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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abel  [homepage]님께서 남기신 글 (2002-12-20 02:10:13, Hit : 7858)
[re] [펌]포럼A 주재환 인터뷰(잘린 것 나머지)
사회  이제 이야기가 사회를 대하는 작가의 윤리적 태도, 특히 여기-이곳에서 작업하는 예술가들의 작업 이전의 삶의 전망 같은 것으로 넘어가는 것 같습니다. 평소 공성훈 씨는 자신이 작가도 미술가도 아닌 ‘미술관계자’로 불리는 걸 좋아하시는 것 같은데, 그 속에서 나름의 윤리적 태도를 은연중 내비치시는 것으로 생각되는데요.

공성훈  예전부터, 직장인처럼 하루에 8시간은 작업을 해야 내가 직업인으로서의 화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중·고등학교 시절의 영향인지, 그 때는 하루에 꼭 한 장씩 그림을 그렸으니까요. 그런데 대학 진학 후 뭔가 어긋나더라고요. 그러나 실제로 92-93년에는 꾸준히 매일 작업을 했어요. 그러면 떳떳할 것 같았지요. 그러니까 제 의식 속에는 스스로가 화가로서의 노동을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 라는 강박 같은 것이 있는 거죠.

박진화  좀 다른 의미에서 저는 죄의식이 없는 사람은 화가가 아니라고까지 생각해요. 여기서 죄의식이란 시대적 흐름 속에서의 피해의식뿐 아니라 인간 본연의 절박한 윤리적 태도를 말합니다. 젊었을 때 기성사회를 보면서 반발하고 저항했던 70년대는 군부 독재 정권의 막바지여서 학내 사정도 혼란스러웠지요. 그런 시대 상황에 자의식까지 중첩되어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졸업 후에 한동안 그림을 그리지 않았습니다. 그후 다시 그림을 그리면서도 유명한 화가가 되지 않으리라는 자신을 향한 약속을 지금까지 하고 있습니다. 아까 배영환 씨도 말했지만 작가적 제스츄어에서가 아니라 내 범위에서 내 태도대로 해보자는 의미에서 선생님 작업의 진정성이 제게는 와 닿았습니다. 그리고 아마 그런 점이 ‘작가  주재환’에 대한 관심에 앞서 ‘주재환 선생님’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배영환  주 선생님께서 자신을 주변인으로 돌리시는 말 속에는 사회에 대한 윤리의식이 들어 있다고 느껴집니다.  이중섭의 신화 중에, 나이 들어 동네 아이들의 발을 씻겨 주면서 ‘나는 평생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라고, 자신을 주변인으로 돌리는 예술가적인 죄의식 내지는 자의식이 있습니다. 그런데 작가는 왜 사회적으로 그런 윤리 의식을 죄의식처럼 갖게 되었는지 저로써는 어떤 때 궁금해져요. 예를 들면 현재에는 하루 평균 8시간의 노동윤리가 있지만 19세기말의 한 사회주의자는 하루에 3시간만 노동하자는 단체를 만들기도 했어요. 그런 주장에 비추면 화가들은 이상할 정도로 노동 윤리에 시달리는 데다가, 한국 사회에서 확보되지 않은 작가적 정체성 때문인지 지나친 죄의식을 갖는다는 생각이거든요.

공성훈  그건 우리뿐 아니라 다른 나라의 작가들에게도 있다고 하더군요. 어디에서 들은 얘기인데 미국 서부의 작가들도 노동에 대한 윤리 의식이 강박적으로 있어서, 어느 날 브루스 나우만이 작업실에 출근을 했는데 마땅히 할 것이 없어 비디오 카메라 앞에서 계속 농구공만 튀기고 있었다는 일화가 있거든요. 작가들의 그런 강박 관념은 세계적인 것 같아요.

박진화  저는 그런 수동화된, 강요되는 듯한 근면함에 대한 역겨움이 있었어요. 7-80년대에 어찌보면 가장 예민한 시기를 보낸 저로써는 그때의 사회적 요인도 그런 생각을 하는데 크게 작용했겠지요. 기성 사회가 무책임하고 부도덕하게 느껴졌기 때문에 정직하게 산다는 것은 차라리 그런 판에서 발을 빼고 사는 것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주재환  작가의 윤리라든가 하는 이야기를 들으니까 이런 생각이 나요. 제가 20대에 친구들과 그림에 대한 논쟁을 종종 했었는데 나는 당대 최고의 작가로 ‘고바우 영감’의 김성환을 꼽았었어요. 옛날에는 광부 매몰 사건도 많았고...? 우리 세대는 끔찍한 걸 많이 봤거든요. 지금도 변한 건 별로 없지만...? 그게 무의식중에 윤리에 작용했던 것 같아요. 생존에 급급했던 젊은 시절에는 그림 그리는 것을 사치라고 생각했어요.  

공성훈  노승일이라는 바둑관전 기자가 쓴 프로기사 차민수의 실명 소설이 있는데 그 소설에 이런 구절이 있었어요. ‘남자로 태어나서 갖는 가장 큰 사명은 가족을 먹여 살리는 일이다.’ 저는 어떻게 보면 너무 단조로워서 수상한 이 문구가 왠지 감동적이었어요. 여러 가지 저질러지는 사회적 부정을 보면서, 정말 이런데서 지낼 바에야 한가하게 발을 빼고 살겠다고 생각들은 하겠지만, 그렇다고 고사에 나오는 죽림칠현처럼 물러나서 한 곳에 매진하는 사람도 별로 없어요. 이런 갈등이 묘하게 교차되어 있거든요. 그리고 그런 갈등은 일정한 조직에 매이지 않고 혼자서 세상을 봐야하는 작가들에게는 더 심한 것 같고요.  

주재환  윤리와 비 윤리의 문제는 살아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착종과 갈등을 끌어안고 고민하는게 정상이라고 봅니다. 내일 모레가 환갑인데도 이런저런 욕망이 들끓고 혼란스러워요.

류용문  제 느낌으로는 오늘 좌담에서 유독 작가의 윤리에 관한 내용이 많은 것 같습니다. 작업에 관한 얘기를 할 때도 그 밑바닥에는 윤리적 태도를 강조하는 분위기가 있는데 작가가 왜 작가 스스로 작가의 윤리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어야만 하는지 짚고 넘어가야할 것 같아요.

주재환  얼마 전에 본 TV 외화에서 어느 시인이“돈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시인은 TV수리공보다 못하다”는 대사가 인상적이었어요. 아마 그런 말이 실감나는 시절이어서 아닐까요.

박진화  7-80년대는 군사 독재가 억압하던 시대여서 하나의 점을 쳐다보고 있으면 윤리가 어느 정도 해결되는 듯 한데, 90년대는 시대적 배경도 다르고 미술의 지형도 완전히 바뀌어 어떤 가치 판단을 해야 할지 혼란스러워지면서 다시 이런 문제가 대두되는 게 아닐까 생각  되는데요. 특히 주 선생님의 작업에서는 그런 면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듭 논의가 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진정성이 도저히 검증 불가능함에 비해 윤리라는 문제는 전체적인 상황 속에서 어느 정도 판단이 가능한 이유도 있겠지요.

류용문  보통 사람에게 용인되는 윤리와 작가에게 요구되는 윤리의 수준은 좀 다른 부분이 있죠. 그건 한 사회 안에서 통용되는 작가의 위상과 연관되는 것 같아요. 저 스스로는 제가 아직은 작가 지망생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그런 입장에서 제가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상당히 고급취미생활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가끔 자괴감같은 것도 느끼지요. 그런데 주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텔레비젼 수리공과 시인의 위상에 대한 시인의 자조적인 말이 실감나는 지금과 같은 시절에, 과연 작가가 감당해야할 윤리의식이 그렇게 커야만하는지 하는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배영환  화가의 윤리 의식이나 죄의식이라는 게 저로써는 좀 박하게 말하면 자기애에서 비롯되는 게 많은 것 같아요. 검증 불가능한 자기 윤리에 지나치게 치우치지 않나 싶습니다.  아까 극단적인 예로 이중섭의 일화를 들었지만 누구든 현실의 돌아가는 틈바구니에 있으니까 아무 할 일이 없이 살 수 없죠. 그냥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행동을 하기까지의 태도와 그 행동을 보고 윤리라는 말이 성립되는 거죠. 주 선생님의 작업에서 보여졌던 것도 그런 면에서 이야기 할 수 있겠지요.

사회  이제 윤리에 관한 얘기는 윤리적으로 어느 정도 된 것 같으니까 이야기를 좀 바꿔서 작가의 작업에 관한 성실성과 처음에도 좀 나온 얘기입니다만 작업, 또는 작품의 경계는 무엇인가에 관해 얘기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시간도 많이 흘렀으니까요. 우선 제가 느끼는 바를 말하자면 주선생님은 좌담 내내 생활의 여러 관계로 인해 작업을 하지 못했다고 말씀하셨지만, 저는 그 작업들 속에서 박모 씨의 작업과 유사한 점들을 느꼈습니다. 설치나 매체미술에서는 성실성이 종종 자본과 노동의 투입으로 평가되기도 하는데 선생님의 작업에서는 박모 씨의 작업에서와 같은 최소한의 재료, 움직임을 통해 최대한의 개념을 낚겠다는 태도가 보입니다. 어떤 때는 그것을 저예산 예술이라고도 하는데 공성훈 씨가 얘기하는 로우테크(low-tech) 작업과도 일맥상통한다고 생각됩니다. ‘성실’이 왜곡되어 있는 상황에서 성실을 바라보는 작가로서의 태도는 항상 경계에 있기 마련이죠. 그럴 때 우리가 최소한의 품을 팔아 얼만큼의 작업을 하면 작가로서 태업이 되고 얼만큼 물러서면 성실한 수행이 되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박진화  작가의 성실성은 우선 작업 자체로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작업을 하다 보면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성과 중의 중요한 부분으로 노동의 성과가 있어요. 문제는 성실성을 상품화하는 것이죠. 나는 성실하다고 온 몸으로 시위하는 것 같은 태도 말이죠. 작가는 성실해야 하고 작업에 자신의 거의 전부를 싣는다는 측면에서의 성실함은 중요합니다. 성실히 수행하다보면 상품화라든가 하는 비판의 소지는 배제할 힘이 생기게 됩니다. 그런 측면에서 삶의 태도, 작가적 태도가 중시되는 것이죠. 역으로 말하면 그림으로 그런 성취가 가능할 것 같아 작업에 매진하는지도 모르죠.

배영환  주선생님께서 아까 나이가 들었는데도 혼란스럽다는 이야기를 하셨는데 저는 그것을 문자 그대로의 혼란이라기보다는 작가의 태도로 생각합니다. 제가 사춘기에 좋아했던 작가가 있었는데, 초기작에서는 구원을 열망하는 인간의 혼란을 그렸어요. 그래서 그것을 읽는 저에게도 어떤 뜨거움, 사람에 대한 반성적 시선들을 생각하게 해서 제가 좋아하는 작품이 됐단 말이에요. 그런데 다소 유명해 지자 어느 날 갑자기 득도한 사람이 된 것처럼 고고한 폼으로 한 세계에 안주하더군요. 미술계 역시 그런 풍토가 있어요. 초기의 민중미술만 하더라도 민중시를 시각적으로 그냥 번안해 놓은 듯한 도상이 많고, 또 노동자들에 대한 맹목적일 정도의 애정이 끓어 넘치는 것처럼 보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도사연하는 이들이 많아졌단 말이죠. 제 생각에  주 선생님께서는 그런 맹목적 열정과 초탈한 자세를 다 피해 가려고 노력한게 아닌가 싶어요. 아마 그건 작가가 예술적 재능에 절망해 보는 것은 차라리 혜택이고 전부 생활에서 좌절하는 경우가 많은 우리나라에서 그 두 가지의 끈을 놓지 않고 그 사이의 긴장을 유지하셨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건 작가적 성실성이죠.

공성훈  저도 기본적으로 조금전의 박진화 씨 말씀에 동의합니다. 그리고 ‘미술관계자’의 입장에서  볼 때 특히 화가는 다른 매체와는 달리 성실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아까 얘기했듯이 가령 유화물감에는 수백 년의 역사가 어떤 체계로 남아 무거울 수밖에 없지요. 그 절대의 무게를 감당하려면 성실한 것이 필요조건이 되어야 하는데, 성실하기만 한 작가가 그것만으로 화가로써의 충분조건을 갖춘 좋은 화가, 좋은 작업으로 평가되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직업인으로 친다면 화가는 파업을 해도 사회적인 여파가 없다고 하는 인식이 팽배한 사회에서 파업은 불가능하죠. 태업 역시 비판될 수 없다고 봐요.  박모 씨의 경우는 어느 면에서는 태업이지만 정치적인 측면에서 그 태업을 이용하는 경우니까 순수한 의미에서의 파업이나 태업은 불가능한 거죠. 이건 좀 다른 얘기지만 러셀의『행복론』에 현대사회에서 화가가 불행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나와요. 과학자와 화가는 어떤 정해지지 않은 목표를 향해 매진한다든가 성공에 대한 확신이 없다든가 하는 유사한 면이 많은데 현재의 시스템에서는 과학자보다 예술가가 훨씬 불행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과학자는 연구의 성패와 상관없이 인류에 도움이 될 거라는 희망이 있지만 화가는 그런 희망이 없다는 거였어요. 어떤 의미에서는 화가의 성실성이라는 것은 자가당착 같기도 해요.

