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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초가 된 페미니스트라는 말이 자꾸 생각난다는. 진정한 권력은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하는 것이라는...드라마 대사가 기억나는 대목이다.
글고, 평등주의라고 하면 안되나. 왜 자꾸 저런 말을 쓰는지.
차라리 페니스트라고 하는게 재밋겠다. -_-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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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 페미니즘 논쟁의 종결을 보면서
[- 다시 원점에서 묻는다]
강성률 | 영화평론가
1.
감수성 예민한 남성인 척하지 말라. 여성들은 보면 다 안다. 자기를 ‘페미니스트’라고 부르지도 말라. 당신은 자격미달이다. 그것은 마치 KKK(남부 백인 우월주의 결사 : 편집자주)단 회원이 ‘동등한 세계에 대한 꿈’을 부르짖는 것과 같다.
당신이 속한 곳은 저쪽보다 항상 돈 많이 받고, 출세를 향한 몸도 활짝 열린 곳이다.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지금의 상황을 개선하는 데 일조 못하라는 법은 없다. 여성을 돕는 방법은 남성들을 설득하는 일이다. 콘크리트 같이 딱딱한 남성의 머리 속에 새 개념을 불어넣는 일이 어려울 것이다.
마이클 무어는 자신의 책 <멍청한 백인들>에서 남성 패권주의를, 예의 신랄한 시선으로 풍자하면서 위와 같이 썼다. 나 역시 이러한 마이클 무어의 시선에 많은 부분 동조한다. 남성이면서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부르는 것이 얼마나 위선적일 수 있는지 항상 고민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가부장적 유교 질서가 너무도 완고한 사회에서 교육을 받고 자랐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그것을 벗어나려고 하지만,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세뇌된 것은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인간으로서의 모든 차별이 없는 “동등한 세계에 대한 꿈”을 가지지만, 그래서 오히려 마이클 무어의 말처럼 돈 많고 출세를 향한 길을 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완전한 평등의 꿈을 꾸지는 못하고 어정쩡한 위치가 되어버린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한국에서 페미니즘을 논하는 것은 매우 난처한 것이다. 그것은 유교적 가부장제가 너무도 완고하게 지배하면서 여성들을 차별해 왔기 때문에, 그것이 지금도 완고하게 남아 있기 때문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특히 남성들이 페미니즘을 거론하는 것은 너무나 어렵다. 그것은 자칫 잘못하면 여성을 ‘두 번 죽이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고, 또한 그것을 거론하는 남성들은 웬만큼 섬세하지 못하면 ‘마초 꼴통’이라는 소리를 듣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페미니즘을 거론했었다. 그것은 지금 한국영화 비평계에서 행해지는 페미니즘 담론을 보면서 가진 의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에 대해 깊이 알지는 못하지만, 일천한 지식이나마 내가 알고 있는 페미니즘과는 다른 경우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것을 페미니즘 내부에서 소화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2.
“내가 처음 비판한 것은 페미니즘 평자들의 폭력적 글쓰기가 문제가 있다는 것, 페미니즘이 말하는 주체적 여성(또는 여성적 주체)이 살아 있는 영화에 관한 정의가 너무 추상적이라는 것, 그리고 페미니즘의 잣대가 공정하게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씨네21> 447호)이었다. 여기에 대해 심영섭이 답변을 했지만, 나는 그것이 성실한 답변이 아니었음을 재반론을 통해 보여 주었다.
그 이후 다른 평자들이 개입하기 시작했다. 물론 나의 논의에 대해 전적으로 개입한 것은 아니고 비평을 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조금씩 개진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대부분 내가 제기한 문제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고 다른 것을 논한 것이었다. 다만 김경욱만이 페미니즘 잣대가 공정하지 않다는 나의 문제 제기에 대해, 즉 “처음부터 끝까지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그리는 홍상수의 영화에 대한 그들의 평은 어떠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나름의 비평을 개진했었다. 물론 여기에 대한 반론도 있었다.
이렇게 진행되던 페미니즘 논쟁은 최근에 주유신과 황미요조의 글을 게재하면서 장장 4개월에 걸친 논쟁을 마무리지었다. 이 논쟁에서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잃었는가?
3.
