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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omepage]님께서 남기신 글 (2009-03-13 16:25:29, Hit : 595)
전시 3.13



Post Visualization

제리율스만展 / Jerry N. Uelsmann / photography

2009_0312 ▶ 2009_0414 / 월요일 휴관



제리율스만_Shadow Dream_젤라틴 실버 프린트_20×16cm_2004
ⓒ Jerry N. Uelsmann / 한미사진미술관 소장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30am~06:00pm / 월요일 휴관




트렁크갤러리_TRUNK GALLERY
서울 종로구 소격동 128-3번지
Tel. +82.2.3210.1233
www.trunkgallery.com






트렁크갤러리의 2009년 3월 전시는 아날로그 합성사진의 세계적인 거장 제리 율스만의 작품을 전시한다. 전시 작품들은 현재 한미사진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제리 율스만 작품 중 일부로 2007년 한미사진미술관에서 개최되었던 전시작품들을 트렁크갤러리에서 다시 한 번 전시하게 되었다. 트렁크갤러리는 2009년부터 컨텐츠 다양화로 해외작가들까지로 확대하려한다. Jerry N. Uelsmann”전시는 그 처음이 될 것이며 앞으로 해외 작가들의 작품을 적극 선보이는 기획을 조심스럽게 기획해 내려 한다. 한국 미술시장의 다양한 컨텐츠 확보와 중요작가프로모션을 감당하고 있는 트렁크갤러리의 또 다른 활동이 주목되어지리라 확신한다.




제리율스만_Untitled (Clasping hands and rocks)_젤라틴 실버 프린트_20×16cm_1989
ⓒ Jerry N. Uelsmann / 한미사진미술관 소장



제리율스만_Untitled (Chair in room with cloud)_젤라틴 실버 프린트_20×16cm_1998
ⓒ Jerry N. Uelsmann / 한미사진미술관 소장



제리율스만_Untitled (Silhouette angel)_젤라틴 실버 프린트_11×14cm_1992
ⓒ Jerry N. Uelsmann / 한미사진미술관 소장



제리율스만_Untitled(Quentin massys painting in street)_젤라틴 실버 프린트_11×14cm_2001
ⓒ Jerry N. Uelsmann / 한미사진미술관 소장


Post Visualization - Jerry N. Uelsmann ● 최첨단의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한국, 현재 국민의 40%가 디지털 카메라를 이용한다는 보도이다. 조작이 쉽고 빠르며, 컴퓨터의 포토샵 프로그램으로 언제든지 이미지의 조작이 무한 가능한 시대이다. 하지만, 1950년대 작업을 시작하였던 제리 율스만의 작업은 수 십대의 확대기와, 여러 장의 필름을 손수 합성하는 순수한 아날로그적 포토몽타주 형식으로 그 자신을 그 시대 주목 받게 한 모더니즘 형식완결의 대표성 갖는다. 이 작업들은 비례충격에 의한 초현실주의에 근거하고 있다. 스트레이트 한 사진이 중심이던 시대, ‘Post Visualization / 후시각화' 이라는 미학적 근거에 의한 작가의 이미지 재구성의 방식 착안과 이 개념, 그리고 그 테크닉은 당시 사진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었다. 자연, 인간, 신화적 이미지 등. 다양한 소재, 그 무한한 상상력, 그 초현실성까지의 그 뛰어난 기술력은 그만의 시각적 놀이였고, 그 결과물들은 곧 그의 창조세계이다. 디지털 합성 기술은 아마도 제리 율스만의 조합인화법에 근거해 프로그램화 하였을 것이 분명하다. 또한 그의 후시각화, 그 아날로그 합성인화기술은 오늘의 포스트모던 아트웍의 테크니컬 한 작업들에 그 기초를 분명히 배우고들 있다. 이번 트렁크 갤러리의 전시는 현재 활발히 작업하는 제리 율스만의 80년대 이후의 작업들로 한미사진미술관 전시를 놓친 여러분들에게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 트렁크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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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록展 / LEEJEONGLOK / 李政錄 / photography

2009_0213 ▶ 2009_0315 / 월요일 휴관



이정록-private sacred place-사적성소#1-3_C타입 라이트젯 프린트_120×160cm_2008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이미지 속닥속닥 Vol.071119e | 이정록 사진展으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pm~06:00pm / 일요일_12:00pm~06:00pm / 월요일 휴관




공근혜갤러리_GALLERY KONG
서울 종로구 팔판동 137번지
Tel. +82.2.738.7776
www.gallerykong.com






이정록은 미국 유학시절 제프 와이즈(Jeff Weise R.I.T교수 겸 뉴욕에서 현역으로 활동하는 사진작가)에게서 현대미술로서의 사진과 설치 작업을 배웠고 풍경사진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안셀 아담스의 마지막 제자인 윌리 오스트만(Willi Osterman)에게서 흑백사진을 배우며 오랜 시간 동안 차분히 사진 작가로서의 실력을 다져 왔다. 1998년 그는 첫 개인전에서 「남녘 땅」 이라는 시리즈물의 전통흑백사진을 발표했다. 작품의 배경이 된 호남의 들녘은 그의 고향이자 유년의 추억과 애정이 묻어있는 곳으로 이 땅의 산천을 순수하게 있는 그대로 담아내는데 주력했다. 미국 유학 중이던 2003년에는 「aquarium」시리즈의 컬러 사진들을 처음 선보였으며 이후로 기법과 색채에 대한 끊임없는 연구를 거듭하여 2007년 「신화적 풍경」, 2008년 「사적성소」 등의 시리즈로 현장 설치를 시도한 작품을 발표 하면서 본격적인 메이킹 포토 작가대열에 진입하게 되었다.




이정록-private sacred place-사적성소#1-5_C타입 라이트젯 프린트_120×160cm_2009



이정록-남녘 땅#9_젤라틴 실버 프린트_50×60cm_1998



이정록-남녘 땅#7_젤라틴 실버 프린트_50×60cm_1997


공근혜갤러리와 함께 대구 사진 비엔날레의 리뷰어로 참여했던 휴스턴 미술관 사진담당 큐레이터 앤터커(Anne Wilkes Tucker)는 “최소한의 연출로 전혀 다른 느낌의 풍경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며 이정록의 작품들을 극찬하였고, 스페인 Photo quai 미술관 객원 큐레이터이자 세계적인 사진비평가 알레한드로 카스테요테(Alejandro Castellote) 역시 그에게 찬사를 보내며, 내년에 있을 스페인 미술관 전시에 추천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이정록-Mythic Scape10_ Dolmen-신화적 풍경_고인돌#1_C타입 라이트젯 프린트_90×120cm_2006



이정록-Mythic Scape13_Tree of life#1-신화적 풍경_생명나무_C타입 라이트젯 프린트_120×160cm_2007


이정록은 대구사진 비엔날레를 통해 공근혜갤러리 선정작가가 된 것뿐만 아니라, 국내외로 좋은 평을 받으며 그의 상상력만큼이나 무한한 가능성을 펼쳐 보일 수 있는 기회들을 얻게 되었다. 그의 사진은 멋있는 사진의 틀을 벗어나 영원히 자유로운 세계에 다다른 듯한 느낌을 준다. 마치 신의 눈으로 바라보는 인간의 세계인 듯. “단순히 내가 바라본 특정한 모습의 풍경 그대로 재현하기 보다는 이 풍경을 매개로 특정장소나 사물에 대한 영적인 느낌이나 상상들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신화적 풍경」작가 노트 中) ● 이번 전시를 통해 앞으로 이정록 작가가 한국뿐만 아닌 세계 현대사진계에 미칠 영향력을 가늠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 공근혜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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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os

김혜란展 / KIMHYELAN / 金惠蘭 / painting

2009_0218 ▶ 2009_0317 / 공휴일 휴관



김혜란_chaos & frustration #13_캔버스에 유채_162×130.3cm_2008




초대일시_2009_0218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09:30am~07:00pm / 일요일_10:00am~06:00pm / 공휴일 휴관




표갤러리 서울 신관_PYO GALLERY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258-79번지
Tel. +82.2.543.7337
www.pyoart.com






표 갤러리에서는 우리의 삶에서 불가항력의 힘인 죽음의 경계 앞에서 느끼는 혼돈과 모호함을 작가 특유의 회화 기법으로 담아내는 김혜란의 개인전을 마련했습니다. 작가는 개인의 경험을 통해 느꼈던 죽음에 대한 감정과 생각을 시각의 잔상에서 사라져가는 듯한 인물의 형상을 통해 표현하고 있습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인 현존과 부재 사이 의 모호한 혼돈의 에너지를 투영하고 있는 작가의 작품은 생명과 죽음, 순간과 영원에 대한 철학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이번 전시를 통해 매일매일의 바쁜 일상 속에서 잊기 쉬운 삶과 죽음의 본질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작가 김혜란의 독특한 회화세계를 감상하는 기회를 가져보시기 바랍니다. ■ 표갤러리 서울




김혜란_chaos & frustration #31_캔버스에 유채_162.2×117cm_2008


호흡 -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 호흡한다는 사실은 나로 하여금 매순간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서 있음을 인식하게 한다. 거의 언제나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그 사실을 잊고 있었으면서도 '호흡'에 대해 생각하게 되면 깜짝 놀라 살아있음을 새삼스럽게 깨달으며 한숨을 돌리는 것이다. 누군가 죽음의 경계선을 넘어보았다면, 육체를 이탈하는 그 담 너머 벌어지는 무엇인가를 체험했다면, 그 호흡의 의미는 더욱 절실하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이어가는 시간이 흐르며 천천히 죽음을 향해 갈수록, 일찍이 죽음을 엿보았던 체험에 대한 기억은 역설적으로 서서히 흐려져, 다시금 호흡한다는 사실조차 거의 잊고 지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 체험에 집착해서도, 흐려져 가는 기억을 당연하게 여겨서도 안 된다. 다만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살며 죽는 것이다. 죽음은 삶과, 삶은 죽음과 이어져 있다. 빌 비올라(Bill Viola)가「해변 없는 바다」(Ocean without a shore)(2007)에서 인용했던 세네갈의 시인 비라고 디롭(Birago Diop)의 시가 나에게 깨우쳐 주었던 것처럼.




