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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omepage]님께서 남기신 글 (2012-11-15 19:37:57, Hit : 1199)
[re] 2012 전시정보

 

테크놀로지 사회의 기계미학:

기계는 무엇을 구걸하는가?展 2012_1116 ▶ 2012_1215 / 월요일 휴관

초대일시 / 2012_1116_금요일_06:00pm

작가 프리젠테이션 / 2012_1117_토요일_02:00pm

참여작가 김두진_노진아_박재영_신기운_아찌아오(Aaajiao) 이장원_잭슨홍_트로이카(Troika)

후원 / 서울문화재단 공동주관 / 송원아트센터 기획 / 백곤(blog.naver.com/paikgon) 전시보조 / 한지숙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송원아트센터 SONG WON ART CENTER 서울 종로구 윤보선길 75(화동 106-5번지) Tel. +82.2.735.9277

테크놀로지 사회의 기계미학: 기계는 무엇을 구걸하는가? ● 새로운 종(species)이 탄생하면 언제나 기존에 있던 종들과 충돌이 일어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다. 18세기 중엽 인류의 역사에 혁신적인 종(species)이 탄생하였다. 바로 기계(Machine)가 그것이다. 기계는 태어나자마자 인간의 인식과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19-20세기 초·중반 기계들의 대 전쟁(산업혁명과 세계대전)은 인간들로 하여금 점점 더 기계에 종속되고 맹신하게 만들었다. 이후 인류는 기계를 정복하기 위해 눈부신 과학기술의 발전시켰다. 기계들은 인간의 자리를 하나둘씩 차지하면서 자신의 활동범위를 폭발적으로 확장시켰고, 급기야 인간의 감각까지 대체하게 되었다. 그 결과 기계는 스스로 자생할 수 있는 생명력을 획득하기 위해 인간들에게 구걸을 하기 시작하였다. 『테크놀로지 사회의 기계미학: '기계는 무엇을 구걸하는가?'』는 이 기계들의 구걸에 관심을 가졌다. 이 프로젝트는 인간과 기계테크놀로지간의 관계에 대한 연구한다. 프로젝트의 제목이자 단 하나의 질문인 기계의 구걸을 묻는 것은 테크놀로지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화두임이 틀림없다. 바로 인간인 우리들에게 말이다. 이 질문엔 "기계는 인간에게 무엇인가?"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왜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을 닮은 기계를 제작, 생산, 창조해내는가? 기계의 조건에 대해 묻는 이러한 물음은 단지 기계에 대한 것이 아니라 우리들 인간 자신들에 속한 것이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창조해내고 있는가?" 찰흙으로 신의 형상을 본떠서 사람을 만든 창조주 프로메테우스(Prometheus)는 인간에게 불을 주어서는 안된다는 금기를 깨고 인간에게 불을 주고, 그 벌로 코카소스 산꼭대기에 묶여 죽지도 못하고 독수리에게 산채로 간을 먹히는 고통을 당한다. 불은 인간이 신으로부터 벗어나 스스로의 힘으로 문명을 열수 있었던 강력한 도화선이 되었다. 프로메테우스의 신화는 프로메테우스의 피와 살로 빚진 인간의 숙명에 대해 생각게 한다. 마찬가지로 기계 종의 탄생은 새로운 프로메테우스를 상징한다. 인간이 인간과 같은 기계를 창조하면서 기계에게 내어주어야 할 것은 과연 무엇인가? 과연 기계는 인간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이 이 시대 테크놀로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절실하게 필요할 것이다. 왜냐하면 기계라는 새로운 종을 맞아들여 함께 공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 1. 기계인간의 탄생 1738년 2월 11일 프랑스 파리 롱그빌 호텔의 전시실에 획기적인 기계인형이 전시되었다. 바로 자크 드 보캉송(Jacques de Vaucanson, 1709-1782)이 제작한 플루트를 연주하는 자동인형(Flute Player)이었다. 나무로 제작된 이 인형은 높이 168센티미터 정도의 실물크기 인형이었다. 당시 기계가 플루트를 연주한다는 것은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보캉송은 플루트 연주자를 작동시키기 위해 파이프 세 개를 통해 인형의 가슴 부위를 관통하는 아홉 개의 복잡한 풀무 장치를 인형 아랫부분에 설치했는데 이것이 바람을 불어넣는 기능을 했다. 또 혀를 작동시키는 동력 전달 물림장치와 입술을 안팎으로 움직이게 하는 물림장치가 기계 내부에 설치되어 있었다. 이 기계가 전체적으로 작동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경이로웠다. 당시 볼테르(Voltaie)는 보캉송을 두고 "근대의 프로메테우스"라고 칭하였다. 이 자동인형은 디드로와 달랑베르의 『백과사전』 첫째 권에 '안드로이드(android)'라는 표제로 상세하게 기록되었다. 여기서 안드로이드는 "적절하게 설치된 스프링 따위의 수단을 이용하여 겉으로 보아 사람과 비슷한 어떤 기능을 수행하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는 자동인형"으로 정의되었다. (게이비우드, 김정주 역, 『살아있는 인형 인공생명의 창조, 그 욕망에 관한 이야기』, 이제이북스, 2001, pp. 50-51 참조) ● 보캉송은 이후 기계오리를 제작한다. 이 기계오리는 곡식을 집어먹고 곧바로 항문으로 배설하는 자동기계였다. 물론 배설용 곡물이 기계 내부에 따로 준비되어 있었지만 이는 기계인형, 즉 오토마타(automata)의 등장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기계, 즉 오토마타는 당시 데카르트의 근대 기계론적 세계관과 유럽사회의 시계 제작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폭발적으로 영역이 확장되었다. 그러나 이후 이성 중심적인 데카르트의 기계론을 가차 없이 비판하면서 인간의 정신적 활동까지 기계적 작동으로 설명하는 유물론자 메트리(Julien O. de la Mettrie, 1709-1751)가 나타났다. 그는 자신의 저서 『인간기계론 L' Homme machine』(1748)에서 인간을 기계의 개념과 완전히 동일시하였다. 그는 인간은 자신을 규정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하나의 기계'일 뿐이지만 태엽에 의해 작동되는 시계와는 달리 인간은 그 구조 전체를 조망할 수 없는 복잡한 기계로서 통일적인 전체성을 지닌다고 주장하였다. 즉, 뇌의 물질적인 기능이 수행되어야 정신이 비로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에게 정신작용의 근원은 육체라는 물질에 있기에, 인간은 곧 기계 그 자체이며, 뇌의 작용도 육체의 물질적 기능이라고 보았다. 그의 이러한 기계론적 세계관과 과학기술의 발전은 인간들로 하여금 자동인형에 매료되게 하였다. 바로 자동인형이 인간 생명체와 유사성을 띄고 있었고, 또한 인간 스스로 자신의 이미지를 물리적으로 대상화시켜 분신을 창조해낼 수 있었다는 가능성을 믿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계적인 인간모형은 인간의 상상력을 자극시키기에 충분했다. 인간은 내면에 잠들어 있던 자기창조의 욕망에 불씨를 지피면서 인간을 기계적으로 재구성했다. 기계, 혹은 기계인간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자동인형은 '피와 살'의 미메시스로 인간들에게 끊임없는 질문을 던진다. 진정으로 인간은 자신을 대체할 인간기계를 만들고 싶은가? 그렇게 만들어진 기계인형과 인간의 차이는 무엇인가? 라고 말이다. ● 2. 생명을 가진 기계 18세기 기계인형, 즉 오토마타의 발전은 인간에게 끊임없이 인간은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한다. 보캉송의 흥미있는 장난감을 보던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는 1741년 보캉송에게 직물제조 로봇을 만들 것을 권고한다. 이에 보캉송은 씨실과 날실을 짤 때 장력을 똑같이 유지할 수 있고, 사람이 두 손으로 잡아당겨 처리했던 예전방식보다 훨씬 더 많은 올을 처리할 수 있는 기계를 제작한다. 