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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omepage]님께서 남기신 글 (2013-01-30 10:09:04, Hit :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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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러운 교란 - 백남준을 말하다 / 끈질긴 후렴

GENTLE DISTURBANCE Talking Paik展 / TIRELESS REFRAIN展 2013_0129 ▶ 2013_0630 / 둘째,넷째주 월요일 휴관

초대일시 / 2013_0207_목요일_05:00pm

오프닝 공연 / 단 한번도. 완연히. 덜컥 김성배(밴드 비아)_김온(사운드 아티스트) 이용창(레나타 수이사이드)_조선구(밴드 SSS)

셔틀버스 / 15:15 합정역 2번 출구, 16:00 한남동 더힐(전 단국대학교 자리) 육교 건너편 셔틀버스 예약 / 031-201-8512, reservation@njpartcenter.kr

『부드러운 교란 - 백남준을 말하다』상설展 2013_0129 ▶ 2013_0630 참여작가 백남준_쟈드 얄커트_샬롯 무어먼_만프레드 레베

『끈질긴 후렴』-기획展 2013_0207 ▶ 2013_0616 참여작가 김범_믹스라이스_송상희_산티아고 시에라 프란시스 알리스_이수성_이완_멜릭 오아니앙 아나 휴스만_나디아 카비-린케

관람료 성인_4,000원(단체_2,000원), 청소년,어린이_2,000원(단체_1,000원) * 경기도민 50% 할인, 7세 미만, 65세 이상, 국가유공자, 장애인 무료 * 단체_20인 이상, 중복할인 안됨

관람시간 / 10:00am~06:00pm / 토요일_10:00am~07:00pm / 둘째,넷째주 월요일 휴관

백남준아트센터 NJP Art Center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상갈동 백남준로 10 Tel. +82.31.201.8571 www.njpartcenter.kr

"부드러운 교란"은 백남준의 친구였던 설치예술가 크리스토와 잔-클로드 부부가 자주 썼던 표현으로, 그들은 자신들처럼 백남준도 기성의 사회 시스템에 비판적 문제제기를 함으로써 교란을 일으키지만, 그것은 언제나 부드럽고 유머러스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상설전 『부드러운 교란-백남준을 말하다』展은 백남준의 그런 유쾌하지만 날카로운 사회적 의식을 담은 작품들과 그와 함께 작업한 작가들의 작품 및 풍부한 자료들을 선보이는 자리입니다. ● 한편 기획전 『끈질긴 후렴』은 백남준의 태도와 마찬가지로, 직접적인 정치적 메시지를 표현하기보다는 반복과 되새김을 통해 꾸준히 사회적 문제들을 수면으로 드러내는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예술가의 정치성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작품들로 이루어진 전시입니다.

백남준_과달카날 레퀴엠_1977_부분
백남준_과달카날 레퀴엠_1977_부분

1960-70년대 유럽과 미국에서는 신구 세대 간의 갈등이 극에 달하며 기존의 사회질서에 반대하는 운동이 끊임없이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문화예술계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백남준을 비롯한 일련의 아티스트들은 다수의 관객과 공유할 수 있는 매체인 비디오를 사용하여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노력하였습니다. 비디오는 부조리한 세상에 도전하는 예술가들에게 중요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 백남준은 그의 영상작품 「과달카날 레퀴엠, 1977」에서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과 일본의 격전지였던 과달카날 섬에서 샬롯 무어먼과 함께 평화를 위한 곡을 연주하고 퍼포먼스를 했습니다. 그리고 퍼포먼스 영상은 전쟁 당시의 미디어 이미지들과 빠른 속도로 교차되도록 편집되었습니다. 이 작품에서 백남준은 전쟁에 관해 직접적이고 신랄하게 비판하지는 않지만, 기억과 역사를 되새기는 행위만으로도 사회에 대한 강한 문제 제기를 합니다. 백남준의 이런 전략은 동시대의 예술가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작가들은 과격한 정치적 메시지를 전하기보다는 마치 "후렴구"처럼 반복을 통해 은연중에 사회에 대한 비판적 메시지를 만들어내며, 영상뿐만 아니라 설치, 회화, 만화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끊임없이 사회에 대한 개입을 시도합니다. 이번 전시는 정치에 종속되지 않은 예술이 어떻게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적 관점을 제시하는지 보여주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백남준_TV 침대_1972/1991
백남준_비디오 샹들리에_1991

부드러운 교란 - 백남준을 말하다 본 전시는 백남준의 작품 중에서 가장 정치적이라고 평가 받는 비디오 작품 「과달카날 레퀴엠」에서 출발합니다. 제 2차 세계대전의 격전지였던 솔로몬 군도의 과달카날 섬을 소재로 한 이 작품에서 백남준은 전쟁의 파괴적인 속성뿐만 아니라 사회적 금기에 대한 저항을 담아냈습니다. 「과달카날 레퀴엠」은 1977년 뉴욕의 카네기홀에서 『감옥에서 정글로』라는 공연의 일부로 처음 상영되었는데, 여기에서 감옥은 샬롯 무어먼이 1967년 옷을 벗은 채 첼로를 연주했던 작품 「오페라 섹스트로니크」로 인해 감옥에 갇혔던 사건을 의미합니다. 백남준은 음악 분야에서 금기시되던 성(性)을 전면에 내세워 클래식 음악이 성스러워야 한다는 통념에 저항하였습니다. ● 「과달카날 레퀴엠」을 통해 전쟁에 대한 기억이 승자와 패자 모두에게 상처임을 환기시키면서 백남준은 시공간을 넘나드는 비디오 작업으로 부드러운 교란을 도모했습니다. 본 전시에서는 백남준의 부드러운 교란을 보여주는 「과달카날 레퀴엠」, 「오페라 섹스트로니크」와 함께 그에게 정치적인 예술이란 무엇인지, 사회 참여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작품과 자료들이 소개됩니다.

