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loral Outing-꽃으로의 외출
김민규_김인영_김화현展 / painting
2008_0923 ▶ 2008_1014 / 일요일, 공휴일 휴관
김민규_순수하지만 공의로운 황제
2_캔버스에 아크릴, 금박_162×112cm_2008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관람시간 / 11:00am~06:30pm / 일요일,공휴일
휴관 금요일 11:00am~07:00pm / 토요일 11:00am~05:0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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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과
같은 체제에서 절대적 권력을 지닌 한사람의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유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민주주의적 신념이 이미 인류에게 뿌리박혀
있기 때문이다. 과거 왕이나 황제가 가졌던 권력은 18세기에 전 세계적으로 일어났던 시민혁명의 결과로 인해 권력자에게서 대중에게로 이양 되었다.
자유와 평등사상을 바탕으로 쟁취한 대중의 주권은 이제 가장 보편적이고 존중받는 가치의 산물이 된 것이다. 따라서 현대의 사회에서는 어떠한 인간도
다른 누군가의 지배를 받지 않으며 언제든지 자신의 의사를 표명할 수 있고 법적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자유로운 행동을 보장받는다. ● 이와
같은 현대적 신념은 보편적 관점에서 제도와 법에 의해 실현된다고 본다. 하지만 여기서 실제로 현대의 인간이 충분히 자유로운가? 아니, 과거
왕정이나 제정시대에 비해서 만이라도 좀 더 자유로워 졌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남는다. 특히 자유를 보장하는 제도와 법이 제 기능을 다
하고 있는지에 대한 회의는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 문제이다. 비록 법이 일관성을 가진다고 할지라도 법적용이 항시 공정한가의 문제는 한 시대의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확답을 제시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또한 자유를 보장하는 법과 제도가 자유로 인해 파생되는 ‘자연 상태(홉스가
지적하였던)’도 해결해야만 하지만 그 수위에 대한 끊임없는 이념적 논쟁과 갈등만 양산할 뿐 뚜렷한 해결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비록 근대의
자유주의는 독재자를 이겼지만 대중의 자유와 행복을 보장해야 하는 현대의 법과 제도가 그 취약성과 한계를 너무도 극명히 드러낸다. 이와 동시에
자유 경쟁체제가 낳은 자본주의적 욕망이 역으로 자유를 현저히 제약하고 있다. 이런 취약한 상황은 우리로 하여금 구조적인 문제에 대한 회의를 품게
하였고 결국 인문학자들은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표현을 사용하기에 이른다. 자유 민주주의에 대한 이와 같은 원론적인 회의에 대해 촘스키(Noam
Chomsky)는 파워 엘리트들의 독재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려는 음모론일 뿐이라고 일축하기도 한다. 하지만 현재의 구조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기에는 자유의 허용과 제약의 문제가 전혀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 또한 인간이 자유를 얻음으로써 정말 행복해졌는가에 대한 근본적
회의를 제기한 사례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절대적 권력에서부터 벗어난 인간이 과연 그만큼 행복해 졌는가에 대해 에릭 프롬(Erich
Fromm)은 자유가 인간에게 가져다 준 불안과 무기력을 괄목할 현상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인간이 자유를 얻음으로써 함께 경험하게 되는
고립감과 고독에 기인한 바가 큰데, 이 때문에 인간이 누리는 자유가 항상 행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오히려 자유가 인간의
정서적 보호막을 제거하고 군중 속의 고립을 유발시켜 자아의 공백 상태를 초래할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현대인은 언제든지 이러한 자유에서부터
도피하여 복종과 굴종에 향하려고 하는 경향을 보일 수 있다. 그것은 현대사에서 있었던 나치즘이나 파시즘에 대한 대중적 추종과 무관하지 않다.

김민규_민주적이지만 정의롭지는 않은 황녀_캔버스에
아크릴, 금박_162×112cm_2008
존 듀이(John Dewey) 또한 에릭 프롬과 마찬가지로 자유에 대한
인간의 나약하고 변덕스러운 태도를 지적한다. 그는 민주주의적 가치에 대한 위협이 비단 전체주의를 표방하는 독제세력에 의해 가해지는 것이 아니라
권위와 규율에 의존하고자 하는 우리 자신의 태도 속에서 형성된다고 주장한다. 제도와 가치 속에서 신앙으로 군림하는 민주주의적 자유의 개념이,
사실상 우리 자신의 심리적 본성 속에서 고독과 무기력을 유발하는 인자로 격하될 수 있음을 시사한 것이다. 이러한 본성은 절대적인 권력자에 대한
대중적 향수와 연민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 인류는 비록 수세기동안 자유를 위해 투쟁하여 왔지만 인류가 그와 같은 일관성을 계속 유지하여 왔던
것은 아니다. 가장 급진적으로 구체제를 혁파했던 민족이 다시 왕정복고로 회귀하였던 사례를 비롯하여 현대의 전체주의가 대중의 동의를 업고
민주정권을 붕괴시켰던 경우 등을 보더라도 대중은 스스로에게 부여된 자유를 항상 향유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자유에 대한 이러한 양면적인 반응은
최근의 전형적인 민주주의 체제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민주적인 의식이 확고하다 할 만한 현대의 대중들은 이익을 제한하는 규제에 적극
반발하다가도 공권력이 실추되었다 싶으면 엄정한 공권력을 강하게 요구한다. 이익상 반대되는 집단들에 대해 강력한 공권력의 행사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대중 심리는 자연스럽게 전체주의나 절대 권력에의 추종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회 정치적 동향과 더불어 에릭 프롬이
지적한 인간의 ‘자유에서의 도피’ 경향은 ‘자유’에 대한 우리의 판단에 혼란을 가중시킨다. ● 나의 작품은 자유에 대한 인간의 순수한 신념과
자유의 이면에 발생하는 강제의 필요성 사이에서 과연 이상적인 접점을 찾을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과 관련이 깊다. 절대권자를 상징하는
어진(御眞:동양의 전통적인 왕의 초상)의 형태는 자유를 회피하여 강한 대상에게 의탁하고자 하는 인간의 심리와 연결되기도 하지만 자유에 대해
정의롭고 양심적인 제제를 가하는 이상적인 권위의 상(像)을 의미할 수도 있다. 어린아이의 순수함이 공의와 양심이라는 거룩한 용포(龍袍)를 입고
폭력과 아집이 아닌 원칙과 진실의 왕홀을 쥔다면 우리가 그 권위를 인정할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그 권위의 주체는 인간이 아닌 ‘개념’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자유에 대한 미흡한 태도로 인해 자아의 공백을 초래한 현대인이 쉽게 빠질 수 있는 권위주의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류가 순수한 의지로 쟁취한 자유를 적극적으로 향유하기 위한 명분이다. 이 명분은 하나의 물음에 대한 답에서 성립할 것이다. 정의와
원칙이 서 있는 자유를, 또는 민주적인 가치를 수호하는 권위를 어떻게 실현하겠는가가 그 물음이다. 나의 작업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비롯되었다. 학자나 전문가적인 입장이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으로서, 또 민주국가의 국민으로서 마땅히 고민하고 추구해야할
문제를 내 나름의 방식으로 고민하는 것이다. ■ 김민규