주재환  여러분들의 말을 끊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저는 사실 진정성, 성실성 같이 ‘성’자 들어가는 말 안 좋아해요. 누가 쓴 건지 이런 낙서가 기억납니다. “지리멸렬, 이것이 저희가 사는 세상입니까. 그렇다. 이것이 너희가 사는 세상이다. 어쩔래.” 그 연유야 어찌됐든 ‘고단한 세월’에 그래도 한가닥 희망을 꿈꾸면서, 그 희망의 실체는 대개 뜬구름이지만, 각자 나름대로 지지고 볶으면서 최선으로 사는 수밖에 없어요. 그게 아마 진정성이겠죠. 그리고 오늘은 우리가 좌담을 하면서 이러저러한 일들에 대해 이야기 하지만 내일이면 말이 또 달라질 수 있어요. 사람은 늘 부유하는 거니까. 저는 작업을 통해 인간의 몸부림이 눈에 선한 생활일선에 더 근접해있고 싶어요. 예를 들면 <폰팅맨>, <싼%> 두 점은 생활정보지에 실린 광고를 오려내서 만든 것이지요. 비유하자면 최전방 관측소에서 본 생동하는 현실이 동기가 되었어요. 일간신문에는 재벌의 광고가 나지만 생활정보지에는 영세업자들의 광고가 실리거든요. ‘싼%’라는 너무나 직설적이며 괴이한 합성어에서 죽느냐 사느냐 하는 절박한 현장의 신음소리를 듣게 되지요. 저와 가까운 동료들이 ‘비싼’ 보다는 ‘싼’이 더 많아 이런 작품이 나오는지는 모르지만...? ‘싼%’는 크게 뭉뚱그려 이 시대를 살고있는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 아닌가 합니다.

사회   여태까지의 이야기에서도 많이 묻어 나왔습니다만, 주선생님 작업의 경계, 또는 형태적, 글쎄 적당한 말을 찾기는 어렵지만 우리가 일상적으로 예술품으로써의 작품이라고 할 때의 그런 이미지와 좀 다른 주선생님 작품에 대해 이야기해보죠.

공성훈  의도적으로 삐끗하는 듯한 선생님 작품을 볼 때 처음에는 좀 당혹스러웠어요. 그러니까 삐끗하는 의도가 선명하지 않은 점 때문이랄까요. 사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그리던 관성에 의해서라도 더 잘 그리게 되잖아요. 그래서인지 97년에 제작된 회화는 그전보다 우아해지고 아우라도 생기는 것처럼 보였어요. 그런데 올해는 또 그걸 접으시고 꼴라쥬를 많이 하셨더군요. 제가 볼 때 주선생님은 고급미술에 대한 거부감이 있으신 것 같아요. 이런거죠. 관객들에게, 뭐 화가가 대단하냐, 나처럼 하면 다 예술가처럼 살 수 있지 않느냐 하는. 저는 그런 작품들에서 일견 모더니스트 프로젝트 중의 하나인  작가의 태도를 본 것 같습니다.

박진화  선생님 연배의 분들이 갖고 있는 실존주의적인 태도가 있잖아요. 저는 선생님의 전 작업을 자기 실존을 거는 것으로 봤습니다. 아까 제가 98년의 작업이 다소 내적인 절제가 결여되어 있지 않는가 하는 비판을 했었는데 자기 실존이 너무 빨리 빠져 나와 마치 절제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나 싶어요. 선생님의 성공적인 작업이 일반적인 특성과 함께 동시에 그렇게 자기실존이 걸려 있는 경우에 설득력을 갖는다는 의미에서는 60년대 실존주의에 침윤되었다고도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제가 놀란 것은 그런 측면의 우리나라 작가들이 한결같이 자신의 존재에 대한 물음에 함몰되는 경우가 많은 것에 비해 선생님 작업은 현실 상관적인 작업이라는 것이죠. 그 두 측면을 한 화면에 결합시키는게 놀라웠어요. 특히 <쇼핑맨>, <폰팅맨>을 보면 정보적인 면과 더불어 현대인의 실존적인 고독이 느껴지거든요. 그걸 결합하는 힘이 선생님 작업의 핵심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배영환   우리 풍토에서는 성실성이 작업보다 부각되어 가치부여의 잣대가 되곤 하는데 한편으로는 야만적인 순종주의, 서열주의가 있으니까 오히려 저는 주선생님 작업의 특징은 작가적 태도가 강렬하게 드러나는, 혹은 드러내는 것이라고 하고 싶네요. 회화에 한해서 얘기한다면 주 선생님의 회화는 전통적인 방식을 취하고 있지만 일정 수준에 이르려는 기술로서의 회화가 아니에요. 아까도 말했지만 일기를 쓰듯이 작업하는 작가라 할 때 비유적으로, 일기조차 보여주기 위해 거짓으로 쓰기도 하는 풍토에서 이런 작업이 가치를 지니는 것이죠.

박진화  배영환 씨의 얘기는 다소 수동적인 측면에서의 얘기일 수도 있다고 봐요. 제 생각엔 그걸 적극적으로 넓힐 수는 없는가 하는 겁니다. 전통을 폐기하자는 게 아니라 적극적인 의미에서 주 선생님의 작업을 미술의 어떤 부분에 정초시키고 뿌리를 내려 미학적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모색 할 수는 없을까하는 거죠.

류용문  아까 최전방 관측소 얘기를 하셨는데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은 전위와 후위가 불분명한 상황인 것 같아요. 이건 제 개인적인 경험에서 떠올려본 생각인데 저는 군에서 포병부대에 복무했기 때문에 최전방 관측소를 현실로 체험했거든요. 최전방이라 처음엔 앞에 적이 있는 것으로 알고 경계하는데 알고 보면 적보다 훨씬 안으로 들어온 거예요. 그래서 앞이 아니라 뒤를 살펴야 되죠. 전위는 그 지점으로만 따져서는 적과의 구분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때 몸으로 느낀거죠. 특히 밖에서 볼 때 그 위치만으로는 편을 가릴 수가 없어요. 비유하면 저는 후방지원사단에 있다보니 전위 중에 누가 진짜고 가짜인지 진위를 가릴 수 없다는 느낌이 항상 듭니다. 아니 어떤 것이 전위이고 후위인지, 우리 미술에 그런 것들이 실재하는지 조차 의심스러워요. 우리가 모색해야 할 것이 전위의 패러다임인지 후위의 그것이어야 하는지가 저에게는 과제처럼 남습니다.

사회  이 좌담에서 주선생님이 하신 이야기를 쭉 듣다보면 선생님의 세대의, ‘성’자 붙은 말은 싫다고 하셨지만, 윤리의식의 가장 큰 검열관은 생활이라는 전선이었고, 예술적 독전관 역시 그 전선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저희에게 그것은 보다 추상적인 그 무엇이었을지도 모르겠는데 그 지반이 균열되면서 갈피를 잃었던게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해 봤습니다. 남은 이야기가 있으면 마저 하시고 좌담을 마칠까 하는데요.

주재환  젊은 작가들과 오랜만에 작업에 관한 이야기를 하니까 긴장도 되고 작업에 관한 의욕도 생기는 기분이에요. 맨 처음에 얘기했지만 전시 후의 비평모임 같은 것이 있었으면 더 많은 이야기들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 뿐만이 아니라 여러 작가들이 서로의 작업에 대해 토론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회  각자의 작업 스타일이나 태도들이 많이 다르다보니 이야기가 다소 방만해지기도 했지만, 주선생님을 포함해서 이곳에서 작업하는 분들의 문제의식은 어느 정도 드러난 것 같습니다. 문제의 해결이랄까 답은 각자의 작업에서 구체적으로 전개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내년 중에 주선생님의 전시가 열리지 않을까 싶은데, 오늘 좌담에서 미진했던 부분은 그때 있을 ‘비평’  시간에 이야기하기로 하고요. 오랜 시간동안 진지하게 말씀 나눠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정리: 김희정, 박은하                                     


                         



    주 재 환,  앙 데 팡 당  


                                                                                      황세준  

  

   주재환은 너무 넓어서 풍경 같다. 그런데 예술가로써 그의 풍경은 신화적이거나 기이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말마따나 매우 평범해 보인다. 좁은 골목들, 그만그만한 집들과 구멍가게가 들어서 있는 흔한 동네풍경. 하지만 언뜻 뻔해 보이는 이 풍경은 들여다볼수록 깊어서 어디에서 갈피를 잡고 어느 길에서부터 윤곽을 잡아야 할지 망설이게 만드는 그런 것이다. 그건 그의 내부에 있는 모든 집들과 길들이 저마다의 사연을 오롯이 담고 있고 그것들은 각자 현재적 삶을 살고 있어서이다. 모든 삶은 저마다 중요하다. 주재환이라는 풍경 속으로 들어가 그것의 이곳 저곳을 더듬어 본다는 것은 ‘평범’이라는 낯익은 삶 속에 들어있는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것이고,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자기 절제를 통해 얻어지는 것인가를 알아내는 일이다. 무한이 유한 속에 있듯이, 비범한 것은 평범한 곳에 있다. 그러나 그것을 알아채기는 왜 그리 어려운지. ‘탐방기’라는 것을 쓴답시고 일산 신도시 ‘밤가시 마을’에 있는 그의 작업실을 두어 번 다녀오고, 이런저런 일로 그를 만나면서 나는 내가 얼마나 주제 넘는 일을 맡고 있는지 절감했다

선생님



그가 없는 사석에서도 나는 그를 지칭할 때 ‘주 선생님’또는 ‘주재환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연배 상 이십년 이상 차이가 나는 어른이므로 그것은 당연한 일 같지만, 본인이 없는 자리에서의 나이 차이라는 것은 호칭에 별 영향을 못 끼친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상 알고 있다. 그러니까 뭐 이런 식이 된다. “뭐뭐뭐 선생 뭐가 그게 뭐냐?” 거나 조금 기분이 상해 있을 때면 “뭐뭐뭐, 그게 뭐뭐냐?” 덧붙여 욕설 몇마디 등등. 그가 없는 자리에서도 내가 그에게 존칭 비슷한 것을 쓰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내가 그를, 혹은 그의 작업을 좋아해서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그는 나의 선생님 격이기 때문이다; 사소하다면 사소한 이런 문제들에 내가 민감한 이유는 내가 쪼그만 신경질의 사람이라서 그런건데, 사소한 일은 나에게 그 무엇인가를 증명해 준다. 우선 그는 나보다 대학을 일찍 그만둬 버렸다. 82학번인 내가 ‘학교는 다니기 싫지만 그렇기 때문에 졸업은 해야하는 것 아닐까’, 라는 이상한 생각에 겨워 무려 3년을 허비한 후 84년에야 학교에서 잘려나간 반면, 60학번인 그는 60년 1학기를 마치고 ‘차비가 없어서’ 학교를 그만 두었다; 나중에 그는 차비가 없어서라는 말은 과장이고, 자신은 과장을 싫어한다고 얘기했지만 어쨌든 그는 깨끗이 대학에서 생활로 빠져나갔다. 다음은 군대 문제. 가뜩이나 가기 싫던 군대였으나 85년, 징집영장을 받았을 때 나는 ‘연애’하고 있었으므로 더 더욱이나 군대에 가기 싫었다. 그래서 47킬로이던 몸무게를 43킬로까지 줄였지만, 군의관한테 말 한마디 잘못하는 바람에 군대에 가고야 말았다. 그는 병역기피자다. 물론 지금은 다 해결된 문제지만. ‘아니 어떻게 군대에 안 가셨어요’라고 내가 묻자 그는 ‘게을러서 학교에 있는 병적 카드를 동회로 옮기지 못하는 바람에’라고 대답한 후, ‘에이  군대란 데가 뭐 하는 데니, 그런데 내가 어떻게 군대를 가갔니’라고 부연해서 대답했다; 앞에 그리고 뒤에 있을 그의 이야기는 나와 사적으로 나눈 이야기들이다. 그로써는 제자 뻘 되는 후배에게 농담 삼아, 허물없이 한 말이 공식적으로 활자화되는 것이 달갑지 않을지도 모르겠으나 나로서는 할 수 없다. 나는 고자질하는 자의 역할을 맡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활. 나는 별 직업 없이 ‘작업 합네’하는 태도로 일종의 민폐를 끼치며 근 십 몇년을 살아왔다. 발이 공중에 떠 있다. 그는 ‘딱딱이’라고 불리던 야경꾼에서 행상, 외판원 그리고 출판사 편집자 등 언제나 ‘작업 합네’와 상관없는 직업전선에 서 있었다. 아직도 나는 ‘혐의’와 ‘감개(感慨)’사이에서 사람들을 만난다. 사람에 관한 평상심을 도무지 유지할 수가 없다. 나는 의심하고, 감동한다. 작업의 성과(작품의 성취와 별 관계없이 이루어지는 대 사회적인 어떤 것을 말함)에 대한 욕심과 그 욕심에 대한 혐오의 뒤범벅 속에서 작가도 뭣도 아니게 게을러진 나 같은 입장에서 보자면 ‘작업에 관한 만보기(萬步機)’라도 몸에 내장되어 있는 사람처럼 또박또박 자신이 해야 할 작업을 천천히 그러나 날렵하게 해나가는 그는 확실히 감동적인 무엇이고, 그가 살아온 날들의 ‘사는 일’에 관한 실천들은 나의 의심을 한 수에 제압한다. 그러니 나는 그가 없는 자리에서도 별 수없이 그를 선생님으로 불러마지 않는 것이다.