산티아고 시에라_금발로 염색하는 대가로 돈을 받은 133명의 사람들_2011
산티아고 시에라_화랑의 벽을 떼어내어 땅에서 60도로 기울기를 유지하는 다섯 명의 사람들_2011
나디아 카비-린케_아니오_2012
믹스라이스_폭포_2013
이완_불가능한 것의 가능성_2012
송상희_성탄절 저녁식사_2012
프란시스 알리스_그린라인 : 때로는 시적인 행동이 정치적이 될 수 있고, 때로는 정치적인 행동이 시적이 될 수 있다_2007
멜릭 오아니앙_여러 날들, 나는 내가 본 것과 볼 것을 보고 있다_2011

끈질긴 후렴 기획전 『끈질긴 후렴』에서는 예술가들이 특정한 행동을 지속하거나 되풀이함으로써 어떻게 현실에 대한 비판적 관점이나 의식을 일깨우는지 조명하고자 합니다. 특히 다소 무모해 보이거나 가시적인 성과가 없어 보이는 행동들을 지속함으로써, 다분히 사회 비판적인 효과를 얻는 작품들을 한자리에 모으고자 했습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경계지역인 '그린 라인'에서 평온한 퍼포먼스를 진행하는 예술가(프란시스 알리스),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의 노동자 캠프에서 11일 동안 100미터의 영화 트랙을 매일매일 설치하면서 반복적으로 촬영한 영상(멜릭 오하니언), 원주민에게 의미를 모르는 스페인어를 익히게 하고, 이주민들을 금발로 염색하게 하고, 미술 전시장의 벽을 기울이게 하여 그 비용을 지불하는 예술가(산티아고 시에라) 등을 통해 우리는 예술가가 첨예한 정치적 대립구도에서 어느 한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흐름에 잠시 편입하는 상황을 보게 됩니다. 일견 목표가 무엇인지 알기 힘든 이 행위들은 정치적, 경제적으로는 무의미할 수 있지만, 거대담론들을 미시적인 감각으로 분해해서 보여주는 역할을 하며 이 과정을 통해 작업들은 예술적 의미를 획득합니다. ● 정치 자체에 대한 침투이건, 보이지 않는 힘을 가시화하는 미시정치이건, 위의 예술가들의 정치성은 감각적 충실함에서 비롯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이번 전시는 정치에 종속되지 않은 예술이 어떻게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적 관점을 제시하는지 보여주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 백남준아트센터

 

 

 

 

신광호展 / SHINKWANGHO / 申廣浩 / painting 2013_0201 ▶ 2013_0221

신광호_untitled_캔버스에 유채_73.5×61cm_2012

초대일시 / 2013_0201_금요일_06:3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정수화랑JEONGSU GALLERY서울 종로구 사간동 41번지cafe.daum.net/artfocus

감정의 충돌과 순간의 정점 ● 작가의 길을 선택한 신광호는 성실하게 배운 손끝의 그림솜씨로 사실적 묘사나 시각적으로 화려한 외형에 사로잡히지 않고 심적 과정∙정신적 체험을 바탕으로 사물의 의미와 인간 내면의 본질을 표현하려 한다. ● 그것을 위해 그는 원색을 주로 하는 강렬한 색채를 이용하여 색의 대비(對比) 효과를 추구하며 끊임없이 작가 개인의 자아(自我)를 주관적으로 표현하는 개인적 감정표출의 예술을 추구하고 있다. 작가는 내면의 정신세계를 현실로 확장하여 창조하는 과정에서 정밀한 형태와 조화로운 색채 사용은 무시되고 왜곡과 과장을 통해 비현실적인 내면적 자아 속으로 빠지고자한다.

신광호_untitled_캔버스에 유채_73.5×53cm_2012
신광호_untitled_캔버스에 유채_116.5×90.5cm_2012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심적 변화와 충돌은 타인과의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다양하고 복잡한 감정을 자화상을 통해 표현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등장하는 자신의 모습은 결국 자신은 물론 타인의 모습까지 함께 포함하고 있다. 다시 말해 사고와 언어를 가진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이 애매모호한 감정은 결국 양자 간의 커뮤니케이션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내가 느끼는 것과 상대방이 느끼는 것이 동시에 일어날 수 있다는 전제를 가진다. ● 한마디로 정의 내려지기 힘든 인간 감정의 복잡함은 작가의 내면에서 오랜 시간동안의 고민을 거친 후 화면의 빈 공간에 순간적인 흔적으로 남겨진다. 이 "순간성"은 작가가 붓을 들고 있는 짧은 시간동안 완벽하게 작업에 몰입하고 동화되어서 나오는 일종의 행위이며, 화면에 색이 안착되고 형태가 형성되는 순간 백지에 대한 공포는 와해되고, 작가 내면의 두려움과 또한 그것으로부터의 희열이 동시에 발생한다. 이 순간은 작가가 가지고 있는 내면의 무언가를 끄집어내는 과정으로 그가 작품을 창조해 내는 에너지의 정점이다.

