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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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omepage]님께서 남기신 글 (2012-12-31 23:46:09, Hit : 1679)
전시 2013.1.1

 

New Generation

2013 공모당선展 2013_0102 ▶ 2013_0129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30am~07:00pm

에이블 파인아트 갤러리 서울 ABLE FINE ART NY GALLERY 서울 종로구 화동 127-3번지 1층 Tel. +82.2.546.3057 www.ablefineartny.com

특정 장르에 국한되지 않고 오직 국제적 잠재력을 기준으로 선정된 10명의 작가들과 함께 2013년 새로운 한 해를 여는 공모 당선전 New Generation展을 준비 하였습니다. 약 한달 동안 열릴 전시에 참여하는 작가들은 이미 본인의 작업관을 구축 한국 미술계 전반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으며 그보다 더 나아가, 현대 미술의 중심 뉴욕에서 세계 미술 시장에 새로운 도전을 시작합니다. 한국의 현대미술을 세계에 알리는 선발대의 일원으로서 Able Fine Art NY Gallery와 함께 국제무대에 첫 발을 내딛는 이들에게 많은 성원과 격려 부탁 드립니다. ■ Able Fine Art NY Gallery

강덕봉_Disguise 16_Pvc 파이프, 우레탄 페인트_25×110×7cm_2012

Part 1 ● 나의 작업은 관계(關係)와 소통(疏通)에 관한 이야기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원하든 원치 아니하든 끊임없이 관계를 맺어가고, 또한 그 속에서 소통하며 살아간다. 관계속의 소통, 소통을 통한 관계, 이것은 우리의 본질을 나타내는 그 어떤 말보다 가장 중요한 말이 아닐까 싶다. 지금의 현대인(現代人)들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사회적인 관계 속에서 인하려 하며, 피상적인 인간관계 안에서 인위적인 구조가 복잡해 질수록 스스로를 위장하여 불투명하게 감추어 버린다. 즉, '나는 누군가인가' 와 같은 자신의 정체성을 '다른 사람에게 비추어지는 나'를 통해 정립해 버리고, 자신이 가진 본질은 외면하는 것이다. 본질을 숨기고 타인을 위해 만들어낸 이미지를 발견 했을 때 우리의 자아는 스스로에게 일종의 배신감 같은 것을 느낀다. 나아가 존재론적 괴리에 빠져들어 비진정성으로 인한 작은우울함에 신음하기도 한다. 작품에서 보여지는 빈 공간, 채워져 있으나 비워진 형상… 이러한 것들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공허한 모습을반영하고 있다. 결국, 아무리 채우려 해도 채워지지 않는 존재감의 상실은 점점 더 공허함만을 가중시킬 뿐, 끊임없이 무언가를 채우지 않으면 도저히 버텨낼 수 없는 현실에서 그저 빈껍데기 안에 스스로를 숨긴 채 박제된 이미지로서 힘겹게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 강덕봉

김기석_Corner inside-trespass_130×162cm_2011

대도시가 기동 (機動) 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에너지의 흐름이 계획되는데, 나에게 도시인의 움직임은 그 곳으로 유입되는 그 흐름처럼 느껴진다. 이 때 개인은 온전한 개인의 모습으로 드러나지 않는데, 이러한 현대인의 모습은 나의 관심을 끌어왔다. 아마도, 과거 조직생활에서 형성된 나의 기억이 그와 닮아있으며, 이후로도 그 기억은 꿈과 같은 무의식 속에 침습해 있었기 때문인 듯하다. 그것은 거대 시스템의 부속으로서만 존재 가능한 나와 끊임없이 그것을 부정하는 나 사이의 아이러니이다. ● '구석' 시리즈는 그러한 체제 하의 개인성의 위축과 그 심화로 인해 변질하는 개인적인 어떤 것에 대한 작업으로서, 그 의미는 기호적 이미지와 상징적 표현을 통해전달된다. 예를 들어, 3개의 축은 다중적인 의미를 내포한다. 바슐라르의 구석진공간을 떠올리면, 내 작업의 공간은 아마도 사회화되지 않은 채, 도시 안에 비도시적 뉘앙스로 남겨진 개인성의 도피처일 것이다. 하지만 문명화, 사회화가 강화되면 그곳은 콘크리트가 빚어내는 도시 공간의 결정(結晶)이 될 수도 있다. 이 사이에서 유발하는 불안감, 우울함 등은 늘 나의 염두에서 조형 방식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해부학적 표현과 해체하려는 반해부학적 표현의 이율배반적 그리기는 그 예일 것이다. 간헐적인 시멘트 질감 위로 쌓인 상이한 농도의 물감, 선(線)적인 드로잉 조형이나 물감 던지기와 같은 조형 방식도 주제와 관련된 생각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단순화 되어있는 기하학적 도상과 캔버스 위의 복잡한 질감은 시각적으로 강한 대조를 이루면서도, 그것이 표방하는 내용을 환기한다. ■ 김기석

이지은_기억하기_E.V.A_90×210×13cm_2011

존재 - 기록하기 ● 존재한다는 것은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의 총괄이며 시간과 공간 안에서 성립된다. 기록한다는 것은 존재 했었음을 나타내는 유일한 방법이다. "사라짐은 또 다른 그리움으로…" 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라졌다. 사소하게 생각했던 것이 없음을 통해 소중한 존재감을 알린다. 어느 순간 변해있는 주번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 이미 지나가버린 수 없이 많은 시간들에 대한 아련한 기억을 떠올려 본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변하고 사라져 간다. 인간은 사라져가는 것들을 기록하고 보존하며 지나간 시간에 대한 역사를 기억하고 새로운 시대의 발상으로 이어간다. 수집이나 기록에 의해 보여지는 지나간 흔적들은 진열장에 놓여져 눈으로만 그 가치를 바라보고 보여짐으로 지나간 시간의 모든 것을 말하게 된다. 지금의 모습도 지나간 시간 속에 옛것과 같이 기록으로서 남겨지게 될 것이다.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를 시각적, 정신적 경험을 통해 사유하고 자연의 순리적인 시간 속에 머물며 공간에 의해 인식되고 기록되어 진다. 생명이 있거나 없거나 이 세상에 실존하는 모든 것은 변하고 사라진다. 사라짐은 눈에 보이지 않을 뿐 또 다른 에너지로 또 다른 그리움으로 남겨진다. 초가 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초는 연소되어 어디로 사라지는 것인가? 아니면 내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이 공기 중에 기체가 되어 떠돌고 있는 것인가? 손에 잡히지도 않고 눈에 보이지도 않고, 오감으로 느낄 수 없는 존재감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이러한 생각은 존재에 대한 집착인가? 이로부터 나의 작업은 사라지기 전 찰나의 시간을 붙잡으며 사진촬영을 통해 기록하기로 시작한다. 사진으로 기록된 작업에서 하나의 이미지를 흔적으로 정하며 흔적의 이미지 또한 제거하는 방식을 통해 부재의 네거티브 형태로 표현된다.결국 있음도 있음이 아니고 없음도 없음이 아닌 존재에 대한 표현이 나의 작업이다. ■ 이지은

장입규_Flughafen in Duesseldorf_사진, 종이_125×190cm_2012

이번 작업은 공간과 우리의 시지각 그리고 그 사이에서 생겨나는 인식의 차이에 대해 고민한다. 작업에서 나타나는 공간을 먼저 설명하면 그 공간은 수많은 장면들이 연결되어 나타나는 장면이다. 그 공간들은 낱장으로 보자면 실제공간이지만 그것들이 함께 연결되는 순간 더 이상 그러한 공간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 하지만 그 공간은 실재보다 더 실재일 수 있다. 그것은 실제공간의 어느 특정위치에서 사람이 보고 느낄 수 있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음으로 그 연결된 장면을 변형시켜 평면의 사진이 아닌 사진이라는 매체를 오브제로 사용, 사람의 시지각을 교란시키는 입체적인 작업이 된다. 정면에서는 그 본연의 장면을 볼 수 있지만 다른 곳에서는 분열되고 사라지고 왜곡되어 원래와 다른 장면들이 생성된다. 그것은 감상자가 작품을 보는 위치에 따라 마치 조각과 같이 수많은 새로운 장면이 생성된다. 왜곡된 시지각 현상을 우리는 환영 또는 환각(Illusion)이라 한다. 나는 이 환영을 통해 감상자에게 새로운 시각과 자세의 변화를 유도하고 그것을 통해 세상을 더 자유롭고 다양하게 접근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 수 있음을 희망한다. ■ 장입규