이런 현상의 배후에 있는 문제의 핵심을 정확하게 파악한 게이비 우드(Gaby Wood)는 플루트 연주자가 "인간의 오락을 위해 고안"된 것인 반면, 보캉송이 리옹에서 만든 이 직조 기계는 "인간이 필요 없음을 인간에게 보여줄 의도"였다고 지적하였다. 이것이 인간성을 상실한 로봇이 처음으로 제작되는 순간이다. 보캉송의 자동인형 이후 헝가리의 볼프강 폰 켐펠렌(Wolfgang von Kempelen, 1734–1804)은 1769년 체스 두는 자동인형을 제작하였다. 커다란 체스판이 놓여 있는 나무상자 앞에 앉아 있는 남자의 목각상으로 인형의 오른팔은 손등이 위로 향하도록 한 채 체스판 옆에 놓여있었고 살짝 들어 올린 왼 손에는 가늘고 긴 파이프가 들려 있었다. 사람들은 이 생각하는 기계 앞에서 좀처럼 체스를 이기지 못했다. 수십년 후 이 인형의 비밀이 밝혀졌는데, 바로 체스 고수가 기계 속에서 인형을 조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켐펠렌의 자동인형은 경외감 뿐만 아니라 불안과 두려움 또한 불러일으켰다. 살아있는 생명체, 즉, 인간만의 것이라고 생각되었던 영역이 침범당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안의 중심에는 무엇이 인간의 특성이며, 어떤것이 인간만의 특성인가라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게이비우드, 앞의 책, pp. 103-106) ●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인간 스스로 기계가 되고자 했다는 것이다. 왜 인간은 기계가 되고자 하는가? 체스의 초고수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왜 기계안으로 들어간 것인가? 바로 인간을 넘어서는 "생명을 가진 기계"를 창조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을 닮은 완벽한 기계를 창조하면 신적 지위를 획득할 것 같은 환상이 이 인간들로 하여금 기계인형에 몰입하게 만든다. 이러한 생각은 많은 사람들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영국의 작가 메리 셸리(Mary Shelley, 1797-1851)의 대표작 「프랑켄슈타인」(1818)은 바로 이러한 자동인형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피와 살」로 구성된 프랑켄슈타인은 인간의 조건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인간복제와 생명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소설의 후반부엔 프랑켄슈타인(과학자)과 괴물 모두 파멸하는 것으로 끝난다. 미친 과학자와 날뛰는 골렘(자동인형)의 모습 뒤에는 새롭고도 낡은 계명이 있다. 바로 "너 자신의 모습을 닮은 것을 창조하지 말라"이다. (부르스 매즐리시, 김희봉 엮, 『네 번째 불연속 The Fourth Discontinuity』, (주)사이언스북스, 2001, p. 81) ● 하지만 인간의 호기심이 멈출 수 없듯이 자동인형에 대한 탐구는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현대의 테크놀로지 사회에서는 살아 움직이는 몸(테크놀로지)과 두뇌(컴퓨터)를 가진 기계인간들이 속속 태어나고 있다. 그들은 인간신체를 준거점으로 인간처럼 꿈꾸며 자신의 미래를 계획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인간에게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요구한다. 그 요구는 아마도 인간이 필요치 않을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 3. 기계는 무엇을 구걸하는가? 인간신체를 준거점으로 하는 기계인간의 전략은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인간의 물리적인 신체를 기계화 하는 것이다. 이는 오토마타, 기계인형에서 시작하여 사이보그(cyborg)의 개념과 연결된다. 둘째, 인간 신체를 벗어나 인간 정신에 몰입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계인간의 개념은 사이보그를 넘어 가상신체로 확장된다. 인간의 몸을 기계로 대체하는 것과, 인간의 정신을 기계적 가상신체로 대체하는 것 모두 인간을 기계인간으로 만드는 것에 일조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여전히 기계인간에 대한 두려움과 불신이 존재한다. 이러한 기계신체, 가상신체에 대한 우려는 인류가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증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과학을 발전시키고 기계를 통해 인간의 신체를 물질화하고 가상적으로 통제한 결과라 할 수 있다. 기계들이 인간의 감각을 대체하고 인간의 역할을 기계들이 하나둘씩 차지하면서 기계는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되었다. 우리는 이제 이 생명력을 가진 기계를 예찬하면서도 그 기계를 두려워한다. "기계는 무엇을 구걸하는가?"란 질문은 기계에 대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인간을 위한 것이다. "인간은 기계를 통해 무엇을 실현하고 있으며, 기계에게 무엇을 구걸하고 있는가?" 이제 우리는 컴퓨터 가상현실과 소프트웨어 프로그램들에 하루라도 접속하지 않으면 현대사회를 살아갈 수조차 없다. 기계는 인간에게 끊임없이 구걸한다. 다름아닌 인간의 호기심과 열정, 그리고 살아있는 생명을 강렬하게 요구하고 있다. "기계는 무엇을 구걸하는가?"라는 질문은 디지털 테크놀로지 사회에서 기계란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을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기계와 인간의 존재에 대한 물음과 예술적 성찰을 요구하는 물음이다.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러한 물음의 중심에 바로 인간이 있다는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기계 테크놀로지는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가에 대해 끊임없이 되물어야 한다. 기계인간과의 아름다운 공존은 인간이 인간일 때 비로소 이루어진다. ● 『테크놀로지 사회의 기계미학: '기계는 무엇을 구걸하는가?'』는 인간이 기계를 예술로 끌어들임으로써 기계에게 어떠한 감각들을 요구, 혹은 구걸하고 있는가에 대한 연구이다. 특히, 예술의 메시지를 기계가 어떻게 이해하고 전달하고자 하는지가 중요하다. 그 메시지는 기계가 인간에게 전달하는 방식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인간이 기계를 통해 인간 스스로에게 전하는 메시지인 것이다. 그럼으로 인간을 향한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 바로 "기계는 무엇을 구걸하는가?"의 전체적인 물음인 것이다. "기계는 무엇을 구걸하는가?"는 세 가지 카테고리를 통해 기계와 인간의 관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기계 테크놀로지의 구걸은 자연현상의 모방이라는 관점, 둘째, 기계는 인간의 인식과 예술적 감각을 재현한다는 점. 셋째, 기계가 스스로 테크놀로지를 자기 복제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관점들을 통하여 기계 테크놀로지와 인간과의 관계, 특히 기계를 바라보는 인간의 시선, 예술적 미디어로써 기계가 인간에게 요구하는 지점들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예술을 통해 기계는 무엇을 구걸하고 있는가?" 사유의 물음을 시작한다. ● 4. 기계에 대한 여덟 예술가들의 사유 테크놀로지 사회를 살아가는 예술가들은 기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이 질문은 단지 작품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예술가로서의 사유에 대한 물음이다. 여덟 예술가들의 메시지에 귀기울여보자.