신광호_untitled_캔버스에 유채_130×89cm_2012
신광호_untitled_종이에 아크릴채색_69.5×42cm_2012

이런 작업의 내용과 과정은 20세기 초 독일에서 발생했던 표현주의(Expression)의 개념과 상응한다. 표현주의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점이 예술가의 정신적인 것의 표현, 즉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며 어떤 형태로든 작품 안에 작가의 영혼이 깃들어 있어야한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기존의 아카데미적인 사실적 표현이나 풍경화의 원근법을 무시하고 인체의 분석적인 해부학을 거부했으며 또한 인상주의의 빛의 조화나 음영의 법칙은 더 이상 화면 안에 존재하지 않았다. 단지 그들은 그들 자신의 주관을 드러내는 도구로써 색채와 형태의 표현력을 강조했다. 여러 대표적인 표현주의 작가들 중에서도 그의 일련의 작업들은 에드바르트 뭉크 (Edvard Munch 1863-1944, 노르웨이) 의 작업을 연상시키게 한다. 삶과 죽음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인간 내면의 슬픔과 두려움을 표현했었던 그의 작품에서 뚜렷하게 볼 수 있었던 인간의 심리는 한마디로 혼란 그 자체였다. 지금 작가가 무엇이라 뚜렷하게 정의 내리지 못하고 있는 그것은 인간의 내적인 무엇, 늘 한마디로 정의 내려질 수 없는 혼란스러운 것, 그래서 그것은 "순간"이라는 광기로 화면에 나타나 작품이 되고, 작가의 정신과는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 예술은 이러한 정신세계의 의식적 표현이며 이 정신세계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합목적적인 근거와 이성적인 설명이 따라야 한다. 작품은 그것으로부터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을 때 진정한 예술로써의 가치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 유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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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하니

선무展 / SUNMU / 線無 / painting   2013_0202 ▶ 2013_0216

선무_너2_캔버스에 유채_72×61cm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20604e | 선무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3_0202_토요일_05:00pm

관람시간 / 12:00pm~06:00pm / 일요일_12:00pm~05:00pm

갤러리 담 GALLERY DAM 서울 종로구 안국동 7-1번지 Tel. +82.2.738.2745 www.gallerydam.com cafe.daum.net/gallerydam

갤러리 담에서는 신년기획초대전으로 선무작가의『뭐하니』전시를 마련하였다. 탈북화가로 잘 알려진 선무작가는 한국에서 선무라는 예명으로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데 이번 전시는 열 한번째 개인전이다. 북한에서 탈북하여 김일성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와 작가가 소망하는 유토피아를 그려내고 있다. 태어나면서 청년기까지의 학습된 곳에서 벗어나 환경이 전혀 다른 이곳에서 청년기를 보내면서 겪는 갈등들도 화면 속에 표출하고 있다.「뭐하니」라는 작업에서는 우리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면서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묻고 있다. 또한, 아직 북한에 있는 모친에게도 부칠 수 없는 편지를 그린「편지」를 비롯하여, 언젠가 남북이 함께 갈 날을 소망하며 어린 아이들의 손을 잡고 가는 모습을 그린「우리 함께」, 어린 아이가 오랜 못이 박힌 문을 열어젖히는「문을 열다」는 작품 등 14여 점의 신작이 보여진다. 선무작가는 분단의 선을 비롯하여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계층과 계급간의 보이지 않는 갈등들이 없어지기를 희망하며 작업을 하고 있다. 이미 해외에서는 많은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선무작가는 인터내셔널해럴드트리뷴과 뉴욕타임지에 거푸 인상적인 기사와, 영국 BBC, 독일의 ARD, 미국의 Voice of America 등에서 비중있는 다큐멘타리에 등장하였다. ■ 갤러리 담

선무_너1_캔버스에 유채_72×61cm_2012

이사람 선무가 사는 법1. 지난 4월은 북한이 우주에 쏘아 올린 이상한 물건으로 온통 시끄러웠다. 북한은 인공위성을 실은 우주발사체라 말하고, 미국과 한국언론은 대륙간탄도탄을 위장한 로켓이라 한다. 여기에 가수 신해철이 "북한로켓발사를 경축한다"는 글을 올려 논란을 부추겼다. 여기서 필자는 어느 쪽을 옹호하고 싶지 않다. 이 지면은 날 선 정치적 입장을 밝히는 자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이 상황에서, 이 상황을 미술적 시선으로 바라보는 작가를 떠올릴 뿐이다. 이름은 선무. 가명이다. 그는 가명을 써야만 하는 사람이다. 한자로는 줄 線. 없을 無. 줄이 없다는 것. 여기서 줄이란, 무언가를 이어주는 것이 아니라, 막는 것, 즉 장애물이다. 결국 그의 이름은 장애물이 없다는 것. 더 정확히 말하면, 이미 놓여있는 장애물을 본인의 의지로 없애겠다는 것이다. 현존하는 장애물을 넘어온 사람이며, 그 장애물 때문에 가명을 써야만 하는 사람인 동시에 장애물을 없애겠다는 의지를 가명에 투사한 사람. 그가 바로 선무다. ● 흥미로운 건, 그가 현존하는 장애물을 없애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 혹은 무기란 고작 두 손, 그리고 손에 잡은 붓과 캔버스, 그리고 붓질을 조율하고, 그의 경험을 기록하고 호명하는 눈 뿐이다. 그렇다. 그는 화가일 뿐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 화가가 보잘것없는 무기로 투쟁하려는 장애물이 실로 어마어마하다는 점이다. 분단. 남북을 가로지른 넘지 못할 줄. 거대한 이념과 이념의 물적 장치인 수많은 살상기계들이 수많은 삶을 짓이겨 찢어 놓은 정치적 실재. 그것이 바로 선무의 장애물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 장애물을 설정하고 유지하는데 공헌한 북한체제와 그 우두머리를 상대로 투쟁하려는 것이다. 손에 붓 하나 꼭 쥔 채 말이다. 그를 처음 만난 건, 2007년 4월인 듯하다. 어느 작은 대안공간의 전시를 준비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창달린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불쑥 옆자리를 차지하고선, 생경한 억양으로, "선생의 생각이 무엇인지 궁금하외다"하고 말을 붙였던 그 사람이다. 모자 챙 아래 살짝 어른거리는 그의 눈빛은 솔직히 나로서도 감당하기 어려웠다. 우린, 서로 독한 시선과 몇 마디 말을 서로 던지고 받은 채 그날을 경험했다. 어딘지 불안한, 그 불안이 과도한 자신감으로 이글거리는 수척한 몰골의 그였다.

