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속이 다 시원하다...... .' ) + + +
[조우석의 Culture Map] 모차르트 이펙트 혹은 ‘달콤살벌한 권력’의 신화들
--- 클래식이 정서순화에 좋다는 달콤한 거짓말 (1) Vol. 53 2007. 3. 8~3. 14
이 땅에서, 특히 음대 출신들에게 클래식은 거의 신앙에 가깝다. 이런 형국에서 ‘클래식은 죽었다’라고 선언하는 건 배교에
다름없다. 우리 문화의 태생적 한계?

“혹시 ‘모차르트 효과’라는 말은 들어보셨겠지만, 이것도 들어보셨나요? ‘브루크너 효과’, 아이가 매우 느리게 말을 하며 한 말을
되풀이 한다. 심오한 성품을 가졌다는 명성을 얻게 된다(Child speaks very slowly and repeats himself
frequently. Gains reputation for profundity). ‘바그너 효과’, 아이가 과대망상증 환자가 된다. 자기 누이와
결혼할 수도 있다(Child becomes a megalomaniac. May eventually marry his sister). ‘말러
효과’, 아이가 끊임없이 "내가 죽어가고 있어요" 라며 길고 크게 고함을 친다(Child continually screams - at great
length and volume that he's dying). ‘브람스 효과’, 아이가 말하는 문장이 3의 배수인 단어수로 이루어진 경우 무척
아름답게 말한다. 하지만 문장이 4개나 8개의 단어를 포함하는 경우 묘하게도 지루해진다(The child is able to speak
beautifully as long as his sentences contain a multiple of three words. However,
his sentences containing 4 or 8 words are strangely
uninspired). ”
국내의 경우 음반시장의 황금기는 1990년대 말이다. 당시 음반가게는 전국에 걸쳐 2만 개. 외환위기를 거쳐 오늘에 이르는 10년 뒤
음악파일 전성시대로 환경이 바뀌면서 음반가게는 엄청 쪼그라들었다. 불과 3000곳으로 추산될 정도다. 따라서 음악에 관한 한 대한민국은 10년
전과 전혀 다른 세상으로 바뀌어버린 셈인데, 그래도 잘 팔리는 음반은 따로 있단다. 그 하나가 ‘모차르트 이펙트’이다. ‘바흐 이펙트’ 등 아류
상품도 상당수다.
태교에 좋다는 것이고, 특히 두되 발달까지 돕는다는 헛소문에 이 땅의 아줌마부대들이 허겁지겁 사들이는
모양이다. 과학이라는 외피 아래 근거 없는 상업주의가 가세한 마케팅이 먹히는 구조인데, 앞의 인용문은 그런 통념에 딴죽을 거는 재미있는 유머다.
확신컨대 그런 유머감각을 발휘한 장본인은 한국인은 아니다. 확신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박래품(舶來品) 클래식에 대한 신앙에 가까운 선호가 가장 확고한 동네가 우리의 대한민국이기 때문이다. 그런 풍토에서 선뜻 ‘배교자’가
튀어나올 것 같지 않다. 일반인들이 그렇게 꽉 막혀있는 판에 이른바 음대 출신들이야 말할 나위가 없다. 아니 음악을 균형 있게 받아들이는 감각은
되레 더 떨어지기 십상이다. 그 많은 음대에서 매년 무시 못할 음악도들이 배출되지만 그들이 안정적이고 건강한 교양인구로 성장했다는 보고를 나는
도무지 접해본 바 없다. 세상이 다 알듯 그건 음대만이 아니라 미술, 무용 등 거의 모든 예술장르 교육의 태생적 한계이기도
하니까.
아시듯 음악대를 포함한 예술 분야의 고등교육은 첫 발자국부터 그렇게 심상치 않았다. 즉 그들은 해방 이후 근대 교육기관으로 막 출발한
대학이라는 아카데미즘의 우산 안에 기를 쓰고 들어가려했다. 그게 폼이 난다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사회적 안전판이라고 봤을까? 콘서바토리,
미술학교, 무용스쿨 등 기존 대학 시스템과는 독립적 성격의 교육기관을 만들려는 시도는 애초부터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커리큘럼은 말할 것도
없다. 이식된 바다 건너 예술 장르를 그저 유지 내지 반복시키는 걸 사명으로 알았다. 그렇다. 음대는 초장부터 ‘콘텐츠 부재+동북아
관료주의’라는 두 개의 늪에 빠진 것이다.