김인영_A
Look-1_캔버스에 애나멜_160×80cm_2007

김인영_A Look-2_캔버스에
애나멜_160×80cm_2007

김인영_A Look-3_캔버스에
애나멜_160×80cm_2007

김인영_A Look-4_캔버스에
애나멜_160×80cm_2007
전신(傳身) ● 동양화에서는 인물화에 있어 전신(傳神), 즉 인물의
외양 뿐 아니라 정신까지 드러나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어 왔다. 그림 속의 몸은 정신을 전달하는 도구이기 때문에 관람자는 몸만을 따로 떼어놓고 볼
수 없다. 형형한 눈빛이 인물의 기개를 잘 나타내는지는 논의될 수 있으나, 눈이 큰지 작은지, 나아가 아름다운지 추한지는 문제되지 않는다. ●
이와 비슷한 예는 서양미술에서도, 특히 남성을 재현한 작품에서 흔히 발견된다. 몸은 주인공의 지위·권력·지성·인품 등을 먼저 드러내려고 하며,
몸이 몸으로서만 보이는 것을 어떻게든 피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작품 속 남성은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바를 보여줄 뿐 작품 밖 관람자의 요구는
철저히 외면한다. ● 이런 작품들을 대할 때 나는 무력함을 느낀다. 학자의 깊은 지혜가 전해지는 그림도 좋고 영웅의 위풍당당함이 드러나는 그림도
좋지만, 그들의 위대함은 나의 취향에 부합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림 속 인물에게 있어 그림 밖의 나는 어떤 사람이어도 상관이 없고,
내가 무엇을 보고 싶어하는지도 상관이 없다. 아예 내가 그 자리에 없어도 상관이 없다. 이러한 시각경험은 나의 욕망과 기대가 무시되는 느낌을
주며, 나의 존재 자체도 마치 없는 듯이 취급되는 느낌을 준다. 정신 또는 인격과 분리되지 않은 남성 신체는 시선의 온전한 대상이 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관람자를 시선의 온전한 주체로서 인정하지 않는다. 나는 ‘시선을 가하는 자’로서의 내 자리를 다시 찾고 싶었다. 그래서 오로지
나의 시선을 위해 존재하는, 내가 보아주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남성 신체의 이미지를 제작하기로 하였다.

김화현_고매한 결합_장지에
채색_120×105cm_2008

김화현_胸中萬華_ 장지에
채색_137×55cm_2008
‘보이기 위한 몸’을 효과적으로 구사하기 위하여, 나는 이러한 신체가 미술사를 통해
어떻게 표현되어 왔는지를 공부하였다. 필요에 따라서는 원전이 있는 자세를 내 작품에 그대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흉중만화』에서는 신윤복의
「미인도」를, 『군자지교』에서는 카라바지오의 「악사들」을 차용하였다. ● 나의 그림 속 남성 신체는 몸 이외의 다른 것을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혹 인물의 정신세계를 암시하는 요소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몸을 더 매력적으로 돋보이게 하는 소도구로서만 사용된다. 몸 자체로서만
드러난 몸은 보는 이의 취향과 욕망에 따라 평가의 대상이 되며, 이 때 시선은 권력으로서 행사된다. 온전히 대상화된 신체를 그림으로
옮기는(傳身) 행위는 나로 하여금 나의 취향과 욕망이 긍정되고 존중되는 과정을 눈으로 확인하게 해 준다. 내가 보고 싶은 것, 내 눈에 보기
좋은 것은 무엇인지 찾아 나가고 그것을 가시화함으로써, 시선의 주체로서의 내 위치가 확보되는 시각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
김화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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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언어-Venti Logos
윤은자展 / YOONEUNJA / 尹恩子 / photography
2008_1015 ▶ 2008_1021

윤은자_경복궁_잉크젯 프린트_71×103cm_2007
초대일시_2008_1015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하절기) / 10:00am~06:00pm(동절기)
갤러리 나우_GALLERY NOW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2-13번지 성지빌딩 3층
Tel. +82.2.725.2930
www.gallery-now.com
허공의 메아리를 찾아서 ● 바람과 천 그리고 색과 공간이 만드는 수많은 허공의 형상들은 첫 눈에 어디서 많이 본 우리 고유의 것들 말하자면 하얀 소복, 색동저고리, 솜이불, 댕기 등 사라져 가는 우리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특히 작가는 허공에 굽이치는 형상들은 한국의 전통 춤인 승무에서 하늘을 향해 순간적으로 길게 솟구치는 장삼자락에서 연유되었다고 말한다. 장심자락의 미묘한 순간포착, 그것은 우리 고유의 것에 대한 또 다른 뉘앙스를 암시하는 결정적 찰라-순간이 될 것이다. 게다가 의도적으로 한국인의 보편적인 정서로서 색동과 황토 그리고 단층의 오방색은 더욱 더 설명할 수 없는 우리 고유의 한(恨)을 암시하고 있다. ● 그러나 관객의 입장에서 이러한 형상들은 단순히 승무의 춤사위로만 해석되지 않는다. 이상하게도 형상들은 관객의 모든 상상력을 무력화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단번에 상징적으로 “한국의 전통”이라는 모호한 관념 이외 그 어떤 구체적인 것도 지시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컨대 초저녁 어색한 인공조명으로 희끄무레한 하늘에 솟구친 야광 천들은 갑자기 보는 이로 하여금 온 몸에 전율을 느끼게 하면서 전혀 예견치 못한 어떤 설명할 수 없는 공포를 가져다준다.

윤은자_예술의전당_잉크젯 프린트_110×156cm_2007

윤은자_이승복동상_잉크젯 프린트_71×97cm_2007

윤은자_청보리밭_잉크젯 프린트_108×152cm_2007
작가는 사진의 공간구성에서 관객의 긴장을 유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유동과 부동의 조화, 인공과 자연의 긴장, 물질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것의 혼용, 그리고 순간과 지속의 대립 구조를 설정하고 있다. 특별히 허공에 던져진 상부의 주제와 하부의 배경 사이에서 드러나는 의미의 병치는 전체적인 작품의 극적인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다. 예컨대 큰 공간을 차지하는 하늘 아래 배경으로 나타나는 산 능선과 청 보리밭, 한강의 밤, 예술의 전당, 전통 초가집, 남대문, 경복궁, 서울역, 민통선 등은 단순히 한국의 자연과 전통이라는 상징적인 것이 아니라 관객 각자의 경우로 재구성되고 재해석되는 일종의 제유법적인 효과를 가진다. ● 이러한 문맥에서 볼 때 바람과 하늘, 색과 선이 만드는 허공의 이미지들은 단순히 한국의 자연과 전통 미를 예찬하는 과시적인 웅변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은밀한 욕구와 기억이 무의식으로부터 의식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위장된 기억의 단편들 즉 작가 자신의 무의식에 부유하는 과거 기억의 인상들이다. ... 그것은 어두운 방을 밝게 환히 비추는 빛과 같이 곧 응시자 모두의 공통된 애환과 애착으로 전이(轉移)되어 갑자기 작가의 특별한 이미지가 응시자의 경험적인 공간에서 아무 이미지로 환원된다. 이럴 경우 이미지들은 조건반사와 같은 무기표의 신호로서 관객의 심연에 내재된 기억을 자극하는 자극-이미지(image-stimuli)임과 동시에 우리 모두의 희미한 기억의 흔적으로서 반향 없는 허공의 메아리가 된다. ■ 이경률