트로이카 Troika_SURROGATE_Lama C-Type Print, gloss, mounted on Aluminium 3mm_2012

영국에서 활동하는 그룹 트로이카TROIKA_Eva Rucki, Conny Freyer, Sebastien Noel)는 테크놀로지, 특히 전자적 빛을 통해 자연의 의미에 대해 묻는다. 작품 「Surrogate」는 영화 『블레이드 러너』(1982)의 원작 소설인 필립 K 딕(Philip K. Dick)의 소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 Do Androids Dream of Electric Sheep?』(1968)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되었다. 세계자연보호기금(World Wide Fund for Nature)의 마스코트인 WWF 팬더를 통해 미래의 디스토피아적인 세계를 잘 보여준다. 필립 K 딕의 소설에는 인간에 의해 황폐화된 사회에서 동물을 소유하고 돌보는 것이 시민의 미덕이자, 높은 사회적 지위를 드러내는 상징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멸종위기의 동물과 구할 수 없는 동물이 담겨있는 카탈로그를 통해서 전자적 동물을 구입한다. 이것이 바로 Surrogate(대용품)이다. WWF 엄마 팬더는 전자적 빛을 내뿜는 전자적 아기 팬더를 끌어안으며 관객들을 원망의 눈빛으로 바라본다. "누가 이러한 전자적 미래사회를 만들었는가?" 기계는 살아있는 생명체의 대용품이 될 수 있는가? 수많은 전자적 써로게이트가 살아 움직이는 테크놀로지 사회에서 트로이카의 팬더는 인간과 기계 또는 리플리컨트(replicant)에 대한 많은 철학적인 질문들을 던져준다.

아찌아오 aaajiao_Cloud.data_영상 설치, 혼합재료_210×75×200cm_2010

트로이카가 전자적 디스토피아에 대해 반성을 촉구한다면, 중국 상하이에서 활동하는 미디어아티스트 아찌아오(Aaajiao Xu Wenkai)는 기계테크놀로지의 유쾌한 미래를 꿈꾼다. 작품 「Cloud data」는 인간이 직접 자연의 구름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 구름은 단지 가상현실의 스크린으로 볼수밖에 없지만 스크린 안의 무한한 가상공간을 항해하며 인간의 시각적 감각에 새겨진다. 그는 구름의 재질감 색과 온도 등이 현실적으로 느낄 순 없지만 가까운 미래에 인간 신체를 통해 직접적으로 경험할 날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며 테크놀로지를 긍정한다. 그의 또 다른 작품 「투리토프시스 누트리틀라(Turritopsis nutricula, 작은 보호탑 해파리)」는 영원히 죽지않는 생명체이다. 1883년 지중해에서 발견된 이 생명체는 해파리처럼 생겼는데, 이형분화(transdifferentiation)를 통해서 위협을 받거나 노화되면 다시 어린시절의 세포로 돌아가 영원한 생명을 유지한다. 그는 컴퓨터 알고리즘을 통해 작은 보호탑 해파리를 만들었다. 실재와 가상의 세계에서 영원히 존재하는 생명인 이 작은 보호탑 해파리는 어쩌면 기계가 인간에게 요구하는 '생명'에 대한 답이 아닐까?

이장원_untitled_가변크기_2004~8

아찌아오가 자연과 생명을 기계 테크놀로지로 재현하였다면 이장원은 버려진 CD-ROM 드라이브로 기계생명체를 창조하였다. 컴퓨터 정보의 기록저장고인 CD를 받아들이고 이를 다시 정보로 바꾸어주는 CD-ROM 드라이브의 입력-출력 장치를 통해 만들어진 그의 작품은 인간의 접촉을 요구한다. 인간이 원형 기계 안에 손을 넣어 그것과 교감함으로써 그 기계생명체는 소리내어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의 기계생명체는 인간의 생명에너지에 반응하는 신체-기계인터페이스인 것이다. 인간에게 끊임없이 자신이 살아있음을, 유용한 정보를 해독할 능력이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그의 기계는 끊임없이 움직인다. 기계는 더 이상 단지 인간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을 향해 소리친다. 나의 생명은 자연의 식물이나 동물의 생명과도 같이 살아있고, 자극에 반응할 수 있다고 말이다. 그의 기계생명체는 인간에게 되묻는다. 살아 숨 쉬는 나를 당신들은 어떤 존재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고.

노진아_제페토의 꿈 Geppetto's Dream_레진에 유채, 컴퓨터, 인터렉티브 시스템_가변설치_2010

이장원의 기계생명체가 인간의 신체에 반응했다면, 노진아의 사이보그 기계는 직접적으로 인간에게 질문한다. 그녀는 기계테크놀로지와 인간의 관계에 대해 관심이 많은데, 이는 사이보그화 된 인간의 미래상에 대해서가 아니라, 인간화되고 있는 기계의 현재에 대한 것이다. 작품 「제페토의 꿈」에서 기계 피노키오는 생명을 얻어 자신의 존재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을 의심하는 인간들에 대해 묻는다. 왜 나를 인간으로 보지 않느냐고 말이다. 그러면서 다시 인간에게 질문한다. 인간의 조건이 무엇이냐고. 이 기계인형의 존재증명은 결국 인간에게 되돌려진 인간의 근원에 대한 물음이다. 과연 인간이 기계인간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사유할 수 있는 이성과 인간의 언어를 공유하는 기계인간 피노키오는 인간과 기계 사이에 존재하는 틈을 없애기 위해 우리들의 눈을 바라보며 끊임없이 인간 근원에 다가가는 질문들을 던진다.

김두진_Spring Time 봄_3D 디지털 프린트_230×145cm_2010

노진아가 인간의 외형을 고스란히 닮은 기계인간을 창조했다면, 김두진은 작품을 통해 인간의 조건이 무엇인가에 대해 말한다. 그는 뼈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을 개별적 주체로 바라볼 수 있는 방법이 바로 해골 즉, 뼈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남성과 여성, 백인과 흑인, 인간과 인간 사이의 모든 갈등은 피부에서 오는 것으로 피부가 제거되면 인간의 근원에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기계인간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기계가 단지 인간의 외형과 형태를 닮는다고 하여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가? 기계는 인간의 뼈를 가질 수 있는가? 그의 디지털 해골사진은 단지 죽음을 의미하는 해골이 아니라, 삶을 창조해내기 위한 근원적인 매체이다. 인간신체를 가장 아름다운 피부로 표현한 신고전주의 화가 부게로의 작품을 차용하여 피부를 제거한 그의 작품은 인간 본연의 모습과 인간 자체를 다시 생각하기 위한 예술적 전략인 것이다. 스스로 푸른빛을 발하는 디지털 뼈는 인간이 끊임없이 가꾸고자 하는 뽀얀 피부를 제거하여 인간의 신체성, 혹은 몸을 향한 담론을 디지털 가상세계로 내던진다. 이제 기계인간은 과연 어떠한 뼈를 가져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남는다.

