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남녀
리진 회화展
2007_0307 ▶ 2007_0327
리진_목욕I_화선지에 채색_41×43cm_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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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0307_수요일_06:00pm
갤러리 아트싸이드 서울 종로구 관훈동 170번지 Tel. 02_725_1020 www.artside.org
문인화의 현대적 재구성,
음식남녀 ● 옛 선비들이 시문을 짓다가 남은 먹으로 여백에 그림을 그리던 것이 문인화(文人畵)의 발단이었다고 한다. 그림을 전문으로 하지
않는 문인들이 여기(餘技)로 그리는 것이었기에 사생(寫生) 보다는 사의(寫意)를 우위에 두었다. 하지만 평소 문인화를 익숙하게 즐겨찾던 사람에게
리진(李津)은 다소 낯설지도 모른다. 더욱이 한번쯤 사군자를 배울 요량으로 정성스레 먹을 개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리진을 문인화가라고
부르는 것에 의문을 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리진_가족_화선지에
채색_29×138cm_2007

리진_담중취진_화선지에
채색_96×180cm_2007
중국에서는 70년대부터 문인화 속에 서양의 사실주의가 도입되기 시작했는데, 80년대
중반에는 “신문인화(新文人畵)” 운동이 유행하여 당시 중국미술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들은 필묵운율(筆墨韻律)을 중시하는 전통회화기법을
계승하면서도 작품의 정조는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것이 풀어내는 것이 특징이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리진은 90년대 이후 중국 수묵화계에서
영향력 있는 신문인화가로 자리 잡았다. 여느 문인화와는 달리 리진의 그림에서는 선비의 기품과 여백이 있는 작품을 보기는 힘들다. 대신에 문인들
내면의 원초적인 욕구, 음식과 성(性)에 대한 이야기를 ?슬캐껙?飮食男女)’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다채롭게 보여준다. 중국의 고전
〈예기(禮記)>에 보면 “음식과 남녀에는 인간의 커다란 욕망이 있다(飮食男女, 人之大欲存焉)”고 하였고, 맹자(孟子)도 음식과 섹스를
인간의 본성(食色性也)으로 간주하였다. 문인들이라고 본성이야 무엇이 다르겠는가. 오히려 시와 음악을 즐기는 문인들 중에서도 음주를 좋아하며 성적
유희에 탐닉했던 은자(隱者)들도 얼마나 많았던가. 사실 어떤 의미에서 리진은 중국의 비주류 문인의 전통을 계승 발전시킨 것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리진의 그림은 문인화라고 하기엔 세속적이고, 춘화(春畵)라고 하기엔 전위적 성격이 농후하다.

리진_목욕II_화선지에
채색_41×43cm_2007

리진_목욕III_화선지에
채색_41×43cm_2007
우리는 리진이 자신의 그림을 “초현실주의”라고 말하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실
치졸하고 무성의한 듯한 제발(題跋)은 뜻을 전달하는 것보다는 의도적으로 여백을 채우는 조형적 기능을 할 뿐이다. 오히려 화면 속에 등장하는
사물이 상징적인 경우가 많다. 가령 이따금씩 공중에 걸려있는 고깃덩어리는 ‘폭력’을 뜻한다고 한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 유난히 우리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담중취진도(淡中趣眞圖)>라는 작품이다. 왜냐하면 이는 그가 얼마 전에 한국을 방문하고서 받았던 ‘한국’에 대한 느낌을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리진_민이식위천_화선지에
채색_180×96cm_2007