김혜란_chaos & frustration #32_캔버스에 유채_162.2×117cm_2008


호흡이 끊어진 듯, 사지를 통제하는 의식의 기능을 이미 잃은 듯, 신체는 홀로, 또는 동반자와 함께 널브러져 있다. 이미 죽은 것일까. 혹은 절망하다가 심신이 지쳐 잠든 것일까. 아니면 편안하고 행복한 휴식 상태를 설마 내가 오해하고 있는 것일까. 알 수 없다. 나는 얼굴 표정을 읽을 수도, 사태를 파악할 수도 없어서 “모습이 너무 희미하니까…”라고 핑계를 대곤 시선을 돌리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현장과 신체의 자세는 강력하게 나를 사로잡아 몰입시키는 마력이 있다. 다만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내 눈 앞에 그 모습을 들이대어 눈을 뗄 수 없게 하는 이가 ‘절망’과 '죽음'과 ‘평화’를 아는 사람임에 틀림없고, 나와 더불어 그것에 대해 생각하기를 원하는 것 같다는 사실 뿐이다. ● 아니나 다를까, 그 광경과 색채의 마력이 충격적이었다고 말했던 내게 김혜란은 죽음의 경계를 넘었던 자신의 체험, 그리고 혼돈(chaos)과 좌절(frustration)에 대해 조용히 말했다. ● 역시 그랬다.




김혜란_chaos & frustration #20_캔버스에 유채_210×130cm_2008


체험은 자신의 삶을 깊게 하며, 삶을 통찰하는 눈을 뜨게 하며, 그 결과는 예술로도, 일상의 생활로도 결코 숨겨질 수 없다. 그러나 그 체험의 깊이를 공유하며 또 다른 삶의 깊이를 더욱 깊게 할 수 있는 자에게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세미한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는 능력이 주어져야 한다.(‘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누가 14:35) 비라고 디롭(Birago Diop)처럼 불의 소리, 물의 소리, 우주의 소리를 들을 귀가 있어야 한다.




김혜란_chaos & frustration #37_캔버스에 유채_210×130cm_2009


그 때, 우리는 김혜란의「chaos & frustration」시리즈에서 무심한 바람결을 타듯, 시각의 잔상에서 흐려져 가는 고통과 좌절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서히 희석되는 동시에 역설적으로 천천히 죽음을 향해 다가가고 있는 우리 자신을 용인하게 된다. ●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의 회화에서 충분히 활용되었던 사진과 회화의 경계 문제, 순간성과 지속성, 그리고 시간의 흐름과 기억에 관한 생각들을 떠올리며 나는 생각한다.




김혜란_chaos & frustration #39_캔버스에 유채_210×130cm_2009



김혜란_chaos #40_캔버스에 유채_150×150cm_2009


예술에 있어서 한껏 높아진 모든 지식과 논리와 철학 이전에 우리에게 준비되어야 할 것은 삶에 대한 진정한 깊이와 직관의 통찰이라고. 그것이 없으면 어떤 감동에 관한 논의도, 예술과 인간에 대한 사랑에 관한 말도 허사라고. 그것은 고통과 좌절을 받아들이며 서서히 죽음을 향해 갈지라도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호흡’을 멈추지 않게 한다고. ■ 김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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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데기 전(傳)

박성휘展 / PARKSEONGHWI / 朴星輝 / painting

2009_0226 ▶ 2009_0317



박성휘_바리데기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1×73cm_2009




2009_0226 ▶ 2009_0310
초대일시_2009_0226_목요일_06:00pm

관람시간 / 09:00am~06:00pm


일곡갤러리_ILGOK GALLERY
광주광역시 북구 일곡도서관길 82 일곡도서관 내
Tel. +82.62.510.1631
ilgoklib.bukgu.gwangju.kr




2009_0311 ▶ 2009_0317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09:30am~06:30pm


갤러리 라이트_gallery LIGHT
서울 종로구 인사동 147번지 미림아트 2, 3층
Tel. +82.2.725.0040






THE WOMEN STORY-바리데기 전(傳) ● 수천수백년 동안 어떤 이야기가 살아서 우리에게 전해 내려오는 이유는 그것이 ‘사실’보다 더 ‘진실’하기 때문이다. 바리데기 신화가 우리 땅에서 가장 유력한 모습으로 끊임없이 재탄생되는 이유는 현실과의 닮음, 여성이 스스로를 신화 속에 투사해야 견딜 수 있었던 현실 때문이었다. ● 내가 신화와 조우할 수 있었던 건 여행지의 한 당산목 아래서 기도를 올리는 여성을 만난 때문이었다. 나처럼 여행 중이었던 그녀는 아이를 기원하고 있었다. 온갖 첨단 과학이 우주를 날아다니는 이 21세기에 당산나무 아래서 자신의 소망을 기원하는 여자라니! 그 원시적인 풍경은 나에게 곧장 신화로 다가섰다. ● 하늘과 땅, 지하를 연결해 주는 젖과 꿀이 흐르는 생명나무(우주나무), 세계수라는 시베리아 사하족의 신목(神木)이 있다. 이 신목은 우리의 서낭당 신목과 같은 의미라 할 수 있다. 바리데기 여신과 세계수의 결합이 바리수이다.




박성휘_물을 걷다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162cm_2009



박성휘_바리수-실을 엮다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7×130cm_2009


이 땅의 모든 여성은 바리데기이다. 어머니와 그 딸들은 온갖 색실로 한 땀씩 바느질을 하듯 실제 삶에서 이룰 수 없었던 삶과 꿈을 바리데기에게 실어 신목과 연결시켰다. ● 그리스 신화의 카론은 망자를 배에 태워 저승으로 인도한다. 망자를 태운 배를 타고 황천수를 건너 서역국에 이르는 우리의 바리데기 역할이 서양 신화에도 고스란히 존재한다. 이렇듯 세계의 신화에는 바리데기 신화와의 공통적인 요소가 있다.




박성휘_바람부는날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89cm_2009


그 신화의 닮음성은 곧 인간의 삶과 꿈이 닮은 것이라는 의미인바 나는 그 점에 주목했다. ● 세상에 나자마자 버려진 존재였으나 스스로를 일으켜 세우는 바리데기. 밥하고 빨래하고 남자를 사랑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며 스스로 모든 생명의 어머니가 된 여자. 때문에 나의 이번 작업에 나타난 소재들, 배와 실꾸리와 꽃과 방울 생명수병 등은 모두 바리의 삶의 도구이자 꿈이며 현실을 사는 여성들의 삶의 모습에 대한 상징이다. 수천 년의 시간을 흘러 나에게 다가온 바리데기는 내 안에 뿌리를 내리고 생명의 나무의 바리수로 뻗어나갈 것이다.




박성휘_봄을 피우다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5×53cm_2009


바리데기 신화 ● 옛날 한 옛날, 불라국에 오귀대왕과 길대왕후가 계시었다. 대왕내외가 해님, 달님, 별님, 물님, 불님, 흙님 등의 공주를 줄줄이 낳고 기가 막혀하다가 온갖 치성을 드린 끝에 휘황하고 상서로운 꿈을 꾸며 다시 수태를 했는바, 낳고 보니 또 딸이었다. 대왕은 막둥이 이름을 지어주기 싫은 건 물론이고 곁에 두기도 싫어 서해바다 용왕께 진상해 버리라 명하고 핏덩이는 버려진다. 이름 하여 바리데기. ● 비리공덕할아비와 할멈 손에 건져져서 자라게 된 바리데기는 열다섯 살이 되어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다. 죽을병에 걸린 친부 오귀대왕 때문이다.




박성휘_바리수-달빛 속에서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2×130cm_2009


서천서역국 동대산에서 솟아는 약물을 먹어야만 낫는 병에 걸린 오귀대왕이 약물을 찾으러 갈 사람을 백방으로 구하다 급기야 버린 딸 바리데기까지 떠올린 것이다. 하여 부모 상봉을 하게 된 바리데기는 군말 없이 서천서역국, 저승을 향해 길을 떠난다. ● 바리가 서천서역국으로 가는 길을 모르니 길에서 사람을 만날 때마다 묻게 되는데 한 마디 대답을 듣기 위해서 치러야 하는 값, 노동은 매번 험난하다. 자갈밭을 고운 흙밭이 되고 갈고, 산더미 같은 빨래를 검은 것은 희게 빨고 흰 것은 검게 빨고, 맑은 물이 뚝뚝 들을 때까지 숯을 씻고, 광활한 들판의 풀 한포기 뽑을 때마다 나무아미타불을 외야 한다.




