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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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님께서 남기신 글 (2002-11-29 15:30:03, Hit : 438)
시뮬라크와 현실효과 - 이경률
이곳이 많은 사람들이 들르지 않는다는 것이 사실 나에게는 큰 장점중 하나다.... 암데서나 푸고서 맘껏 모아놓고 부담없이 비교해가며 볼 수 있으니까...핫...    미국현대사진전에 이경률씨가 진행한 세미나 요약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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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시간은 공간이 아니라 무한히 넓은 평면이다. 기차를 타고 시간 여행을 떠나보자. 창가에 지나가는 수많은 시간들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한 질서를 보여준다. 휙휙 지나가는 차창 풍경들은 미래로부터 출현하고 과거로 사라지는 동어반복만이 있을 뿐이고 거기서 의미의 엄격한 질서(시간성)가 생긴다. 이와 같이 우리는 어리석게도 시간은 언제나 공간속에서 ‘포착’된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달리는 기차의 맨 앞 기관실 창에서 끝없이 놓이 레일을 보자. 눈앞에 보이는 풍경은 출현하고 사라지는 운동들이 아니라 미래와 과거를 모두 동시에 응축시키는 현재의 지속에 있게 된다. 일종의 거대한 녹음판인 셈이다. 우리가 흔히 공간적 개념에서 시간을 미래와 과거로 말하지만 사실상 모든 시간은 현재에 농축될 뿐이다. 거기서 기억한다는 것은 현재에 무시간으로 잠재된 과거 사실이 의식에 돌출하는 수평개념 뿐이지, 어떠한 시간의 질서도 허락하지 않는다. 고로 시간은 원래 평면의 무질서에서 가공된 공간적 질서 일뿐이다.원래 대상은 인지되는 것이 아니라 잠재태의 형태로 이미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감각적인 무엇으로부터 대상을 인식하고 그 인식 과정에서만 존재라는 라벨을 부여하려 한다. 가령 어떤 남편이 어느날 갑자기 오랫동안 같이 살아 온 자신의 부인 얼굴에서 느껴지는 괴물 같은 인상은 스스로 이해하기 힘든 현상이다. 그럴 경우 그는 그가 인지하는 부인의 얼굴이나 행동으로부터 그러한 인상을 논리적으로 파악하려 한다. 이는 현상의 원인성을 언제나 느끼는 주체가 아닌 대상에서 이해하려는 방식이다.

그러나 사실상 부인의 얼굴은 전혀 변한 것이 없다. 그러한 인상은 단지 그가 인지하지 못할 뿐이지 느껴지는 객체가 아니라 느끼는 주체의 내부에서 발생된 존재이다. 이러한 이해 방식은 달리는 기차 안에서 우리가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창 밖의 풍경이 지나가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 같은 경우이며, 또는 아우라와 같은 느낌이 사실상 수용하는 주체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상 그 자체에서 농축되어 스스로 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 같다. 이처럼 세상은 감각적으로 인지되는 대상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직감이나 기분 또는 충동과 같이 무의식의 심연에서 이유 없이 솟아오르는 존재들도 있다.
원래 의미는 처음부터 대상에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텅빈 공간에서 채워진 것이다. 우리는 어리석게도 의미는 수학 공식이나 과학적 공리처럼 언제나 구체화되고 정형화 된 그리고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라고 믿고 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대상은 반드시“정답”이라는 객관적인 의미를 가져야 한다고 믿고 있다. 심지어 예술가가 표현한 작품에까지도 이미지는 처음과 끝을 맞추는 퍼즐 구조처럼 정확히 분석이 되어야 하며 또 작가는 그러한 직조를 짜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의미는 생성-변성의 진행과정에서 이해되는 가상적이고 동태적인 것이다 : 의미는 우리를 둘러 싼 어두운 배경에서 최초로 생성되어, 자연과 문화의 경계에서 사건과 표면 효과를 통해 발생되고 또 계열화되어 결국 평범과 진부라는 의미의 종착역에서 소멸한다. 이와 같이 의미는 의미의 무질서 혹은 과잉으로서 이해되는 무의미로부터 진화되어 거의 대부분의 경우 집단의 목적을 위해 인위적으로 선택되고 만들어진 양식이다. 역사는 기억으로부터 왜곡된 의미의 폭력이고, 문화는 오랫동안 우리의 감각을 마비시킨 의미의 족쇄이다. 그래서 우리가 인지하는 대상의 의미는 사실상 문화적으로 코드화 된 표피에 불과하고 역으로 그 이면에 어둠의 배경에서 최초 무형으로 생성된 무엇(본질)을 감추고 있다.

