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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omepage]님께서 남기신 글 (2009-04-01 21:36:51, Hit : 546)
[re] 전시 3.30



풍경과 정경

이준규展 / LEEJUNGYU / 李浚揆 / printing

2009_0401 ▶ 2009_0419



이준규_window00913_메조틴트_40×60cm_2009




초대일시_2009_0401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30am~09:00pm




갤러리 쌈지_GALLERY SSAMZIE
서울 종로구 관훈동 38번지 쌈지길(아랫길 B1)
Tel. +82.2.736.0900
insa.ssamziegil.com






이준규의 판화 ● 메조틴트는 사진이 발명되기 전 초상화 제작에 널리 사용되어졌던 대표적인 판화다. 다른 판화들에 비해 사실적이고 정교한 재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사진과 비교해 봐도 비록 사진만큼 정밀하지는 않지만, 사진이 흉내 낼 수 없는 부드러운 톤이 매력이다. 사진과 메조틴트의 차이는 이렇듯 톤과 질감에서 두드러진다. 사진이 흡사 피사체를 고정시켜놓은 것 같은 매끄럽고 즉물적인 피막을 가지고 있다면, 메조틴트는 낱낱의 입자가 만져질 것 같은 촉각적인 질감이 특징이다. 흔히 메조틴트의 표면질감을 벨벳에 비유하기도 하는데, 이는 상당할 정도로 로커에 의한 미세요철효과에 기인한 것이다. 이렇듯 사진이 등장한 이후에도 메조틴트의 입지는 결코 줄어들지 않았으며, 나아가 오히려 사진과의 비교를 통해서 그 장르적 특수성이 더 두드러져 보이게 된 감마저 든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특유의 톤과 질감 탓에 가능한 일이다.




이준규_window00905_메조틴트_20×30cm_2009


여하튼 메조틴트의 특징은 이렇듯 뛰어난 재현능력과 촉각적이고 부드러운 질감에 있다. 이러한 특징은 추상적인 화면보다는 구체적인 모티브를 소재로 할 때 더 잘 드러나 보인다. 한편으로 메조틴트는 소위 검은 땀의 소산으로 불릴 만큼 집요한 끈기와 장인정신이 요구되는 만큼 다른 판화에 비해 작가 층이 두터운 편은 아니다. ● 이준규는 이렇듯 메조틴트의 단일 판종에 천착하면서 일관된 전개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몇 안 되는 작가들 중 한 사람이다. 그동안 다뤄온 소재들을 보면 대략 도시적 삶의 환경에 대한 관심, 주로 한강변을 모티브로 한 자연풍경, 그리고 꽃과 같은 자연소재를 거쳐 근작에서의 창문 시리즈로 이어진다. 부연하면, 도심의 왁자한 모습 대신 변두리의 정경에 포커스를 맞춤으로써 현대인의 소외된 초상을 부각하는 것이 확인된다. 나아가 도심의 정경을 포착할 때도 도심의 휘황한 불빛과 그 불빛을 배경으로 서성이는 군상을 대비시켜 현대인의 공허한 일상을 강조하는 편이다. 이렇듯 일상을 재현할 때 여기에 작가의 자기 반성적 사유가 덧입혀져 어떤 서정적 정조(이를테면 공허함이나 쓸쓸함과 같은)를 불러일으킨다.




이준규_window00906_메조틴트_20×30cm_2009


작가의 판화에 사람이 등장하는 것은 아마도 이 시리즈가 유일하지 않나 싶다. 그렇다고 그 배경이나 이로부터의 특유의 정조마저 사라지지는 않은데(그러기는커녕 오히려 더 강화되는 느낌이다), 이를테면 창문 시리즈 중 골목길에 접해 있는 집들을 포착해 그린 판화들이 그렇다. 모티브로 하여금 화면을 가득 채우는 식의 풀 사이즈로 잡은 구도나, 흑과 백, 빛과 어둠의 콘트라스트가 강조되는 편인 이 일련의 판화들에서 도심의 변두리 삶의 환경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또 다른 형태로 변주된다. 정작 사람이 그려져 있지 않음에도 삶의 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은(이를테면 골목 안쪽 어둠 속에서 꼬마가 불쑥 모습을 드러낸다거나, 창문 뒤편 방안에서 라디오 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은) 이 판화들은 작가가 일종의 부재의 미학에 대한 공감을 터득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부재의 힘은 존재의 그것보다 더 강하다. 부재에 의해 암시력이 배가되고, 이때의 암시력은 관객들이 저마다의 심미적 계기를 발휘해 채워 넣어야 할 몫으로 돌려지기 때문이다(동양화의 여백 역시 이런 심미적 계기와 무관하지 않다). 여기에 작가는 유년시절의 기억과 같은 사사로운 경험과 이로부터의 정조를 덧붙이는데, 이로 인해 부재와 암시는 더 강화된다. 이 판화들은 말하자면 정작 빛(존재)보다는 오히려 어둠(부재) 속에 숨어 있을 그 무엇(이를테면 유년시절의 기억이나 상실된 욕망과 같은) 때문에 비로소 특유의 정조를 불러일으킬 수 있게 된 것이다. 원래 빛보다는 어둠이 더 많은 것을 담아내며, 말보다는 침묵이 더 많은 이야기를 하는 법이다.