캐스퍼 강_DISILLUSIONMENT I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스크린 잉크_65×90cm_2012

캐스퍼 강(Casper Kang)의 작업물은 사람의 마음을 갖고 장난치지만, 이를 그저'장난기 많은' 것이라고 할 수만은 없다. 흔히 디지털 프린트 작업으로 쉽게 오해 받는 그의 그림들은, 실제로 그림의 질(quality)에 대한 그의 완강한 기준을 반영하는 아주 길고 힘든 과정을 통해 꼼꼼하게 탄생된다. 그는 의도적으로 아주 평면적인 미학(aesthetic)을 추구하며, 부인하기 어려울 정도로 영향력 있는 깊이감을 불어넣는 동시에 놀라운 효과를 만들어 낸다. (중략) 그의 시각적 영감은 대게 한국의 전통적인 민화 자료에서 비롯된다. 이런 이미지들에 대한 그의 관심은 순수하게 형식적이며, 이는 주관적이기보다 객관적이기 때문에 그 이미지들이 의미하거나 나타낼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철저한 비 애착(non-attachment)을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그것들을 가져와 선입견을 품지 않은 채 (가끔은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변형시키고, 강력하게 정의된 그의 개인적 미학(aesthetic) 환경에 새로운 목적을 제공한다. 그러므로 다른 시대의 문화적 맥락 안에 숨겨져 있는 이미지들은 본질적인 변화를 겪으며, 명백하게 동시대적인 그의 새로운 전 작품들(oeuvre)의 필수불가결한 요소들이 된다. ■ Andy St. Louis Part2

성민우_결혼_비단에 채색, 금분_162×97cm_2009

내게 처음 다가온 풀은 놀라운 번식력과 생명력을 지닌 생명체였다. 한여름 건기와 우기를지나며 한 주 사이에도 1-2m씩 자라나는 풀을 보면서 나의 생명력도 저와 같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졌다. 그 이후로 풀은 내게 은유가 되고 비유가 되어 나의 삶을 보듬었다. 나의 개인적 아픔을 기록으로 남길 때도, 내 삶과 일상적인 삶들에 대한 연민과 위로가 필요할 때도 늘소재가 되어 준 고마운 존재다. 이제 나는 풀이 다른 생명체들과 관계 맺고 살아가는 모습을보다 직접적이고 해석적으로 표현해내고자 한다. 그들 간의 갈등과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그들이 관계 맺고 살아가는 공생의 삶을 본받고 싶다. 풀은 단순히 일 년의 생을 살아가는 하찮은 존재가 아니다. 풀의 삶을 통해 인간의 삶을 살펴보고 나의 삶을 바라보며 어떠한 관계 속에 나를 위치시킬 것인지 꾸준히 고민해 나갈 것이다. 고작 일년의 시간도 살아가지 못하는 풀이라는 소재에 집착하는 이유는 아직도 내가 그들에게서 배워야 할 것이 많아서다. 풀에 대한 집착이 인간의 삶으로 이해되고 확장되기 위해 나는 좀 더 풀과 함께해야 할 것이다. ● 오래된 결혼사진을 바탕으로 작업된 결혼은 질경이와 달개비로 구성되어 있다. 질경이는 양지에서 잘자라는 풀이고 달개비는 음지에서 잘 자란다. 흔히 여성은 음으로 남성은 양으로이야기된다. 하지만 이 작업에서 여성은 질경이로 남성은 달개비로 표현하여 일종의 도치를 만들어 냈다. 붉은 선으로 그려진 풀 하나하나의 잎맥은 각기 다른 풀로 그려진 여성과 남성의 이미지를 엮어낸다. (중략) 양지에서 자라는 질경이는 음지에서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살아간다. 달개비는 햇빛을 받아들이기 위해 잎을 피우지만 양지보다는 음지의 서늘함을 더 닮았다. 너무나 다른 이 풀들의 교집합을 결혼이라는 형상으로 보여주고자 한 작업이다. ● 생존과 번식에 있어 솔직하고 아름다운 풀들의 욕망이 인간의 형상으로 대치되면서 또 다른 해석을 낳을 수 있다고 본다. ■ 성민우

성병희_비행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1×168cm_2012

창백하도록 하얀 얼굴은 삐에로의 두꺼운 화장과도 닮아있고, '하얗게 질린다'라는 표현에서의 하얀색과도, 창백하고 핏기가 없이 삶의 모든 의욕을 잃어버린 사람의 얼굴색과도 통해있다. 눈의 붉은 색은 울고 난후의 충혈된 눈이기도 하고, 핏발선 분노의 눈이기도, 호기심으로 집중해서 바라보는 눈이기도 하고, 오랫동안 자신의 얼굴위에 두꺼운 화장을 하고 있는 사람의 얼굴의 색과 대비되어 더욱 붉게 보이는, 절대 가려 질수 없는, 인간의 속 깊은 곳에 있는 살색이기도 하다. ● 손끝의 붉은 색은 상처(외부로의 내부로 부터의), 고통, 호기심등을 나타낸다. 우리는 손으로 무의식을 말을 많이 한다. 이 그림에서의 손짓은 수화처럼 보이지만 명확한 의미에서의 수화는 아니다. 손짓으로 눈이 다 할수 없는 이야기의 부연설명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 그렇다면 그 설명은... 각각의 보는 사람들이 해석해 보면 어떨까? 모든 그림은 거울 처럼 각각의 보고있는 사람을 비춘다. 그곳에 비춰지는 해석은 각각 다를 것이다. ■ 성병희

양인희_Mabi 17 마비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13.5×162cm_2012

무엇을 잡고 싶었던 것일까 움켜쥐고 있던 오른손에 의해 잠에서 깨어났다. 잠과 깨어 있음 사이의 몽롱한 상태는 그 사이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하면서도 순간 벗어나 있었다는 의식을 지니게 해준다. 찰나가 전부가 되고 전부가 찰나가 되는 … 사이 ■ 양인희

이세준_계속되는 의문_캔버스에 유채_90.9×116.8cm_2012

나의 작업은 내가 인식하고 있는 이 세계의 복잡성과 불가해성에서부터 출발한다. 작업을 처음 보았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특징은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는 자유롭고 화려한 색상의 팔레트인데, 이러한 명시성 높은 색들의 향연은 회화의 화면을 더욱 카오틱하게 만들어 줄 뿐 아니라 근대적인 원근법에서 조금 더 자유로워 질 수 있도록 도와준다. 물체들의 전후 관계를 보여주는데 용이한 선 원근법을 조작해서 앞과 뒤가 뒤섞인 풍경을 만들어 내기도 하고, 크기를 변화시켜 고의적으로 전후 관계에 혼동이 오도록 유도 한다. 이러한 것들은 회화의 구도를 더욱 복잡하고 다의적으로 만들어 주는 요소로서 작용하며, 그림 속 사물들이 서로 유기적인 모순관계를 이루도록 하기 위한 시도들이다. (중략) 「예술적 경험의 다양성」이라는 작품에서 나는 하나의 그림을 완성한 후 새로운 캔버스를 그 위나 아래 혹은 옆으로 붙여서 크기를 확장시켜가는 시도를 하였다. 이렇게 확장 되어 지는 작업은 유기체처럼 스스로를 증식해 나가며, 한 눈에는 들어오지 않는 크기까지 커지곤 한다.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 그림은 우리가 우리의 세상을 단편적으로 밖에 이해 할 수 없는 것처럼 태생적으로 불가해를 내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나의 작업은 전체의 개괄적인 이미지에서 시작해서, 찬찬히 뜯어보고 들여다 볼 때야 비로소 찾을 수 있는 아주 작은 붓 자국 속에 담긴 이미지에 이르기까지, 거시적인 것과 미시적인 것으로, 나아가 구상적인것에서부터 추상적인 것으로, 그리고 이미지 적인 것에서 물질적인 것으로 다양한 층위를 이루게 된다. ■ 이세준