리진_이과두_화선지에
채색_138×69cm_2007
그림 속에는 리진 자신을 모델로 하는 남자가 등장하는데, 그 표정을 보면 술과 여자를
밝히는 모습이 음흉하지만 어딘가 익살스럽고 귀엽기까지 하다. 실제로 리진은 덥수룩한 수염을 기르고 있는데 여태껏 한 번도 면도해 본 적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외모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그가 가방 대신에 들고 다니는 시장바구니이다. 60~70년대 톈진 시내에서 흔하게 구할 수 있었던
시장바구니를 그는 어디를 가든지 항상 들고 다닌다. 어쩐지 그 시장바구니 속에는 그만의 독특한 예술세계가 가득 담겨있을 것만 같다. ■
권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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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ing UP
2007 갤러리스케이프 신진작가 기획展
2007_0306 ▶ 2006_0331
김민경_ Camouflage_플라스틱_각 15×15×15cm_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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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0306_화요일_06:00pm김민경_남학현_에테르_이지숙_최문석
갤러리 스케이프 서울 종로구 가회동 72-1 Tel. 02_747_4675 www.skape.co.kr
Spring UP展은 봄기운과
함께 새로이 도약하는 신진 작가 5명을 발굴하여 선보이는 전시이다. 참여 작가인 김민경, 남학현, 에테르, 이지숙, 최문석은 90년대에
청소년기를 보내며 대중문화에 개인적·개성적으로 등장한 ×세대로 소비 지향적 주체라 불리던 세대가 생산적 주체로 탈바꿈하려는 현시점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작가들이다.

이지숙_The
Coloring-Strech_클레이_24×12.5×40cm_2007
먼저, 이지숙의 coloring series는
단일한 시점으로 이루어진 백색의 견고한 덩어리로서의 조각을 거부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작가는 내부와 외부로 구분되는 조각의 구조와 거기에 회화적
요소가 첨부됐을 때 형성되는 표면의 관계에 주목한다. 일반적으로 조각의 마지막 단계에 진행되는 컬러링은 작가의 coloring series에서
지배적인 요소로 등장하며 내부, 외부, 표면으로 나눠지는 조각의 구조를 유기적인 통합체로 재구성한다. 컬러링의 2차원적 화면으로부터 3차원화된
표면의 이미지는 차원이 변화하면서 서로 분할되고, 해체되다, 다시 얽히고, 교차하며 대상을 향한 다각적인 바라보기를 유도한다.

김민경_Camouflage_플라스틱_각
15×15×15cm_2007
반면에 김민경의 camouflage는 조각의 형상과 표면의 표현에 집중되는데, 이는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이미지로서 자신을 드러내고 있는 현대인의 모습을 반영한 것이다. camouflage는 ‘위장하다’라는 뜻의 단어로 작가는
‘위장’에서 단순한 위선과 허위가 아닌 사회 속에서 개인이 자신을 변장하고, 감추기도 하지만, 오히려 자아를 드러내기도 하는 내밀한 욕망의
수단을 발견한다. 이번의 신작 camouflage에서는 서로 다른 독특한 머리 스타일을 하고 있는 동일한 얼굴의 두상들을 볼 수 있다. 이는
빠르게 변화하는 유행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집단의 이미지를 좇으면서도 자신을 차이 나게 드러내기 위해 ‘위장’하는 현대인의 모습과 닮아있다.

에테르_가구적 시선(furniture's
eye)_캔버스에 디지털 프린팅& 아크릴채색_100×100cm_2007
이어 에테르ETHER의 가구적
시선(furniture's eye)에서는 표면이 극사실적으로 접사된 플라스틱 장난감이 등장한다. 카메라 앞에서 피부는 미끄럽게 번들거리고,
커다란 모공들이 훤히 드러난 장난감의 얼굴은 유년기의 시각적 환영으로부터 단절되며 현실감이 부여된 현재의 상황으로 내던져진다. 매끄러운 재질의
플라스틱에 침투된 작가의 시선은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플라스틱 피플’적 정서를 드러낸다. 수백여 점의 장난감을 수집하며, 장난감을 그리기도
하는 몸소 팝스러운 작가는 ‘가구적 시선’에 대해 ‘팝의 서정성’이라 말한다.