그래서 원래 이미지는 문화화 된 의미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어떤 존재를 누설하는 생성이다. 특히 언제나 시각적으로 존재했던 대상만을 보여주는 사진 이미지는 그 자체가 무의미의 메시지.즉 탈 코드이다. 거기서 어떠한 의미도 고착되어 있지 않다. 만약 이미지가 “이것은 무엇을 말한다.”라고 쉽게 읽혀진다면 그것은 단지 우리가 어떤 분명한 메시지를 위해 임의적으로 정해 놓은 하나의 약속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또 한번 어리석게도 사진은 언제나 유일한 하나의 정답을 은닉한 어떤 특정한 의미나 새로움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 사진은 원래 문화적으로 결정된 의미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문화 이전의 ‘자연’이라는 원형을 상황으로 암시하는 유일한 재현도구이다. 이때의 사진을 그러한 것을 재현하는 장치라는 뜻에서 “사진적 장치” 라고 한다. 결국 사진을 찍는 다는 것은 의미가 아직 들어가지 않은 빈 껍질 그대로인 존재(시물라크르)를 누설하는 행위 즉 “사진적 행위”이다.
이처럼 우리의 세계는 동전의 양면처럼 크게 두 가지 관점에서 이해되는데, 같은 대상이라할지라도 그것을 이해하는 방식은 정반대로 나타난다. : 한편으로는 모든 대상(복사)은 최상의 지향성을 말하는 가상적인 원본(이데아)을 가지고 거기서 각각의 의미를 부여받고, “정도상의 차이”에서 공간성과 시간성 그리고 역사성을 가진다고 생각하는 과학적인 사고(인식론)이다. 또 한편으로는 모든 대상은 가상적인 것이 아닌 최초 고유의 본성을 가지며, 바로 이러한 “본성상의 차이”에서 대상들은 가상적인 것이 아닌 최초 고유의 본성을 가지며, 바로 이러한 본성상의 차이에서 대상들은 분절(분화)한다고 생각하는 정신적 사고(존재론) 이다. 이러한 이분법은 크게 철학적 견지에서 전자를 흔히 플라톤주의라고 하고 후자를 반 플라톤주의라고 한다. 그러나 이 두 관점은 현실에서 존재하는 대상의 종류에 따라 분류된 것이 아니라, 단지 대상의 근본을 이루는 본질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른 것이다.

이데아의 세계와 각각의 세계로 나누어지는 플라톤 동굴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의 현실인 감각세계이다. 이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대상을 보는 방법이 달라지는데 플라톤은 이러한 감각의 세계를 몇 개의 단계로 구분하였다. 그러나 플라톤에게 분할은 분류의 문제도 아니고 장르나 종과 같이 현실세계의 다양한 오브제에 대한 선별 문제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오브제 중에서 어떤 것들이 진짜 이상화된 형상 즉 원본을 가지는 복사(원본-복사)들인가 또한 어떤 것들이 잘못된 복사들(복사-복사)인가를 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동굴 안에 있는 모든 대상들은 복사본이다. 그러나 그 복사본들은 원본의 닮음에 따라 단계별로 나누어진다. : 일차 복사는 최초로 조물주에 의해 원본인 이데아로부터 아주 정확히 모방된 일차 복사들을 말하는데, 전락 이전의 인간과 같이 진정한 닮음복사본들이다. 이것들은 형상 안에 있는 이데아를 복사한 정말로 닮은 복사들로, 동굴의 빛이 들어오는 영역의 인식대상들이다. 플라톤주의는 바로 이러한 닮음 복사에 의해 가짜로부터 진짜를 또는 환상이나 허상으로부터 현실의 진정한 사물을 객관적으로 구별하고 나아가 진리를 추구할 수 있다는 객관적 관념론이다. 여기서 오늘날 우리의 과학적 시각인 인식론은 엄밀히 말해 이러한 내적닮음을 가지는 상부구조의 대상들(일차 복사물)에 그 대상들의 원본(닮음) 즉 형이상학적 원리를 적용하여 그것의 논리와 의미를 파악하려는 일종의 실증주의 이다.