잭슨홍_인간적인 자동판매기_설치_2012

김두진과 노진아가 인간과 기계의 관계에 대한 연구하였다면, 잭슨홍은 사이보그화된 인간을 직접적으로 실천한다. 「현실세계를 위한 디자인」, 「Upset」 등 현대사회의 방어기제 디자인 작품들을 선보였던 그는 역발상 디자인을 통해 사물과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 꾸준히 연구해왔다. 그의 「인간적인 자동판매기」는 켐펠렌의 체스 두는 자동인형에 영감을 얻어 제작한 인간을 위한 기계이다. 테크놀로지 사회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얼마만큼 기계를 믿을 수 있는가? 기계는 인간에게 편안함을 주는 동시에 불안과 불신을 안겨준다. 이러한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제작한 「인간적인 자동판매기」는 체스 두는 자동인형의 원리처럼 인간이 자동판매기에 들어가 직접 음료수를 제공한다. 그의 자동판매기는 드문드문 내부가 보이지만 전동 연필깎이와 헤어 드라이기를 사용함으로써 기계장치의 효과를 충분히 표현할 수 있다. 너무나도 인간적인 그의 작품은 기계를 바라보는 인간의 시선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얼마만큼 기계를 믿을 수 있는가? 인간만큼 편안하고 믿을만한 기계가 있는가?라고 말이다. 그의 유쾌한 작품은 기계가 걸어가야 하는 방향에 대해 위트있게 보여준다.

박재영_자가최면장치 self hypnosis machine_혼합재료_2012

박재영은 스토리텔링을 기반으로 일상적인 환타지를 만들어낸다. 그 환타지는 기계 테크놀로지가 지배하는 가상의 세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그의 세계에서 활동하는 존박사와 보카이센은 허구적 인물이지만 현실세계와 밀접하게 관계를 맺는다. 그가 설립한 가상의 회사 다운라이트(DoenLeit)는 거짓이라는 뜻이지만, 실제 사업자등록을 가진 회사로 설립되었다. 그는 이 다운라이트를 통해 우리사회에서 가상이 현실화되는 지점들에 대해 연구한다. 즉, 실재세계에서 행해지는 실재적인 환타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기계를 통한 가상의 마인드컨트롤 런칭쇼에 실제 사람들이 모여들어 기계를 구매하기를 희망하는 것을 보면서 그는 우리사회가 얼마만큼 기계에 종속되어 있고, 기계를 맹신하고 있음을 반성한다. 그의 작품 「자가최면장치」는 최면을 불신하는 현대인들이 안심하고 이용할 수 있는 기계장치이다. 인간인 최면치료사보다 최면기계에게 자신의 과거를 맡기는 이 사회의 실재성은 이미 환타지 그 자체이다. 그의 작품은 가상의 최면장치이지만, 그 장치가 실재한다고 믿기만 한다면 너무나도 훌륭한 기계최면사인 것이다. 결국 가상과 진상의 구분은 인간의 "믿음"을 통해 이루어진다. 인간의 "믿음"을 구걸하는 기계는 그러므로 허구이지만 실재하는 것이다.

신기운_Desire has no history_체스, 2채널 영상 프레임 설치_Full-HD H.264 코덱, 00:12:00_2009

신기운은 모든 사물들을 갈아서 가루로 만든다. 그는 수퍼맨, 아이팟 등 시대적 아이콘을 갈아버리는 행위를 통해서 영웅주의와 기계테크놀로지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였다. 즉, 미디어가 만들어낸 영웅이미지를 갈아 없앰으로써 미디어사회에 대한 복수를 감행하는 것이다. 그의 작품에서 중요한 지점은 갈려 없어지는, 혹은 깨지는 과정을 드러내는 찰나에 있다. 흐르는 시간이 멈추고 사물이 원래상태에서 갈려나가는 순간, 그 사물을 바라보는 인간의 관념이 부서진다. 과연 사물의 본래적 의미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부서지기 전 원형의 틀인가 아니면 부서진 파편들인 것인가? 그는 체스판의 체스 말을 기계를 통해 찍어 부셔버림으로써 사회의 수많은 편견들을 무너뜨리고자 한다. 테크놀로지 사회, 기계적 맹신에 의해 부셔지는 체스 말은 우리 인간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기계는 인간사회의 편의와 미래를 위해 공헌하지만, 그 기계에 의해 인류는 자신의 발목을 내어줄 수도 있다. 테크놀로지와 인간의 공생은 인간의 아킬레스를 확고하게 보호할 때 가능하다. 이상을 향한 관념을 다시 인간으로 향하게 할 때 기계는 비로소 인간의 친구가 된다. ■ 백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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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스트로폴로지

Catastrophology展 2012_1116 ▶ 2012_1226 / 월요일 휴관

초대일시 / 2012_1116_금요일_06:00pm_2층 아카이브실

오프닝 공연 / 2012_1116_금요일_07:30pm_1층 스페이스 필룩스 허먼 콜겐 Herman Kogen「더스트 DUST」

참여작가 미하이 그레쿠 Mihai Grecu_허먼 콜겐 Herman Kolgen 료이치 구로카와 Ryoichi Kurokawa_박자현 Ja Hyun PARK 손정은 Jeung Eun SHON_송진희 Jinhee SONG

후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기획 / 조선령

작가와의 대화 미하이 그레쿠_송진희 / 2012_1118_일요일_03:00pm 손정은_박자현 / 2012_1208_토요일_03:00pm

공연 및 아티스트 토크 예약 접수 / arkoevent@arko.or.kr 선착순, 무료, 각 행사 하루 전까지 접수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월요일 휴관

아르코미술관 ARKO ART CENTER 서울 종로구 대학로 100번지 Tel. +82.2.760.4608 www.arkoartcenter.or.kr www.facebook.com/ArkoArtCenter

'재난학'이라는 의미의 신조어를 제목으로 삼은 이 전시『카타스트로폴로지』의 초점은 일상과 공존하는 현대의 재난이 어떻게 우리의 감각을 미시적 차원에서 바꾸어놓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 '재난'이라는 단어가 '사고'라는 단어보다 더 파괴적이고 두려운 느낌을 주는 것은, 그것이 한 개인의 죽음이나 고통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전체의 붕괴를 암시하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해, 후쿠시마에서 온 경악스러운 영상과 사진들은 우리에게 현실을 떠받치고 있는 좌표의 상실과 상식적인 인과관계의 종말을 경험하게 했다. 장난감처럼 팽개쳐져 있는 비행기들, 육지에 난파한 거대한 배의 사진은 우리 지각의 기준점을 붕괴시켰다. 원전에서 흘러나온 방사능 물질 중 가장 치명적인 플루토늄의 반감기가 2만년이라는 말을 들으며, 우리는 그 시간이 의미하는 바가 우리의 삶과 상상력 훨씬 너머에 있다는 사실에 망연해졌다. ● 우연히 들이닥치는 폭력적인 힘에 의해 현실의 범주와 안전한 인과관계의 틀이 무너지는 것을 재난이라고 부른다면, 오늘날 우리는 도처에서 재난에 맞닥뜨리고 있다. 몇 달 전 미국의 한 영화관에서 일어난 총기난사 사건에서, 관객들은 순간 영화 속의 총소리와 실제의 총소리를 구별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때 관객이 보고 있던 영화 그 자체가 거대한 재난과 공포를 다룬 것이었음을 상기해볼 때, 우리는 허구와 현실의 안전한 테두리가 붕괴했다는 사실에 경악하게 된다.