남학현_재일교포호랑이_한지에 채색,
돌가루_140×200cm_2005
전통 채색화의 재료로 작업을 해온 남학현의 회화에서도 소재로서 장난감들이
등장한다. 작가는 장난감으로부터 회상되는 유년기의 기억과 같이 신기루처럼 일어나는 순간들을 포착하여 화폭 전체에 그 감흥을 담아낸다. 그의
표현방식을 살펴보자면 수많은 옅은 선들이 겹치어 하나의 풍경을 그려내는데 형상들은 그 안에서 드러났다가도 배경과의 구분 없이 통합된 분위기로서
다시 화폭 속으로 사라진다. 화폭으로부터 이미지가 포착되고 와해되는 순간들은 작가의 동적인 필력과 어우러져 동양화가 가진 기운생동의 현대적
접근과 그 가능성을 엿보게 한다.

최문석_U-topia_스테인리스스틸, 모터,
합성수지_120×160×60cm_2007
마지막으로 최문석은 기계문명에서의 인간의 소통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가장
보편적인 통신 수단인 핸드폰을 기반으로 한 관객과의 인터렉티브 작업을 선보인다. 작가의 기계에 대한 태도는 작품의 제목인 U-topia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는데, 차가운 금속성 재료와 기계 부품들은 작가의 휴머니즘적인 감수성으로 형상화되어 관객이 작품에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면 그
반응으로서 움직이게 된다. 이러한 움직임은 단순해보이지만 그 움직임을 살펴보면 사회 속에서 집단화된 인간의 행태와 개인이 직면하는 현상들을
패러디하는 등의 인간에 대한 작가의 예리한 시선이 해학적으로 반영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 이러한 다섯 작가의 작업은 탈권위적이고
자유분방한 세대의 문화적 기류를 반영하듯 기존의 양식에 몰두하기보다는 자신만의 관심사와 경험을 바탕으로 한 접근으로 각기 다른 개성과 실험적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개념적 접근뿐만 아니라 소재나 재료 면에서도 차별화되는 지점은 작품의 완성도를 기하고 있으며, 앞으로의 창작 활동에
기대를 품게 한다. Spring UP展에서 선보이는 다섯 작가들을 시작으로 갤러리 스케이프는 젊고 유망한 신진 작가들을 소개하고, 이들의 창작
활동과 국내외 전시활동을 지속적으로 지원하고자 한다. ■ 갤러리 스케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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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llel Spaces II
이태훈 사진展
2007_0228 ▶ 2007_0313
이태훈_Parallel Spaces II_100×211cm_시바크롬_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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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0228_수요일_06:00pm갤러리 한 기획초대전
갤러리 한 서울 종로구 경운동 66-4 B1 Tel. 02_737_8825 www.gallery-han.com
장난감 사진기의
시각적 호문쿨루스 ● 흐릿하다. 화면이 흔들린다. 무질서를 표방하는 듯 하지만 그리 소란스럽지는 않다. 악곡으로 치자면 푸가(fuga)
형식이다. 차라리 이미지는 기다림과 정적에 더 가깝다. 또한 이미지의 중첩과 분절을 통해 형상은 불분명하게 되고 잠깐이지만 그로부터 째깍거리는
시계소리가 들린다. 중첩된다는 것, 그것은 필름이 되감기는 소리, 사진의 기계적 속성을 드러낸다. 혹여 작가는 대상보다는 현재-파악하기조차
힘들어 조이스(James Joyce)가 ‘더할 나위 없이 미묘하고도 덧없는 순간’이라 불렀던-의 연속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닌가 싶다. 이 소리
덕분에 형상은 압축되지 못하고 보류되어 있다. 사실 압축되지 않은 것은 형상이 아니라 시간이지만, 이것이 이태훈의 사진에서 하나의 특성으로
부각된다. 하긴 엄밀하고 직설적인 형상이라 해도 늘 상상이 끼어들기 마련이다. 무엇보다도, 모든 형상은 시간과 개개인의 해석 없이는 불가해한
존재다. 작가와 관객이 동시에 만족하는 ‘바로 그 존재’, 다시 말해 ‘실재’는 없다. 작가와 관객, 각자의 경험과 시각적 판단 여하에 따라
비로소 형상의 존재가 규정된다는 말이다. 형상에 실재의 문제가 잠복해 있다면 형상이 당연히 그 적절한 위상을 회복하는 것 또한 필수적이다.
따라서 이태훈의 의도도 사진의 시간성과 관객을 통해 ‘실재’를 유용한 지표로 삼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실재를 불러 ‘존재 판단의
형상’이라 하는 것도 무방하겠다.