선무_창문을 열다_캔버스에 유채_72×60cm_2010

그랬던 선무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다. 물론, 그 해 가장 내가 참여했던 전시 가운데 가장 강렬한 인상으로 남은『노순택-선무 2인전, 우린 행복합니다』(호기심에 대한 책임감, 2007)이 비교적 좋은 반응을 얻었고, 같은 해 대안공간 충정각에서 열렸던 1회 개인전이 강렬하게 회자되면서, 서로 잊지 않고 지내긴 했지만, 최근의 성장은 지극히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사실, 몇몇 콜렉터들 제외하면, 선무의 그림에 먼저 관심을 보인 것은 해외의 언론이었다. 지난 겨울, 인터네셔널해럴드트리뷴과 타임지에 거푸 인상적인 지면을 차지하더니만, 벌써, 영국 BBC, 독일의 ARD, 미국의 Voice of America 등에서 비중있는 다큐멘타리에 등장했다. 지난 3월에는 호주에서 개최된 북한관련 국제행사에서 북한의 현재를 회화로 증언하는 예술가의 한 명으로 참여했고, 내년엔 미국에서 비중 있는 전시를 앞두고 있다. 그는 이제 그는 그저 정치적 망명가가 아니라, 정치적 문제를 회화라는 방법으로 풀어내는 예술가로서 세상의 시선을 끌고 있다. ● 그는 삶의 경험은 그에게는 정치적 아픔을 동반하는 개인적 아픔임에 틀림없지만, 그는 그 아픔을 붓 하나로 세상의 관심을 끌어내는 매력으로 바꾸는 데 성공하고 있다. 이건 매우 중요한데, 결국 붓 하나 꼭 쥔 그의 손이 거대한 이데올로기적 대립에 기반한 정치적 모순에 맞서는 방법을 비로소 그가 찾아내는데 성공했다는 사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유일한 방법이자, 가장 효과적인 방법 말이다. 그건, 그림의 매력으로 세상을 휘어잡고, 그의 삶의 아픔, 그 아픔을 초래한 정치적 모순을 세상의 관심 한 복판에 던지는 일이다. 그는 그 길을 찾아낸 것으로 보인다. 그의 그림을 객관적 지평에서 바라보는 평론가의 한 사람으로 이런 평가는 전혀 근거 없는 평가가 아니다. 그와 그의 그림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그저 돈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정치적 이슈를 생산할 수 있는 국제언론, 정치인, 기관의 참여자들이다. 물론, 그가 그의 개인적 아픔과 분단의 모순을 상품화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단호히 자신의 작품을 아무에게나 판매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의 그림이 갖는 시장가치가 아니라, 선무가 사회와 예술이 교차하는 지점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선무_노래하는 소녀_캔버스에 유채_163×130cm_2011