현경_Hello! another me_캔버스, 일본종이에 아크릴채색_220×480cm_2011

인간의 욕구나 의지의 좌절 등은 마음속에 상처를 입히고 그로 인해 편집적,강박적인 감정을 낳게 된다. 복잡하게 엉키어버린 심리 상태는 고통,화,슬픔,원망 등 네거티브한 감정 등을 동반하며 보기 싫은 것, 추한 것들로 인식되어 온 이러한 감정들은 밖으로 끄집어 내지도 못한 채 안을 향해 억눌려 왔다. 나는 복잡 다양한 인간의 감정、특히 그 중에서도 살아가는 동안 직면하게 되는 불가해 한 일들, 부조리, 모순 등으로부터 발생하는 감정들이나,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문제들, 말하자면 인간의 불행에 관련된 감정에 관심을 갖고 있다. 표출 되어지지 못한 네거티브한 감정들, 안으로 안으로 억눌려버린 그음의 에네르기를 끄집어내어, 어떠한 형태로든 전향시키고,해소 시키고 ,정화시키는 프로세스에 관심을 두고 작업을 하고 있다. 그것은 어쩌면 모순을 넘어서 망연하게 만드는 대상일 수도 있고, 비합리적인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닐 수 도 있다. 그러나 절대적 가치관이 존재하지 않는, 무엇을 단서로 살아가야 할 지가 과제인 지금, 어쩌면 사회 그리고 인간이 계속 요구해왔던 문제일수도 있겠다. 예를 들면 우리조상들은 「굿」을 통해 현실을 직시하고 보다 나은 삶을 기원해왔다. 굿에서 보여지는 삶에 대한 집착, 죽음에 대한 공포,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욕구, 욕망, 이 모든 것들은 추한 것이 아니다. ●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이다. 단지 행복한 삶을 원하는 발버둥 인 것 이다. 무속신앙이 현대까지 남아오게 된 배경에는 인간의 기쁨, 슬픔, 원망, 사랑 같은 보편적 감정과 관련되어있다. 시대가 바뀌어도 민중의 입장에 서서 인간의 탄생과 죽음 빈부의 차 사회 부조리 등의 문제를 짊어진 사람들의 출구가 되어주고,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등을 밀어주고 있는 것이다. 현실을 직시 하고 받아들인 후에야 다음 스텝을 위한 한걸음을 뗄 수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행복한 삶을 기원하는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된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한 삶을 원한다 그 어느 누가 불행한 삶을 원하고 선택하겠는가. ● 이점이 내가 작품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것과 상통한다. 확실히 현실을 직시하고, 살아있다는 것을 재인식 시키는 것, 미래를 예감 시키는 것, 지금 자신에게 닥친 혼란이나 시련은 모든 것이 끝난 완전한 어둠이 아닌, 새로운 가능성을 품은 일시적 어둠, 재생을 위한 시간이라는 메세지를 계속해서 전달하여 포지티브한 힘을 끌어 내는 것이다. ■ 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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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nitting Wire

이원경展 / LEEWONKYOUNG / 李元京 / installation 2013_0104 ▶ 2013_0111

이원경_Knitting Wire_와이어_가변설치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10213g | 이원경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3_0104_금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화봉 갤러리 HWABONG GALLERY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7-28번지 백상빌딩 B1 Tel. +82.2.737.0057,1159 gallery.hwabong.com

몇 년 혹은 몇 십 년을 식물인간인체로 지내다 기적적으로 깨어난 사람들의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그들은 끊임없이 자신이 살아 있음을 마음속으로부터 외쳤다고 한다.

이원경_Knitting Wire_와이어_가변설치_2012

식물인간의 가족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수도 없이 환자에 대해서 포기할 것을 권유 받는다고 한다. 살아있는 상황에서 자기를 포기할 것을 권유받는 가족의 모습을 지켜보는 식물인간 당사자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저 움직이지 못하고 표현하지 못할 뿐인 그들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고 단정 짓는 어떤 판단에 대해 잠시 멈추어 보고 싶었다.

이원경_Knitting Wire_와이어_가변설치_2011
이원경_Knitting Wire_와이어_가변설치_2011

그것은 사람처럼 섬세한 감정이 없을 것이라 여기는 동물들에 대한 판단마저 다시 생각해 보도록 했으며, 움직임마저 보이지 않는 식물에 대해선 어떻게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인지…, 감정이 없다고 쉽게 단정 지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모든 판단의 유보로부터 식물에 대한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원경_Knitting Wire_와이어_가변설치_2011
이원경_Knitting Wire_와이어_가변설치_2011

철사로 뜨개질하듯이 변형된 형태로 엮어가며 마치 동물인 듯이 움직일 수 있고, 감정이 있는 살아있는 생명임을 표현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렇게 쉽게 단정 짓고, 알고자하는 노력이 인색했던 그들에게 다시 말을 건네 보고자 한다. ■ 이원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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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 고독 씹어 먹을 것.

이다흰展 / LEEDAHEEN / 李다흰 / drawing 2013_0107 ▶ 2013_0202 / 일,공휴일 휴관

이다흰_청춘이라는 지위의 모자를 쓰면_포장지에 콘테, 목탄, 색연필_71×60cm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이다흰 블로그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후원 / 서울시_(사)서울영상위원회

관람시간 / 11:00am~08:00pm / 일,공휴일 휴관

충무로영상센터 오!재미동 갤러리 미술동네 OHZEMIDONG GALLERY 서울 중구 충무로4가 125번지 충무로역사내 Tel. +82.2.777.0421 www.ohzemidong.co.kr

소녀 혹은 숙녀, 어쩌면 소년 아니면 어떤 청춘이 담장 아래로 떨어졌다. 그의 부모님은 그를 달래기 위해 비행기에 몸을 실은 후였지만 '그림자가 이끄는 중력의 힘이 너무 커져 버린 탓에.'라고 급히 외치며. 청춘이란 지위의 모자를 눌러쓰면, 너무 푹 눌러쓰면 시야를 가려버려. 사실 그는, 그녀는 그림자를 자신의 몸으로 눌러버렸지. 그림자의 중력보다 무거웠던 그 마음으로. 나는 떨어지는 그를 받아내었지만,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고 조용히 치를 떨며 바보라고 속삭였지. 그러나 곧 우리는 다시 만났다. 그늘에서라도 잠시 쉬어갈 수 없었던 그 어둠에 대한 너의 무게가 나의 목덜미 뒤에도 슬며시 내려와서 고개를 자꾸 떨구게 돼, 네 그림자와 난 마주 보고 있다. (2012.02.베를린에서)

이다흰_이방인 아닌 이방인으로_공책 낱장에 연필, 잉크_가변설치_2012

이 소외감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 이것은 나만 안고 있는 것일까. 에 관한 탐구로 시작되었다. ● 나에게 고독은 네 가지로 분리된다. 「1. 인간 존재 자체의 고독 2. 군중 속 고독 3. 사랑의 고독 4. 세대의 고독(청춘)」 나는 내가 가진 고독의 시를 읊는다. 글이 아닌 그림으로. 그리고 그중에서 4번째의 고독을 가장 많이 노래하고 있다.

이다흰_마중나오길 기다렸던 사람_포장지에 연필, 오일스틱, 콘테_88×65cm_2012

여럿과 함께, 사회로 달려나가야 할 생기 넘치는 청춘을 나는 고독을 벗 삼아 좀먹고 있었다. 모두가 함께할 때 나 또한 그곳에 속했지만, 혼자인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나는 언제나 마음 한편이 비어 있었고 그곳을 채울 공간과 시간과 인간을 알 수 없었다. 이러한 고백은 나의 친구와 동료들도 지니고 있었다. 그들도 나와 다르지 않았다. 물론 표현은 달랐지만, 그들도 그 마음 한편에 안달 나 하며 또 덤덤해하기도 했다. 나는 이것을 청춘의 찬란한 우울함이라 말했다. 이것에서 도망치려는 자들은 분주히 움직이고 그렇지 않은 자들은 잠시 멈추리라. 나는 후자이고 우리는 잠시 이 청춘의 찬란한 우울함을 즐길 필요가 있다. 함께이면서도 느낄 수밖에 없는 이 고독은 세대를 걸쳐 또다시 다가오겠지만 지금은 지금일 뿐이니까. 하지만 언젠가 반드시 채워지리란 보장은 없다. 나 역시 이 한편의 비밀을 알고 있지만 영원히 채워질수 없단 걸 잘 알고 있고, 나는 그 구멍을 그리는 것으로 대신하려한다. 아주 미약하고 아직 서툴지만, 그림은 내게 은유적 고백이고 위안이 된다.

