepage]님께서 남기신 글 (2003-07-07 01:59:34, Hit : 334)
[펌]정거장에서의 중얼거림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다.   그림이라는 매체에서 '그린다'는 행위가 무엇보다 우선되는 만큼, 사진에서 '찍는다'는 행위는 그것만으로 사진을 대칭할 수 있는 단어일 것이다.   그것은 또한 빛을 전제로 한 행위이고.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모네같은 케이스처럼, 그렇게 빛을 사랑한 사진가가 있었던가 싶다.    어두운 플랫홈속에 명멸하는 빛들을 다사롭게 만져줄만한 애정을, 어느 사진가가 가지고 있었을까.
간단히 생각해보면, 그럴 것도 같다.      사진가가 다루기 가능한 빛의 정도란 것이 미미한 것도 사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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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문광훈 _독문학,고려대 교수


클로드 모네(1840∼1926)는 1877년부터 1878년에 걸쳐, 파리의 생 라자르 역과 그 주변을 그린 일련의 작품을 발표했다. 모네의 관심은 빛과 대기의 흐름에 따라 화가의 눈에 시시각각 다르게 느껴지는 역 주변의 인상이었다. 분주한 플랫폼의 정경처럼 모네의 그림에서 빛과 색채는 쉬지 않고 움직인다. 화면 안의 모든 실체는 유동하는 빛과 색채의 현란함 속에서 사라질 듯 투명하게 빛난다. 모네의 눈부신 빛과 색채의 세계로 들어가 본다.



왼쪽·클로드 모네 〈생 라자르 역〉 75.5×104cm 1877 파리 오르세이 미술관 오른쪽·모네의 사진(59세)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하나의 비유일 뿐이다.” - 괴테

클로드 모네(Claude Monet)의 그림 중에는 그가 1877년에 그린 〈생 라자르 역〉이라는 작품이 있다. 언제였던가, 이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가. 목요일마다 서는 프랑크푸르트대 도서관 앞의 노점거리에서였던가, 한결같이 사람 붐비던 라이프치히 거리의 한 아케이드 모퉁이에 있는 그림과 액자를 파는 가게에서였던가, 아니면 콘스타블러 봐헤에 서던 비정기적 장날이었던가. 알 수 없다. 그 그림 속의 가뭇없이 사라져 가는 듯한 사물들처럼, 이 그림을 언제 어디서 처음 보았는지에 대한 기억 역시 선연하질 않다. 오직 남은 것은 그것을 보았다는 한때의 사실, 그리고 그 사실 안에 녹아 있는 한때의 행복했던 충격뿐. 시간은 드물게 즐거웠던 지난 시절의 구체적 세목을 사상(捨象)한 채 그 껍질만 남겨 놓는다. 시간 스스로 친절했던 적은 한번도 없다. 시간의 광포함 뒤에 남는 것은 오로지 형해와도 같이 조각난 느낌과 어슴푸레한 기억들. 즐거웠던 날들의 아귀 맞지 않는 파편만 보듬은 채 우리는 지금 여기를 견뎌간다.