이준규_window00904_메조틴트_40×30cm_2009


한강변을 모티브로 한 자연풍경 역시 특유의 정조를 불러일으킨다. 그 풍경은 텅 비다 못해 적막하기까지 한데, 흡사 여백 자체가 되려는 풍경, 암시 자체를 지향하는 풍경, 부재를 향해 퇴행하고 있는 풍경, 최소한의 흔적과 자취로만 남겨진 풍경, 마침내는 사라지고 말 풍경 같다. 풍경이 사라진 그 빈 자리에는 아마도 정조(정조 자체로 환원된 풍경의 흔적)만이 오롯이 자리하게 될 것이다. 그 아스라한 풍경이 비록 현실적인 모티브에도 불구하고, 비현실적으로 보이고 초현실적으로 보인다. ● 그리고 꽃과 같은 자연소재를 다루고 있는 판화들은 일종의 꽃 초상화(보다 큰 범주인 사물 초상화에 아우러지는)를 보여준다. 모티브가 되는 꽃 한 두 송이를 제외한 화면 전체가 텅 비워져 있어서 모티브를 부각하고, 시선을 모티브에 집중시킨다. 전통적으로 초상화는 이처럼 맥락으로부터 떼 내어진 초상 자체의 사물성을, 대상성을 즉물적으로 강조하는 식이 아닌가. 해서, 이런 초상화의 작화방식은 불가피하게 초상 자체를 추상화시킨다(이렇게 초상은 불멸성을 획득한다). 어떤 사람, 바로 그 사람이라는 구체적 지시성에도 불구하고 그 맥락이 지워지는 것과 함께 그의 구체적 존재성마저 사라져버린다(그리고 추상화된 존재성을 덧입는다). ● 마찬가지로, 그려진 꽃 저마다의 이름을 헤아릴 수 있을 만큼 사실적인 묘사에도 불구하고 결코 어떤 꽃, 바로 그 꽃(김춘수의 시에서와 같은 나와 의미로 맺어진 꽃)이라는 구체적 사건은 결코 일어나지가 않는다. 말하자면 그저 꽃으로 분류되고 호명될 뿐인(이를테면 백과사전 속 삽화처럼), 꽃이 아닌 꽃의 개념(꽃의 추상)으로 남겨지는 것이다.




이준규_window00903_메조틴트_40×30cm_2009


작가의 다른 판화들이 특유의 정조가 강하게 작용한다면, 이 일련의 꽃 시리즈는 상대적으로 개념적인 성향이 강하다. 그런가하면, 이때의 개념적 성향은 이중적인데, 말하자면 철저하게 개념적이지는 않다. 그림에서의 텅 빈 배경화면 자체를 올려다 본 하늘로 볼 수도 있고, 동양화에서의 여백으로 볼 수도 있고, 관객이 저마다의 심미적 계기를 작동시켜 완성해야 할 암시적인 공간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이처럼 철저하지 못한 개념적 성향은 이때(개념적인 작업)에조차 작가의 정조가 강하게 작용하는 탓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 이중적 성격으로 인해 꽃 시리즈는 독특한 긴장감을 자아낸다. ● 그런가하면 근작에서의 창문 시리즈는 도시적 삶의 환경을 모티브로 한 전작에서의 계기를 이어받고 변주한 것이다. 엄밀하게는 삶의 환경에 대한 관심이 (자연)풍경을 경유해, 재차 도시적 정경에 대한 관심으로 옮아온 것이다. 해서, 근작에서는 삶의 질에 대한 자기 반성적 사유(골목길 연작에서 강조된 것과 같은)보다는 상대적으로 모티브가 놓여진 정경(장소)에 대한 객관적 묘사가 두드러져 보인다. 풍경(자연의 재현)과 정경(도시의 전망)과 경관(순수한 시선 혹은 객관적 시선 혹은 무관심적 시선)이 의미연관을 이루고 있는 것인 만큼 빌라와 아파트 같은 도시적 모티브를 소재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표층에는 풍경의 전형적인 문법이 오버랩 돼 있다.