윤은자_초가_잉크젯 프린트_71×96cm_2007

윤은자_한강_잉크젯 프린트_71×84cm_2007

윤은자_해미읍성_잉크젯 프린트_71×97cm_2007
이 사진들은 ‘사진 찍는 다는 행위’와 사진철학의 한 부분인 ‘결정적 순간’에 대한 주관적인 관점을 연구한 이미지들이다. 우리 앞에 무엇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은 우리의 시선을 통해서 대상을 인지한다는 의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진을 찍는 다는 것은 대상과 우리와 일정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을 말한다. 이 관점으로부터 한국의 미가 지닌 대상에 사진기의 파인더를 통해 그것의 멋을 관찰한다는 것이다. 이 때 사진기의 파인더에 잡힌 대상은 문화 그리고 역사적으로 상징화된 한국의 풍광이다. ● 상징화된 대상 앞에서 본인은 전통적인 다큐멘터리 측면에서 피사체의 실재를 있는 그대로 촬영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의 퍼포먼스를 통해 또 다른 의미의 ‘결정적 순간’을 재현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결정적 순간’의 단어적인 의미는 브레송의 철학과 동일하다. 그는 공간을 선택하고 시간이라는 절대적 순간을 놓치지 않고 일순간에 벌어지는 상황을 필름의 표면에 고정시키는 것이다. 본인의 ‘결정적 순간‘은 브레송의 것과 맥을 같이하고 있으나, 그것의 차이는 본인이 연출이라는 행위를 통해서 한 순간을 포착한다는 것이다. ● 구체적으로 언급하자면 브레송의 ‘결정적 순간’이 모더니즘적 사고였다면 본인이 의도하는 ‘결정적 순간’은 후기 모더니즘적 성격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시각적 사고의 경험은 한국의 전통적인 춤의 백미인 ‘승무’로부터 기인되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승무’의 절정은 장삼의 순간적인 미묘한 움직임이다. 그 순간적인 움직임이 사진기의 셔터 스피드에 의해 고정되었을 때, 그 이미지는 ‘결정적 순간’에 의해 한국의 미로 포착되는 것이다. 한국의 멋을 재현하기 위해 1차로 공간을 설정한 후 그 공간과 어우러진 색을 지닌 천을 결정한다. 그 다음 바람의 힘을 빌려 그 천을 허공에 뿌려 천의 형상이 셔터 찬스에 의해 공간과 완벽한 조화를 이룰 때 하나의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 다시 말해서 대상과 색 그리고 천의 형상이 완벽한 조화를 이룰 때 하나의 이미지가 재현되는 것이다. 이 때 바람의 방향 그리고 본인의 연출 행위, 푸른 하늘을 향해 천을 뿌리는 퍼포먼스를 통해서 한국의 미가 지닌 아름다움이 창조되는 것이다. 작품에 재현된 바람의 의미는 한 지역에 존재했던 바람의 한 형태이며, 이 바람의 형태가 곧바로 배경과 어우러진 한국 자연의 멋으로 묘사되는 것이다. ● 또한 본인의 사진에서 화면 구도는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자리하고 있다. 왜냐하면 바람에 의해 색을 지닌 천의 형상이 대상과 조화를 이루려면 충분한 공간이 확보되어야 하늘 공간에서 그것이 상징적인 ‘바람의 언어’로 탄생되기 때문이다. 색을 지닌 천의 선택은 일반론적인 측면에서 한국인의 보편적인 정서에 기인한 색채가 지닌 상징성을 바탕으로 결정되었다. 결국 사진기의 파인더에 잡힌 자연, 색을 지닌 천 그리고 바람을 통해서 한국의 문화가 지닌 상징성을 ‘바람의 언어’로 시각화하는 작업이다. 이 사진들은 포스트모더니즘 관점에서 연출이 가미된 또 다른 의미의 ‘결정적인 순간’에 의해 재현된 한국의 멋이며, 한국의 미이다. ■ 윤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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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 inner monologue
남진숙展 / NAMJINSOOK / 南振淑 / painting
2008_1015 ▶ 2008_1021

남진숙_A full moon_캔버스에 유채_116.8×91cm_2007
초대일시_2008_1015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주말_11:00am~06:00pm
미술공간 현_ARTSPACE HYUN
서울 종로구 관훈동 106번지 창조빌딩 B1
Tel. +82.2.732.5556
www.artspace-hyun.co.kr
"어느 날 눈을 떠보니 너무 어두워서 주위를 가늠할 수 없어 답답한데, 몸조차 마음대로 움직여 주질 않는다. 문득 돌아보니 지나온 길은 자취 없이 사라지고 발자국조차 남지 않았다. 지구가 사라진 것인지, 단지 어둠에 싸여 사방(四方) 분간이 안 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때! 무언가 움직임이 보인다. 저 멀리 희미하게 어른거리는 것은 과연 빛일까...?"

남진숙_Dryness_캔버스에 유채_72.7×60.6cm_2008

남진숙_夢 中 人_캔버스에 혼합재료_162.2×130.3cm_2008

남진숙_Harden into stone_캔버스에 유채_72.7×60.6cm_2007
현실과 비현실, 희망과 절망의 경계 어디쯤에서 나는 어쩌면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평온한 휴식을 원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세상 어디에도 속할 수 없을 것 같은 절망적인 현실은, 나를 이루고 있던 모든 것을 뒤흔들어 더 이상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막막한 공간 속에 나를 던져 놓았다. 그리고 모든 것이 사라진 그 자리에서 할 수 있었던 최초의 몸짓은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과 마주하는 것뿐이었다. 나는 그렇게 나를 표현할 수밖에 없었고, 그림을 그리는 그 시간은 세상을 잊고 시간을 잊고 심지어 나 자신 조차도 잊을 수 있는 유일한 위안(慰安)의 시간이었다.

남진숙_여자, 정혜_캔버스에 유채_72.7×53cm_2007

남진숙_Shadow-esse_캔버스에 혼합재료_116.8×91cm_2008

남진숙_미래와의 조우(遭遇)_캔버스에 유채_116×80.3cm_2007
지리멸렬한 삶에 쫓기어 서게 된 지금의 이 자리에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 돌이켜 생각해보면 매년 봄을 맞이할 때마다 느껴지는 자연의 신비로움만큼이나 오묘하다. 그래서 다만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필연으로 얽힌 연기(緣起)의 결과일 뿐”이라는 그 말만이 지금의 나를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 거울을 본다. 옳게 왔으며 옳게 가고 있는가? 바람은 차고, 그림자는 길다. ■ 남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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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의 세계...
문준호展/ MOONJUNHO / 文俊浩 / painting
2008_1015 ▶ 2008_1021

문준호_Rock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유채_91×73cm_2008
초대일시_2008_1015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영아트갤러리_YOUNGART GALLERY
서울 종로구 관훈동 105번지 2,3층
Tel. +82.02.733.3410
www.youngartgallery.co.kr
나의 작업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것은 사람들의 욕망과 환상, 유머와 쾌락등 내면적 세계를 밖으로 표출하고자하는 자유로움이다. 그 자유로움을 밝고 풍부한 색채에 담아 선으로 표출했다.
인간들은 이중적인 감정과 성격을 색에 감추며 겉으로는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그 색들은 제각기 아름다우며 어지러울 만큼 화려한 색으로 카멜레온처럼 변화한다. 그래서 이 현란한 세상을 색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우리들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자신을 가꾸며 자신의 얼굴표정 또한 바꾸려 애쓴다. 단 10분도 같은 표정을 지을 수 없는 우리는 눈, 코 , 입을 셀 수 없이 움직이며 늘 무언가를 지시하고 있다.

문준호_아담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유채_190×130cm_2008

문준호_이브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유채_190×130cm_2008

문준호_이브의 유혹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유채_162×130cm_2008

문준호_이브의 유혹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유채_91×73cm_2008

문준호_이브의 유혹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유채_110×190cm_2008

문준호_축복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유채_91×73cm_2008
나의 작품에는 여러 등장인물이 있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각자 가지고 있는 희노애락을 얼굴에 담아내고 있고, 그 형태는 추상적이며 색으로 덮여 있지만, 그 내면의 세계는 얼굴에 모두 표출된다. 자유로운 그들만의 몸짓은 반복되는 듯한 형태에 순간순간을 나타낸다. ■ 문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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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 경계-The final frontier
나형민展 / NAHYOUNGMIN / 羅亨敏 / painting
2008_1015 ▶ 2008_1021