모네의 이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주체할 길 없이 연이어 떠오르는 단상의 목록들은 무엇이었던가? 가볍고 투명한 빛과 색채의 환희, 그 속에서 떠다니듯 묘사된 사물들과 그 사물들을 닮아 있는 사람들과 이제 막 어디론가 떠나려 하는 기차와 대기의 움직임…. 그리고 또 있다. 정거장과, 정거장에서의 말하여진, 말하여지지 않은, 숱하게 놓쳐버린 사연, 사연들…. 모네의 이 그림을 이해하는 데에는 그의 삶을 이루는 전기적·예술적 사실도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이를테면 그가 1840년에 태어나 1926년까지 살았다는 것, 인상주의를 유럽의 예술사조로 만드는 대표자 노릇을 했다는 것 등의 범박한 사실에서부터, 그에 이르러 빛은 회화의 주된 모티프로 발견되었다는 것, 객관적 아름다움보다는 순간적으로 사라지는 사물의 포착을 중시하였다는 것, 그리하여 아틀리에 회화를 혐오하고 야외에서 스케치를 즐겼다는 비중 있는 사실에 이르기까지, 그것들은 이미 그의 이 그림 속에 다 녹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생 라자르 역〉에서의 빛은 그림 위의 모든 요소를 관통하며 지나간다. 그것은 사물에 비껴 굴절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꿰뚫고 지나감으로써 그 윤곽을 지우며 또다시 드러나게 한다. 마치 빛 자체가 고유한 색채를 가지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것은 자기 손길이 닿는 모든 것에 자기 나름의 독특한 형태와 모습을 부여하면서 사물을 변색시킨다. 빛은 모든 것을 살아 꿈틀거리게 한다. 기관차와 그것이 내뿜는 수증기는 대기의 빛과 어우러져 서로 녹으면서 역의 지붕이 마치 하늘인 듯, 그리하여 수증기 속에 오히려 하늘을 감싼 듯 사물들은 빛 속에서 스스로 현상방식을 바꾸어 간다. 하나의 사물을 이루는 한 점 한 점의 빛깔은 다른 하나의 사물에서도 나타나고, 다른 사물의 빛깔은 그 아닌 사물로 또다시 퍼져 나간다. 빛은 스스로 빛나면서 사물들을 빛 속에서 서로 이어준다.

빛의 움직임처럼 〈생 라자르 역〉 안의 색채 역시 쉬지 않고 움직인다. 그것은 그 자체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마치 빛의 마술에 걸린 듯 부유하는 공기처럼 떠다니며 겹쳐지고 또 나누어진다. 뜨거운 증기를 내뿜는 기관차가 이제 막 도착하는 것인지, 아니면 어디로 떠나려 하는지 알 수 없듯이, 혹은 그 옆에 서성이는 사람들이 이제 막 내린 사람들인지, 아니면 기차에 오르기 위해 움직이는지 알 수 없듯이, 이 그림 위에 그려진 모든 것은 정지하여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를 향해 발걸음을 움직이고 있다. 기차와 사람뿐만 아니라 역의 플랫폼과 지붕 그리고 저 밖으로 보이는 거리의 건물들마저 쉼 없이 유동하는 색채의 다양함 속에 언제라도 사라질 듯 자신의 존재를 희뿌옇게 얼핏 보여 주고 있다.

영구적인 정물의 세계는 어디에도 없다. 생명을 지니든 지니지 않든, 모네의 사물들은 쉼 없이 활동하는 빛의 작용으로 함께 어울리고 일렁거리며 춤추는 듯하다. 마치 머지 않아 사라질 자신의 존재가 견디기 어려운 듯, 사물은 자신의 고단한 어깨를 끊임없이 들썩이며 아우성치고 있다, 춤추고 있다. 침묵의 지층을 뚫고 나오려는 듯, 사물은 아우성치며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편에서 이편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사물의 춤에는 탄식이 녹아 있다. 색채의 몸짓에는 소멸하는 생명의 비애가 담겨 있다. 빛은 사물의 억눌린 침묵과 아우성을 드러낸다. 모든 사물에 미치는 빛의 기적이여. 모든 사물을 비로소 약동시키는 빛의 마법이여. 빛이 사물에 닿자, 사물은 살아 작열하면서 제 모습을 시시각각 변형시켜 간다. 빛 하나의 존재와 빛 하나의 소멸이 이루는 영묘한 존재의 질서여. 빛으로 하여 네가 살아 있고 빛으로 하여 네가 꺼져 가는구나. 빛은 존재하는 모든 사물에 새 생명을 부여하는 최고의 율법처럼 보인다. 끝없이 부서지는 빛의 색채 속에는 끝없이 소멸해 가는 삶의 순간들이 혼융되어 있다. 그러니까 빛과 색채에 대한 화가의 전념은 여기에서 허약하여 부서지기 쉬운 삶 자체에 대한 전념으로 나타난다.