이준규_window00901_메조틴트_20×30cm_2009


이처럼 도시의 정경과 자연풍경이 중첩된 경우로는 화면의 아랫부분에 건물의 옥상이나 지붕을 배치한, 그리고 화면의 대부분을 하늘로 비워 논 일련의 판화들에서 두드러져 보인다. 말하자면 화면의 아랫부분에 치우친 건물의 구획선은 사실상 전통적인 풍경화에서의 지평선이나 수평선 그리고 공지선에 해당하며, 따라서 마치 현실과 비현실을 가름하는 경계 위에 속해져 있는 것 같은 아득하고 숭고하고 초월적인 심미적 정조를 자아낸다. 그런가하면 원래 자연에 속해져 있던 이 정조가 향수로 축소되고 변질되는 지점이 있는데, 바로 건물의 전면을 클로즈업해 그린 화면 아래쪽에 잔디 혹은 풀을 배치한 판화들이다. 그것들(잔디 혹은 풀)은 자연으로부터 도시에 이식된 것들이기에 그 만큼 더 애틋하고, 더 절실하고, 더 사랑스럽다. 그것들은 현대인이 상실한 자연을 상기시키고, 시뮬라크르나 기약 없는 유토피아로 남겨진 풍경을 환기시켜준다. ■ 고충환




이준규_window00902_메조틴트_20×30cm_2009


창문 이미지로 이어지는 작업의 시작은 블랙과 화이트의 면 분할로부터 시작된다. 블랙과 화이트의 경계선에서 작업이 시작 되어지는 공간에 대한 사색과 여러 이미지들의 제자리 찾기 등 작업기법에 대한 연관성에 중점을 두고 화면이 구성되어진다. 사람들의 삶의 주변 공간들, 도시를 가득 메우고 있는 회색 건축물과 회색의 벽 사이사이를 차지하고 있는 창문들 하나하나는 나의 삶과 함께 숨쉬고 이어져가는 삶의 기억들과 더 나아가 많은 사람들의 중요한 공간으로 대표되리라 생각한다.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건물 위의 커다란 공간들 그 속에 표현되지 않은 보이지 않는 이미지들, 화면전체를 구성하고 있는 회색의 벽들은 창문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정지되어 있는 듯한 건물의 모습들을 나만의 표현 방식으로 하나하나 무언가 연결 지어가고 있다. 때로는 표현 되고 때로는 표현되어지지 않은 주변 사물들에 대해 다시 한번 물음표를 던지고 있다. 언젠가는 누군가가 나타나 회색의 벽을 메우고 넓은 하늘을 채워줄지도 모른다. 나는 그러한 공간들에서 또 하나의 의미를 부여하고 또 다른 중요한 정신으로 작업의 연속성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며, 삶의 경계선에서 다시 시작될 작업 하나하나를 이어나갈 힘을 새롭게 얻어온다. 항상 무언가를 찾아 다니며 빈 공간들에 의미를 부여하며 그것들을 찾아 다닐 수 있는 시간들이 계속 이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 이준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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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O

반경란展 / BANKYUNGRAN / 潘鏡蘭 / painting

2009_0403 ▶ 2009_0409



반경란_N'9-5_캔버스에 연필, 유채_162×260cm_2009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2009 갤러리 쿤스트라움 신진작가 네번째전

관람시간 / 11:00am~06:00pm





갤러리 쿤스트라움
KUNSTRAUM GALLERY
서울 종로구 팔판동 61-1번지
Tel. +82.2.730.2884
www.kunstraum.co.kr






환영으로 읽혀지는 이마고/imago ● 반경란의 작업에서 ‘환영/illusion'은 우리가 현실이라고 정의하려는 무의식의 일부에 불과할지 모른다. 사실 ‘환영/illusion'이라는 단어가 라틴어의 유희를 뜻하는 ’ludus'에서 유래된 점을 입증하듯 반경란의 작업들은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들의 시적 또는 환각적인 유희들로 감추어진 세계의 이면을 무의식으로 표출한다. 따라서 작가는 이성적 판단에 따르는 논리나 상식, 경험들을 진지하게 경계하는지도 모른다.