나형민_Exit from somewhere_한지에 토분, 채색_70×100cm_2008
초대일시_2008_1015_수요일_06:00pm
본 전시는 서울문화재단 젊은 예술가지원(Nart 2008) 선정 사업입니다.
관람시간 / 10:30am~06:30pm
노암갤러리_NOAM GALLERY
서울 종로구 인사동 133번지
Tel. +82.2.720.2235
www.noamgallery.com
‘경계에 서있는 풍경’ ● 동양의 산수화가 당대의 우주자연, 삶의 공간에 대한 이해와 해명, 물음에 대한 도상화였으며 동시에 하나의 이상향으로서의 유토피아·도원경을 제시하는 그림이었다면 그것은 오늘날 더 이상 가능하지 않아 보인다. 공간이 바뀌었고 삶의 조건 역시 달라졌기 때문이다. 더 이상 선인들처럼 산수 속에서 살며 그 산수·자연을 흠모하고 그곳으로 귀의하려는 욕구 대신에 도시 공간 속에서 적극적인 생의 욕망을 실현하고자 한다. 자연을 대신해 도시가 실질적인 삶의 조건이 되었고 그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제 도시에 낙원을 실현하고자 하며 그 욕망은 좀 더 ‘업그레이드’ 되면서 갈수록 명품화와 고급화로 치닫고 있다. 여기에는 매스미디어와 광고, 이미지 전략에 힘입은 바 크다. 그런 의미에서 도시는 결국 이미지다. 이미지이기에 그것은 허구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또한 여전히 자연은 도시의 대척점에 위치하면서 도시인들의 황폐하고 스산한 마음을 위로하고 진정한 삶의 여유로움을 제공해 줄 수는 있지만 자연 자체가 대안이 되지는 못한다. 이미 우리의 삶은 도시에 길들여져 있고 그 도시는 더욱 팽창하고 번성해가기만 할 뿐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도시가 인간다운 삶이 가능한 곳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 돌이켜보면 모든 산수화·풍경화에는 당시 사람들이 품고 있던 유토피아에 대한 믿음들이 서려있다. 도시공간 역시 현실 공간에 지상의 유토피아를 실현하려는 욕망 아래 가설되었다. 그러나 자연을 대신해 그 도시가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의 유토피아를 실현해준다고 믿기는 어려워졌다. 따라서 도시풍경을 그리는 작가들에게 그 도시는 좌절된 유토피아의 꿈, 허구적인 가짜 낙원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나형민_Stairway to Heaven_한지에 토분, 채색_200×640cm_2008
나형민은 자신이 살고 있는 현재의 도시풍경을 그린다. 그곳은 한국사회의 보편적인 풍경, 일상적인 도시풍경이다. 그 풍경은 또한 특정한 장소의 재현이라기보다는 작가의 관념 속에 자리한 도시, 현실풍경이미지다. 그는 “도시란 무엇인가, 우리를 둘러싸고 이 현실풍경은 어떤 것일까”를 그림 속에서 질문한다. 마치 산수화가 우주자연의 이치를 규명하고 그 공간을 지배하는 법칙에 대해 사유하는 그림으로서 기능했다면 그에게 도시풍경화는 자신의 삶의 이루어지는 이곳에 대한 해명의 성격이 강해 보인다. 그는 자신이 거주하는 현재의 공간, 풍경을 내려다본다. 관찰한다. 마치 영화 ‘베를린천사의 시’의 첫 장면에서 천사가 도시를 내려다보듯, 고담시를 내려다보는 배트맨처럼 말이다. 혹은 번화한 파리를 거닐던 벤야민이나 아니면 도원경을 꿈꾸며 산수를 소요하고 와유하던 옛 선비들의 동선을 연상시킨다. 그는 산수 대신 이곳의 현재 풍경을 다룬다. 그곳을 소요하고 그로인해 떠오른 단상과 느낌을 이미지화한다. 그것은 생각의 도상화이자 느낌의 구조화다. 그는 이런 저런 풍경의 편린을 모아 자신이 보고 느꼈던 도시·현실풍경에 대한 하나의 텍스트를 기술·‘일러스트’한다. ● 그런데 그가 기술하는 이 도시, 현실풍경은 다소 비관적이다. 도시는 가짜 환상으로 모조된 곳이다. 도시는 수많은 이미지, 기호들로 뒤덮여있다. 그 이미지들은 일종의 유토피아를 시각적으로 확인시켜준다. 그러나 그 유토피아는 동시에 어디에도 없는 ‘유토피아’에 다름 아니다. 도시는 영속성보다는 일시성의 연속이다. 그 시각적 컨텍스트는 연속적인 전체가 아닌 다양한 조각으로 이루어진 콜라주로 파악된다. 혼돈과 일시성, 전체성을 함축하는 관료적 도시모델(통일된 전체)에 의한 지속적인 파괴와 자본가의 실용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자율성에 의해 생성되는 비이성적이고 파편화 된 곳, 그곳이 바로 이 도시공간이다.

나형민_경계에 서다-무지개언덕_한지에 토분, 채색_115×160cm_2008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왜 도시에 기거하고 있고 도시의 삶을 공경하는 것일까?..실체적인 도시의 모습이 아닌 이상화된 도시 이미지를 동경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도시의 가치가 ‘효용가치’가 아니라 인간의 욕구를 채워주는 상징적 기호와 이미지에 의해 가치가 결정되는 ‘교환가치’로서 도시의 상이 결정되기 때문이다...우리를 둘러싼 도시의 가상적 기호와 이미지들은 도시의 실상을 실체로부터 분리시키고, 그것들을 스크린 표면 위에 이상적으로 재포장함으로써 도시의 현실을 간과하게 만든다. 즉, 오늘날 도시 이미지는 산수화의 관념화, 이상화와는 달리, 리얼리티 자체가 되기도 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사실보다 더 사실적으로 잘 구성하기도 함으로써 실제적인 도시를 대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시는 보다 더 현실적인 ‘하이퍼리얼리티가 되어 현대인들에게 보다 현실감 있게 다가온다...그러므로 도시는 가고 싶고, 보고 싶고, 기거하고 실은, 즐기고 싶은 향유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그럼으로써 기의와 기표로서의 산수화 산수화의 전통적인 기호 의식은 붕괴되고 그 자리를 현대 도시의 이미지가 대체함으로써 산수화가 제시하였던 도원경의 역할을 도시의 가상성이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나형민)

나형민_경계에 서다1_한지에 토분, 채색_115×160cm_2008
그림 속에는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도시풍경이 둥실 떠있다. 구름이 뭉개뭉개 피어오르고 더러 새들이 날아간다. 덧없이 사라져가는 순간의 모습 같기도 하고 여유롭고 평화로운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한다. 작가는 구체적인, 특정한 장소를 그렸다기보다는 도시를 대변하는 혹은 현재의 이곳 풍경을 상징적 이미지로 연출하고 있다. 그 풍경은 하늘을 새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달처럼, 비행접시처럼 떠있고 부양되어 있다. 수평으로 자리한 그 풍경은 지극히 건조하고 담담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렇게 떠있는 모습이 다소 위태롭기도 하고 불안하고 찰나적인, 안타까운 생의 거주공간을 연상시킨다. 그런가하면 수평으로 자리한 적조한 풍경은 공허하면서도 출구 없는 도시풍경, 현실풍경을 암시한다. 그러나 현실과 환상이 기이하게 경계를 맞대고 있는 이 풍경은 단지 도시에 대한 비관적 인식으로만 기울거나 도시가 제공하는 유토피아에 함몰되는 데서 벗어나 그 사이, 경계에서 진동한다. ● 우리가 거주하는 일상적인 도시풍경 혹은 한적한 어느 풍경을 잡아내고 있는 이 그림은 황토빛으로 적셔져있다. 모필을 공들여 발라나간 흔적은 황토색 물감을 수묵처럼 다루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모노톤으로 조율된 현실풍경은 강렬하게 빛나는 파란 하늘과 어울리는 듯 하면서도 꽤나 이질적으로 위치해있다.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이나 말이다.