박성휘_바리수-달빛 속으로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2×130cm_2009


온갖 지옥을 경험하며 산 넘고 바다 건너 마침내 서역국 동대산에 도착하니 산지기 무장승은 바리에게 길 값, 물 값, 구경 값으로 몸 공양까지 바란다. 혼인하여 석삼년을 함께 살며 아들 삼형제를 낳으면 그때 서천의 신기한 묘약을 주겠다는 것이다. ● 서천에 이르기까지 갖은 지옥을 거치며 이승에는 물론이요 저승에도 공짜란 없음을 충분히 터득한 바리는 무장승과 혼인한다. 그로부터 석삼년 무장승을 위해 밥 짓고 빨래하고 아들 삼형제를 낳는다. 아홉 해가 지난 뒤 드디어 뼈살이 꽃, 살살이 꽃, 피살이 꽃, 숨살이 꽃, 혼살이 꽃을 구하고 약물을 얻게 된 바리는 아들들과 더불어 불라국으로 귀환한다. 아버지 오귀대왕의 숨이 이미 끊긴 뒤였으나 바리데기는 서천에서 구해 온 꽃들과 약물로 아버지를 되살린다. 그리고 불라국의 절반을 떼어주겠다는 부친의 제안을 마다하고 세상에서 버려져 떠도는 영혼들을 저승으로 인도하는 오귀신으로 거듭난다. ■ 박성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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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en City

김준기展 / KIMJUNKI / 金埈基 / installation

2009_0311 ▶ 2009_0317



김준기_Seen City 0911_Silver Mirror, Sheet, LED, Light Box, 고분자수지 접합_120×71.1cm_2009
Light On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이미지 속닥속닥 Vol.070620d | 김준기 개인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9_0311_수요일_06:00pm

벨벳 인큐베이터 연례공모 프로그램

후원_한국문화예술위원회-아르코 영아트 프론티어 프로그램
협찬_(주)자산 유리-보오미 거울_(주)조양 글라스

관람시간 / 12:00pm~08:00pm / 마지막 날 화요일(17일)은 낮 12시까지





벨벳 인큐베이터
VELVET INCUBATOR
서울 종로구 팔판동 123-3번지
Tel. +82.2.736.7023
www.velvet.or.kr






아날로그적 감성의 회복을 희구하는 디지털 시대의 도시인의 초상 ● 김준기는 현대적 삶의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는 도시의 생태와 그 속에서 생활하는 인간의 모습에 관심을 갖고 이를 관찰하며 작업해왔다. 김준기에게 도시는 자신의 창작의 근거지이자 생활과 사색의 일부분이지만 그 공간은 관찰과 분석의 대상으로서의 객체화된 공간이 되기도 한다. 작가는 그러한 도시에 몸담고 생활하며 관찰하고 사색하는 과정을 거쳐 작품을 잉태해낸다. 그렇지만 도시에서 생활하며 작품의 모티브를 채집하면서도 작가는 항상 스스로 도시 공간의 주체로서 그 속에서 타자와 관계를 맺고 호흡하는 자신을 들여다보기보다는 도시 공간에서의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관찰자로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대상을 바라보는 편이다. ● 도시를 구성하는 특징 가운데 하나라고 볼 수 있는 현대식 건물이나 지하철과 버스와 같은 대중교통 수단의 유리창과 거울을 매개로 생성되는 반사와 투영의 이미지들이 오늘날의 도시공간에 넘쳐난다. 그들의 중첩과 간섭에 관심을 가지고 이러한 이미지들을 화면에 담는 작업을 해온 김준기가 이번에 초점을 두는 것은 좀 더 정리된 화면이며, 그 화면 속에 색채를 보다 적극적으로 적용시킨 이미지들의 조형성이다. 이제까지 그의 화면에는 거대도시의 전형적인 상징인 고층 건물과 자동차 등이 인파와 뒤섞인 모습이 드러나기도 하고 때로는 그 도시의 이면의 소소한 모습이 인상적으로 표현되기도 하였었는데 이번 전시에서는 전자보다는 후자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셈이다.




김준기_Seen City 0910_Silver Mirror, Sheet, LED, Light Box, 고분자수지 접합_120×71.1cm_2009
△ Light Off / ▽ Light On / ▽▽ Light On


김준기는 자신에게 순간적으로 다가온 이미지들을 중첩시켜 구성된 화면 안에서 존재 간의 관계와 사고에 주목하고 자신의 작품을 바라보는 관람자의 입장에 따라 가변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열려진 태도를 보여주었었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작품들이 이전의 전시에 출품되었던 작품들과 일관된 맥락을 유지하면서도 차이를 보이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작가가 이전보다 도시 공간의 외형적인 이미지에 대한 관심을 줄이고 그보다는 도시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행동을 통해 그들의 내면을 읽는 데에 더욱 관심을 쏟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작품의 특징은 지극히 평범한 시선으로 바라본 도시의 단상이 화면에 중첩되어 다층적 이미지의 변주와 하모니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 김준기는 작품의 주제에서 일관성을 유지하는 만큼 작품 재료에 있어서도 일관되게 유리와 거울을 주요 재료로 다루고 있다. 작가는 작품 활동 초기부터 유리와 거울 등을 중요한 재료로 사용하여 왔는데, 거울은 원래 자아성찰의 도구이면서 때로는 허영의 상징이었으나 그의 작품에서의 거울은 자아와 대상을 비추고 서로를 엮어내는 표현과 기록의 마당이며 실제와 그 허상으로서의 그림자, 그리고 다시 그 허상의 반사와 중첩이 이루어지는 다중적 의미와 관계를 형성시켜주는 장으로서 인식되고 있다. 김준기가 다루는 이미지는 반사와 투사를 거치면서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고 결과적으로 자아 정체성의 혼란을 유발하는 현대인의 초상을 보여주는데, 이번 작품에서 김준기는 이러한 정체성의 혼란을 현대인의 좌절과 이에 따른 일회성 소비와 욕망의 반복적 현상으로 연결하여 해석한다. ● 이번 전시에 출품된 작품에서 김준기는 유리와 거울이라는 재료를 LED 발광 패널과 시트지 등과 결합시켜 보다 미묘하고 독창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있다. 작가가 그의 작품에서 도입하고 있는 거울과 유리는 현대적이면서도 차가운 속성을 가졌으며 시각적 표현 소재로 가공하기가 어렵고 자칫하면 산산이 깨져버릴 수도 있는 재료인데, 작가는 이러한 민감하고 다루기 힘든 재료적 속성에도 불구하고 유리에 대한 탐구를 계속 해나가고 있다. 이러한 유리에 날카로운 칼로 컷팅한 시트지로 표현된 이미지와 포토샵 처리된 디지털 이미지를 바탕으로 작가가 직접 그린 이미지들을 중첩시켜 작품이 완성된다. 이렇게 제작된 작품에 배후로부터의 조명을 가미하여 조명이 켜진 상태에서 나타나는 이미지와 조명이 꺼진 상태에서 드러나는 이미지 사이에는 표면 반사와 이미지 투과의 정도가 달라짐으로써 한 작품 안에서 복수의 이미지가 담기게 된다. 이렇게 가변적인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은 작가의 표현을 따르자면 도시 공간에서 활동하는 현대인의 실상과 욕망의 한계를 극대화시켜 제시함으로써 궁극적으로 그들이 새로운 자아의 성찰에 이르게 하려는 것이다.




김준기_City-holic 0909_Silver Mirror, Sheet, LED, Light Box, 고분자수지 접합_106.7×60.8cm_2009
◁ Light Off / ▷ Light On



김준기_Seen City 0908_Silver Mirror, Sheet, LED, Light Box, 고분자수지 접합_106.7×60.8cm_2009
◁ Light Off / ▷ Light On


김준기의 작품은 재료적 차별성과 함께 주제 면에서도 몇 가지 특징을 보여준다. 우선 그의 작품 속의 인물이나 오브제들은 관람객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려는 의지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럼으로써 도시의 익명성과 개체간의 단절 등의 감정이 잘 드러난다. 이번에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대부분도 지하철이나 공원같은 공공의 장소에서 외부와의 소통을 단절시킨 채 휴대전화나 게임기와 같은 디지털 기기를 손에 든 상태에서 그곳에 몰두하며 시선을 집중하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 작품이 대부분을 이룬다. ● 김준기가 포착한 인물들은 대부분 익명성을 띤다. 그리고 이러한 인물들은 이미지와 컨텐츠를 소비하는 현대사회의 주체로서 도시 공간에서 군중 속의 소외를 느끼며 디지털 이미지가 만들어 내는 허구적 현실에 소모적으로 매몰되어가는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한 이미지에서 작가는 현대인들의 기대와 좌절, 긴장된 삶에서의 피난처로서의 가상의 공간에 대한 탐닉 등을 읽고 있으며 그러는 가운데 관람자들이 자신이 속한 공간의 의미와 존재감을 확인하고 자신을 그 속에 투영시켜 바라보도록 만든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을 통해 작가는 현대적 도시문화가 역설적으로 상기시켜주는 아날로그적 감성의 회복을 희망하고 있다. ■ 하계훈




김준기_Seen City 0913_Silver Mirror, Sheet, LED, Light Box, 고분자수지 접합_90×90cm_2009_Light On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각자의 가치관과 이해를 포함하고 있다. 보는 것은 선택이며 이 선택에 따라 우리가 보는 것을 이해 할 수 있듯이 이번 작업에서 나의 시선은 이미지가 현실을 대신하는 시대, 이미지와 콘텐츠를 소비하는 도시에 살고 있는 현대인에게 고정되어 있다. 이번 작업에서 주목하는 것은 표피적이고 현상적인 현실의 모습 속에서 자기애정과 자기유희에 몰입된 디지털 세대의 소비와 욕망, 그리고 그것의 일회성에 관한 것들을 생각해보는데 있다. 디지털 홀릭 상태의 현대인들을 관찰하고 탐구하는 과정에서 출발하여 확대된 이번 작업이 디지털화 되어가는 현대인의 삶속에서 나타나는 욕망의 한계와 일회적 속성을 확인하고 자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길 희망한다. ■ 김준기