반경란_N'9-7_캔버스에 연필_90.9×130cm_2009


여기서 우리는 작가가 인식하는 또 하나의 세계 즉, 꿈을 현실로 읽어나가는 일루지온의 세계를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작가의 ‘환영/illusion'에서 보여 지는 무의식의 행위들은 욕망과 정신의 은밀한 충동에 의해 생산된 하나의 상징 덩어리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녀에게 있어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는 그림을 생산한다는 행위에 선행되는 무의식의 유희로 보여진다는 점이다. 쾌와 불쾌가 공존한다는 점에서 프로이드가 말하는 본능적 에너지의 원천이 작가 내면 깊숙이 숨겨져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작가가 어떤 대상을 인식하기 이전, 경험하게 되는 이마고/imago/이미지의 존재를 우리로 하여금 읽거나 인식하게 만든다고 느껴진다. ● 이마고(imago)는 유년기 처음으로 내면화된 내적 대상 내지 무의식적 환상을 지칭 한다는 점에서 작가 반경란의 회화의 상징을 함축적으로 설명한다. 어쩌면 작가에게 있어 이마고/imago/이미지는 오브제/object/대상을 인식하는 관념/idea/무의식으로 지금/instan/현재를 진행하는 동시다발적 해석일 수 있다. 따라서 작가의 시선은 ’환영/illusion'에 반영된 억압된 내면의 갈등을 치유한다는 목적의 인식보다 있는 그대로를 사유함으로 치유되는 이마고/imago/이미지들을 생산하는 점에 고정되어있다. 여기엔 당연히 산고의 고통이 따른다. 하지만 고통은 잠시 지나가는 일루지온/환영이라는 점을 상기시키고 이 점은 견디어내야 한다고 작가는 분명히 이야기한다.




반경란_N'9-2_캔버스에 유채_41×32cm_2009



반경란_N'9-0_캔버스에 유채_41×32cm_2009


반경란의 작업은 어떻게 기억하고 팽창하고 어떻게 소멸되어가?라는 물음을 갖게 만드는 드로잉의 구성들이다.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어떤 정해진 형태 없이 살아 숨 쉬는 그 자체의 생명을 가진 유기체, 그 것이 작가 내면의 또 다른 일루지온/환영의 드로잉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실제로 존재하지만 개념이나 사고로 환원될 수 없는 것들과 조우했을 상황을 화려하거나 현란한 선들로 묘사해 나간다. 이성의 오만과 독선에 질려버린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인식능력의 한계를 끊임없이 돌아보며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몸부림칠 수 있다는 사실의 자각을 반경란의 드로잉에서 우리는 발견한다. 너무도 선명한 선들의 움직임들은 그것이 드로잉의 선이 아니라 칼날의 상징처럼 난도질당하는 행위의 이마고/imago를 상기시킨다는 점에서 괴성으로 뒤덮인 베이컨의 외침보다 더 처절한 지적 유희를 안겨준다.




반경란_drawing21_종이에 연필_16×15cm_2009



반경란_drawing5_종이에 연필_20.5×25.5cm_2009



반경란_drawing9_종이에 연필_20.5×25.5cm_2009


작가는 선험적일 수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이마고/imago와 이미지/image 사이를 오가는 철학적 줄타기를 통해 우리가 현재를 인식하는 삶의 방식들에 의문을 품게 만든다. 또한 그런 생각으로 작가 반경란의 평면을 대하다 보면 회화 이상의 조형성을 지녔다는 사실에 한번 더 그림을 보게 만든다. 이미지의 선험적 경험이 그림을 보는 개개인의 내면에 어떤 충동적인 감정/이미지/lmage들을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작가의 이마고/imago가 그림에 관여하는 이들에게 어떤 형식으로든 작용했으리라는 생각이란 점에서 작가 반경란의 이번 전시 ‘환영으로 읽혀지는 이미지’들은 작가 자신 또는 그것을 보는 모두에게 좀 더 진지 하라는 메시지를 던져준다. 감동이 필요하면 결코 관념을 곁에 두어선 안 된다고! ■ KunstYo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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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없는 곳으로

이호인展 / LEEHOIN / 李浩仁 / painting

2009_0403 ▶ 2009_0423 / 월요일 휴관



이호인_아무도 없는 곳으로_캔버스에 유채_181×227cm_2008





초대일시_2009_0403_금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30am~06:3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선컨템포러리
GALLERY SUN CONTEMPORARY
서울 종로구 소격동 66번지
Tel. +82.2.720.5789,5728
www.suncontemporary.com