2. 사실, 선무의 그림들을 그리 간단하지 않다. 물론, 간단하지 않은 이유의 가장 큰 요소는 그가 정치적인 그림을 그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왜냐하면, 정치적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기 때문이다. 민중미술이 그랬고,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의 이상한 형식들이 그러했다. 선무의 정치적 그림은 정치적 그림의 지평에서도 차별적이다. 선무는 대개의 정치적 그림과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그림을 정치화시킨다. 이점을 독자들에게 납득시키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다만, 이렇게 시작할 수는 있다. 즉, 그는 시각적으로 '겉으로 드러나는 바'와 '의미하는 바'를 대립시킨다는 것이다. 이건, 좀 기호학적으로 복잡한 설명을 동반한다. 시각적으로 드러나는 바를 '기표'(記票, signifier)라 한다면, 의미하는 바는 '기의(記意, signified)'라 할 수 있다. 대개의 정치적 그림은 기표와 기의의 직접성에 근거한다. 예컨대, 80년대 집회나 시위에 등장하는 걸개그림에서 불끈 쥐어진 팔뚝과 주먹(기표)은 있는 그대로 노동자 혹은 농민의 투쟁의 힘을 의미한다. 선무는 이런 기표와 기의의 직접적 관계를 설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선무는 기표와 상반되는 기의를 설정한다. 이점을 좀 더 쉽게 설명하면, 보이는 것 그대로 읽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선무는 보이는 것과 반대되는 의미를 화면에 부여한다. 이러한 기호학적 화면구사는 선무의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들을 난해하게 만든다. ● 예컨대, 선무가, 2007년 대안공간 호기심에 대한 책임감에 김정일의 초상(「조선의 신」, 2007)을 걸었을 때, 가장 먼저, 가장 강렬하게 반응한 것은 주민들이었다. 어찌 김정일의 초상을, 그것도 청와대 지척인 부암동에 버젓이 걸어 놓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전시기간 내내 주민들의 항의와 신고가 이어졌다. 아마도 출동한 경찰의 수가 전시를 일부러 관람하기 위해 찾아오는 관객 수보다 많은 날도 있었다. 그렇다면, 기표와 기의를 쪼개려는 선무의 시도는 실패한 것이 아닐까? 적어도 주민들은 김정일의 초상을 보고, 적어도 선무가 김정일을 찬양할 의도가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쉽게 알 수 있어야 했다. 선무가 구사하는 기표-기의의 구사가 더 정교하게 나타나는 지점이 이곳이다. 선무는 그의 회화적 가능성의 공간을 기표에만, 혹은 기표와 기의의 자의성에만 두고 있지 않다. 정작 선무는 자신의 의도를 기표로부터 분리된 기의 속에 숨겨 놓는다. 참, 이걸 쉽게 설명하기는 더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만약, 이 글의 독자들이 필자가 구사하는 과도한 단순화를 용인해주기만 한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즉, 선무는 기표와 기의를 쪼개고, 쪼개진 기의를 다시 쪼갠다. 이걸 비평적인 담화로 표현하면, 글쎄, 시각적 기호의 이중적 분화라 할까? ● 선무는 김정일의 시각적 표현을 최대한 중립화한다. 그건 그저 사실적인 김정일의 얼굴일 뿐이다. 그저 무표정한 사실묘사일 뿐이다. 부암동 주민들은 과연 이렇게 중립화된 김정일의 초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김정일은 적어도 남한 사회에서 이렇게 그려질 수 없다. 이 땅에서 단순한 사실묘사만으로 중립화되기엔 이 민족에게 저질러진 김정일의 죄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북한체제와 그 수괴로서 김정일을 비판할 의도라면, 그는 적어도 김정일에 머리에 괴물같은 뿔이라도 두어 개 그리고, 인민에게 집단구타라도 당하며 나뒹구는 그의 모습이라도 그렸어야 한다. '무찌르자 공산당' 같은 문구라도 넣어서 말이다. 그러나, 선무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선무가 김정일을 미화하고 찬양하기 위해서 그렇게 그렸던 걸까? 물론, 결코 아니다. 그렇다면, 그의 의도는 어떻게 달성되는 걸까? 자신으로 하여금 넘지 못할 선, 사랑하는 가족들을 버리고, 수만 리를 지나 이 생경한 땅에 오도록 강요한 그 사회, 그 체제의 수괴에 대한 정치적 비판의 의도를 어떻게 달성하려는 것일까? 그는 그러한 의도를 철저하게 숨겨놓는다. 그렇다면, 어디에 어떻게 숨겼을까? 힌트는 김정일의 머리 위에 그려진 별이다. 북에서 별은 곧 최고권력자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 별은 가장 뾰족한 모서리를 김정일의 머리 정수리를 겨누고 있다. 별은 이미 선무가 정교하게 틀잡은 캔버스 틀에 의해 무참하게 잘려나가 있다. 북에서 별은 이렇게 그려질 수 없다. 그건 금기에 해당한다. 게다가 선무는 별의 가장 날카로운 끝으로 무방비 상태의 김정일의 머리를 겨누고 있는 것이다. 정치적 비판을 가장 극단적인 방식으로 시각화하고 있는 것이다. 시각적 형태를 통해, 정치적 분노를 가장 극한의 형식으로 밀어 붙이는 것이다.

선무_당당한 소녀_캔버스에 유채_93×72cm_2011

3. 이런 방식은「세상에 부럼없어라1」(2006)에도 적용된다. 비교적 초기작에 해당하는 이 그림은 더 이상 기쁠 수 없는 북한의 어린이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게다가 선무는 이 그림 아랫부분에 '우리는 행복합니다'라고 쓰고 있지 않은가? 만약, 이 그림을 기표와 기의로 나눈다면, 기표는 희열에 빛나는 북한어린이며, 기의 역시 북한체제가 가져다 주는 행복일 것이다. 그는 무엇을 의미하고 싶었을까? 남한과 북한 사회를 모두 경험해 본 선무가 북한 체제에 향수를 느끼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사실, 만약, 북한체제를 비판하기 위해 헐벗고, 굶주린 북한 어린이를 그렸다면, 그건 화가의 정체성을 갖는다고 보기 어렵다. 현실의 회화적 변환이 성취되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선무의 그림을 대할 때의 매력은 이 사람이 정치적 비판이 회화의 가능성의 공간을 따라 우회하는 방식을 추적하는데 있다. 선무가 숨겨놓은 비판을 정확하게 추적하기 위해선 롤랑 바르트가 제공하는 기호학적 개념, 즉 '외연'(外延, denotation)과 '내포'(內包, connotation)을 도입하는 것이 유익할 수 있다. 외연과 내포는 기의, 즉 기호의미를 좀더 세밀하게 관찰하기 위한 도구일 수 있다. ● 외연이란 말 그대로 겉으로 드러나는 명시적 의미를 말한다. 체제와 김정일의 업적을 선전하는 북한의 아이가 기쁨에 겨워 밝게 웃고 있다면, 그 웃음+표정의 외연은 드러나는 것처럼 김정일의 위대함과 북한체제의 우월함이다. 반면, 내포란, 좀더 깊숙이 '숨겨진 의미'를 의미한다. 선무의 화가로서의 자질은 기호의 의미의 지평에서, 외연과 내포를 정확하게 대립되는 방식으로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이다. 북한 어린이가 보여주는 기쁨과 희열의 외연은 김정일과 북한에 대한 극도의 찬양이지만, 내포는 그 찬양이 너무나도 극단적이라는 것, 그래서 비현실적이라는 것이다. 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도, 현실의 가장 비현실적인 속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현실이,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결코 현실 속에서 가능하지 않음에 대한 일종의 은유적 고발이랄까? ● 소녀는 또래의 다른 소녀들이 도저히 그럴 수 없을 만큼 기뻐하고 있다. 이 기쁨이 과연 진실일까? 도저히 진실일 수 없는 진실, 그것은 혹여 가장된 위장일 가능성이 높다. 현실을 가상으로 위장하는 것이 아니라, 가상을 현실화하는 위장이다. 현실을 가상으로 재구성하는 것은 몇 마디의 말이면 충분하지만, 가상을 현실화하는 위장은 집단, 혹은 사회전체의 수준에서 위장을 강요하고 강화하는 강고한 시스템이 필요하다. 정작 기쁨에 겨워하는 북한 어린이를 그렸을 때, 선무가 숨겨놓은 내포는 그런 기쁨이 현실에서 가능하지 않은 위장이며, 이 위장을 현실 속에서 가능케 하는 북한사회 체제가 갖는 불가해한 폭력성이라는 것이다. 결국 동일한 기표를 통해 상반된 외연과 내포를 서로 대립적으로 구성해 낼 수 있는 능력, 그것이 선무가 보여주는 회화의 세계라는 것이다. 이런 방식의 기호학적 화면구성은 선무가 보여주는 그림들을 전반적으로 관통하고 있다. 사실 그는 사실적 묘사에 충실한 리얼리즘 화가이지만, 더 본질적으로는 의미를 다루는 정교한 기호학자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그가 다루고 처치하는 의미가 결국 사실을 재료로 수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을 통해 의미의 세계를 시각화하는 사람. 그가 바로 선무다.