대화

“그 눔 그거 양아치야.” 그가 누구인가를 자신의 동류라도 되는 듯이 다정하게 지칭할 때 자주 쓰는 말이다; 이 양아치라는 말은 너무 낡아서 가죽의 가죽이 되어버린 가죽처럼 부드럽고 편안하다. 자신이 원래 뜻했던 것과는 거의 상관없이 이 말은 비주류의 헐거움과 평화로움을 강조한다. 나는 그의 말과 행동에서 다량의 ‘양아치성’을 검출해낸다. 그가 자신의 ‘양아치다움’을 얼마나 순결하게 유지, 보수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한가지 예로는 작업실 방문 약속을 위해 전화를 건 나와의 통화 내용이 있다; 전화를 건 상대가 나임을 확인하자 그는 대뜸 이렇게 말했다.
너 요즘 자주 빤다며?/ 예?/ 아니-, 요즘 맨날 빤다며-/ 아, 네- 좀 자주 마시는 편이지요, 뭐/ 야, 너 그래서 되갔니, 응-. 제2의 건국이라는데/ 네-/ 제2의 건국이라는데 청년이 그렇게 술을 마시면 안되잖니, 응 (그리고 표기하기 어려운 그의 독특한 웃음소리)/ 네, 뭐 많이는 안 마시고요/ 근데, 왜?/ 네, 저기 선생님 작품 슬라이드도 보고 작업실도 한번 가려고요/ 그래, 그럼 그거 한꺼번에 보자, 안 본 사람들하고 한꺼번에, 따로따로 보면 그거-, 니들도 한꺼번에 봐야 편하잖니, 응-
요컨에 그는 누군가의 말마따나 똥 께나 싸고, 방귀 께나 뀌는 모든 것에 대한 거부감을 일관성 있게 유지하고 있는 것인데, 그 안에는 제도의 그물 사이를 유영하는 자의 민첩함과 그물의 기반에서 스스로 유리된 자의 쓸쓸함이 묻어있다.

어떤 사람이 무슨 얘기 중에 ‘그런데 주선생님이 왜 갑자기 그렇게 나이가 드셨지’라고 말했는데, 나,이,가,든,다,는 것은 부실해진 치아, 오십견, 신장 계통의 이상 등으로 육체에 깃드는 것 같다. 나이가 갑자기 들어 보이는 그가, 그 어느 날 차안에서 내게 물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뭐냐고; 그는 그날의 모임에서 마신 소주에 약간 취해 있었고, 드물게도 나는 멀쩡한 정신이었다. 이런 종류의 질문에 답하기는 어렵다,라기 보다 약간 긴장된다. 요즘 흔히 쓰는 말로 ‘내공(內功)’을 시험 당하는 것 같아서. 잠깐 생각하다가 나는 순순히 대답했다. 물을 마시는데요. 물을 마신다, 그래 그거 참 좋은 거다, 근데 난 일어나면 담배를 펴, 담배를. 그는 매우 외롭고 이상스럽게 풀죽은 목소리로 이렇게 얘기했는데, 나는 이 선문답보다도 무의미한 대화가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 것이었는지 아직도 알 수 없다. 다만 나는 어둠 속을 달리는 심야의 자동차처럼 삶이 그에게 남겨 놓은 흔적을 따라 어떤 밑도 끝도 없는 회한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본 것 같다. 사랑보다 더 슬픈 건 정, 이었으므로 육체에 드는 나이보다 무거운 것은 그 시간이 지워준 회억(回憶)들, 돌이킬 수 없는 습관들, 박태순 식으로 말하자면 이 ‘정든 땅 언덕 위’.좌담원고를 팩스로 보내드렸더니 며칠 후 그에게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커피 숍에 들어가 마주앉은 나를 불러 자신의 옆자리에 앉힌 후 그는 자신이 교정 본 원고를 하나하나 내게 설명했다. 자신이 이야기한 부분 중 이런 건 쓸데없는 말이니까 빼자는 둥, 참석자가 자신의 작품을 ‘굉장히’ 아름답다고 말했는데, 뭐가 ‘굉장히’냐, 굉장히는 빼자는 둥, -적, -의,  등은 일본말의 잔재이므로 가급적 쓰지 않아야 하고, 특히 -에의는 쓰지 말아야 한다는 둥, 교습소는 일본식 조어니까 다른 말로 바꿔야 한다는 둥, 나는 내가 이오덕 선생하고 앉아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얼추 교정을 다보고 마주앉아 차를 마시며 그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거, 왜 삼성출판사에서 ‘세계사상전집’이라고 나왔잖니, 그때 그거 대학 교수들이 번역하고 나도 교정보고 그랬는데, 근데 대학교수들이 뭘 알갔니, 문장도 안되고, 그래도 그거 많이 팔아먹었다, 너, 근데, 그 함석헌 영감 있잖니, 그 영감이 ‘깐디’ 자서전을 번역했는데, 그 영감이 그거 대단해, 원고지 교정을 볼 때 틀린 거 위에 보통 펜으로 찍찍 그어서 고치잖니, 근데 이 영감은 그걸 전부 종이를 오려 붙이는 거야, 틀린데 위에다가 종이를 붙이고 다시 쓰는 거야, 너, 그 영감 대단한 사람이다” 그는 의기양양하게, 글자로 표기할 수 없는 웃음을 웃어가며 이 얘기를 했는데, 어떤 올바른 일에 대한 사심 없는 즐거움 때문에 그는 마치 자신이 ‘간디 자서전’을 번역한 사람 같았다. 이 돌발적이지만 근본적인 근면함 앞에서 나는 짜증난 초등학생처럼 얌전하게 앉아 있었다.
        
연극(演劇)

願을 세우니, 거짓말이나니/ 희망은 作用하는 거짓말이므로

내가 이 시구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것이 삶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연극성을 직관적으로 드러내고 있어서 이다, 라고 나는 스스로에게 설명한다. 사실은 희망이 거짓말이라는 표면의 말이 통쾌해서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삶이 연극이라는 인식은 ‘삶은 허구였어’라는 수사적(修辭的) 차원이거나, 살아가려면 적당히 연극을 해야한다거나 하는 기교적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라, 삶이 그 삶을 사는 자에게 일정한 거리를 요구한다는 것을 알아채는 일인데, 삶을 조망할 수 있는 거리의 확보야말로 삶에 달라붙을 수 있는 조건이기 때문이다. 마치 붙었다 떨어졌다하며 의미를 발신하는 모르스 전신기처럼. 따라서 관극(觀劇)의 시점(視點)과 자신이 극에 참여하는 시점(時點)을 서로 ‘너머’에 있게 해야 비로소 작용하는 거짓말이 작용되는 참말이 될 것이고 이 반복과 투시의 궤적이 삶의 부피이자 자신을 개관(槪觀)하는 힘으로 삶을 계속 살게 할 것이다. 그런 ‘삶이라는 연극’에 주재환은 몸으로 통달해 있다; 그것의 가장 확실한 증거는 그의 작업들이겠지만 그것에 관해서는 다른 분들이 이야기할 것이므로 여기서는 ‘그’만을 통해 얘기해야겠다. 앞서 그와의 대화에서도 인용했지만, 그는 말할 때 습관적으로 ‘─잖니’라는 소녀 취향의 어미를 가진 부정 의문문을 쓴다. 그는 이 비공격적이고 은근한 의문형 권유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다가서고 그 스스로는 ‘후라이’로 부르는 익살을 통해 즐거운 소통의 문을 연다. 그는 무거운 것은 가볍게, 그러니까 종교, 이념, 미학 등 추상적이고 제 무게에 함몰된 것들을

쏴ㄹ라 말로 희화해서 부르곤 하는데, 그것을 통해 그 단어들이 가지고 있는 엄숙주의를 휘발시킴으로써 그것들을 일상의 자리로 내려 앉히고, 오히려 작고 가벼운 것을 통해 모든 것들이 저마다 가지고 있는 존재의 깊이를 환기시킨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나는 지금

‘쏴ㄹ라쏴ㄹ라  있는 꼴이다. 되짚으면, 그런 시점의 자유로운 이동 사이사이에서 생긴 익살이 남을 다치지 않게 하려는 어법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겠는데,생각해보니까 그건 사소한 것을 공경하는 마음이자 그런 마음조차 별 것 아닌 것으로 구박할 수 있는, 철저한 아니다-그렇다의 발랄함이다; 누군가는 그의 특징을 ‘권력을 해체하려는 의지’라고 말했다. 아닌게 아니라 그는 체질적인 반골인지 그렇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권력 또는 상대적인 권력자를 싫어한다,라기보다 우습게 본다. 대신 상대적으로 별 힘없는 사람들을 배려한다. 이 대칭적 사유를 바탕으로 그는 자신에게 몽상가J씨의 배역을 부여하고, 산책 나간 몽유로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삶이 본질적으로 연극임을 실연한다. 좋은 연기란 보는 이의 존재를 확장시키는 것일텐데 그의 연기는 보는 이가 자기 삶 속에서 맡고 있는 배역을 성찰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고, 자신의 역할을 입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공간을 터 준다. 그것이 주변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고 삐진 사람들을 화해시킬 수 있는 그의 힘일 것이다. 시인의 말대로 ‘희망이 작용하는 거짓말’이라면 다른 시인의 말마따나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나는 이것이 ─잖니와 후라이와 쏴ㄹ라

만들어진 주재환의 연극이 우리에게 전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말, 메모

“현실과 발언에는 작업에 대한 가능성이랄까, 그러니까 세태풍자, 블랙유머가 있는 작업을 할 수 있겠다 싶어서 참여하게 됐고, 또 관제미술, 국적불명의 미술이 아니라 우리의 미술을 해야겠다, 하는 마음도 현발에 참여하게 된 계기가 됐지. 현발의 모임에서는 작가마다 주제발표를 했는데, 내가 어떤 주제를 발표했는지는 오래돼서 기억나지 않지만 오윤의 미술에 대한 견해가 매우 날카로웠다는 것은 기억이 나. 현발 전시에는 세번 출품했지. 서로의 작업에 대한 비평들도 많이 하고 끝나면 한잔하고, 좋은 모임이었다고 생각해. 주로 평론가들이 얘기를 많이 하고, 성완경, 원동석은 서로 논쟁도 하고, 그런데 처음에는 회원이 꽤 많았는데 점점 떨어져 나갔지. 그때 사회 분위기가걖? 겁도 나고 그랬겠지.”
“85년 민미협이 만들어지고, 나는 참여 반 구경 반이었지. 원래 체질이 주변부에서 맴도는 타입이라, 게으르고, 태만해서 그런건데, 좋게 얘기하면 욕심이 없는 거고. 87년 대표 할 때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이 있었잖아, 그래 ‘반고문전’을 연 것이 기억에 남아, 개헌서명운동도 하고. 내가 공동대표를 맡았던 87, 88년에 사무국장하던 홍선웅, 유연복이 고생 많이 했어. 어느 조직이나 그늘에서 일하는 사람은 빛을 못 보잖아. 아직도 마음의 빚이 남아 있어요. 최민화가 현장에서 그림 그리던게 기억에 남고, 근데 그거 현발에 있던 서울대 출신 화가들이 민미협에 참여한 것을 나는 높이 평가해요. 그렇잖아, 사회적 불이익을 감수하고...
“미진사에서는 미진신서─오늘의 시각예술을 기획했지. 우리 출판현실이 양서는 안팔리니까, 공예나 우리 옛것에 관한 책을 기획은 했는데 출판은 못하고. 홍가이, 이일 평론집 같은 책도 냈지. 우리 사회가 자료가 없는 사회라고 생각해서 자료로서의 가치가 있는 거니까. 기획력 같은 것은 출판사 주간을 꽤 오래 했으니까 생겼을 거고, 상산조형연구소에서 수주 받은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그랬으니까 있는거겠지.”


“먼저 유화 자체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고, 유화를 하다 보면 나이의 때가 밖으로 나가는 기분, 숙변제거를 하는 것 같지. 수신(修身)일 거야.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서 생긴 애환을 푸는 방식 이기도 하고, 또 작품을 판매하는데도 유리할 것 같잖아. 90년에 들어서야 처음으로 작업실을 갖게 됐는데, 저기 제기동에 있는 옥탑에서 한 2-3년 있다가 신사동, 은평구에 있는 그 신사동으로 옮겼다가, 96년 여기 일산 밤가시로 온거지. 요즘 들어 작업에 집중을 좀 하는 것은 작품 판매로 생활이 좀 되었으면 하는 생각도 있어. 그래야 작업하는데 재투자가 되고, 호구지책 문제 때문에 작업하는데 힘이 빠지니까. 나이가 들었다고 회고전을 하는 것은 사회적 관습일 뿐이겠지. 73년에 술집에서 첫 전시를 하긴 했지만 이제 화랑에서 데뷔전을 해야겠지. 자연스러운 일인 거 같아. 그렇지, 암각화에 나오는 인물상을 차용해요. 그게 취향에도 맞고 또 미술전공을 오래 못해서 묘사력도 별로 없고. 암각화라는 게 선사시대 생활을 바위에 새긴 거잖아, 그래서 나는 우리 시대의 암각화를 해보자, 그런 생각도 있는 거지.”
“신선한 작업이 별로 안보여서 인사동에서 발길이 점점 멀어져. 좀 실험적인 작업을 하는 작가들은 대부분 바탕이 약한 것 같애. 미술교육의 문제겠는데 과소비가 심한 거 아냐. 작가 약력 같은 거 보면걖" 광주비엔날레는 너무 거대한 행사인데다가 관중동원을 한다는 게 야만적이야, 낡은 방식이고. 도무지 볼 수가 없더라고. 보세창고에서 끌어내온 것같은 작업이 너무 많고, 그리고 내 생각에는 테크놀로지 미술은 시대정신에 안 맞아. 에너지 절약을 해야 잖아, 환경문제가 심각한데. 미술이 너무 전문적이 되가는 것 같아요. 조선시대 겸재나 단원 그림은 대중적이었다고, 지금은 미술이 지나치게 세분화 돼서 예술이 점점 소통이 안되는 거지. 나는 건축평론가가 아주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근데 너무 없어. 우리가 항상 보게되는게 건물인데 그것에 대한 비평이 없다는게 말이 안돼지, 도시평론가도 있어야 되고.”
“유년기에 전쟁을 겪은 것 때문이기도 하고, 20대 때 생활에 부대낀 것이 힘들었어. 벼라별 걸 다 했지. 사는 게 먼저니까. 그 때는 사회 전체가 불안하기도 했지. 그게 그림에, 유화에 말야, 죽음의 느낌 같은 것, 삶의 어둠이 나타나는 이유일거야.”
“내가 보기에 한국 사회는 ‘3둥’으로 요약되는데, ‘3둥’이 뭐냐 하면, 막가둥, 먹자둥, 몰라둥 이야. 그렇잖아, 막 가버리고, 막 줏어 먹고, 그리고는 난 몰라야. 이런 건 누가 가사 써서 노래로 해야돼. 조선 세종 때 ‘삼강행실도’를 만들어서 백성들한테 보급 했는데, 그러니까 일종의 윤리교과서지, 그게 사회적으로 살부(殺父)사건이 문제가 되서 그런거야. 사회적 윤리의식이 너무 없는 것에 대해 문제제기를 해야돼. 지도자라는 사람들의 말이 가지고 있는 허위성 같은 것도 밝혀야 하고.”
나는 묻고, 이렇게 들었는데, 내가 질문을 그치자 그가 말했다. “잘 물어 봤는데 이걸 안 물어 봤어. 종교문제, 이게 굉장히 중요한 거거든.” 나는 약간 머슥해 졌고, 그가 말을 이었다. “내가 특별한 종교를 가진 거는 아니지만 이런 거는 있어. 일종의 화두랄까, 공안 말야. 그건 ‘그 다음’이야. 그러니까 그 다음은 뭘까, 이를테면 ‘윤리적 정체성’을 지키는 어떤 것은 무엇일까, 그 다음에 나는 어떻게 그걸 지킬 수 있을까, 이런 것. 소금 같은 것. 나는 ‘확신 인간’을 거부해. 그래서 ‘그 다음’이야.”