빛과 색으로 창조되는 세계



왼쪽·〈생 라자르 역〉드로잉 25.5×34cm 1877 파리 Marmottan 미술관
오른쪽·〈생 라자르 역〉 캔버스에 유채 64×81cm 1877 파리 Marmottan 미술관



사물의 윤곽을 그리며 관통하는 빛은 이 사물에 온갖 색채와 형식을 부여하고 있다. 빛 자체의 운동이 사물의 형태와 색채에 끼치는 무한한 효과의 층위들. 사물은 동질적 빛의 전개 속에서 각기 다양하게 울리면서 자신의 차별성을 상실하여 간다. 태양빛의 균형적 작용에 의해 동질적 공간의 무대 위에서 그것은 자신의 고유한 빛을 다채롭고 싱그럽게 펼쳐 보이는 것이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색채들이 가물거리며 지워져 가는 이 전체적 분위기는 무엇을 암시하는가? 그것은 근대적 삶을 특징짓는 대도시 생활의 조급함인가, 아니면 현란한 삶의 다채로움과 그것의 허무한 종결인가? 모두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두를 통일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틀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을 현존적 운명에 대한 투시라고 부르고자 한다. 보일 듯 보이지 않는 낱낱의 사물들 - 투명과 반투명 사이에서 움직이며 나타났다가 숨고 또다시 나타나는 사물의 짧은 자취와 그 긴 궤적들, 이것은 그 자체로 지금 여기에 머물다 사라지는 모든 현존하는 것을 닮아 있다.

자연을 인간 체험의 가장 큰 거울이라 한다면, 그림 속의 자연은 거울의 거울이다. 자연은 사람의 체험 또는 사물의 모습 그 자체를 담는 데 반해, 예술은 이 자연을 형상화 과정에 다시 한 번 매개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읽어 내야 할 궁극적 비유가 자연이라 한다면, 예술작품은 우리가 해명해야 할 비유의 비유다. 사물을 그 자체로 드러내는 거울이 자연이라 한다면, 예술은 사물과 사물의 배후, 거울과 거울의 배후까지 암시한다. 예술의 자연은 그러므로 자연보다 더욱 자연적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짧고 고단하며 거친 삶의 묵시록이 된다. 자연이든 예술이든, 존재하는 모든 사물에는 삶을 꿰뚫는 질긴 운명의 비유가 묻어 있다. 그러나 이 비유는 사물을 비출 뿐만 아니라 이 비춘 것을 암시하고 해명하고자 하는 예술작품 속에서 한층 적극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물에서 또 예술에서 자기 삶의 형식과 운명을 끊임없이 해독해야 한다. 모네의 색채는 이런 삶의 양지와 음지를 가만히 알려준다. 색채의 해명에서 그는 삶의 밝고 어두운 방을 비춘다. 색채의 방 안에서 인간은 얼마나 투명하며 또한 불투명한가. 투명은 단지 색채적 욕구일 뿐 어쩌면 불투명이야말로 실존의 원형질인지도 모른다.