즉 기꺼이 받아들인 예술교육의 콘텐츠는 철두철미 바다 건너 서구의 형해화된 불모의 아카데미즘이었다는 점, 거기에 동북아의 유구한 ‘체제 내
학문’인 관학(官學)의 틀이 확인사살을 한 것이다. 태생적 한계를 가지고 이 땅에 출현한 것이다. 안타깝기 그지없는 상황인데, 따라서 우리의
예술교육이란 후기 식민주의의 흥미로운 연구대상이라는 게 나만의 생각이다. 사람들은 물을 것이다. “인문학 분야도 사정은 어슷비슷하지
않느냐?”고. 맞다. 그러나 매판성 내지 장식적 성격이 그중 강한 곳이 바로 음악을 포함한 예술 일반의 영역이다.
유감스런 이런 구조에서 미술의 경우 인상파 대가 전시회, 루브르박물관 명품전시회 류의 개성 없는 ‘보따리 문화상품’들이 코흘리개 아이들의
호주머니를 노리고 수입되고 있다. 그 한켠에서 ‘모짜르트 이펙트’를 팔아대는 것이다. 정서발달에 그만이고 두뇌개발에도 좋다는 주술(呪術)은
소비자의 확신으로 받아지고 있지만, 과연 그게 사실일까? 혹시 그게 가짜 신화라면? 아니 최소한 19세기 서구에서 통하던 ‘흘러간
노래’라면….
밝히지만, 그걸 입증하기 위해 과학적 통계를 들고 나올 생각은 전혀 없다. 어차피 그것은 형이상학의 세계에 속하는 영역, 따라서 신화의
하나라고 보기 때문이다. 신화 탄생의 족보를 잠시 추적해보자. 시작은 19세기 서구 사회였다. 음악학자들은 1802년 발표된 음악학자 포르켈의
바흐 전기를 기점으로 본다. 직후 호프만 같은 그 시기의 음악학자들은 입을 모아 거품을 물기 시작했다.
급기야 클래식은 불변의 비물질적인 영역에서 따로 존재하는, 그래서 종교적 고양(高揚)에 해당하는 지고의 음악이라는 꽤나 허튼 소리까지
용감하게 등장했다. 웃지 마시라. 그게 불과 30년 전까지 서구에서 불변의 진리로 통하던 사회적 공리였다. 미국 음악학에서 제법 영향력 있다는
조셉 커먼의 말을 빌자면 “하이든과 모차르트, 그리고 베토벤의 기악음악이 새로운 미적 이상의 본체”(87쪽)이자 “정신적 세계”(88쪽)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음악이야말로 숭고함의 형이상학에 속한 것이라고 떠받들어졌다(조셉 커먼, 『음악을 생각한다』,
궁리).
▶▶ 클래식은 숭고한 정신세계?
하지만 세상이 바뀌었다. 요즘에는 그들이
만들어낸 거품 신화란 꺼져버린 지 오래라서 지금은 유통조차 되지 않는다. 한국 땅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케케묵은 옛 신화가 중고교 교실에서
버젓이 유통된다. 60년대 말 내가 중학교를 다닐 때까지만 해도 ‘바흐=음악의 아버지’ ‘헨델=음악의 어머니’라는 식으로 배웠으니 지금 생각하면
헛웃음부터 나온다. 세계 3대 바이올린협주곡은 베토벤-멘델스존-차이코프스키라고 써야하는 시험문제도 등장했으니까. 베토벤이 작곡한
피아노-바이올린-첼로 소나타는 각각 몇 개이고, 현악사중주는 몇 개인가를 묻는 질문이 나오기도 했다.