별, 소년 병사의 죽음

어디에선가 백남준은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중학교 이학년 때 피난열차의 지붕에서 서로 올라타려고 아우성치는 피난민들을 내려다보며 인생을 연극처럼 보겠다고 다짐했다’고. 살려는 사람들의 악다구니가 백남준을 무대에서 객석으로 내몰았다. 그는 그래서 철저히 멀리 있다. 모국에서 멀고, 예술은 사기이고 자기는 소규모 사업가일 뿐이라는 쇼 맨쉽으로 무장한 채 예술에서도 달아나고. 또한 그의 작업은 얼마나 먼 육체성인가. 그토록 먼 곳에서 아름다운 그는 아름다움의 힘으로 언뜻언뜻 우리에게 가까이 오지만 그 보편성의 빛은 우리에게는 사실 희미하다. 물론 그것이 백남준의 배역이겠지만. 전쟁은 그것을 겪은 사람들에게  어떤 방식으로라도 자기의 모습을 각인 시켜 놓는다. 내가 백남준이 어디에 썼던 글을 떠올린 것은 주재환이 자신이 겪은 전쟁을 이야기할 때였는데, 주재환의 얘기를 들으면서 왜 연배도 다르고, 얘기 내용도 다른 백남준의 글이 떠올랐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내가 예술가들의 어릴 적 체험으로부터 그를 이해해야 한다는 편견에 빠져있거나, 주재환이 백남준을 별로 안 좋게 얘기하는 것을 들은 기억이 거꾸로 연결되어서일 수도 있다. 그래서 어쨌든 열살 남짓의 어린 주재환이 피난 내려간 충북 옥천의 외가댁 뒷산에서 본 것은 날 고구마를 입에 물고 죽은 소년 인민군의 주검과 밤하늘에 그야말로 무수히 떠있는 별들이었다,고 그는 내게 되풀이해서 말했다.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날 고구마를 먹다가 그걸 채 다 먹지도 못하고 죽은 소년을 본 그 보다 더 어린 소년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니 그 이미지는 그가 지나온 시간 속에서 무엇이 되었을까. 살려는 의지를 온 몸으로 드러내고 있는, 그러나 이미 싸늘하게 식어있는 주검은 참 냉혹한 실제이다. 어둡고. 그리고 별에 관한 얘기. 서울 원남동에서 살다가 피난 내려간 그가 50년대 초의 산골 밤하늘에 떠 있는 별을 보고 느꼈을 기분은 나도 알 것 같다. 그는 무수한 별들을 보며 ‘자연’을 생각했다고 말했다. 땅과 하늘, 어둠과 빛, 전쟁과 자연, 실제와 꿈 이런 무수한 이항들이, 그 선연한 이미지의 긴장들이 땅에서부터 몽상을 끌어올리는 힘을 또는 현실에서 예술을 길어내는 자세를 그에게 준 것이 아닐까. 물론 이 생각은 전쟁의 끔찍함을 경험한 모든 사람들이 전혀 제 각 각의 삶을 살았다는 사실 때문에 별 설득력 없는 비약일 수 있다. 그러나 고통의 영상을 오래 간직하는 마음이 있고, 그것을 정면에서 마주 볼 용기로 자기 삶의 축을 세우는 사람도 있다. 굳이 묻지는 않았지만 삶과 죽음이 뒤엉킨 채 내버려진 육체와 깜깜한 하늘에서 쏟아져 내릴 듯이 빛나는 별들 사이에 존재하는 수없이 많은 상념들이 예술가 주재환의 부피를 늘려 주었고, 생활인 주재환의 바탕을 다져주었을 것이다. 그는 그 어린 날 보았던 모습을 언제가 그려보고 싶다고 말했다.    

앙데팡당

예전에는 보통 ‘앙데팡당(independance)’이라고 불렀다. 일종의 ‘무소속’이라고 할 수 있는, 제도 밖에서 작업하는 사람들을. 요즈음에는 ‘인디(independence)’, 라고 흔히들 얘기하는 독립군(獨立群)들. 주재환은 무엇으로부터도 전혀 독립적이지 않은 사람들이 ‘앙데팡당’이라는 역설적 제목의 전시를 하기 시작 할 때부터, 모든 미술가가 ‘독립’돼 버린 이 IMF 치하의 시기까지 매우 독자한 방법으로 자신의 예술적 입장을 견지해 온 몇 안되는 작가이다. 아니 내가 알고 있기로는 ‘앙데팡당’과 ‘앙가쥬망(engagement)’이라는 두 축 사이의 긴장을 아직까지 유지하고 있는 거의 유일한 작가이다.
나는 위의 불어들, 그 발음들을 보거나 들을 때마다 덕수궁 옆에 있던 국립공보관이 생각난다. 얼기설기 지은 그 가건물에서 본 전시들, 누구의 도불전 또는 귀국전들. 성대한 국전(國展)의 시대. 대망의 70년대라는 거리 곳곳의 플랭카드, 광화문 앞의 철골 아치, 박정희의 유신(維新). 그리고 또 그리고. 나는 그때 그런 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몰랐었고, 그런 것들이 무엇인지 알게된 후에는 ‘유년 시절’이라는 모서리가 부드러운 이미지로만 남아있지만, 그에게 그 시절은 ‘이 시대 최고의 화가는 현실의 부정을 대중을 향해 드러내는 자이다’라고 화우(畵友)들 앞에서 주장 할 수 있었던 젊은 시절이었다. 그는 ‘앙데팡당’과 ‘앙가쥬망’이라는 불어가 정치와 경제와 사회와는 전혀 상관없이 오직 예술 속에서만 오, 남용되던 시절에 거길 떠나 생활 속으로 들어가는 길을 택했고 예술에 관해서는 한동안 ‘잠수’해 있었다; 내가 이 불어 단어를 표나게 쓴 이유는 그의 시대를 드러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작가는 시대를 끌고가는, 시대의 산물이므로. 그의 시대는 6, 70년대이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간접체험을 통해 내가 알고 있는 그 시절의 정서가 그에게는 많이 배어있다. 그건 가끔 그의 ‘후라이’가 우리를 썰렁하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내가 신기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런 그의 몸에서-그러니까 그 시절에 인이 배긴 곳에서 어떻게 오늘의, 내일을 바라보는 작업이 나올까라는 것이다.  그는 ‘앙데팡당’과 ‘앙가쥬망’ 사이에서 긴장된 몸으로 ‘독립’과 ‘참여’를 날쌔게 아우르는 작업으로 귀환했다. 그것은 삶의 지평과 예술의 지평을 동시에 꿰뚫어 본 사람만이 헤쳐 나올 수 있는 귀환로이다; 자신은 몽유로라고 하겠지만. 앙데팡당 주재환은 그 길을 지나 이제 90년대에 판정승했다. 그 도저한 예술가의 독립정신으로 이십일세기의 앞장을 서 주십시오,  하는 부탁은 너무 야박한 것일까.    



주재환의 현세간(現世間) 미학과 산문 정신
                                                                          성완경(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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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주재환의 작품이 볼 만하다. 그냥 볼 만한 게 아니다. 눈을 크게 뜨고 보게한다. 그리고 예술의 오래된 정언(定言)이 오늘의 이 바보스럽고 통속적이며 지리멸렬한 한국 현대미술의 변방에서 생생하게  살아 있음에 화들짝 놀라게 된다.  훌륭한 예술이란 한 시대 상황의 총체적 난관(難關)과 모순을 작가가 온 몸으로 받아들이고 살아낸 결과이며, 인생과 인문의 특유의 결 속에서 숙성되는 것이라는 그 평범한 진리 말이다. 그리고 예술이란 스타일적 표지의 문제가 아니라 자유의 문제라는 것 말이다…. 그런데 이 자유라는 것이 정말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주재환이 나에게 보여주는 자유는 ‘도덕의 진짜 모습’과 거의 동일한 의미로서의 자유다. 말하자면 그것은 삶의  난관과 모순으로부터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것이다. 그의 인문(人文)과 분방한 상상력도 이와 비슷한 궤적을 따라 있다.  말하자면 그것은 모순의 기류에 기꺼이 몸을 실은 날개짓이자 폐부를 찌르는 농담인 것이다. 삶의 존재론적 현실적 무게를 받아들이면서도 희끗희끗 퍼뜩이는 자유의 몸짓과 희망을 희미하게나마 감촉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은 정녕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주재환의 예술은 기본적으로 먹물들의 미학이 아니라 현세적 삶의 한가운데로부터 나오는 절박성과 즉각성의 미학이다. 이‘싼%’적, ‘폰팅’적인 산문정신과 그 비물질성, 도덕성이 그의 예술의 힘의 원천이다. 산문정신이라지만 항상 그것은 시적 메타포의 차원을 숨겨  갖고 있다. 주재환은  이 시대의 이름없는 ‘찌찌삐삐’(은평구의 12만 전화가입자)들의 바람에 실려  허공 속으로 흐트러지는 목소리들과,  생활정보지의 ‘싼%’ 광고들과, 일기장 위에서 삶을 마감하는 한자루 ‘볼펜의 수명’에서 힘겨운 삶의 실존을 발견한다. 또한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보며, 15세기의 한 젊은이가 꿈꾼 복숭아 꽃나무이건 20세기 한국의  젊은이들이 꿈꾼 자유 평등  정의로운 사회라는 신기루이건, 왜 항상 유토피아를 그린 설계도만 쌓여갈 뿐 그것이 겨우 보이는 점으로조차도 현실의 지도 속에 한 번도 나타나지 않는가를 질문하며  괴로워한다([미학-몽유도원도]). ‘위험스런 주변환경에서의 철저한 도피’라는 서구의 비회화미학의 모방에 ‘위험스런 주변환경에서는 현찰이 중요’라는 체험미학의 실체를 갖다붙임으로써 미술제도와 작가적 삶의 허구성을 풍자하기도 한다([미학-이브 클라인]). 그의 번뇌의 ‘시대착오적’ 크기와 그 철학적 인문적 화두의 종과 횡으로의 무진함은, 이를테면 서울의 동서를 가로지르는 한강의 수많은  다리들 위의 홍수같은 차량들의 물결 곁을 몽유환자처럼 헤매는 [몽상가 J씨의  몽유로]칼라도판 9의 궤적만큼이나 거창하고 부조리하다. 한강의 모든 교량들과 그 남북단 입체교차로들을 횡축으로 길게 이어붙인 위에 이 저항적이고 절망적인 몽상가의 산책로를 눕혀진 ㄹ자형 궤적으로 표시해놓은 이 작품에서, 개념적 명료성은 광역 도로교통지도 그 자체만큼이나 체계적이고 정보적인 양상을 띄고 있다. 도시적 스케일은 이번엔 전통문화적 인문 요소까지 추가되면서 서울시 전도 규모의 꼴라쥬 작품 [퇴마신군(退魔神軍)]에서 반복된다.
    