송진희_EAT INTO_단채널 영상_00:08:00_2011
Herman Kolgen_DUST RESTRICTION_비디오 사운드 설치_2011
Mihai Grecu_IRIDIUM_단채널 영상_00:04:16_2006
손정은_하느님의 만나(Manna) 아버지의 젖 어머니의 정액_혼합재료_2012
Ryoichi Kurokawa_GROUND_3.1채널 영상설치_00:12:00_2011
박자현_일상인_종이에 펜_162×120cm_2011

물론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우리는 재난의 당사자나 희생자가 아니라 목격자 혹은 구경꾼일 뿐이다. 하지만 오늘날 삶의 위치에서 죽음의 위치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 않다. 재난과 죽음은 도처에서 우리를 찾아내고 우리를 엄습한다. 일상과 재난의 경계선은 무너져가고 있다. 요컨대 현대 사회의 재난은 단 한 번에 우리의 삶 전체를 바꾸어버리는 총체적 충격이라기보다는 우리가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에 삶 속으로 스며들고 삶 자체와 공존하는 그 무엇이 되었다. ● 이 전시는 재난의 대책을 제시하거나 정치적 책임 소재를 묻고자 기획된 것이 아니다. 물론 그러한 일들도 반드시 필요한 작업일 것이다. 하지만 예술의 역할은 다른 곳에 있다. 예술은 일상에 도래한 균열과 심연을 회피하지 않고 직시하며 환상 없이 우리의 리얼리티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 ● 전시에 참여한 여섯 작가는 각자의 방식으로 이를 수행한다. 이 작가들은 미세한 극소감각에 집중하면서 설명할 수 없는 불안이나 불편함의 느낌을 다룬다는 공통분모를 갖는다. 이들의 작업은 재난과 같은 사회적 사건을 명시적으로 담고 있지 않다. 초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의 미세한 감각의 뒤틀림을 제시할 뿐이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틀 그 자체를 의문시한다는 점에서, 이 작품들은 사회적 차원과 맞닿아 있다.

Herman Kolgen_DUST_오디오 비주얼 퍼포먼스_2012

전시 참여작가 허먼 콜겐의 오디오 비주얼 퍼포먼스.「오버랩(Overlapp)」과「더스트(Dust)」두 작품으로 구성된다.「오버랩」은 태풍에 의해 도시가 먼지와 바람에 휩싸인 풍경을 통해 암울한 현대 도시의 현재 상황을 묘사한다.「더스트」는 마르셀 뒤샹의 설치 작품「커다란 유리」(1912-1923) 표면에 내려앉은 먼지를 촬영한 만 레이의 사진에 영감을 받은 작품이다. 도시 곳곳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생겨나 부유하는 '먼지'의 움직임을 극도로 확대하여 보여주는 단편적인 영상들이 불길한 전자음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 조선령

공연 및 아티스트 토크 예약 - 이메일 접수 arkoevent@arko.or.kr (선착순, 무료, 행사 하루 전까지 접수) - 메일에 참여 프로그램명, 날짜, 이름, 연락처 기재 - 문의전화(접수는 전화로 받지 않습니다) 02-720-4605 - 여유 좌석 있을시 현장 접수도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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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세포의 요정 Cellormoon

김쎌展 / KIMCELL / mixed media 2012_1109 ▶ 2012_1125 / 월요일 휴관

김쎌_美세포의 요정 Cellormoon展_브레인 팩토리_2012

초대일시 / 2012_1109_금요일_05:00pm

참여작가 김쎌(KIM Cell)_Rotta_허동_이윤성_박선우 외

기획 / 최흥철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브레인 팩토리 BRAIN FACTORY 서울 종로구 통의동 1-6번지 Tel. +82.2.725.9520 www.brainfactory.org

Cellamon Company 창립사 ● 'Cellormoon'은 시각 예술과 영상, 디자인, 모델의 영역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전방위적인 창작 활동을 펼치고 있는 신예 아티스트 김쎌이 고안한 '미세포의 요정'이자 선원복 스타일의 교복 소녀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유명 일본 에니메이션 『Sailor Moon』을 패러디한 존재이다. 또한 그녀는 생물학 체계와, 번식, 이식, 증식, 감염과 같은 병리학적 개념을 차용하여 조형언어를 해석하고 작업에 변용하고 있다. 생물체의 체세포나 세균을 실험실에서 배양하듯이 여성 캐릭터의 귀여움을 강조하는 눈, 손, 머리카락 등을 증식시켜가며 프랙탈하게 반복하여 화면을 가득 채우지만, 극단적인 평면화를 시도하는 비정형적인 패턴 회화로 기괴한 강박감의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김쎌_美세포의 요정 Cellormoon展_브레인 팩토리_2012

이렇듯 만화형식으로 간략화 한 여성의 특정 신체 일부 요소를 무작위로 무한 증식시켜 평평한 캔버스를 뒤덮는 올 오버 패턴 페인팅 회화는 최근 작가 자신의 손바닥 이미지를 복제 반복해서 벽, 바닥과 천정 등 전시 공간 전체를 육질로 뒤덮는 '김쎌 신드롬' 설치 실험과 바디 페인팅, 신체 퍼포먼스, 사진, 영상, 사운드, 출판 등으로 확장되고 있다. 특정 의미가 배제된 체, 지극히 단순하고 직관적인 기호와 형태를 조립한 모듈의 인하여 포화 상태로 치닫는 패턴 회화와 설치는 궁극적으로 일상공간을 점거하여 단백질 감성 공간으로 변모시킨다.