빛과 대기의 흐름을 연구한 이는 물리학자나 기상학자만이 아니었다. 화가 역시 빛과 대기의 흐름을 집요하게 관찰하고 추적한 사람이었다. 아니 화가는 이 부단한 흐름에서 사라지고 마는 것들의 현존적 무게를 발견하고 또 이를 색채로 드러냈다는 점에서 그들과 다르게 보인다. 대개의 인상주의자들처럼, 모네 역시 감각적 인상을 가장 작은 단위로 분해한 후 다시 이 요소들을 통합하고, 이런 통합에서 현실의 역동적 연속성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이 연속성에서 드러나는 것은 드러나지 않는 것을 배후로 한다. 보이는 것은 대개 반쪽의 진실에 지나지 않는다. 삶의 모호성은 밝혀지는 것이면서 스스로 감추기 때문이다. 모네는 빛에 의한 사물의 굴절 속에서 패잔해 가는 인간의 운명이 숨쉬고 있음을 보았던 것이다. 소멸하는 사물을 끝없이 부서지는 색채로 포착함으로써 그는 인간 실존의 원형들 - 있었던 것에서 없었던 것으로 돌아가고 언젠가 다시 어떤 있음으로 전환될 존재의 생성적 순환과정을 표현한 것이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그것이 인간이든 사물이든, 삶이든 세계든, 따로 또 같이 서로 어울리며 스스로 영위해 간다. 한 개인이 다른 한 개인의 삶에서 자신과의 겹침과 어긋남을 동시에 발견하듯이, 사물의 생리는 끊어지듯 이어지고 이어지면서 다시 끊어진다. 이 철리(哲理)에 우리는 표현을 통해 다가간다. 화폭 위의 창조된 진실을 읽음으로써 우리는 사물의 생리 - 사라짐과 생겨남 그리고 다시 사라짐으로 이어지는 세계의 근본적 존재방식에 근접하는 것이다. 회화의 언어는 그려진 진리를 통해 우리를 진리로 인도한다. 빛의 점묘화 - 그림은 그 자체로 보이는 진실이다. 창출된 예술의 세계가 이 세계를 처음으로 계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화가의 색채는 단순히 대상모사적이 아니라 대상창출적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사물에 묻어나는 자연적 효과를 그 자체의 순도에서 지각하고자 한 비견할 바 없이 강렬했던 한 화가의 시선과 만나게 된다.

무엇이 모네로 하여금 사물 그 자체의 충일성, 보이는 것 자체의 본래적 농도에 다가가게 만들었을까. 관찰할 수 있는 최대한의 사실에 다가가기 위해, 거리나 화실에서 스케치와 마지막 손질을 하면서 그는 얼마나 가혹한 자기요구 속에서 시간과 싸웠을 것인가. 모든 떠오르는 것들의 스러짐이여. 소멸의 계기는 사물에 덧붙여지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이미 내재된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마치 모든 것을 굴절시키는 태양 역시 낮이 지나면 세상의 지평 속으로 숨듯이, 아니 그런 숨김 속에 스스로 크기조차 변모시켜 가듯이, 빛에 드러나는 사물 역시 빛의 굴절을 겪기 전에 이미 소멸의 계기를 내포하고 있다. 필멸의 운명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화가의 표현은, 그것이 빛의 파장과 그 영향을 놓치지 않는 한, 사물의 본성, 그리하여 세계의 본성에 다가가는 것처럼 보인다.

사물의 살아 꿈틀대는 직접성과 만나기 위해 화가는 얼마나 엄격하고 예민한 감각의 촉수를 지니고 있었던가. 순간순간 소멸하는 사물의 변이를 화폭에 담기 위해 그는 얼마나 긴긴 날들을 색의 언어들과 씨름하며 형상의 산고를 견뎌 냈을 것인가. 그가 지닌 사물의 다양성을 감지하는 지각의 다양성, 열린 감각이 비로소 사물을 그 전체성에서 해방시킨다. 넘쳐흐르는 색채의 정감에는 지각하는 시선의 색채적 지향이 스며 있다. 빛 속에서 사물을 보면서 보이는 색으로 사물을 표현하면서 화가는 대상을 여기 이 자리에 마침내 있게 한다. 화가는 그 근본에 있어 ‘눈의 인간’이다. 그는 색으로 사유하는 자다. 모네 그림의 표면을 채우는 그 무수한 붓놀림에서 나는 화가의 생각하는 눈빛을 느낀다. 모네는 여든 생애로 삶을 마친 것이 결코 아니었다. 그는 지금 여기, 그 그림을 바라보는 내 눈빛 속에서 다시 태어난다. 한 획 한 획의 필치에는 한 생애의 자취처럼 그의 뜨거웠던 눈길이 어려 있다.