나형민_경계에 서다2_한지에 토분, 채색_130×160cm_2008
빽빽한 건물과 간판, 박제처럼 자리한 나무가 몇 그루 서있는 적조한 풍경에는 인적이 부재하다. 사람이 지워진 풍경은 순간 비현실감을 안긴다. 비근한 도시의 골목길과 계단, 주택단지, 그리고 빌딩과 간판들이 가득한 풍경은 조합된 이미지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사람들이 다 떠나가 버린 바닷가에 폐허처럼 방치된 허름한 건물도 등장한다. 그 건물은 ‘출입구’라 쓰여진 문구를 각기 달고 도열해있거나 ‘무지개언덕’이라 쓰여진 간판을 명패처럼 달고 있다. 그 문구가 도시 혹은 공간에 대해 사람들이 욕망하는 실체를 직접적으로 발설한다. 도시는 그런 문구와 이미지로 가득하다. 전국의 모든 도시의 입구에는 ‘가장 살기 좋은 도시’란 문구를 기념비적으로 달고 직립해있다. 수사(레토릭)가 현실을 대체하고 허구가 실체를 뒤덮는다. 도시는 그런 의미에서 거대한 이미지다. 도시는 너무 많은 이미지들과 볼거리들로 흘러넘친다. 아울러 무수한 활동들이 전개되고 지칠 줄 모르는 욕망과 소비와 증식이 자가 발전적으로 생성되어 간다. 규범도 질서도 취향도 없는 이 ‘정체성 불명’의 정체가 현재 도시의 초상 같다. 그래서인지 이곳에서 사는 이들은 자연스레 도시란 공간의 모습을 제대로 보고 싶다는 욕망이 인다. 도시를 거닐며 이곳을 새삼 다시 본다. 그래서 작가는 도시를 어슬렁거린다. 그는 하염없이 종이를 소비하면서 도시가 버린 스펙타클을 주워 모은다. 도시의 모습에서 자신의 욕망과 감각, 상실과 아픔을 본다. 자신의 상처를 만난다. 발터 벤야민의 말대로, 그는 ‘넝마주이’다. 그러나 바로 그 넝마와 같은 것들 속에 무언가가 있다. 그것에 도시의 성질, 인간들의 본성, 우리의 시선 등이 어지러이 얽혀있다. 그렇게 얽힌 실타래를 그림으로 하나씩 풀어내고자 한다. 대도시라는 새로운 공간은 그 자체는 벤야민의 지적처럼 하나의 커다란 “도서관”이며, 더 나아가 현실을 반영하는 하나의 커다란 “거울 도시”와 같은 역할을 한다. 작가는 도시가 결국은 커다란 판타지 이미지에 머물고 있음을 깨닫는다. 진정한 유토피아는 이 지상도시에 가설되기 어려울 수도 있을 것이다. 대신 그는 그림 안에서 우리가 미처 체험해보지 못한 미지의 공간에 대한, 어떤 경계를 넘나드는 환영, 예술적 체험을 안기는 한편 현대인들에게 공간의 정체성에 대한 환기를 불러일으키고자 한다.

나형민_Falling to Heaven_한지에 토분, 채색_174×135cm_2008
그의 그림은 일종의 다큐멘터리적이고 분석적인 힘을 갖고 있다. 그 이미지는 우리가 생각하는 도시와 실제 몸으로 겪고 있는 도시 사이의 간극을 알고자 하는 욕구의 산물이다. 그가 본 서울(나아가 한국의 모든 공간)의 초상, 그렇게 발견하고 체득하고 응시해서 재현한 이 그림에 들어와 박힌 공간은 우리로 하여금 익숙하고 낯익은 공간을 새삼 낯설게 바라보게 한다. 그 거리 사이로 이상한 의문과 기이한 생경함이 서식한다. 다시 내 삶을 되돌아보고 그 삶을 추동시키고 흡입해내는 공간을, 공간을 구성하는 모든 것들을 그리고 그 공간의 이면까지도 ‘다시 보게’ 한다. 그림의 힘은 그 자리에서 소리 없이 부풀어 오른다. ■ 박영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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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OM
서금앵展 / SEOKEUMAENG / 徐錦鶯 / painting
2008_1015 ▶ 2008_1021

서금앵_Room#8_캔버스에 혼합재료_130.3×162.2cm_2008
초대일시_2008_1015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6:30pm
이형아트센터
LEEHYUNG ARTCENTER
서울 종로구 관훈동 21번지 인사아트프라자 4층
Tel. +82.2.736.4806
우리는 공간 속에 존재한다. 각 공간들은 그 나름대로의 쓰임이 있고 그것들의 존재적 의미가 있지만 사람들의 선험적 경험에 의해 다른 해석을 하기도 한다. ● 공간 속 사물들은 관객의 관점에 의해 주관적으로 의미가 부여된다는 것을 전제로 하였으며, 우리의 일상적인 공간이 갖고 있는 다양한 의미를 함축하여 연출함으로 일상적 공간을 예술적 체험으로 새롭게 인식하는데 있다. ● 일상공간이란 문자 그대로 ‘매일’, ‘날마다’를 뜻하는 공간이다. 아침에 눈을 뜨고 저녁에 잠자리에 든다거나 몸을 씻고 식사를 하듯이 반복적이고 연속적인 행위들로 채워진 공간이다. 그러나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일상공간의 중요성과 그 가치를 인식하는 것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바로 일상 공간 안에 일어나는 반복성, 습관성, 당연성 때문에 그것이 일상 공간 안에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의식에 중요하고 특별한 것으로서 파고들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일상은 모든 사람들의 ‘생명의 장’이지만, 또한 일상은 숨어 있다. 일상이 사람들의 망각의 그늘에서 시들지 않고, 진정한 생명력이 넘치는 시간과 공간이기 위해서는 일상을 사는 것으로 족하지 않고, 일상을 ‘보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서금앵_Room#1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3×193.3cm_2008

서금앵_Room#2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3×193.3cm_2008
본인은 우리를 밀접하게 둘러싸고 있는 일상적 공간들의 의미를 인식하고 또한 새롭게 부여하여 그 공간에서 심리적으로 느껴지는 개인적인 공간을 서술적으로 표현하였다. 공간 안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 그 공간에서 창조적 활동을 위해 어떤 준비를 했고 어떤 사고를 했는지, 그 흔적을 재현함과 동시에 공간 속 공기의 온도와 기류마저도 그림 속 공간에 베어들게 하는 것이다. 일상의 경험을 통해 얻어진 이미지는 현실적인 요소와 상징적인 요소를 가지고 단순한 복제로서가 아닌 독자적인 정신으로 화면에 여과되어 표현하였다. 이처럼 일상 공간의 부분이나 전체를 선택하여 이야기하듯이 서술함으로서 친숙함과 동시에 새로움을 부여하는 것이다.

서금앵_Room#3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45.5×112.1cm_2008

서금앵_Room#4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45.5×112.1cm_2008
특별해 보이지 않는 일상생활 공간에 시선이 머물고 주체가 머물렀던 그 공간을 누군가 멀리서 또는 가까이서 바라보게 된다. 실제 공간 속에서 물체는 선택되어지고 놓여지지만 존재의 흔적으로 그 의미를 획득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공간은 곧 인간의 흔적을 담는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고 그러한 흔적으로 인해 존재성에 대해 의문의 소지를 갖게 된다. 일상공간을 보는 타자에 대해 조심스럽게 제시하고 존재자가 없는 존재, 존재자와 타자의 관계도 생각해 본다. 바라보는 시선이 주체가 아닌 타자의 시점으로 존재자가 없지만 흔적이 남은 공간을 타자가 바라보는 관점으로 그 속에 내포되어진 의미를 전달하고자 한다. 즉, 존재의 의미, 타자와 타인, 타자적 응시를 염두에 두고 장면을 선택하고 구성하는 것이다.