김쎌_Cell의 증식_비닐, 카메라, 손사진_가변설치_2012
김쎌_Cell의 증식_비닐, 카메라, 손사진_가변설치_2012

이번 김쎌의 브레인 팩토리 전시는 앞으로의 활동을 위한 엔진이 되어줄 아트 매니지먼트 컴퍼니 『Cellormoon Company(이하 셀라문 컴퍼니)』의 창립행사이다. 『셀라문 컴퍼니』는 오로지 절대적인 매력의 아티스트 김쎌에 의한, 김쎌만을 위한 창작 플랫폼이자 협업 방식의 실험적인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공간은 온라인에서의 교류 활동이 작가를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플랫폼이자 물리적인 무대가 되어 서로 다른 장르의 아티스트들이 끊임없이 증식되는 '쎌感'을 의미하는 'Kim Cell Syndrome(이하 김쎌 신드롬)'을 주제로 다양한 협업을 펼치고, 각각 5개의 프로젝트를 함께 론칭한다. 이윤성 작가의 신체가 분리된 토루소 이미지를 모티브로 삼은 패턴 회화와 자기 신체이미지 복제반복 설치 작품, 음반, 뮤직비디오, 발행 외에 쎌 디자인을 적용한 색칠공부 세트와 같은 아트 상품, 의상 등을 소개하는 에디터 박선우와의 협업 패션 화보집 형식의 『CELLORMOON Magazine』 창간 등 다채로운 프로젝트를 이번 쇼를 통해 발표한다. 자기 신체 기반의 퍼포먼스를 글과 사진으로 수록하는 『셀라문 매거진』 창간호와 함께 김쎌의 신체를 두드려 내는 소리를 레코딩한 MDS 멤버 뮤지션 허동과의 협업 음반, 영상 작가 Rotta와 함께 제작한 창립기념 영상과 신체 퍼포먼스 뮤직비디오 등 다양한 엔터테인먼트 생산품이 동시에 발매된다.

김쎌_H.CELL Syndrome_사진_2012
김쎌_K.CELL Syndrome_사진_2012

고도 성장의 경제적 풍요의 분위기 속에서 성장한 이들 신진 작가 세대들은 문화적 콤플렉스나 변방의식이 이전 세대들에 비하여 희미하고 개방적이며 자신감이 넘치는 반면, 고도 성장의 끝자락에 위태롭게 버티고 있는 이른바 88만원 세대가 가진 기회 상실의 불안감을 견디며 살아간다. 그리고 이전 세대들의 과도한 자의식과 그것의 확인을 위하여 거듭된 소비의 과잉에 의한 엔트로피의 증가에 따르는 연쇄적인 현상은 젊은 세대들에게 스트레스와 강박의 근원이 되며, 무의식 저변에 깔려있는 공포감을 유발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의 먹먹한 우울함을 우물처럼 토해내는 장소를 찾아 네트워크를 헤매고 있다. 그러나 그곳은 매우 위생적이며 비종말론적인 공간이어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회화, 사진, 설치 작품과 더불어서 김쎌에 의한 신선한 협업의 시도는 그녀가 속한 세대 다수의 자발적 요구에 의하여 자연스럽게 발생한 창작 활동의 소셜 네트워킹 협업의 새로운 사례로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 최흥철

김쎌_Y.CELL Syndrome_종이에 혼합재료_79×55cm_2012

The Inaugural Message for the Cellamon Company ● 'Cellormoon' is the 'Beauty-cell Fairy' that the new emerging artist Kim Cell creates who freely cros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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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undary Lab

홍승표展 / HONGSEUNGPYO / 洪承杓 / printing.drawing.painting 2012_1117 ▶ 2012_1202

홍승표_Round Garden_종이에 펜_51×72cm_2012

초대일시 / 2012_1117_토요일_04:00pm

2012 SeMA 신진작가 지원 프로그램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주말_10:00am~04:00pm

코너아트스페이스 CORNER ART SPACE 서울 강남구 신사동 580-6번지 제림빌딩 1층 Tel. 070.7779.8860 www.cornerartspace.org

홍승표는 청각 기관이나 시각 기관, 소화기관에 이르는 인간 장기를 대체하여 기능하는 기계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며 사는 사람들을 그린다. 그림 속 인간은 차가운 철의 시대를 살아가지만, 그러한 현실에 놀랄 만큼 어려움 없이 적응하며 신체의 일부로까지 받아들이는 모습이다. 작가는 기계와 결합된 인간의 모습들을 철판 위에 제작하며, 철이라는 매체의 물질성과 상징성을 가지고 기계와 예술, 기계와 인간의 사용목적과 생산성을 분석한다. 작가의 작품은 홍대 판화과 시절 시작된 에칭 기법에서 출발한다. 홍승표는 철판 위에 직접 라인드로잉을 에칭 기법으로 음각하고, 그 위에 채색을 하는 방법으로 제작한다. 또한 종이에 제작된 라인 드로잉들은 기계의 블루프린트를 연상시킬 정도로 정확하며, 이는 기계를 설계하는 단계로서의 드로잉이자 하나의 완성품을 보여주는 기능을 수반하기도 한다. ● 당시의 기계미학은 기계와 대량생산이라는 두 시대적 현상에 이데올로기적으로 기원 한다. 산업혁명 이후, 인간은 기계가 생산해 내는 제품 없이는 살기 힘들어졌고, 도시의 일상은 대량생산된 제품들의 도움으로 유지되었다. 이 시기 등장한 바우하우스는 스스로를 '기계적인 합리주의'라 부르며, 기계의 논리를 디자인의 논리에 반영시켰다. 기계 및 대량생산에 맞게 디자인을 설계하여 일상을 디자인한다는 것은 기능주의적이며, 그 디자인 대상에 대한 형식은 문제에 대한 상세한 합리적인 분석의 결과로서 합리주의 사고이다. 이는 대량생산과 소비에 의해 미래의 유토피아가 곧 도래하리라는 믿음에서 비롯되었다.

홍승표_Sparky Tram_강철판에 에칭, 유채_65×92cm_2011
홍승표_The Wireless Retina_강철판에 유채_64×100cm_2011

한국의 70-80년대는 기계미학이 태동한 서구의 20-30년대와 일치한다. 이 시기 한국에서는 대량생산시스템이 개발되며, 많은 것들이 표준화 또는 규격화 되기 시작했다. 공장에서 생산된 제품은 인간의 생활환경 또한 표준화시켰고, 대량생산 시스템은 인간 생활의 외부적 환경뿐만 아니라 인간의 사고 또한 변화시켰다. 찰리 채플린의「모던 타임즈」에서 보여주듯, 하루 종일 나사못을 돌리다가, 공장을 나와서도 계속 나사못을 돌리는 채플린의 모습에서처럼, 대량생산이라는 기계적인 체계는 인간의 신체에 적합한 시스템이 아니라 인간의 신체가 대량생산 시스템에 맞추어야 한다는 모순을 나았다. ● 생명체는 자연 환경 속에서 삶을 지속하기 위해 진화해 왔다. 인간 또한 자연환경 속에서 삶의 존속을 위해 진화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자연환경은 인간에 의해 삶을 영위하기 위해 진화 중이다. 변화된 자연 환경 속에서 인간은 삶의 연속성을 진행하기 위해 진화할 것이다. 인간이 만든 환경으로 대변되는 기계들은 인체의 기관처럼 유기적이면서 필연적이다. 시계 안의 기계부속들이 어느 하나 불필요한 것 없이 설계된 것처럼 정교하다. 하지만 기계의 기능을 자세히 들여다 본다면 각 기능들이 합쳐져 생명체가 쉽게 할 수 있는 일을 수행하는 기관들임을 눈치챌 수 있다.