언제라도 사라져 버릴 듯한 색채 언어 위에서 사물은 놀랍게도 사라지고 상실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속하고 유지된다. 빛과 색의 어울림에서 사물은 그리고 세계는 다시 창조되는 것이다. 지속하는 것의 소멸적 계기와 스러져 가는 것들의 재귀적 계기를 드러내어 밝혀 주는 예술의 이 비밀스러운 작용을 무엇이라고 이름해야 하는가. 소멸하는 것들의 목덜미를 나꿔채 그것을 형상의 선명한 제단 위에 머무르게 하는 이 놀라운 표현과정을 무엇이라고 말해야 하는가. 존재하는 것의 부재를, 부재하는 것의 다가올 존재를 현시하는 예술적 형상행위를, 그 추동하는 에너지를 우리는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나. 그것은 표현에 대한 의지, 드러내 파악하고자 하는 형상적 욕구일 것이다. 표현함으로써 예술가는 계속 변모하고자 한다. 그림으로써, 씀으로써, 지움으로써, 그는 자신을 교정하고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어떤 의미 있는 항체가 되고자 한다. 예술의 형상적 욕구는 기존 삶의 항체적 계기로 자리한다. 태양의 윤곽을 알기 위해 우리는 눈멀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런 맹목적 대담성을 통해 예술가는 맹목적이지 않을 수도 있는 어떤 길을 발견하고자 한다. 불투명으로 추락해서야 비로소 가능해지는 투명한 세계로의 접근, 이 천형적 역설로 인하여 예술은 스스로 갱신해 나간다. 표현의 역설은 자기갱신의 에너지다. 사라짐과 머무름의 이 의미는 모네가 그의 그림의 공간적 대상으로 역을 택했다는 점에서도 잘 나타난다.

모든 사라지는 것에는 그것의 흔적이 있다. 그러나 이 흔적마저 더 큰 사라짐의 일부를 이룬다. 소멸의 순간적 계기는 모네 그림의 공간적 소재가 되는 생 라자르 역과 연결될 때, 수용미학적 효과에 있어 그 정점에 이르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역은 그리고 정거장은, 많은 시인이 노래했듯, 삶의 어떤 계기가 되는 시작점 또는 종결점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그 어떤 것도 머무르지 않는다. 영원성이란 말을 역은 모른다. 역에서 항구적인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항구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뿐이다. 그리하여 역에서는 떠나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머지 않아 다가올 것들에 대한 설렘이 구분할 수 없이 교차한다. 그러나 이 세상의 역은 마음의 역을 상징하기도 한다. 마음은 무수하게 떠나가고 도착하는 가운데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알프레드 되블린(A. D쉇lin)은 이렇게 말하였던가. “내 마음속에는 수많은 기차가 출발하고 도착하는 역이 있다.” 우리는 제각기 나름의 역을 품고 있다. 출발과 도착을 함의하는 역의 이미지는, 이를 감싸는 공간적 환경 역시 화가의 서정적 묘사로 인해 언제라도 해소될 듯한 찰나에 있다는 사실에 의해 더욱 강조된다.