이다흰_한적한 언덕_크래프트지에 혼합재료, 콜라주_104×124cm_2012

좀 더 솔직하게 고백을 해보자면, 나 혼자만의 위로를 위해 동지(?)들을 끌어 모으려는 의도도 없지 않아 있다. 하지만 얻어걸리기라도 하듯 누군가 이 고백을 알아준다면 참 기쁠 일이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이기적인 이 소통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내가 소통할 수 없다고 좌절하고 있을 때 그 은밀한 그 소통의 위대함을 느꼈다. 그러나 언젠가 무너져 내릴지 모른다. 더 폭넓은 소통을 해야 하겠지만, 그걸 알기에 지금의 나는 답답함과 불안함 속에 살고 있는 것 일 테지만 내가 그리고 있는 청춘이 이것이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의 고독함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어쩔 수 없는 건 정말 어쩔 수 없다. ● 아마 나와 같은 사람들이 속속 숨겨져 있으리라 믿는다. 그들을 찾아 서로 위안을 얻고 조심스레 변화를 꿈 꿔본다.

이다흰_서커스 준비_포장지에 연필, 오일, 콘테_60×59.5cm_2012

나의 작품은 모두 드로잉이다. 내가 지닌 무겁고도 두루뭉술한 감정들을 표현할 때 물리적으로 가벼운 재료들을 가지고 그려나가는 것은 매우 흥미로웠다. 매체에 대한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는 이 시점에서 나의 작품을 굳이 '드로잉'이라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표현에 있어서 가장 첫 번째의 정신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의 그 첫 번째 정신은 늘 불안함과 불완전함을 담고 있기에 드로잉의 소재나 느낌이 그 생각과 행위의 조화를 이루어내기에 가장 적합했다. 완전할 수도 있고 불완전할 수도 있으며 기계적일 수 없는 손길은 늘 미완성이어야만 하는 장면들을 만들어낸다. 어쩌면 완벽한 마지막 단계가 될 수도 있고, 미완성적으로 보이는 그림은 그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페인팅을 위한 단계로 보일지도 모른다. 나는 대개 그런 과정으로만 인정받아왔던 드로잉이 좀 더 독립적인 장르가 되길 바란다.

이다흰_때 아닌 깊은 바다_갱지에 파란색 볼펜, 혼합재료_가변설치_2012

물론 드로잉은 작가의 세계를 함축한다기보다는 연결짓는 쪽이다. 아무리 꽉 채워진 화면, 섬세한 표현으로 무장해도 작가의 세계를 깊이 있게 탐구할 수 있는 묘한 여백을 느끼게 한다. 일부러 남겨놓지 않아도 느껴지는 그 여백은 바라보는 사람이 채워 줄 것이며, 내가 가장 어려워하는 소통이란 걸 이룰 수 있는 열쇠가 된다. 나는 이토록 드로잉이라는 방식에 집착하고 있다. 미완성이 주는 상상과 불안함이 주는 잔상을 예찬하고 싶고, 많은 실험을 통해 그 느낌을 더 끌어올리고 싶다. ■ 이다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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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의 시대

진귀원展 / JINGUIONE / 陳貴元 / installation.sculpture   2013_0109 ▶ 2013_0115

진귀원_라코스테걸_합성수지, 우레탄도장_165×60×40cm_2009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갤러리 이즈 GALLERY IS 서울 종로구 관훈동 100-5번지(인사동길 52-1) 1층 제4전시장 Tel. +82.2.736.6669 www.galleryis.com

상업문화와 야만 ● 진귀원은 합성사진, 또는 만화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캐릭터들을 만들어 상품물신주의에 빠져 있는 한국사회를 풍자한다. F.R.P에 우레탄으로 도장된 인간상들은 총천연색의 환상이자 현실이다. 편재하는 현실 속에서 찾아진 환상은 3차원 상에 우뚝 서 있다. 그는 돈으로 모든 것이 귀결되는 신자유주의 사회를 '야만의 시대'(전시부제)로 간주한다. 하나의 가치로 환원이 일어나는 현대사회는 사실과 환상을 어느 때보다도 근접하게 한다. 유행하는 옷을 차려입은 청소년의 머리통이 에이리언이고, 여성 직장인 머리에 SM 하위문화의 성적코드가 이식되어 있는 모습이 그다지 충격적이지 않다. 학생은 미래의 직업을 위해 장기적인 투자를 해야 하는 대표적 집단이며, 직장인은 그 결과를 나타내지만, 양자는 그들이 수행해야만 하는 그 밋밋한 노동 형태로 인해 자극적인 소비문화를 필요로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노동과 여가에서의 동시적인, 현대사회에 만연한 이중의 소외이다. ● 어느 때보다도 그 간극이 벌어지고 있는 예술과 문화 사이에서, 인터넷과 함께 성장한 젊은 작가들은 재미와 흥행이 있는 양지쪽으로의 지향이 생겨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작품 아이디어를 짜내는 과정은 둘째치고라도, 추운 곳에서 홀로 흙을 주무르고 독한 화학물질과 함께 일일이 수공으로 작업해야 하는 생산의 과정과, 아늑한 장소에서 손가락으로 버튼이나 자판만 두들기면 되는 소비문화의 차이는 쉽게 극복되지 않는다. 단적으로 코드는 가볍고 빠르며, 작업은 무겁고 느리다. 작업, 특히 조각은 결국 묵직한 현실계에 속해있다. 여기에 작가들의 어려움이 있지만, 그만큼 현실과 유의미한 상호작용을 할 수 있는 기회 또 한 가질 수 있는 이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것도 미미한 상호작용이 아니라, 자기 주도적인 생산물을 통한 상호작용의 가능성에 예술의 진정한 야망이 있다. 진귀원이 대중문화의 코드를 적극 활용하면서도 현대 자본주의 문화에 대한 비판을 시도하는 부분은 예술이 해야 하는 긍정적 항목 중의 하나를 수행한다. 아방가르드 시대와 달리, 미술이 무엇을 할 수 있으랴 싶지만, 자본주의가 추동하는 물신적 체계의 가장 큰 희생자 중의 하나가 예술임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사회 비판은 현대미술의 자기비판의 과정에 포함되어야만 한다. 예술은 지배적 동질성에 대항하는 차이를 추구함과 동시에, 차이가 차별이 되지 않는 이상적 사회를 예견한다. 비판이 없으면 야만은 지속된다. 야만이 확대 재생산 될 수 있는 시스템 역시 역대 최강이다. 작가는 대중들이 가볍게 접할 수 있는 인터페이스에서 참조한 보편적 코드를 활용하여 지금여기의 삶을 지배하는 어두운 규칙을 폭로한다. ● 특히 그가 모든 것이 상품으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곤 하는, 나름대로 질서 바른 사회를 문명이 아닌 야만으로 파악하는 것은 생각해 볼만한 대목이다. 어떤 기준이든 그것이 유일한 것이 되었다면 억압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러한 일이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 이전 사회에서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서 각 사회가 하나의 현실원칙에 의한 지배를 받지 않았다. 서로 다른 영역이 공통의 문법으로 서로 엮이는 과정은 세계화, 보다 정확히는 세계 시장화의 예에서 보듯이, 보다 많은 다수의 패배자를 낳을 수밖에 없다. 전시장은 진귀원이 조각을 통해 그리는 야만의 시대의 풍경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대중에게 혐오감을 줘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준수해야 하는 공공미술과를 전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에게 공공성은 무난한 장식품이 아니라, 바람직한 공공적 삶과 대치되는, 극복해야할 요소에 맞춰져 있다.