서금앵_Room#5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16.8×72.7cm_2008

서금앵_Room#6_캔버스에 혼합재료_116.8×72.7cm_2008
본인이 작품을 통해 자아와 타자와의 관계를 생각해보고 개인의 가치와 타자에 대한 책임을 의식하면서 은연히 주체를 드러내고자 한다. 화면 속에서 주체는 없지만 흔적이 베여있는 공간을 관객이 바라봄으로서 관객 자신의 위치와 더불어 주체의 존재를 느끼게 하는 것이다. 공간의 물리적인 기능과 정신적인 기능이 그들의 관계 속에서 맞물려 공간의 확장으로 이어지길 기대한다. ■ 서금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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肖像(초상)-그 傳神(전신)의 세계
김현철展 / KIMHYUNCHUL / 金賢哲 / painting
2008_1015 ▶ 2008_1025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김현철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8_1015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월전미술문화재단 한벽원 갤러리
서울 종로구 팔판동 35-1번지
Tel. +82.2.732.3777
금릉 김현철 초상화전에 부쳐 ● 우리문화의 황금기인 진경시대에는 그 시대를 주도한 조선성리학 이념에 입각하여 무정물(無情物)인 산수(山水)에도 기(氣)가 내재(內在)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시대를 풍미하던 진경산수화는 산수에 내재된 정신성까지 표출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화성(畵聖)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이 금강산과 그 주변 동해안 일대를 진경화풍으로 사생해서 화첩을 꾸미고, 「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으로 제목을 삼은 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 전신(傳神)이란 초상화를 그릴 때 외모의 형사뿐만 아니라 내재된 정신성까지 사생해 낸다는 의미이다. 그러니 해악전신이란 바다와 산악의 내재된 정신성까지 표출해낸 산수화라는 뜻이다. ● 무정물인 산수가 이럴진대 유정물(有情物)인 동식물과 사람을 그리는데 있어서 그 정신성 표출여부가 얼마나 큰 열쇠가 되었겠는가. 겸재가 풍속인물화나 화훼(花卉)·초충(草蟲)·영모(翎毛) 분야에서도 대성공을 거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현철_송설당 진영 (松雪堂眞影)_비단에 진채_188×98cm_2008

김현철_김해선 초상 (金海仙肖像)_비단에 진채_58×47cm_2008

김현철_김금덕 초상 (金今德肖像)_비단에 진채_65×46cm_2006
그러나 겸재는 진경산수화에 주력했을 뿐 이런 제반 분야는 후진들에게 양보하여 10년 후배인 관아재(觀我齋) 조영석(趙榮祏, 1686-1761)은 풍속인물화풍의 문호를 개설했고, 화재(和齋) 변상벽(卞相璧, 1730-?)은 초상과 영모에 발군의 기량을 뽐내었다. ● 이후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1745-1806)와 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 1758-?)이 나와 풍속인물화를 마무리 짓는데 여기서도 항상 전신성의 표출을 표방했으니 혜원이 그의 풍속화 30폭을 모아 놓은 풍속화첩을 「혜원전신첩(蕙園傳神帖)」이라 한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 금릉 김현철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재학중이던 1980년대 중반 무렵에 진경시대를 현대 우리나라 문예부흥의 기준으로 삼고자 하는 필자의 뜻에 공감하여 간송미술관에 입문하였다. 이후 진경산수화풍과 초상화풍을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자세로 계승 발전시키려는 화도(畵道)수련을 쉬지 않고 계속해 오고 있다. 그 세월이 벌써 20여년을 지나고 있다. ● 입문 초기에 혜원의 「미인도」를 임모하느라 안간힘을 쓰던 일이 어제 같은데 벌써 중견작가로 성장하여 초상화전을 개최한다 하니 감개가 무량하다. 아무쪼록 관아재, 화재, 단원, 혜원으로 이어지는 진경시대 초상화풍을 계승 발전시킴으로서 사진기가 해내지 못하는 정신성 표출에 성공하여 초상화 제작의 유행을 선도하는 전시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 최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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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적 현대여성의 초상
유희승展 / YUHEESEUNG / 柳希承 / painting
2008_1009 ▶ 2008_1024 / 월요일 휴관

유희승_추억_천배접 화선지에 수묵, 금분, 석채_42.5×58.5cm_2008
초대일시_2008_1010_금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월요일 휴관
게이트 갤러리_Gate gallery
서울 종로구 가회동 1-5번지 경남빌라 제상가 1층
Tel. +82.2.3673.1006
www.gategallery.kr
이중적 현대여성의 초상 ● 서구미술에서도 전통적으로 여성은 타자로서 감상의 대상이 되는 존재였다. 작품에 등장하는 꽃장식과 나비, 시선의 처리에서 내면적 자아세계를 표현하려는 여성의 이중적 심리상태를 표출하고자하였다. 본인의 작품을 통해 여성의 현실을 인식하고 자아를 탐구하고자 의도하였다.

유희승_봄이 오는 소리_천배접 화선지에 수묵, 금분, 석채_59×84cm_2008

유희승_자아ego_천배접 화선지에 수묵, 금분, 석채_160×85cm_2008

유희승_자아ego_천배접 화선지에 수묵, 금분, 석채_160×85cm_2008
본인이 가장 비중을 두는 것이 수묵이다. 五彩를 내포한 먹의 필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감상자들에게 무한한 세계를 상상 가능하게 해준다. 오히려 흑 백 톤이기에 그것은 더 극대화 될 수 있다. 화선지에 나타난 다양한 먹빛은 깊고 풍부한 표정을 가능하게 해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의 안정을 주고 고뇌와 번민을 잊게 해주는 면이 있다.

유희승_가을_천배접 화선지에 수묵, 금분, 석채_43.5×115cm_2008

유희승_훨훨_천배접 화선지에 수묵, 금분, 석채_44×31cm_2008
화면에서, 수묵의 경우, 원색의 채색과 서로 충돌하거나 갈등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그만큼 수묵은 지각적으로나 화학적으로 깊은 포용력을 갖고 있다. ■ 유희승

게이트 갤러리 오시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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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IN
김진展 / KIMJIN / 金眞 / painting
2008_1015 ▶ 2008_1028

김진_무제_혼합재료_96×78cm_1999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이미지 속닥속닥 Vol.080805c | 김진 “Closed In” View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8_1015_수요일_05:00pm
갤러리 더 케이
GALLERY THE K
서울 종로구 가회동 25-1번지
Tel. +82.764.1389
www.gallerythek.com
겹쳐지고 쌓이면서 또는 흐르면서 이루어진 비 균질의 표피로 안면화 된 인물들은 표피-심층, 내면-외면, 고유성과 일회성 등 대상을 이분법적으로 파악하는 습관적 분류방식을 무기력하게 한다.

김진_무제_혼합재료_96×78cm_1999

김진_무제_혼합재료_130×97cm_2001

김진_무제_혼합재료_130×97cm_2001

김진_무제_혼합재료_130×110cm_2008

김진_무제_혼합재료_130×110cm_2008

김진_무제_혼합재료_130×110cm_2008
이 작업에서 인물들은 개체성을 추론 가능케 하는 여타의 수사가 배제된 상태에서 하나의 성질, 상태로 환원하기 쉽지 않은, 인간의, 인간일반의 complexity에 대한 나의 관념을 투사한 대상으로 반초상적 초상화이다. ■ 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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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nderland
강지만展 / KANGJIMAN / ??? / painting
2008_1015 ▶ 2008_1105 / 일요일 휴관