대단히 속화(俗化)된 형태의 음악교육을 우리들은 받은 셈이다. 그런 교육의 원조는 앞에 말한 19세기 음악학자들이었지만, 도매상은 따로
있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교육자들. 바로 그들이 속화된 통조림 교육을 교실에서 들고 온 이들이다. 소매상을 거쳐 최종 소비자는 해방 이후
대한민국 중고교와 대학교. 거짓신화의 생산-유통-소비에 이르는 구조는 바로 그런 식민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어쨌거나 바로 그 통에 서구 클래식은 의심할 바 없는 정전(正典, canon)의 반열에 있었고, 이 땅의 기존 음악들은 ‘로컬음악’ 혹은
‘민속음악’의 딱지가 붙어 하위 음악으로 전락을 해버렸으니 참담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그림을 그려보자. 세상의 모든 음악에는
아래(로컬음악)와 주변부(대중음악)가 있고 그 위와 가운데의 빛나는 자리를 고전음악(클래식)이 타고 앉은 꼼짝 못할 위계질서가 연출된 것이다.
이 질서 속에서 만들어진 ‘검증 안 된 가설’, 그러나 서구 형이상학의 위세 아래 유포됐던 거짓 철학은 이미 우리에게
익숙하다.
“클래식은 숭고한 정신세계에 속하며, 당연히 정서순화에 좋다”는 통설이 바로 그것이다. 수상쩍은, 그러나 의문을 제기할 수 없었던 통설이
지금은 ‘모차르트 이펙트’로 변해 눈먼 부모나 비서구권 시장을 공략하는 셈이고…. “당신이 즐기고 있는 음악이란 알고 보면 매우 정치적이다”는
주장을 나는 저번에 던진 바 있다. 음악은 가치중립의 영역이기는커녕 그 반대라는 얘기였다. 반복하거니와 음악은 철두철미 권력관계, 서구중심주의를
반복하고 있는 핵심 공감이다. 그러나 최소한 내게 음악이란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 따라서 숭고한 심미적 감상의 영역에 속한다는 말은 삼류
거짓말에 불과하다. 근대 이후 서구가 잡았던 헤게모니를 반영하는 역사의 찌꺼기일 뿐이다.
따라서 다음 회에 나는 그런 제국적 질서의 유럽중심주의라는 자궁 속에서 탄생한 ‘적통(嫡統) 음악’, 즉 대문자 M으로 시작하는
Music인 클래식이 어떤 과정을 거쳐 19세기 제국의 요란한 취주악대로 떠올랐는지, 그리고 지금은 누추한 애물단지 신세로 조락을 해버렸는지를,
또 1백여 년 권력사의 흐름을 두 차례에 나눠 보여드릴 참이다.
19세기 제국주의와, 그것의 철학 정립에 봉사했던 19세기 초창기 서구 음악학의 안간힘을 말하기에 앞서 우선 선연한 몇 개의 영화 장면이
떠오른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서 유태인을 학대하는 부하들을 지켜보면서 방 안에서 흘러나오는 클래식을 즐기던 독일군 장교의 등골 오싹한
엽기. 그건 엽기가 아니라 ‘인공음악’ ‘교묘한 음악’ 클래식에 잘 어울리는 절묘한 그림인지도 모른다.
공포영화 〈양들의 침묵〉에 등장하는, 그 무슨 박사인가 하는 이름의 엽기 살인범이 즐겨듣던 음악을 기억하시는가?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바로 그것이었다. 비약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서구 클래식 음악과 무관치 않은 또 하나의 끔찍한 장면을 상기시켜드리고 싶다. 꽤
유명한 복음주의 찬송가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작곡한 기독교 목사 존 뉴턴. 놀라워라. 그 친구는 18세기 중반 노예상인
출신이었다.
1764년 이후 수백 명의 아프리카 노예들을 실어 나르던 ‘죽음의 상인’, 당시 노예선에서 신음하던 흑인들에게는 ‘음웨네 푸토’로 불렸던
저승사자. 사실 음웨네 푸토란 사람 잡아 먹는 악마란 뜻이란다. 클래식은 그런 폭력적 권력, 그리고 철학에서 말하는 이른바 서구적 이성의 독단과
썩 잘 어울리는 요소가 있다는 것을 다음 회에 털어놓으려 한다. 클래식과 폭력적 권력은 태생적으로 어슷비슷하고, 동전의 양면이라는 점을 요즘
새삼 확인하고 있는 중이다.
| 조우석 _ 《중앙일보》 기자 wowow@joongang.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