이태훈_Parallel Spaces
II_100×177cm_시바크롬_2000

이태훈_Parallel Spaces
II_100×177cm_시바크롬_2003
그렇다면 우리가 사진에서 의미하고자 하는 ‘바로 그 존재’는 동굴 벽에
비친 왜곡된 그림자에 의거해 대상의 진짜 형상을 보는 것, 즉 어떤 대상에 대한 단일한 범주의 영역일 뿐이다. 혹은 기껏해야 존재 판단의 가설인
데자뷰(dja-vu) 현상일 수도 있겠다. 여기서 사진은 존재 그 자체가 아니라 존재의 그림자를 포착하는 것이라는 혹자의 증언이 설득력을
갖는다. 이를 고려해 본다면, 실상 그 어떤 실체도 지시적이거나 유동적, 상대적이거나 시간적 대상으로는 존재할 지라도 고정된 절대적 표상으로는
인지되지 못한다. 우리가 절대적 표상으로 인지하는 것은 선입견내지는 착각에 속할지언정 진리의 영역은 아니다. 그렇다면 ‘바로 그 존재’라는 보편
개념은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 사진이 현재의 재현이나 기록이라는 것은 진실일까? 시간 내 존재인 우리는 정녕 ‘동일한 시각’으로 사물과 상황을
볼 수 있을까? 하지만 이런 질문에 답할 수 있는 보편적 개념과 일치하는 실재는 없다. 보편적 대상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보편적
하늘’, ‘보편적 나무’란 존재하지 않는다. 설사 어떤 현실이나 대상이 사진을 통해 의례적으로 살균과정을 거친다 해도 ‘보편적 실재’는 없다.

이태훈_Parallel Spaces
II_100×131cm_시바크롬_2004

이태훈_Parallel Spaces
II_100×203cm_시바크롬_2006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태훈에게 이 보편성은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그의
사진이 다가가고자 하는 것, 그것은 현실과 순간에 고무되는 것, 오직 현재 이외에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에게는 역설적으로 오로지
보편적이고 영원할 때에만 지속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태훈의 사진은 시작도 끝도 없으며, 중심도 변경도 없다. 모든 것이 중요하고 모든
것이 중요치 않다. 모든 것이 필요하면서도 불필요 하다. 그는 관객이 보고자 하는 것을 보게 하는 이미지를 만든다. 이는 관객을 속이거나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그의 사진은 관객의 선택 여하에 따라 제기되는 실재(the real)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분절되고
중첩되면서 우리에게 대상을 보는 여러 가지 방식을 제안하면서 재현의 의미를 고찰하게 한다. 이런 방식을 통해 그의 사진은 선택 가능한 영역으로
회생되면서, 도구적 의미의 중층으로 둘러싸이게 된다. 시간과 공간의 불규칙성 문제를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실재’에
대해 희망으로 점철된 시각적 파노라마에 대한 진술이다.