홍승표_Coin Operation Gills_아연판에 에칭, 유채_44×54cm_2009
홍승표_Sky Sound, Engine Crawing_강철판에 에칭, 유채_64×98cm_2011

홍승표는 80년대 아버지가 운영하던 금형 공장의 기억들을 작품세계와 연결한다. 아버지가 공장 기계제작을 위해 각종 동물 모양의 지우개 금형틀의 설계도를 그리던 모습은 작가의 작품 속에서 공장의 기계들이 인간의 장기가 된 모습들로서 나타난다. 홍승표는 인간의 신체의 일부가 된 기계들에 대해 찰스 다윈의 진화론으로 이해한다고 말한다. 청동기 시대를 거쳐 여전히 철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더 진화하는 길은 철과 육체의 결합인 것이다. ● 여기서 우리는 네덜란드의 미술가인 유프 판 리스하우트 Joep van Lieshout 이「노예도시 Slave City(2005~)」에서 보여주던 이성과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디스토피아적 세계와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작품에서 리스하우트는 건물들, 건강 센터, 미술관, 마을과 대학까지 약 20만 명이 거주할 수 있는 창조도시를 재현한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를 모토로 전혀 쓰레기를 배출하지 않는 구조로 설계되었다는 이 도시는, 그 제목 자체에서 명백히 드러나듯 기계화된 사람과 진화된 세계에 대해 비평적 입장을 관철한다.

홍승표_On And On and On And Off_강철판에 에칭, 유채_74×64cm_2011
홍승표_Pudding Gear Solid_강철판에 에칭, 유채_65×67cm_2011

반면, 홍승표의 세계는 조금 더 기계 친화적이다. 기계는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 일상생활 속에 존재한다. 놀이 공원에서 기계와 함께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장면과 아기를 유모차를 태워 커다란 시각장치 기계와 함께 걸어가는 부부의 모습에서 보듯, 작가는 기계적 유기성과 기계의 부품으로 된 인간의 장기들을 사람들이 사는 공간에 자연스럽게 자리하며 환경으로서 존재하게 한다. 문화 혹은 생물학적 '진화'가 사람이 만든 환경 속에서 진행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 한국의 80년대 산업화와 기계화가 가져온 빠른 부富는 단순한 비평의 대상만은 아니라는 작가의 입장은 신선하다. 작가는 대량생산한 기계 장치들이 우리의 생활을 도와주는 경지를 넘어서 신체의 일부가 됨을 '진화'라 부른다. 디자인된 기계들은 사람들과 영향을 미치며 사람들의 생활을 디자인해간다. ■ 양지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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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done

송명진展 / SONGMYUNGJIN / 宋明眞 / painting 2012_1121 ▶ 2012_1215 / 월요일 휴관

송명진_Undone 3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1×350cm_2012_부분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90305e | 송명진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1121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인 GALLERY IHN 서울 종로구 팔판동 141번지 Tel. +82.2.732.4677~8 www.galleryihn.com

한 수 물리다. ● 그간 내 '그리기'의 짧은 궤적에 관심을 뒀던 이들이 있다면 새로운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가 좀 수월할 듯하다. 말(言) 이외의 방편들을 통해서 그림이란 결과물로 갈무리한 일을 돌이켜 말로써 다시 풀어내야 하는 처지가 그리 녹록치는 않기 때문이다. 근래의 작업들은 이전과는 좀 달라 보일 듯싶다. 우선, 대표색이라 할 만한 초록색은 그림에서 찾아볼 수 없으며, 가상의 캐릭터 '손가락 인간'들도 사라졌다. 대신, 화면의 이미지들은 전체적으로 단순해졌으며, 색채도 베이지색이거나 회벽색과 같은 중성색이 주조를 이룬다. 이전(2005~2009년)의 작품들 즉, 초록색의 작품들에선 그 소재들이 초록이라는 색채가 관습적으로 상징하는 것처럼 자연을 표방하고 있거나 또는 자연을 모방하는 재료로 쓰이며 이미지의 표면을 구성했다. 그 이면의 개념 틀은 회화라는 장르의 특성이자 한계라 할만한 '평면성(flatness)'의 문제로, 이것은 작가가 작품을 통해 스스로 회화의 정체성을 인식하는 계기임과 동시에 관객에게 제시하는 것이었다. 더불어, 예의 캐릭터가 등장하는 그림에서는 내부의 이야기 구조와 외부의 평면성이 서로 간섭하고 교류하는 관계를 보여줌으로써 두 상반된 개념의 결합가능성을 시험했었다.

송명진_Objects 2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0×194cm_2011

이제 근간의 작업들을 살펴보자. 화면에서 보이는 사물들은 주로 원기둥과 같은 간단한 입체도형의 형상을 띠고 있고, 약간의 형태적 가감을 통해 변주되고 있다. 그 단순 형태를 이루는 색채 또한 글머리에 언급한 바와 같이 초록색의 강렬함과 단호함에 비하자면 탈색된 색채라 할 만하다. 그것은 마치 흙의 색 또는 몸의 살색과 같아서 도처에서 흔히 발견될 수 있는 색으로, 정색하지 않으면 미처 인식되지 못하는 그런 색감들이다. 또한 그 사물들이 일으키는 사태를 보자면, 화면의 원기둥은 그 내부에서 물성의 변화가 있은 듯 액체로 채워져 있고, 그것은 곧 바깥으로 흘러내려 지척의 구멍으로 다시 흘러들어 간다(Objects 2, Work 1,2). 화면에서 사건은 어떤 식으로든 발생하고 있지만, 물질은 결국 순환하며 원점으로 회기하고, 구멍은 메워져 평편하고 무심해지고 말 터이다. 작품들에서 등장하는 사물들은 흡사 블랙홀과 같은 시커먼 구멍들의 언저리에서 놀고 있다. 그 자리가 아슬아슬해서 무게중심이 잠깐이라도 흐트러지면 사물들은 구멍 속으로 꺼꾸러질 태세지만, 함정처럼도 보일 법한 이 구멍은 사물이 나고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갈 출구이자 입구처럼도 여겨진다.