강지만_날아라_캔버스에 혼합재료_100×100cm_2008
초대일시_2008_1015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09:00am~07:00pm / 일요일 휴관
얼 갤러리
ERL GALLERY
서울 강남구 신사동 532-2번지 진송빌딩 B1
Tel. +82.2.516.7573
www.galleryerl.com
이미지의 유머러스함에 감춰진 진한 고독감 ● 젊은 날의 초상이자 집적된 기억의 총체라고 할 수 있는 작가 강지만의 그림들. 어린 시절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또는 나에게서부터 타인과 동물에 이르기까지 그의 그림 속엔 소소하지만 생각할 여백이 충만한 일상의 행복과 고독감이 물씬 배어있다. 피터 팬을 동경하듯 망토를 걸친, 어딘가 어설픈 어른과 천진난만한 듯 혼자만의 생일을 즐기는 앙칼진 표정의 아이, 어디로 흘러가는지도 모른 채 주스를 마시거나 뜨개질에 여념이 없는 태평한 사람의 아이러니한 모습들에서 현실을 도외시한 무감각과 보상의 자유가 다중 구조로 다가오는 반면 체제와의 결별, 세상과의 단절, 오늘과 내일에 대한 반추와 기대가 동시에 포착된다. 이를 주체적 실존에 덧칠되지 못한 미완의 자아 찾기와 애증이라고 설명해야 하는 게 적절한지 모르겠지만 무엇보다 그의 그림에서 발견할 수 있는 중요한 특징은 외피적인 코믹스러움의 이면에 존재하는 개성 강한 캐릭터를 통한 회화적 감성의 전복과 일상에 대한 동질감의 획득이라고 할 수 있다. ● 끈기의 산물인 점묘(노동집약적인)로 이뤄진, 마치 한 편의 인생풍자극과 같은 그의 그림들은 사뭇 진지한 내용을 담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타자에게 묘한 웃음을 선사하는 매력을 발산한다. 「내가 누군지 알아?」라든가 근작인 「밀고」와 같은 작품을 보면 리히텐슈타인 식의 구체적 설명이 이입되어 있지는 않지만 심리적 반전을 꾀하는 뛰어난 해학성, 앙증맞은 캐릭터자체의 독자성으로 인해 입가에 미소를 절로 번지게 만든다. 하지만 겉보기완 달리 그 속에는 인간사의 쓸쓸함과 외로움, 도시인들의 무관심과 에고이스트적인 이중적 잣대와 시선이 올곧이 녹아 있음을 부정하긴 어렵다. 이를 다른 말로 하자면, 그의 그림들에서는 이미지의 유머러스함에 가려진 진한 고독감이 생경하지 않게 묻어나고 있으며 이는 문명 속에 침전되어가고 있는 휴머니즘을 일깨우는 일종의 역설로 해석할 수 있다. ● 이처럼 드러남과 내재됨이 상반된 전복현상은 강지만 작업의 형식적 관점을 읽을 수 있는 단초가 되며 우리가 ‘장 앙투안느 와토’나 ‘후지다 미라노’의 「피에로」를 보며 멜랑콜리에 빠지듯 그의 작품 앞에서도 밝음과 어두움, 슬픔과 기쁨을 동시에 체감하거나 웃음이라는 장막에 숨겨진 애수와 같은 야릇한 감정에 휩싸이도록 하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아마도, 어쩌면 이는 우리네 삶과 정서를 담보하고 있기에 그러한 것이 아닌가 싶으며 작가 자신의 다이어리이자 곧 우리 현대인들에 관한 날카롭고 애정 어린 자서전이라는 점에서 그가 전하려는 메시지들은 무심코 간과할 수는 없는 것들이랄 수 있다.

강지만_힘내자_캔버스에 혼합재료_97×130cm_2008
입체적 캐릭터를 통한 자아의 발견 ● 두 번째 특징, 즉 「잠수하는 날」, 「나만 따라와」, 「지난날의 복수극」, 「훈수」 등 자신과 관련된 특별한 스토리를 내재하고 있는 그의 작품들은 여느 동화가 그러하듯 일인칭 시점 아래 그려지면서도 모든 이들이 청취 가능한 주파수 아래 ‘내레이션(narration)’을 함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강지만의 작품성을 높이는 분명하고도 명징한 요소인데, 내레이션을 맡은 이들은 바로 강지만의 창조적 캐릭터들이다. ● 그의 개성 있는 캐릭터들은 본래 순수예술과 상업예술의 간극에서 태어나 자라왔기에 만화나 여타 팝아트에서 보이는 것처럼 일견 전형적이지만 무성 영화의 성우처럼 다양한 포지션을 함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회화 소재로써, 현대인들의 상징적 아이콘(Icon)으로써 이중성을 안고 있다는 점에서 전혀 전형적이지 않은 입체적 캐릭터들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다. 그렇다면 그 캐릭터들은 어떤 의미를 함축하고 있을까. 주지하다시피 그의 그림엔 대체로 (동물을 제외하고)세 명의 주인공이 등장하는데, 붉은 머릿결을 한 성숙한(느낌의) 여자와 ‘혼자 놀기’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는 영악한 아이, 그리고 수염이 듬성듬성 나 있지만 막연히 철없어 보이는 한 아저씨가 그들이다.

강지만_밀고_캔버스에 혼합재료_130×161cm_2008
예리한 관찰력의 소유자라면 이미 눈치 챘겠지만 강지만의 영민한 기억과 풍부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그림이라는 작은 무대에서 펼쳐지는 이 캐릭터들의 농익은 ‘연기’는 그야말로 일품이다. 자세히 보면 주인공들은 항상 혼자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으며 코믹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다. 그들은 척 봐도 ‘얼큰이(얼굴이 큰 이)’에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서 환상의 나래로 빠져들거나 익살스러운 형태로 화면 곳곳을 누빈다. 하지만 대체로 무뚝뚝하거나 심드렁한 표정으로 일관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화면에 등장하는 동물들조차 어쩜 그리 세상 다 산 존재들 마냥 무심하고 약아빠지게 비춰지는지, 사람이나 토끼나 늑대나 새나 감성적인 측면에선 모두 일체화된 양상으로 전개된다. 그 자체로만 따지자면 인간과 동물 간, 화자와 관자 간 간극은 전혀 없으며 또 하나의 이기적인 사회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것 같아 처연한 기분마저 들게 한다. 물론 그것이 작가에 의해 위장되고 액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기에 우린 재미있고 흥미로움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감춰진 것의 상징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 어쨌든 작가에 의해 단순한 일러스트레이션이나 흔한 캐릭터에서 진정한 배우로 둔갑하는 데 성공한 그들은 세월과 비례하여 각자의 개성과 향기를 뿜어내며 보편적 공감대를 거쳐 그의 회화 속에서 새롭게 태어난다. 단순히 대중 속 각인된 외피를 모방해 얹혀 놓는 팝아트의 식상한 수준에서 벗어나 고유의 얼굴과 표정 아래 무형의 언어들을 뱉어내는 존재들, 차라리 우리네 모습을 투영한 느낌마저 들기에 그의 인물군은 그래서 부쩍 살갑게 다가온다. 따라서 이들의 의미와 역할은 정지된 물성에 불과한 그림을 일종의 시트콤처럼 그림에 역동성을 부여하고 잃어버린 순수를 되새김질 하게 하거나, 피터 팬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의 자화상을 대변하는 등 다분히 상징적인 주제들을 현실화하는데 있으며 실제로 ‘강지만표’ 예술을 만드는데 크게 공헌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 웃기면서도 의미심장한 캐릭터들이야말로 강지만 작품의 진정한 주연들이라고 할 수 있다.

강지만_뜨개질_캔버스에 혼합재료_130×130cm_2008
촉망받는 신진 작가로써의 가능성 ● 강지만의 예술세계를 요약하자면 한마디로 아직 덜 자란 ‘피터 팬’이 세상을 떠돌며 겪게 되는 여행기라고 할 수 있다. 개념적으론 인간과 사회, 현실과 이상, 아픔과 슬픔, 고독과 연민이라는 삶에 당면한 거대하고 험난하며 거친 파도를 헤치며 진정성과 정체성을 찾으려는 젊은 작가의 노력과 고투라고 해도 틀리지 않다. ● 그와의 대화를 통해 건진 재미있는 발견은 그의 라이프스타일이 일견 치밀하고 은둔적인 ‘히키코모루’에 가깝다는 점이다. 원색 계열의 밝고 따스한 색감의 돌가루가 섞인 독특한 안료로 하나하나 정성어린 붓 터치로 그려내는 과정 자체가 상당한 공을 필요로 할뿐더러 내용 면에서도 고독한 현대인의 자아를 찾아가는 난이도 높은 여정에 기꺼이 헌신하는 까닭에 자의든 타의든 그는 은둔자임을 자처할 수밖에 없게 된다. 실제로 그는 하루라는 시간의 대부분을 일상에 혹은 기억 속 언저리에 위치한 소소한 단상들을 꺼내는데 소진하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세밀한 플롯을 짜고 하나하나 시퀀스를 짜 맞추는 과정에 열중한다. 여기에 말없는 대사를 읊조리는 캐릭터를 스케치로 앉힌 다음 이를 다시 일일이 점으로 연결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렇게 한 달을 해야 비로소 일정한 상황이 담긴 작품이 완성에 이르니, 그 누군가 “당신은 히키코모루요”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타인의 주문에 의한 것이 아닌, 그의 말대로 ‘좋아서’하기에 즐거운 자발적 은둔자라는 점에서 다분히 긍정성을 내포하고 있다.