김준기展_벨벳 인큐베이터_2009



김준기展_벨벳 인큐베이터_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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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tremely Ordinary

임주연展 / YIMJUYOUN / 任炷姸 / painting.video

2009_0311 ▶ 2009_0317



임주연_빨간줄바지_캔버스에 유채_112.1×162.2cm_2008




초대일시_2009_0311_수요일_06:00pm

2009 갤러리 쿤스트라움 신진작가 두번째, 임주연展

후원_서울특별시_한국문화예술위원회_(재)서울문화재단

관람시간 / 11:00am~06:00pm





갤러리 쿤스트라움
KUNSTRAUM GALLERY
서울 종로구 팔판동 61-1번지
Tel. +82.2.730.2884
www.kunstraum.co.kr






나의 작업의 출발은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옷가지의 형태에서 많은 것을 도출해낼 수 있다는 막연한 가능성에서였다. 나는 회화와 복제미디어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며 카메라가 잡아내는 연속적인 찰나 혹은 영상 스틸컷을 회화를 통해 표현한다. 개인적인 일상 속에서 이미지를 만들고, 자기내면과 혹은 타자와의 소통을 시도함으로써 자아라고 부를 수 있는 진정한 실체와 존재에 대해 생각해본다. 일상에서 기록된 이미지를 통해 시간에서 나타나는 심리적 공간을 보여주고 혹은 별개의 새로운 심리적 공간을 형성하며, 일상에 내제한 삶의 존재론적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 사진으로 기록된 이미지는 신체의 일부를 제한된 시각으로 보여주며 일종의 시간성을 지닌 각각의 이미지들은 짧은 시퀀스를 이룬다. 옷은 나에게 ‘몸’을 의식하게 만들고, 자의식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러한 자기 투사적 오브제인 옷과 함께 드러나는 몸의 부분적 이미지는 내 작업의 행위자인 동시에 소재로서 나타나고 있다. 더 이상 상징적인 매체가 아니게 된 몸은 그 자체로서 사진과 비디오를 거쳐 회화 속에 자리잡는다. 몸은 언어와 함께 상호작용을 위한 매개체이다. 우리는 몸을 통해 습득된 행동과 거기에 입혀진 옷으로 사회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게 된다. 이러한 상호작용의 의식들을 통해 일상의 본질을 드러낸다. ■ 임주연




임주연_반스타킹_캔버스에 유채_각 97×130.3cm_2007



임주연_회색면티_캔버스에 유채_90.9×72.7cm_2008


일상-기억의 단상 ● 일상은 우리가 생각 없이 보내게 되는 소소한 기억들의 기록을 표현해내는 평이한 시간이라고 작가 임주연은 이야기한다. 여기서 작가가 이야기하는 일상의 기억들이 어떤 기호에 의해 기록되어진 사진보다 더 사실적으로 느끼게 하는 이유는 현실을 보다 더 사실적으로 그려서가 아니라 현실이라고 믿게 만드는 기호들을 좀 더 유효하게 기록해서 일 것이다. ● 우리는 재현된 그림이 회화로 읽혀지는 모방의 진정한 의미가 그림을 평면적 시각으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그림에 무엇이 있다고 믿게 만드는 상징의 과정이라는 점에서 작가의 기록이 일상보다 더욱 사실적 사회성을 갖게 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 임주연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절제된 언어들 속엔 위장과 변신으로 과장된 무엇이 있다고 믿게 만드는 어떤 행위가 존재한다.




임주연_회색양말Ⅱ_캔버스에 유채_65.1×90.9cm_2008



임주연_파란면티_캔버스에 유채_65.1×90.9cm_2008


그것은 작가가 이야기하듯 무의미하게 반복되어지는 일상적인 탈의(脫衣) 나 탈피(脫皮)가 의미 없지 않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왜냐하면 행위를 인지하는 대상으로서의 해석들은 행위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다른 기호/의미로 전달되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가가 의식하지 않고 벗는 탈의행위는 행위자 혼자만의 상징적인 공간에서 이뤄지는 무의식적 행위인 것이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탈피의식으로 이뤄내는 공간은 어떤 희열과 구속으로부터 자신만의 비밀스런 자유가 공존하는 공간으로 인식되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존재하지 않는 비현실적 공간으로서의 탈의(脫衣)는 무의식속에 잠재돼 있는 자기애의 표출로 상징된다. 이점은 또한 현실을 바라보는 일상과 표현되어진 대상의 시선이 다르지 않다는 점에 있어서 의미하는 대상이 동일할 수밖에 없는 중첩된 자아의 관계를 이야기한다.




임주연_청바지_캔버스에 유채_80.3×116.7cm_2008


따라서 보이는 것으로 사유를 하고 보여 지는 것으로 욕망을 인식한다는 점에서 임주연의 작업이 사유하는 주체로서 뿐만 아니라 욕망하는 주체로서의 일상을 재현해 낸다는 점은 명확해진다. ● "공간이나 사물을 그 자체로 바라보게 되었을 때 겪는 낯섦이 신선하게 다가왔다"라는 이번 임주연의 전시『Extremely Ordinary』로 만나는 일상들은 그림에 관여하는 개개인의 현상들이 작가의 거울에 반사되는 단상으로 비춰 진다는 점에서 단순함 그 이상의 인식으로 다가올 것이다. 일상, 그 평이함이 주는 기억의 단상 속에 작가의 공허한 시선과 마주하는 기억이 되길 바라면서! ■ K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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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 river flows through the people

표세권展 / PYOSEGWON / 表世權 / photography

2009_0311 ▶ 2009_0317



표세권_남여고등학생_잉크젯 프린트_50×50cm×2_2009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표세권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9_0311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pm~07:00pm




가나아트 스페이스_GANAART SPACE
서울 종로구 관훈동 119번지 3층
Tel. +82.2.734.1333
gana.insaartcenter.com






흘러도 흐르지 않는 강이 있다. 다양한 삶을 고이 담고 있는 한강이다. 한강은 일상 공간으로서 서로 다른 표정이 마주치는 곳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야기를 품고 한강으로 온다. 때로는 낡은 지갑처럼 익숙해 보이고 때로는 처음 접하는 외국어처럼 낯설게 느껴진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서 말을 걸어 보기로 했다. 서로의 이야기를 포개어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어느덧 서로가 서로의 일상이 된 지금 우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다. ■ 표세권




표세권_운동하는 여자_잉크젯 프린트_50×50cm×2_2009


서울의 한강 또는 삶 속의 한강 ● 표세권의 사진들은 한강을 보여준다. 그런데 한강을 주제화 하는 그의 사진 형식은 특별하다. 그의 사진들 안에서 한강은 두개의 오브제로 짝 지워져 재현된다. 우선 풍경과 인물이 짝 지워져 있고 인물들 또한 혼자가 아니라 쌍으로 복수화 되어 있다. 외적으로는 풍경사진과 인물사진의 장르가 중복되고 내적으로는 피사체 구성이 복수적이라는 점에서 표세권의 한강 사진들은 말하자면 짝 사진들(pair photos)이다. 물론 표세권의 짝 사진 형식은 사진적 의도와 표현 사이의 기술적 제한성을 벗어나려는 작가의 방법론적 고민의 결과로 보인다. 풍경과 인물을 다 같이 한강의 테마로 삼고자 할 때, 그러나 피사체와의 거리 때문에 두 피사체의 동시적 주제화가 불가능할 때, 작가가 선택할 수 있는 주제의 재현 방식은 동일한 이미지의 프레임 공간 안에서 개개의 피사체를 상호 교체적으로 테마화 하는 짝 구성 방식뿐일 것이다. 하지만 표세권의 짝 사진 구성을 다만 시각적인 표현 형식으로만 보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조금만 오래 들여다보면, 표세권의 짝 사진 형식은 그의 사진들이 보는 이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사진적 메시지와 더 깊이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표세권의 사진들은 어떤 특별한 짝 구성의 형식을 지니며 또 그 형식을 통해서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것일까?




표세권_회사원_잉크젯 프린트_50×50cm×2_2009



표세권_노부부_잉크젯 프린트_50×50cm×2_2009


내가 보기에 표세권의 짝 사진들은 세 가지 층위에서 그 형식적 특성과 메시지가 읽힌다. 우선 ‘풍경’의 층위가 있다. 표세권의 사진 안에서 한강은 두 개의 풍경으로 이원화 된다. 하나는 자연 풍경이고 다른 하나는 도시 풍경이다. 예컨데 두 청년 악사들의 등 너머로 보이는 억새풀과 유모차와 함께 산책 나온 젊은 어머니가 서 있는 휜 눈밭의 풍경은 여전히 자연성을 간직한 한강의 얼굴을 보여준다. 하지만 인물들의 등 뒤로 보이는 아파트들과 스카이라인을 어지럽게 만드는 마천루들의 군집 이미지는 한강이 더는 자연이 아니라 대도시의 한 부분일 뿐임을 새삼 깨닫게 만든다. 한강은 말하자면 표세권의 사진 공간 안에서 화해할 수 없는 두 이질적 풍경들로 이원화되어 있고 그러한 풍경 이미지의 불연속성은 프레임 공간을 동질적 화해의 공간이 아니라 대립적 성격의 두 이미지가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갈등 공간으로 여겨지게 만든다. 하지만 보다 주목해야 하는 건 풍경 이미지들의 표층적 대립성이 아니라 그 대립성이 보는 이에게 불러일으키는 특별한 시각적 효과, 더 정확히 풍경의 이원 대립성이 시각적으로 야기하는 상호 충돌 효과이다. 예를 들어 두 여학생이 여름 워킹을 즐기는 햇빛 좋은 산책로와 두 그루의 푸른 나무는 등 뒤의 콘크리트 다리와 그 다리 건너 고층 건물들의 풍경으로 인해 그 자연성이 더더욱 부각된다. 마찬가지로 두 여고생을 더 없이 왜소하게 만드는 거대한 콘크리트 기둥은 그 아래 무성한 잡풀들의 진한 초록빛 때문에 그 건조한 물질감과 잿빛이 더더욱 강조되어 나타난다. 표세권이 보여주는 한강의 풍경은 이원 대립적이지만 그 이원적 대립성은 두 풍경의 대립성을 고착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의 특성을 강조하고 부각 시키는 힘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표세권_아기와 엄마_잉크젯 프린트_50×50cm×2_2009