진귀원_어반 아나콘다_합성수지, 우레탄도장_70×250×60cm_2009
진귀원_트랩트_합성수지, 우레탄도장_130×150×50cm_2011

인간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 특히 언어라는 상징적 구조는 '나는...'으로 시작하는 그 주체를 만든다. 지배 질서의 원리가 내재되어 있는 상징적 구조는 개인의 욕망 또한 만든다. 기호, 특히 상품기호들의 우주로 이루어진 자본주의 사회에서 눈은 계속 타올라야 할 욕망의 대상을 수집하는 대표적 감각기관이다. 보는 인간은 보여 짐 또한 인식하는데, 진귀원의 작품은 이러한 시선(eye)과 응시(gaze)의 역학 관계 속에서, 상품의 기호가 결정적임을 보여준다. 상표는 사회적 인간이 상대편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코드가 된다. 보고 말하는 인간은 무엇보다도 욕망하는 인간이다. 작품 속 주인공들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휘감는 유명 상표들은 욕망하는 인간이 만나는 실재가 상품 세계로 한정되어 있음을 알려준다. 욕망은 다양한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고 뻗어나가야만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것은 상품의 생산과 소비라는 유일한 회로로 빨려 들어간다. 사회는 욕망의 회로와 상품의 유통구조를 일치시키려 한다. ● 체계는 규정될 수 없는 욕망을 코드화 시켜 값을 매기고 유통시킨다. 코드는 등질적인 것이지만, 그것이 유도하는 결과는 철저한 불평등이다. 자연, 몸, 무의식 등 값을 매길 수 없는 것까지 값을 매갤 수 있게 되면, 모든 것은 값을 중심으로 서열화 되기 때문이다. 가격 매기기는 마치 수학공식처럼 중성적인 행위인 것 같지만, 그것은 결국 서열화를 낳기 때문에 보다 높은 서열을 차지하기 위한 끝없는 경쟁이 생겨난다. 현대의 야만은 이러한 맹목적인 경쟁으로부터 발생한다. 이 전시에서 문명화 과정은 야만을 새로운 방식으로 배치시킨다. 현대의 야만은 더 많은 약자를 만들어내는 억압적 체계에 의해 생산된다. 야만은 주먹이나 총칼이 아니라 법과 시장을 통해, 그것이 파생시키는 이데올로기와 허위의식, 도그마와 상식 등을 통해 행해진다. 야만은 퇴행을 의미하지만, 사실 투명한 이해관계에 근거할 법한 법규들의 등장은 역사의 진보에 의해 나타났다. ● 앨버트 허쉬먼은 『열정과 이해관계』에서 '열정이 인간을 사악해지도록 부추키지만, 이해관계에 얽매어 그럴 수 없는 상황에 놓인다'는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의 문구를 인용하면서, 고전적 자본주의에 의해 부각된 이해관계와 사라져가는 열정을 대비한다. 허쉬먼은 인간의 이해관계를 열정에 대립시키고, 인간이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할 때 야기되는 긍정적인 효과와 열정에 휘말리게 될 때 생기는 재난의 상태를 대비한다. 고전적 자본주의 시대에 학자들은 인간 행위에 공통적인 이해관계가 지배하는 세상이 비인간적이고 냉정하다고 생각지 않았다. 이해관계는 이성만큼이나 투명하고 긍정적으로 평가되었다. [열정과 이해관계]에 의하면 자본주의는 인간의 충동과 어떤 성향들을 억누르고, 좀 더 단순하고 예측 가능한 일차원적인 인간성을 만들어 내리라고 기대하였다. 오늘날에는 이상하게 들리는 이런 입장은 특정한 역사적 시기에 상존하던 분명한 위험을 걱정하고, 인간 열정의 파괴적인 힘을 걱정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진귀원_루저_합성수지, 우레탄도장_190×50×50cm_2012

이전의 모든 사악하고 파괴적인 악덕들은 합리적 이해관계가 아닌 비합리적 열정에 의한 것이었다. 일시적인 열정이나 충동에 휩쓸리지 않는 '합리적인 의지'나 '합리적인 이기심'이 고전적 자본주의 시대에는 도덕적 덕목으로 꼽혔다. 그것은 이해관계가 공사의 영역에 있어 인간사를 처리하는데 보다 이성적인 방법이라는 긍정적인 생각이다. 이해관계가 인간행위의 지배적 동기라는 생각은 가능한 사회질서를 위한 현실적 기초가 마침내 발견되었다는 지적 흥분을 야기 했다. 가장 일반적인 특성이 예측성이다. 반면 대부분의 열정적 행위는 변덕스럽다는 점이 강조된다. 불확실성, 특히 인간의 가변성은 없애야 할 주요 난관이 되었다. 인간은 이해관계에 충실할 때 확고부동하고 질서정연해지며 이는 열정에 휘말렸을 때와 정반대이다. 열정은 광폭하고 위험하지만, 물질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단순하고 무해하다는 것이다. 상인이 부를 축적하는 것은 귀족계급의 열정적 유희와 방종, 또는 군대나 해적의 야만적 약탈보다는 부드럽고 평화로워 보인다. ● 그래서 당시의 지도적 철학자들은 자본주의가 인간 본성의 파괴적이고 불길한 요소를 억누를 수 있다고 기대했다. 그러나 상업은 곧 또 다른 전쟁, 그것도 항시적인 전쟁이 되었다.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인간이 무해하다는 생각은 자본주의의 현실이 완전히 드러난 이후에야 사라지게 되었다. 진귀원의 작품에서 파국적 상황 속의 다국적 기업의 로고는, 보편적으로 편재하는 이해관계가 왜곡된 방식으로 파괴적 본능을 다시금 불러냄을 알려준다. 맹목적 욕망에 휘둘리는 인간만큼이나 계산하는 기계는 인간이라 할 수 없다. 협소하게 이해된 이해관계는 다시금 인간적 열정을 관철하는데 숙고해야할 이성적 요소가 되어야 할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살아가며 작업하는 이들 또한 열정과 이해관계 간의 적절한 조화가 필요하다. 진귀원은 그가 풍자극의 무대 위에 불러낸 캐릭터들에 모두 자신의 이빨을 이식시켰는데, 그것은 비판이 스스로에게도 겨누어짐을 암시한다. ■ 이선영

진귀원_인터뷰_합성수지, 우레탄도장_각 120×50×40cm_2010

작년 하루 평균 자살자 43.6명. OECD국가 중 자살률 9년째 1위, 10대 사망원인 1위 자살, 20대의 사망자 절반, 30대의 사망자 40%가 자살로 목숨을 끊는 나라, 대한민국. ● 본인의 작업은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이 처해있는 환경과 삶에 관한 이야기이다. 현재의 대한민국은 신자유주의의 살인적인 경쟁 앞에서 소수의 독식 승자와 다수의 패자로 이분되어 심화되는 빈부격차와 실업난 속에서 도태되어지는 비정하고 불안한 사회가 되었다. 인간 본질을 넘어선 비틀린 구조. 시스템 속에서 고통받는 인간에 대한 고찰이다. 신자유주의는 자주 '정글'에 비유된다. 약하면 잡아먹히고 강한자만이 살아남는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법칙만이 삶의 원칙이다. 그렇게 살아남은 승자가 모든 것을 차지하고 패자는 모든 것을 잃는다. ● 본래 신자유주의는 자유경쟁시장이라는 경제 원리이다. 하지만 신자유주의는 비단 경제뿐만 아니라 그것으로 고유해야 할 다른 모든 가치들을 경제적 질서에 편입시킨다. 물론 한국사회 또한 예외는 아니다. 인간은 수치화 되고 계산 가능해졌다. 연봉, 자산규모는 그 사람의 가치를 표현하는 지수로 평가받는다. 교육은 이미 상품화 되었고 더 나은 학벌과 그래서 더 나은 부의 확보에 이바지 하는 것이 교육의 역할이 되었다.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기를 경쟁과 서열, 개인화를 통해 연대라는 느낌조차 가져보지 못한 채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벌여야한다. 12년을 학교에서 아등바등 보내고 대학에 진학하지만 경쟁은 줄어들지 않는다. 높아진 사회의 요구 탓에 쌓아야할 스팩은 많고 다시 토익공부, 고시공부, 학점관리에 메달리지만 등록금은 비싸고 시간이 부족하니 그들의 마음속에는 엄청난 불안과 회의, 취직 실패에 대한 두려움에 고통받는다. 대학을 졸업해도 소위 '괜찮은' 직장을 구하지 못한 대다수의 젊은 세대들을 기다리는 것은 비정규직, 다단계 판매, 청년실업이라는 우울한 단어들 뿐이다.