내가 먼저 논할 것은 아직도 나의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페미니즘 진영의 폭력적 글쓰기에 대한 언급은 심영섭의 답변을 제외하곤 무응답으로 일관했다. 페미니즘 평자들의 가혹하리만큼 혹독한 폭력적 글쓰기가 정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일까? 자신들이 보기에, 김기덕 영화가 폭력적이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대응방식으로서 폭력적 글쓰기가 정당화 될 수 있는 것일까? 정말이지 나는 여기에 대해 그렇다고 답하기 어렵다. 무엇보다도 이런 폭력적 글쓰기는 비평에서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폭력적인 글쓰기도 대부분 김기덕 영화에만 집중되고 있는 현실이지 않은가.
다음으로 내가 제기한 문제, 페미니즘 비평이 내세우는 여성의 주체성이 구체적이지 않다는 물음에 대해서도, 나의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논쟁을 결산하는 글에서 황미요조는 나의 이런 자세를 두고 “이런 질문 속에는 페미니즘이란 무언가 총체적이고 일관적이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현대의 페미니즘이 힘주어 강조하는 ‘차이의 정치학’과 완전히 반대 지점에 서 있는 것이다”라며, 내가 현대 페미니즘의 기본도 모르는 사람인 것처럼 서술했다. 하긴 황미요조는 바로 앞부분에서 내가 제기했던, 영화를 한 가지 잣대로만 볼 수는 없다는 의문에 대해, 이렇게 “고전적인 혹은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비판은 아주 교묘한 방식으로 페미니즘을 대상화하고 타자화시키는 것이라고”, 그래서 정확히 나를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노력하는 마초 혹은 착한 마초”를 거론하기에 이르렀다.
황미요조의 이런 의문에 대해 나는 또 한 번 절망했다. 서두에서 이미 거론한 것처럼 남성이 페미니즘을 거론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다시 한 번 실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녀에게 한번 물어보자. 그녀는 내가 왜 이런 질문을 했는지 정말 그 의도를 모른단 말인가? 정말로 나는 페미니즘을 타자화시키기 위해 속이 뻔히 보이는 질문을 한 것인가? 나는 페미니즘 평자들이 제기하는 잣대가 너무도 달라서 그렇게 물은 것이다. 여기에 대해 황미요조는 ‘차이의 정치학’을 모르는 것이라고 답한다. 좋다. 그런데 현대 페미니즘의 핵심이 차이의 정치학이기 때문에 같은 평자의 페미니즘 비평도 일관적이지 않아도 된다는 말인가? 그래서 감독에 따라 서로 다른 잣대를 들이대면서 한 감독은 완전히 죽여버리고 다른 감독은 띠우는 것이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인가? 여기에 대해 페미니즘 평자들이 의견 교환을 하지 않고 묵인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 태도라는 말인가?
황미요조가 말한 “지금 이 순간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페미니즘 내부의 분화와 차이에 대한 세심하고도 비판적인 관심”이라는 것에 나 역시 전적으로 동의한다. 나 역시 제발 그렇게 해서 다양한 페미니즘 비평을 만나고 싶다. 남녀 문제만이 아니라 계급, 지역, 학벌까지 온갖 관계가 복잡하게 형성된 현대의 메커니즘 속에서 페미니즘이 좀더 넓은 여성성으로 적극적으로 개입했으면 좋겠다. 내가 제기한 문제는 한국의 페미니즘이 깊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제발 좀 다양한 페미니즘의 백가쟁명을 한국에서도 이루었으면 좋겠다.
페미니즘의 잣대가 공정하게 적용되지 않는다는 나의 의문에 대해서도 황미요조는 “페미니즘은 다 다르다. 페미니즘은 결코 페미니즘 일반 혹은 여성 일반으로 고정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답한다. 나는 여기에 대해 적극적으로 찬성한다. 이번 논쟁에서 가장 큰 성과는, 많지는 않았지만, 김기덕이나 홍상수의 영화에 대해 페미니즘 평자들이 서로 다른 의견을 개진했다는 것이다. 개인마다 다른 페미니즘 잣대를 통해 서로 다르게 평가했다는 것이다. 정말 필요한 것은 바로 이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4.