또 한편으로 플라톤 동굴의 어둠의 심연에서 퇴화된 이차 복사물과 삼차 복사들이 있는데, 이것들은 모방 아래의 하급 단계에서 원본과 멀리 떨어졌다는 이유로 하부구조의 저급한 대상들이 된다. 이러한 계급에서 가장 아래에 있고 모든 것들 중 가장 퇴화되어 나타나는 것들이 이데아의 환상이나 신기루 또는 허상인데, 플라톤은 이것들을 거의 잘못된(가짜)복사로서 시뮬라크르라고 지칭하였다. 그러나 플라톤은 사실상 거의 시뮬라크르들을 언급하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은 이데아의 닮음을 가지고 있지 않는 잘못된 복사로서 이해되어 우리의 감각세계에서 소외되고 추방된 것들이기 때문이었다.

플라톤주의에서 볼 때 시물라크르 세계는 플라톤 동굴우화에서 환상주의로부터 현실을, 시뮬라크르로부터 사물 자체를 구별하는 가능성을 거부하는 혼돈의 세계이자 허상의 세계이다. 예컨대 신은 그의 이미지로 인간을 창조했고 그래서 인간의 원본은 진정한 복사라고 한다. 그러나 인간의 원죄이후, 신과의 내부적인 닮음은 좌절되어 인간은 하나의 잘못된 가짜 복사 즉 시뮬라크르로 전락하게 된다.

그러나 반-플라톤주의에서 시뮬라크르는 현실에 존재하는 대상들의 배경 또는 질료를 이루는 발생적 존재가 된다. 쉽게 말해 동굴안에 있는 대상 전체를 곧 우리의 실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거기서 더 이상 상부구조의 원본인 이데아는 존재가 인지하는 것들은 동굴에 빛이 들어오는 영역 즉 인식 대상들로 빈 껍질인 시뮬라크르에 의미라는 구체적인 내용물을 체우면서 진화된 것들이다.

시뮬라크르가 무엇과 닮는다는 것, 그것은 닮음이 아닌 것의 이데아를 닮은 것이다. 그래서 시물라크르는 닮음이 아닌 것과 껍질과 알맹이 상이에서 차이의 이데아(질 들뢰즈의 차이 존재론)를 가진다. 이와 같이 대상의 본질 파악은 상부구조와 원본 대조(원본-복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질서, 혼돈, 심연등과 같이 비유되는 하부구조의 최초생성에 있다. 거기서 가짜로부터 진짜 또는 원본과 복사를 분할하는 독립적인 관점을 가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현실은 지금 이러한 모든 존재들(상부와 하부)을 전체로 내재화 즉 통합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이러한 미로와 심연이 바로 플라톤의 동굴이고 우리의 실질적이 현실이다.

“니체는 이러한 동굴에 있는 모든 종류의 존재를 부인하면서, 태양과 신선한 공기로 이어주는 통로 대신에 단지 또 다른 동굴로 이어주는 통로만 있었을 뿐이라고 단언하면서 플라톤 주의를 공격한다. 후기 구조주의자들의 담론들 중 중요한 한 부분은 위장된 닮음의 단순한 효과로 간주되는 그들의 현실적 시각에서 니체를 따른다. 그들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실재가 아니라 시늉과 신호에 의해 생산되는 현실효과라고 말한다.”