진귀원_긴급체포_합성수지, 우레탄도장_80×120×45cm_2012
진귀원_맹목적 의지_합성수지, 우레탄도장_각 40×16×8cm_2012

현대사회의 불안과 공포 ● 불안과 공포는 한 짝이다. 그것들은 하나만 오지 않고 언제나 한 쌍으로 온다. 불안이 만성화된 공포라면, 둘은 하나의 본질에 속하는 두 가지의 감정이다. 그렇다면 가장 무서울 때는 언제일까? 불안이건 공포건 간에 그 정체가 '불분명'하고, 그 위치가 '불확정'이고, 그 형태가 '불확실'할 때다. 분명히 있지만, 그 정체가 무엇인지, 어디에 있는지, 어떤 형태로 있는지, 알 수 없을 때 불안과 공포는 증폭된다. 왜? 그것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고, 그 대처할 수 없음은 직접적으로 생존을 위험에 빠뜨리기 때문이다. 모든 공포 영화의 공식은 이 원리를 충실하게 따른다. "공포가 가장 무서울 때는 그것이 불분명할 때, 위치가 불확정할 때, 형태가 불확실할 때, 포착이 불가능할 때, 이리저리 유동하며, 종적도 원인도 불가해할 때다. 어떤 규칙성도 합리적 이유도 없는 공포, 그 낌새가 여기저기서 선뜻선뜻 나타나지만, 결코 통째로 드러나지는 않는 공포야말로 가장 무시무시하다. '공포'란 곧 불확실하다는 것이다. 위협의 정체를 모른다는 것, 그래서 그것에 대처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에 달려들어 맞서 싸우려 해도, 싸워볼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지그문트 바우만) ● 아마존 깊숙한 정글속의 부족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취재해 화재가 되었던 다큐멘터리를 본 적 있다. 문명의 척도가 행복이라면 그들은 가장 문명적인 부족일 것이다. 그들은 자연에 순응하고 어린아이와 약자를 먼저 보살피며 평화로운 방식으로 갈등을 해결하고 있었다. 아마존 정글의 야만적인 원주민들과 달리 문명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던 우리가 실제로는 강자의 약자 착취와 무한경쟁의 고통에 시달리며 차가운 콘크리트 정글위에서 쫓고 쫓겨다니는 진정한 야만의 삶에 내던져져 있는 것은 아닐까? ■ 진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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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ity of No Limits

김지혜展 / KIMJIHEA / 金智惠 / photography   2013_0109 ▶ 2013_0115

김지혜_City Space L05_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_60×80cm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10627a | 김지혜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0109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30am~06:00pm / 화요일_10:30am~12:00pm

갤러리 라메르 GALLERY LAMER 서울 종로구 인사동 194번지 홍익빌딩 1층 Tel. +82.2.730.5454 www.gallerylamer.com

도시생태학, 도시를 스캔하는 이미지 헌터 ● 사진은 가히 이미지의 제왕이랄 만하다. 이미지를 생산하고 소비하고 유통하고 유포하는 것으로 치자면 사진만한 매체는 없다. 미술의 꽃이랄 수 있는 회화의 자리를 밀어냈다고나 할까. 더욱이 회화는 미술에 한정되지만, 사진의 가두리는 따로 없다. 이처럼 사진은 일상과 이상의 경계 모두를 아우르는 탓에 일상 속에 더 깊고 넓게 파고들 수가 있었다. 그리고 디지털 이후에는 이상의 영역과 범주마저 넘나든다. 현실적인 것은 물론이거니와 상상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즉각 이미지로 구현시켜준다. 사진은 원래 현실의 반영이었고, 현실적인 것의 증거며 증명이었다. 다큐멘터리와 르포르타주 그리고 스트레이트포토가 그랬다. 유태인 학살 현장을 찍은 한 장의 사진이 내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는 수전 손택의 회고에 등장하는 사진이 그렇다. ● 이처럼 사진이 진실을 증언하기 위해서 호명되어졌다면, 디지털 이후 사진은 진실보다는 거짓을 증언하기 위해서 더 많이 더 자주 호출된다. 각각 리얼리티를 증명하는 사진과 상상력을 구가하는 사진, 현실을 반영하는 사진과 가상현실을 열어 놓는 사진이 사진의 두 축을 견인하면서 사진의 표현 영역을 확장시키고 있는 것. 덩달아 처음에 현실과 가상현실은 분리되어졌지만, 점차 그 구분이며 경계가 흐릿해진다. 그리고 마침내 가상현실이 현실의 일정 부분을 대체하기에 이른다. 픽처레스크 곧 그림 같은 풍경이라는 세속적인 표현에서 이런 현실과 가상현실의 전복현상이 예시된다. 풍경(현실)이 그림(가상현실)의 기준이 되는 대신, 그림(가상현실)이 풍경(현실)의 잣대가 되고 있는 것. 가상현실이 현실의 근거가 되고, 그 자체 또 다른 현실이 된 것이다. 그렇게 가상현실은 현실의 의식을 넘어 무의식을 파고든다.

김지혜_City Space L06_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_60×80cm_2012

여기에 판화가 가세된다. 각종 사진제판법의 이름으로 수행되는 판화를 사진과 구별하게 해주는 근거는 그저 장르상의 명분에 지나지가 않는다. 어떤 판화는 사진으로 볼 수가 있고, 어떤 사진은 판화로 볼 수가 있다. 이렇게 사진은 현실과 가상현실의 경계를 넘나들고, 장르의 벽을 넘는다. 김지혜는 판화를 전공했지만, 진즉에 판화와 사진과의 친족성에 주목했고 흥미를 느꼈었다. 그런 탓에 사진과 판화 모두를 아우르는 독특한 형식의 지점에 이를 수가 있었고, 현실과 가상현실이 혼성된 남다른 비전을 열어 보일 수가 있었다. ● 김지혜는 카메라를 들고 도시를 배회한다. 흡사 느와르 영화장면 같은 스산한 도심을 파고들어 적당한 사냥감을 찾아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적당한 사냥감이라고는 했지만, 엄밀하게는 익명의 사냥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익명은 도시의 파사드고 페르소나며 아키타입이다. 익명을 찾아 헤매는, 건(gun) 대신 카메라를 들고 도시를 스캔하는 이미지 헌터라고나 할까.

김지혜_City Space L12_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_30×90cm_2012

그렇게 도시의 이곳저곳이 카메라에 붙잡힌다. 그리고 컴퓨터 작업을 하는데, 도시에 대한 작가의 인상이며 해석이 이때 만들어진다. 만들어진다? 사진은 찍는 사진과 만드는 사진으로 나뉜다. 편의상 사진의 물길은 찍는 사진에서 만드는 사진 쪽으로 흘러왔다고 볼 수가 있겠다. 작가의 사진에는 찍는 사진과 만드는 사진이 모두 들어있다. 이미지를 채집하기 위해 찍는 사진이 입력단계에 해당한다면, 그렇게 찍은 사진을 컴퓨터를 통해 만들고 조작하는 과정이 출력단계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사진을 만들고 조작하는가. 만드는 사진은 사진을 만들 뿐만 아니라, 도시에 대한 인상과 해석도 결정짓는다. 사진을 조작하는 이유가 도시에 대한 인상과 해석을 재현하기 위한 것이라는 말이다. ● 그러므로 작가에 의해 재현된 도시는 객관적 현실의 재현이기보다는 주관적 해석을 통한 재현이다. 그럼에도 도시에 대한 인상이며 경험이 대동소이한 연유로 인해 재차 객관적 현실성을 얻는다. 바로 중첩된 도시, 흐르는 도시, 부유하는 도시다. 중첩된 도시는 저마다 다른 이해관계가 포개져 있음을 표상한다. 그리고 도시는 흐르고 부유한다. 도시가 흐르고 부유하는 것은 뿌리 없는 사람들을 표상한다. 이처럼 뿌리 없는 사람들이 밀물처럼 들어왔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그리고 그 물길과 물길 사이로 노이즈가 끼어든다. 저마다 다른 속내며 이해관계가 잡음을 일으키면서 도시의 소리를 생성시킨다. 그 소리를 시각언어로 옮겨보면 사람들은 저마다 보고 싶은 것을 보고, 저마다의 관점에 따라서 본다. 같은 것을 보면서 다른 것을 본다. 저마다 보고 싶은 것을 보므로 지엽적으로 보고, 저마다 보고 싶은 대로 보므로 왜곡된 형태로 본다.