이태훈_Parallel Spaces
II_100×166cm_시바크롬_2007

이태훈_Parallel Spaces
II_100×135cm_시바크롬_2007
전통적으로 사진은 순간의 압축된 재현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이태훈의
사진은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어찌 보면 그의 사진은 ‘팽창된 현재’에 대한 재현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의 사진은 시간적인
구획을 지워 버리고 사진을 찍는 행위가 하나의 연속적인 현재 속에서 발생했다는 인상을 자아내기 위하여 형태가 연속적으로 반복된다. 이 반복
행위는 선의 우아함과 신비한 분위기를 연출하면서 의외로 실재와 유리되는 것 같기도 하다. 여기에서 오해가 발생할 수 있다. 우선 그의 사진이
디지털의 기술적 능력과 예술적 감각으로 조작된 속임수가 아니냐 하는 의문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실재와는 무관한 사진이 된다. 하지만
그의 사진이 어떤 조작 없이 어린이들이 갖고 노는 장난감 카메라(Holga)로 촬영된 것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왜 그가, 뉴욕에서
전문적인 사진 수업을 한 작가가 장난감으로 세계를 보고자 했을까? 그것은 직접적으로 현자의 돌은 아닐지라도 최하위 하부구조를 이루는
‘호문쿨루스(homunculus)’, 즉 기술에 의한 자연을 대변하는 것이다. 더불어 이 장난감 사진기는 오늘날 디지털 카메라의 기술에 비해
조작의 가능성에서는 거의 백치에 가깝다는 의미에서 아름다운 퇴행이다. 이쯤 되면 사진은 외견상의 현재가 아니다. 그의 사진은 현재와 팽창된 현재
사이의 이미지 속으로 빈번히 미끄러져 들어가는 보는 자들의 영역이 된다. ● 이렇듯 여러 가지 선택적 이미지를 매개하는 이태훈 사진의 강력한
힘은 실재와 재현에 동시적으로 관계하고 있다는 점에 근거한다. 우리가 애초에 알아차렸듯이 이 분절과 중첩의 이미지가 가지는 미덕은, 그것이
물리적인 실재의 부재가 부과한 걸림돌로부터 자유로울 수도 있으면서도 여전히 그 실재와의 관련성을 관객을 통해 주장할 수 있다는 데 있다. ■
유근오 ------------------------
이일우의 肖 像 展
이일우 사진展
2007_0228 ▶ 2007_0316
이일우_초상전_디지털 프린트_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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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0228_수요일_05:00pm작가와의
만남_2007_0308_목요일_03:00pm
문신미술관 기획초대전 협찬_HP_프린트 보다
관람시간 /
월요일~토요일_10:00am~05:00pm
숙명여자대학교 문신미술관 빛갤러리 서울 용산구 효창원길 52 르네상스 플라자 B1 Tel. 02_710_9134 www.moonshin.or.kr
이번에 선보이는 작업은
이일우가 2003년 이후 일관되게 진행해 온 Portrait 프로젝트 중 Untitled, Strandbilder에 이어 세 번째 발표하는
작업이다. 이 작업의 모티브는 정작 표현되어야 할 대상은 사라지고 작가 자신들의 셀프 포트레이트로만 채워지는 현대미술에서 초상의 경향에 대한
일종에 거부감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사진매체를 통해 표현되어지는 초상이라는 대상에 대한 근본적 물음과 매체를 통한 소통이라는 커다란
물음과 표현 가능성에 그의 작업이 집중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일우_초상전_디지털
프린트_100×100cm_2003

이일우_초상전_디지털
프린트_100×100cm_2004

이일우_초상전_디지털
프린트_100×100cm_2004
특이하게도 이일우의 작품에서 보여 지는 각각의 사람들은 한결 같이 사진 밖의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사진을 통해 보여 지는 이 단순한 시선처리는 작가가 사진속의 사람들을 바라보는 관자들과 소통하기 위해 사용한
일종의 사진적 장치다. 이일우는 작품 속 초상과 소통하고 또 그 초상은 관자들과 소통한다. 이것이 그가 작품들을 통해 시도하는 소통의
메커니즘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관자들이 그의 작업을 파악하고 나면 사진 속에 보여 지는 시선이 전달해 주는 정확한 답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초상이 갖고 있는 시선이 던져주는 문제에 대한 답은 관자들 개인이 풀어야 한다