정도의 차이에서 모든 대상을 양과 크기로 비교하는 인식론에서 볼 때, 우리를 둘러 싼 모든 대상은 원래 정답 없는 시뮬라크르가 아니라, 누군가가 내 놓은 수학 문제와 같은 것으로 반드시 그 속에 정답이 있고, 이러한 가설을 토대로 새로운 공리나 영원히 변하지 않은 진리를 얻을 수 있는 분석 대상이 된다. 그래서 세상에 존재하는 대상들은 건축물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총체로서 연대성과 상호 의존 관계들을 가지는 거대한 그물망이나 유기체의 구조물로 이해된다. 구조를 이루는 요소의 의미는 체계의 충체속에서 그 위치에 의해 규정되는데, 이는 서양 장기놀이의 각 말들이 각각의 상황에 의해 서로서로 규정되는 놀이 규칙과 같다(구조주의). 이때 시뮬라크르는 하나의 존재가 아니라 단지 총체를 위한 하나의 자료가 된다.

그러나 본질상의 차이를 근거로 하는 생성존재론적 관점에서 볼 때,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은 현재와 동시성 그리고 대상들의 질적 차이만 있을 뿐 , 영원히 불변하는 어떤 규칙이나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거기서 의미는 단지 생성 -변성하는 진호과정의 한 단계일 뿐이다. 우리의 세상을 말하는 실재라는 거대한 현실은 의미와 상징들의 문화적 활동영역에서 이해되는 대상들(현실태)과 또한 그 대상들을 현실화시키는 일종의 배경이 되는 대상들(잠세태)로 구성된다. 이것들은 언제나 현재에 동시에 그리고 무시간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현실태만 인식되는 일상에서 잠재태는 언제나 현실태로 위장되어 나타난다.




그래서 엄밀히 말해 우리를 둘러싼 모든 대상들은 우선 잠재태(시뮬라크르들)가 만드는 가상적인 출현 즉 “현실효과”이고, 거기서 문화적으로 인식되는 대상이 현실태이다.
결국 이러한 관점에서 진실은 상부구조원본인 이데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부구조의 시뮬라크르에 있고, 오히려 가상적인 것은 복사-복사인 시뮬라크르가 아니라 원본-복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든 것을 문화적 형상의 틀속에 가두면서 오랫동안 시뮬라크르의 존재를 억압하고 소외하여 왔다. 현실은 현실이 아니라 현실효과이고, 그 효과들 중 극히 일부만이 우리가 현실이라는 의미를 부여하여 왔다. 구조주의의 논리와 의미의 폭력은 효과들에 대한 또 다른 존재의 발견은 결과적으로 구조주의자들에게 니체의 반-플라톤주의로의 회귀를 강요한 셈이 되었다. 사진은 구조주의의 구체적인 실행인 모더니즘의 예술을 전복하고 동시에 메타-구조주의(후기구조주의) 설정을 위한 가장 적절한 매체가 되었다. 왜냐하면 사진은 구조 없는 수많은 구조들의 현실효과들을 포착하는 탁월한 재현 매체가 되었다. 왜냐하면 사진은 구조 없는 수많은 구조들의 현실 효과들을 포착하는 탁월한 재현매체임과 동시에 시뮬라크르의 역설을 위한 모델이 되었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실재는 바로 이러한 현실효과의 예술적 실행을 말하며 거기서 시뮬라크르의 누설은 사진의 인덱스이기도 한다.

오랫동안 대상의 구조물로 믿어오던 의미와 코드를 넘어, 어느 날 유령 같이 출현한 기의 없는 기표들, 어딜 봐도 특이한 것 없는 무감각 그 자체의 일상의 평범들, 이해할 수 없는 무의식의 내재적 충동들, 뭔가 잘못된 어떤 황당한 부조리들, 형용할 수 없는 이상한 감성의 음색들 등과 같은 것들은 시뮬라크르가 만드는 상황적인 현실 효과들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더 이상 플라톤 동굴의 허상이나 환영이 아니라, 우리를 싸고 있는 현실의 진실임과 동시에 존재의 증거이다. 사진을 찍는 다는 것, 그것은 바로 이러한 상황을 연출하는 부조리 연극과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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