김지혜_City Space S13_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_15×100cm_2012

이처럼 저마다의 이해관계가 밀어올린 지엽적인 시각과 왜곡된 형태야말로 도시인의 공통경험일 것이라고 작가는 진단한다. 바로 도시에 대한 작가의 인상이며 해석이다. 이렇게 마치 초점이 나간 것처럼 흐릿한 사진, 피사체의 주변이 겹쳐 보이거나 흔들려 보이는 사진, 예각이 긴장감과 불안감을 불러일으키는 사진이 도시의 표상으로서 제안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콜라주나 먹선 드로잉이 부가되지만, 대개 도시의 인상이며 성격은 사진 자체에서 이미 상당할 정도로 결정된다. 그리고 이렇게 결정된 도시의 인상이나 성격은 설치형식을 통해 현실성이 강화된다. 마치 소리 없는 노이즈를 듣는 것 같은, 보이지 않는 이해관계의 네트워크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생생한 현장감을 주는 것이다. ● 이처럼 김지혜는 진즉에 도시에 주목했고, 도시의 생리를 작업으로 옮겨놓는 일에 관심을 기울여 왔다. 그리고 도시의 생리를 작업으로 옮기는 일에 사진과 컴퓨터가 중요한 수단이며 방법을 제공하고 있다. 꼭 그렇다고 단언할 수는 없겠지만, 사진과 컴퓨터라는 매체나 매체적인 특수성은 도시의 생리에 부합해 보인다. 일종의 도시생태학이 주제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인데, 주제와 표현 방식 모두가 무리가 없어 보이고 조화를 얻고 있다는 생각이다. 속된 표현을 빌리자면 주제와 방법의 궁합이 맞아 떨어진다고나 할까. 이를테면 이미지와 이미지가 서로 반영하고 중첩되는 것을 통해 복잡하게 얽힌 이해관계의 네트워크를 표현하고 전달하는 식이다. 가장자리가 겹쳐 보이고 흔들려 보이는 이미지를 통해 저마다의 관점과 관점이 부닥치고 충돌하는 노이즈(차이가 만들어내는 잡음)를 표상하는 식이다.

김지혜_City Space S15_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_90×120cm_2012

이렇듯 작가는 진즉에 사진과 컴퓨터라는 매체에 매료됐고 익숙했다. 그렇게 컴퓨터를 만지고 놀다가(?) 재미난 사실을 발견했다. 우연성이 개입해 최초 입력한 이미지를 왜곡하고, 예기치 못한 이미지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렇게 근작에 이른다. 원래 판화와 사진이 결부된 방식의 작업을 하다가, 마침내 본격적인 사진을, 만드는 사진을, 디지털 사진작업을 선보이기에 이른 것이다. 그 과정을 보면, 컴퓨터상에서 최초 입력된 정보를 왜곡하고 변형하는 것인데, 실제 풍경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와 공간 일부를 컴퓨터 프로그램을 통해 마우스로 밀어낸다. 판화와의 연관을 생각한다면, 마우스는 일종의 전자 스퀴지 내지는 디지털 스퀴지에 비유될 수가 있겠다. 그리고 회화와 관련해 보자면, 마우스가 그림을 그리는 붓을 대신한 것이란 점에서 마우스 페인팅과 비교되는 일종의 마우스 포토로 명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알다시피 컴퓨터상의 이미지는 픽셀로 이뤄져 있다. 작가는 이 툴(컴퓨터 프로그램과 마우스가 연동된)을 이용해 픽셀을 유동화 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적어도 논리적으로 볼 때 컴퓨터상의 이미지를 의도한 대로 왜곡하고 변형하고 견인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예기치 못한 우연성이 개입되는 것인데, 전작에서의 콜라주나 먹선 드로잉이 그랬던 것과도 같은 우연적인 요소와의 놀이를 즐기는 것이다. 한편으로 이처럼 우연성의 놀이라고해서 자칫 작가의 작업을 가볍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우연성은 말 그대로 예상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탓에 수많은 실패를 거듭해야 하고, 그렇게 축적된 실패가 뒷받침된 어떤 감각적 지점이 가늠된다. 작가는 그렇게 가늠된 감각적 지점을 실마리 삼아 원하는 이미지를 찾아가고 찾아내는 것이다. 실로 우연성의 바다와 감각의 바다를 헤집는 일에 비유될 수가 있겠다.

김지혜_City Space S16_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_100×150cm_2012

그렇게 마우스가 지나가면서 만들어낸 이미지며, 최종적으로 출력된 이미지는 어떤가. 마치 사물 고유의 색상을 긴 색 띠로 분해해놓은 것도 같고, 시공간을 길게 늘여놓은 것도 같고, 감각적 현실이 졸지에 추상적인 현실로 변모되고 변질된 것도 같다. 길게 늘여진 시공간이 현실감각을 흔들어놓으면서 아찔한 현기증을 불러일으킨다고 한다면 좀 과장적인가(아마도 사진이 지금보다 더 커진다면 좀 더 실감날 것이다). 상대성의 원리에서처럼 시공간이 좌표를 잃고 임의적으로 늘어나고 줄어드는 현실(아님 비현실?)을 예시해주고 있다면 좀 비약적인가. 여하튼 분명한 것은 알만한 현실이 졸지에 낯설어 보인다는 점이다. 아방가르드의 낯설게 하기를 떠올려주는 대목이다. 현실은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고, 보이는 대로도 아니다. 익숙하면서 낯설다. 도시를 소재로 한 것이란 점에서 익숙하고, 왜곡되고 변형된 이미지란 점에서 낯설다. 바로 도시의 두 얼굴을 표현한 것이며, 도시의 양가성을 표상한 것이다. 도시는 친숙하면서 낯설다. 안 봐도 비디오인 친숙한 이미지들로 축조된 것이지만, 그러나 그렇게 알만한 이미지들은 그 이면에 생경하고 낯 설은 이미지를 숨겨 놓고 있다. 캐니와 캐니의 그림자에 해당하는 언캐니를 숨겨놓고 있는 것이다. ● 도시의 이미지를 스트라이프로 분해해놓고 있는 작가의 디지털포토는 이렇듯 도시의 양가성을 표상한다. 그 표상형식은 꽤나 세련되고 감각적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도시적인 감수성이 느껴진다. ■ 고충환

 

 

 

 

eyes 시선

최경운展 / CHOIKYUNGWOON / 崔輕云 / painting 2013_0112 ▶ 2013_0120

최경운_시선_캔버스에 유채_38×97cm_2011

초대일시 / 2013_0112_토요일_04: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주말,공휴일_10:00am~05:00pm

한전아트센터 갤러리 KEPCO ARTCENTER GALLERY 서울 서초구 쑥고개길 34 제 1전시실 Tel. +82.2.2105.8190~2 www.kepco.co.kr/gallery

목격자(目擊者) ● '재의 계곡 (a valley of ashes)' 이라고 불려 지며 언제나 먼지 바람이 부는 황량한 황무지, 그 잿빛의 땅 위를 닥터 티 제이 에클버그(Doctor T. J. Eckleburg)의 두 눈이 내려다보고 있다,는 문장은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라는 소설 안에 등장하는 장소에 대한 설명이다. 뉴욕시의 어느 안과의사가 설치한 후 다른 곳으로 떠나버리고, 그대로 방치하는 바람에 지금은 색깔이 바래져 있는 거대한 두 개의 눈동자가 그려진 간판, 그 거대한 눈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삶을 조용하게 바라보고 있다. ● 우리의 삶을 바라보는 그 누군가의 시선, 우리는 스스로 그 시선이 되기도 하고, 그 시선 앞에 놓여지게도 된다. 이미 존재하고 있는 수많은 시선들, 그 수많은 시선들에 인위적으로 더해진 눈동자의 이미지, 이미지의 시선. 작가 최경운은 또 하나의 시선을 작품 안에 들여놓음으로써 우리에게 또 하나의 시선을 더하고 있다.

최경운_untitled_캔버스에 유채_41×31.8cm×2_2012

그 앞에 서있는 우리는 이 화면의 시선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혹은 그 화면이, 그 앞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우리들을 또 어떻게 바라보게 될 것인가를 상상해보는 것은, 이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시각' 앞에서 느껴보는 묘한 경험이기도 하다. 작가는 외부의 모습을 향해, 자신의 내면의 시선이 바라보는 것을 화면으로 그려낸다. 최경운의 작품들의 경우에는 그가 바라보는 대상이 바로 그 시선 자체가 되어버린 듯하고, 작가로 하여금 우리는 작가 자신에게서처럼, 선택의 여지없이 그 시선 앞에 놓이어지는 상황에 있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캔버스 위에 더해진 이 얇은 물감의 층을 하나의 시선으로 보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이미지라는 것을 재생산 해내는 것과 그 과정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상기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인칭이 없는 이 사물에 더해진 지각의 가능성, 인간과 사물 사이에 놓여진 끊임없는 감각하기의 연장(延長)들 속에서 몸과 신체가 지니는 감각을 넘어선 지각과 사유의 세계를 밝혀내던 철학들이 말해온 지각의 세계, 그것이 바라보게 만드는 지각의 세계들 속에는 분명, 이 인칭 없는 시선들 너머에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들이 존재할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몸과 감각들이 어루만져야 할 무엇인가가 이 화면 속에 존재하고 있음에 다름 아니다. ● 서로의 앞을 지나는 수많은 타인들, 그 모든 시선들, 그 앞에 드러나는 고상함과 우아함, 대상 없는 비판과 판단들, 우리의 체험된 몸이 바라보는 체온 없는 시선들과 그 앞에 드러나는 불안과 긴장감. 우리의 시선이 목격하는 타인의 삶의 장면들. 그렇게 우리는 누구나 서로에게 있어 '재의 계곡'을 넘나드는 이방인들이다. 그리고 저 멀리에 커다란 시선이 조용히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최경운_untitled_캔버스에 유채_97×145.5cm_2012