   삶의 온갖 비가시적 영역을 가로지르는 주재환의 작업 속의 비물질성과 인생적 철학적 메타포들은, 기본적으로 민중의 찐득찐득한 현실의 모순과 삶의 때를 직시하는 리얼리즘적 산문정신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이 산문정신은 다양한 반조형적 형식들을 통해서 실현되고 있다. 대부분의 작업은 조형적 미학성보다는 오히려 조형적 가난과 왜소함을 그냥 척 들이대는 식으로 제시되거나 아니면 주절주절 늘어놓는 식의 외양을 거리낌없이 취한 것들이다. 잡다함이나 산만함도 그의 미학의 익숙한 부분이다. 주의해보면 잡다하고 보잘 것 없는 것이 오히려 군더더기를 생략한 결과라는 것을 알고 놀랄 때도 있다. 조형적 힘주기를 빼낸 결과인 것이다.
   주류미술의 비평이나 시장에서 쉽사리 식별 가능한 일관된 스타일의 표지라는 것을 거의 찾기 힘들다는 것도 어찌보면 그래서 당연한 건지 모른다. 작업 매체도 산만하리만큼 다양하다. 개념예술적 드로잉, 만화, 사진 및 인쇄물 꼴라쥬, 그림에 문자 텍스트가 곁들여진 시화 형식이나 텍스트 자체, 오브제, 유화, 컴바인 페인팅, 페이퍼 컷 아웃, 설치 등 다양하다. 표현형식은 기본적으로 반조형주의를 지향하고 있다. 조형을 통한 양식의 건설보다 조형의 파괴와 비형식을 통해서 ‘비평적’ 맥락을 생산하고 그 속으로 내용을 배설시키거나 차원 이동을 시키는 방식이다. 여기엔  자동기술법적 즉흥성과 우연성, 그리고 이와 반대되는 꼼꼼한 설계가 내지 기획자로서의 체계적 기획과 편집도 포함되고, 풍자와 메타포, 초현실과 S.F, 유언비어와 속설, 퀴즈, 속담과 수수께끼, 우화, 수집가 활동 등도 다양하게 이용된다. 이같은 다양성과 복합성은 그의 작업의 반모더니즘적, 개념예술적 가치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측면이다.
   주재환의 작업에 나타난 그 ‘현세간 미학’의 산문정신과 복합성은 기본적으로 작가의 중생적, 현세간적 삶의 철학에서 오는 것이고 그의 오랜 예술적 숙성과정을 지배해온 삶의 내용, 감정, 지식, 사회관계 등의 반영일 것이다. 앞서 말한 자유도 결국 그 핵심은 이런 것들에서 유래할 것이다. 삶의 궤적의 복합성으로부터 생겨난 어떤 포괄적 감정 내지 도덕성 같은 것, 자유란 바로 그것의 다른 이름일 뿐인 것이다. 주재환이 취한 예술가적 자유는 현실의 사회 경제 정치 문화적 모순의 중압과 인생의 존재론적 고뇌의 무게만큼 무겁고 가까스로의 것이고 도덕적인 것이다. 그것은 서구의 근대사와 예술제도가 분비해낸, ‘자유로운 창조자’로서의 예술가로부터 상당한 원거리에 위치한다. 주재환은 바로 이 원거리가 도덕성의 이름이고 자유의 이름인 이 시대의 많지 않은 작가군에 속한다. 그들이 스스로를 귀속시키는 곳은 미술계라고 하는 낡은 허위의식의 동네가 아니라 민중적 창발성(immediacy)의 세계다. 최근 ‘인공생명’ 연구가들이 말하는 것처럼 생물계에서 창발성이 위력을 발휘하는 곳이 ‘단순계’가 아니라 ‘복잡계’와 ‘단순계’의 중간쯤 되는 영역에서 ‘복잡계’에 가까운 쪽이라는 사실이 이점에서 시사적이라고 해야  할지 모른다. 즉 이들은 ‘예술계’라고 하는 관례화된 오토마티즘적 단순계의 반대쪽에 위치하는 것이다.
   그러나 민중적 창발성이 단순히 즉발성의 예술만으로 발현되는  것은 아니다. 주재환의 다양한 작업들은 그 ‘싼%’적 ‘현세간 미학’의 뿌리가 매우 넓고 깊은 곳에 연원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 폭과  깊이 속에서 우리는 낡음으로부터 새로움을 만들어내는, 그리고 새로움을 인생과 인문의 오래된 틀 속에서 재해석하는 온고이지신(溫古而之新)형의 예술가, 낡음과 새로움을 한데  뒤섞는 복합형 모더니스트의 면모를 보게 된다. 이것은 그의 작업 중 어떤 특정 매체나 특정 경향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왜냐면 이것은 내용적 발상과 체질의 문제이지 형식과 방법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재환의 작업에서 유화 작업의 의미를 이런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이 유용할지도 모른다. 유화라는 끈끈한 매체는 앞서 말한 절박성이나 즉각성 등 ‘정보론적’ 작업의  그 가벼움과 순발력과는 다른 차원의 장점을 갖고 있다. 작가 스스로 얘기하고 있듯이 유화 작업들은 ‘정보론적’이라기보다는 ‘존재론적’ 차원에서의 작가 자신을 더 정직하게 드러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유화작업들조차도 그 현세적 미학의 산문정신으로부터 동떨어진 별개의 것은 아니다.

2
    주재환은 1980년 <현실과 발언> 창립전에  출품한 [몬드리안 호텔]칼라도판 2,[계단 을 내려오는 봄비]칼라도판 3, [차렷 경례] 등 유머러스하고 명료한 반현대주의적 유화작품으로 미술계에 처음 등장한다. 60년대 초반 홍익 미대를 다녔고, 학교를 중도 포기하고 난 후 자영업 등 이런 저런 일로 생활을 꾸려나가며 한 때 출판 삽화도 그리고, 술집에서 개인전을 열기도 했지만, 미술계라는 동네에 이름을 드러내기는 이 때가 처음이었다. 이 때 그의 나이 꼭 40이었다. 80년 이전까지 그가 그림그리는 일 외에 가장 지속적으로 했던 생업은 출판 편집 및 기획 일이었다. 이 일은 80년대와 90년대에도 계속하여 2, 3년전 그만둘 때까지 지속했다.
   79년의 <현실과 발언> 그룹 결성과 그 이듬해의 창립전 출품은 이제까지 미술계 바깥에서 머물던 그가 반모더니즘과 현실풍자적 시각의 새로운 미술운동에의 가담을 통하여 한국의 현대미술의 문제, 그리고 자기 자신에 있어서의 미술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사고하기 시작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제까지 한국미술계의 고질이던 학연에 따른 막연한 미술그룹과 달리, 한국 현대미술의 상황과 자신의 예술적 지향 문제에 대한 비교적 뚜렷한 의식의 공유점을 갖고 출발한 이 그룹의 창립전을 전후한 시기의 각종 토론 모임과 예비 작품 발표회, 술자리, 화실 방문 등에서, 주재환의 소위 ‘먹물’ 먹은 사람들과는 다른 서민적인 반골 기질과 달관, 완전히 밑바닥과 상통하는 체질화된 ‘맨발’ 정신, 험난한 세상을 건너온 4.19세대 ‘출판지식인’으로서의 특유의 박람강기(博覽剛氣)와 ‘격조’가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 시작했다. 이제까지 기존미술계의 그 어떤 인간유형이나 모럴과도 구별되는 이 인물의 ‘격조’와 역할로 인해 주재환은 그 이후 한국의 반모더니즘적 미술조류 내지 민중미술과 떼어놓을 수 없는 이름이 되었다. 1985년 《힘 전》 탄압 사태로 촉발된 ‘민중미술’ 계열의 다양한 개인 및 소집단들의 거듭된 연대회의와 그 결실로서의 <민족미술협의회> 결성, 그리고 그 이후의 80년대 민중미술의 판도에서 든든한 선배이자 동지로 서 그의 자리가  늘 후배들로부터 존중되었고, 87년에는 신학철과 함께 이 협의회의 공동대표를 역임하기도 했다.
    
    80년대 초 그의 작업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풍자적 발상과 표현형식의 기호학적 명료성이다. 이 점은 80년 현발창립전의 [몬드리안 호텔], [계단을 내려오는 봄비], [차렷 경례] 등 유화에서만이 아니라, 같은 해에 그린 [태풍 아방가르호의  시말]이란 제목의 만화에서도 그의 일관된 기질적 특성으로 뚜렷이 짚어볼 수 있다. 몬드리안이라는 대표적 모더니스트의 회화적 형식을 호텔이라는 세속적 공간의 입단면으로 전환시키면서 그 속에 권력과 돈과 성과 미술의 가장 한국적인 풍속도를 압인(押印)해 넣은 [몬드리안 호텔]에서 묘미의 핵심은 기호학적 뒤집기에 있다. 즉 몬드리안이라는 순수회화적 기호로부터 호텔이라는 키치 기호로의 전환과 그것이 내포하는 모더니즘에 대한 비평 내지 풍자의 차원이 바로 그 묘미라 할 수 있다. 순수조형으로서의 엄격한 몬드리안적 질서가 만화의 칸들을 연상케 하는 소란스런 대중문화의 장면성과 서사성(한국적 졸부들과 권력자, 디스코테크 손님, 강도, 창녀, 자살자, 전시중인 화가와 그 관객들 등 온갖 세속적 풍경의 파노라마)에 의해 점거되면서 그 문화적 아우라가 균열되고 있는 점도 또한 이 만화같은 호텔 풍경의 묘미다.
   [계단을 내려오는 봄비]는 모더니즘의 대부격인 뒤샹의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를 조형미학이 아닌 ‘현세간의 미학’으로 뒤집어 해석한 풍자적 작품이다. 미술사적 신화에 대한 풍자적 해석과 계급사회의 권력적 위계에 대한 만화가적 풍자가 하나로 절묘하게 결합된 작품이다.(이 작품에서 오줌은 아래로 내려올수록 점점 굵어지다가 마지막에는 그것을 맞는 사람이 아예 폭포수처럼 굵어진 그 물벼락의 뒤쪽으로 사라져버린다. 주의해 보면, 계단과 인물 및 오줌발 사이의 네가티브 스페이스가 계단을 오르는 또하나의 커다란 덩치의 인물의  반복된 실루엣으로 읽힌다), 뒤샹의 원작에서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의 움직임을 보여주는 그 중첩된 형체들의 기계미학적 조형성은 이 작품에서 명료한 실루엣 형태들의 평면성과 문학적 풍자성으로 바꿔치기되었다.
   [차렷 경례]에는 완전한 기호학적 인물이 등장한다. 양변기의  몸통과 그 뚜껑에 지나지않는 경례 자세의 인간이다. ‘차려 경례’ 구호에 맞추어 관객에게 경례를 붙이고 있는 이 인물의 몸통은 양변기이고 머리통은 양변기의 뚜껑이다. 입을 벌린 양변기와 그것이 관객에게 붙이는 경례는 예술의 의미와 예술가로서 산다는 것의 실존에 대한 가장 ‘주재환 식의’ 냉소와 좌절감을  드러낸다. 이 냉소주의는 미술에 대한 그의 정서와 도덕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측면이다.
   이 작품들 사이의 공통점은 주제를 잡아내는 ‘현세간’(現世間)적 시선의 산문정신과 그 풍자성이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더 주목할 것은 이 ‘현세간’적 시선을 드러내는 방식에 있어서의 개념예술적, 기호학적 전략이다. 몬드리안과 뒤샹이라는 신화적 아우라를 지닌 모더니즘의 텍스트를 마치 세탁소에서  헌 양복 ‘우라까이’하듯 뒤집으면서 새로운 컨텍스트의 도상학으로 전환시켜내는 것인데 그 방식이 개념예술적이고 기호학적인 명료성과 설득력이 있다.
   [태풍 아방가르호의 시말]에서도 이점은  마찬가지다. 이 만화는  현실과 유리된 채 비현실적 자기만족에 빠져 있는 아방가르드의 폐쇄성과 환상을 조롱한 만화다. 파리 잡고 담뱃재 털고 발가락으로 선풍기 끄고 켜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 무기력하고 한가로운 예술가의 행태 묘사와, ‘유리잔  속의 태풍’에 불과한 그 몽유적 환상의 궤적을 드러내는 데 쓰인 그래픽들이 ‘70년대  중반 이래 한국 현대미술의 주류로서 자리를 굳힌 이른바 ‘백색 모노크롬‘류 전위미술의 스타일적 표지들을 연상시킨다는 데 이 만화의 묘미가 있다. 여기서도 일종의 기호학적 게임이 있다.


   은밀하게 소통되는 암유나 비어(蜚語)의 형태로 그 게임이 이루어 질 때도 있다.  81년에 그린 유화로서 지금은 소재불명이고 도판만 남아있는 [광땡]이 이에 해당하는데, 여기서 그 의미의 아슬아슬한 탈착(脫着)은 전적으로 흉흉하고 암울했던 시대의 소통의 어려움과 은밀함에 기인할 것이다. 이 작품은 화툿장의 8월 광 그림을 작품의 골격으로 차용하여 마치 화투판이나 술자리에서의 은어나 비어와 마찬가지의 암유적 방식으로 당시의 전두환 일당의 나라 말아먹기에 대한 냉소와 무력감을 표현한 작품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작품에서, ‘기호학적 의미 비틀기’의 핵심은 팔공산 만월 아래 살찐 배의  실루엣처럼 붕긋 솟아오른  호(弧)의 중앙에 붙어있는  11월 똥 껍질의 실루엣이다. 그 작은 실루엣이 나뭇가지로 위장한 군인의 철모 같기도 하고 또 (포만감을 즐기는 권력자의 살찐 복부 아래 보잘 것 없는 품으로 붙어있는) 노인의 거시기 같기도 하다. 혹은 (있어선  안될 자리에)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기생식물이나 사마귀처럼  읽히기도 한다. 둥근  만월과 光이라는 글자는 왕의 권력과 전두환의 벗겨진 머리를 불가피하게 환기시킨다.    
    