다음으로 ‘인물’의 층위가 있다. 표세권의 사진 안에서 한강의 풍경이 이원 대립적 성격을 지닌다면 한강을 테마화 하는 또 하나의 오브제인 인물들 역시 이원 대립적으로 구성된다. 표세권이 의도적으로 구성하고자 하는 인물들의 이원 대립성은 무엇보다 인물들을 단수가 아니라 쌍으로 촬영하여 프레임 안에 병렬 시키는 복수적 배치성에서 확인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인물의 복수적 병렬 구성이 인물들을 나이와 직업들에 따라 다양화함으로써 시각적 효과를 높이고자 하는 의도의 소산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인물들의 복수 구성에서 주목해야 하는 건 인물들을 그들이 저마다 소속되어 있는 사회적 패러다임에 따라 분류하고 규범화 하고자 하는 표세권의 유형학적 시선이다. 유형학적 인물 사진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인물을 그들이 속해 있는 역사적 동질성과 문화적 규범성 안에서 파악하고자 하는 사진이며 그러한 사진적 의도 때문에 개개의 인물들을 고유한 퍼스낼러티를 지닌 개인이 아니라 역사적 문화적 내용을 지시하는 기호로 독해하기를 요청한다. 표세권의 복수적 인물 사진들도 다르지 않다. 우리는 유형학적 시선으로 포착된 여고생들의 복수 사진 안에서 그 인물들이 입고 있는 교복과 헤어스타일을 기호 삼아 이 시대 교육의 제도적 속성들을 읽어 낼 수 있다. 마찬가지로 관능적인 유니폼을 입고 버디라인을 만들고 있는 성숙한 여인의 자세와 표정을 통해서 이 시대 여성적 아름다움의 규범성과 신체적 욕망의 기호를 발견할 수 있으며, 함께 아침 산책을 나온 듯 보이는 노부부의 포즈와 표정을 통해 이 시대 중산층 노년들의 규범적인 부부애와 생활이 어떤 전형성을 지니는 것인지를 읽어낼 수 있다. 하지만 표세권의 유형학적 시선의 사진적 효과가 응시되는 인물들의 역사 문화적 유형성을 확인 시키는데서 끝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더 주목해야하는 건 그러한 유형학적 시선이 보는 이에게 모르는 사이에 불러일으키는 심리적 효과이다. 작가의 주관성을 가능한 배제하면서 정면성으로 촬영하여 객관화 시킨 표세권의 인물들은 다름 아닌 그러한 객관적 유형성 때문에 유형학적 사진이 생략하고자 하는 인물의 개인성, 즉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인물 개개인의 고유성과 내면성에 호기심과 관심을 보는 이에게 불러일으킨다. 예를 들어 철저하게 객관화 된 모습으로 프레임 공간 한 가운데에서 묵묵히 그러나 집요하게 보는 이를 응시하는 인물들 앞에서 그 누가 이 사람은 누구일까? 라는 질문을 피할 수 있겠는가. 인물들을 응시하고 포착하는 표세권의 시선은 유형학적이지만 그러나 그 유형학적 시선은 동시에 비유형학적 사진 효과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또한 역설적이다.




표세권_뮤지션_잉크젯 프린트_50×50cm×2_2009



표세권_트래킹_잉크젯 프린트_50×50cm×2_2009


마지막으로 ‘삶’의 층위가 있다. 표세권의 사진 안에서 풍경과 인물의 층위가 이원 대립적 성격을 지닌다면 삶의 층위는 그러한 불화성이 해소되는 층위이다. 표세권의 프레임 공간을 불화의 공간에서 화해의 공간으로 바꾸어 경험케 하는 삶의 층위는 무엇보다 대립적 성격을 지니는 풍경과 인물이 그 단절성을 극복하고 동시적으로 응시되면서 발견 된다. 풍경과 인물이 연속성과 동질성을 회복하면서 프레임 공간이 화해의 공간으로 바뀔 때 보는 이가 새삼 발견하게 되는 건 일상 공간으로서의 한강, 즉 우리들이 저마다의 이유로 관계를 맺으며 함께 살아가는 삶의 현장으로서의 한강이다. 하지만 삶의 공간으로 전환된 표세권의 사진 공간 안에서 만나는 한강이 다만 지리적 장소로의 한강, 즉 서울의 한강만은 아니다. 그 한강은 저마다의 일상 속에서 기억되지는 않지만 그러나 너와 나의 삶 속에서 면면히 흐르고 있는 무의식적 소망의 한강, 더 정확히 소통이라는 이름의 한강이다. 예컨대 한강이 삶의 공간으로 응시될 때 새삼스럽게 발견하게 되는 한강의 푸른 물결과 그 위를 가로지르는 긴 가교는 더 이상 자연성과 도시성의 이질적 기호가 아니라 다 같이 흐름과 소통을 지시하는 동일한 기표가 아닌가. 모든 경계들을 지우는 한강의 중단 없는 흐름과 모든 거리와 사이들을 잇기 위해 강 위에 길게 누운 콘크리트 가교는 대도시적 삶이 강요하는 불화와 불통을 거부하면서 너와 내가 서로 만나고자 하는 그 어떤 소통에의 욕망을 암묵적으로 지시하고 있지 않은가. 표세권의 사진이 보여주는 한강은 서울의 한강이지만 그 안에서 흐르고 있는 건 우리들 마음 속의 한강이다. 그리고 표세권의 한강 사진 앞에서 우리가 잠시 걸음을 멈춘다면 그 또한 너와 나의 마음 속을 흐르는 한강의 물소리에 귀를 기우리기 위해서일 것이다. ■ 김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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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ditation In City

황인란展 / HWANGINRAN / 黃仁蘭 / painting

2009_0311 ▶ 2009_0317



황인란_도시안의 명상_Meditation in City_판넬에 연필, 아크릴채색_150×180cm_2009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6:30pm




갤러리 아트사이드_GALLERY ARTSIDE
서울 종로구 관훈동 170번지
Tel. +82.2.725.1020
www.artside.org






존재의 심연으로의 여행, ‘새로운 열망’과 마주할 때까지 - 사물의 절제 ● 황인란의 세계는 명상적이다. 정적과 평화를 위협하는 방해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외부의 소음은 남김없이 차단되어 있다. 내부의 대기를 조율하는 주체는 언설이 아니라 언설의 부재다. 시간은 일시적으로 정지해 있고, 현존 이외의 시간대는 개입하지 않는다. 이 진공 탓에 비둘기의 날갯짓조차 명상의 리듬을 탄다. 그 동작은 역동보다는 정지에 속해 있다. 하물며 올빼미의 쾡한 두 눈은 밤의 적막을 능히 지켜낸다. 인물들은 눈을 감은 채 사색에 잠겨 있다. 부산을 떨거나 상념에 잠긴 채로 정적의 동행자가 되기란 어려운 일이다. 이 세계는 시선만큼이나 이미지 또한 절제되어 있다. 한 인물과 비둘기, 이따금 등장하는 화분이나 고양이가 이 느린 세계를 지키는 구성원의 다이다. 이 단촐함의 의미는 존재의 내면에서 횡포를 부리는 ‘사물의 독재’를 환기할 때 분명해 진다. A.W. 토저(Aiden Wilson Tozer)를 따르면, 불안은 존재의 심연에서 진리에 대한 갈망이 추방되고, 그 자리를 사물들이 차지한 때부터 시작된다.




황인란_정오의 꿈_Dream of Noon_판넬에 연필, 아크릴채색_60×112cm_2009


현 단계의 존재가 범하는 오류의 근원은 존재의 심연을 사물에게 양도한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독재자의 특성은 소유욕이다. 즉 ‘많이’ 획득하고 이득을 내는 것이다. “이 독재자가 우리의 마음에 살기 시작하는 순간,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된다”고 토저는 밝힌다. 황인란의 부재와 정지의 미학은 존재를 교란하는 사물의 독재를 최소화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를 통해 존재의 심연으로 이어지는 사유의 여정이 마련된다. 평화와 정적은 사물의 독재와 벌여야 할 한 판 싸움에서 유용한 도구가 될 것이다. 이미지의 절제는 상승의 욕망에 중독된 사색의 물꼬를 다시 밑으로 흘려보내기 위한 필연적인 전략이다. 표현(ex-pression)의 완화는 힘이 외부로 분산됨으로써 심연의 싸움에서 산만해지거나 기진하지 않기 위함이다.