익숙한 풍경 속에서 만난 생경함 ● 이호인의 그림에는 넓고 푸른 바다, 파도, 바람 그리고 섬이 있다. 이와 더불어 보일 듯 말 듯 한 형태로 이 자연에 깃든 인간의 흔적이 스미듯 표현되어 있다. 작가는 어느 날 인도양 어딘가의 섬을 조감도적으로 찍은 사진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원시림이 빽빽이 들어선 작은 섬임에도 불구하고, 섬 한 귀퉁이에 오색찬란하게 자리하고 있는 파라솔을 발견하고는 지구상의 어느 곳이든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이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이후, 이호인은 늘 자연과 함께 인간의 흔적을 병치시키는 작업을 해 오고 있다.  




이호인_파란 천막_캔버스에 유채_162×227cm_2009


그의 작업이 담고 있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파란 천막」의 제작 동기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설악산의 광대한 자연 속에서 우연히 발견한 파란색 천막으로 대변되는 인간의 흔적은 아무리 산을 올라도 지워지지 않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마치 픽셀이 부분적으로 나가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한다. 또한, 그의 최근작 「잠자는 사람들」 역시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자연과 맺고 있는 피상적인 관계를 돌아보게 하는 작품이다. 이호인의 작품을 단순한 쪽빛 바다에 둘러싸인 작은 섬 풍경이라거나 혹은 자연의 일우를 클로즈업(close-up)하여 그려놓은 풍경으로만 볼 수 없게 하는 요인이 여기에 있다.




이호인_흰섬_캔버스에 유채_130×162cm_2008



이호인_ghost ships_캔버스에 유채_130×162cm_2008



이호인_versus_캔버스에 유채_130×162cm_2009


그렇다면 이호인은 어떤 이야기들을 이 풍경 속에 담아놓고 있는 것일까? 그의 작업은 관객으로 하여금 높은 곳에서 세상을 내려다볼 수 있게 하는 시선을 줌으로써 마치 피터팬(Peter Pan)이 되어 하늘을 나는 기분이 들게 만들어 주기도 한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자못 몽환적이며 환상적으로 다가오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작업이 우리를 피터팬과 웬디(Wendy)가 도달했던 것 같은 이 세상 저편의 네버랜드(Neverland)로 이끌어 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의 풍경은 동화 속 네버랜드를 꿈꾸게 함과 동시에 우리를 네버랜드로 이끌기 보다는 깨진 픽셀처럼 조화되지 못한 채 놓여있는 작지만 강한 현실의 흔적을 강화시켜 더욱 더 현실을 각인 시키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호인_붉은 숲_캔버스에 유채_130×162cm_2008


한편, 몽환적인 그림 속에서 깨닫게 되는 강한 현실감이라는 이와 같은 생경함은 자연의 한 부분을 깊숙이 관찰해 들어감으로써 산림의 깊은 내면을 드러내기 시작한 근작의 경우에도 발견할 수 있다. 산림의 일부를 클로즈업하여 그려낸 그의 작품들은 형형색색의 이름을 알 수 없는 식물들이 뿜어내는 빛으로 반짝이고 있으며, 호화로운 색채의 향연으로 빛이 산란하고 있는 숲속에 들어선 듯한 느낌을 주기까지 한다. 부분적으로 드러나는 표현적인 붓질이나 흐르는 물감의 흔적에도 불구하고 그의 근작이 주는 이러한 화려함과 장식성은 무화되지 않는다. 그러나 화려함에 지쳐 장식적으로까지 보이는 숲속 풍경에서 조차 작가는 허구와 실재, 자연과 문명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틀거리를 교묘히 병치함으로써 그 구분을 해체하고 있다. 그리고 그 모호한 경계의 접점을 통해 허구와 실재, 자연과 문명이라는 것이 서로 이율배반적인 듯 보이지만 결코 서로가 서로에게 없어서는 존재할 수 없는 조건들임을 암시하고 있다. 비록 서로 어울리지 않고 생경하게 보인다 하더라도 허구는 실재와의 관계 속에서 자연은 문명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의 의의를 부여 받는다고 해야 할까? 이들의 익숙하지만 생경한 동거가 그의 화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 기혜경




이호인_lovers_캔버스에 유채_181×227cm_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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