김기덕 영화를 누구보다도 과격하게 비판했던 페미니스트 주유신은 나의 이런 의문이 못 마땅했던 모양이다. 그녀는 논쟁을 정리하는 글에서 나의 문제 제기에 대해 “페미니스트의 관점으로 영화를 비평한다는 것을 문제삼고 있는 지금의 상황”이라고 아주 단도직입적으로 불쾌감을 나타내고 있다. 그렇다면 다시 나는 물어야 한다. 주유신은 마땅히 내가 제기한 의문에 대한 답을 했어야 했다. 나는 <씨네21> 443호에서 주유신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그녀의 글쓰기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었다. 실명이 거론된 상황에서 그것이 못마땅했으면 나의 문제 제기에 대한 답을 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예전의 목소리에서 강도가 덜하지만 더 섬세해진 시각으로 여전히 김기덕을 비판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은 이미 많은 평자들이 했던 것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주유신은 지금 한국영화 비평 역시 한국영화와 마찬가지로 거대한 남성들의 목소리만 울려 퍼지고 있다고 한다. 그녀의 말을 빌리자면, “한국영화에 대한 비평적 작업이 이처럼 완고하고도 퇴행적으로 ‘남성 중심적 패러다임’으로 회귀하는 경향은 ‘신르네상스’를 맞이한 한국영화의 전체적인 지형도나 내적 경향을 잘못된 방식으로 총체화하는 오류에 빠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단정짓는다. 어떤 상황을 보는 것은 그것을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이는 너무도 당연한 사실이다.
그런데 내가 이런 당연한 사실을 거론하는 것은 지금의 한국영화 비평계를 보는 시각이 주유신과 다르기 때문이다. 주유신이 예를 든 것처럼(그것도 남재일과 허문영의 글이 전부이지만), 지금 한국영화 비평계가 정말로 남성적 시각의 서사만 횡행하고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유신의 시각일 뿐이다. 물론 이런 주장에 대해 주유신의 이것이 나의 시각일 뿐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한국영화 비평계에는 페미니즘 평자들이 굉장히 많고, 그들의 목소리는 항시 울려 퍼진다. 김기덕 논쟁이 일어났을 때 페미니즘 평자들의 목소리를 상기해 보라. 오히려 나는 당시 페미니즘 평자들의 목소리가 마치 “거대한 남성의 목소리”와 너무도 판박이였다고 생각한다.
지금 한국영화 비평계에는 정성일 같은 남성 평론가도 수시로 페미니즘 시각에서 영화를 평가하고 있으며, 일일이 이름을 거론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페미니즘 평자들이 비평계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단연코 지금 한국영화 비평계에서 페미니즘 평자들은 주류이며, 한국영화 비평계에서 영화비평 방법론 가운데 이렇게 일관된 목소리를 많은 사람이 내는 것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한국영화 비평의 목소리가 남성적 시각의 서사화 일색이라면, 주유신의 말처럼 페미니즘 평자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나 역시 그것을 바라고 있다. 다행히 앞으로 그녀의 글을 자주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녀는 김기덕 영화를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을 뒤돌아보며 (자신을 포함해서) 진정성이나 엄밀함이 부족했던 것은 아닌가 반성하고 있다. 그것은 다시 시작하겠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5.
<씨네21>에서 페미니즘 논쟁을 처음 시작하면서 나는 좀 독하게 마음먹기로 했다. 그러나 온갖 인신공격과 비방을 보고 들으면서 나는 참 많은 후회를 했다. 내가 왜 이런 짓을 시작했던지(이 글을 쓰면서도 사실 두렵다)……. 그런데 논쟁이 끝난 지금, 나는 여전히 의문이 많다. 단지 착한 마초에 불과하기 때문에 복잡다단한 페미니즘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까? 여성 차별을 몸으로 겪지 못했기 때문일까?
마이클 무어의 말처럼, 나는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부르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고? 역시 마이클 무어의 말처럼, 나는 자격미달이기 때문이며, 여자들은 보면 다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 말만은 꼭 하고 싶다. 페미니즘 비평은 정말로 다양화해져야 한다는 것, 이제 페미니즘 비평은 서로 논박을 해도 될 만큼 그 두께가 쌓였고 두터워졌다는 것을. 그래서 자신이 처함 입장과 학문의 시각에서 한 영화를 두고 페미니즘 시각에서 논쟁하는 것을 보고 싶다. 그렇게 할 때 페미니즘은 진정 여성해방을 앞당길 것이다. 나 역시 “콘크리트 같이 딱딱한 남성의 머리 속에 새 개념을 불어넣”을 것이며, 그렇게 “남성들을 설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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