황인란_낯선 여행 Strange Travel_판넬에 연필, 아크릴채색_100×179cm_2008


황인란의 회화세계는 표현보다는 표현의 절제로, 수사보다는 침묵으로 기울고 있다. 표현의 전문가들에 있어서는 장광설보다 그것의 포기가 더 어려운 미덕이다. 강력한 이슈와 설득하고 싶은 유혹에 빠져드는 이같은 시대에는 더더욱 그렇다. 이 시대의 미술창작행위들이 그토록 노골적이고 소란스러우며, 감각적으로 자극적이거나 개념적 현란함으로 무장하는 이유가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반면 침묵에는 자신을 포장해 왔던 현란한 수사를 포기함으로써, 자신이 드러날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맞서는 과정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감각적으론 그다지 유쾌하지 못한 경험일 수 있다. 그렇더라도, 작가의 절제미를 과장할 필요는 없다. 황인란의 회화는 적지 않은 것들을 이야기한다. 거기에는 함축적이긴 하지만, 누락과 축약을 동반하는 서술형식이 존재한다. 사물들은 모호하고 얇긴 하지만 어떤 상호성을 암시하거나 기호적인 지위를 갖기도 한다. 서술적인 동시에 서술의 부재를 지향한다고 해야 할까. 보여줌, 표현에 관여하지만, 그 보여줌과 표현에는 체념의 뉘앙스가 어려있다. 황인란의 회화는 그렇듯 부재의 미학을 실험하고, 침묵의 언어를 훈련하면서, 조심스럽게, 깨지기 쉬운 상태로 명상의 여정에 첫 발을 들여놓고 있는 것이다.




황인란_무심의 끝_End of Absentmindness_판넬에 연필, 아크릴채색100×180cm_2008


격자 문양, 부재와 정지 ● 부재의 미학은 이 명상적 공간의 배경 처리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배경을 구성하는 규칙적인 격자 패턴은 이 공간이 바깥세상과는 거의 전적으로 다른 차원임을 암시한다. 그 평면성, 수평과 수직의 예외 없는 엄격함, 어떤 굴곡이나 외부로 향하는 출구도 허용하지 않고, 외부를 보여주는 창조차 없다. 이처럼 배경이 부재를 대변하는 곳에서 상시적 감각은 길을 잃는다. 지상보다 수십 배나 빨리 날고 있음에도, 외부의 참조가 없기 때문에 어디론가 가고 있다는 느낌이 없는 고공비행과 같은 맥락이다. 모노크롬까지는 아니더라도, 색채의 수는 제한되어 있고, 저채도의 파스텔 톤을 지나치지 않는다. 색의 정념이랄까 하는 것들, 뭔가 격하거나 솟아오르는 것의 결과들, 의외의 가능성, 성가시게 하는 요철은 사전적으로 여과되어있다. 물리적 공간이 제한되고, 비교 가능한 외부세계가 부재할수록, 이성적 판단은 위기에 처하게 된다. 역설적이게도 그 차단과 부재가 초래한 위기로 인해, 우리는 우리가 오류없는 판단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자만감에서 한 발 뒤로 물러서게 된다. 이성이 (자신을 포함해) 세계를 판단할 만큼의 궁극적인 포괄성의 위치에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직감하는 것이랄까. 이러한 깨달음은 다른 종류의 예지력이 요구된다는 사실을 인정하도록 만들 것이다.




황인란_무심의 끝_End of Absentmindness_판넬에 연필, 아크릴채색_73×117cm_2009


“보고 아는 일반적 방식은 맹목과 수고와 불확실성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의 글은 명상의 깊은 단계가 어떻게 바깥세계의 요인들로부터의 차단에 기초하는 가를 잘 알게 한다 : “모든 변화와 모든 복잡성, 그리고 모든 역설과 모든 다양성은 사라집니다. 우리의 마음은 깨달음의 공중에서, 어둡고도 평온하며 모든 것을 품고 있는 실재에서 헤엄칩니다.” 다시 황인란의 회화에서 원근감의 거세는 인물의 묘사로까지 연장됨으로써, 이 수도원적인 차단과 유리가 이 세계의 중요한 시론(詩論)임을 확인해 준다. 원근을 거의 삭제하는 일관하는 묘사방식에 의해 사물들의 존재감은 더욱 감상자에 의해 보완되어야만 하는 결핍의 상태에 놓이게 된다. 외부와 차단된 이 세계에선 현재의 호흡, 살아있음, 생명 자체가 말을 걸어온다. 사색의 물꼬는 오로지 현재로만 집중된다. 과거의 회한과 미래의 예단 같은 시간의 크로노스적 질서는 이 엄격한 종횡의 차단막을 투과할 수 없다. 이 여과와 통제가 배경을 이루는 격자 패턴의 역할이다. 그것은 일종의 그물이자 차단막이다. 그것은 크로노스적 연대기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며, 카이로스적 사색을 위한 방어막이다. 그것에 의해 모든 불규칙성, 이례성, 예외적인 것들, 불행한 기억들, 행복에 대한 집착, 트라우마들의 격한 파장이 여과된다. 이에 의해 공간은 평온을 유지할 수 있다. 예기치 않음, 우연, 불확실성과 같은 불안과 스트레스의 자양분이 되는 실존의 조건들이 존재를 사로잡고 통제하는 일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황인란_대화_Conversation_판넬에 연필, 아크릴채색_73×117cm_2009


단순하고 부드럽고 친근한 세계 ● 황인란의 눈을 감은 채 사색에 잠겨있는 인물들은 분명 중세기의 수사나 퀘이커 교도가 아니다. 그들은 전형적인 도회지 풍의 인물들로, 세련된 차림새와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성 아우구스티누스로부터 존 번연에 이르는, 파스칼과 톨스토이를 아우르는, 동일한 긴 여정의 한 지점에 있다. 작가와 우리들이 사는 대도시가 사유의 옥토가 아닌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불모지라는 의미는 아니다. 사유는 공간의 차원이 아니라, 내적 활동의 차원이기 때문이다. 황인란의 회화는 특별히 다운타운에서의 사유라는, 우리들이 오랫동안 내동댕이쳐 왔던 숙제에 대해 말한다. 도시의 현란함 속에서는 외부세계의 성취동기들로부터 발길을 돌려 내면으로 선회하는 여정이 더욱 조롱당하고 교란되기 마련이다.




황인란_도시안의 명상_Meditation in City_판넬에 연필, 아크릴채색_80×117cm_2008


“있지도 않은 행복을 찾으러 덫을 놓는 토론장에 발을 들여놓기를 좋아하는”, 그같은 지혜를 자처하는 사람들의 틈새에서, “어둠과 불확실성과 무기력을 겪어야 하는 사유의 책임을 감당해나간다는 것은 더군다나 쉽지 않은 일이다. 황인란의 회화는 세련된 도시인의 명상이라는 주제를 통해 현재진행형인 우리의 진실로 다가온다. 그 세계는 깊고 큰 평온과 평화에 대한 우리 모두의 존재적 결핍과 갈증을 대변한다. 작가는 절제된 형식과 부드러운 색조, 차단과 부재의 회화어법을 통해 명상으로 범주화되곤 하는, 그리고 무엇보다 작가 자신의 것인 따듯한 사색의 한 시각적 알레고리를 제시한다. 그것은 단순하고 부드러우며, 이성의 저편을 갈망하면서도 여전히 우리 곁에서 멀지 않은 친근한 세계이기에 더욱 의미롭다. 무엇보다 그의 회화가 지니는 미덕은 우리가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열망과 마주할 때까지, 존재의 내면으로 향하고자 하는 우리의 깊은 염원을 대변하고 있다는 점이다. ■ 심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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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오감도

Art & Synesthesia展

2009_0318 ▶ 2009_0607 / 월요일 휴관






초대일시_2009_0317_화요일_05:00pm

김환기_한묵_이준_최덕휴_홍종명_신영상_이우환_우제길
안병석_차명희_김호득_문봉선_윤병락_황순일_이용학_안성하
신미경_안성희_박재웅_손원영_김병호_최승준_양민하_전가영

관람시간 / 평일_10:00am~09:00pm / 주말, 공휴일_10:00am~06:00pm / 월요일휴관





서울시립미술관
SEOUL MUSEUM OF ART
서울 중구 미술관길 30(서소문동 37번지)
Tel. +82.2.2124.8800
www.seoulmoa.org