〈생 라자르 역〉을 이루는 한 점 한 점의 색깔은 모자이크처럼 서로 어우러지면서 공간 속의 사물뿐만 아니라 공간 자체의 현상형식을 잘 드러낸다. 이 공간은 개별적 사물들과 대비를 이루기보다는 융합적 화해를 이루면서 삶의 사라지는 순간에 녹아들고 있다. 그러니까 사물의 소멸적 계기는 모네에게 현실의 환각적 효과를 주기보다는 현존하는 사물과 이를 감싸는 공간의 구성적 요소로 나타나는 것이다. 변화, 상실, 사라짐, 소멸은 자연에 덧씌워진 인위적 배경음이 아니라 모든 존재하는 것의 주조음인 것이다. 단지 그것은 인간 지각의 부분적 원근법에 의해 끊임없이 가려질 뿐이다. 삶의 온갖 이야기는 역 또는 정거장에서의 중얼거림일지도 모른다(‘역(驛)’과 정거장은 탈것이 도착하고 출발하는 장소라는 점에서 모두 동일한 의미를 지니지만, 앞의 것은 구체적·물리적 장소와 결부된 곳인 반면 - ‘서울역’이나 ‘정동진역’에서처럼 -, 뒤의 것은 특정지명으로부터 자유로운 일반적인 장소다. 따라서 ‘역’이란 정거장의 한 형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은 평생 수없는 정거장을 거쳐 가지만 표백된 이별의 말만 중얼거리며 죽어갈 뿐이다. 그래서 우리의 한 시인은, 젊어서 죽은 그 시인은 길 위에서 이렇게 적었을까.
그는 어디로 갔을까 / 너희 흘러가 버린 기쁨이여 / 한때 내 육체를 사용했던 이별들이여 / 찾지 말라, 나는 곧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했다 / 이제 해가 지고 길 위의 기억은 흐려졌으니 / 공중엔 희고 둥그런 자국만 뚜렷하다 / 물들은 소리 없이 흐르다 굳고 / 어디선가 굶주린 구름들은 몰려왔다 / 나무들은 그리고 황폐한 내부를 숨기기 위해 / 크고 넓은 이파리를 가득 피워냈다 /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돌아갈 수조차 없이 / 이제는 너무 멀리 떠내려온 이 길 / 구름들은 길을 터주지 않으면 곧 사라진다 / 눈을 감아도 보인다

어둠 속에서 중얼거린다 / 나를 찾지 말라… 무책임한 탄식들이여 / 길 위에서 일생을 그르치고 있는 희망이여


기형도,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1988) 전문

시인이 사는 삶의 세계는 사라지는 것으로 가득 차 있다. 사라지거나 아니면 굳어 있거나 흐릿하거나 혹은 굶주려 있다. 심지어 푸르른 잎새마저 “황폐한 내부를 숨기기 위해” 자라난다. 푸르름 역시 황폐하게 사라져 버릴 것으로서만 삶에서는 자리한다. 시인은 이 떠나가는 것, 잊혀진 것, 죽어 버린 것을 추적한다. “찾지 말라, 나는 곧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했다”. “돌아갈 수조차 없이/이제는 너무 멀리 떠내려온 이 길” 앞에 서서 그는 스스로 떠나갈 것으로서 생명 속에 있다. 떠나갈 것으로서 시인은 떠나간 것 그리고 떠나갈 것을 기억한다. 이런 그의 탄식은 허약하지만, 그의 희망은 “길 위에서 일생을 그르치고 있”을 뿐이지만, 사물을 사라짐 가운데 기억하고자 하는 시인의 언어는 강렬한 환기력을 지닌다. 그리하여 “구름들은 길을 터주지 않으면 곧 사라진다”는 시인의 글을 읽으면서 우리는 사물과 세계의 근본적 소멸을 지금 여기로 불러들이는 시적 포착력을 확인한다. 이 시적 표현은 사라짐과 머무름을 빛의 작용 속에서, 또 역이라는 공간에서 색채적으로 드러내는 모네의 회화적 표현과 하나로 만난다.



驛 - 실존적 갱신을 도모하는 곳



왼쪽·그림 뒷면에 광원을 쏘아 찍은 〈생 라자르 역〉 (1877) 안료가 얇게 칠해진 곳은 빛이 투과되어
밝게 빛난다. 오른쪽·생 라자르 역 전경 1850


색채의 반사작용에 대한 인상주의자들의 탐구가 정거장 모티프의 문학적 의미로까지 이어지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 화가들의 관심을 일차적으로 끈 것은 빛의 작용과 이를 통한 형태의 굴절에 관한 주제였지, 정거장이라는 장소가 지닌 비유적 의미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빛 속에 명멸하는 사물의 모습을 통해 그들이 존재의 일시성과 우발성을 표현하고자 하였다면, 정거장이라는 공간적 소재의 선택은 적절한 것으로 보인다. 정거장은, 위에서 적었듯이, 수많은 작별과 만남, 그리하여 새로운 출발을 예비하는 장소가 아니던가. 그곳은 단순히 도착하거나 떠나는 곳이 아니라 삶의 전적인 전환 - 실존적 갱신을 도모하는 곳이다. 그러니만큼 그곳은 삶의 의미론적 교차점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상주의자들의 회화적 관심은 정거장이 지닌 문학적 주제의미와 전혀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 그것은 현실을 단순히 재현하는 그 이상으로 암시하고 상징하며 의미한다.