선무_천사의 분노_캔버스에 유채_91×72cm_2012

4. 지난해 인사동 쌈지갤러리에서 열렸던 두 번째 개인전『세상에 부럼없어라』는 또 다른 세계를 보여준다. 전작들은 주로 선무가 북한에서 배웠던 선전화풍의 이미지 조직방식에 기초해 있다. 사실적인 묘사, 거대한 캔버스 위에서 붉은 색과 푸른 색 중심의 강렬한 색과 구도를 통해, 두만강을 건널 때의 분노와 절망, 불안을 그렸다면, 두 번째 개인전에선 드디어, 남한에서 익힌 소위 서구적 현대미술의 영향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무엇보다 유머코드가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 유머란 삶의 질곡을 뛰어 넘어 공동체를 형성하는 감성적 기반이기도 하지만, 가장 효과적인 약자들의 무기이기도 하다. 유머란, 작은 웃음으로 굳고 강건한 덩치의 적에게 무시할 수 없는 균열을 내는 예술적 무기라는 것이다. 나이키 운동복과 아디다스 신발을 신고서 뒤뚱거리며 우스꽝스운 표정을 짓는 김정일. 이건 단순한 불경이나 조롱이 아니다. 선무는 김정일의 존재와 권위를 우스꽝스럽게 희화화시킨다. 그는 그저 광대처럼 경망스럽게, 익살스럽게 웃고 있다. 물론, 선무가 구사하는 유머는 폐부를 찌르는 양가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다. 비판적 함의는 개혁 개방을 거부하면서도, 그 자신은 세계적인 상품으로 사치를 즐기는 김정일을 희화화하는 것이다. 이 작품은 그러나 비판에만 그치지 않는다. 그림 속의 김정일은 행복해 보인다. 이 모습은 선무의 그림에서 언제나 굳은 표정을 짓던 독재자가 아니다. 독재자는 과잉 집중된 권력의 중심이면서 동시에 바로 그 권력 때문에 언제나 그 누구보다 불안한 사람이기도 하다. 권력이 주는 거만함과 불안함은 선무의 그림 속에서 김정일의 무표정한 얼굴로 나타났다. 그런데 서양의 품질 좋은 상품들로 치장한 김정일의 표정에는 그러한 거만과 불안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선무의 그림 속에서 김정일은 행복해 보인다. 이 행복한 표정이 던지는 정치적 함의는 무엇일까? 선무는 그림 속 김정일에게 어떤 의미를 부여한 걸까? 어쩌면, 선무는 개혁 개방이 인민을 위하는 길일 뿐 아니라, 김정일 자신에게도 행복을 가져다 주는 길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선무_천사의 고민2_캔버스에 유채_72×61cm_2012

그것이 비판이건, 정치적 요구이건, 선무는 자신의 의도를 유머코드를 통해, 회화적 의미의 지평에서 효과적인 방식으로 전달하고 있다. 정치적인 비판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가벼운 외양으로 던져 놓은 이 작품의 재미는 이후 다양한 매체들의 관심을 끌었고, 세계에 전달되었다. 이 밖에 특정한 오브제를 형태적으로 반복팝아트의 형식 또한 관찰된다. 마릴린 먼로, 코카콜라, 브릴로 박스와 같은 대중문화의 오브제들을 무한히 반복함으로써 화면을 채워나갔던 엔디워홀의 경우처럼, 선무 역시 그가 집착하고 있던 북한 어린이의 모습을 질서정연하게 늘어놓고 있다는 것이다. 남한 사회에서의 생경한 자본주의적 경험들을 북한에서의 경험과 병치하는 방식들도 눈에 띈다. 특히, 전라, 혹은 반라의 여성누드와 인공기를 병치하는 방식은 보다 강렬한 비판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것은 북한체제에 대한 모독적인 불경인 동시에 좀 더 인간의 자연스런 욕망을 존중하는 사회에 대한 갈망일 수 있다. 선무의 회화적 방법이 진화하는 과정은 미술이 그저 미술일 수만은 없음을 보여준다. 미술은 투쟁이다. 미술은 과거의 미술에 대한, 미래의 미술을 위한 투쟁일 뿐 아니라, 미술이 사회와 교차하는 지점에서 나름의 변화와 변혁을 요구하는 정치적 투쟁이기도 하다. 선무는 이 정치적 투쟁을 미학적인 방식으로 변환할 뿐 아니라, 그 역의 변환 역시 시도하고 있다. 즉 미학적인 방식으로 정치적 투쟁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 미학적이자 정치적 투쟁의 거대한 지형은 정작 선무라는 한 작가의 손에 잡힌 작은 붓 한 자루에 의해 지탱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선무가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가 경색된 남북관계를 복원하는 데 어떤 정치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는 정작 이 시대, 이 상황에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가장 새로운 방식으로 풀어내고 있다. 그의 그림 속에서 남북은 그저 피 흘리며 싸우는 대립적 투쟁의 상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의 그림에서 그려지는 모든 상황들은 언젠가는 제자리로 돌아와야 할 것들이다. 그의 그림이 현실과 조응하며, 세상을 바꾸고, 세상과 함께 바뀌어 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동시대 미술장에 참여하는 관객에겐 일종의 행운이라 할 수 있다. ■ 김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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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신중국미술 @What:New Contemporary from China