“향과 색과 소리는 서로 부르며 대답한다.” (보들레르,「조응(照應)」) ●『新오감도』는 16세기말부터 17세기 서양회화에서 많이 그려졌던 ‘오감도(五感圖)’를 응용한 제목으로, 오늘날 미술에서 드러나는 시각 외의 청각, 후각, 촉각, 미각 등의 양상, 그리고 각 감각들이 상호 연계되는 공감각(共感覺)적인 경향을 조망하는 전시이다. 전통적인 오감도는 작품에 등장하는 각 소재들의 상징성을 바탕으로 감각의 찰나성과 허무함을 교훈적으로 제시하는 그림이었다. 반면, 오늘날 미술 작품에서의 감각적 경향은 오히려 작품의 제작과 감상에 영감과 상상력을 부여하는 도구로 활용되고 있음을 이 전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세계를 온전히 지각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모든 감각이 유기적으로 동원되어야 한다.”고 했던 마샬 맥루한의 말처럼 작품을 바라다볼 뿐 아니라 소리를 듣고 향기를 맡으며, ‘만지지 마시오’가 원칙인 미술 작품을 촉각적으로 체험하는 가운데 우리는 작가의 작품세계와 한층 더 가까이 교감하게 된다. ● 여기서 중요한 키워드가 있다. 최근 여러 분야에서 다양하게 회자되는 ‘공감각(Synesthesia)’이다. 글씨에서 색을 보았던 랭보, 색에서 소리를 느꼈던 칸딘스키처럼 감각의 전이능력을 지닌 사람을 공감각자라고 하는데, 일반인들도 공감각적 지각을 경험한다. 낮은 음은 어두운 색을, 높은 음은 밝은 색을 연상하게 하거나, 시원한 탄산음료에 환한 색을 연상하는 등의 것으로, 이는 감각 마케팅이나 디자인에도 활용된다. 문학에서는 ‘푸른 휘파람 소리’ 등의 공감각적 심상이 있으며, 피타고라스와 괴테, 스트라빈스키 등 역사속의 여러 인물들이 색과 음의 관계성을 구체적으로 연구한 바 있다. 미술에서의 공감각을 이야기하자면 칸딘스키를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데, 그 역시 시각과 청각의 연결성에 주목하였다. 자신의 회화에 음악성을 부여한 그는 색채와 선에서 음감을 느꼈으며 마치 음악을 연주하듯 화면을 연출하였다. 그는 “색채는 건반이다. 눈은 망치이다. 영혼은 많은 줄을 가진 피아노다. 예술가란 그 건반을 이것저것 두들겨 목적에 부합시켜 사람들의 영혼을 진동시키는 사람이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렇게 시각의 청각적인 관련성으로부터 출발하여, 미술이 그 방식과 매체를 점차 다변화하고 실험해감에 따라 후각과 촉각, 미각에 이르는 다양한 작용과 현상을 보여 오고 있음을 오늘날의 미술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더불어 현대미술작품의 논의에 있어 공감각이라는 단어가 자주 언급됨을 발견하곤 한다. 사전적 의미는 ‘하나의 감각이 다른 영역의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현상’이지만 오늘날 다방면에서 언급되고 있는 ‘공감각적’이라는 표현은 한자어를 직역한 ‘감각이 함께 나타난다’라는 뜻처럼 단순한 전이 현상만이 아닌 여러 감각의 동시적 공존, 그리고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상호 영향과 미묘한 틈새까지 포괄하는 개념으로도 확장되어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 이 전시는 이러한 공감각의 경향이 오늘날 미술 안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구현되고 있는가, 작가들의 상상력의 원천으로 어떻게 기능하고 있는가를 고찰한다. 일반적으로 시각만이 요구된다고 보여지는 회화 작품 안에서 또 다른 감각의 전이와 연상작용을 이끌어내게 됨을 보여주는 'Ⅰ. 감각의 환영', 시각 외의 청각, 촉각, 후각, 미각 등을 다중적으로 자극하여 새로운 미적 경험을 유발하며 관객의 참여로 인한 상호작용성을 가지는 작품들로 구성된 'Ⅱ. 다중감각 : 교차와 혼합'의 두 섹션으로 나뉘어 보여진다.

Part 1. 감각의 환영 Sensory Illusion ● "회화는 우리의 눈을 어디에나 놓는다. 귓속에, 뱃속에, 허파 속에 아무데나 놓는다.” (질 들뢰즈,『감각의 논리』) ● ‘환영(illusion)'이라 하면 시각적 이미지를 생각하게 되지만, 여기서의 환영은 은유적인 견지에서 허구적이고 가상적인 감각 전반의 상황을 표현한다. 들리나 들리는 것이 아니고, 맡아지나 맡는 것이 아닌, 하나의 일루전으로서의 감각, 즉 ‘감각의 환영’을 이 섹션의 작품들은 내포하고 있다. 우리는 흔히 작품을 ‘본다’ 라고 한다. 그러나 ‘보여지는’ 요소만이 존재하는 회화 작품일지라도 작품을 바라보고 감상하는 동안 우리의 뇌에는 시각 이외의 다양한 감각들이 자극되며, 여러 가지 연상과 전이 작용들이 일어나곤 한다. 우리가 특정 기억을 떠올릴 때 시각만이 아닌 후각, 청각적 이미지를 복합적으로 인지해내듯 작품의 감상도 시각에 국한되지 않는 총체적인 행위이다. 작품은 우리의 지각과 감성을 다각적으로 일깨우며, 시각적 이미지는 비시각적, 비물질적 이미지들을 배태하며 관람자에게 받아들여진다. 앞서 인용한 들뢰즈의 말처럼 시각은 뇌로만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다양한 감각기관을 모두 자극하는 것이다. 문학에서 시의 심상을 이야기할 때 청각 이미지, 후각 이미지 등으로 분류하듯, 전형적인 시각예술인 회화에서 읽혀지는 시각 외적인 이미지의 환영을 네 가지의 테마로 나누어 살펴본다.




김환기_봄의 소리_캔버스에 유채_153×89cm_1969_개인 소장



한묵_리듬구성_캔버스에 유채_50×73cm_1970



이우환_바람과 함께_캔버스에 유채_218×291cm_1988_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윤병락_여름향기-탐스러운 상자_캔버스에 유채_170×158cm_2008



황순일_In a Strange Darkness_캔버스에 유채_170×324.3cm_2005


Part 2. 다중 감각 : 교차와 혼합 Multiple Sense: Crossing and Blending ● 이 섹션의 작품들은 바라다볼 뿐 아니라 소리를 듣고, 향기를 느끼며, 촉각적 액션에 의한 반응을 경험하는 등 하나 이상의 감각들이 시각과 함께 직접적인 자극으로 다가오는 작업들이다. 앞 섹션의 작품들을 화학적인 공감각 경향으로 비유할 수 있다면, 이 섹션의 작품들은 물리적 공감각 경향이라 일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물리적인 다중 감각 자극 안에서도 상호간의 연관성과 연상성으로 화학적 양상이 함께 작용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 새로운 미적 경험을 유발하며, 관객의 참여로 인한 상호작용성을 가지는 이 작품들은 두 가지 양상으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아날로그적 재료의 특질에서 야기되는 공감각성으로, 향기 나는 비누로 만든 조각, 폭신한 재질로 만들어진 앉을 수 있는 입체설치작품이나 담쟁이나 이끼 등의 식물설치로 정원의 기운을 느끼도록 연출하는 형태 등이다. 두 번째는 디지털 테크놀로지에 기반한 작품들로, 소리, 움직임 등 관람객의 반응에 의해 이미지가 변화하고 소리가 연주되는 등 첨단 미디어를 매개로 소통하는 작업들이다.




신미경_translation-glass series_비누_가변설치_2009



박재웅_일흔 여섯 개의 마늘종_캔버스에 유채_각 19×34cm_2004



김병호_Silent Pollen-Sowing_혼합재료_225×60×43cm_2007



전가영_의자들의 합창_라이트패널, 한지_140×490cm_2007


작품들과 만나는 가운데 전시와 작품을 ‘본다’는 시각 위주의 고정관념을 넘어 미술을 새로운 맥락에서 느끼고 체험하며, 매체의 다변화로 어렵고 복잡해졌다고 여겨지는 현대미술이 오히려 다양한 감각에 의한 소통성과 다각적 감성의 매력을 지님을 확인하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더불어 일대일대응의 인과관계를 넘어서는 다중감각성 속에서 하나의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 오늘날 미술의 담론, 현상의 일면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 최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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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Practice Of Behavior

권순관展 / KWONSUNKWAN / 權純寬 / photography

2009_0306 ▶ 2009_0405 / 월요일 휴관



권순관_A Practice of Behavior Gestures In Swimming Pool
SN_7-009_디지털 C 프린트_187×720cm_2008~2009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이미지 속닥속닥 Vol.060618b | 권순관 사진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9_0306_금요일_05:00pm

성곡미술관 2009 내일의 작가展

관람료 / 대인_4,000원 / 소인_3,000원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성곡미술관_SUNGKOK ART MUSEUM
서울 종로구 신문로 2가 1-101번지 1관
Tel. +82.2.737.7650
www.sungkokmuseum.com






권순관의 살아있는 이미지 ● 권순관의 거대한 사진들은 관객의 시선을 압도하는 그 무엇이 있다. 사진의 포맷에 있어서 크기의 확대는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닌다. 우선 그것은 뒤셀도르프 학파에 의해 최초로 사용된 수법으로 사진을 단순한 기록문서나 르포르타주와 구분하는 효과를 노린다. 포맷의 확대는 사진을 유용한 목적으로 사용하는 전통적 사진 기술에서 벗어나 무용한 목적, 즉 갤러리나 박물관의 벽에 걸리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음을 증명하는 최초의 방법이었다. 따라서 오늘날 수많은 사진작가들은 작품을 기념비적인 크기로 확대하는 경향이 있으며 권순관도 그 대열에서 예외는 아니다. 이 학파의 원조인 베혀 부부는 사라져가는 산업사회의 구조물들을 엄밀한 문서적 기법을 사용하여 중성적으로 제시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사진이 기록이거나 문서이기를 거부했으며 사물의 흔적이 아닌 독자적인 이미지로 거듭나기를 바랐다. 예컨대 주체적 감성이나 느낌, 시간적 변화, 사건의 절정 등 소위 뜨거운 것들을 배제했으며, 순간적 의미를 품고 있는 장면의 포착과 주체적 표현 대신에 차갑고 엄밀하고 단단한 구성을 추구했다. 여기서 이미지는 다른 그 무엇의 흔적이 아니라 새로운 실체로서 사실성을 획득한다. 그래서 베혀 부부와 그 뒤를 이은 뒤셀도르프 학파 작가들의 작품에서는 우발성과 사건성 대신에 엄밀하고 치밀한 구성과 인위성, 실재보다 더 실재인 가공의 실재 냄새가 짙게 풍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포맷의 확장 역시, 사진 이미지를 단순한 미메시스가 아닌 예술적인 독자적 실체로 전환하는 효과를 내포한다.