최경운 작가는 오랜 시간 중국에서 작업을 하면서 지내왔다. 닮은 얼굴의 이방인, 비슷한 말들을 만들어 내는 이방인을 바라보는 또 다른 사람들의 시선, 그리고 어쩌면 낯선 모국의 시선들. 작가에게 있어 타국에서의 생활과 귀국으로 이어지는 시간이 지금의 작업을 만들어 내게 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외롭고 아프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들에게 그 안의 인물들과의 소통과 위로를 바란다고 했다. 작품 속의 인물들이 외롭고 아프게 느껴지는 것은 저 인물들의 표정과 분위기가 아니라, 나를 떠난 나의 시선의 돌아오지 않음에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에게 자신을 하나의 이방인으로 돌려보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나에게서 멀어져 나와, 낯선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어쩌면 힘겨운 일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거울조차 낯설지 않은 나와 나의 공존 속에서, 한번쯤 자신의 삶을 조금 더 먼 곳으로 두어보아야 할는지도 모르겠다. ● 나의 시선에서 내가 떠나고 있다. 그리고 어느 언덕을 넘어 내가 사라진다. 어느 거리를 지나, 그곳의 바람을 지나, 언젠가 그가 멀리에서 다시 가까이 돌아왔을 때, 비로소 우리는 먼 길에서 돌아온 그를 아우르며 어루만지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우리가 그들 바라보았을 때, 그는 비로소 우리에게 돌아오고 있는 길 위에 서 있게 되는 것이다. ■ 김종렬

최경운_untitled_캔버스에 유채_130.3×193.9cm_2012

중국에서 7년간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돌아왔다. 나는 평소 중국에서 늘 하던 대로 슬리퍼와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 다녔는데, 어느 날 집 근처 산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서려는 순간 엄마가 물었다. "그렇게 입고 어디 갈려고?" "동네 산에 가는데." 동네의 야트막한 산이지만 사람들은 히말라야 산맥을 정복할 것 같은 차림새였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불편한 시선을 느꼈고, 엄마조차 나를 창피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 작은 사건으로부터 나의 의문은 시작되었다. ● '사람들은 왜 타인의 시선에 신경을 쓰는 걸까?'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왜 불편한 시선을 보내는 거지?'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는 것일까?' '이런 시선이 불필요한 관계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을까?'

최경운_untitled_캔버스에 유채_130.3×162.2cm_2012

타인의 시선이 불러오는 초조한 마음과 불안감... 그리고 그로인한 외로움, 이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로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인간은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로울 수 없고, 나 또한 그렇다.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가 깨닫는 과정보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여 지는가를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고, 이것은 어느새 남에게 보여지는 삶을 암묵적으로 강요당하는 분위기로 가고 있다. ● 이번 전시의 작품들은 이러한 생각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전시장에서 관객들이 작품을 통해 '시선'을 느낄 수 있도록 의도했고, 이를 통해 나의 생각을 관객과 공유하고 싶었다. 정면으로 응시하되 비뚤어지고 왜곡된 눈동자를 통해 관객으로 하여금 타인의 시선을 느끼게 하고 싶었으며, '그런 시선들 속에서 우리들은 정작 소외되고 외롭지 않는가?' 라는 질문도 던져보고 싶었다. 지금까지 나의 작품의 주제는 실제로 내 자신이 그러하듯이, 현대사회에서 흡수, 융화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나와 같은 부류의 인간에게 호기심을 갖게 되었고, 그것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어졌다. 나의 작품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어둡고, 외롭고, 아프다. 현대사회의 거대한 틀 속에서 외롭게 부유하고 있는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나의 작품 속 인물들에 동감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이번 전시를 통해 관객과 함께 '당신도 외롭고 힘들구나.' 라는 짧은 위로의 건네고 싶고, 또 듣고 싶다. ■ 최경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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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Modern Shamanistic City Maps

듀크 최展 / Duke's Choi / drawing 2013_0112 ▶ 2013_0124

듀크 최_Planetary Energy_한지에 잉크_70×136cm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듀크 최 페이스북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3_0118_금요일_05:00pm

Opening reception 30~60분마다 알루미늄 악기로 연주되는 실험적인 사운드와 2012년 몽골과 한국에서 작업하며 영감을 받았던 카르그라 라고 하는 독특한 창법과 노래가 공연됩니다.

관람시간 / 02:00pm~06:00pm

갤러리 두들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2가 14-59번지 2층(문래우체국 옆) Tel. +82.10.4940.3035 cafe.naver.com/gallerydoodle

듀크의 작품은 인간의 정신적인 무엇(souls) 그리고 존재하는 사물의 각기 다른 개성을 나타냅니다. 작가는 실제의 물리적인 형태를 그리지 않고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불가분의 에너지를 보여주려 합니다.

듀크 최_Growth 1_한지에 잉크_70×136cm_2012
듀크 최_Growth 2_한지에 잉크_70×136cm_2012
듀크 최_Growth 3_한지에 잉크_70×136cm_2012
듀크 최_The Eagle_한지에 잉크_70×136cm_2012
듀크 최_Third Eye_한지에 잉크_70×136cm_2012
듀크 최_Totems_한지에 잉크_70×170cm_2012

어떤 에너지는 무리를 이루는 다른 에너지보다 좀 더 크기도 합니다. 작품 속에서 사물은 이 현대의 도시속(인간및 그외의 것들)에 있는 에너지로 표현 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에너지가 매일의 우리의 삶 속에서 존재하고 지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 갤러리 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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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 公園

곽한울展 / GWAKHANOUL / 郭한울 / painting 2013_0112 ▶ 2013_0312 / 일요일 휴관

곽한울_yard_종이에 혼합재료_60×80cm_2012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5:00pm / 일요일 휴관

미스맥 갤러리 MISSMACC GALLERY 서울 종로구 통의동 효자로 7길 8 Tel. +82.2.2057.6327 cafe.daum.net/gallerymsmc

그 시절 친구의 집에는 이층 침대가 있었고 책상 위에는 새하얀 도화지가 있었다. 토요일 오후, 공원으로 자전거를 타러 가자는 친구의 전화를 받고 삼거리로 달려간다. 멀리 손을 흔드는 친구와 그 아이의 가족이 함께 있다. 아버지는 누나와 다정스레 이야기를 나누고 어머니는 등나무 바구니를 들고 있다. 아마도 바구니 안에는 가족을 위한 소풍 간식이 들어 있을 것이다. 그 낯선 풍경을 보는 순간 자전거는 점점 느려지고 얼굴에 분홍빛이 오른다. 자전거는 서고 친구의 부모님께 공손히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거짓말이 나온다. '나 오늘 못 가. 엄마가… 그냥 오래.' '그럼 왜 왔어. 아까 전화로 그냥 얘기하지.'

곽한울_one day_캔버스에 혼합재료_90×130cm_2012
곽한울_park_캔버스에 혼합재료_80×130cm_2012
곽한울_garden_종이에 혼합재료_60×90cm_2012
곽한울_some night_캔버스에 혼합재료_90×130cm_2012
곽한울_some_캔버스에 혼합재료_97×154cm_2012
곽한울_yard_캔버스에 혼합재료_97×145cm_2012

내가 같이 가지 않을까 미리 이야기 하지 않고 나를 가족 소풍에 초대한 친구가 미워진다. 다시 인사를 하고 자전거를 되돌려 집으로 달린다. 자전거는 점점 빨라지고 땀이 나기 시작한다. 어린 시절, 나는 왜 친구의 가족 소풍에 따라 가지 못했을까.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되어도 내가 들어가기 힘든 공간이 있다. 누구에게나 허락되어 열려있는 공간들. 그 소소한 인생의 단편에 나의 자리를 생각한다. 나는 그곳을 바라보고 있다. ■ 곽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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