한중수교 20주년 기념展 2013_0205 ▶ 2013_0331 / 월요일 휴관

초대일시 / 2013_0205_화요일_05:00pm

개막 심포지움 2013_0205_화요일_03:00pm~05:00pm_아르코미술관 스페이스 필룩스 1부 / 특별강연「중국 현대미술의 신조류」_판디앙 중국미술관장 2부 / 참여작가 및 작품 소개 리우춘펑 중국미술관 큐레이터_리후이_왕웨이_위앤위앤_원링_천웨이

참여작가 쉬빙 Xu Bing_먀오샤오춘 Miao Xiaochun 리후이 Li Hui_왕웨이 Wang Wei 위앤위앤 Yuan Yuan_원링 Wen Ling 송이거 Song Yige_천웨이 Chen Wei

후원 / 아트미아 협찬 / SK 주최 / 중화인민공화국문화부_한국문화예술위원회_주한중국대사관 주관 / 중국미술관_아르코미술관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월요일 휴관

아르코미술관 ARKO ART CENTER 서울 종로구 동숭길 3 Tel. +82.2.760.4850~2 www.arkoartcenter.or.kr www.facebook.com/ArkoArtCenter

『@What : 신중국미술』展은 한중수교 20주년을 기념하여 아르코미술관과 중국미술관이 공동으로 기획한 전시회입니다. 이 전시는 중국의 신세대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는 동시대 중국의 모습을 조망합니다. 전세계적인 시장개방과 도시화,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는 정보통신기술과 그로 인해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통신매체 등을 비롯해서 다양한 요소들이 중국 사회의 역동성인 변화를 주도하고 있습니다. 거대한 사회 변혁이 야기하는 삶의 양식과 개인의 인식 변화는 중국의 신세대 예술가들에게도 중요한 창작의 영감을 불어넣어주고 있습니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작품들은 개방과 자본화에 대한 충격을 주로 표현해왔던 90년대의 작가들과는 달리 변화된 환경에서 느끼는 친숙함과 이질감을 동시에 경험하고 있는 오늘날 중국 젊은 세대들의 감수성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새롭게 부상하는 중국의 신진 작가들 중심으로 구성된 이번 전시는 관객들에게 중국현대미술의 새로운 측면을 보여주게 될 것입니다.

쉬빙_새로운 영문 서예필법-춘강화월야 Spring, River, and Flowers on a Moonlit Night_ 화선지에 수묵_277×98cm×6_2012

쉬빙 Xu Bing ● 언뜻 전형적인 서예작업으로 보이는 그의 작품 앞에 서면 관객은 자신이 아는 글자가 없다는 사실에 당황하게 될 것이다. 쉬빙이 만들어내는 문자는 "소리와 의미"라는 기본 구조를 해체하고 있다. 그는 "문자"를 원래 모양 그대로 차용하지 않으며 고의로 문자를 왜곡시키지도 않는다. 그가 목판에 새긴 2천 개의 한자는 해체와 새로운 조합 후 소리와 의미가 없는 "순수한 형태"로 변한 것이다. 문자학의 측면에서 이는 어쩌면 터무니 없는 행동일 것이나, 미학과 시각예술의 관점에서 보면 그리 황당하지 않다. 오히려 예전에 없었던 서도와 그림 양방향 발전에 새로운 발자취를 남길 수 있는 진전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관객은 독자가 아니라 관찰자의 입장이 되었을 때 비로소 해독의 부조리가 시각의 장엄함으로 변하게 되고, 시각적으로 구축된 전체를 바라볼 수 있으며, 그 안에 담긴 풍부한 정신적인 내용 또한 깨달을 수 있다. 쉬빙은 시각예술의 본령은 오직 "가시성(可视性)"이지 "가독성(可讀性)"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먀오샤오춘_네오 큐비즘-무중유생 The Neo-Cubism-Out of Nothing_3D 애니메이션 설치_00:14:00_2011~2

먀오샤오춘 Miao Xiachun ● 서정적인 분위기의 고전음악과 함께 상영되는 먀오샤오춘의 애니메이션은 서양 미술사에서 이미 고전이 되어 버린 작품을 개작하여 현재화시킨 것이다. 예를 들어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작가를 닮은 인물들과 그들이 벌이는 사건들은 라파엘(Raphael)의 아테네 학당(School of Athens)이나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의 쾌락의 정원(Garden of Earthly Delights) 등의 장소에서 행해진다. 장엄한 서사구조가 느껴지는 그의 작업은 고색창연한 중국의 과거와 초 현대화 된 대도시로 상징되는 중국의 동시대를 연결하고 있다. 동시에 서양의 전통을 현재와 미래의 출현 가능한 시점과 연결시키고 있기도 하다. 그의 작품에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는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혼합되어 새로운 차원의 시간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리후이_V_스테인리스 스틸, 거울, 레이저, 포그머신_500×700×1500cm_2011

리후이 Li Hui ● 리후이는 기술매체를 이용해 현란한 빛이 내려앉는 오브제나 컴퓨터를 통해 왜곡, 변형된 형태의 조각작품을 창작한다. 그의 작품은 21세기 중국이 당면한 가장 중요한 문제, 즉 급격한 도시화와 산업화로 인해 파급되는 문명의 충돌을 언급한다. 형식은 미래적이나 그 속에 담겨있는 시점은 통사적이다. 그 자극적인 형식은 삶과 죽음, 존재와 초월, 물질과 정신과 같은 이원대립항의 경계를 넘어서는 작가의 시선을 표현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모순과 갈등 속에서 역동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오늘날 중국 사회의 단면을 내비침으로써 미래의 낙관과 비관 사이에 위치한 개인의 불안감을 은밀하게 드러내고 있다.