권순관_A Practice of Behavior 54-Table In Library
SN_7-012_디지털 C 프린트_252×360cm_2008~2009


이미지의 팽창은 그 독자성 외에도 예술적 효과 자체를 만들어낸다. 그것은 위의 뒤셀도르프 학파 중의 한 사람인 안드레아스 구르스키와 토마스 루프가 즐겨 애용했던 수법이기도 하다. 토마스 루프는 저해상도의 필름을 고도로 확장시킴으로써 그만의 독자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이를테면, 그는 9.11테러 현장의 생생한 장면을 찍은 사진들이나 잔해 현장을 확대함으로써 사진에서 특별한 사건을 다룬 기록의 냄새를 제거하였다. 확대된 이미지는 현실적인 도시 테러의 한 장면을 낭만적인 전쟁터의 한 장면으로, 과거 예술가들의 상상으로 묘사되어 나올 법한 장면으로, 마치 터너 풍경화의 한 장면처럼 바꿔놓았다. 이렇듯 토마스 루프는 우편엽서나 증명사진, 또는 각종 미디어에 실린 사진들을 실제의 유명 관광지나 실물,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자신의 작품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루프는 사진의 진정성이 유래하고 또 사진이 기록한다고 믿어지는 ‘여기 지금’의 생각을 버린다. 그와 함께 재현된 장소는 재현 속에서 사라지거나, 수없이 많은 유사한 사건들 또는 그 모습들의 그렇고 그런 성격 속으로 희석되어 사라지게 된다. 결국 그 장소는 소위 말하는 ‘이미지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의 장소’가 되는 것이다. 이미 현실에서 발생한 사건의 모방이 아니라 이미지 자체를 실재적인 사실의 발생지로 만드는 작업은 권순관에게 중요한 작업인데, 그것은 이미지의 도구인 연출이라는 약간 다른 수법을 사용함으로써 행해진다. 구르스키의 작업은 현대인은 있는 그대로의 풍경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고전주의 화가들이나 모더니스트 화가들에 의해 길들여진 방식으로 보고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그는 절묘한 구성을 통해 도시 풍경 속에서 낭만주의 화가들이 그린 장엄한 자연 풍경을 되살리고자 했고, 대성당의 내부 모습을 질서정연하게 되살리고자 했다. 권순관의 이미지들 역시 상당부분 구르스키의 등가의 원칙을 따르고 있는 듯하다. 베혀 학파의 다른 거장들은 시간의 지속을 추구하기 위해 인간들과 사건들이 흔적만을 남긴 채 사라진 상태나 사건이 도래하기 직전의 장면을 포착함으로써 팽팽한 긴장감을 유도하는 반면, 구르스키나 권순관의 작품에서는 인간들의 행위와 사건이 직접 연출되어 제시된다. 때로는 현장에서 군중들이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카메라에 잡히기도 하지만 권순관 사진의 대부분은 엄밀한 구성의 원칙에 따라 연출된 장면들이다. 그리고 그 장면들 중에 어떤 것은 고전적인 종교화나 풍속화를, 어떤 것은 모더니스트적인 추상화를, 또 어떤 것은 현대 영화의 한 장면을, 또 다른 어떤 것은 스포츠 중계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권순관_A Practice of Behavior Gestures In Football field
SN_7-154_디지털 C 프린트_180×225cm_2008~2009


권순관은 자신의 이미지들이 엄밀한 원칙에 따라 구성되었음을 숨기지 않는다. 인물들의 다소 부자연스러운 동작은 스스로가 인위적으로 연출된 것임을 은연중에 내비친다. 여기서 권순관을 사진 예술가가 아닌 퍼포먼스 작가로 분류하는 오해가 발생할 수 있다. 미술사에서 퍼포먼스와 사진은 매우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으며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개념 미술이나 퍼포먼스와 함께 미술은 탈물질화되어 점차 사라질 위기에 직면하였다. 그러한 미술들은 사진을 자신들의 증거물로 삼았다. 사진은 자취를 남기지 않는 미술의 흔적으로 이용되었던 것이다. 사진은 미술의 물질적인 부산물이나 찌꺼기에 불과하였고, 그런 만큼 사진은 기술적 의도적인 면에서 엄청난 푸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사진을 예술적 재료로 삼은 예술가들에게는 사정이 달라진다. 인물들의 동작과 표정, 구성은 오직 사진을 위해서 존재하고, 선택되며, 사진의 예술적 필요에 의해 생산되고 폐기된다. 이제 사진은 어떤 것의 흔적이 아니라 사물과 사실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권순관_A Practice of Behavior-Gestures In Gallery
SN_7-159_디지털 C 프린트_180×225cm_2008~2009



권순관_Configurations_SN_6-012_디지털 C 프린트_180×225cm_2008~2009


권순관의 사진 이미지들은 매끈하고 깔끔하게 치워진 시원한 장들 위에 놓인다. 그리고 우리의 전 감각에 호소하는 강력한 빛과 현란한 색채의 유희 속에서 이미지들은 개념적, 시각적 유희를 동시에 제공한다. 그러나 기화하여 중심 없이 날아갈듯 한 색채와 빛의 유희들은 그 강화된 표면성과 함께 더 내밀한 표면성을 보충한다. 특히 그의 거대한 포맷은 사소한 모티브들을 거대한 크기로 만들면서 화면의 모든 위계를 제거한다. 지평선과 소실점을 제거하고, 생생한 현장을 한 눈에 들어오게 포착함으로써 이미지를 깊이가 없는 평면성 속에 가둔다. 위계적 질서 없이 평면적으로 나열된 이미지들, 반복, 중심의 부재, 주변과 변두리의 등가는 관객의 시선을 공허 속에서 떠돌게 한다. 평면적인 이미지 뒤에는 아무 것도 없으며, 시선을 고정시키는 중심점도 없다. 이미지의 각 부분은 다른 부분과 동일한 가치를 지니거나 아예 가치가 없어 보이며, 오직 각 부분들 사이의 관계 속에서 변하며 존재 의의를 찾는다. 여기서는 전반적으로 어떤 공허가 지배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하나의 이미지 내에서 위계가 부재하듯이, 각각의 스펙터클 사이에도 위계가 없다. 그 모든 장면들은 그 평범한 일상성 속에서, 또는 완벽히 연출된 인위성 속에서 모두 등가물들이다. 오늘의 모든 사건과 스펙터클이 강력한 인위에 불과하듯이, 그러한 사건들을 본 딴 다양한 각각의 순간들은 그저 그런 인간들이나 잡다한 사건들을 조합하고 나열하여 묘사되고, 모든 거북스런 우발성이나 불규칙성은 은밀히 제거된다. 매끈하고 흠 없는, 숨 막히게 투명한 세상 속에서 개인은 거대한 기계의 한 부분에 불과하며 무심하고 공허한 행위를 반복한다.




권순관_Configurated in Accumulative Space-늙은 남자의 멱살을 잡고 화를 내는 남자
An angry man seizing by the old man'neck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150×457cm_2007



권순관_Configurated in Accumulative Space-분수대에 앉아 먼 곳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여자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150×189cm_2007


엄청난 장비와 대형 카메라, 조명, 세트, 배우의 선정과 연출까지 집요한 작가적 노동력을 요하는 권순관의 사진은 공허한 우리의 현실을 단단한 이미지의 실체성으로 그려낸다. ■ 이수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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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증후군

Dohwasuh Re:openstudio展

2009_0311 ▶ 2009_0318



해석증후군展_2009




초대일시_2009_0311_수요일_06:00pm

참여작가
김상목_김은지_민지영_박은영_박해빈_이광준_이시우
이준복_장두화_장종완_차동훈_PLASTIC SAURUS

기획_이준복_홍성재
협찬_초아산업

관람시간 / 01:00pm~08:00pm





도화서(圖畵書)_DOHWASUH(Image and text)
서울 서대문구 대현동 27-53번지
cafe.naver.com/dohwasuh.cafe






해석증후군-도화서 오픈스튜디오展 ● 도화서가 지난 해 4월 오픈파티와 함께 스튜디오를 연지 1년. 그리고 다시 그 문을 연다. 첫 번 오픈스튜디오가 공간 소개와 홍보의 성격을 가졌다면, 이번은 그 안에 깃든 12명의 젊은 작가들이 함께, 그들의 생산물과 그 안에 담긴 주제의식들을 선보이는 취지를 띄고 있다. 지난 1년 동안 도화서는 신촌 작업공간에서의 오픈스튜디오와 프리젠테이션, 그리고 외부기획전참여 등을 통해 관객들과 지속적으로 만나오면서, 다양한 질책과 격려들도 받았다. 그러는 동안, 작가의 의도와 작품의 표현, 그리고 관객의 해석 사이에 일정한 간극이 존재함도 경험하였고, 그것을 받아들일 줄도 알게 되었다. 이번 오픈스튜디오는 이에서 출발한다.




차동훈_실험실_벽화, 도자기_가변크기_2009



이시우_family of itemtity_캔버스에 유채_182×227cm_2009


의학과 심리학에서 말하는 ‘증후군(症候群)’이란, 여러 개의 증상이 하나로 연결되지만 그 까닭을 명백히 밝히지 못하거나 단일한 원인이 아닐 때 병명에 준하여 부르는 것이다. 젊은 작가들의 작품들도 이와 비슷한 점들이 있다. 그들이 가진 의욕과 모티프의 다양성에 비하여 작업의 크기와 표현의 폭이 협소해 복잡한 작업과정조차 단조롭게 재단되거나 축소 해석되는 면들이 적지 않다. 단순히 시각적 이미지에 기댄 ‘재단평가’는 젊은 작가들에겐 특히 버겁고 부담스럽다. 주제를 천착하면서 미적 근거를 확보할 물리적 여유가 상대적으로 적은 젊은 작가들은, 표현방식으로 채택한 매체의 당위성이나 의도의 진정성을 증명할 겨를도 없이 재단 받아야 하는 이삼중고 속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이럴 때 빠져들기 쉬운 유혹은, 지나치게 난삽(難澁)한 철학적 배경을 동원하거나, 설익고 정제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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