강지만_내가 간다__캔버스에 혼합재료_97×130cm_2008
한편 학업을 마친 뒤 알음알음 관심을 받기 시작한 이후 그는 지난해 각종 주요 아트페어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현재와 같은 형식을 취한 건 아니었으며 기존 자신의 그림에 답답함을 느낀 나머지 대대적인 방향전환을 모색했다. 그림을 그릴 땐 행복해야하는데 왜 그러하지 못한가라는 자문에 대한 스스로의 응답이었던 셈이다. 젊은 날의 고민과 갈등은 독자적인 길을 걷도록 했고 진취적이고 참신한 작품 활동은 그의 별난 캐릭터들과 함께 단연 주목 대상이었으며 기타 주요 단체전과 그룹전, 얼 갤러리 기획전 등을 거치면서 강지만은 비로소 한국 팝아트의 한 지류를 이끄는 작가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번 ‘얼 갤러리’에서의 기획전이야말로 작가 강지만에게 있어 창작의욕을 고취시키고 예술세계의 확장을 도모할 수 있는 또 다른 전환점이 될 것임에 자명하다. 아직 연륜이 짧고 활동범위 역시 일정부분 한정적이었다는 점에서 이번 전시는 그만큼 가능성을 폭넓게 확보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 얼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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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피는
인동욱展 / INDONGWOOK / 印東旭 / painting
2008_1010 ▶ 2008_1029 / 월요일 휴관

인동욱_기다려 2_석채에 혼합재료_48×90cm_2008
초대일시_2008_1010_금요일_05:00pm
관람시간 / 11:00am ∼ 08:00pm / 월요일 휴관
샘터갤러리_SAMTOH GALLERY
서울 종로구 동숭동 1-115번지 샘터사옥
Tel. +82.2.3675.3737
www.isamtoh.com
일상 ● 별로 새로운 것이 없는 일상의 연속이다. 어제는 잿빛 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나는 집 근처의 언덕으로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언덕 위에는 한 채의 오두막이 있었는데, 그 뒤로 무서운 폭풍우가 몰려들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작업실로 돌아와 쫓기듯이 열쇠를 구멍에 밀어 넣었다. 곤히 잠들어 있는 아내의 얼굴에 맺힌 땀을 닦아주는 동안에도 아무런 변화의 기색은 엿볼 수 없었다. 식사 후 두 시간 정도의 잠을 청하고 난 뒤 다시 나의 일상으로 되돌아왔다. 변화란 존재하지 않는다.

인동욱_문막_석채에 혼합재료_88×48cm_2008
집 ● 집은 인간의 삶과 도시문명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인간의 발명품이다. 그러나 집은 근대 도시문명을 태동시킨 물질적 주역의 자리에만 머물지 않는다. 이제 집은 그것을 도구로 삼아 근대 도시문명을 태동시켰던 인간의 손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의 독자적 진화 논리를 획득한 이데올로기로 변모했다. 집은 인간의 삶의 구조를 변화시키는 사회적 권력형태, 곧 인간을 지배하는 ‘혼돈의 유령’으로 옷을 갈아입은 것이다. 모더니즘 이후 산업화된 대도시의 어두운 모습을 시적으로 형상화하는데 주력하여 온 독일 표현주의 시인 파울 쩨흐(Paul zech)는 「철로 이루어진 도시」라는 시에서 인간을 짓누르는 현대의 산물인 도시를 악마적 메커니즘으로 고발하기도 하였다.

인동욱_기다려 5_석채에 혼합재료_105×65cm_2008
대화 ● 그것이 집이라고 중얼거려 보지만, 이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이 말은 집에 미치지만, 집 그 자체와 일체화하는 것을 거부한다. 사물은 그에게 붙은 이름과 분리돼 있다. 다만 거대한 물체가 놓여 있을 뿐으로, 이를 집이라고 부르는 것이나 그것에 관하여 어떤 표현을 쓰는 것도 바보스럽게 생각된다.

인동욱_9월19일_석채에 혼합재료_65×170cm_2007
꽃이 피는 ● 2004년 「난장」시리즈와 「오합지졸」의 발표 후 지속적인 작업을 하고 있는 인동욱은 집을 그리는 작가이다. 그린다는 표현보다는 짓는다는 말이 더 잘 어울리는 표현일 것이다. 풍부한 건축현장의 경험은 인동욱이 처절한 재료와의 싸움을 시작하게 되는 빌미를 마련해 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작가에게 재료는 어떠한 필연적인 숙명과도 같은 존재이다. 빌딩을 짓기 위해서는 기초 공사를 철저하게 해야 건축물이 바로 서듯이 인동욱에게 재료의 선택과 사용은 그가 그리고자 하는 내용만큼이나 중요해 보인다. 작품의 보존성이라는, 예술가의 의무에 충실한 작가의 편집증적인 집착이 그 힘든 작업의 방법론을 택하게 되었으리라. ● 하나하나 선택된 재료는 작가의 손에 의하여 일일이 갈고 가공되어 지난한 기초 공사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후에야 인동욱은 그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동네」, 「문막」, 「기다려」, 「낙산」, 「굴레방」, 「낮에」, 「뜨겁게」, 「하루」, 「탑」, 「형님나라」, 「당신아」등의 제목에서 보듯이 작가가 주목하는 대상은 서울의 뒷골목이나 일상이다. 인동욱은 일상을 그리는 작가이다. 그에게 집은 단순한 집이 아니라 풍경이자 일기이며, 희노애락을 함께 하는 놀이이기도 하다. 인동욱이 그린 집들은 하나같이 삐뚤삐뚤하고 금세 쓰러져 갈 것만 같이 왜곡되어 있다. 그는 대상을 특정한 은유와 비유로 표현함으로서 그 대상으로 하여금 생명력을 획득하게 도와주고 있다. 틀을 벗어난 조형 어법은 표현의 자유를 보장 해 주게 되는데, 분해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을 통해서 일상의 축적된 메시지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인동욱_기다려 3_석채에 혼합재료_45×122cm_2008
달동네를 연상시키는 인동욱의 작품에서 현대 사회가 만들어 놓은 문명의 그늘은 발견하기가 어렵다. 오히려 그의 그림에는 밝은 색채가 주류를 이루며 행복했던 기억만이 연상되는 아이러니를 경험하게 된다. 시대의 변화에는 늘 위기의식이 따라오는 법이고, 새로운 문화의 패러다임은 응당 전위적이고 다양한 미적 상상력을 요구한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변화 그 자체, 혹은 변화된 현실의 다양한 면모에 대한 미적 표현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명철한 인식의 눈인 것이다. 인동욱은 미세하게 분화된 거대한 세계를 통하여 총체적으로 세계를 이해하려는 시지각에 닿아 있다. 쓰러져 가는 마을에 환한 빛깔의 꽃이 등장을 하게 되는데, 작가에게 꽃은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인식 자체를 완강하게 거부하는 동시에 희망의 메시지를 동시에 제시하고 있다.

인동욱_기다려 4_석채에 혼합재료_96×56cm_2008
이번 샘터 갤러리의 전시 주제인「꽃이 피는」에서 인동욱은 다분히 건축적인 요소의 그림을 선보이게 되는데, 집과 꽃과의 만남을 유도함으로서 그의 작업에서 느껴지는 경직성을 다소 극복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지극히 일상 속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작가는 잠시나마 쉴 수 있는 집을 제공함으로서 과장되고 왜곡된 자아를 되돌아 볼 수 있는 사색의 시간을 제공하고 있다. 그의 시선은 문명의 언저리에 머물러 있지만, 그곳에서 희망의 메시지를 발견하는 것은 그가 맑은 정신의 소유자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 이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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