왕웨이_선전 파빌리온 Propaganda Pavilion_혼합재료_170×1200×260cm_2011

왕웨이 Wang Wei ● 왕웨이는 장소, 지점, 문화 혹은 역사적인 요소 등과 같은 요소를 해체하고 재조립하여 관객 앞으로 옮겨놓는다. 이번 전시에 출품한 왕웨이의 작품은 사회주의 국가에서 흔히 존재하는 선전(propaganda)용 게시판에 중국 전통 건축양식이 어색하게 결합되어 있는 구조물을 재현한 것이다. 그는 대상의 크기와 재료, 외형을 손질해 시간과 장소의 특징이 없는 전시공간에 옮겨 놓고, 우리에게 일종의 복합적인 허구, 즉 자연적으로 발생한 허구형식을 바로 인공으로 조성된 전시실에 옮겨놓음으로써 관람객의 주의를 환기한다. 동시에 그는 은밀하게 감추어진 이중적인 허구와 황당한 현실이라는 일상생활의 본질을 상기시킨다.

위앤위앤_물거품 Visionary Hope_프로필렌, 목재, 아크릴 도료_가변크기_2012

위앤위앤 Yuan Yuan ● 초상화가 주를 이루는 위앤위앤의 초기작업은 사회적 관념의 묘사와 그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동시에 포착하는 그의 작가적 방향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한 초상화들을 확장시켜 하나의 사회적 풍경으로 만들어 낸 것이 이번 전시에 출품된 '물거품'이다.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람의 이미지는 자신의 주변이나 인터넷에서 수집한 젊은 중국인들의 패셔너블한 모습이다. 한껏 멋을 낸 각각의 인물들은 화려하고 장식적이지만 동시에 즉시적이고 일시적인 젊음의 속성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한 개인의 모습들이 하나의 거대한 풍경이 되었을 때 결국 느껴지는 것은 시간의 덧없음이다. 동시에 이는 경제적, 사회적 신분상승을 위해 여념이 없는 자본주의 사회의 전형성이 만연한 오늘날 중국 사회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원링_8PM_종이에 잉크_79×109cm×6_2011

원링 Wen Ling ● 원링은 하루 동안 자신이 겪는 일상의 행위들을 만화의 형식으로 표현한다. 비슷한 연배의 다른 중국 젊은이의 일상과 큰 차이가 없어 보이는 그의 일상을 잘 살펴보면 젊은 세대의 보편적인 일상 속에 자리잡은 다양한 문화적 편린들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병상에 계신 부친을 간호하는 일과 휴대폰으로 문자를 주고받으며 차를 몰고 베이징의 번화가에 나가 식사를 즐기는 일들이 교차하는 일상을 통해 오늘날 중국 사회의 생생한 일면을 감지할 수 있는 것이다. 원링의 작업이 단순한 일상을 묘사하는 것을 넘어서는 의미를 갖는 이유는 미술작가의 입장에 서 있는 그가 만화책의 발간이나 인터넷 커뮤니티, 소셜네트워킹서비스 등을 통해 그의 예술표현의 영역을 확장하고자 하는 노력을 지속하기 때문이다. 보수적인 미술계 생태구조에서 쉽지 않은 이러한 시도를 작가는 많은 좌절과 난관에도 불구하고 중단하지 않고 있다.

송이거_하늘 사다리 The Ladder of Divine Ascent_캔버스에 유채_200×300cm_2012

송이거 Song Yige ● 송이거의 회화는 모종의 공간을 재현한다. 그의 회화에서 대상은 공간과 결합되어 있거나 공간 자체가 일종의 대상처럼 존재하고 있다. 때문에 그의 회화 속 공간은 몽환적이고 은유적이다. 이러한 공간은 실재하는 어떤 장소의 재현이 아니라 투시와 음영이 결합하여 구성된 허상과 기억의 혼합체다. 그려지는 대상들은 각자의 다양성과 고유성이 생생하게 묘사됨으로써 분명한 생명력이 부여되어 있다. 이는 공간이 환기하는 분위기의 밀도를 강화시켜 보는 이로 하여금 재현된 이미지를 보기보다 역동적 공간체험의 기회를 제공하는 결과로 귀결된다. 그의 감각적인 회화는 번영과 풍요가 넘치는 현실과 그 이면의 어두운 음영의 공간을 오가는 오늘날 중국의 젊은 세대의 감수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천웨이_새 한 마리의 소생을 기다리며 Waiting a bird to wake up_혼합재료_가변크기_2011

천웨이 Chen Wei ● 천웨이의 작업은 관객이 그 내부로 들어가 체험하고 유희할 수 있는 어떤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 그 세계는 이성과 지식이 아니라 내면에서 울려 퍼지는 고요한 감각의 과정을 통해 접근하는 세계다. 작품 자체가 작가 스스로 내면을 관조하여 얻어낸 어떤 심상을 재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작업의 핵심은 작가의 내면만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이들 모두 갖고 있는 경험의 세계들과 접속시킴으로써 무한대의 세계로 새롭게 재현되는 것에 있다. 그의 감각적인 설치는 오늘날 물질과 외형에 편중된 중국사회의 현실에 대한 예술적 반작용이기도 하며, 소멸되고 있는 감각의 가치에 대한 복원의 의지이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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