이일우_초상전_디지털
프린트_100×100cm_2003

이일우_초상전_디지털
프린트_100×100cm_2004

이일우_초상전_디지털
프린트_100×100cm_2004
이러한 소통의 메카니즘만 보다면 초상전의 사진들은 단지 소통을 주제로 한 실험적인
작업으로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초상전에 보여 지는 대상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자화상이자 그들이 지닌 시선에서 느껴지는 아련한 감정이
작업을 보는 이들에게 전이되기 때문에 관자들에게 이해되는 메시지는 복합적이다. 그것이 이일우의 작업을 단순한 초상사진이 아닌 우리들의 자화상으로
여겨지게 하는 이유이다. ■ 이경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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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narian flood
박은하 회화展
2007_0221 ▶ 2007_0312
박은하_planarian-The Guest Ⅰ_캔버스에
유채_261×162cm_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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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0221_수요일_05:00pm진흥 New Artist 2007 선정작가
초대展
관람시간_10:00am~07:00pm / 일요일 휴무
진흥아트홀 서울 동대문구 신설동 104-8번지 진흥빌딩 1층 Tel. 02_2230_5170 www.jharthall.org
노랑, 빨강, 녹색, 핑크의
서로 다른 현란한 색채의 ‘플라나리아’는 화면전체를 휘감듯 사무실 구석구석을 누빈다. 비정형의 형태인 ‘플라나리아’는 화면 구석구석을 살아서
집어 삼킬 듯이 질서와 규격으로 짜여진 사무실 공간 이곳 저곳을 침투한다. 컴퓨터, 사무기기와 함께 잘 짜여지고 체계를 갖춘 현대사회는 저항할
수 없는 불가항력의 ‘시스템’의 실체로서 유지되고 있으며 현대의 인간은 이 시스템의 부속처럼 기계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

박은하_planarian-The Guest
III_캔버스에 유채_196×130.5cm_2007

박은하_Planarian II-The
Guest_캔버스에 유채, 아크릴채색_130.5×162cm_2006
정면으로 거부할 수 없는 거대한 공룡과도 같이
개개인의 삶을 감시하고 위협하는 현대사회는 현대인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자 피할 수 없는 실체인 것이다. 작가 역시 이러한 ‘메커니즘’속에
종속되어 있는 일부로서 극도의 피로와 고통을 호소하며 탈출구를 찾기에 이르는데 ‘플라나리아’라는 매개를 통해 ‘유년의 기억’과 ‘꿈’ 속으로
빠져드는 ‘퇴행의 방법’을 선택한다.

박은하_Planarian III_캔버스에
유채_196×130.5cm_2006

박은하_Planarian-The Guest
II_캔버스에 유채_234 × 61cm_2007
작가는 ‘환상’을 통한 ‘유희의 기억’을 되새김질 함으로써 질서와
틀에서 일탈을 경험하며 동시에 현대사회의 안정된 ‘시스템’에 의문을 던지며 작가의 상상력으로 그 ‘시스템’에 일격을 가하고 싶어한다. 상상의
세계가 허용되지 않고 유년의 아름다운 기억들이 망상으로 치부되어 버리는 무감각한 사회 곳곳을 침투하듯 어루만지며 보듬는 그만의 방식으로 심리적
위안을 얻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상상의 ‘플라나리아’는 기세가 있지만 평온한 듯이 보이지 않는다. 어디론가 끊임없이 흐르는 유기체적인
‘플라나리아’는 상상의 세계가 ‘현실’과 융화되지 못하고 표류하는 불안정한 갈등을 표출하고 있다.

박은하_planarian-The Guest
II_캔버스에 유채_234 × 61cm_2007

박은하_Planarian-Object Ⅳ_캔버스에
유채60.6×72.7cm_2007

박은하_Planarian-Object Ⅲ_캔버스에
유채_60.6×72.7cm_2007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가느다란 균형의 실은 극도의 긴장을 불러일으키며 팽팽하게
맞선 채 환상과 현실 사이에서 왔다 갔다를 반복하지만 결국에는 환상이 현실을 완전히 뒤덮을 수도, 현실이 환상의 침투를 남김없이 막아낼 수도
없는 모호한 밸런스를 유지하는 것이다.” 라는 작가의 말에서 ‘환상’과 ‘현실’의 괴리의 간극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은 채 팽팽한 긴장감으로
대립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어쩌면 그것이 숙명적인 현실일 것이다. 피할 수 없는 줄 알면서도 끊임없이 상상의 ‘플라나리아’를 현실 속에
침투시키며 현대사회의 모순과 일전을 벌이는 작가의 작업에서 안일하고 나태한 삶에 일침을 놓는 야성의 미덕을 발견하게 된다. 그의 작업이 쉽게
간과할 수 없는 무게와 진지함을 지닌 이유도 여기에 있다. ■ 구자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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