〈생 라자르 역〉이 역사가에게 직접적으로 알려주는 것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니만큼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서보다는 관찰자의 상상력에 의해 적극적으로 읽혀야 한다. 이 적극적 해독에서 이 그림의 색채와 형태의 모호성은 현실의 모호성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현실을 재현해 내는 모네의 필치에서 우리는 어떤 것도 동일한 것으로 남지 못하며, 또 남을 수 없다는 그리하여 우연성과 우발성만이 현재를 지배하는 원리라는 근대적 인식의 실마리를 읽는다. 이 점에서 우리는 그가 자신의 시각적 경험을 지금까지의 화가보다 더욱 완벽하게 재현함으로써 다른 현실을 발견하였고, 그럼으로써 현실영역의 확장에 기여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모네는 인간의 경험에 밀착된 예술언어로 세계를 묘사하였던 것이다. 삶의 모든 것은 주목하고 묘사하며 사랑하고 연민을 지닐 대상인 것이다.

예술은 그 자체로 사물의 정태적 단일성을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삶의 표면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삼켜 버리는 존재의 가없는 심연, 그것의 있을지도 모를 가능성을 색채와 소리와 언어를 통해 암시하고자 한다. 빛의 소용돌이 속에 드러나는 한때의 광휘와 쇠잔은 일상의 크고 작은 일 속에 널려 있다. 그것은 안개나 수증기처럼 서로 뒤섞이면서 삶을 드러내고 또 지운다. 여기에 빛과 그림자, 사물과 사물, 사라짐과 생겨남, 나와 세계의 경계는 확연하게 긋기 어렵다. 예술은 바로 이 소멸의 변화와 분열에서 자기 갱신을 표현함으로써 떠나가는 것에서 지속하는 것을, 이어지는 것에서 사라지는 것을 드러내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그것은 이를 보고 읽고 듣는 사람의 눈과 귀와 입 그리고 온몸을 맑고 밝으며 또한 넓게 변모시키고자 한다. 빛 속에 드러나는 한때의 영광과 패잔의 흔적을 최대한의 지각능력으로 읽어내어 화폭 위에 담으려 했던 모네는 이런 의미에서 눈으로 빛을 사고하고 색으로 표현한 ‘눈의 인간’이었다.

사고하는 눈으로 화가는 빛과 색채와 대결한다. 이 대결을 통해 그는 꺼져 가는 사물에 다가올 빛을, 존재의 영광에 폐허의 기미를 암시하고자 한다. 소멸하는 것을 그가 더욱 오래 붙들어두고, 아직 오지 않은 것을 예감하는 것은 이런 암시에서다. 예술의 표현은 찬란한 것의 헛된 열광과 조락해 가는 것에 대한 섣부른 탄식에 우리의 눈과 귀를 덜 어둡게 한다. 예술의 표현을 보고 읽고 들음으로써 우리는 다르게 보고 다르게 읽고 다르게 듣는 것을 배운다. 사물을 달리 지각함으로써 우리는 현존적 방식을 드넓히는 것이다. 마음의 내부가 황폐해지지 않게끔, 길 위에서 희망이 그르치지 않게끔 우리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실로 또한 비유로 읽어 낼 수 있어야 한다. 모든 사라지는 것은 읽어 내야 할 영원성의 비유다. 이 읽기를 통해 우리는 달리 가능할 수 있는 삶의 어떤 양식을 꿈꾼다. 예술은 거듭 말하여 다른 표현형식의 추구를 통한 존재의 확장, 그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달리 꿈꾼다. 그러므로 나는 살아 있다. 예술은 다른 지각방식을 통해 지금 여기 삶을 변화시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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