   <현실과 발언> 동인들의 단체전에  주재환은 80년의 창립전과, 88년의 《한반도는 미국을 본다》주제전에 이르기까지  다섯차례 출품했다. 그밖에 《반고문전》(1987), 《그림마당 민 개관 4주년  기념전》(1989) 등 <민미협> 주변의  각종 주제전이나 기념전 그리고 무슨 무슨 돕기전이나, 기금 모금전 등에 낸 것이 있는데 그 수효는 그리 많지 않다. <현발>전을 포함하여 1980년에서 93년까지 대략 20여점 정도다. 드문 드문하게 발표된 이 작품들은 포토꼴라쥬 인쇄 멀티플([Happy a Loyal Art]1982, [블라디보스토크의 명상]1982, [천상병 시 ‘새’]1987), 포토꼴라쥬([願往生]1990), 만화 ([88 UFO 환상]1985), 설치([고문]1987), 혼합재료([미제 껌 송가]칼라도판 81987) 등 다양한 매체로  제작된 것들이다. 파스텔([희미한 꿈]1988),  아크릴릭([어둠 속에서]1990), 유화([지리산 조곡(弔哭)]1991,  [아리랑]1992, [아니다 아니다 그렇다 그렇다 / EST EST NON NON]1993) 등 회화적 매체로 된  것들도 있다. 작품의 주제는 미술제도 또는  미술계 현실에 대한 풍자와  분단, 5.18, 고문 문제 등 역사나 사회정치적 상황에 대한 저항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非와 禁의 현실, 마치 잘못 끼워진 단추처럼 계속 잘못 되어가고 있는 현실,  모순되고 억눌리고 비틀린 현실에 대한 좌절과 소외와 무력감을, 그 자조와 한탄과 분노를 담고 있는 작업들이라 할 수 있다. 이 시기 작품의 저조한 숫자는 미술계의 경력주의와 권위주의에 대한 그의 체질화한  냉소적 태도와 생활  상의 실제적 이유 등의  결과겠지만, 당시의 사회 정치적 상황과 시대 분위기도 크게 작용했다고 보여진다. <현발> 이후 주재환의 사회적 삶은, 작가이자 출판인(출판 편집인 및 기획자) 그리고 약간 느슨한 의미의 문화운동가, 그리고 각종 문화 관련 일의 상담 및 자문역 등에 걸친 복잡한 것이었다. <민미협> 대표직만이 아니라 80년대적 한국의 사회 상황에서 이른바 진보적 지식인, 작가, 활동가로서 지워진  그밖의 여러 크고 작은 역할들도 그의 일상에서 적지 않은 일들이었다. 쉽지 않았던 86년의 장준하  선생 새긴돌 건립 일이나 90년의 4.19혁명 30주기 기념행사 준비 등이 그 예다. 이런 류의 재야 쪽 ‘공공적’ 일에 그는 많은 애정과 시간을 쏟았다. 그밖에도 거듭된 미술탄압에 대한 항의와 대책 강구의 현장, 87년 이한열 장례, 91년 강경대 장례 등 현장에서도 늘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박창수 노조위원장의 영안실에서의 시신 탈취 사건 때 전경이 벽을 깨고 들어오는 <한겨레신문>의 그 유명한 신문  사진을 들고 <민미협> 사무실에 처음 달려온 사람도 그였다. 이 사진은 나중 그의 작품의 일부가 되었다. 80년대의 이런 시대분위기는 통상적 의미에서의 작가적 활동과는 다른 삶의 형식을 요구했다. 93년까지의 저조한 작품 숫자는 이같은 시대적 배경의 역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이러한 사실은 주재환 작품목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작품목록은 17쪽: 편집자)