송명진_Work 1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94×130.3cm_2011

또 다른 사태를 보자면, 종잇장처럼 둥글게 말린 원기둥의 열 위를 육중한 육면체의 덩어리가 서서히 미끄러지듯 전진하고 있다. 지탱해내기엔 역부족으로 보이는 원기둥들은 무거운 덩어리 아래서 용케도 버티고 있으며, 지나간 그 자리엔 버거웠던 흔적이 남았다. 더군다나 바닥엔 구멍들이 포진하고 있어 사태를 더 불안하게 만든다. 그리고 화면 전체를 가로지르는, 마치 낙서처럼 무신경하고도 과감한 붓질, 이것은 결국 이 모든 상황을 무화(無化)시키고 만다(Undone 1). 이처럼, 작품에는 화면 위에서 벌어지는 사태에 무심하게 끼어들어 아무렇지도 않게 모든 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요소들이 존재한다. 드센 눈보라가 풍경을 삼키듯 물감 얼룩들은 화면 전체를 덮어버리고(Undone2), 탄력 있는 양감을 유지하며 굽이치던 뽀얀 살빛의 기다란 물체는 그 표면에 미세한 균열을 내고 어느 순간 갑자기 그 말단에서 사태를 종결시켜 버린다(Undone 3). ● 공들여 그렸다가 마구 지워버리고, 순탄하게 잘 흐르는 듯하다가 갑작스런 변덕으로 망쳐버린다. 그림을 그린 이 조차도 이와 같은 급작스런 쇠락에 당황스럽고 불안하긴 매한가지지만, 사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캔버스 화면은 그저 이미지의 놀이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듯싶다. 그림을 그리는 행위 또한 아이들의 놀이와 별반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아이들이 실컷 갖고 논 후 진력난 장난감을 장난감 통에 다시 던져버리고 놀이를 마무리하듯이 나는 화면의 이미지들을 결국 어떤 방식으로든 다시 원래 비롯되었던 자리로 돌려보내고 있는 중인 듯하다. 발 밑 구멍으로 숨기건, 낙서로 뒤덮어 지워버리건, 구석으로 밀쳐놓건 말이다. 이것은 또 다른 이미지들이 놀 수 있도록 편평한 바탕으로 다시 비워놓는 것과 다름 아닐 것이다.

송명진_Work 2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94×130.3cm_2011

일견, 허망해 보이는 이러한 상황들이 이전의 작품들에서 꾸준히 견지했던 회화의 '평면성'의 문제와 연장선상에 있는 것은 아닐까 스스로 유추해 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일 것이다. 작품의 외적 형식에 변화가 있다손 치더라도 한 작가가 꽤 오랫동안 견지해오던 태도에는 부지불식간에라도 그 관성이 남아 있을 법하니 말이다. 되새겨보자면, 평면 위의 선묘(線描)에 음영(陰影)을 넣어 무엇이건 실재하도록 만들어내는 방법을 처음 접한 소시적에, 그리는 이를 적어도 화면 위에서는 조물주로 격상시키는 명암법에 대한 경이(驚異)가 컸던 만큼이나 그 반대급부로 화면이란 평면의 바탕에 대한 의심과 회의가 자리 잡았던 듯싶다. 그래서인지 나는 늘 거대 담론이나 심오한 사상을 담기엔 회화의 태생이 불완전하고도 자기 모순적이라고 느꼈고, 이제껏 화면 속에 어떤 개념이나 의미를 담는데 흥미를 느끼기 보단 사전에 그 바탕을 의심하고 타진해보는 것에 몰두했었다. 그 구체적 방법론으로, 이전의 작품에서는 예컨대, 화면의 그려진 이미지들이 결국은 평면 위의 환영일 뿐이란 사실을 주지시키기 위하여 매끄럽게 묘사된 이미지들 틈새로 새하얀 캔버스의 평면을 드러내어 눈앞에 펼쳐보였다고 한다면, 근작에서는 전 단락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조금 다른 방식을 취한다고 할 수 있다. 나는 그것에 대하여 그저 작은 숨구멍을 내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것은 충만하게 잘 묘사된 사물들 사이로 균열을 내어 무력하게 만들고, 결국 그 구멍을 통해 전복 가능하도록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기'라는 애초의 허튼 수작 위에 또 하나의 허튼 수작을 덧입히는 것처럼 무용(無用)해 보일 지라도 말이다.

송명진_Undone 1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27.3×486cm_2011

사실, 근작에선 화면에 어떤 의미를 담지도, 아니 오히려 지우려 애썼다고 하는 것이 더 타당할 듯싶다. 다만, 화면의 이미지들 간의 관계에서 시각적으로 경험되는 '촉각성', 바로 이것만은 담보(擔保)하고자 했다. 이것은 앞서 언급했던 '평면성'과 같은 의미들조차 모두 지워버리고 난 후의 잉여의 실재이자 손톱 밑에 박힌 가시처럼 실상이다. 여기서 말하는 촉각성은 단순히 이미지를 사실적으로 묘사해서 손으로 만지고픈 욕구를 유발시키는 촉각적 감각이라기보다는, 일상에서 겪었던 내 몸과 사물간의 촉각적 경험을 그림을 통해 연상시키고 시각적으로 공감해 보는 감각이며, 화면의 사물들과의 관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다음의 촉각적 사태를 유추하게 만드는 '시각적인 촉각성'이라고 할 수 있다. 촉각은 인간의 몸이 사물과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것이 당연한데, 습득된 촉각적 정보는 몸이 기억하도록 각인되어 새로운 사물을 접할 때 몸의 직접적인 경험을 생략하더라도 그 속성을 파악하게 만든다. 기실, 촉각성은 과거의 내 작품들에서도 예의 양감을 살리며 이미지를 묘사하는 방식으로 인해 낯설지 않은 감각일 터인데, 이제껏 이것이 기저에서 작용하는 잠재태(潛在態)였다고 한다면, 이번 작업에서는 의미의 차원보다 우위에서 강조되고 있다.

송명진_Play 1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3×162cm_2012

한편, 예술에 있어 작가와 그 작가가 창조한 작품은 서로 간에 얼마만큼의 필연성이 담보되어 있을까.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직접적이고도 발 빠른 매체들을 차치하고 유독 그림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무언가를 표현하고자 할 때, 그 지난한 그리기의 과정 중에 끼어드는 우연들과 변형, 타협들의 과정을 수용해버린 결과물인 그림이 그린 이의 초심의 의도나 생각과 얼마만큼이나 일치될까. 작가가 작업에서 결과적으로 견지하고자 하는 의미나 개념은 작가와 필연적 관계라기보다는 그 과정에서 우연히 조우하는 것이 아닐까. 우여곡절 끝에 완성된 작품은 이제 작가를 오히려 설득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가 그림을 통해 어떤 의미를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자의든 타의든 일종의 자기 기만적 행위가 어느 정도 끼어들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결국, 작가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주체적이기보다는 다만 작품에 몸을 빌려줄 뿐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작가는, 아니 나는 그저 자족적인 무언가를 끄적대고 싶었을 뿐인데 말이다. ● 요즘 난 내 의식을 마치 투포환 선수처럼 힘껏 저 멀리 전방에 던져놓은 느낌이다. 한편으론 내 뒤로 멀찌감치 떨어뜨려 놓은 듯도 하다. 그래서 내 몸이 내 의식을 쫓아가는 중인지, 아니면 내 몸이 내 의식으로부터 도망하는 중인지 헷갈린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겠다. 아무튼, 제풀에 지쳐서이건 합의에 의해서이건 언젠간 그 둘은 다시 만나게 될 것이고, 만남과 동시에 괜한 불협화음으로 다시 이별을 고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와 같은 어리석어 보이는 숨바꼭질의 무한반복, 이 숨바꼭질의 궤적이 내 나름의 회화사(繪畫史)가 되지 않을까 내심 불안하다. ■ 송명진

송명진_Play 2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3×162cm_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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