3
   주재환은 90년 말 모처럼의 작업공간을  따로 용두동 쪽에 마련한다. 이 무렵은 80년대적 민주화 운동의 가투(街鬪)식 분위기가 어느 정도 진정되고, 사회 전반의 분위기가 많이  바뀌고 있던 때였다. 오랫동안 주간(主幹)으로 일하던 미술출판사 <미진사>의 일도 상근직으로부터 비상근직으로 전환하면서 그는 모처럼 작업에 전념할 시간을 얻는다. 이 당시 그가 집중한 작업은 유화였다. 94년에서 97년까지 4년간 제작한 것의 대부분이 유화다. 이는 일산 작업실에서(주재환은 96년 작업장을 일산으로 옮겼다) 98년에 제작한 엄청난 양의 작품의 대다수가 혼합재료 및 설치 유형의 작업인 것과는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그는 94년부터 97년까지 4년간 전부 42점의 유화를 그렸다(94년에 10점, 95년에 9점, 96년에 6점, 97년에 17점). 같은 기간에 유화가 아닌 매체로 제작한 것은  94, 95, 97년에 혼합매체가 각 4점, 3점, 1점이 있고, 97년에 프린트 1점이 있을 뿐이다.
   유화는 주재환의 예술가적 생애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그리고 방금 말한 그 대조, 즉 94-97년간의 거의 전적인 유화작업과 98년의 혼합매체 등 비유화적 매체의 작업 사이의 대조는 어떻게 설명되어야 할까.
주재환의 최근 작업의 그 ‘열려진’ 자유로움과 개념예술적 비물질성, 반조형주의적 서사 등을 생각할 때, 그가 유화에 보인 집착은 얼핏 잘 이해가 안가는 측면으로 보일 수도 있다. 이와 반대로 그를 통상적 의미에서 화가, 또는 유화가로 놓고 볼 때 유화 이외의 그의 다양한 혼합매체 작업들과 그 개념예술적 내용을 과연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도 있다. 그러나 주재환의 유화작업과 기타 혼합매체적 작업을 꼭 대립적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오히려 그 둘은 잘 들여다보면 내적으로 상보적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상보성의 내용이 무엇이냐가 주재환의 작가적 면모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주재환은 오랫동안 유화가로 상징되는 예술가적 자기 실현에 강한 집착을 보여왔다.앞서 말했듯 이 점은 얼핏 보아 그의 민중적, 현세간적 산문정신이나 개념예술적 발상, 기호학적 연출 체질과는 기본적으로 대립적이거나 모순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문제를 좀 깊이 볼 필요가 있다. 전체성의 실현이란 점에서 이 둘은  공통된 것이고 내적으로 하나로 얽힌 뿌리 같은 것이다. 미술가 지망생들의 대부분이 유화가로서의 자기 실현에 야심을 갖는다. 사실 그 야심의 뿌리라는 것은  깊은 것이고, 예술가적 영혼 속에 깊이 각인된  것이다. 화가치고 반 고호적 의미에서의 자기실현을 꿈꾸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주재환의 경우 아마 그 욕구는 남보다 결코 더 작은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두가지 이유를 상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체질에 연관된 것이다. 주재환은 그 체질과 감성, 그리고 집중력과 통합성에서 전적으로 예술가적 페르소나에 딱 들어맞는 사람이다. 주재환은 ‘세상에 맞서는’ 사람이고, 전체의 구도를 보는 사람이고, 또한 사물과 징후를    그 전체의 구도와의 연관 속에서 감성적 철학적으로 대조하고 편집하고 녹여내는 사람이다.  편집과 녹여냄은 지적, 감성적 우수성의 증거이고, 이에 대한 신뢰와  자기실험에의 욕구는 모든 예술가적 프로젝트의 기본이다. 이것은 전체성의 실현 욕구와 그 욕구 실현 과정의 지구(持久)함과 복합성에 대한 탁월한 이해를 요구한다. 나는 주재환이 그 요구를 알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유화는 그가 그 스스로에게 부과한 이 확신에 대한 실험의 첫째 관문이었다.
   이에 덧붙여 또 한가지 이유를 추측해볼 수 있다. 그것은 주재환에게 그 실험의 기회가 처음에 미술대에 입학하던 젊었을 적 있었지만 실천을 하지 못했고(그는 학업을 중단하고 일찌기 생활전선에 뛰어 들어야 했다.) 그 이후로도 여러 가지 사정으로 그것이 미루어졌기 때문에, 이것이 그로 하여금 그것에 더 집착하게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이다. 80년 <현발> 창립전에 낸 [몬드리안 호텔], [계단을 내려오는 봄비], [차렷 경례]와 이듬해의 [광땡], 그리고 그 때로부터 10년 후 91년부터 3년간 1년에 한점씩 그린 [지리산 조곡], [아리랑], [아니다  아니다 그렇다 그렇다]가 그가 14년간 그린 유화의 전부다. 바로 이 저조함이 94년 이후로 마치 그 반사작용인양 훨씬 집중적이고 활발한 유화 제작을 가져오지 않았겠는가 하는 상상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어떻게 유화를 그렸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이것은 유화를 그리면서 유화라는 매체와 그 전통을 어떻게 자신의 것으로 소화했느냐, 그리고 이런 과정 속에서 자신의 어떤 체질을 발견하고 실현했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주재환의 유화는 나에게 무엇보다도 그 속의 ‘갈등의 구도’와 더불어 읽힌다. 그의 유화작업은 대체로 일종의 개념적 표현주의와 비슷한 성향을 띠고 있다. 이것을 무형식의 비판적 인문그림(문인화)이라는 말로 이해해도  좋다. 말하자면 형식의 일관적 특징이라는 것과는 별로 무관하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내용이나 감정, 태도, 집착 같은 것인데 바로 이런 것들의 어떤 연속성이나  상수(常數) 같은 것이 있고, 이것이 첫째 언급되어야 할 중요한 측면이고, 그리고  바로 이것이 유화적 외피  즉 작품의 결과에 대하여 일으키는 갈등 또는 긴장이라는 것이 작품에서 읽힌다는 것이다. 이 갈등은 유화라는 물질의  언어로 귀결되어 나타나는 데, 그것은 곧 덮음, 누름, 불투명한 흔적, 지움, 간결화, 병치, 드러냄과 감춤 같은 것들이다. 유채라는 물질 다루기 또는 거의 물질 주물러 터뜨리기에 가까울 정도의 매우 느리고 중첩된 과정은 그 중첩과 생략, 지움과  덮음의 중첩된 과정의 갈피에서, 거의  언제나 상징이나 암유 등 개념적 차원을 갈무리해 넣으려는 욕구의 흔적을 동반하고 있다. 말하자면 물질의 흐름과 그 흔적에 대한 매혹이 있으면서도 그것이 그냥 저 홀로 가는 회화적 매혹으로 흐르는 것을  억제하거나 차단하는, 상징이나 은유 같은 개념적 차원의 컨트롤이 늘상 느껴진다는 것이다, 이 두 차원의 만남은 상호 갈등과 상호  순치의 독특한 회화적 상황을 작품 속에 만들어내고 있다. 주재환의 유화 작업의 일종의 개념적 표현주의 비슷한, 여운이 길고 착잡한 특이한 맛은 바로 이 회화적  차원과 개념적 차원의 복합성에서 비롯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복합성은 많은 경우 그 내용의 불투명성 내지 기호학적 불명료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의미는 마치 안개 낀 밤 어둠 속의 사물의 윤곽처럼 겨우 희미하게 감지될 뿐이다. 이것은 그에게 있어 유화라는  매체가 마치 오랜 시간을 두고 써온  일기처럼 살면서 묻는 찐득찐득한 때, 끈적끈적하면서 덜 마르고 하는 ‘정신의 때’라  할 수 있는 삶의 궤적이 묻어 나오는 재료로 이해되고 있는 점과 일차적으로 연관된다. 주재환 특유의 내용이나  분위기는 그 더딤과  끈적끈적함으로부터 분리시키기 힘들다. 이 더딤과 끈적끈적함 속에  그는 여러 가지 분위기를 복합시킨다.  이를테면 환각적이고 몽환적이며 초현실적인  분위기, 예언적이거나  초월적, 상징적인  분위기, 또는 세상사에 대한 철학적 정언, 정치적 역사적 주제 등이 그 내용이다. 이 모든 분위기들은 회화적 물질의 흐름과 그 실현을 더욱 더디게 하면서 그 속에서 서서히 구현되는 개념적 차원과    더불어 나오는 것들이다. 이같은 지연과 복합성이 화면에  독특한 긴장과 개성을 부여한다.
이를테면 [비무장지대](1994)에서 어두운 풍경 속의 ‘지뢰’라는 경고 표시와 철모 쓴 달팽이와도 같은 기괴한 형체의 언저리에 난데없이 쓰여 있는 수직방향으로 배열된 ‘어머니’라는 세 글자처럼, 이 작품의 의미의 골격을 지탱해주고 있는 것은 거의 괴기스러울 정도의 로맨틱하면서도 낯설은 풍경(이 공간을 휴전선 어디쯤으로 위치시킬 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상징적으로 분단의 공간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과 상형, 그리고 이같은 단어들 사이의 충돌이다. 작품 [禁](1994)에서 푸른색 달빛을 받은 숲 배경으로 붉은 색으로 쓰여진 禁이라는 한자 글씨도 마찬가지의 효과를 준다. 국제정치의 지도와 회화적 공간을  중첩시킨 작품이라 할 수 있는 [오감도](1995)도 이런 류의 작품인데, 여기서 우리의 시선이  만나는 것은 기상도처럼 씨줄 날줄이 있는 지구적 풍경 위에 들어간 서울, 평양, 모스크바, 북경, 동경, 워싱톤 등 붉은 글씨들이 자아내는 이 정치적 풍경의 착잡성이다.
   이같은 지연과 복합성 속에 갈무리된 주제들은 나름대로 다양하다. 94년에 그린 유화작품들의 주제는 분단, 냉전체제 하의  현실에 대한 부정과 저항이 주류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주제들은 80년대적 상황과 떼어놓고 볼 수 없다. 이미 80년대초부터 다뤄왔던 미술제도에 대한 풍자와 저항 이외의 대부분의 주제들, 이를테면 [미제껌 송가](1987)처럼 미제국주의와 식민지적 외래문화 및 상업문화에  대한 비판이나, [우금치  꽃맞이], [백년전의 농민, 백년후의 농민](이상   1994), [반고문](1987), [現世間](1994) 등처럼 동학농민전쟁에서 분단과 5.18에까지 이르는 역사적  상황과  사회정치적  현실에  대한  관심과  저항,  [한강 다리로 오신 예수](1994)처럼 소외된 사회계급에 대한, 또는 사회문화적  분위기에 대한 관심, 그리고 같은해의 혼합재료 작품  [찌찌삐삐]처럼 도시와 그 속에 담긴 삶의 익명성과 그 볼륨에 대한 시적 몽상 등에서 보듯이, 세상사의 그 역사적 정치적 운명과, 그 속에 담겨있는 이름없는 삶들의 허망한 무게가 이런 계열의 주제로서 열거될 수 있다. 특히 91년에서 93년까지 그린 그 희소한 세작품 [지리산 조곡], [아리랑], [아니다 아니다 그렇다 그렇다] 모두가 그 주제로서 분단, 이현상, 5.18 등  역사적 정치적 주제를 다룬 것들인데, 이런 주제들은 94년에 그린  [비무장지대], [現世間], [禁], [사상의 그늘], [우금치 꽃맞이] 등과 완전히 동일선상에 있는 주제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같은 해의 [흰꽃]처럼 역사 정치적 주제가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 대단히 로맨틱하고 환상적인 분위기의 은유적 작품도 있다.      
95년의 작업들은 역사적 정치적 주제로부터 점차 풀려나는 듯한 분위기를 준다. 이때부터 어떤 여유로움과 싯적 상상의 풍부성, 자유로움 같은 것들이 드러난다. 때로는 선가적(禪家的)이고 신비주의적이며 비의적인 분위기까지 보인다. [性禪], [손금], [陰陽], [농담]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시적 자유로움은 때로는 [고압선]처럼 의미의 불투명성을 동반하기도 한다.
   96년에 오면 [백미러]칼라도판 5, [야구] 등에서 보듯  일상적 소재를 아주 해학적으로 해석한 빼어난 작품들을 만나게  된다. 어딘지 분명치  않은 공간 속을 달리는  자동차 백미러 속의 호랑이 얼굴을  보여주는 작품 [백미러]는, 자동차로 상징되는 일상의 현대성 속에서 우리가 갖는 격세지감을 민담적 세계에 병치시킴으로써 빼어난 해학을 만들어낸다. 백미러 속의 호랑이 얼굴은 작품 속의 운전자가 보는 우리의 얼굴일 수도 있고, 이 작품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에 백미러를 통해 드러난 운전자의 얼굴일 수도 있다. 호랑이가 단지 현대성의 너머 저 멀리 퀘퀘묵은 민담세계에  속해서만이아니라, 그 얼굴의 표정이 익숙한 운전자의 표정이 아닌 서투름과 곤혹스러움, 그리고 촌스러움까지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복합적 유머를 느끼게 한다. TV의 대리만족을 통해 우리에게 익숙한 야구경기를 그라운드에 포진한 선수들 사이의 질서,  던지고 받는 공의 흐름 등 바로 그 경기의 포맷에 내재한 에너지의 구조를 거의 문자적 상형에 가까우리만큼의 (장욱진류의) 압축된 아이콘으로 화면 속에 탄력적으로 재현한 [야구]는 그 시적 농축과 탄력성 그것만으로도 여간 매력적인 작품이 아니다. 여기서 매력의 초점은 암각화의  고대 상형문자의 아우라를 갖는 아이콘들 사이의 탄력적 질서와 그것이 번안해 내고있는 현대 대중문화의 공공적 포맷 사이의 그 신선한 대비와 중첩이다. 같은해 제작된  [천둥번개]칼라도판 4 는 의미론적 맥락의 모호성으로 오히려 우리의 흥미를  끈다. 커다란 추상표현주의적  필치와 색채의 얼룩들이 마치 궂은 날씨와도 같은 혼돈을 보여주는 이 작품은 주재환의 모든 작품 중에서 가장 회화적, 색채적 작품이다. 96년의 이 몇 안되는 작품들은 한편으로 보다 밀도가 높아진 기호학적 압축과 다른 한편으로 그  회화적 터치의 여유로운 개방성을 통해 주재환의 유화작업의 보다 원숙해진 경지를 짚어보게 하는 작업이다.
   97년에 제작된 유화들은 대체로 더욱 풀어진  작업들이다. 다소 빨리 그린 듯한 가벼운 터치의 반추상적 형식 속에 자유분방한 상상, 위트, 유머, 은유 등을 담고 있다. 물질의 지구(持久)한 끈적거림 대신에 빠른 필치로 드로잉하듯 쉽게 그린 작업들이 주종이다. 이 가운데는 논리적, 기호적인 것도 있고, 이와 반대로 내용이 잘 잡히지 않는 그 불투명함이 더 심화된 것도  있다. 때로는 나이브함 그 자체가 해석의  모호성과 자의성을 만들어내는 측면도 있다. [헹가레], [역사의 종말], [제국주의 국가의 장례식], [都市戰士], [루트(√) 人] 등에서 그 가벼움이나 나이브함을 발견한다면, [번뇌(煩惱)]칼라도판 12, [소주와 성경] 등에서는 철학적, 종교적 화두를 세속적 삶의 고통에 접합시키는 관자적 시선의 깊이를 느끼게 된다. [불면(不眠)], [질주], [검정잠바 다리를 건너다]도 이런 류의 작품인데, 여기서는 관자적 거리보다는 심리적 불안과 죽음의 그림자가 더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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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재환이 98년에 제작한 총 60점이  넘는 작품의 대다수는 혼합매체 내지  설치작업이 그 주류를 이룬다. 이 작업들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그 산문적이고 개념예술적인 속성이다. 앞서 말했듯  94-97년간의 작업은 대부분  유화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때 그린 유화가 전부 42점인 것에 비해, 같은  기간에 유화가 아닌 매체로 제작한 것은 혼합매체가 8점, 프린트 1점이 있을 뿐이다. 98년 이후로는 이것이 역전되어 98년 한해 동안(10월까지) 제작한 총 60점에 달하는 작품 가운데  대다수가 혼합재료, 설치, 인쇄물 위의 꼴라쥬, 프린트 등이고 유화는 그 가운데 7점 밖에 안된다. 즉 매체의 주종 관계가 역전한 것이다.
   다양한 매체와 형식을 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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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사한 방대한 양에 달하는 이 작업들에서 느껴지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 발상과 주제의 층위가 매우 넓고도 복합적이라는 점이다. 그런데도 이런 작업들이 마치 미리 준비된 익숙한 물건들을 마음대로 갖고 놀면서 이것 저것 턱 턱 꺼내듯이, 그렇게 힘들지 않게 이어지면서 새로운 세계를 계속 보여준다. 문턱을 넘으면 또다른 세상이 발견되는, 그런 식의 계속 열려지는 자유로운 운동을 보여준다. 무언가가 터졌고, 흐르는데, 그 속에서 나오는 것들이 명료함과 힘을 느끼게 한다. 이제까지의 모든 작업들에 잠재해 있던 복합성들이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으면서 하나하나 다시 태어나는 듯한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혼합재료 작품은 이 시기 이전에도 드문드문 있었다. 80년대의 [안전모], [미제껌 송가]를 비롯하여, 90년대 들어서면 94년에 제작한 [한강다리로 오신 예수], [찌찌삐삐], [백년전의 농민, 백년후의 농민],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등이 있고, 95년에 [화투노름으로 본 해방 50년], [나가다오], [굿모닝 코리아], 그리고 97년의 [비닐봉지,은박지] 등이 있었다. 이 작품들의 주제의 대강의 성격은 앞서 이야기한 바있다. 그 형식은 대체로 몇개의 정보 요소 또는 형태 요소를 비교적 단순히 첨부하거나 나열하는, 또는 폭넓게 배열하는 방식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정보론적’이고 평면적이며, 단순전달적인 연출이 특징이라 하겠다.
[화투노름으로 본 해방 50년]은 이같은 평면적 서사의 대표적 예다. 이 작품의 내용은 험난한 근현대역사에 대한 민초들의 다소 자조적이고도 저항적인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모대학에서 나온 민속사 관련 책에 담긴 내용의 인용이 작품의 골격인데, 민담설화적, 유언비어적인 속세간의 보통 서민들의 상상력을 엿볼 수 있다. 이를테면 화투의 섯다판 ‘족보’에서 인기 있는 삼팔광땡의 그 3.8은 1945년 분단의 그 38선이고, 쎄륙의 4.6은 1950년 육이오의 ‘살륙’을 뜻하는 것이고, 일싸는 51년 1.4후퇴의 그 1.4고, 오칠은 60년의 5.16에서 16을 1+6=7로 풀어 5.7이고, 장팔 곧 10과 8로 된 한 패는 79년 10.26 사건에서 26이 2+6=8로 변하여 10.8이 된 것이고... 등의 주절주절한 해석이다. 작가의 특출한 상상력의 소산이 아닌 실재하는 중생들의 유언과 비어적 상상을 그대로 펼쳐보인 내용이다. 현세간의 속설에서 작품의 소재를 취하는 산문가적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이와 비슷하면서도 약간 다른 또하나의 사례는 94년의 [찌찌삐삐]이다. 이 작품은 이 글의 서두에 잠깐 언급한 작품이기도 한데, 은평구의 십이만 전화가입자 명부가 실린 페이지들을 이어붙인 거대한 크기의 작품이다. 이렇게 이어붙인 페이지 위에 트레이싱지에 싸인펜으로 쓴 자작시 ‘모래알 하나...’가 겹쳐서 부쳐진 첨부형 작품이다. 이 시는 은평구 십이만명의 전화가입자들의 “모래알처럼 바람에 실려 사방 허공으로 흩날리는” 찌찌삐삐 신호음 속에서 “일일이 공팔이 은평구 / 신사동 현대아파트 백오동 / 천사백이호 / 삼칠육에 삼일칠이 - 사일공일공일 / 일공공육사이칠”인 작가 자신의 존재를 음미하는 내용이다. 현대적 일상성의 인구학적 스케일과 익명성을 보여주는 이 작품에서 흥미로운 것은 바로 그 스케일과 익명성 속의 십이만분의 일의 단위로서의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이 작가의 독특한 견자(見者)적 시각이며, 그것을 드러내는 물리적이고 중성적인 방식이다.
이같은 익명성은 미학적 착안의 문제라기 보다는 이보다 더 깊은 주재환 자신의 체질화된 삶의 철학과 도덕성의 문제인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주제환의 살아온 삶의 궤적과 그 중생적 익명성의 자연스런 반영이리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이야기할 수 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언젠가 주재환과 함께 인사동 거리를 걷다가 수도약국 근처에서 천박한 적동색 주물 장식 조각으로 치장한 한 가로등을 발견하고, 그야말로 구청에 납품하는 어떤 사업자의 작품일 것이 뻔한 그 새로 세운 가로등의, 예술과는 거리가 먼 상업적 상투형과 그 볼품 없음에 대하여 내가 무어라고 투덜거린 적이 있었다. 그 때, 나의 코멘트에 대한 주재환의 한마디 대꾸에 나는 일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했다. 그 말이 무슨 말인 줄 알아들었기 때문이다. “이것도 밤새 만든거야” 이것이 주재환의 대꾸였다. 주재환의 이 대꾸는 나에게 큰 깨우침을 주는 놀라운 새로운 ‘미학’이었다. 이 미학은 미의 보편적 기준이나 예술적 세련성으로서의 미학, 또는 모더니스트의 ‘일반적’ 조형미로서의 미학이 아니라, 바로 그 ‘밤새 만든 것’이 의미하는 삶의 컨텍스트에 더 관심을 두는 미학이다. 즉 우리의 사회적 삶의 일반적인 양태와 그 관례적 수준을 실질적으로 결정하는 구체적 삶의 컨텍스트와 그 내용에 대한 상상이다. 한마디로 삶의 민중적, 중생적 컨텍스트에 대한 상상이다. 바로 그 깨달음이 나를 후려친 것이었다. 사실 이것은 나 자신이 잊고 있었을 뿐, 실제 나 자신의 그동안의 경험으로도 익히 알고있는 문제이다. 이를테면 내가 어떤 공공조각이나 벽화제작에 관련하여 철공업자나 주물제작자 또는 도장업자에게 디자인 도면과 더불어 어떤제작을 발주했을 때, 그 일의 진행과정이나 결과물에서의 미적 완결성의 수준은 모더니스트이자 고급의 심미적 기준을 갖고있는 발주자로서의 나의 ‘일반 미학’의 수준에서 결정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도급과 납품의 조건, 즉 어떤 만큼의 질적 완벽성과 정교성을 기대할 수 있도록 내가 단위 품목이나 단위 시간당 얼마마한 금액으로 그 일을 발주했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사실 말이다. 발주자는 늘 그 금액으로 요구할 수 있는 작업의 정교성의 수준, 완벽성의 수준을 헤아릴 줄 알아야 된다는 말이다. 싼 가격에 발주했으면 그 수준의 질에 만족해야지 그 이상의 질적 완벽을 요구해선 안된다. 그것이 삶의 상식이고 윤리인 것이다. 공공작품 같은 특정한 일의 발주가 아닌 일상적으로 흔한 일의 경우에도, 그리고 도급계약자가 아닌 자신이 데리고 있는 연구원이나 직원 또는 디자인에 대해서도 이 점은 마찬가지다. 그것을 나는 나의 사회적 삶 속에서 여러 차례 거듭 체험하고 확인해야 했다. 하나의 납득될 수 있는 윤리나 도덕성이라는 것은 이와 같은 실체적 삶 속에서의 ‘가능한 조건’과의 연결 속에서만 상상할 수 있는 것이라는 점, 주재환의 ‘이것도 밤새 만든 거야’가 나에게 새삼 화들짝 깨워준 것은 이같은 윤리에 대한 상상의 문제였다. 바로 이것을 주재환류의 衆生의 美學이라고 이름붙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추상적 완벽성의 기준이 아닌 삶의 주어진 여건이나 그 ‘되어감’의 맥락에서의 기준에 대한 상상력. 이것은 실제 주재환의 작업에 있어서도 그 반모더니즘과 반조형주의적 성격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
중생의 미학은, 보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현세간의 삶의 원리와 그 호흡에 대한 탁월한 이해에서 오는 것일 것이다. 그것은 민중의 삶의 구체적 내용, 그 고달픔과 그 원리와 결재방식, 그리고 난관과 갈등의 해소와 위로의 방식, 그 삶의 끈적끈적함과 때, 그리고 그 역설적 숭고함에 대한 본능적 공감과 탁월한 이해의 소산이다.



주재환이 생활정보지 광고난의 ‘싼%’ 광고를 주목하는 까닭도 이런 맥락에서 설명될 수 있다. 살인적인 높은 이자와 연체시 담보물 차압을 의미하는 ‘싼%’ 광고의 ‘싼%’라는 두 글자의 따끈따근함과 절박성에서 벼랑 끝으로 내몰린 삶의 막막함과 절망을 읽어내는 주재환은 또한 이 따끈따끈하고 절박한 신호에서 삶의 산문적 때와 그 시름이 묻어나오는 현세간 예술의 창발성(創發性)을 꿈꾼다. 비극성의 무게와 창발성의 욕구는 이렇게 그의 예술에서 꼭같은 동전의 양면이 된다. 일수놀이하는 아주머니의 가방과 그것으로부터 늘어뜨려진 여러 개의 줄에 매어달린 ‘싼%’ 광고들은 비좁은 서민 아파트 현관에 매어달린 1년생 화분의 메마른 이파리들처럼 생존의 고달픔과 불안정함 앞에 우리를 맞닥뜨리게 한다([싼%]).
손바닥보다 작은 은행 통장 이상으로 삶의 기구한 사연들과 그 희노애락을 함축하고 있는 공공 오브제가 또 있을까. 단지 입출금이나 급여 이체, 공과금 납부만이 아니라 적금, 대출, 연대보증, 담보보증으로부터 자칫 잘못하면 연체이자, 기한내 이익상실, 신용불량, 거래정지, 차압, 파산, 소송, 자살 등에 이르기까지 돈에 얽힌 삶의 피말리는 사연들이 가로세로 정연한 입출금 기록과 잔고기록의 갈피갈피에 숨어 있는 것이 은행 통장이다. 돈의 순환의 안쪽에 숨어있는 삶의 이런 기막힌 사연들을 미술의 주제로 드러내는 것이 과연 가능할 것인가. 작품 [내 돈]칼라도판 7에서 주재환은 화면 중앙에 붙인 은행 통장의 입출금 페이지의 사면을 둘러싸며 ‘내돈내돈내돈내돈내돈내돈내돈내...’라는 글씨를 자신의 손으로 무수히 반복하여 그 흔적들을 지폐의 무늬나 은행통장 입출금 페이지의 배문(背紋)처럼 화면 가득히 채웠다. 그 반복된 글씨쓰기의 막막함과 절망적인 미니말리즘은 그가 실제로 겪었고 지금도 겪고 있는 대출보증의 피말리는 파장 속에서 그가 묵묵히 겪은 경험과 그 감내하기 힘든 인고를 떠올리게 한다. 작가는 ‘돈내’와 ‘내돈’의 상호반사, 그리고 ‘내돈’과 ‘내돈내’ 간의 단 한 글자의 거리에서 삶과 죽음을 가르는 문턱만큼이나 엄중한 돈의 무서운 진실을 읽어낸다.
[나의 푸른 꿈]에서는 현실 속에 부재하는 희망이 언어적 표상과 그것이 가르키는 내용 사이의 괴리를 통하여 은유되고 있다. 이 작품의 모티브는 그가 신문에서 본 실제의 기사에서 온 것이다. 기사는 정신분열에 걸린 어떤 입시생에 관한 이야기고, 단조롭게 반복해 쓰여진 이 글귀는 실제 그 학생의 노트에 쓰여진 글귀였다. 이 개념예술가에게는 그 글자를 자신이 반복해 쓴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으리라. 이 글씨들은 그의 아들이 쓴 것이다. 작가는 밤톨이 빠져나간 다섯개의 밤송이를 그림 위에 추가하였다. 글자수에 맞춘 이 다섯개의 밤송이 가운데 끝의 것이 제일 큰 것은 그것이 ‘꿈’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싼%], [내돈], [나의 푸른 꿈]은 주재환의 현세간의 미학이 짚어낸 삶의 가장 숨막히는 중압감의 지점이라 할 수 있다. 주재환이 일상의 환경을 보는 시선은, 이를테면 미술가들이 소비사회와 대중문화를 보는 일반적 시선과 구별되는 지점을 드러낸다. 주재환의 작업 중 얼핏 보아 이같은 일반적 시선에 가장 근접한 작업, 다소 팝 아트적 감각을 보인 작업이 [쇼핑맨], [폰팅맨], [바코드] 등이다. 그러나 주의해 보면, 여기서도 이미지 패티쉬적, 미학적 팝과는 다른 시선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쇼핑맨]은 백화점의 쇼핑백을 사용한 방대한 페이퍼 컷 및 꼴라쥬 작업의 일부분이다. 사람의 실물 스케일에 맞추어 머리에서 발끝까지 쇼핑백의 컷아웃으로 조립된 이 [쇼핑맨]은 일산 신도시의 삶에서 그가 익숙히 발견해 낸 현대성의 ‘욕망하는 유령’으로 전시장 벽의 천정 라인으로부터 빨래나 허수아비처럼 내려 걸리게 되어있다. 땅에 끌릴 정도로 닿는 이 쇼핑맨의 발치는 이 인물을 똑바로 세우지는 않는다. 반대쪽 머리 끝은 쇼핑백의 손잡이 형태를 그대로 갖고 있다.

쇼핑백의 색채, 그래픽, 타이포, 지질을 능숙하게 활용하면서 시원하게 절개하고 재단하고 이어붙인 그 솜씨에서 다다 ‘몽퇴르’(조립공)의 불온성과 팝 디자이너의 세련된 쾌락이 공존함을 본다. 전혀 어렵지않게 시원하게 이루어낸 듯한 그 가위질에서 쪼물닥거려 겨우 만들어낸 단 하나의 화인 아트 오브제가 아니라, 마치 지금 막 떼지어 상륙한 한무리의 ‘뉴 킷즈 온 더 블록’ 풍의 구매행렬을 보는 듯한, 그 무한히 증식될 수 있는 복수성과 전형성을 느끼게한다. 신중현의 음악을 즐겨듣는 작가의 젊은 리듬과 속도도 느껴볼 수 있는 작품이다. 이 복수성과 익명성, 그리고 그것의 양쪽 볼륨에 관한 아이디어, 인구학적 스케일의 상상력은, 앞서 언급한 [찌찌삐삐]에서도 그랬듯이, 현대적 일상에 대한 주재환의 해석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다. 이 특성은 [부음], [폰팅맨], [세계의 실상]에서도 반복되어 나타난다.
[부음]에 내포된 그 관조와 시적 차원의 철학적 스케일은 신문에 난 부고의 숫자만큼이나 다반사인 죽음의 복수성과 익명성으로부터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도처에 편재하는 이 죽음의 일상성은 그가 신문의 부고 광고를 오려 접어 만들어 황천으로 떠나보내는 그 배의 숫자만큼 복수적이다. 그가 구상하는 배의 숫자의 적지않은 점이 이를 말해준다. 이 점은 어쩌면 [부음]이 예술작품이라기 보다는 종교적 프로젝트임을 말해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생활정보지의 폰팅 광고에서 출발한 [폰팅맨]의 발상이나 그 첨부식 표현방법은 기본적으로 [찌찌삐삐]와 동일하다. 그러나 [싼%]와 유사한 절박성과 화면 중심부의 모뉴멘탈한 규모로 꼴라쥬된 [폰팅맨]의 상형적 명료성이 이 작품을 [찌찌삐삐]로부터 구별시키는 요소다. [폰팅맨]은 주재환의 혼합재료 작품 가운데 조형적 볼거리로서도 가장 주목을 끄는 작품들 가운데 하나다. [세계의 실상]의 작품발상도 그것이 기초하고 있는 것은 사회학적, 인구통계적 상상력이다. [몽상가 J씨의 몽유로], [어느 탈옥수의 도주로], [퇴마신군] 등 도시공간적, 지리적, 역사민속학적 상상력과 더불어 공간적 차원으로 확장된 작업의 사례도 그 익명성이나 인구학적 스케일에서 위의 작업들과 일정한 공통점을 나누어 갖고 있다.

이상 언급한 작업들과 그 특징들은 주재환의 작업의 경향이 조형미학적 설득력보다 철학적, 사회학적 색채를 띤 개념예술적 발상에 더 기울어져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그의 작업의 산문적, 현세간적 속성도 이와 관련지워 이해할 수 있다. 반조형주의와 반모더니즘적 색채도 또한 마찬가지다. 후자의 특징은 이미 [몬드리안 호텔], [계단을 내려오는 봄비] 등 현발 초기의 풍자적 작품들에서부터 볼 수 있었다.
98년의 ‘일기 연작’이나 ‘미학 연작’을 비롯한 그밖의 많은 작품들은 이점을 더욱 풍부한 스펙트럼 속에서 보여주고 있다. 일기 연작은 [커피], [볼펜의 수명], [김치국물] 등인데 이 작품들의 발상은 기본적으로 반조형적, 비물질적이다. 커피 흘린 자국이나 도시락의 김치국물이 흐른 자국 또는 볼펜 한자루의 목숨의 궤적을 담아낸 공간이 일기장의 페이지라는 점은 중요한 암시를 준다. 이 작품의 조형적 가난함과 보잘 것 없음은 그 개념의 철학적 깊이와 명료한 단순성에 대해 짝을 이룬다.
철학적 화두나 삶의 정언적 명제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유도하는 [설탕과 소금], [빗 속의 연인], [수수께끼] 등 작품에 대해서도 같은 얘기를 할 수 있다. [빗 속의 연인]은 길게 늘어뜨린 벽지 위에 색연필 드로잉과 그림 및 텍스트 꼴라쥬로 된 작품이다. 복합매체로 된 개념예술 작품이라 할 수 있는 이 작품의 컨텍스트는 빌 게이츠 등 두뇌집단(작품 상부의 집단초상)으로 상징되는 오늘의 정보화 사회 속의 개인의 주체성 내지 정체성 문제라 할 수 있는데, 그 표현방법이 유머러스하면서도 우리를 화들짝 깨게 하는 선문답 식의 압축된 화두를 던져준다. “...그럼 너는 누구냐?”
미학 연작은 인쇄 텍스트와 기타 혼합재료로 된 것으로 [도난작품], [포장그림], [이브 클라인], [몽유도원도] 등인데 이것들도 이 부류에 포함된다. 이 연작은 연작 이름이 말해주듯, 일종의 예술론적, 미학적 성찰로서의 개념예술적 작업들이다.
미학 연작에 속하지 않지만 [수수께끼]와 [K씨,1000살을 살다] 같은 작품도 인쇄 텍스트 작품이다. 이 작품들의 형식은 언어의 투명한 명료성 그것을 가장 순수한 구조적 형태로 이용한 것으로, 완벽한 비물질적 개념예술 작품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예술 그 자체에 대한 자기회귀적 질문이 아닌 철학적, 인생적 내용([수수께끼])과 정치적 내용([K씨...])을 담고있는 점이 다르다. 후자는 분단의 영속화에 대한 반어법적 풍자다. 이 작품의 다이아그램에 의하면 1945년에 태어난 K씨는 2945년에 1000살을 먹게 될 것이다.
인쇄 텍스트는 앞서 언급했던 페이퍼 컷 작업이나, 그밖의 다양한 형식의 설치미술들과 더불어 주재환의 최근 작업의 활력을 짚어보는 데 있어 중요한 표현 형식들이다. 페이퍼 컷 기법은 위에 언급했던 [쇼핑 맨] 외에도 [도망가는 임신부], [일년 열두달], [바코드], [엄마와 아기], [퇴마신군], [마지막 탱고], [상승과 추락] 등의 작업에서 설치미술의 방식과 결합되면서 놀라우리만큼 신선한 설득력을 얻고 있다. 특히 [도망가는 임신부]와 [일년 열두달] 등에 등장하는 기호적으로 압축된 형태의 컷아웃 인물상들은 그것이 하나의 회화적 공간에 고착된 것이 아니라, 달력의 사진처럼 인쇄된 풍경, 스크린, 벽지 등 어느 곳에서나 적응하면서 기존 풍경의 컨텍스트를 바꾸는 매력적 융통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같은 융통성과 증식은 색종이 컷아웃 벽화인 [엄마와 아기]나 악보와 색채사진의 컷아웃 설치작품인 [마지막 탱고]에서 풍부한 공간적 적응성과 드라마를 만들어낸다. 칼라 인쇄된 전통 무신도의 도상들의 컷아웃들이 서울시 교통지도 위에서 자리잡으면서 펼쳐내는 역사인문적 이야기 또한 무척 흥미롭다([퇴마신군]). [상승과 추락]은 높이 솟은 고층건물의 청사진 입면도에 이 건물로부터 추락하는 수많은 인간들의 컷아웃을 입체적으로 결합시킨 것인데, 그 의미의 대비적 연출과 재료의 가벼움이 아주 매력적인 개념예술 작품을 만들어내고 있다.
주재환 작업이 드러내는 철학적 차원은 그것이 사회 속에서의 중생적, 현세간적 삶의 흐름에서 체득한 것이라는 점에서 두뇌의 산물이 아니라 ‘몸’에 연관된 것이라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주재환의 개념예술적 투입이 사회적 경험 주체로서의 몸만이 아니라 더 깊은 존재론적 의미에서의 혹은 생물학적 의미에서의 ‘몸’을 포괄하고 있다는 점 또한 제대로 주목되어야 할 부분이다. 주재환의 최근 작업들은 그것들이 작가 자신의 육체로 체험하는 생로병사에 관한 메타포일 것이 분명하다고 추측케 하는 작업들을 포함하고 있다. [치즈 5, 네 모습이 앞으로 어떻게 변해갈는지], [볼펜의 수명], [수퍼칼슘], [나의 푸른 꿈] 등이 이런 류의 작업들이다. [질주], [불면], [심야의 고속도로]칼라도판 6 등의 작품도 이에 해당할지 모른다. 후자의 두 작품의 경우 어쩌면 그것들이 환기하는 심리적 긴장의 날카로움이, 이를테면 화면의 중앙을 고속도로처럼 수직방향으로 가로지르며 곤충이나 인간 같은 유기체를 좌우대칭으로 절단낸 듯한, 비인간적이고 폭력적인 어떤 소외적 힘이 불러 일으키는 그 불길함이 이런 추측을 하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미학 연작중 [포장작품]의 인쇄 텍스트를 인용하며 글을 마친다.


이것은 1981년 7월 22일~28일 동안
롯데쇼핑 롯데화랑에서 열린
현실과 발언 동인의 도시와 시각전에
출품한 그림이다

18년전에 무엇을 그렸는지
기억이 없어 궁금하지만
포장을 풀지않고 그대로 전시하는 까닭은
예술
지리멸렬한 이 시대에
누구를 위해서
무엇을 향해서
어떻게 하려고
··········
難關

  2002/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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